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2 22:33:57

자힐리야

1. 개요2. 신앙3. 특징4. 후대의 해석5.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해석6. 사이드 쿠틉의 해석

[clearfix]

1. 개요

아랍어: جاهلية‎
로마자 표기: Jahiliyyah

무지 또는 어리석음(جهل)의 시대(ية)

자힐리야는 두 가지 뜻을 가진 어휘다. 첫 번째로는 예언자 무함마드이슬람을 계시받기 이전 아라비아반도(고대 아라비아)의 문화가 상황 전반을 지칭하는 뜻이다.[1][2] 당시의 아라비아반도아랍인 부족들은 저마다의 부족신을 섬겼다. 아랍 신화 문서 참조.

한 편 자힐리야는 아불 알라 마우두디, 사이드 쿠틉 등에 의해서 샤리아를 적용받지 않는 모든 형태의 사회를 지칭하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는데 이들의 주장은 '무슬림 인구가 대다수인 국가라 하더라도 샤리아가 헌법으로 지정되지 않은 국가는 모두 실질적으로 비이슬람 정부가 통치하는 정권으로, 혁파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자힐리야라는 어휘는 타크피르주의와 깊이 연관되어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자힐리야라는 단어가 역사 용어 이외에 현대 무슬림/이슬람 사회 관련해서 언급하는 사람이라면 이슬람주의, 그 중에서도 근본주의 계열일 가능성이 높다.

2. 신앙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반도는 구체적인 기록 문화가 부재했고 아랍인들의 자체적인 역사 서술 역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늘날 현대인들이 아랍 신화에 나름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랍 무슬림들의 전승 기록 덕분이다. 당시 아랍인들은 아브라함을 자민족의 시조로 삼는 등 아브라함 계통 종교의 영향을 받은 다신교를 믿었으며 여러 동물신 외에도 360여 개의 신들을 섬겼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메카에서 숭배한 신이었던 알 라트, 알 웃자, 후발 등이 잘 알려져 있다. 아브라함 계통 종교는 기본적으로 일신교이지만 고대 아랍인들은 이를 기반으로 독자적인 토속 신앙을 만들어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당시 아랍인들은 이웃한 동로마 제국에서 전파된 기독교나 유대교에는 호의적인 편이었으나[3] 조로아스터교에 대해서는 생소해하거나[4] 무척 적대적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베두인들의 토속신앙에서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아랍인들에에는 가축이 새끼를 낳으면 한 쪽 귀를 잘라서 부족신에게 제물로 바치거나 여아를 모래사막에 생매장하는 풍습, 한 밤 중에 벌거벗고 메카카바 주변을 달리는 등 풍습이 있었으나 이슬람화 이후 금지되었다.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신들을 조각한 작품들도 발달되었다.

3. 특징

달력은 주로 태음태양력을 따랐다.

아라비아반도의 환경상 대부분 사막이거나 거친 바위로 이뤄진 메마른 고원이었고, 바다로 둘러쌓인 반도였다 보니 이슬람 이전부터 바닷길을 통한 무역이 발달했다. 아라비아반도 남부의 예멘과 반도 북동부 해안의 바흐라인 지방, 내륙 사막 지방은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가졌으나 이슬람화 이후 아랍어 이외 언어는 대다수 사멸하고 문화적 차이 역시 다소 좁혀지게 되었다.

아랍 문학사 관련해서도 자힐리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자힐리야 시대 당시 쓰여진 시들은 중세 이슬람 황금기 당시에도 아랍 시의 모범으로 칭송받았다. 자힐리야 시대 당시 아랍인들의 주요 여가 생활 중 하나는 바로 시를 읊는 것이었다. 시가 아랍인들의 생활에서 얼마나 중요했던 지 가장 우수한 시로 꼽힌 작품은 커다란 깃발에 글로 적혀 메카 한 가운데 게시되는 영광을 누렸다. 무함마드가 쿠란을 계시 받은 이후 아랍인 시인 중 상당수가 시를 짓는 것을 포기하는데,[5] 당시 아랍인들 입장에서 쿠란을 능가하는 명문을 만들 수 없다고 시를 짓기를 포기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6] 한 편 아랍 무슬림들은 쿠란의 계시 이후 쓰여진 시들이 자힐리야 시대 당시 쓰여진 시들만 못하다는 점을 아쉽게 여기고, 자힐리야 시대 당시의 시들을 수집하여 기록에 남겼다.

