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5 01:40:40

페피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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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 제6왕조 제5대 파라오
페피 2세
Pepi II | 𓊪𓊪𓇌
파일:800px-AnkhnesmeryreII-and-Son-PepiII-SideView_BrooklynMuseum.png
페피 2세를 안고 있는 안케센메리레 2세[1]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페피 2세(Pepi II)
출생 기원전 2284년
사망 기원전 2216년/2184년
재위 기간 이집트 파라오
기원전 2278년 ~ 기원전 2216년/2184년
(약 62/94년)
전임자 메렌레 1세
후임자 메렌레 2세
부모 아버지 : 메렌레 1세
어머니 : 안케센메리레 2세
배우자 네이트, 이푸트 2세, 안케센메리레 3세, 안케센메리레 4세, 웃제브텐, 메리티테스 4세
무덤 사카라의 피라미드

1. 개요2. 통치
2.1. 100년에 가까운 재위 기간
3. 사카라의 피라미드

[clearfix]

1. 개요

이집트 고왕국 제6왕조의 5대 파라오. 무려 94년[2] 동안 왕좌를 지키며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주였다.

페피 2세는 오래디 오랜 재위 기간에 걸맞지 않는 무능한 파라오였다. 그의 재위 기간 내내 이집트 고왕국은 가파르게 쇠퇴했고, 파라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으며 아문 신관들의 권력이 지나칠 정도로 강해졌다. 페피 2세가 너무나 오래 장수하면서 왕세자들이 연달아 죽어나가고 후계 구도가 무너졌던 것. 결국 페피 2세가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이집트 고왕국은 멸망하고 혼란기인 제1중간기가 도래한다. 보통 '페피 2세'라고 짧게 줄여 부르지만 두 번째 이름인 '네페르카레[3]'까지 붙여서 '페피 2세 네페르카레'라고 부르기도 한다. 네페르카레는 고대 이집트어로 '의 영혼은 아름답다'라는 뜻이다.

2. 통치

2.1. 100년에 가까운 재위 기간

페피 2세는 94년 동안 이집트를 통치하며 거의 100년에 가깝도록 왕좌를 질기게도 오래 붙잡고 있었다. 웬만한 왕조의 존속 기간에 맞먹는 세월에 걸쳐 왕위를 유지했다는 의미. 페피 2세는 기원전 2278년에 6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다만 즉위 직후에는 너무나도 어렸기에 모친이자 선왕 페피 1세의 왕비였던 안케센메리레가 대신 섭정을 맡아 대신 이집트를 다스렸다. 그녀는 자신의 오빠 자우를 재상으로 두고 이집트를 다스렸는데, 위에 나오는 페피 2세가 어머니의 무릎 위에 앉아있는 이 조그만 조각상이 바로 안케센메리레의 섭정 기간 동안 만들어진 상아 조각상이다. 페피 2세는 그 긴 재위 기간 동안 많은 조각상들을 만들었지만 현재 그를 묘사한 조각들 중 우리에게 전해져오는 것은 고작 3개에 불과하고, 개중 가장 페피 2세의 모습을 잘 표현한 것이 바로 위의 조각상이다.[4]

당시 페피 2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가 있다. 당시 아스완의 총독이었던 하르쿠프가 남긴 기록인데, 하르쿠프는 누비아 원정 도중 피그미족과 만나 일부를 포로로 잡았다. 총독은 이 일을 그대로 왕궁에 보고를 올렸고, 이 보고를 받고 신난 페피 2세는 피그미족을 산 채로 붙잡아 올 것을 총독에게 명령했다. 당시 어린 나이였던 페피 2세는 키가 유난히 작다는 피그미족에 대해 전해듣고 엄청난 관심을 보였고, 개중 하나를 잡아와 궁중 광대로 삼고 싶어했다. 그래서 파라오가 친히 보낸 편지의 내용은 대충 "나는 니네가 푼트 지역에서 얻은 모든 전리품보다도 그 난쟁이가 더 보고 싶으니, 하루라도 빨리 터럭 하나라도 상하지 않게 잘 데려오도록 해라"... 페피 2세의 소망이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어쨌든 하르쿠프는 죽을 때 자신의 무덤에 이 일화를 새겨넣을 것을 바랐고, 이로 인해 현대까지 이 이야기가 전해져내려오게 되었다.[5]

페피 2세는 전대 파라오들의 외교 정책을 그대로 답습했다. 시나이 반도에서 구리터키석 광산을 찾아 귀중한 광물들을 수입해 들여왔고, 비블로스와 교류하며 중동의 값비싼 특산품들을 가져왔다. 또한 남쪽의 누비아인들과는 캐러밴을 통해 물물교환을 치렀고 앞서 말한 하르쿠프에게 명령해 남쪽 일대를 탐사하고 부족들과 친교를 맺을 것을 명했다. 메렌레 1세 시절부터 상이집트의 총독직을 맡으면서 상당히 유능했던 총독인 하르쿠프는 파라오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그는 어린 파라오가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피그미족과 다시 접선하는가 하면[6] 상아, 향료, 동물 가죽 등을 이집트로 들고 돌아왔다. 페피 2세는 남쪽의 누비아 뿐만 아니라 서쪽에 있는 거대한 사하라 사막에 대한 탐사도 지시했다. 사하라 곳곳에 점점이 흩어진 조그만 오아시스들을 이어 지도를 작성했고, 이 지도를 토대로 무역대를 보내 사막 너머의 국가들과 교역하기를 원했다.

