언어별 명칭 | |
<colbgcolor=#ddd,#010101> 한국어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영어 | Library of Alexandria |
라틴어 | Bibliotheca Alexandr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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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었던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도서관.무세이온(Musaeum, Mouseion)[1] 산하의 부설 기관(자료실)인 제1도서관과 세라페이온[2] 산하의 부설 기관인 제2도서관으로 나뉘어 있었다. 무세이온 산하의 제1도서관은 신전의 부설 기관(자료실)으로 건립되었으나 학문적 중요도나 유명세는 무세이온을 넘어섰다.
당대 최고의 학자를 도서관장으로 임명하고, 전 세계의 학자들을 알렉산드리아로 초빙하는 등 세계 최고의 도서관을 만들 목표로 엄청난 재원을 투자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후원으로 발전하였으며, 기원전 3세기경 건립된 이후 고대 로마가 이집트를 점령한 기원전 30년대까지 지식과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2. 제1도서관
기원전 3세기경, 신성한 장소에 인류의 지식 모두를 아우르려는 욕구에서 지어졌다.헬레니즘 시대 학문연구의 중심이었으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잠시 번영하였다가 이후 쇠퇴하였다. 각지에서 초청된 학자 100여 명이 자연과학, 문헌학을 연구하고 강의하였다.
기원전 300년경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립을 시작하였으며, 프톨레마이오스 2세 때 완성하였다.
귀족이나 명망 높은 학자라든가 특권층이 제1도서관의 주 이용자였다. 브루케이온(Bruchium, Brucheion), 즉 왕실 지구에 소재한 제1도서관은 학문 연구소의 기능도 했다.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는 100여 명의 교수가 배치되어 있었고, 오늘날의 대학 캠퍼스처럼 정원, 공용식당, 열람실, 강의실, 회의실 등의 시설이 있었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서적들과 중동, 유럽의 여러가지 고서들, 연구 자료, 그림들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을 때 로마 병사들의 방화로 큰 손실을 입었다. 이때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고, 기원후 3세기까지도 로마 치하에서 존속하였지만, 3세기 초 카라칼라의 무세이온 탄압으로 알렉산드리아 교육의 중심지는 이하의 세라페이온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기원후 260년대까지는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있으나, 무세이온과 도서관은 270년대, 특히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팔미라의 제노비아로부터 알렉산드리아를 빼앗은 272년 전후, 또는 늦어도 3세기 말[3]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4세기나 5세기에도 '무세이온'이라는 장소에 대한 언급은 문헌에 드물게 나타나지만, 이는 다른 무세이온이나 다른 어딘가에 일시적으로 재건된 무세이온으로 추정하는 경우가 많다.
3. 제2도서관
기원전 235년경 프톨레마이오스 3세가 지은 세라피스 신전, 즉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페이온(Serapeum, Serapeion)[4]은 기본적으로는 신전이었지만,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학술 중심지로 무세이온과 나란히 발전하였다.세라페이온 부속 도서관도 있었으며, 이를 편의상 무세이온 부속 도서관과 구별해서 '제2도서관'으로 부르기도 한다.
공공도서관 느낌이었다. 대출 여부는 미지수.
기원전 43년, 페르가뭄 도서관이 20만권에 달하는 책을 이관해줌으로 확장되었다. 세라페이온은 3세기 초부터 무세이온을 능가하는 교육 시설이 되었고, 세라페이온 부속 도서관도 무세이온 부속 도서관에 버금가거나 그를 능가하게 되었다.
세라페이온이 언제 파괴되고 사라졌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3세기 말까지 무세이온은 이미 거의 몰락했으므로, 아래의 "몰락" 절에서 3세기 이후에 다루는 것은 상당 부분 세라페이온의 몰락일 수 있다.
세라페이온은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 시절인 4세기 후반, 391년의 다신교도 성전 출입 금지 칙령으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사료는 작성자의 관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어 있지만, 다신교도 측 사료에 따르면 이때 기독교도 군중들이 세라페이온을 파괴했다고도 한다.
4. 특징
도서관은 정원, 공동 식당, 독서실과 강의실, 집회실 등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신간 도서의 관리와 책의 분류를 하는 부서가 존재하였다.
