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고왕국 제5왕조 4대 파라오 네페레프레 Neferefre | ||
채색된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네페레프레의 조각상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네페레프레(Neferefre)[1] | |
부왕 |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 |
선대 | 네페리르카레 카카이 혹은 솁세스카레 | |
후대 | 솁세스카레 혹은 니우세르레 | |
묘지 |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2] | |
왕비 | 켄트카우스 3세(Khentkaus III)[추정] | |
자녀 | 멩카우호르(Menkauhor Kaiu)♂[추정] 솁세스카레(Shepseskare)♂[추정] 나크트사레(Nakhtsare)♂ 카카이바에프(Kakaibaef)♂[추정]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25세기 초반~중반 재위기간 2년 이하~7년 사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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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페레프레는 고왕국 제5왕조의 파라오로,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왕비 켄트카우스 2세의 장남으로 추정된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왕자 라네페르(Ranefer)로 알려져 있었다.네페레프레는 아부시르 왕릉에 자신을 위한 피라미드 네체리바우 라네페레프[7]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재위 2년째 즈음에 공사가 중단되었다. 이는 그가 갑작스럽게 죽었음을 시사하며, 그의 재위 기간은 2~3년으로 추정된다. 그의 피라미드는 후임자인 동생 니우세르레 이니에 의해 급히 완성되었고, 그곳에서 발견된 미라 조각들은 그가 20대 초반에 사망했음을 보여준다.
네페레프레의 활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며, 그의 기초적인 형태의 피라미드를 놓고 아버지의 피라미드를 완성하려 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라의 제단"이라는 뜻의 호테프-레라는 태양신전을 계획했으나, 재위 기간이 짧아 실제로 지었는지는 불확실하다. 네페레프레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인물은 솁세스카레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파라오일 가능성이 있지만, 그와의 관계는 불확실하고 논쟁의 대상이다.
2. 기록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다는 사실은 미로슬라프 베르너(Miroslav Verner)를 포함한 이집트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다. 베르너는 그의 통치 기간을 나타내는 단 하나의 비문을 발견했는데, 이는 피라미드의 하부 구조로 이어지는 복도의 모퉁이 쪽에 있었던 벽돌에 남겨진 것이였다. 이 비문은 첫 번째 가축 계수 해의 아케트 계절[8] 4일에 작성된 것으로, 이는 그의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통치 해를 의미한다.아부시르와 다른 곳에서 발견된 몇몇 유물들은 네페레프레의 통치 시기나 그 직후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그의 호루스 이름이 새겨진 점토 도장이 있다. 다른 유물로는 켄트카우스 2세(Khentkhaus II) 신전에서 발견된 아부시르 파피루스(Abusir Papyri)가 있는데, 이 유물의 출처는 5왕조 중후반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네페레프레의 장제전과 장례 의식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문서들은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단지의 존재를 확인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왕의 장례 의식의 중요성과 행정 조직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제공한다.
네페레프레는 신왕국 시대의 여러 고대 이집트 파라오 목록에 등장한다. 가장 초기의 언급은 세티 1세의 통치 기간에 작성된 아비도스 역대 파라오 목록으로, 네페레프레의 즉위명이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니우세르레 이니 사이에 29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람세스 2세의 통치 기간에 만들어진 사카라 석판에는 네페레프레가 솁세스카레 뒤에 나와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의 두 번째 후계자로 등장한다. 이 목록에서 그의 이름은 필사 오류로 "카네페레" 또는 "네페르카레"로 기록되었다. 같은 시기의 토리노 파피루스에서도 네페레프레의 즉위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문서가 훼손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이 목록에서 네페레프레의 통치 기간이 1년으로 표시된 부분은 여전히 읽을 수 있다.
네페레프레는 기원전 3세기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통치 기간에 이집트의 사제 마네토가 쓴 《아이깁티아카(Aegyptiaca)》에도 언급된 것으로 보인다. 《아이깁티아카》의 사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섹스투스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와 유세비우스의 언급을 통해 알려져 있다. 아프리카누스는 《아이깁티아카》가 네페르케레스, 시시레스, 케레스의 계승을 언급했다고 전해지며, 이는 각각 네페리르카레, 솁세스카레, 네페레프레의 헬레니즘식 이름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마네토의 제5왕조 재구성은 사카라 석판과 잘 일치한다. 아프리카누스의 요약에서 케레스는 20년간 통치한 것으로 언급되었다.
