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스핑크스(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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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한국어 | 멤피스와 네크로폴리스 ―기자에서 다슈르까지의 피라미드 지역 |
영어 | Memphis and its Necropolis – the Pyramid Fields from Giza to Dahshur | |
아랍어 | ممفيس ومقبرتها منطقة الأهرام من الجيزة إلى دهشور | |
프랑스어 | Memphis et sa nécropole – les zones des pyramides de Guizeh à Dahchour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9년 | |
등재기준 | (i)[1], (iii)[2], (vi)[3] | |
지정번호 | 86 |
أبو الهول
Great Sphinx of Gi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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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스핑크스를 옆에서 바라본 모습. |
2. 모습
얼굴 부분의 복원 추정 모습 | 수염 조각[7] |
현재 스핑크스에는 코가 없다. 학자들이 스핑크스의 얼굴 부분을 상세히 조사해본 결과, 코가 있었던 부분에 끌과 망치로 두드려 깨진 자국이 확연히 남아있었다고 한다.[8] 즉 자연적으로 풍화되어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코를 부숴서 떨어뜨려버렸다는 이야기다. 이집트학 학자인 로버트 레너가 조사한 결과, 이미 서기 3세기에서 10세기 경 사이 즈음에 코 부분이 떨어져나갔다.
스핑크스의 코가 떨어져 나간 이유를 두고 온갖 잡설들이 판을 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소문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군대가 대포를 쏘아서 코를 맞혀버렸다는 것이다. 물론 근거는 전혀 없으며 사실도 아니다. 대포로 스핑크스 얼굴을 맞췄다면 코만 떨어지는 정도로 끝날리도 없다. 또다른 설에는 이집트를 정복한 무슬림 신자인 맘루크들이 일부러 깨버렸다는 말이 있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이슬람교였기에 스핑크스도 우상으로 여겨 얼굴 부분을 고의적으로 훼손시켜버렸다는 것이다.[9] 이슬람이 오기 전에 기독교가 국교이던 로마 지배 시절에도 많은 고대이집트 유물들이 우상숭배라고 훼손되기도 했기 때문에, 정확한 훼손 시기와 이유는 알 수 없다.
코 부분이 떼어져 나간 것이 워낙에 눈에 잘 띄어서 그렇지만 사실 턱수염도 떨어져 나간 상태이고, 이마에 달려있었던 코브라도 떨어졌다. 다만 이 턱수염은 아직 남아있어서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턱수염 부분의 제작 연대와 나이를 조사한 결과 원래 스핑크스를 건설할 때는 없었고, 아마 후대의 파라오들이 따로 만들어서 붙였을 것이라고 한다. 수염은 진작에 떨어져서 오랫동안 모래 속에 파묻혀있다가 1900년대 즈음 영국 고고학팀이 발굴하여 영국으로 가져가버렸다. 이집트 당국 측에서는 줄기차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영국에서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다.
2.1. 형태의 유래
당연히 그리스의 괴물 스핑크스와는 상관이 없는 거상으로, 옛 이집트의 신을 묘사했다고 추정된다. 스핑크스를 언급한 현존하는 첫 번째 기록은 제18왕조의 투트모세 4세가 남겼는데, 여기서 그는 이 거대 석상이 호루스를 묘사한 것으로 여겼다.미국인 역사 저술가인 수전 와이즈 바우어(Susan Wise Bauer)는 2007년에 출판한 저서인《고대세계사》[10]에서 이집트의 스핑크스와 그리스의 스핑크스가 사실은 상관이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제기했다. 고대 이집트 시기에 카프레의 피라미드 앞을 지키는 거석상을 '산(生) 형상'이란 뜻으로 Shesepankh(셰세팡크)라고 불렀는데,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이집트의 'Shesepankh'는 워낙 유명했기 때문에 그리스에 알려지면서 발음이 변해 '스핑크스'라는 외래어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발음이 유사할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석상 스핑크스와 그리스의 괴물 스핑크스, 둘 다 사자 몸에 사람 얼굴을 한 거대한 존재라는 점도 바우어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하는 부분이다. 만약 이 주장이 맞다면, 고대 이집트의 석상 스핑크스가 고대 그리스 신화의 괴물 스핑크스의 원조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그러하듯 스핑크스에도 의문점이 많다. 하나는 '스핑크스상의 얼굴이 몸에 비해 너무 작다'는 점으로, 원래 사자상이나 아누비스, 호루스 등 다른 무언가의 상이었는데, 후대에 파라오의 얼굴로 깎았다는 추측이 있다. 원래는 전통적으로 '파라오의 머리를 한 사자'라는 표현 때문에 당연히 사자의 머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이론이 등장했는데, 이후 몸의 비율이나 뒷다리 모양 등을 볼 때 고양이과보다는 개과일 가능성이 보였기 때문에 아누비스였다고 주장하는 이론도 등장했다.
