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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바스 왕조 시기 성벽 유적
로마 시대 극장 유적
1. 개요
이집트 아랍어 : الفرما (엘-파라마)영어, 라틴어 : Pelusium
그리스어 ; Πηλούσιον
콥트어 : Ⲡⲉⲣⲉⲙⲟⲩⲛ
이집트 북동부의 유적. 포트사이드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해안 평지에 위치한다. 나일강 델타의 녹지와 시나이 반도의 사막의 경계에 위치하며, 중세 시기까지 이집트의 관문으로 여겨져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고대 이집트 시기부터 로마 제국과 압바스 왕조, 파티마 왕조 시기까지 군사적으로 중요시 되던 펠루시움 (알-파라마)는 1118년 보두앵 1세의 십자군에게 파괴되어 폐허로 남았다. 현재 펠루시움은 텔 엘-파르마로 불리며, 중세 시대 성벽과 고대 극장 및 성당 유적이 남아있다.
2. 역사
동로마 시기 성당 유적
짧은 간격으로 성탑이 있는 성벽 유구
고대 이집트어로 아문 신전이란 뜻인 페르 아문 혹은 사이엔으로 불렸다. 다른 설로는 라틴어로 '진흙 하구'란 뜻인 오스티움 펠루시아쿰 (Ostium Pelusiacum)에서 유래 했다고도 한다. 이집트의 관문 요새로써 펠루시움은 이집트 신왕국 이후 이집트를 침공한 아시아 방면 세력들과의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우선 기원전 720년경 아시리아 제국의 군주 센나케립이 침공군과 함께 나타났으나 밤중에 쥐떼가 활끈과 방패 줄을 갉아먹는 바람에 다음날 이집트 군에게 대패했다. 기원전 525년에는 아케메네스 제국의 샤한샤 캄비세스 2세가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 펠루시움을 포위했는데, 어느 날 페르시아 군이 이집트에서 신성시 되는 고양이를 방패에 얹고 공격하자 수비대가 제대로 반격하지 못하며 함락되었다. 이후 파라오 프삼티크 3세도 도주 중 사로잡히며 이집트는 페르시아에게 정복되었다.
기원전 404년, 이집트는 대봉기로 페르시아 지배에서 벗어났다. 이에 기원전 373년, 아케메네스 제국의 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는 20만에 달하는 대군을 모아 육상과 해상 양면으로 이집트를 침공했다. 하지만 육군은 넥타네보 1세가 수비를 맡은 펠루시움에서 저지되었고, 이에 해군은 나일 강으로 들어갔으나 범람을 예상하지 못해 밀려나며 멘데스 전투에서 패했다. 기원전 340년, 제국 내부를 정비한 샤한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는 30만 대군을 모아 펠루시움을 공격했다. 펠루시움에 배치된 필로포론 휘하의 5천 그리스 용병대는 페르시아측 테베 출신 장군 라크라테스의 성급한 공격을 격퇴하며 버텼지만, 파라오 넥타네보 2세가 섣불리 공세에 나섰다 패배한 후 도시는 협상을 거쳐 항복했고 수비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다만 불과 7년 후, 펠루시움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에 항복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펠루시움에 '왕의 동반자' 칭호를 받은 장군들 중 하나를 배치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이던 기원전 173년, 시리아 전쟁의 일환으로 이집트를 침공한 셀레우코스 왕조의 바실레오스 안티오코스 4세는 펠루시움 성벽 앞에서 프톨레마이오스 6세를 격파하고 붙잡아 폐위한 후 이집트 대부분을 장악했다. 다만 로마의 개입을 우려한 안티오코스 4세는 곧 철수했고, 펠루시움은 프톨레마이오스 령으로 회복되었다. 기원전 55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권력 다툼에 이용하기 위해 불러들인 로마 장군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과 펠루시움을 점령했고, 주민들을 학살하려 했지만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제지했다. 기원전 48년에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패배한 폼페이우스가 펠루시움에 상륙했다가 옛 부하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에게 암살되었다.
그후 당도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대립에 있어 후자 편을 들었다가 전자가 반발하면서 벌어진 알렉산드리아 전쟁에 휘말려 수세에 몰렸다. 이에 카이사르는 소아시아의 측근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에게 지원을 구했고, 이에 후자는 페르가몬의 미트리다테스를 파견했다. 기원전 47년 미트리다테스는 펠루시움을 기습 공격해 함락한 후 카이사르를 구원했고, 클레오파트라 7세가 집권했다. 카이사르 사후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안토니우스는 뒤이어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에서 기원전 30년의 악티움 해전에서 패했고, 옥타비아누스가 상륙하자 펠루시움의 지휘관 셀레우코스는 항복했다. 이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자살하면서 펠루시움을 포함한 이집트는 로마 제국령이 되었다.
2차 유대 반란기인 115-17년, 알렉산드리아의 유대 반군이 펠루시움 인근 수로들을 장악했다가 토벌되었다. 동로마 제국기인 5세기 전반에는 초기 기독교 성인 펠루시움의 이시도루스가 이곳에서 수도 생활을 했다. 그러던 501년, 사산 제국의 샤한샤 카바드 1세의 침공으로 펠루시움은 큰 피해를 입었다. 541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이 펠루시움에서 처음 기록되어 지중해권 각지로 퍼졌다. 639년 12월에는 아므르 이븐 알 아스가 이끄는 이슬람 제국군이 펠루시움을 포위, 한달의 공성전 끝에 항복시켰다. 이슬람 지배 하에서 군사적 요충지이면서도 안정을 누리던 도시는 749년, 우마이야 왕조에 반기를 든 바쉬무르 콥트교 반군에게 함락되어 약탈되었다.
9세기 압바스 왕조 시기 펠루시움 (알 파라마)은 이집트의 주요 무역항 중 하나였고, 라다님 유대인 상인들이 동로마 및 서부 지중해권과의 교역을 주도했다. 파티마 왕조 시기에도 번영하던 도시는 1118년 3월,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 보두앵 1세가 이끄는 십자군의 공격을 받았다. (십자군의 이집트 원정) 곧 수비대가 도주하며 펠루시움은 점령되었고, 보두앵 1세는 도시를 초토화시켰다. 다만 그는 현지 물고기를 과하게 먹다가 식중독에 걸려 회군하던 도중 병사했다. 이후 파티마 조는 십자군의 침공에 대비하며 해안 항구 도시들을 대부분 포기했고, 따라서 펠루시움은 재건되지 못한 채로 폐허로 남았다. 다만 사막의 건조한 기후 덕에 성벽은 비교적 잘 보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