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 제2중간기 26대 공동/27대 파라오 소베크호테프 4세 Sobekhotep IV | ||
| 소베크호테프 4세의 석상 |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카네페르레 소베크호테프 (Khaneferre Sobekhotep) | |
| 아버지 | 하앙케프[1] | |
| 공동 통치 | 네페르호테프 1세 | |
| 선대 | 네페르호테프 1세, 시하토르 | |
| 후대 | 메르호테프레 소베크호테프 | |
| 묘지 | 아비도스 S10으로 추정 | |
| 왕비 | 탄(Tjan) | |
| 자녀 | 소베크호테프-미우 (Sobekhotep-Miw)♂ 소베크호테프-자-자 (Sobekhotep-Dja-Dja)♂ 하앙케프-이케르네페레트 (Haankhef-Iykherneferet)♂ 아멘호테프 (Amenhotep)♂ 네브티우네트 (Nebetiunet)♀ |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 재위기간 8~9년 | ||
1. 개요
이집트 제2중간기 13왕조의 26대 공동 파라오이자 27대 파라오이다. 쇠락해져가는 이집트 13왕조의 마지막 황금기를 이끈 파라오로 알려져 있다.2. 가계
2.1. 부모와 형제자매
소베크호테프 4세의 아버지는 ‘신의 아버지’로 불린 하앙케프(Haankhef), 어머니는 ‘파라오의 어머니’로 불린 케미(Kemi)이다. 부계 조부모는 ‘도시 연대의 병사’로 불린 네히(Nehy)와 그의 아내 세네브티시(Senebtysy)로 알려져 있다. 모계 조부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카네페르레 소베크호테프 4세는 네페르호테프 1세와 시하토르의 동생이며, 시하토르가 공동통치자로서 재위 중에 사망하자 네페르호테프 1세의 후계 공동통치자로 임명되었다.
2.2. 혼인과 자녀
그는 여러 왕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확실히 알려진 이는 ‘파라오의 아내’라고 불린 탄(Tjan) 한 명뿐이다. 탄은 여러 왕비 중 주된 왕비를 의미하는 ‘대왕비’ 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탄 소생의 자녀로는 아멘호테프(Amenhotep)와 네베티우넷(Nebetiunet)이 있다.이 밖에 왕자로 기록된 소베크호테프 미우(Sobekhotep Miu), 소베크호테프 자자(Sobekhotep Djadja), 하앙케프 이이케르노프레트(Haankhef Iykhernofret) 세 아들이 더 있으나, 그들의 생모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3. 재위
소베크호테프 4세는 13왕조 가운데에서도 강력한 군주였고, 멤피스, 중이집트, 테베에 대한 통치는 사료로 잘 확인된다. 다만 그가 통치한 시기에 이집트 전역이 완전히 통일되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집트학자 킴 라이홀트(Kim Ryholt)에 따르면, 당시 나일강 델타 동부는 이미 14왕조가 장악하고 있었다.3.1. 공동통치
네페르호테프 1세의 재위 중 후계 문제와 혼란으로 인해, 그는 동생 시하토르를 공동통치자로 임명했다. 그러나 시하토르는 1년이 지나기도 전에 사망했고, 네페르호테프 1세는 다시 둘째 동생인 카네페르레 소베크호테프 4세를 공동통치자로 세웠다.3.2. 단독 통치
카르나크에서 발견된 비석에는 아문-라 신전에 대한 기부가 기록되어 있다. 또 파라오의 이름이 새겨진 문주 한 쌍이 카르나크에서 발견되어 건축 활동도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카르나크 출토의 멘투호테프 2세 조각상에는 소베크호테프 4세가 복원했다는 명문이 남아 있다. 아비도스에서도 지역 신전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각종 명문이 새겨져 있는 벽돌들이 확인된다.카르나크에서 발견되어 현재 루브르 박물관[2]에 있는 재상 네페르카레 이메루(Neferkare Iymeru)의 석상에는, 그가 파라오를 위해 운하와 '백만년의 집'이라는 건축물을 건설했다는 기록이 있다. 석상의 출토지가 카르나크인 점을 고려하면, 건축물들도 그곳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재위 6년차에는 이집트 최남부 와디 엘-후디(Wadi el-Hudi)의 자수정 광산으로 원정이 이루어졌으며, 이 원정은 현지에 세워진 네 기의 비석으로 확인된다. 에드푸에서는 재위 8년차로 연대가 새겨진 비석이, 와디 하마마트(Wadi Hammamat)에서는 재위 9년차의 명문이 있는 비석이 각각 보고되어 있다.
