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트셉수트 장제전의 전경.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고대 테베와 네크로폴리스 |
영어 | Ancient Thebes with its Necropolis | |
아랍어 | مدينة طيبة القديمة ومقبرتها | |
프랑스어 | Thèbes antique et sa nécropole | |
국가·위치 | 이집트 룩소르 주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79년 | |
등재기준 | (i)[1], (iii)[2], (vi)[3] | |
지정번호 | 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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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 하트셉수트 여왕의 장례 신전. 고대 이집트어로는 'Ḏsr-ḏsrw', 즉 성소 중의 성소라고 불렀다. 특유의 단정한 아름다움 덕분에 고대 이집트를 상징하는 건축물 중 하나로 꼽힌다.2. 역사
여자의 몸으로서 파라오에 등극한 하트셉수트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그 일환의 하나가 바로 데이르 엘 바하리에 세운 장제전이었다. 하트셉수트는 재위 7주년부터 재위 20주년 사이 어느 시점에 장제전 건설을 시작했다. 중왕국 시대의 파라오 멘투호테프 2세의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초안을 작성한 뒤 건설 도중 몇 차례 설계를 변경하면서 지었다고 한다. 장제전이 완공된 이후에는 아문 신전으로서의 역할도 겸하여 매년 계곡 축제를 열거나 하트셉수트 여왕과 투트모세 1세를 기리는 중심 사원으로서 기능했다.하지만 하트셉수트 여왕이 사망한 이후에는 장제전도 수난을 겪었다. 그녀의 뒤를 이은 투트모세 3세는 알 수 없는 이유로[4] 재위 20년차부터 하트셉수트 지우기에 착수, 이 과정에서 장제전에 새겨져 있던 하트셉수트의 이름을 지우거나 장제전에 세워졌던 그녀의 조각상들을 부숴버렸다. 하지만 이 행위는 오래가지 못했고, 후일 아멘호테프 2세 즉위 2주년부터는 하트셉수트 지우기가 완전히 폐지된다. 물론 투트모세 3세 시절에 지워졌던 흔적을 복구한 건 아니었지만 더이상 하트셉수트 장제전에 파괴 행위가 가해지지는 않았다.
전성기 시절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모습.
투트모세 3세 이후 아케나톤이 기존 종교를 배척하고 아톤 신앙을 포교한답시고 신전에 새겨졌던 아문의 형상을 지워버렸지만 아케나톤 사후 즉시 아톤 신앙이 몰락하며 다시 복구됐다. 투탕카멘, 아이, 호렘헤브 등의 파라오를 거치면서 아문의 형상이 죄다 다시 새겨졌다. 이후에도 장제전은 여전히 신앙의 중심지로 잘 쓰였다. 특히 신왕국이 망하고 들어선 혼란기 제3중간기인 제21왕조와 제25왕조 등에서는 왕족 뿐만 아니라 아문과 몬투 사제들의 묘지로도 사용됐다고 한다.
장제전 자체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까지만 해도 이집트 고대 신앙의 중심지로 잘 쓰였으나 로마 제국의 기독교 국교화 등의 과정을 거치며 점점 버려졌다. 서기 6세기 경에는 콥트 교회가 장제전의 폐허 위에 지어졌고 기존의 부조 위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모습이 덧그려지는 등 훼손도 여러 차례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씩 더 흐르자 이마저도 없어지며 장제전은 완전히 사람들에게 버려지고야 말았다. 가끔씩 순례자들이나 일부 사제들이 장제전 유적을 방문해서 참배했지만 자주 오지는 않았다. 순례자들이 장제전에 새긴 1223년의 마지막 기록 이후, 장제전에 관련된 기록은 더이상 없다.
장제전은 모래 속에 반쯤 묻혀져 무너져가다가 서양인들의 관심 덕에 다시 빛을 보기 시작한다. 근대에 장제전을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1737년의 영국인 리처드 포콕.[5] 이후 1798년에는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도중 프랑수아 졸루아와 르네 에두아르 드벨리에 등이 방문했다. 1817년에 조반니 바티스타가 단순 관광 목적이 아닌 고고학적 발굴, 혹은 이를 빙자한 도굴 목적으로 방문했고, 1850년대와 60년대에 어귀스트 마리에트가 최초로 체계적인 발굴 작업을 시작했다. 이때 장제전 위에 세워졌던 기독교 수도원 유적이 싹 헐려나갔고 중앙 테라스의 남쪽 열주를 모래에서 꺼낼 수 있었다. 그 유명한 하워드 카터가 1893년과 1906년에 걸쳐 모래를 완전히 치워냈고 이후 학계의 공조 하에 1900년대 초중반에 걸쳐 사원을 대부분 복원할 수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공간들이 관광객들에게 공개된 상태다.[6]
3. 건축
하트셉수트 장제전의 모습.
