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제2중간기 26대 파라오 네페르호테프 1세 Neferhotep I | ||
<colbgcolor=#decd87><colcolor=#A0522D> 휘 | 카세켐레 네페르호테프 (Khasekhemre Neferhotep) | |
아버지 | 하앙케프[1] | |
공동 통치 | 시하토르 소베크호테프 4세 | |
선대 | 소베크호테프 3세 | |
후대 | 소베크호테프 4세 | |
묘지 | 아비도스 S9로 추정 | |
왕비 | 세네브센(Senebsen) | |
자녀 | 하앙케프(Haankhef), 케미(Kemi), 와네페르호테프(Wahneferhotep) | |
재위 | 이집트 파라오 | |
기원전 1747년~기원전 1736년 혹은 기원전 1742년~1733년 혹은 기원전 1741년~기원전 1730년 혹은 기원전 1740년대 혹은 기원전 1740년~1729년 혹은 기원전 1721년~1710년 혹은 기원전 1705년~1694년 재위기간 11년 1~4개월 |
1. 개요
이집트 제2중간기 13왕조의 26대[2] 파라오이다.2. 가족
2.1. 출신
네페르호테프 1세는 테베의 비왕족 가문 출신으로 군사적 배경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조부 네히(Nehy)는 “도시 연대의 장교” 칭호를 지녔으며, 조모 세네브티시(Senebtysy)는 “가문의 부인”이라는 일반적 칭호만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 사이의 알려진 아들은 하앙케프(Haankhef)였다.하앙헤프는 자료에서 항상 “신의 아버지”와 “파라오의 날인자”로, 그의 아내 케미(Kemi)는 “파라오의 어머니”로만 나타나 왕족 출신이 아님을 시사한다. 엘-라훈(el-Lahun) 출토 스캐럽 인장에는 하앙케프가 네페르호테프의 아버지임이 직접 기록되어 있으며, 토리노 파피루스에도 네페르호테프 1세의 부친으로 하앙케프가 명시되어 있다. 토리노 파피루스가 파라오 이외의 비왕족 인물을 기록하는 일은 극히 드물며 이례적이다.
주목할 점은 네페르호테프 1세와 전임 소베크호테프 3세, 후임 소베크호테프 4세가 비왕족 출신임을 은폐하지 않고 오히려 비석이나 스캐럽 인장에서 공표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통상 혈통에 정당성을 두던 이집트 전통과 어긋나며, 직전의 세트 메리브레 관련 기념물이 훼손된 정황과 연관지어, 이들 군주가 자신들을 그 전임자들과 의도적으로 구분하려 했던 시도로 해석되기도 한다. 이유는 확실치 않다.
2.2. 자손과 승계
아스완 출토 비문에 따르면, 네페르호테프 1세는 세네브센(Senebsen)과의 사이에서 하앙케프(Haankhef)와 케미(Kemi)라는 최소 두 명의 자녀를 두었다. 와네페르호테프(Wahneferhotep)이라는 또 다른 아들도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재위 말기 공동 통치자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시하토르였고, 시하토르와 네페르호테프 1세가 거의 같은 시기에 사망하자 또 다른 동생 소베크호테프 4세가 즉위하였다.소베크호테프 4세는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 내에 세운 비석[3]에서 자신이 테베에서 태어났음을 언급한다. 네페르호테프 1세 역시 테베 출생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제13왕조의 수도는 당시 북쪽 잇타위(Itjtawy)에 있었다.
