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12:49:33

유야와 투야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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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와 투야의 무덤

قبر يويا وتويا
Tomb of Yuya and Tuya

1. 개요2. 역사3. 미라4. 부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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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멘호테프 3세의 아내 티예 왕비의 부모이자, 투탕카멘의 외증조부모인 유야(Yuya)와 투야(Tuya)가 묻힌 무덤. KV46이라고도 한다.

1905년 2월 미국의 백만장자 시어도어 데이비스의 후원으로 발굴을 진행하던 이집트학자 제임스 E. 퀴벨이 발견했다. 이미 고대에 3번 정도 도굴당한 무덤이긴 하지만, 미라와 황금관, 금빛 데스마스크, 전차, 각종 가구들, 항아리와 도자기 등 원래 부장품의 상당수가 보존되어 있었다.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기 이전까지는 이집트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이라 불렸을 정도로 중요한 무덤들 중 하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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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예 왕비 왕가의 계곡
유야와 투야는 이집트 신왕국 제18왕조 시대에 살았던 대귀족 부부였다. 아크밈 출신으로 신을 모시는 사제였을 것으로 추정. 왕족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딸 티예(Tiye)가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와 결혼하면서 왕족에 맞먹는 거대한 부와 권력을 지니게 된다. 티예는 아멘호테프 3세의 정실 왕비였고, 유야와 투야는 딸 덕분에 왕가의 계곡에 묻힐 수 있는 특혜를 누릴 수 있었다. 물론 파라오와 왕실 직계에 비하면 권력이 약했으나 왕가의 계곡에 묻힐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마어마한 특권이었다.

하지만 유야와 투야의 무덤은 이미 고대에 약탈당했다. 그 것도 무려 3번씩이나. 무덤이 봉인된 직후 이미 한 번 도굴당했고, 인근 무덤 KV3와 KV4를 짓는 와중에 두 번 더 도굴당했다. 첫 도굴 때에는 향유와 음식처럼 빨리 썩어버리는 물건들만 빼돌렸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도굴 때에는 그냥 대부분의 보석과 리넨 천, 온갖 장신구들을 쓸어갔다. 도굴 이후 사제들이 다시 무덤을 대강 정돈하고 재봉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내팽겨쳐진 투야의 미라는 다시 수의로 덮어놨고, 텅 비어버린 상자들도 어느 정도 채워놨고 깨진 봉인과 석회벽들도 부분적으로 다시 쌓아올려 출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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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데이비스 무덤 입구 내부 복도
그렇게 3,000년 동안 잊혀져 있던 무덤은 1905년 제임스 퀴벨의 발굴 작업으로 다시 세상에 공개된다. 당시 제임스 퀴벨은 미국의 백만장자 시어도어 데이비스의 후원을 받아 왕가의 계곡에서 발굴을 진행 중이었다. 1902년 ~ 1903년 사이의 발굴 프로젝트에서 투트모세 4세하트셉수트의 무덤을 발굴했고, 1904년 12월에 새로 발굴을 시작했다. 허탕만 치던 퀴벨은 1905년 1월 예전까지 탐사해보지 않았던 KV3 무덤과 KV4 무덤 사이의 좁은 미발굴 지대로 눈길을 돌렸다. 이 일대는 인공적으로 쌓아놓은 거대한 돌더미들이 있어 함부로 치우고 파낼 생각을 못하고 있던 곳이었는데, 퀴벨은 이게 숨겨진 무덤의 흔적이 아닐까 의심하여 이 곳을 파헤치기 시작했다.[1]