3개의 테라스로 이루어진 장제전은 거의 전부가 석회암을 쌓아서 만들었다. 가장 앞에 있는 탑문을 거쳐 들어가면 제일 낮은 1층 테라스가 나온다. 이 테라스에 약간 높게 깔린 석조 보도를 걸쳐 쭉 이동하면 경사로가 나온다. 경사로를 올라가야 두 번째 테라스가 나온다. 두 번째 테라스의 서남쪽 모서리 끝에는 사랑의 여신 하토르의 신전이, 서북쪽 모서리 끝에는 죽음의 신 아누비스의 신전이 있다. 이 두 번째 테라스에 깔린 경사로로 올라가면 마침내 세 번째이자 마지막 테라스가 나오는데, 지금은 천장이 대부분 무너져내렸지만 한때 존재했던 이중 다열주홀을 거쳐 들어가면 마지막 중정으로 들어갈 수 있다. 중정을 거쳐 더 안쪽으로 입장하면 양 옆으로 왼쪽에는 왕실 장례 사원이, 오른쪽에는 태양 사원이 있으며 맨 끝에는 아문 신을 모시는 지성소가 있다.
장제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당연히 3단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형태의 테라스다. 저멀리 계곡 사원에서 1km에 달하는 기나긴 보도를 따라 쭉 이어진 테라스로, 각각 완만한 경사로를 통해서 올라갈 수 있다. 맨 아래 1층 테라스는 너비 75m, 길이 120m에 달하고 동벽 중앙에 나있는 폭 2m짜리 문으로 들어간다. 테라스에는 두 그루의 페르세아 나무, 파피루스와 꽃을 담은 2개의 T자형 대야, 경사로 앞에 누워있는 2개의 사자상이 있다. 하단 테라스의 25m에 달하는 포르티코에는 각각 22개의 기둥들이 2열로 배열되었으며 벽에는 정교한 부조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부조는 엘레판틴 섬에서 오벨리스크 2개를 카르나크 신전으로 옮겨와 아문 신에게 바치는 하트셉수트의 모습이다. 주랑 바깥 끝에는 7.8m짜리 오시리스 석상이 하나 있다.
경사로를 따라 올라가면 나오는 2층 테라스는 너비 75m, 길이 90m다. 서쪽과 북쪽에 주랑들이 서있는데,[7] 서쪽 즉 정면 회랑에는 22개의 기둥들이 2열로 서있고 북쪽 즉 측면 회랑에는 15개의 기둥들이 1열로 서있다. 특히 이 서쪽 정면 회랑에 새겨진 부조들이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남서쪽 부조에는 푼트 지방[8]으로 떠난 원정과 룩소르로의 여행이 새겨졌는데 이 부조가 가장 유명한 편. 북서쪽 부조에는 투트모세 1세와 하트셉수트 여왕의 탄생을 경축하고 신성화하는 모습이 있다. 경사로 입구에는 역시 사자 1쌍이 있고 경사로 난간에는 코브라 위에 앉아 쉬는 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남서쪽과 북서쪽 모서리에는 각각 하토르와 라의 사원이 작게 하나씩 있다.[9]
푼트 지방으로 떠나는 원정대의 모습 | 3층 테라스 위 오시리스 신상이 세워진 기둥 |
3층 테라스의 오시리스 기둥들을 지나 들어갈 수 있는 중정은 여러 기둥들이 둘러싼 형태였다. 지금이야 기둥들이 대부분 무너져 그 뒤의 벽만 볼 수 있지만 원래는 여기 전체에 주랑들이 쭉 서있었던 것. 정면부인 서쪽에는 3열 주랑이지만 동쪽, 북쪽, 남쪽에는 2열 주랑이다. 정면부의 벽에는 8개의 작은 벽감과 10개의 큰 벽감이 파여있는데 원래는 여기에 하트셉수트의 조각상들이 있었을 걸로 추정한다. 현재 남아있는 벽에는 역시 부조들이 새겨져 있다. 북쪽에는 계곡 축제, 남쪽에는 대관식, 동쪽에는 오페트 축제[10]를 넣었다. 여기에서 3갈래로 길이 나뉘는데, 오던 대로 주축을 따라 정면으로 쭉 가면 아문의 지성소가, 오른쪽으로 틀면 태양 사원이, 왼쪽으로 틀면 왕실 장례 사원이 나온다.