3. 어형
고전 이집트어로는 당연히 그리스식 표현인 스핑크스라고 칭하지 않았고, '살아있는 (왕을) 닮은 형상'이라는 뜻의 샤자프 아나흐(szp anh)[11]라고 불렀다. '스핑크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시절 이집트와 거래하던 그리스 상인들이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스핑크스의 이름을 붙인 것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그리스 상인들 사이의 은어였으나 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마케도니아계가 이집트의 왕이 되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면서 '스핑크스'라는 명칭이 통용되었다. 이후 그리스 문화를 향유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로마 제국이 약 1,000년을 지배하면서 '스핑크스'로 정착했고, 이슬람이 지배한 지 천수백 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스핑크스라고 불린다.4. 역사
대스핑크스는 하나의 거대한 암석을 통째로 깎아 만들었다. 사막에는 끊임없는 모래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에 사암이 독특한 형태로 풍화되어 깎여나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암석들 중 하나가 우연히 사람의 머리와 비슷한 형상이 되자, 고대 이집트인들이 아예 기반암 전체를 깎아 거대한 스핑크스 석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아마 카프레가 이 스핑크스 석상의 주인이었다고 여긴다. 가장 큰 이유는 대스핑크스를 만들 때 깎아낸 암석들을 잘라낸 벽돌들이 그대로 카프레의 장제전에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대스핑크스와 장제전이 동시에 만들어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므로, 카프레가 대스핑크스의 주인이라고 추측하는 것이다.[12]대스핑크스는 워낙에 압도적인 크기 때문에 이미 고대 이집트 내에서도 유명한 랜드마크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대스핑크스의 중요성도 점차 줄어들었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닥치자 카프레의 피라미드를 포함해 대스핑크스 역시 버려져 모래 속에 묻혀버렸다. 모래 속에 묻힌 대스핑크스가 다시 지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때는 500년 정도나 시간이 흐른 이집트 신왕국 시대였다. 이와 관련해 전해지는 전설이 있다. 어린 투트모세 4세가 왕자 시절 모래 위에서 거적을 깔고 잠을 자던 도중, 대스핑크스가 꿈에 나타나 '만일 나를 모래 속에서 꺼내준다면 너를 파라오로 만들어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투트모세 4세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스핑크스 주위에 쌓인 모래를 깔끔하게 치워주었고, 결국 투트모세 4세는 실제로 왕위에 올랐다.[13] 파라오가 된 투트모세 4세는 이 이야기를 적은 '꿈의 비석'을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 세워주었다.[14]
고대 로마 시대에는 기자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기자의 대스핑크스 역시 인기 많은 관광명소가 되었다. 이때 이미 대스핑크스와 피라미드는 고대 유적 취급을 받았고, 로마 황제들은 순전히 흥미나 호기심 때문에[15] 대스핑크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로마의 네로 황제는 스핑크스 주변에 높게 쌓인 모래를 치웠고 12m에 달하는 계단이 스핑크스의 앞발 앞까지 깔렸다.[16] 로마 시대에 기자를 방문한 대 플리니우스는 당시 대스핑크스를 방문한 후 느낀 자신의 소회를 기록에 남기기도 했다. 그의 기록을 보면 그때까지만 해도 대스핑크스의 얼굴에는 붉은색이 칠해져 있었다고 한다. 대플리니우스 이후에도 대스핑크스는 여러 황제들과 로마인들의 중요한 관심 대상이되었으나 로마 제국이 점차 쇠락하면서 관심도 줄어들었다. 마지막으로 대스핑크스 근처에 건물을 세운 황제는 서기 200년 경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였다. 로마 제국이 완전히 몰락하자 대스핑크스는 다시 모래에 묻혔다.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바라보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장레옹 제롬 作 |
이집트가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를 믿게 된 이후에도 스핑크스는 딱히 지배층에게 테러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스도교에서 성상 파괴주의가 성행했을 무렵은 이미 동로마 제국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시리아와 이집트를 이슬람에게 빼앗긴 지 한참이 지난 뒤였고, '우상'이란 것을 훨씬 민감하게 여기는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지배한 이후에도 스핑크스는 무사했다. 이유는 간단한데, 그냥 스핑크스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집트를 지배하던 이슬람 군주들은 스핑크스나 피라미드와 같은 이집트의 거대 조형물을 '옛 이집트 임금의 커다란 무덤' 정도로 생각해서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또 일부 개방적인 군주들은 선조들이 세운 것이니 뭔가 배울 게 있는 유적이라 여겼고, 따라서 대부분의 군주들은 (현대의 문화재 보호와는 거리가 있지만) 나름대로 지켜주려고 했다. 실제로 중, 근세의 극단주의자들이 이집트의 유적을 훼손하려다가 발각되어 처벌을 받는 일도 종종 있었다. 대스핑크스는 이집트의 상징이자 대표적인 랜드마크로 확고하게 자리잡았고, 1800년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나폴레옹이 직접 스핑크스를 보고 간 일도 있다.