회랑은 파피루스 두루마리들을 보관하는 책장들로 이루어졌으며, 최초로 국경에 상관없이 그 당시의 모든 서적들을 수집하여 세계의 지식을 취합한 것에 대해 의의가 있었다.
당시 장서 수집 방법에 대해서는 알렉산드리아에 입항한 모든 선박을 뒤져 서적을 압수한 뒤 몇 달이 걸리든 필사본을 만들어서 원본을 보관하고 사본은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었다고 전해진다.[5] 이것을 현대 납본제도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과거의 자료를 수집하는 것 이외에도 여행과 숙박, 정보, 급여를 제공하는 교류의 역참 역할을 했으며, 연구 기관으로서의 경험론적 기반을 바탕으로 비평 등의 철학적 사고관 또한 발달되었다. 이러한 비평 등이 활발해지며 검증된 책들은 학자들에 의해 보다 더 정확한 복사본과 이모본으로 제작되었다.
보유했던 장서의 양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최소 1만 권에서 70만 권, 100만 권, 130만 권까지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나, 당대의 도서관들에 비해 그 규모가 매우 방대했다는 것만은 모두가 동의한다. 이러한 문서들로 대표되는 지식 수준은 현대의 기준으로도 꽤나 진취적이고 진보적이어서 놀라움을 동반한다.
5. 소장되었던 것으로 알려진 장서 목록
- 아리스타르코스: '기원전 3세기, 지구가 태양 주위에 공전한다는 것을 발견함'
- 에라토스테네스: '기원전 3세기 지구의 반지름을 측정함'. 그의 저서 《천문학》.
- 히파르코스: '기원전 2세기, 신성과 혜성을 관측, 1080개의 항성에 대하여 밝기를 6등급으로 분류하여 항성 목록 작성을 시도하였으며, 각각의 별 위치와 밝기를 표현하였고 세차 운동을 발견하여 태양년과 항성년을 더욱 정확하게 구할 수 있게 하였음'
- 칼리마코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문학사라고도 할수있는 《피나케스》를 저술하였고 〈아이티아〉를 비롯한 많은 시작품을 남겼다 '
- 유클리드: '기원전 3세기 기하학자, 각종 연구 자료 '
- 히로피러스: '기원전 3세기, 뇌가 장이나 신체를 조종한다는 것을 밝혀내고 약을 만들기 시작함'
- 베로소스의 《세계사 전집》: 저술 시점까지 43만 2천년간의 인류 역사를 기록한 도서
- 아폴로니우스: 행성 운동의 궤도가 원이 아닌 타원임을 증명함. 아폴로니우스의 《원뿔 곡선론》 저작 원본.
- 소포클레스가 만들었지만 지금은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 비극 작품 수십 편.
- 그리스의 3대 비극 작가 중 하나인 아이스킬로스는 생전 90여 작품을 발표했다고 전해지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면서 대부분의 작품들이 유실되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7편뿐이다.
약 2000년 전에 이러한 인문학, 과학 사실들을 발견하고 연구한 자료들이 소장되어 있었고, 이 곳의 장서들이 온전히 보전되었더라면 지금보다 과학 발전이 훨씬 가속화되었을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과학이 단지 '자연에 대한 체계적인 관찰'만을 의미한다고 보기에는 어렵기에 걸러들을 필요는 있다. 자세한 사항은 과학적 방법 문서 참조.
6. 몰락
흔히 알려진 바로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대형 방화 혹은 파괴 사건으로 인해 책들이 다 분서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잘 운영되고 있다가 한순간에 몰락해버렸다는 뉘앙스인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살펴보면 고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파괴되었음을 말하는 기록은 다수 존재한다. 고대 로마 시절 카이사르, 아우렐리우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일련의 파괴 행위가 기록되어 있으며, 7세기 이슬람 세력이 알렉산드리아를 정복했을 때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기록[6]도 남아 있다.