두 번째 테라스의 남서쪽 모서리로 쭉 향하면 사랑의 여신 하토르 신전이 나온다. 하토르 신전은 장제전 건물과는 따로 떨어져 독립적인 건물인데, 원래는 세 번째 테라스 위에서도 바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현재는 두 번째 테라스로 들어가는 것 외에는 입장 방법이 없다. 입구로 올라가는 경사로에는 하토르 여신의 머리모양을 새긴 4개의 기둥주장식이 있고 입구의 벽에는 하토르에게 음식을 바치는 하트셉수트가 있다. 안에는 2개의 다열주홀이 있어 첫 번째 다열주홀에는 12개, 두 번째 다열주홀에는 16개의 기둥이 있다. 굳이 장제전에 하토르 여신의 사원을 만든 건 하토르 여신이 데이르 엘 바하리 지역에서 중요한 여신이었기 때문,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트셉수트가 여자였기에 스스로를 여신과 동일시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두 번째 테라스의 북서쪽 모서리에는 죽음의 신 아누비스 신전이 있다. 남쪽에 있는 하토르 신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규모가 작은 편. 12개의 기둥들이 3 x 4로 배치했고 2개의 방들이 낮은 문지방으로 분리된 채 연이어 배치된 형태다. 벽에는 아누비스를 숭배하는 부조가 빼곡히 새겨졌고 특히 아누비스가 하트셉수트를 내세로 인도하는 모습도 있다.
장제전 주축의 맨 끝에 있는 것은 바로 아문 지성소다. 하트셉수트가 '나의 아버지 아문의 정원'이라 부를 정도로 중요한 공간이었다. 3개의 방들이 일렬로 나열된 형태로 생겼는데, 첫 번째 방에는 아문의 방주가 있으며 채광창이 뚫려서 내부로 햇빛을 공급한다.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상인방에는 등을 맞대고 왕좌에 앉은 두 명의 아문 신과 그에게 무릎을 꿇은 파라오가 있다. 지고의 위치인 파라오가 무릎을 꿇을 정도의 아문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습. 홀 내부에는 투트모세 1세와 하트셉수트가 여러 공주들과 아문을 경배하는 모습이 새겨졌고 네 모퉁이에는 오시리스의 모습을 한 하트셉수트의 석상 4개, 양 옆의 벽감에 든 아문 신상 6개가 있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연례마다 계곡 축제를 열어서 저멀리 카르나크에서부터 장제전까지 퍼레이드를 벌였는데, 그 퍼레이드의 종착지가 바로 이 방이었다고 한다.
아문 지성소의 두 번째 방에는 아문의 형상이 벽에 새겨졌다. 양쪽에는 작은 예배당이 딸려있는데, 북쪽 예배당에는 헬리오폴리스의 엔네아드들이 새겨져 있으며 남쪽에는 룩소르의 엔네아드들이 새겨져 있다. 각각 거대한 셉터와 앙크를 쥔 모습. 헬리오폴리스 엔네아드의 상징은 아문이고 룩소르 엔네아드의 상징은 몬투 신이다. 맨 끝의 세 번째 방에 아문의 황금 신상이 있었지만 현재는 물론 없어졌다. 학계에서는 이 세 번째 방은 하트셉수트의 시대 이후 1,000년도 이후인 프톨레마이오스 8세 시대에 지어진 걸로 추정해서 '프톨레마이오스 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여기에 가짜 문이 있었을 거라는 주장도 있지만 검증되지는 않았다.