발굴은 1905년 1월 25일에 시작됐으며 2월 6일에 무덤의 문을 발견했다. 2월 12일 저녁에 문앞에 쌓여있던 모래와 토사물들을 모두 치워 말끔하게 드러났다. 단단한 바위에 새겨진 문과 문설주는 4.02 x 1.35m 크기였으며, 진흙 석고로 굳힌 돌덩어리들로 막혀있었지만 위쪽 46cm는 뚫려버린 상태였다. 즉 이미 도굴됐다는 증거였다. 데이비스가 이 틈 사이로 무덤 내부를 천천히 들여보자 가파르게 경사진 복도와 문 가까이 놓인 지팡이가 보였다. 사다리가 없었기에 데이비스는 현지인 감독관의 어린 아이를 들여보내 지팡이를 가져오도록 했다. 아이는 지팡이 외에도 금박을 입힌 돌 스카라베, 전차의 멍에도 함께 가지고 돌아왔다. 데이비스는 그날 저녁 이 유물을 이집트 정부의 발굴 책임자인 가스통 마스페로에게 보여줬고, 이에 큰 흥미를 느낀 마스페로는 다음날 아침 무덤 개봉식에 참석하기로 결정했다.

2월 13일 아침, 문의 봉인이 조심스럽게 해체되었고 데이비스, 마스페로, 웨이갈[2]이 일렁거리는 촛불을 들고 무덤으로 들어갔다.[3] 이들은 가파른 복도를 내려가다가 인장이 찍힌 석고 봉인문을 만났다. 이 봉인문 역시 이미 문설주 바로 아래쪽에 약간의 틈이 뚫려있었다. 문 바로 양쪽에는 문을 봉하는 데 사용된 석고 잔해가 담긴 진흙 그릇이 있었다. 문 위쪽의 틈을 통해 문 뒤의 매장실에 촛불을 들이밀어본 3명은 번쩍이는 황금빛을 발견하곤 틈을 통해 문을 넘어 매장실로 발을 디뎠다. 데이비스는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 방은 어두울 수 있는 최대한 어두웠고 엄청나게 더웠다. 우리는 촛불을 들었지만 촛불은 너무 희미한 불빛만을 내었고 눈이 너무 부시어서 금빛 반짝임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었다...
가스통 마스페로는 무덤의 주인을 알아보기 위해 거대한 목재 관에서 '유야'라는 이름을 읽어냈다. 옆에 있던 데이비스는 너무나 흥분해 촛불을 검은 수지 표면에 거의 대기까지 했다. 조금만 자칫했으면 수지에 불이 붙어 끔찍하게 타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 순간 자신들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빠질 뻔 했는지 깨달은 3명은 서둘러 매장실을 나갔다가 나중에 전등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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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황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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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황금관
발굴 결과, 무덤에서는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석관, 금박과 은박을 입힌 목재 이중관, 카노푸스 상자, 전차, 침대, 의자 등 가구, 다양한 용기와 그릇 등이 출토됐다. 특히 무덤의 주인 유야와 투야의 미라도 약간 주름지긴 했지만 거의 온전한 채 관에 누워있는 상태로 발견됐다. 이전까진 이만한 규모와 화려함을 갖춘 무덤이 발견된 적이 없었기에 당대로선 이집트학 최고의 발견이라고 할만했다. 강도의 위험성을 깨달은 데이비스는 최대한 빨리 유물들을 포장해 카이로이집트 박물관으로 실어보냈다. 3월 3일 모든 부장품들이 나일강에 도착했고, 다음날 무장 경비의 감시 하에 기차에 실어 카이로로 운송됐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무덤을 정리하는 도중, 프랑스외제니 드 몽티조 황후가 갑자기 발굴 현장을 들이닥쳐 무덤을 구경했다고 한다. 퀴벨은 기겁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최대한 예를 갖춰 황후를 대접하려 들었다. 황후는 유물들을 보고 싶어했지만 이미 대부분이 카이로로 가기 위해 포장되어버린 상태였기에 퀴벨은 정중히 사과할 수 밖에 없었다. 아래는 발굴을 도운 조셉 린든 스미스의 회고다.
그 여인은 '무덤 발견에 관한 이야기를 좀 들려다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퀴벨은 '기꺼이 하겠습니다, 다만 죄송하옵게도 앉을만한 의자를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 답했다.

그녀의 대답은 재빨리 나왔다. '그럼, 내게 딱 맞는 의자가 하나 있군.' 그리고 우리가 공포에 질린 사이, 그녀는 방바닥으로 내려와 3,000년 동안 그 누구도 앉지 않은 의자에 앉았다!

