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제17왕조 8대 파라오 세케넨레 타오 | Seqenenre Tao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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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decd87><colcolor=#000> 휘 | 세케넨레 타오(Seqenenre Tao)[1] | |
| 부왕 | 세나크텐레 아모세로 추정 | |
| 선대 | 세나크텐레 아모세 | |
| 후대 | 카모세 | |
| 묘지 | 데이르 엘 바하리[2] 드라 아부 엘 나가(Dra' Abu el-Naga')[3] |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 기원전 1560년~기원전 1555년 혹은 기원전 1558년~기원전 1555년 | ||
1. 개요
이집트 제2중간기 제17왕조의 8대 파라오이다.2. 통치
세케넨레 타오는 하이집트에 위치한 15왕조와 전쟁을 하였다.[4] 하지만 그 외에도 데이르 엘 발라스(Deir el-Ballas)에 새로운 진흙 벽돌 궁전을 지었고, 근처에 감시 초소까지 지었다고 한다. 또한 해당 지역에서 누비아 양식의 도자기가 대거 발견되어 누비아인 일부도 동맹으로 끌어들였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세케넨레 타오의 통일 전쟁을 그의 대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세케넨레 타오가 끔찍하게 죽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그의 후대들이 계속해서 통일 전쟁을 지속하여 17왕조가 승리하게 되고, 2중간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3.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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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발견된 파라오 미라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5] 유일하게 신왕국 이전의 파라오 미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세케넨레 타오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다름아닌 미라의 처참한 외관이었다.
미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상당히 끔찍하게 죽었다. 사망 당시의 나이는 약 40세로 추정이 되며, 두세명의 사람들이 그를 포위하고 둔기로 죽였다고 한다. 일단 도끼로 왼쪽 뺨 일부가 먼저 잘려나가고, 이빨이 드러났으며 턱이 부러져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번의 타격으로 두개골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으며, 단검 혹은 투창이 오른쪽 눈 윗부분의 이마를 베었을 것이다.
2009년 이후로 다른 의견이 제시되었는데, 세케넨레 타오의 미라는 상처 부위가 머리에 집중되어 있으며 팔, 다리 등에 별 상처가 없었다. 또한, 2021년 조사에 따르면 미라가 발견되었을 때 손목 부분이 손상된 것으로 파악되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추론해 보면 세케넨레 타오는 테베 군대가 힉소스에게 패배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목이 구속된 채로 투옥되었으며, 당시의 적이었던 힉소스 왕에게 직접 처형당했다는 것이다. 처형 도구로는 도끼가 유력해 보인다고 하며, 당대의 힉소스 왕의 도끼와 세케넨레 타오의 미라의 상처 자국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그의 시신은 그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발견되었을 때는 이미 부패가 되고 있던 상태였다. 결국 신하들은 급하게 방부 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고,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방부 처리가 되어 현재까지 미라가 전해져 오고 있는 것이다.
혐오스럽긴 해도 이미 부패된 상태에 심각하게 훼손된 시체를 가지고 미라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당대 이집트의 미라 제작 기술이 얼마나 수준 높았는지 짐작케 만드는 미라이다. 다만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인해 미라화 과정이 정교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방부에 필요한 핵심 재료인 나트론이 충분히 사용되지 못했기에, 방부 처리를 완전히 제대로 하진 못한 탓에 전시 당시 미이라에서 불쾌한 기름 냄새와 악취가 심하게 났다고.
[1] Seqenera Djehuty-aa 혹은 Skenenra Taa 로도 하기도 한다.[2] 미라가 발견된 지역이다.[3] 학자들이 추측하는 원래 무덤이 위치한 지역이다.[4] 전쟁이 일어난 이유가 기가 막힌게 제15왕조의 왕 아페피가 테베에 있는 연못에 있는 하마들이 시끄러우니까 죽이라는 이유로 시비를 걸자 발끈한 세케넨레 타오는 힉소스인들을 상대로 하는 통일전쟁을 일으킨 것이다.[5] 1934년 조세르의 피라미드에서 미라화된 인간의 왼쪽 발이 발견된 사례 등 이전 시대의 파라오 유해가 발견된 적은 있으나 현재는 모두 유실되었으며 발견된 발이 조세르의 발인지도 확실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