중정의 오른쪽에는 태양 사원이 있다. 중정으로 들어간 다음 세 개의 기둥이 달린 현관으로 그대로 꺾어서 들어가면 바로 태양 사원이 나온다. 입구의 문설주는 하트셉수트, 라 호라크티, 아문의 형상으로 장식했고 현관 부조에는 투트모세 1세와 하트셉수트가 있다. 웅장한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작은 안뜰이 나오는데 남쪽과 서쪽 벽에 작은 벽감이 있고 전자에는 앙크를 주는 라 호라크티의 모습, 후자에는 자신을 직접 숭배하는 하트셉수트의 모습이 있다. 중정의 왼쪽에는 왕실 장례 사원이 있는데, 세 개의 기둥이 달린 현관으로 들어가면 2개의 기도실이 나온다. 동서 축을 중심으로 북쪽 기도실은 투트모세 1세가, 남쪽 기도실은 하트셉수트 전용이다. 특히 이 하트셉수트의 기도실은 길이 13.25m, 폭 5.25m, 아치형 천장이 달린 높이 6.35m에 달하는 거대한 방으로, 장제전 전체에서 가장 거대하다.[11] 벽에는 가짜 문, 제례 장면, 의식을 수행하는 사제와 제물을 받는 하트셉수트 등 전형적인 기도실의 장식들이 있다.[12]
4. 여담
테러 직후 피로 물든 장제전을 물로 씻어내 청소하는 모습. 뿌린 물에 피가 섞여 계단 아래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 1997년 11월 17일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단체 알-자마-알-이슬라미야가 이 곳에서 테러를 일으켰다. 테러리스트들은 경비원을 죽이고 관광객들을 유적 안에 가둔 뒤 무려 45분 동안이나 내부를 돌아다니며 학살극을 벌였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 마체테로 잔혹하게 몸이 난도질당했고, 한 일본 노인 관광객을 칼로 죽인 뒤 시체에 '이집트 관광객 금지'라고 새기기까지 했다. 이 테러로 무려 62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자동 총기와 칼에 맞아 끔찍하게 사망했다. 희생자가 가장 많은 국가는 36명의 스위스였다. 스위스에서 단체관광을 온 일행들이 참변을 당한 것. 다음은 10명이 죽은 일본. 최연소 희생자는 영국의 5살짜리 소년인 세나 터너로 가족 모두가 참사를 당했다. 가히 이집트의 9.11 테러라고 부를 만한 대사건이었다. 하지만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이 테러는 결과적으로 완벽한 대실패였다. 이 사건으로 이집트의 관광객 수는 한동안 수직으로 곤두박칠쳤고, 이로 인해 관광 수입이 추락하자 당연히 경제적으로 낭패를 보고 막심한 손해를 입은(특히 관광도시 계열) 이집트의 국민들이 엄청나게 분노하여 알-자마-알-이슬라미야의 조직원들과 협조자들이 고발당하고 온갖 반발과 지역사회의 축객령으로 세력이 완전히 박살났기 때문이다. 이맘들이 비무장 아이들까지 죽인 살인마 테러범이라고 공개적으로 종교로 연루하여 이슬람의 망신 알-자마-알-이슬라미야를 종교적 처벌을 가해야 한다고 할 지경에 이를 정도로 알-자마-알-이슬라미야는 있는대로 욕을 처먹었고 나중에는 자신들이 배후가 아니라고까지 발뺌했지만[13] 당연히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이집트에서는 과격파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가 거의 사라진다.#
-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의 관리이자 건축가 '세넨무트'가 하트셉수트 장제전을 지었다고 본다. 장제전 바로 아래에 세넨무트의 무덤이 있으며, 세넨무트 소유의 예배당에 파라오의 옷을 입고 성적 행위를 하는 자웅동체의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가 하면 그의 이름이 장제전에 정식으로 새겨진 점 등을 들어 세넨무트가 생전 하트셉수트의 연인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이런 중책을 맡은 세넨무트는 평민 출신이었다. 세넨무트가 관리로 출세하고 하트셉수트의 치세 7년 혹은 8년차에 아버지 라모세(Ramose)와 어머니 하트노페르(Hatnofer)의 무덤을 직접 지었는데, 라모세의 칭호는 망자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형식적으로 붙여주는 '가치 있는'이라는 뜻의 이집트어 zab 뿐이었고 하트노페르의 칭호도 당대 기혼 여성에게 흔히 주어지는 '집의 여주인'뿐이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칭호나 직책이라도 사람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겨서 후세에게 알려주기 위해 빠짐없이 기록하는 게 관습이었는데 무덤에 묻힌 두 사람의 칭호가 매우 소박하다는 점에서 생전에 사회적 지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하트노페르는 제대로 된 부장품을 갖추고 미라로 만들어져 매장되었지만(도금한 데스마스크, 심장에 올려놓는 스캐럽 펜던트, 장례의 서, 카노푸스 단지 등) 라모세는 칠해서 만든 관에 뼈만 남아있었다. 이를 두고 학자들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는 세넨무트의 지위가 높지 않아 공동묘지에 매장했다가, 어머니가 사망해 무덤을 지을 때는 상당한 지위의 관리가 되어서 제대로 된 부장품을 갖춰 어머니의 미라를 안장했고 이전에 대충 매장했던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 다시 붕대를 감아서 어머니와 내세에서 재회하도록 합장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세넨무트의 무덤은 장제전 가까이에 위치하고 매장실만 존재하는 TT353, 반대로 부모의 무덤 근처에 위치한, 예배당만 있는 TT71의 총 2군데로 이 둘을 합쳐야 완전해진다. TT353의 천장에는 자세한 성도를 남겨놓아서 생전에 천문학에도 조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덤에서 나온 장례물품에서 아내의 묘사가 전혀 없고, 사망 후 세넨무트의 장례 집전 책임자를 자식이 아닌 형제가 맡았다는 기록으로 볼 때 평생 독신으로 산 것이 확실하다.