3. 가족
네페레프레는 그의 전임자인 파라오 네페리르카레 카카이와 왕비 켄트카우스 2세(Khentkaus II)의 장남일 가능성이 크다. 이는 아부시르 근처 마을의 집에서 발견된 석회암 판에 새겨진 부조를 통해 확인되었다. 이 부조는 네페리르카레와 그의 아내 켄트카우스와 함께 "왕의 장남 라네페르(Ranefer)"를 묘사하고 있으며, 라네페르는 네페레프레의 즉위 전 이름이다.네페리르카레와 켄트카우스는 최소한 또 다른 아들인 니우세르레 이니를 두었다. 또한 네페레프레와 솁세스카레의 관계는 불확실하지만, 이집트학자 실케 로스(Silke Roth)는 그들이 형제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반면, 베르너는 솁세스카레를 사후레의 아들로 보고 또한 네페레프레의 삼촌으로 보며, 야로미르 크레이치(Jaromír Krejčí)는 솁세스카레가 네페레프레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또 다른 형제로는 이리엔레(Iryenre)가 제안되었으며, 그의 장례 의식이 어머니와 함께 켄트카우스 2세 신전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통해 네페레프레와 같은 혈통인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까지 네페레프레의 왕비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해 말, 아부시르에서 체코 카를로바 대학교 이집트학 연구소의 고고학자들이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남동쪽에서 켄트카우스 3세의 마스타바를 발견했다. 무덤의 위치와 만들어진 연대,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된 비문들은 켄트카우스 3세가 네페레프레의 왕비였음을 강하게 시사했다. 켄트카우스 3세는 네페레프레의 통치 후 몇 십 년 후에 매장되었고, 그녀의 마스타바는 그의 피라미드에 가까운 곳에 만들어졌으며, "파라오의 아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또한, 켄트카우스 3세는 "파라오의 어머니"라는 칭호도 가지고 있어 그녀의 아들이 파라오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네페레프레의 후임자인 니우세르레 이니는 그의 아들이 아닌 형제로 알려져 있으며, 켄트카우스 3세는 니우세르레의 통치 기간에 매장된 것으로 보이므로, 이는 솁세스카레 또는 멩카우호르 카이우가 그녀의 아들일 가능성을 남긴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려진 점이 없어서 아직도 이집트학에서는 이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베르너는 솁세스카레가 네페레프레의 삼촌이었고, 멩카우호르 카이우가 네페레프레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크레이치는 솁세스카레가 네페레프레와 켄트카우스 3세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주장했다.
베르너는 "파라오의 아들"이라고 불린 나크트사레(Nakhtsare)와 아부시르에 묻힌 고위 귀족인 카카이바에프(Kakaibaef)가 네페레프레와 켄트카우스 3세 사이에서 나온 두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크레이치는 카카이바에프가 "파라오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없음을 지적하며, 베르너의 주장이 추측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4. 통치
네페레프레의 사후 니우세르레 이니의 즉위까지의 계승에 대해 이집트학에는 두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가설에 따르면 사카라 역대 파라오 목록과 마네토의 《아이깁티아카(Aegyptiaca)》에 의존하여 네페레프레가 솁세스카레를 계승했다고 믿었다. 이 가설에 따르면, 네페레프레는 니우세르레의 아버지였고,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 니우세르레가 왕위에 올랐다.그러나 2000년대 초반부터 베르너는 이러한 관점을 반박했다. 첫번째로, 네페레프레가 네페리르카레의 장남이라는 부조가 발견되었다. 두번째로,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미라는 그가 네페리르카레 사망 시 18~20세였음을 보여주며, 왕위 계승에 적합한 나이였음을 시사한다. 세번째로, 고고학적 증거는 셰프세스카레의 통치 기간이 수주에서 몇 달에 불과했음을 나타냈다. 이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두 개의 인장과 몇몇 인장 자국만이 알려져 있다는 점에서 뒷받침된다. 네번째로, 솁세스카레의 이름이 새겨진 인장 자국이 네페레프레의 장제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는 네페레프레의 사후에 솁세스카레가 그를 위해 제물을 바쳤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증거들은 솁세스카레가 네페레프레 사후에 통치했음을 시사하며, 피라미드의 정렬도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베르너는 네페레프레가 솁세스카레 이전에 통치했음을 주장하며, 이후 그의 주장은 다수의 이집트학자들에게 받아들여졌다.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 전통적으로는 20년으로 추정되었으나, 이는 과대평가로 현재 학계에서는 훨씬 짧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초기 발굴 결과가 발표되기 전, 이집트 학자들은 그의 재위 기간을 약 10년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이제 거의 학계에서 지지받지 않는다.