외제니 황후가 앉은 의자는 시타문 공주의 왕좌였다. 놀랍게도 의자는 3천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외제니 황후의 몸무게를 지탱해주었는데, 두 남자는 너무나도 당황해서 그녀에게 일어나라고 말할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3.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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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미라
무덤에서는 유야와 투야의 미라 모두가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다. 도굴꾼들이 미라를 건드리긴 했지만 크게 훼손하진 않아 발굴 당시에도 관에 담긴 상태 그대로였다. 특히 투야의 시신은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붕대가 다 풀려버린채 머리와 발만 드러난 채로 고급 천에 덮여 눕혀진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존 상태가 매우 좋아 시어도어 데이비스가 발견 직후 큰 충격을 받았다고.

유야의 미라는 붕대에 부분적으로 싸인 채로 발견됐다. 고대의 도굴꾼들이 몸통 부분의 붕대만 벗겨내고 머리와 발 부분은 그대로 놔두었던 것으로 보인다.[4] 유야의 미라를 꺼냈을 당시 황금과 청금석으로 만든 큼직한 목걸이 일부가 목 뒤에서 발견됐는데, 아마 강도들이 목걸이를 잡아채가다가 일부가 떨어져 남은 것이라고 추정된다. 머리를 싸고 있던 붕대는 카이로로 운송되기 직전에 미리 제거했다.

유야는 키 165cm의 노인으로, 방부처리 과정 때문에 곱슬곱슬한 하얀 머리가 변색되어버렷고 눈썹과 속눈썹이 짙은 갈색으로 변색된 상태다. 팔은 구부러져 있고 손은 턱 바로 아래에 놓여있는 상태. 원래는 모든 손가락과 발가락에 순금 보호대가 끼워져 있었으나 도굴꾼들이 죄다 가져가고 오직 오른쪽 새끼손가락의 보호대만 출토됐다. 미라의 눈 바로 앞에는 리넨 팩이 놓여있었고, 몸통은 수지 처리한 리넨 묶음으로 꽉 채워져 있었다. CT 촬영으로 치아 마모도를 통해 추정한 사망 당시 연령은 약 60세 정도. 부검학자들은 유야가 정통 이집트인이 아닌 외국인과 피가 섞인 혼혈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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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미라
투야의 미라는 남편에 비해서 운이 좋지 않았다. 이미 도굴꾼들이 그녀의 붕대를 죄다 풀어버린 상태였고, 무덤이 도굴된 것을 깨달은 사제들은 붕대를 처음부터 다시 감는 대신 대충 뒤에서 매듭지은 큰 리넨 수의로 덮은 뒤 4개의 띠로 고정했다. 4개 띠의 반대편에는 금박으로 잘라낸 투야의 이름판이 붙었다. 붕대 아래쪽에 있는 수지 코팅은 미라가 마치 거대한 이집트식 목걸이를 걸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고.

