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 6대 파라오 아메넴헤트 3세 Amenemhat III | ||
아메넴헤트 3세의 동상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아메넴헤트(Amenemhat) | |
부왕 | 세누스레트 3세 | |
선대 | 세누스레트 3세 | |
후대 | 아메넴헤트 4세 | |
묘지 | 하와라 피라미드 | |
왕비 | 아아트(Aat) 케네메트네페르헤제트 3세 (Khenemetneferhedjet II) 헤테프티(Hetepti)[추정] | |
자녀 | 네페루프타(Neferuptah)♀ 아메넴헤트 4세(Amenemhat IV)♂[추정] 소베크네페루(Sobekneferu)♀[추정] 하토르호테프(Hathorhotep)♀[추정] 누브호테프(Nubhotep)♀[추정] 시타토르(Sithathor)[추정]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불명 (약 45년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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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중왕국 제12왕조의 6대 파라오. 중왕국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명군이다. 20년 가까이 아버지 세누스레트 3세와 이집트를 공동으로 다스리며 실무 경험을 익혔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내치에 집중한 정책들을 펼치며 평화기를 구가했다. 아메넴헤트 3세의 치세에 이집트는 유례없는 예술과 문화의 진흥기를 맞았으며 중왕국은 역사상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아버지 세누스레트 3세는 누비아와 아시아의 군주들을 상대로 호전적으로 전쟁을 벌였고, 세누스레트 3세가 미리 변경을 정리해둔 덕에 아메넴헤트 3세는 외적이 쳐들어올 걱정 없이 이집트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는 파이윰 지방에 세베크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거나 서부 오아시스 개척로와 질좋은 석재 채산지를 탐사, 제 모습을 닮은 거상 축조 등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아메넴헤트 3세 시대 건설 프로젝트의 최고봉은 바로 다슈르와 하와라에 지은 피라미드였다. 제4왕조 시대의 스네프루 이래 한 번도 지어지지 않았던 피라미드를 다시 세웠다는 데에 역사적인 의의가 있다.
2. 통치
세누스레트 3세는 남방의 누비아 유목민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선제적인 공격을 퍼붓는 등 상당히 호전적인 왕이었다. 파라오는 남자는 죽이고 여자, 어린아이들은 모조리 노예로 끌고 들어오는 가혹하기 없는 군사 원정으로 누비아 반란의 싹을 잘라버렸고, 누비아가 평정되자 시리아, 팔레스타인 유역을 정벌해 아시아 쪽의 위협을 차단했다. 내적으로는 지방 총독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파라오에게 힘을 집중시켰으며, 제대로 된 군주제를 지향하며 왕권을 크게 강화했다. 이렇게 철권통치를 통해 국가를 다스린 정복군주였기에 세누스레트 3세는 훗날 역사학자 마네토나 그리스의 헤로도토스 등이 적은 전설적인 파라오 세소스트리스[7]의 모델이 되기까지 했다. 이렇게 활발한 군사 활동으로 이집트의 변경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강화한 세누스레트 3세는 재위 20년 되는 해에 제 아들 아메넴헤트 3세를 공동 파라오로 임명했다. 세누스레트 3세는 이때부터 슬슬 실질적인 권력을 아메넴헤트 3세에게 넘겨주기 시작했다고 한다.새롭게 왕위를 이어받은 아메넴헤트 3세는 아버지와는 달리 훨씬 평화를 추구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군사 활동을 벌이거나 전쟁을 치르는 것보다는 거대한 건축물들을 짓고 제 위엄을 과시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아메넴헤트 3세는 즉위한 이후 끊임없이 시나이 반도 지방에 있는 구리나 터키석이 나는 광산들을 탐사하거나 이집트 내부의 석재 채굴장들을 확장했다. 아스완에서는 붉은 화강암, 하트눕에서는 설화석고, 투라에서는 석회암 등 각지마다 가지각색의 석재들을 끌어올렸고, 이렇게 채굴된 석재들은 모조리 아메넴헤트 3세의 장대한 건설 프로젝트에 유용하게 쓰였다. 특히 파이윰 일대에 관심이 많던 아메넴헤트 3세는 세베크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짓거나,[8] 12m에 달하는 자신의 거상 2개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세라빗 엘-카딤 지방의 하토르 신전을 개축하고 멤피스의 프타 신전을 개건한 후 엘레판틴 섬의 사원을 다시 세우는 등 수많은 건축물들을 지치지도 않고 지어댔다.