베르너는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이 2년을 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피라미드의 미완성 상태와 그의 치세에 쓰여진 문서의 양이 현저히 부족하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베르너는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건설이 파라오의 예상치 못한 이른 사망으로 인해 중단되었으며, 미완성된 피라미드를 급히 사각형 마스타바로 변환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역사적 자료 두 가지가 이 짧은 재위 기간 가설을 뒷받침한다. 피라미드에 있는 비문은 네페레프레의 즉위 첫해와 둘째 해만 언급하는 것으로 보이며, 토리노 파피루스는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을 2년 미만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고학적 및 역사적 증거를 종합하면 네페레프레의 재위 기간은 약 2년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5. 건축 활동
이름 | 네체리 바우 네페레프레 (Netjeri bau Neferefre) |
뜻 | 신성한 것은 네페레프레의 힘 |
높이 | 7m |
경사 | 64°30'[계획] 78° |
밑넓이는 가로 세로 108m의 정사각형으로 계획되었지만, 그의 예상치 못한 사망으로 인해 피라미드는 7m 높이까지만 완성되었다. 이후 니우세르레는 중앙 부분을 낮은 품질의 석회암, 모르타르, 모래로 채워 급히 완성했다. 외부 벽은 각도 78°로 회색 석회암으로 덮여 정사각형 모양의 마스타바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지붕은 점토로 덮었고, 지역에서 채취한 자갈을 주변에 쌓아서 사막의 언덕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 피라미드는 이후 "언덕"으로 불렸다. 베르너는 이 구조물이 원시 언덕의 형태를 본뜬 것이라고 제안했다.
이 기념물은 신왕국 시기부터 채석장으로 사용되었으나, 거칠고 미완성된 외관 덕분에 도굴꾼의 주목을 받지 않아 추가 피해를 피할 수 있었다.
네페레프레가 사망했을 때 그의 장례식이 열릴 예정이던 장제전 공사는 시작도 되지 못했다. 70일의 짧은 기간 동안, 후계자인 솁세스카레가 작은 석회암 재질의 장제전을 건설했다. 이 작은 장제전은 니우세르레의 통치 기간 동안 완성되었으며, 이후 니우세르레는 그의 형제 네페레프레를 위해 더 큰 장제전을 건설했다. 이 사원은 진흙 벽돌로 지어졌고, 24개의 나무 기둥과 2개의 돌 기둥이 있는 뜰이 있었다고 한다.
사원 내에는 이집트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이집트 스타일의 홀이 있었으며, 이 홀은 나무 기둥으로 지붕을 지탱하고 있었다. 사원에는 파라오를 본뜬 거대한 목재 조각상과 전쟁 포로의 조각상들이 있었다. 주 홀 동쪽에는 제사 의식을 위한 도살장이 있었고, 중심 제단 앞에는 태양의 배가 보관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82년 카를로바 대학교 이집트학 연구소의 발굴 도중 네페레프레의 장례 사원에서 중요한 행정 파피루스 묶음이 발견되었다. 네페레프레와 네페리르카레가 피라미드 복합체를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이들의 사원은 아부시르 고원에 완전히 고립되었고, 제사장들은 사원 근처에 임시 거처를 두고 행정 기록을 보관해야 했다. 반면, 다른 사원의 기록은 사후레와 니우세르레의 피라미드 근처 마을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현재 그곳의 지하수가 범람해서 파피루스는 사라졌다.
네페레프레의 피라미드 매장실 동쪽에서 미라를 감싸는 붕대와 가면 조각, 그리고 흩어진 인간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유해는 왼손, 피부가 덮인 왼쪽 쇄골, 이마와 왼쪽 발 부위의 피부 조각, 몇 개의 뼈로 구성되었다. 이 유해는 부서진 적색 화강암 관과 장례용품이 있었던 층과 같은 층에서 발견되어 네페레프레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라의 방부 처리 기술도 고왕국 시기의 것과 일치했다.
