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0왕조 초대 파라오 세트나크테 Setnakhte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세트나크테(Setnakhte)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1186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189년 ~ 기원전 1186년 (약 3년) | ||
전임자 | 투스레트 | |
후임자 | 람세스 3세 | |
자녀 | 람세스 3세 | |
무덤 | 왕가의 계곡 KV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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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의 초대 파라오.이집트의 최전성기였던 제19왕조를 끝내고, 신왕국의 쇠락기인 제20왕조를 시작한 파라오였다. 이집트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였던 람세스 3세의 친아버지였다.
2. 생애
세트나크테는 전임 왕조인 제19왕조의 일원이 아니었다. 세트나크테의 전임자인 투스레트와는 당연히 혈연적인 관계가 없었고, 세트나크테가 제19왕조의 마지막 '합법' 파라오라고 인정해준 세티 2세와도 전혀 친족 관계가 아니었다. 완전 다른 가문의 쌩판 남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세트나크테가 아마 제19왕조의 머나먼 방계 왕족이거나 대귀족 출신의 찬탈자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최근에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람세스 2세의 수많은 자식들 중 한 명의 피를 이은 손자나 증손자로 보고 있다.일단 즉위 후에 메르넵타의 딸이었던 티이-메리네세 공주와 결혼해 제19왕조로부터의 혈통적인 정당성을 이어받으려고 시도하긴 했다.
세트나크테는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기껏해야 최소 2년 - 3년 정도 밖에 재위하지 못했다.[1] 일부 비석에는 4년[2]까지도 집권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사실이라 보기는 어렵고 유효한 통치 기간은 3년 정도[3]가 정설이다.[4]
세트나크테의 재위기간은 짧았지만, 그 아들 람세스 3세가 탄탄한 왕권을 펼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한 기반을 쌓아주는 데는 성공했다고 평가받는다.
먼저 세티 2세부터 십타, 투스레트 시기까지 가나안에서 할거하면서 이집트 신왕국을 약탈했던 군벌 이르수를 토벌했고, 아문의 카르나크 신전을 복구하는 한편, 왕조 교체기에 도굴당한 제19왕조 파라오들의 무덤을 다시 재봉인하는 등 다양한 민심안정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세트나크테가 죽기 전 이러한 민심안정정책 및 왕권강화정책을 미리 펼쳐두고 간 덕에 후임 파라오인 람세스 3세가 이집트 신왕국 최후의 전성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는 호평이 많다.
세트나크테는 전임 파라오였던 투스레트에 대해서 강렬한 적개심을 품었고, 훗날 왕위를 주장할 세력이 나타나는 걸 방지하기 위해 투스레트의 흔적을 매우 철저히 말소시켰다. 투스레트의 단독 재위기간에 완성된 그녀의 장제전을 철저히 파괴해서 1890년대에 처음으로 발굴을 시도했을 때 '주춧돌 몇 개만 남았다.'고 할 수준까지 만들었고, 투스레트가 왕가의 계곡에 조성하고 있었던 KV14 무덤에서 그녀의 벽화와 이름을 전부 지운 뒤 자신의 무덤으로 재활용했다. 하지만 세티 2세나 십타에 대해선 적대감이 없었기에 세티 2세는 KV15로 무덤을 옮겨 재매장시켰고, 투스레트 단독 재위 시기 남편과의 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십타의 무덤에서 지워졌던 십타의 카르투슈를 복구시켰다.
3. 무덤
세트나크테는 기원전 1186년에 사망했고, 전임 파라오인 투스레트가 쓰기 위해 마련되었던 KV14번 무덤에 안장되었다. 이 무덤을 생전에 눈여겨보던 세트나크테는 투스레트를 쫓아낸 뒤 그녀의 이름과 그림을 지우고, 자신의 이름과 모습을 그려넣어 자기 무덤으로 재활용했다. 하지만 무덤을 봉인한지 얼마 되지 않아 도굴당해서 미라도 사라졌다.그나마 아멘호테프 2세의 KV35 무덤에서 발굴된 미라가 세트나크테의 것이 아닌가 추정되었는데[5] 문제는 이 미라를 자세히 조사하기 전에 1901년에 일어난 약탈로 인해 미라가 소실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남은 건 소실되기 전 찍어놓은 사진 1장 뿐이다.
4. 기타
- 토탈 워: 파라오가 메르넵타 사후 이집트의 혼란기다보니 세트나크테가 등장할 가능성은 높았으나 플레이어블 팩션 군주가 아닌 논플레이어블 팩션의 일반 군주로 등장한다. 대신 아들 람세스 3세가 주인공으로 나오며, 이르수를 처치한 행적을 반영했는지 람세스 3세는 가나안 인근에 배치되어 이르수와 대립한는 걸로 묘사된다.인게임 데이터로 세트나크테와 메르넵타 간 상호대사, 세트나크테 아트워크 일러스트가 확인되면서 DLC 추가군주로 나올 가능성이 높은 상태. 메르넵타와의 대사로 볼 때 고대 리비아 부족인 리부(Libu)와 대립할 것으로 보인다. 이후 왕조 업데이트에서 플레이어블이 되었다.
- 신화 속 양치기 노예가 되었다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선 파리스가 기술자들을 데리고 피람세스를 탈출함으로서 발생한 투스레트와 그녀의 반대파간의 내전을 틈타 어부지리로 손쉽게 파라오에 오른다. 파리스 덕에 손쉽게 파라오에 오르고 신관세력이 날아가 강력한 왕권을 쥘 수 있어서 파리스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여기에 파리스가 생산한 다량의 강철에 관심을 가져 에디오피아의 멤논을 활용하여 친교를 맺고자 한다.[6] 특히 파라오의 힘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했는데 아카이아인들이 피람세스를 약탈하러 오자 손수 나서서 자신의 몸에 태양신 아문-라를 현신시켜 아카이아 군을 쓸어버리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때 힘이 얼마나 강했는지 아킬레우스가 나서서야 간신히 아카이아 인들이 탈출할 수 있었고 이후 파리스발 대영웅시대가 끝나는데 영향을 준다.
[1] 아들인 람세스 3세가 즉위 당시 31세였던 점으로 보아, 즉위 당시 세트나크테는 최소 40대 후반 - 5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당시 수명을 생각하면 이미 나이가 많은 편이었다.[2] 세트나크테의 치세때 아문 대제사장이었던 바켄콘수의 비문에 나온 기록으로 2007년에 발견되었다.[3] 시나이 산에서 발견된 271비문을 근거로 한다.[4] 엘레판티네 비문에서 세트나크테가 재위 2년에 모든 반역자들을 차단했다고 기록한 점을 근거로 4년 동안 재위했다고는 하더라도 투스레트나 다른 경쟁자들과 난립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5] 제3중간기 시절에 왕가의 계곡을 점검해 무덤이 도굴당한 파라오들의 미라를 수습해 재염습한 뒤 2군데의 무덤에 집단으로 매장했다. 그 중 한 곳이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이었는데 오래전에 도굴당해서 다시 도굴당할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한 곳은 시아문의 치세때 테베의 아문 대신관이자 파라오들의 미라를 수습해 다시 매장하는 책무를 맡았던 피네젬 2세의 가족묘로, 후대인 제22왕조 시기까지 매장된 미라가 확인되었다.[6] 이때 세트나크테가 선물한 수호의 반지 덕분에 파리스가 히타이트의 저주에서 무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