다슈르 피라미드 | 하와라 피라미드 |
아메넴헤트 3세가 지은 건축물들 중 백미로 꼽히는 것이 바로 다슈르와 하와라의 피라미드다. 개중 유명한 것은 다슈르의 피라미드로, 현지에서는 '검은 피라미드'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하다. 아메넴헤트 3세가 즉위하자마자 건설하기 시작한 다슈르 피라미드는 기단은 각각 105m 길이이며, 사면의 경사 각도는 54°30'에서 57°15' 50" 사이, 높이는 대략 75m 정도였다. 기자의 피라미드들과는 달리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아니라 진흙벽돌로 지어졌고, 이때문에 현재는 벽돌들이 부스러져 상당히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맨 위쪽에는 1.3m 정도 높이의 회색 화강암으로 깎은 피라미디온이 얹어져 있었으며 피라미드의 사면에는 히에로글리프들을 새겨 아름답게 장식했다. 다만 태양신 아문의 이름은 종교개혁을 펼친 파라오 아케나텐의 시대에 지워져 깎인 것으로 추정된다. 피라미드 앞쪽에는 단순한 형태의 장제전이 서있었다. 피라미드 지하에는 왕의 매장실 1개와 왕비의 매장실 2개가 있다. 그러나 아메넴헤트 3세는 이 곳에 매장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지하수의 누수와 하중 압박으로 인해 매장실 내부에 금이 가고 습기가 차기 시작했기 때문. 놀란 인부들은 바로 보강 작업을 실시했지만, 이미 한 번 부실한 현장을 본 아메넴헤트 3세는 그 곳에 묻힐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결국 파라오는 다슈르의 피라미드를 버리고 새로운 피라미드를 세울 것을 지시했다. 그 것이 바로 하와라의 피라미드다.
아메넴헤트 3세의 새로운 피라미드는 파이윰의 오아시스 일대의 하와라에 지어졌다. 역시 진흙 벽돌이 주재료였으며 기단의 길이는 102~105m 정도, 높이는 58m 정도였으며 사면의 경사는 48°에서 52°정도로 다슈르의 것보다 낮았다. 경사를 더 높게 만들면 하중 압박 때문에 다슈르의 참사가 다시 반복될까봐 우려했던 건축가들이 일부러 그렇게 지어놓은 것이다. 파라오는 다시는 다슈르의 피라미드처럼 기껏 지어놓고 버리는 일을 반복하기 싫었기에 건축가들에게 튼튼한 피라미드를 지으라 닦달했다. 그래서 하와라의 피라미드 매장실은 아예 100톤에 달하는 거대한 통짜 대리암 암석 내부를 파서 만들었고, 다시는 무너지지 않도록 신중에 신중을 기해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라미드 앞에는 다슈르의 것과 마찬가지로 장제전이 또 지어졌다. 하지만 이번 장제전은 굉장히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고대인들은 이를 '미궁'이라고 불렀다. 스트라보는 이 건물에 이집트의 행정구역 개수만큼 방이 있다고 적었고, 헤로도토스는 이 곳을 보고 '방에서 회랑으로, 회랑에서 더 많은 방으로'라는 표현을 썼다. 이같은 복잡한 구조 때문에 하와라의 장제전은 크레타 섬의 미궁의 원형으로 추정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