왕의 시신은 탄산나트륨으로 건조된 후 얇은 수지층으로 덮였고, 백색 석회질 코팅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뇌를 제거했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유해가 제5왕조 시기인 기원전 2628-2393년과 일치함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네페레프레는 미라가 확인된 몇 안 되는 고왕국 파라오 중 하나이다. 생물고고학적 분석에 따르면, 네페레프레는 20세에서 23세 사이에 사망했으며, 키는 1.67~1.69m였을 것으로 보인다. 매장실에서 발견된 두 번째 유해는 중세 후기인 14세기경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네페레프레는 제5왕조 창시자인 우세르카프의 전통을 따라 태양신 라에게 바치는 신전을 계획했거나 건설했다. 이 신전은 "라의 제단" 또는 "라가 만족한다"는 의미의 호테프-레(Hotep-Re)로 불렸다. 신전은 아직 위치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아부시르의 네페레프레 피라미드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전은 사카라(Saqqara) 북쪽에 있는 티(Ti)의 마스타바에서 발견된 비문에서만 언급되었다. 티는 사후레, 네페리르카레, 니우세레의 피라미드와 태양 신전에서 행정 관리로 일했다.
네페레프레의 짧은 재위 기간과 티의 마스타바 외에는 호테프-레에 대한 언급이 없는 점, 그리고 신전에서 일한 제사장이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베르너는 이 신전이 완성되지 않았거나 태양신전으로써 기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대신, 이 신전의 자재가 그의 동생 니우세르레가 건설한 셰세피브레(Shesepibre) 신전을 짓는데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905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비싱(Friedrich Wilhelm von Bissing)이 이끄는 독일 고고학 탐사에서 아부 고랍(Abu Gorab)에 위치한 니우세르레 태양 신전 아래에서 진흙 벽돌로 된 큰 건물의 유적을 발견했는데, 이는 네페레프레의 태양 신전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를 확인할 비문이 없어 추측에 불과하다.
네페레프레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아버지 네페리르카레의 피라미드를 완성해야 했다. 이 피라미드는 5왕조 시기에 건설된 건축물 중 가장 크며, 밑넓이는 가로 세로 105m, 높이는 72m이다. 네페리르카레 사망 당시 피라미드는 외부에 덮을 석회암이 부족했고, 장제전도 건설되지 않은 상태였다. 네페레프레는 피라미드를 석회암으로 덮고 동쪽에 석재 사원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이 계획은 중단되었고, 동생 니우세르레가 이 임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니우세르레는 피라미드 표면 덮기를 포기하고 벽돌과 나무로 장제전을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6. 사후
네페레프레는 다른 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처럼 그의 죽음과 함께 장제전이 설립되었다. 아부시르 파피루스에 따르면, 5왕조 시기에 매년 10일간의 축제가 열렸고, 최소 130마리의 황소가 그의 장제전 도살장에서 희생되었다. 이러한 대규모 동물 희생은 고대 이집트 사회에서 왕실 장례 의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희생된 동물은 의식 후 제사장들이 소비했다.네페레프레의 장례 의식은 고왕국 말기나 제1중간기에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중왕국 시기에 의식이 부활했다는 흔적은 희미하고 모호하다. 12왕조 시기에 쿠이앙크(Khuyankh)라는 인물이 네페레프레의 장례 사원에 묻혔는데, 이는 그가 죽은 파라오와 가까워지기 위해서였거나 다른 의식을 하는 장소들 때문에 무덤 위치가 제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1] "라는 그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다.[2] 대충 만든 마스타바 형태이기 때문에 도굴꾼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로 인해 많은 유물들과 파라오의 시신으로 추측되는 유골까지 발견되었다.[추정] [추정] [추정] [추정] [7] 네페레프레의 영혼은 신성하다[8] 범람의 계절이라는 뜻. 9월 11일부터 1월 8일까지 이어진다. 아케트는 총 4개의 월로 나뉘어지는데, 각각 소우트, 파외, 하토르, 코이악이라고 부른다.[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