위의 내용까지만 보면 별다른 문제는 없어보이지만, 이집트 고왕국은 페피 2세 시절부터 확실하게 쇠퇴하기 시작한다. 지방의 총독들의 권한이 너무나도 강해져 파라오의 명령을 무시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왕실과 결혼한 대귀족들이 난립하며 세력을 다투었다. 다만 이 것이 온전히 페피 2세의 문제만은 아니었던 것이, 페피 1세 시절 이미 왕비의 친척을 재상직에 앉히는 등 외척을 중요 관직에 등용하면서 일부 귀족가들의 횡포가 갈수록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뒤를 이은 메렌레 1세 역시 이같은 상황에 무력하기는 마찬가지, 대귀족과 신관들의 태도는 날로 오만해졌고 나중에는 파라오의 무덤에 맞먹는 크기의 무덤들을 지어대는 등 파라오를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다만 페피 2세가 책임이 아예 없다는 것 역시 아니다. 페피 2세는 재상직을 2개로 나누어 한 명은 상이집트를, 나머지 하나는 하이집트를 다스리도록 만드는 엄청난 실책을 저질렀다.[7] 이는 안그래도 남북 갈등이 심각했던[8][9] 사회 분위기에 기름을 붓는 짓거리였다. 멤피스를 수도로 한 파라오의 영향력은 날로 약해졌고 상이집트는 독립적으로 행세하기 시작했다. 결국 페피 2세 사후 고왕국은 얼마 가지 않아 멸망한다.

3. 사카라의 피라미드

파일:24851_P1_1533533227.jpg
페피 2세의 피라미드는 당시 파라오들의 공동 묘지가 있던 사카라 지방에 지어졌다. 높이 52m 정도의 피라미드는 석회석과 점토로 만들었고, 먼저 6층으로 단을 쌓아 피라미드 형태를 만든 뒤 백색 대리암으로 외벽을 매끈하게 마감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인부들이 공사 도중 이미 기껏 지어놓은 피라미드 근처의 장제전 북쪽 벽과 일부 건물들을 다시 헐어버리고 피라미드 부피를 넓힌 다음 처음부터 다시 공사를 진행했다는 것. 이로 인해 피라미드의 높이와 부피는 훨씬 커졌지만 왜 굳이 이렇게까지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피라미드 밑면의 모습이 특정 상형문자를 닮게하고 싶었거나 아니면 지진에 대비해 기반을 강화하려 했다는 설이 있다. 다만 학자들의 연구 결과 피라미드 내부에 심각한 금과 균열이 가있는 것을 보아 공사 도중 부정확한 계산으로 인해 하중을 제대로 계산치 못했고, 이를 급히 땜질하느라 추가 공사를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피라미드 내부의 관 안치실은 경사진 지붕에 별들이 촘촘히 그려져 있다. 매장실 자체는 거대한 화강암판 2장으로 지어졌고, 내부의 미라를 담았던 석관은 빽빽하게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으며 너비 1.3m, 높이 1.2m 정도의 검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10] 카노푸스 단지를 담던 궤짝은 바닥을 파낸 후 그 곳에 묻었던 것으로 추정. 굳이 추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미 오래 전에 피라미드가 도굴꾼들에게 털려나가 미라고 뭐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11] 피라미드 근처에는 거대한 장제전과 신하, 그리고 왕비들의 위성 피라미드들이 소규모로 지어졌다. 특히 이 장제전에는 파라오가 하마를 사냥하는 장면과 세드 축제에서 연회를 즐기는 모습을 장식하고 있었으며, 페피 2세가 누비아인 추장을 잡아 죽이는 장면 등 왕의 위엄을 찬양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참고로 페피 2세는 그렇게 오래 재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무덤 자체는 이전의 파라오들에 비해 딱히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1] 페피 1세의 왕비이자 페피 2세의 모친.[2] 보수적인 학계에서는 65년 정도로 낮게 잡기도 한다. 물론 65년도 엄청나게 긴 재위기간이다.[3] 이집트 상형문자로는 𓇳𓄤𓂓라고 쓴다.[4] 일부 학자들은 페피 2세의 엄청난 통치 기간에도 불구하고 그의 조각상이 몇 남지 않은 것을 두고 페피 2세 시절 이미 왕실 소속 예술가들이 이탈하기 시작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5] 참고로 하르쿠프가 무덤에 남긴 이 기록은 세계 최초의 여행록이다.[6] 이 과정에서 결국 피그미족 몇 명을 붙잡아 파라오에게 보냈을 가능성이 크다.[7] 사실 2왕조의 니네체르도 한 행동이다.[8] 당시 이집트는 이집트 초기 왕조로 인해 통일된지 상대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기에 잘못하면 다시 나누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9] 이집트의 남북 지역갈등은 기원후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집트인 문서 참조[10] 페피 2세의 관 자체는 예술적으로 상당한 수준이기는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다. 만들 때 측정용으로 임시로 적어놓은 표시가 그대로 남아있는가 하면, 광택도 제대로 내지 않아 완성되지도 않았다. 관뚜껑은 더욱 가관이어서 이건 관뚜껑에 상형문자가 제대로 적히지도 않았다고 한다.[11] 정확하게 말하면 카노푸스 단지 조각 일부는 겨우 남아있다. 연구 결과 왕이 죽은 후 서둘러 이 무덤에 묻혔고, 피라미드는 제대로 마감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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