3. 재위
3.1. 증명
3.1.1. 유물
네페르호테프 1세는 북쪽 비블로스부터 누비아 남부의 부헨(Buhen)·미르기사(Mirgissa)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역의 유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상이집트 남부에서 발견되는 유물이 많다. 하이집트 나일강 삼각주에서의 유물은 텔 엘-야후디야(Tell el-Yahudiya) 출토 스캐럽 1점뿐이다. 알려진 유물은 60점 이상의 스캐럽 인장, 원통 인장 2점, 엘레판티네 출토의 조각상 1점, 와디 엘 샷 엘-리갈(Wadi el Shatt el-Rigal)·세헬 섬(Sehel Island)·코노소(Konosso)·필라에(Philae) 일대의 암각 비문 11개 등을 포함한다. 이 비문에는 “파라오의 지인 네브앙크(Nebankh)”와 “귀중품 관리인 세네비(Senebi)” 등 고관의 이름과 왕실 가족들이 기록되어 있다.아비도스에서는 비석 2개가 알려져 있는데, 그중 하나는 웨가프의 즉위년 4년에 제작되었다가 후대 네페르호테프에 의해 사용권이 넘어간 것으로, 웨프와웨트의 성스러운 행렬로 위에 무덤 축조를 금지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카르나크에서는 네페르호텝의 동상 2기씩 보관되어 있던 보관함 2개와, 네페르호테프 1세와 소베크호테프 4세의 카르투슈가 함께 새겨진 받침대가 발견되었다. 파이윰 지역에서도 유물이 있는데, 셰데트의 소베크와 호루스에게 봉헌된 파라오의 작은 동상이 있으며, 현재는 볼로냐 고고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1.2. 왕명표
동시대 유물 외에, 네페르호테프 1세는 카르나크 파라오 목록 제34번, 토리노 파피루스의 제7열 25행에도 등재되어 있다. 토리노 파피루스는 그의 재위를 11년 1~4개월로 기재하며, 이는 메르네페르레 아이(23년)와 소베크호테프 4세(9~12년)에 이어 왕조 내 두 번째 혹은 세 번째로 긴 재위로 평가된다.3.2. 연대
상대 연대상으로는 소베크호테프 3세의 뒤, 소베크호테프 4세의 앞에 위치한다. 부친 하앙케프와 모친 케미는 “신의 아버지”, “파라오의 어머니” 이외의 칭호가 보이지 않으며, 이를 근거로 네페르호테프 1세가 왕족 혈통이 아니었고 군사적 배경을 바탕으로 왕위를 찬탈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절대 연대에 대해서는 이견이 크다. 학자에 따라 그는 13왕조의 22번째에서 27번째 사이의 군주로 배치되며, 즉위 시점을 기원전 약 1740년에서 약 1700년까지로 본다.
3.3. 통치 범위
네페르호테프 1세가 소베크호테프 3세를 제치고 즉위했든 정통 승계를 했든 간에, 즉위 당시 이집트가 분열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부 연구는 가나안계 14왕조가 이미 존재하여 삼각주 동부를 장악했을 수 있다고 보며, 하이집트 유물이 스캐럽 1점뿐인 점을 그 근거로 든다. 이 견해는 일부 학자에게 수용되지만, 맨프레드 비에탁(Manfred Bietak) 등은 네페르호테프 1세가 전 이집트를 통치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레반트 지역, 특히 비블로스 총독 얀티누(Yantinu)의 비석과 가나안 지역 스캐럽 4점이 발견되는 등 해당 지역과의 교역을 유지할 정도의 권위를 보유했음을 근거로 들었다.한편, 최근 발굴에서는 소베크호테프 4세의 인장과 힉소스의 15왕조의 강력한 파라오 키얀의 인장이 함께 출토된 사례가 보고되어 두 인물이 동시대였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그럴 경우 네페르호테프 1세는 키얀 또는 그의 선대 사키르-하르와 동시대가 되며 삼각주를 온전히 지배하지 못했을 수 있다. 다만 이는 통설 연대에 대한 도전으로[4], 학계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3.4. 통치
카르나크에서 발견된 네페르호테프 1세와 소베크호테프 4세의 공동 받침대, 레그랭(Georges Legrain)이 발견한 네페르호테프의 신전 등은 그가 카르나크에서 일부 건축 활동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 2005년 카르나크에서는 하트셉수트의 북쪽 오벨리스크 아래에서 네페르호테프가 자기 자신과 손을 맞잡고 있는 높이 약 1.80m의 두 개의 석상과 이를 수납하던 두 번째 보관함이 추가로 발견되었다.현재 남아 있는 가장 중요한 기념물은 아비도스에서 발견된 네페르호테프 1세 재위 2년에 만들어진 대형 비석으로, 파라오가 조각상 제작을 어떻게 구상하고 명했는지를 알려주는 왕실 문헌이다. 서두에는 전형적인 칭호[5]가 기록되어 있고, 이어 잇타위의 “고귀한 아름다움”이라고 불리는 궁정에 머물던 네페르호테프가 아비도스의 연례 축제에 설치할 오시리스 상을 만들 것을 원해, 아툼의 “태고의 문헌”에 적힌 신상 제작 지침을 찾아서 확인하도록 명하고, “왕실 재산의 관리인”을 사자로 보내며, 금·은·구리로 상을 제작하게 하며, 마지막에는 파라오 자신이 축제에 참여하는 과정이 서술된다.
전반적으로 그의 치세는 비교적 번영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조각 분야에서 품질이 높은 민간 작품들이 제작되었다.
