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제21왕조 제6대 파라오 시아문 Siamun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이름 | 시아문(Siamun) | |
출생 | 미상 | |
사망 | 기원전 967년 | |
재위 기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986년 ~ 기원전 967년 (약 19년) | ||
전임자 | 대 오소르콘 | |
후임자 | 프수센네스 2세 | |
부모 | 불명 | |
배우자 | 카리말라(Karimala, 추정) | |
자녀 | 불명 | |
무덤 | 본래의 무덤은 타니스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 타니스 왕실묘지(NRT 3,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재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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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제3중간기 제21왕조의 제6대 파라오. 제3중간기의 파라오치고는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겼기에 제21왕조의 파라오들 중에서 가장 권력이 강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름의 의미는 아문의 아들이며, 즉위명은 네체르케페르레 세테페아문(Netjerkheperre-Setepenamun, 신성하신 라의 현현, 아문에게 선택받은 자) 이다.2. 가족 관계
이 파라오의 가족관계에서 대해선 알려져 있는 게 거의 없다. 1999년에는 나일강의 제2폭포와 제3폭포 사이에 있는 셈나(Semna) 사원에 카리말라 왕비에 대한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대 오소르콘의 친딸이었고, 그녀는 '왕의 딸'이자 '왕의 아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사원의 기록에서 재위 14년을 언급하고 있어 시아문이나 프수센네스 2세의 왕비로 추정되었는데 시아문의 재위 5년차에 쿠시 총독을 맡던 네스콘수(Neskhonsu)가 사망하자 그녀의 뒤를 이어 쿠시 총독이 되었기에 시아문의 왕비로 확정되었다. 이 결혼은 시아문이 파라오 직위를 잇는 데 큰 도움이 되었던 걸로 추정하는데 전임 파라오인 대 오소르콘이 리비아 출신이었기 때문.3. 재위 기간
마네토의 이집트 역에서는 재위기간을 9년으로 언급하고 있으나, 카르나크 신전의 신관 연대기 중 파편 3B의 3~5행에 재위 17년차의 수확의 계절(Shemu) 첫 달에 네스파네페호르(Nespaneferhor)의 아들 호리(Hori)가 사제단에 합류한 시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 날은 테피 쉐무 축제일로 이를 통해 계산한 결과 기원전 970년이 나왔다. 따라서 시아문은 기원전 970년에서 16년 전인 기원전 986년에 즉위했다는 이야기가 되며 후임 파라오인 프수센네스 2세가 기원전 967년에 즉위했으므로 정확한 재위 기간은 19년이 된다.시아문 재위 17년차의 이 기록은 의미가 매우 큰데, 파라오라는 단어는 이집트 고왕국부터 이집트 신왕국 때까지 '왕의 활동'을 칭할 때만 썼다. ('파라오'께서 신전/석상을 세우라 명하셨다. 우물을 파라고 명하셨다 같이) 그런데 시아문 재위시기부터 왕의 출생명 앞에 파라오를 붙여 '파라오 시아문', '파라오 프수센네스 2세' 등과 같은 용법으로 쓰이기 시작해서 일반화 되었기 때문이다. 이 용법 변화 덕분에 후계자인 프수센네스 2세의 재위기간도 추정할 수 있었다. [1]
후계자는 없었던 걸로 보이며 사망 후에 테베의 아문 대신관 직을 맡고 있던 프수센네스 2세가 이어받았다.
4. 업적
시아문 재위 시기에 수도 타니스에 있던 아문 대신전은 2배로 확장되었고, 메센(Mesen)의 호루스 신전에 여러가지 작업을 추가했다. 또한 헬리오폴리스와 피-람세스에도 개축을 했는데 실제로 시아문의 이름이 적힌 석재가 출토되었다. 또한 멤피스에 자신의 왕명을 새긴 열주 6개와 앞마당이 딸린 아문 신전을 건설하여 봉헌했으며, 멤피스의 프타 사제단에 여러 은혜를 베풀었다. 그리고 당대의 테베 아문 대신관인 피네젬 2세에게 왕가의 계곡에 있는 신왕국 파라오들의 무덤을 점검하고, 도굴당한 무덤에서 파라오들의 미라를 수습해 재매장하도록 명령했다. 이 작업은 시아문 재위 1년부터 10년까지 진행되었고, 재수습한 파라오들의 미라는 피네젬 2세의 무덤에 안치되었다. [2]5. 무덤
시아문의 원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선대 파라오들의 행적을 따라 타니스의 왕실묘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나, 끊임없이 물이 찼다가 빠지는 최악의 환경이라 소실되었다. 그래서 주변의 무덤들 중 상태가 그나마 나았던 프수센네스 1세의 무덤에 미라를 재안치했던 걸로 보이는데 여기도 환경이 좋지 않았고 목재 관을 썼기 때문에 미라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나마 시아문의 이름이 적힌 샤브티가 출토되어서 재매장했다는 것만 알 수 있다.[1] 셰숑크 1세 치세 5년차에 셰숑크 1세는 상이집트 지역의 오아시스 지배권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마 부족 출신의 대리인인 와이헤세트(Wayheset)를 파견했다. 와이헤세트는 오아시스의 군주이자 지배자라는 직함을 받았고 대 다클라 석비에 그 활동이 기록되었는데, 그 내용은 와이헤세트가 니스-바스테트(Nysu-Bastet)라는 남성의 용수권을 '파라오 프수센네스'의 재위 19년차 토지문서를 참조해 조정했다는 것이다. 과거에 이집트학 연구자들은 이 프수센네스를 프수센네스 1세로 추정했으나, 파라오라는 단어의 용법 변화 때문에 프수센네스 2세를 칭하는 걸로 결론을 내렸고, 그의 재위 기간을 24년으로 수정했다.[2] 피네젬 2세의 아내인 네스콘수는 시아문 재위 5년 차에 먼저 사망했는데, 생전에 그녀가 선대 파라오의 미라를 재염습하기 위한 리넨 천을 기부했다는 기록이 있고 람세스 9세의 미라를 재안치할 때 그녀의 관을 남성용으로 재단장하지 않고 그대로 써서 관도 기부받아 피네젬 2세 생전에 작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