투야의 미라는 149cm의 작은 노인 여성으로 역시나 흰색 머리였다. 그녀의 팔은 곧게 뻗어있었고 손은 허벅지 바깥에 놓여있었다. 내장을 꺼낼 때 갈랐던 절개 부위는 실로 꿰매어졌으며 하단에 홍옥으로 만든 구슬이 달려있었다. 그녀의 몸 속은 역시나 수지를 적신 리넨 천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발에는 황금 샌들을 신었다. CT 촬영 결과 그녀는 약 50~60세 사이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매우 경미한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4. 부장품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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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데스마스크
유야의 미라가 쓰고 있던 데스마스크. 여러 겹의 거친 리넨을 겹쳐 접착한 뒤, 석고를 발라 굳히고 그 위에 금박을 입혀 만들었다. 내부는 석고를 입혔고 밖은 얇은 황금을 발랐다. 긴 가발에는 안감을 덧댔고 끝에 띠를 둘렀다. 제일 까다로운 얼굴 부분은 마지막에 만들었다. 눈, 눈썹, 속눈썹은 상감처리했는데, 눈은 흑요석과 흰색 대리석으로 만들었고 속눈썹과 눈썹은 푸른 유리로 만들었다. 발견 당시에는 도굴꾼 때문에 여러 갈래로 찢긴 상태였는데, 이후 복원해 아내의 가면 옆에 함께 전시 중이다. 작은 코와 큰 눈 등 외모를 어리게 표현한 것이 특징으로, 아멘호테프 3세 치세 마지막 10년의 대표적인 특징이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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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최외곽 목관
유야의 목관은 수지를 덮은 거친 나무로 만들었고 금박을 입힌 치장 벽토로 인물과 상형문자를 장식했다. 모습은 전형적인 제18왕조 양식의 검은색 관이며 관뚜껑은 반원형에다가 양 끝에 수직 차단벽이 세워졌다. 관에는 바닥이 없다. 발견 당시 관뚜껑이 약간 틀어져 있었는데, 도굴꾼이 미라에 접근키 위해 관뚜껑을 뜯어내 던져버린 걸 사제들이 수습하면서 다시 올려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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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첫 번째 관
미라 형상을 한 삼중관 중 첫 번째 관. 최외곽 목관과 마찬가지로 검은 수지로 덮여있다.[6] 금박으로 얼굴과 손, 가발 줄무늬, 몸에 두른 비문 띠를 둘렀다. 전형적인 제18왕조 스타일의 관이다. 호루스의 네 아들들이 양 면에 새겨져 있다. 도굴꾼들이 관뚜껑을 들어 옮겼기 때문에 발굴 당시에는 벽에 기대진 채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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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두 번째 관
나무로 만들어진 두 번째 관. 가장 큰 특징은 검은 수지가 아닌 은박으로 관을 덮었다는 것이다. 당시 유야의 권세를 보여준다. 손에는 제드와 테트 부적을 쥐고 있고 손 바로 아래에 영원 부적을 쥔 독수리가 새겨졌다. 그 아래에는 누트가 무릎을 꿇고 있으며 관의 발치 바닥에는 여신 이시스가 금박으로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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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세 번째 관
나무로 만들어진 세 번째 관. 두 번째 관과 거의 똑같게 생겼지만 완전히 금박으로 덮었으며 손이 없다. 얼굴 모양도 다르고, 측면 비문의 이름도 다른 것을 보아 아마 다른 사람을 위해 제작된 관을 유야가 가져가서 대신 사용한 모양. 역시나 도굴꾼들의 침입 때문에 발견 당시에는 관뚜껑이 석관 가장자리의 비좁은 틈에 처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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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데스마스크
거친 린넨을 여러 겹 겹쳐서 만들었고 석고로 접착, 코팅한 뒤 금박을 발라 마무리했다. 머리 꼭대기에 연꽃 꽃잎 띠와 연꽆 한 송이, 이마에 2개의 넓은 꽃봉오리로 구성된 넓은 필렛 장식물이 있다. 마스크의 가발에 거무튀튀한 부분은 검게 변색된 리넨 수의가 향유와 액상 수지 때문에 붙어버린 것. 하토르의 대신관이자 아문 하렘의 최고 책임자였던 투야의 모습을 담아낸 마스크. 이집트 데스마스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3,500년 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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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최외곽 목관
투야의 최외곽 목관. 거친 나무로 만들어 검은 수지를 칠한 뒤 금빛 수지로 호루스의 네 아들들을 그려넣었다. 내부에는 사자의 서에서 발췌한 이시스와 네프티스가 그려졌다. 남편의 것과 달리 이 관은 바닥이 있다. 발굴 당시 도굴꾼들 때문에 한쪽 패널과 뚜껑이 바닥에 널부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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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첫 번째 관
목재로 만든 투야의 첫 번째 관. 금박을 입힌 석고로 덮었다. 눈은 백색 대리석과 흑요석으로, 속눈썹과 눈썹은 불투명한 보랏빛 유리로 상감했다. 외관이 검은 수지 하나 없이 통째로 금박으로 덮인 것이 특이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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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야의 두 번째 관
내부 관도 목재로 만들고 금박 입힌 석고로 덮었다. 특히 꽃잎 15줄, 방울 모양 구슬로 만든 정교한 목걸이가 특징이다. 첫 번째 관의 뚜껑이 도굴꾼들에 의해 바닥으로 내팽겨쳐진 것에 반해 두 번째 관은 그나마 온전한 상태였다. 이시스, 네프티스, 누트 등 여신들의 형상과 신에게 바치는 기도문이 새겨진 황금 띠가 둘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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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노푸스 단지
유야와 투야의 내장을 담은 카노푸스 함과 항아리들. 유야와 투야가 각각 하나씩 카노푸스 세트를 가지고 있다.[7] 정면에는 이시스네프티스의 모습이, 측면에는 호루스의 네 아들의 모습이 새겨졌으며 뚜껑에는 호루스의 눈아누비스가 있다. 함 내부에는 사람 형상의 방해석 항아리 4개가, 항아리 안에는 미라처럼 포장한 장기들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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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감 목재 보석함