3.5. 무덤
네페르호테프 1세의 무덤은 확정되지 않았으나, 아비도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2013년 이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조사단은 “아누비스의 산”이라 불린 자연언덕 기슭에서 중왕국 말~제2중간기의 왕가 네크로폴리스를 발굴 중이며, 이는 12왕조의 세누스레트 3세의 피라미드 복합체 인근에 위치해 있다. 이 네크로폴리스에는 13왕조 중엽의 피라미드형 대형 무덤 2기와, 이른바 아비도스 왕조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최소 8기의 왕묘가 포함된다. 이 가운데 대형 무덤 S10은 약탈과 훼손을 크게 겪었으나, 주변 왕묘[6]에서의 출토된 유물들을 기반으로 소베크호테프 4세의 묘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해졌다. 이에 인접한 S9이 네페르호테프 1세의 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두 군주는 재위 중 아비도스 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한 정황이 있다.기존 가설로는, 네페르호테프 1세가 엘-리슈트(el-Lisht)의 세누스레트 1세 피라미드 인근에 묻혔다는 견해가 있었는데, 이는 엘-리슈트에서의 네페르호테프의 스캐럽이 출토된 것과, 세누스레트 1세 장례 사원 북문 인근에서 발견된 왕자 와네페르호텝(Wahneferhotep)[7]의 샤브티에 근거한다. 해당 샤브티는 천에 싸여 소형 관에 안치되어 있었고, 양식상 제13왕조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와네페르호텝이 네페르호테프의 1세의 아들이었을 가능성과, 부자가 인접해 매장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또 다른 가설로는 남사카라 남부 미완성 피라미드에 묻혔다는 가설이 있다. 이 피라미드는 제13왕조 중엽에 주로 쓰였던 양식의 매장실을 갖추고 있어[8], 형제 파라오[9]들을 염두에 두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4. 공동 통치
네페르호테프 1세는 11년의 통치 후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후계자는 동생 소베크호테프 4세였다. 또 다른 동생 시하토르는 토리노 파피루스에 후계자로 나타나지만, 형과의 단기간의 공동 통치 기간 중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세헬(Sehel)에서 발견된 두 비문에는 네페르호테프 1세·시하토르·소베크호테프 4세가 함께 열거되는데, 여기서 시하토르는 사망자로 표기되어 있다. 와디 함마마트(Wadi Hammamat)의 또 다른 비문에서는 네페르호테프 1세와 소베크호테프 4세의 카르투슈가 나란히 새겨져 있다. 이를 공동 통치의 증거로 보는 견해와, 소베크호테프 4세가 선왕을 기리는 목적으로 새겼을 뿐이라는 반대 견해가 있다.5. 역사적 동시대성
네페르호테프 1세의 이름이 새겨진 한 비석은 이집트와 근동 연대 동기화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 비석은 “비블로스 총독 얀티누(Yantinu), 총독 야킨(Yakin)의 아들”을 옥좌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하고, 그 앞에 네페르호테프 1세의 출생명과 즉위명이 배치되어 있다. 여기서 야킨은 세헤테피브레의 원통 인장으로 알려진 비블로스의 야킨-일루(Yakin-Ilu)와 동일 인물일 수 있으며, 이 경우 세헤테피브레와 네페르호테프 사이에는 한 세대의 간격이 존재한다. 또한 마리 문서에는 “비블로스의 왕 얀틴-암무(Yantin-’Ammu)”가 등장하며, 이는 비석에 있던 총독 얀티누와 동일 인물로 보인다. 당시 비블로스는 이집트의 반쯤 자치를 하게 냅둔 총독령이었으므로 “비블로스의 왕”은 실질적으로 파라오 명의로 도시를 다스리던 셈족 계열의 도시 통치자를 의미한다. 마리 문서 대부분은 마지막 왕 짐리-림(Zimri-Lim) 치세에 해당하며, 짐리-림은 함무라비와 동시대이다. 이로써 네페르호테프 1세 – 얀티누 – 짐리-림 – 함무라비의 연대 동기화가 성립한다.[1] 왕은 아니고 왕족도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심지어 왕실에 인맥도 없던 것으로 알려졌다.[2] 학자에 따라 22대에서 27대까지 차이가 크다[3] 카이로 JE 51911[4] 키얀과 네페르호테프 1세는 100년 이상의 차이가 난다[5] 상하 이집트의 파라오 카세켐레, 라의 아들 네페르호테프, 파라오의 어머니 케미에게서 태어남…”[6] 예를 들면 워세리브레 세네브카이의 무덤인 CS9[7] “네페르호테프는 영속한다”라는 뜻이다.[8] 매장실이 두곳으로 나뉘어져 있어 두 명을 매장할 수 있게 한 형태[9] 네페르호테프 1세와 소베크호테프 4세와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