3.3. 에드푸
한편 N. 뮐러(N. Moeller)와 G. 마루아르드(G. Marouard)는 소베크호테프 4세 재위 시점에 나일강 삼각주 동부가 15왕조 힉소스 파라오 키얀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견해는 텔 엘드푸(Tell Edfu)에서 조사된 초기 12왕조 시기 행정 건물이 17왕조 무렵 대형 곡물 창고가 지어지기 전까지 제2중간기에 걸쳐 계속 사용되었다는 발굴 성과에 근거한다. 2010~2011년의 발굴에서 기존 건물에 인접한 대형 방에서 힉소스 파라오 키얀의 카르투슈가 찍힌 인장 41점과 13왕조 소베크호테프 4세 명의 인장 9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가 중왕국 말~제2중간기의 문화·연대 문제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고 보며, 키얀이 사실상 힉소스 초기 파라오들 가운데 한 명이고, 15왕조는 13왕조 중기 무렵 이미 존재했으며, 북부는 키얀이, 나머지 지역은 소베크호테프 4세가 통치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그러나 로버트 포터(Robert Porter)는 키얀이 소베크호테프 4세보다 훨씬 뒤의 파라오라고 반론한다. 그는 파라오 인장이 사후에도 오래 사용되는 사례를 지적하며, 오히려 소베크호테프 4세가 더 후대에 재위했거나 13왕조 초기가 기존 인식보다 훨씬 길었을 가능성까지 검토하였다. 라이홀트의 연대안에서는 키얀과 소베크호테프 4세 사이에 약 100년의 간극이 있으며, 니콜라 그리말(Nicolas Grimal) 역시 비슷한 수치의 연대안을 제시하였다. 알렉산데르 일린-토미치(Alexander Ilin-Tomich)는 인장과 함께 출토된 토기 양식을 엘레판티네의 사례와 비교해, 해당 양식이 비교적 늦은 제2중간기에 등장한다는 점을 들어 두 파라오가 같은 시대의 인물일 가능성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소베크호테프 4세의 시점에 델타는 이미 14왕조 또는 15왕조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왕실 조정
네페르호테프 1세 시대의 동시대 자료에 비추어 볼 때, 소베크호테프 4세는 형의 행정 정책을 대체로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재상은 네페르카레 이메루(Neferkare Iymeru), 재무관은 세네비(Senebi), 고위 관리는 네브앙크(Nebankh)였다. 에드푸에서는 ‘문의 장로’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던 호르-아아(Hor-aa)가 확인된다.5. 무덤
소베크호테프 4세의 무덤은 확정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아비도스에서 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 복합체 인근에 ‘소베크호테프’라는 왕명을 지닌 대형 무덤인 S10이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요제프 W. 베그너(Josef W. Wegner)에 의해 발견되었다. 처음에는 세켐레 쿠타위 소베크호테프 1세의 묘로 추측되었으나, 장례 양식은 소베크호테프 4세 시기에 더 잘 맞는다는 견해가 있다.6. 유물
- BM EA 1060: 와와트(Wawat)에서의 군사 활동을 언급하는, 소베크호테프 4세의 왕명이 새겨진 비석.
- Cairo JE 51911: 카르나크에서 발견. 레바논산 삼나무로 만든 아문 신전의 이중 문을 세웠다는 내용이 적힌 소베크호테프 4세의 비석.
- Alliot, Edfou, pl. XVII.2: 에드푸 출토된 ‘호르-아아(Hor-aa)’의 비석[3]에 재위 8년차에 작성된 명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