그런데 기록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13세기에나 이슬람교도들이 파괴했다는 내용이 담론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7] 그래서 18세기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에 의하면 이슬람이 도서관을 파괴했다는 기록은 기독교의 프로파간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게다가 각각의 자료에 기록된 파괴 정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 시기에 기록된 대화재 기록이다. 플루타르코스, 겔리우스, 마르켈리누스, 오르시우스 등의 고대 역사가들은 이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커다란 화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의 장군이었던 아킬라스가 바닷길을 막으며 카이사르의 통신을 끊으려고 하자 카이사르는 스스로 배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불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번져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도적인 방화는 아니고 카이사르의 실수였다는 말이다.
하지만 플로루스와 루카누스는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당시에 화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불이 일어난 곳은 해변의 일부 가옥들 뿐이었다고 한다.
부분적인 소실 혹은 파괴가 아닌, 전체적인 파괴에 대해서는 현대 역사학계에서도 뚜렷하게 의견이 모아지지 않고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한 번의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 도서관이 붕괴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의 파괴 행위가 일어나면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후원하는 지역 왕조가 더 이상 복구 및 유지비용을 댈 수 없게 된 것을 주된 이유로 들고 있다.[8] 자금이 부족한 도서관은 점점 관리가 소홀해졌고, 학자들이 하나둘 떠나간 것에 의해 서서히 몰락했다는 것이다.
일단 도서관의 위치가 호수(마레오티스 호)하고 바다(지중해) 사이에 있어서 누군가 끊임없이 관리해주지 않으면 습기 때문에 문서가 쉽게 상하는 곳인 데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보관하고 있던 주요 자료들은 보존성이 낮고 대부분 화재나 습기에 취약한 파피루스 문서들이었다.
자료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려면 반복적인 필사 작업이 요구되는데, 학자들이 떠나가면 이 작업을 담당할 사람이 없으니 자료가 소실되는 것이다. 물론 필사 작업 자체는 노예를 동원할 수 있지만 그들을 교육하고 작업을 검수하는것은 학자들의 담당이었다.[9]
도서관에 머물며 업무를 보던 수많은 학자들은 지역 왕조의 후원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도서관 유지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이 끊긴다면 도서관의 몰락은 자연스러운 결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위의 글은 반드시 파괴가 외적으로 인해 생기진 않았을 것이라는 점[10], 그러니까 내부에서의 파괴를 고려하지 않았다. 또 도서관이 당대인들에게 크게 인식되어야지 도서관 후원의 중요성이 생기는데, 후원이 안 되었다는 것은 도서관이 그만큼 영세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 또한 간과한다. 즉 도서관의 완전 파괴가 아니라 당대인들에게 인식의 정도가 큰 도서관을 영세한 도서관으로 만든 파괴를 고려하지 않았다.
당대인들의 지적이 많았던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과 위의 서서히 도서관이 사라졌다는 주장을 합해 고려해보면 도서관이 갈수록 영세해져서 후원할 중요성이 떨어졌고, 이로 인해 서서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다.
641년에 알렉산드리아를 함락한 이슬람의 장군 암르 이븐 알 아스가 641년, 지하드를 진행하면서 도서관을 끝장내버린 건 사실이지만[11], 그 이전부터 도서관은 이미 파괴되고 있었다고 5세기의 신학자 파울루스 오로시우스는 적고 있다.
이런 식의 파괴라면 한순간에 파괴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는 이미지가 나온 이유, 그리고 이슬람교도들의 파괴라는 이미지가 나올 수 있는 환경, 마지막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장이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에 있었다는 역사적 맥락 모두 충족시킬 수 있다.
7. 관련 인물
- 아르키메데스가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몇 안되는 저서들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학자들이 언급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친구였다고 한다.
- 이 도서관의 사서였던 제노도투스는 최초로 표준화된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며 최초로 문서를 주제별로 분류하고 겉에 책에 대한 정보를 적은, 최초의 메타데이터를 창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8. 현대
Bibliotheca Alexandrina |
1974년, 알렉산드리아 대학교에서 도서관 건립의 아이디어와 필요한 부지를 제공했으며, 1990년 도서관 건설을 위한 시공사 및 자본을 선정한 후, 1995년 착공하여 2002년 완공 및 개장하였다.
이집트 10파운드 지폐 뒷면에 들어가 있다.
9. 유사 사례
- 현대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위상을 가진 곳은 미국 의회도서관이라 할 수 있다. 세계 최대의 도서관으로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붕괴한다해도 미의회도서관만 살아남으면 복구는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농담이 있을 정도다.