1864년 프랑스로 파견된 일본 외교 사절단들이 이집트에 들른 김에 관광하면서 찍은 사진. 역시 모래에 잠겨 머리만 나왔다. 사진 출처. |
1810년대에 들어서야 본격적인 현대식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카비그리아 주도의 이탈리아 고고학팀이 스핑크스를 덮고 있었던 모래를 파내어 대스핑크스의 가슴 부분까지 드러내도록 만들었고, 이후 조금씩 모래를 치우면서 대스핑크스는 마침내 지표면 위로 제 몸뚱아리를 드러냈다. 1857년에는 카이로 박물관의 설립자로도 유명한 오귀스트 마리에트가 대대적인 발굴 작업을 펼쳐 대스핑크스의 모래 대부분을 깔끔하게 치웠다. 1886년에는 프랑스의 고고학자인 가스통 마스페로가 스핑크스의 앞발 사이에서 발견한 '꿈의 비석'을 분석했는데, 13번째 줄에서 카프레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발견하고, 스핑크스가 아마도 제4왕조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
1900년대 초의 스핑크스[17] | 전체 모습 | 얼굴 부분 |
4.1. 건설자 관련 설
스핑크스의 건설 시기에 대해 일반적으로 대형 공사가 가능했던 이집트 고왕국으로 추측해왔고, 카프레의 피라미드 앞에 서있었기 때문에 카프레 왕이 세웠으며, 카프레 왕의 얼굴을 본뜬 것이라는 것이 거의 정설처럼 내려왔었다. 그러나 정작 스핑크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투트모세 4세[18]가 스핑크스 앞 다리 사이에 세운 '꿈의 비문'으로 이 비문에 의하면, 기자의 스핑크스상이 모래에 파묻혀서 마치 모아이처럼 머리만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곳에 머물던 투트모세 4세의 꿈에 나타나 모래에 파묻힌 자기 몸을 다시 드러내준다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게 해주겠다고 했고, 투트모스가 다시 이를 파내자 약속한 대로 투트모세 4세는 파라오가 되었다. 이 때문에 스핑크스는 투트모세 4세의 시절보다 훨씬 이전에 지어졌다고 보는데, 일반적으로는 스핑크스가 투트모세 4세 시대보다 2,000년 앞선 기원전 3000년에 세워졌다고 추정된다. 이는 기자의 피라미드보다 500년 앞선 것이다.하지만 지질학자들은 기원전 3000년보다 훨씬 이전에 건설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스핑크스의 몸통과 둘러싼 벽을 보면 침식된 흔적이 크게 남아있는데 조사결과 이는 물에 의한 침식이라고 한다. 그런데 스핑크스가 위치한 사막은 기원전 3000년부터 현재까지 침식을 일으킬만큼의 비나 눈이 내린 적이 없었다. 이를 근거로 빙하기가 끝날 무렵인 기원전 7000년이나, 그 이전에 스핑크스가 건설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기원전 7000년에 문명이 존재했다는 근거나 기록이 전혀 없기 때문에 신빙성이 있는 주장이라고 하기는 힘들다.