황금, 흑단, 백색과 붉은색 상아, 푸른 도자기 타일로 장식한 상감 목재 보석함. 측면은 고운 붉은빛 리넨 바탕에 금박입힌 앙크, 제드, 와스 상징이 장식됐다.[8] 측면에는 아멘호테프 3세와 티예 왕비의 있어 왕실 기물이었음을 짐작케한다. 뚜껑에는 아멘호테프 3세의 카르투슈와 영원의 신 헤흐(Heh)가 금박으로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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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박 흑단나무 의자
흑단으로 만든 정교한 의자. 난쟁이 신 베스와 출신의 여신 타와레트의 금박 입힌 형상이 정교하게 새겨졌다. 나무 다리는 사자의 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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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보석함
뚜껑에 아멘호테프 3세의 이름이 새겨진 또다른 보석함. 측면은 푸른 도자기 타일 바탕에 앙크와 제드, 와스 상징이 장식되어 있다. 뚜껑은 양쪽으로 열리는 한 쌍의 뚜껑문으로 만들어졌는데, 무릎꿇은 영원의 신 헤흐가 아멘호테프 3세의 카르투슈를 지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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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황금 의자
유야는 파라오의 군대를 지휘하는 군사령관이었다. 옆의 전차는 그의 무덤에서 출토된 전차. 원래는 바퀴와 몸통 등이 분리된 상태였으나 다시 조립해 카이로 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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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타문의 왕좌
유야와 티야 부부가 아멘호테프 3세와 티예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시타문 공주에게서 선물받은 왕좌. 등받이 맨 위에는 날개달린 태양과 에드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시타문 공주가 하인들에게 황금 목걸이를 선물로 받는 모습이 등 받침대 중간에 금박으로 새겨졌다. 공주의 형상 위에는 '그가 사랑하는 왕의 장녀, 시타문'이라는 글귀가 있으며 노예들이 '남쪽 땅'에서 온 황금을 바쳤다고 한다. 프랑스외제니 황후가 앉았던 의자가 바로 이 것. 튼튼하게 만들어졌는지 늙은 황후의 몸무게를 버텨냈다고 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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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유야와 투야의 침대. 몸체는 고급 흑단나무로 만들었으며 눕는 자리는 파피루스 줄기를 꼬아 무늬내어 만들었다. 흰색과 검은색 줄무늬를 그려 몸체를 장식한, 당시로서는 고급 침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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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야의 전차
유야가 사용하던 금빛 전차. 목재로 만들고 금박을 입혔다. 티예 왕비에게 공물을 바치는 시녀들의 모습과 칼을 들고 춤추는 베스와 타와레트 여신의 모습이 금박 위에 장식됐다. 이 끌기에는 높이가 너무 낮고 금박 장식이 달린 것을 보아 실전용보다는 장식용이었을 것이라고.[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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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브티
KV46 무덤에서는 유야를 위한 샤브티 14개와 투야를 위한 샤브티 4개가 발견됐다. 각각의 샤브티에는 저승세계에서 샤브티를 되살리는 사자의 서 6장의 '샤브티 텍스트' 주문이 새겨져 있다. 유야의 샤브티는 값비싼 흑단과 삼나무로, 투유의 샤브티는 금과 은으로 만들었다.[11] 그 외에도 샤브티들이 사용할 15개의 작은 상자와 멍에, 괭이, 곡괭이, 벽돌 틀 따위가 함께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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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의 서
유야와 투야가 저승세계 '두아트'로 건너가기 위해 필요한 절차와 주문을 적어놓은 책 사자의 서. 총 길이는 9.7m에 4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학계에서는 '유야의 파피루스'라고 부르며, 온전하게 보존된 몇 안되는 제18왕조 시대 사자의 서들 중 하나라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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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 샌들
유야와 투야가 내세에서 사용할 샌들. 파라오는 황금 샌들과 묻혔으나 유야와 투야의 무덤에서 발굴된 샌들들은 파피루스로 만들었다. 내세에서 부족하지 않도록 여러 켤레의 샌들을 넣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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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도자기
유야와 투야가 내세에서 사용할 도자기. 주황빛 도자기부터 줄무늬나 점을 찍어 장식한 도자기, 유약을 발라 색을 낸 도자기 등 종류도 다양하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어떤 생활용품을 사용했는지 짐작 가능한 귀중한 유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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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형상 뚜껑이 달린 화병
젖소, 아이벡스, 개구리, 황소 따위의 동물 머리가 뚜껑에 조각된 도자기 화병. 투야와 유야의 이름이 히에로글리프로 새겨져 있다.
저장용 항아리
유야와 투야가 내세에서 쓸 물건들을 저장해놓은 항아리들. 무덤에서는 탄산수소나트륨이 담긴 항아리 52개와 건조된 음식을 담은 항아리, 향유나 화장품을 담던 항아리들이 여럿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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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유물들
이 외에도 갖가지 작은 유물들이 발견됐다. 아멘호테프 3세의 카르투슈가 새겨진 푸른 도자기 원통, 금박 장식 푸른 도자기 제드 부적, 푸른 유리 스카라베, 원형 장미 모양 장식품 따위가 출토됐다고 한다.

