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상형문자로 적힌 게브투
아랍어: قفط
콥트어: Ⲕⲉϥⲧ
그리스어: Κόπτος
영어: Qift
1. 개요
이집트 중부 퀴나 주의 도시. 퀴나에서 동남쪽으로 15km. 쿠스에서 동북쪽으로 10km 떨어진 나일 강 동안에 위치한다. 현재는 인구 10만 이하의 소도시지만, 과거에는 상이집트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다. 주변 동부 사막에 위치한 금과 규암 광산으로 향하는 거점이었고, 또 상이집트 최동단의 도시로써 홍해 연안 지역과 교류하며 번영하였다. 현재도 동쪽으로 140km 떨어진 쿠세이르 항과 와디 함마마트에 놓인 도로로 연결되어 있다.2. 역사
와디 함마마트와 키프트 (콥토스)
고대 이집트 시기 게브투로 불렸고 행정, 상업, 종교의 중심지였다. 상이집트 제5 주인 하라위의 주도로써 쿠스 역시 그 관할이었다. 당시 타우와 샤쉬리트 (베레니케) 항구로 향하는 두 길의 시작점으로 상이집트와 홍해 연안을 이어주는 유일한 도시였다. 다시 두 항구를 통해 남부 아라비아, 동아프리카, 인도와 교역하였기에 게브투에는 동서의 물산이 집결했던 것이다. 또한 중왕국 시대부터 게브투는 북쪽의 아크밈과 함께 풍요의 신이자 동부 사막을 관장하는 밈 숭배의 중심지였다. 다만 점차 남쪽의 테베에 밀려 쇠퇴했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들어 홍해 무역이 재차 중요해지며 부흥하였고, 콥토스 (Κόπτος)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 제국에 들어 아우구스투스는 콥토스를 확장하였다.
그러다 2세기 들어 동쪽 블레미스 유목민들의 위협이 일자 제3 키레나이카 군단의 일부가 주둔하였다. 그러던 292년 주민들은 로마 지배에 반기를 들었고,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보낸 토벌군은 긴 포위 끝에 콥토스를 함락하였다. 공방전 도중 기존 도시는 크게 파괴되었고, 이후 로마식 요새 도시로 재건되어 수비대가 배치되었다. 6세기 들어 콥토스는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기리며 유스티니아노폴리스로 개칭되었다. 이슬람 정복 후 현재의 키프트로 불리게 된 도시는 쿠스와 함께 상이집트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들이 쉬아 계열 건물을 세우기도 하였다. 1176년 콥트 정교회 신자들이 살라흐 앗 딘의 부재를 틈타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의 동생 알 아딜은 3천의 콥트교도를 도시 주변 나무에 목메달며 강경 진압하였다. 다만 이후로도 일대의 수도원들은 건재하는 등 기독교 신앙 자체는 이어졌다.
아이유브 왕조에 들어 키프트 출신의 카디 (법관)들이 대를 이어 최고법관에 오르며 명성을 떨치기도 하였고, 그들은 고향 지명을 따서 알 키프티로 불렸다. 13세기의 지리가 야쿠트 알 하마위는 키프트 일대의 과수원과 인도양 교역에 대해 저술하였다. 다만 맘루크 왕조 들어 기독교 탄압이 심화되며 상이집트는 전반적으로 쇠퇴하였다, 그리고 16세기 오스만 제국이 기존 시가지를 허물어버린 후 키프트는 완전히 쇠퇴하여 20세기 초엽 인구는 9천에 불과하였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시에는 맘루크 왕공 이브라힘 파샤를 추격하던 프랑스군이 도시 부근에서 맘루크 군을 격파하였다. 그후 19세기 후반 이집트학이 유행하며 프랑스의 고고학 탐사대가 조사를 벌이고 1913년에는 명목상의 주교구가 부활하는 등 서양과의 교류가 있었다.
3. 참고
상이집트의 주요 도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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