한편으로 스핑크스를 카프레 왕이 세웠다는 그간의 정설과도 배치되는 근거들도 제시되었다. 근거는 바로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잇는 축이 스핑크스를 비껴간다는 데서 드러난다. 만약 카프레 왕이 스핑크스를 세웠다면, 당연히 피라미드와 신전 사이에 스핑크스를 배치하고 그 연결축도 일직선이 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카프레 왕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잇는 축이 스핑크스를 비껴가기 때문에 이미 스핑크스는 카프레 왕이 그의 피라미드를 짓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몇몇 학자들은 스핑크스의 얼굴이 카프레보다는 오히려 쿠푸를 더 닮았다고 보고, 그래서 쿠푸의 얼굴을 본떠서 스핑크스를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쿠푸의 아들인 카프레가 자신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잇는 둑길을 만들면서 스핑크스를 우회하게 했음은 아버지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쿠푸가 직접 스핑크스를 건설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는 시선이 일반적이다. 쿠푸는 대피라미드 건설에 매진했으므로 만만찮은 인력과 자원을 소모하는 스핑크스까지 건설하기에는 무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핑크스는 쿠푸가 아니라 쿠푸의 아들인 제데프레가 건설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
제데프레가 아버지 쿠푸의 부활을 염원하면서 스핑크스를 지었고, 이런 의미가 있기 때문에 쿠푸의 아들이자 제데프레의 동생인 카프레도 자신의 피라미드와 신전을 연결하는 둑길을 스핑크스를 우회하는 식으로 지었다는 것이다. 이는 제데프레의 피라미드가 있었던 곳으로 여겨지는 아부 라와슈에서 발견된 조각들을 근거로 든다. 아부 라와즈에서 프랑스 고고학자 샤시나는 다수의 조각상을 발견했는데, 그 중에는 스핑크스의 얼굴에 사자 몸통을 한 조각상도 발견되었다. 이때문에 제데프레가 스핑크스를 건축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
하지만 기존의 정설처럼 카프레가 대스핑크스를 세웠다는 주장도 아직은 힘을 잃지 않았다. 이 주장에 따르면 대스핑크스를 만들 때 깎아낸 암석들을 잘라낸 벽돌들이 그대로 카프레의 장제전에 사용되었고, 심지어 일부 조사에서는 카프레의 장제전들 중 일부가 대스핑크스보다 더 일찍 지어졌다는 결과도 나왔으며, 이는 대스핑크스와 장제전이 동시대에 만들어지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므로 카프레가 대스핑크스의 주인이라는 기존 정설이 역시 옳다는 주장이다.
5. 기타
- 스핑크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방향인 동쪽을 바라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태양을 최고신으로 숭배하고 태양이 뜨는 동쪽을 생명의 방향이라 여겼기 때문. 일부 초고대문명설 학자들이 이 방향을 두고 '기원전 1만 500년 전 춘분에 사자자리가 뜨던 방향을 가리켰다!'고 주장했지만 묻혔다. 일단 고대 이집트인들이 특별히 사자자리를 더 중요시했다는 근거도 없었을뿐더러[19] 굳이 그렇게 세웠다면 분명히 언급이 있을 텐데 그 어떤 문헌에서도 관련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한 설은 스핑크스가 피라미드보다 2천 년 앞선 기원전 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가설이다. 스핑크스 근처에 있는 벽들을 보면 물이 흘러서 생긴 것 같은 침식 작용 흔적이 있는데 이 정도 흔적을 남길 만큼의 홍수나 큰 비가 이집트에 마지막으로 일어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1만 년 전이기 때문. 그레이엄 핸콕 등이 초고대문명설의 일환으로 미는 주장이다. 침식 흔적이 특이하단 주장 자체는 지질학계 일각에서도 나오긴 했다. 핸콕이 그걸 좋다고 갖다 쓴 것.
그러나 벽의 표면에서만 침식흔적이 있기 때문에 벽이 세워진 이후에 침식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벽이 그렇게 오래 전에 세워졌다고 결론 내리기에는 반대하는 학자들도 많다. 우선 이집트 지역에서 그렇게 오래된 문명의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모래나 바람, 모세관 현상으로 빨아올려진 지하수 등이 만든 것이라는 해석들도 있다. 특히 핸콕과 그의 동료들은 자신들의 주장에 맞는 지질학자를 떠받들며 반박하는 학자들을 '이집트학 학자' 등으로 교묘하게 깎아내렸지만, 반박하는 학자들 가운데에는 저명한 지질학자들도 많다.
- 워낙에 유명한 석상이기 때문에 '혹시 저 아래에 무언가 비밀의 방 같은게 있지 않을까?'하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신비주의자인 스펜서 루이스나 에드가 카이스. 1930년대에 스핑크스 아래에 '기록의 방'이라고 해서 고대 아틀란티스의 비밀을 품은 방이 묻혀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근거는 없었고, 레이다 등으로 스핑크스 밑을 샅샅이 탐색해본 결과 그런 건 없었다고 한다.
- 영화 점퍼의 장면 중에 주인공이 스핑크스 머리 위에서 일광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 스핑크스 머리 위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집트 정부에게 겨우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 고양이들이 배를 지면에 딱 붙이고 앞다리만 쭉 뻗은 채로 앉는 자세를 갖다가 '스핑크스 자세'라고 칭하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앞다리를 집어넣으면 식빵자세가 된다. 하지만 고양이가 이집트에서 신성하게 여겨졌던 동물인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반대로 이를 보고 스핑크스를 만들었을 확률이 있다.