- 현대 이집트에서는 이집트 국립도서관과 이집트 국립문서보관소가 그 역할을 맡고 있는데 역사는 꽤 오래되고 장서량도 많지만 미국 의회도서관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 우리나라 역사에서 유사한 사례로 고려 시대의 보제사에 속한 부속건물인 장경전을 들 수 있다. 2층 규모의 건물로 1만권의 장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당대 지식인들은 "지금까지의 모든 지혜가 보제사에 모여 있다"라는 말까지 했다.
10. 현대 창작물
-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대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문명 1부터 최신작 문명 6까지 개근했다. 개근상 수상자는 찾자고 하면 은근히 이것저것 있으나, 불가사의로 내내 개근한 건 도서관 이외에 공중정원, 로도스의 거상, 알렉산드리아 등대, 오라클, 피라미드 뿐이다.
- 문명 1: 자신 이외에 다른 두 문명이 연구한 기술을 즉시 연구한다. 당연하지만 난이도가 높을수록 강력해지고 AI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기술 위주로 연구할 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다만 효과를 없애는 대학 기술이 너무 초반에 있다는 게 아쉽다.
- 문명 2: 전작과 효과가 같다. 전작보다는 효과를 오래 볼 수 있지만, 이 불가사의가 없더라도 첩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상대방의 기술을 빼 올 수 있다.
- 문명 3: 문화를 매 턴 제공한다는 점을 빼면 역시 전작과 효과가 같으며, 추가 사항 역시 본작에서 문화 시스템이 처음으로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게임 난이도가 낮을수록 별 볼 일 없어지고 높을수록 빛을 발한다는 점은 전작들과 똑같지만 퍽 강력한 불가사의로 평가받아, 다른 거 죄다 포기하고 이거 하나를 빠르게 건설하기 위한 전략까지 개발되었을 정도다.
- 문명 4: 위대한 과학자 점수와 짭짤한 양의 문화를 매 턴 제공하고 이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에 과학자 전문가 둘을 추가한다. 과학자 전문가도 위대한 과학자 점수를 주므로 위대한 과학자 생성과 과학력에 큰 보너스를 준다. 만리장성, 오라클, 스톤헨지 등 비슷한 위상을 가지고 있거나 더 강력하다고 평가받는 불가사의도 있지만, 이것들이 이미 건설되었다면 그 다음으로 노려볼 만 하다.
- 문명 5: 문화와 과학, 위대한 과학자 점수를 매 턴 제공하고 걸작 문학 슬롯 둘과 무료 기술 하나를 주며 이 불가사의가 지어진 도시에 도서관을 무료로 즉시 건설한다. 본작의 불가사의를 모두 통틀어서도 최상급으로 평가받으나, 성능이 워낙 걸출하기에 대부분의 AI들도 이걸 짓겠다고 매달린다는 점이 문제다. 이 때문에 할 수 없이 없는 셈 치거나, 힘들게 지어 놓았더니 그 사이에 군사를 늘린 옆동네가 쳐들어오거나 도시를 세우기 좋은 자리를 다 뺐겼더라~ 하는 하소연도 꽤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문명 6: 과학과 위대한 과학자 점수, 위대한 작가 점수를 매 턴 제공하고 걸작 문학 슬롯 둘을 제공하며 고대 및 고전 시대의 모든 기술의 유레카 보너스를 주고 다른 문명에서 위대한 과학자를 영입할 때마다 무작위 기술의 유레카 보너스를 준다. 최강으로 이름을 날렸던 전작에 비하면 영 아니올시다라는 평이 많은데, 유레카 보너스는 얼핏 보기에는 좋을 수 있지만 이 불가사의를 지을 수 있게 하는 사회 정책인 역사 기록이 거의 고전 끄트머리에 있다는 게 문제다. 즉 불가사의를 완공하기까지의 시간까지 고려하면 고대, 고전 시대 기술 중에서 유레카를 받을 수 있는 건 거의 없거나, 있다고 해도 금방 연구할 수 있을 수준이라는 뜻. 이래서 다른 문명이 과학자를 가져갈 경우 유레카를 얻는 보너스가 확장팩에서 추가되었지만, 이것도 일부러 과학자를 영입하지 않아 유레카 하나를 얻느니 과학자를 적극적으로 영입하는 쪽이 더 강력하다.