자힐리야 시대 당시 아랍인들은 폭음을 즐겼으나, 포도주를 즐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당시 아랍인들이 주로 마시던 술은 대추야자술, 곡주, 젖으로 만든 술 등이었다. 고대 당시 이런 술들은 깨끗한 물을 썩지 않게 장기간 보관하기 힘든 상황에서 수분을 보관, 섭취할 수 있는 생필품이었으나,[7] 포도주의 경우는 이웃한 로마 제국에서 비싼 값을 주고 수입해야 하는 사치품들이었기 때문에 자힐리야 시대 당시에도 아랍인들 사이에서 포도주 관련한 인식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쿠란에서는 포도주(خمر)를 직접적으로 명시해서 금지하고 있으며, 이 외에도 하디스에서는 무함마드가 곡식으로 만든 술들을 금지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음주 금주 관련 교리는 칼리드 이븐 알 왈리드가 술고래였다는 기록에서 보듯 당시 시대상 무슬림 사회에서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참고로 무슬림 사회에서 음주 문화가 완전히 뿌리뽑힌 계기는, 사교 장소 모임에서 술을 대체할 수 있는 음료인 커피가 보급된 이후이다.

이 외에도 자힐리야 시대 당시 아랍인들이 즐겼던 여흥으로는 도박이 있다. 당시 아랍인들이 즐겼던 도박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였는지는 아랍 시와 다르게 구체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4. 후대의 해석

서기 13세기 몽골 제국호라즘 제국을 침략한 이후 바그다드압바스 칼리파를 시해하고 중동 대부분 지역을 차지한다. 이란과 아제르바이잔,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는 몽골 제국의 방계 국가인 일 칸국이 들어섰다. 일 칸국은 여세를 몰아 이집트와 시리아 일대까지 정복을 시도하였으나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맘루크 왕조에게 패배하면서, 몽골의 서진은 저지되었다.

맘루크 왕조와 일 칸국의 대치 상태는 일 칸국의 지도자 가잔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가잔 칸은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에서 현지 무슬림들의 민심이 맘루크 왕조 쪽으로 기울자, '맘루크들이 라마단 기간에 마스지드에서 술을 마셨다.'라는 소문을 퍼트린 후, 자국 내 이슬람 율법학자들에게 맘루크 왕조와의 전쟁이 성스러운 지하드라는 파트와를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맘루크 왕조 내 유명 신학자였던 이븐 타이미야는 쿠란의 5장 50절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일 칸국의 법 체계는 이슬람 샤리아가 아니라 몽골 전통 법 야사이기 때문에[8] 일 칸국은 이슬람 국가가 아닌 자힐리야 사회라고 주장하며, 역으로 가잔 칸을 대상으로 타크피르를 내렸다. 즉 가잔 칸의 지하드 선포를 무력화시켰다.
أَفَحُكْمَ ٱلْجَـٰهِلِيَّةِ يَبْغُونَ ۚ وَمَنْ أَحْسَنُ مِنَ ٱللَّهِ حُكْمًۭا لِّقَوْمٍۢ يُوقِنُونَ
아파후쿠물 자힐리야티 야브구나 와만 아흐사누 미날라후 후크만 리까우민 유끼눈
그들은 정녕 무지의 시대의 법을 바라는 것인가? 확고한 신앙(أَحْسَنُ)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보다 더 공정한 자가 있단 말인가?
쿠란의 제5장 알 마이다 50절

몽골 제국의 침략 와중에 직접 살던 고향에서 피난을 간 적도 있었던 이븐 타이미야는 특히 몽골인들을 증오하였다. 당시 맘루크 왕조와 대치하던 일 칸국의 몽골인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상황이었는데 여기에 대해 이븐 타이미야는 "단순히 입으로만 샤하다를 하고 무슬림임을 주장한다고 무슬림이 될 수 없다."라는 논지로 일 칸국이 자힐리야 사회이며, 또한 몽골인들은 자신들이 무슬림이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잔다까[9]라고 주장하였다.