[1] 시어도어 데이비스는 이 곳이 딱히 별볼일 없는 장소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허탕을 치더라도 왕가의 계곡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다면 그것 나름대로 좋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탐사를 승인했다고.[2] 당시 이집트의 새 고대 유물 수석감독관.[3] 정작 무덤의 발견자인 제임스 퀴벨은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에게 에드푸 신전을 관람시켜주느라 이 역사적인 순간에 함께하지 못했다.[4] 도굴꾼들은 몸통 일대의 붕대를 다 벗겨냈음에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절개 부위를 덮고 있던 113mm X 42mm 크기의 작은 금판을 가져가지 않았다. 아마도 어두운 무덤 속에서 도굴을 하느라 못보고 빼먹은 모양.[5]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유야가 매우 장수했다고 추정한다. 유야가 사위 아멘호테프 3세가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도 최소한 30년은 더 살았다는 증거로, 아내 투야가 먼저 죽고 유야가 몇십년 뒤에 죽은 것이라고 본다.[6] 검은색은 다산과 재생을 상징하는 오시리스의 색깔이었다.[7] 옆의 사진은 투야의 카노푸스 함이다. 유야의 카노푸스 함이 아무래도 더 화려한 편이다.[8] 앙크, 제드, 와스는 각각 생명, 안정, 힘을 의미한다.[9] 해당 의자는 사이즈로 봐서 어린이용 의자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금박의 마모도를 분석한 결과 실생활에 꽤나 자주 쓰였다고 한다.[10] 전차의 바퀴에 마모가 거의 없다는 사실 역시 장례식 때만 잠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11] 2011 이집트 혁명 당시 유야의 샤브티 중 7개가 도난당했으며 개중 6개가 나중에 회수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