- 쓰루 디 에이지스의 불가사의 카드들 중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다.
- 엠파이어 어스의 사이버 팩토리인 리빌 빌딩이 이 모습을 하고 있다.
- 매직 더 개더링에서도 정신 나간 사기 카드로 나온 적이 있다. Library of Alexandria 문서를 참고할 것.
-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에서 구현되었다. 다만 당시의 건물 형태를 담은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에, 에페소스에 남아 있는 켈수스 도서관의 모습을 차용했다.
- Warhammer 40,000에 등장하는 아엘다리들의 지식의 보고인 블랙 라이브러리 역시 여기서 모티브를 얻은 듯 하다.
- 소설 최초의 책에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전성기인 기원전 185년과 쇠퇴기인 서기 642년을 다루고 있다.
- 로마 디펜스에서는 에우트로피우스에게 소식을 전해들은 호노리우스에 의해 지원을 받게 되며 수혜를 입었다. 물론 그 후원금은 주인공의 재산인지라 주인공이 피눈물을 흘리긴 하지만... 그 뒤 원역사보다 규모가 커진 길도의 반란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가 초토화되는 와중에도 의외로 멀쩡했지만 도시 자체가 파괴되어 정상적인 도서관 운영이 불가능 해졌기에 스틸리코의 지시로 주 자료나 학자들이 모두 게르마니아로 이전될 예정이다.
- 토탈 워: 로마2에서는 이집트 세력의 고유 불가사의로 등장한다. 4단계 도서관을 증축하면 되는데 연구율을 무려 36%나 증가시켜 안 그래도 연구율 보너스 받아 기술 연구에 유리한 이집트가 빠른 고티어로 갈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
- Fate/Grand Order에 등장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노년의 파라오 영기에서 보구로 사용하는데, 흔히 알려진 역사상의 대도서관과 아틀라스원과 협력해 만든 '또 다른 도서관'이 합일되어 있다는 설정.
11. 관련 문서
[1] 지식과 예술을 관장하는 아홉 여신의 신전을 뜻하며, 박물관을 뜻하는 영단어인 Museum의 어원이기도 하다.[2] 세라피스 신의 신전[3] 특히 297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알렉산드리아 포위 전후[4]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그냥 '세라피스 신전'이라는 뜻이다.[5] Phillips, Heather A., "The Great Library of Alexandria?". Library Philosophy and Practice, August 2010[6] 이 기록은 90년대 한국 EBS에서도 나와 이슬람 술탄이 여길 점령하자 이 도서관 책자는 쿠란에 안 맞으니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나왔었다. 642년 알렉산드리아가 이슬람에 점령되었을 때 도서관의 처분을 묻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에게 “이 책들이 쿠란에 합치되는 가르침이라면 어차피 우린 무슬림이니 그런 책 굳이 더 갖고 있을 필요가 없고, 쿠란에 합치되지 않는 가르침이라면 우상숭배이고 이교도이니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는 2대 정통 칼리파 우마르의 발언이 전해진다.[7] 테오도시우스 1세 문서 참고.[8] 도서관 파괴 행위가 일어났다는 것은 외부에서 쳐들어온 침략자가 있었음을 암시한다. 지역 왕조에서는 침략으로 인한 피해도 복구해야 했을테니, 당장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되지 않는 도서관까지 지원할 여력은 모자랐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9] 애초에 필사라는 일 자체가 최소한 글을 읽고 쓸 줄은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이기에, 문맹률이 높았던 전근대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필사를 업으로 삼는 필경사들 중에도 글을 베껴쓸 수만 있고 읽어서 뜻을 이해할 수는 없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10] 이러한 주장은 이슬람교도들이 침략해 도서관이 파괴되었다는 주장에서 나온 주장일 가능성이 크다.[11] 당시의 칼리프는 우마르였는데 초기 선출 칼리프 시대의 칼리프들은 대개 호학에 개방적인 마인드를 가진 뛰어난 군주들이었지만, 하필 우마르만은 예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