한 번은 마르딘 시가 일 칸국에 함락되었을 때 이븐 타이미야는 사람들에게 해당 도시가 비무슬림의 영토인지 아니면 무슬림의 영토인지를 판가름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는 마르딘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여전히 무슬림이며, 비무슬림이 지배하는 도시에 살고 있다고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같은 이유로 이들은 몽골 점령군에게 그 어떤 노골적인 도움도 주어서는 안 되었다. "(몽골) 병사들이 (명목상)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이슬람의 법이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을 이슬람의 영토(دار الإسلام)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신앙심 없는 자들이 거주하는 비무슬림의 영토라고 볼 수도 없다. 마르딘은 세 번째 카테고리에 속한다. 그 내부의 무슬림들은 가능한 나름의 수준에 맞게 행동하며, 할 수 있는 한 이슬람의 샤리아를 위하여 몽골군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10]

이븐 타이미야의 이러한 해석은 당대 기준으로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 해석은 후술하듯이 20세기 이후로는 '종교 당국자의 허락 없이도 개인적인 지하드 명목의 폭력행위가 가능하다'는 교리로 오용되었다.

20세기 초반 서구 열강이 이슬람권 각지를 침략하는 가운데, 이슬람권의 종교 당국자 역할을 하던 칼리파 제도가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함께 무너져버리자, 이슬람 개혁파 지식인들은 멘붕에 빠져들게 되는데,[11] 이러한 혼란상 속에서 후대 등장한 이슬람주의자들은 타크피르나 자힐리야 관련한 개념을 여타 무슬림 정권이나 집단을 대상으로 남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5.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해석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슬림 지식인 사이에 퍼진 서구 문화와 사상의 맥을 끊는 일이며, 이슬람 고유의 샤리아가 서구 문명이 제시하는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슬림 지식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들이 문화와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이들에게 빌려와야만 했던 잘못된 개념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 아불 알라 마우두디[12]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출생한 무슬림 신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서구 사회를 통해 유입된 현대 문물은 무슬림들을 전통적인 이슬람 가치관에서 멀어지도록 유혹하기 때문에 이를 "새로운 형태의 자흐르"라고 지칭했으며, 현대 사회를 "새로운 자힐리야"라고 지칭했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사상과 그가 창당한 자마아티 이슬라미의 이데올로기는 탈레반의 사상적 기원이 된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사상에 따르면 무슬림들은 현대 사회 즉 새로운 자힐리야 사회의 오염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 원래 이슬람 사회 그대로의 생활 방식대로 원복해야 한다. 그의 가르침대로 탈레반은 시대를 거슬러 중세 이슬람 사회와 율법을 현대 사회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그 결과물은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토후국의 형태로 나타났다.

6. 사이드 쿠틉의 해석

1. 오늘날 모든 인간 사회는 자힐리야 사회이다. 오늘날의 무슬림 국가들 역시 진정한 신정 정치 체제가 아니다.
2. 이슬람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자힐리야 사회는 지하드로 타도되어야 한다.
3. 처음 이슬람사회가 힘이 없는 약한 사회라면 이슬람국가의 수립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힘을 모아야 한다. 이슬람사회가 일단 힘을 모으고 나면 지하드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
- 아불 알라 마우두디

사이드 쿠틉은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자힐리야 해석을 이어받았다. 그가 말하는 자힐리야는 공산주의나 민주주의 등 이슬람 샤리아에 기초하지 않은 모든 정치체제였다.
인간주권이라는 개념에 근거를 둔 모든 종류와 모든 형태의 체제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속성을 탈취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최종 결정권이 신이 아닌 인간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체제들은 하나님 대신 다른 인간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에 해당한다.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의 삶에는 오로지 두 가지의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지도를 받는 삶이거나 오류로 점철된 삶일 것이며, 오류의 형태는 그 무엇이든지 될 수 있다. 진실의 삶이거나 거짓의 삶일 것이며, 거짓 또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중략) 신성한 안내에 복종하는 삶이거나 변덕에 따르는 삶일 것이며, 그 변덕 또한 여러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이슬람의 삶이거나 자힐리야의 삶일 것이며, 자힐리야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신앙의 삶이거나 비신앙의 삶일 것이며, 그것을 삶의 방식이자 사회정치적 체제로 삼는 삶이거나, 그렇지 않다면 비신앙과 자힐리야와 변덕과 어둠과 거짓과 오류의 삶일 것이다.
- 사이드 쿠틉