- 그리스의 스핑크스와는 별개의 환상종임에도 불구하고 기자의 대스핑크스를 비롯해 이집트풍 스핑크스가 퀴즈를 내는 묘사가 아주 흔하다. 정말로 이집트 스핑크스가 퀴즈를 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상당히 많다. 날개달린 암컷 인면사자보다는 거대한 석상이나 황금색으로 치장하고 네메스를 쓴 괴물이 문지기 역할을 맡는 게 더 위압적, 개성적으로 보였거나 임팩트가 굉장해서 그런 듯. 어찌보면 원조에게 짝퉁의 특징이 옮겨간 거라 할 수 있다.
6. 대중매체에서
사라진 코가 인상 깊기 때문에 창작물 등지에서 등장할 때 코가 부서진 이유에 대해 나름의 설명을 넣는 경우가 흔하다.알라딘이 마법의 양탄자에 자스민을 태우고 각지를 누빌 때(그 유명한 'A Whole New World'을 부르는 장면) 스핑크스가 만들어지는 모습이 나온다. 완성 직전의 상태로 등장하나 하늘을 나는 알라딘을 보고 석공이 놀라 실수하는 바람에 코가 부서진다.
이집트 왕자에서는 모세와 람세스가 젊은 시절 마차 경주 놀이로 온갖 장소를 휩쓸고 다니다 공사장까지 난장판이 되는 와중 벽돌더미가 무너져 코가 부서지는 걸로 나온다. 페인트(?)로 스핑크스에게 스마일까지 그려준 건 덤.
딱따구리에서는 우디가 시칠리아에서 부츠발로 걷어 차여 날아가다가 부딪힌 곳이 스핑크스의 코였고, 아스테릭스에서는 오벨릭스가 멋 모르고 스핑크스를 올라가다가 코를 부셔버리자 스핑크스 밑에 숨긴 것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코가 없어진 걸 뒤늦게 본 주변의 석공들은 관광객들에게 팔기 위한 스핑크스 피규어의 코를 망치로 부숴버린다.
그 외 스핑크스가 창작물에 적용된 다른 사례들은 스핑크스/창작물 문서를 참조.
7. 관련글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 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흔히 쿠푸의 대피라미드로 오해하고 있다.[5] 머리 부분이 실물보다 10배, 동체는 22배가 크다.[6] 이집트인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생명과 부활의 방향이라 여겼다.[7] 현재 대영박물관 소장.[8] 콧구멍 아래부분과 콧등 부분 양쪽에서 끌로 돌을 깨냈다.[9] 이 설은 실제 사료가 존재하는데, 한 무슬림이 스핑크스를 훼손하려다가 잡히자 술탄이 고대 유적을 훼손한 죄를 물어 그를 목 매달아 스핑크스 앞에 걸어두었다.[10] 《The History of the Ancient World》[11] '셰세프 앙크'라는 이름은 당시 통용되던 실제 발음이 아니라 모음을 별도로 표기하지 않았던 고전 이집트어의 특성상 이집트학계에서 편의상 주로 모음 e를 붙이는 식으로 임의로 만든 발음이다. 실제 당시 통용되던 발음은 후계 언어인 콥트어나 비슷한 시기에 통용되던 주변 다른 언어와의 대조를 통해 추측하여 재구해야하며, 흔히 실제 이집트어 발음이라고 알려진 인푸, 라메수 등도 진짜 당시 발음이 아니라 이런 식으로 임의로 붙여진 이름들이다.[12] 심지어 일부 조사에서는 카프레의 장제전들 중 일부가 대스핑크스보다 더 일찍 지어졌다는 결과도 있다.[13] 이를 통해 투트모세 4세가 원래 공식 왕위계승자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마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대의명분일 가능성이 더 크다.[14] 이 비석은 카프레의 장제전에 달렸던 석제 문짝을 떼와서 만든 것이었다.[15] 물론 정치적인 이유로 이집트를 방문한 황제들도 있었다.[16] 참고로 이 계단들은 1930년대의 발굴 작업 당시 모두 해체되었다.[17] 오른쪽 머리 장식 부분을 보면 거의 아랫부분이 사라져버린 것을 볼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은 콘크리트로 떼운 것이다.[18] 람세스 2세보다 더 이전의 사람으로 기원전 1400년에 즉위했다.[19] 당시에는 사자자리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별자리의 모습이나 이름은 사람들마다 이름 붙이기 나름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