- 세넨무트는 수석 건축가이자 왕실 고문으로 일하며 여왕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는데, 아무래도 파라오가 여자였던 터라 이 둘의 관계를 두고 쑥덕쑥덕대는 사람들이 많았다. 장제전 바로 인근, 인부들이 쉬던 동굴에도 이 둘을 묘사한 음란한 낙서가 있다. 낙서 속 여성이 하트셉수트라고 확신되는 이유는 하트셉수트의 장제전 바로 옆에 새겨졌고 여자가 파라오가 쓰는 왕관을 쓰고 있기 때문.
- 고대 벽화의 내용이 외설적이니 열람시 주의 [펼치기ㆍ접기]
- 현재 유적은 아침 6시부터 저녁 5시까지 개방한다. 입장료는 140 이집트 파운드. 한화 약 6,000원 정도다. 사진은 공짜로 찍을 수 있다. 유적 입구에서 장제전까지 작은 셔틀버스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데, 딱히 먼 거리는 아니어서 걸어가도 되지만 더운 날에는 웬만하면 버스를 타는 게 낫다. 셔틀버스 비용은 2 이집트 파운드, 한화 약 130원이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4] 하트셉수트가 지나치게 오래 공동통치하는 바람에 그녀의 그림자에 가려서 쩌리 취급을 받던 투트모세 3세가 하트셉수트를 싫어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하트셉수트의 통치는 정당했으며 즉위 당시 지나치게 어렸던 투트모세 3세가 그녀의 섭정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는 점, 투트모세 3세가 재위한 지 20년이 흐른 시점에야 하트셉수트 지우기를 시도했다는 점, 하트셉수트의 총신들을 그대로 기용했다는 점 등에서 확실한 건 아니다.[5] 물론 다른 서양인들이 먼저 방문했겠지만 확실한 기록을 남긴 건 이 사람이 최초다.[6] 원래는 아무 곳에도 들어갈 수 없었지만 2000년에 안뜰, 상부 테라스, 현관이 개방됐고 2015년에는 태양 숭배용 안뜰이, 2017년에는 아문 지성소가 개방되면서 거의 모든 공간에 다 들어갈 수 있게 됐다.[7] 장제전 자체가 동쪽을 바라보고 있기에 우리가 보는 정면 방향이 서쪽, 왼쪽 방향이 북쪽이다.[8] 확실한 장소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아프리카의 뿔 지방 어딘가쯤으로 여겨진다.[9] 이 외에도 북쪽 현관이나 주랑, 4~5개의 신전들이 추가로 들어설 예정이었던 걸로 추정되나 중간에 백지화되면서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지어지지 않았다.[10] 파라오의 장수안녕을 기원하는 축제.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중대한 축제들 중 하나였다.[11] 투트모세 1세의 기도실은 길이 5.36m, 폭 2.65m로 딱 봐도 하트셉수트의 것에 비하면 확연히 작다.[12]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 페피 2세의 피라미드에 그려져 있던 걸 그대로 베낀 걸로 추정된다.[13] 그래놓고 한다는 소리가 관광객들을 죽인 건 이스라엘의 음모라느니 이집트 경찰이 우리에게 덤탱이 씌우고자 죽였다느니 헛소리만 골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