[1]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라는 말은 이슬람 신학 입장에서 보면 어폐가 있는 어휘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이 아담 시대부터 시작된 종교이고 모세나 아브라함 등등을 다 무슬림이라고 생각하기(따라서 모세나 아브라함 등등 무함마드 이전 출현한 선지자들도 다 천국에 간다고 믿는다.) 때문이다.[2] 참고로 자힐리야라는 어휘는 무함마드 이전 시대부터 활동했던 아랍계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는 하지 않는다. 쿠란의 제85장 알 부르즈에는 무함마드가 성인이 되기 이전 예멘에서 순교한 기독교인들 관련한 내용도 있기 때문이다.[3] 하디스에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카바에 걸려있는 아브라함의 초상화를 우상숭배라고 찢어버리라고 명령한 사례가 언급되어 있다.[4] 이븐 카시르의 쿠란 주해서에 나오는 내용으로 니샤푸르에서 의학을 배워와서 메카에 병원을 차린 안 나디르 빈 알 하리스(An Nadhir Ibn Al Harith)는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포교할 때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무함마드의 설교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있던 아랍인 청중들에게 페르시아 신화를 들려준 후 "여러분, 무함마드와 나 중에서 누가 더 재밌는 우화를 말했다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방해했다고 한다.[5] 이를 두고 중세 이슬람 역사가였던 이븐 카시르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남겼다. 모세가 살던 시절에는 마술이, 예수가 살던 시대에는 의학이, 무함마드가 살던 아랍 사회에서는 시가 중시되던 사회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는 파라오의 모든 마술사들을 능가할 수 있는 마술 실력을, 예수에게는 다른 의사들을 능가하는 치유력을, 무함마드에게는 다른 시인들을 능가할 수 있는 글인 꾸란을 내려주었다는 것이다.[6] 오늘날 쿠란 한국어 번역본을 보고, 이게 뭐가 대단하지 여길 수도 있겠지만, 이는 쿠란 아랍어에 입에 착착 감기는 어감 등을 한국어로 온전히 번역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유사 사례로 고대 그리스인이나 고대 로마인들에게 불세출의 명문으로 추앙받았던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나 일리아드 등등도 오늘날 현대어 번역문으로는 현대인 입장에서 큰 감흥을 느끼기 힘든 사례를 들 수 있다.[7] 깨끗한 물이 부족한 건조지대에서 술은 일종의 수질 정화제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게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주어 목을 축이게 했던 사례 등등을 생각해보자.[8] 가잔 칸이 이슬람으로 개종한 이후에도 일 칸국의 법은 이슬람 샤리아 율법이 아닌, 몽골 전통 법인 야사가 그대로 유지될 수 밖에 없었다. 몽골 왕공들 상당수는 이슬람 대신에 불교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에 호의적인 상황이었고, 당시 지방 행정력이나 중앙집권화 능력이 빈약했던 몽골 방계 국가들이 몽골 귀족들에게 샤리아 법 같은 이질적인 법을 강제하기는 무리가 따랐기 때문이다.[9] 원래는 마니교 신도를 일컫는 멸칭이었다. “이단자”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종종 무신론자를 일컫는 표현이기도 하다.[10] Denise Aigle, "The Mongol Invasions of Bilad al-Sham by Ghazan khan and Ibn Taymiyah's Three 'Anti Mongol' Fatwas."[11] 당시 쇼크를 받아 성향 자체가 변했던 인물 중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라시드 리다를 들 수 있다. 라시드 리다는 이후 프랑스위임통치령이었던 시리아-레바논에서 무슬림들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이븐 타이미야의 타크피르 이론을 인용하였다. 라시드 리다의 이븐 타이미야 신학 재해석은 후대 살라프파 운동으로 이어졌다.[12] 아불 알라 마우두디 살아생전 당시는 영국령 인도 제국이 해체되고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었다. 영국 유학파와 친서구주의자들이 파키스탄 건국 운동의 중추가 되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자신이 가만히 있을 경우 파키스탄이 명목상으로만 이슬람을 믿는 자힐리야 사회가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이슬람주의 정당 자마아티 이슬라미를 창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