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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 강변에서 바라본 시가지 풍경
1. 개요
아랍어 رشيد콥트어 ⲣⲁϣⲓⲧ (라시트)
영어 Rosetta
이집트 북부 베헤이라 주의 도시. 이스칸다리야에서 동쪽으로 50km 떨어진 나일 강 하구에 위치해 있다.[1] 1799년 나폴레옹의 원정 당시 로제타 석을 발견한 곳으로 유명하다. 로제타는 본래 지명인 라쉬드를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로 '작은 장미'를 뜻하고 발음이 유사한 로제트와 연결시키며 탄생한 표기이다. 9세기에 세워진 도시는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알렉산드리아가 쇠퇴하자 그 반사 이익으로 성장하였다.
다만 19세기 알렉산드리아의 부흥으로 무역 도시로의 명성은 잃었다. 시내 북부에 기차 역이 있고, 철도는 도심을 서쪽으로 두르고 있다. 이스칸다리아행 열차만이 정차하나 전 역인 부사일리에서 환승하여 다만후르, 카이로 방면으로 갈 수 있다. 1807년 라쉬드는 영국군의 두 차례에 걸친 공격을 모두 격퇴하며 명성을 얻었다. 영국군이 휴전 협정에 서명한 9월 19일은 베헤이라 주의 국경일로 지정되어 기념된다.[2]
2. 역사
시내의 로제타 석 조형물
델타 지역 대부분의 도시들과 달리 라쉬드는 기존 고대 도시가 아닌 이슬람 정복 후에 건설되었다. 749년 이집트의 콥트 기독교도 봉기인 바쉬무르 반란에 맞서기 위한 우마이야 왕조측 진압군의 거점이 된 것이 그 기원이다. 8-9세기 이집트에서는 기독교도 무장세력이 불루루스 호수 일대를 중심으로 나일 강과 다미에타 지류 사이의 델타 북부 지대를 거점으로 지속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제어하기 위해 건설된 라쉬드는 비록 반군에게 습격당하였지만 반란 자체는 832년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마문에 의해 가혹히 진압되었다.
그후 850년대 들어 칼리파 알 무타와킬이 옛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 마을 볼비티네에 성채를 건설하게 하며 본격적으로 도시가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이븐 하칼, 알 무쉬타크 등의 아랍 작가들은 농산물과 수산물 시장이 열리고 종려나무가 즐비한 깔끔한 도시로 묘사하였다. 다만
2.1. vs 십자군
13-16세기 꾸준히 보강된 라쉬드 (줄리앙) 성채
10세기 말 ~ 11세기 초 파티마 왕조의 번영기에 라쉬드는 알렉산드리아, 다미에타와 함께 무역도시로 성장하였고 재차 도시화되었다. 1013년 알 하킴의 반외세 정책으로 주춤했던 교역은 아이유브 왕조기 이탈리아 상인들의 알렉산드리아 왕래를 장려하며 다시 번영하였다. 이로써 크게 번영하게 된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로 방면으로 향하는 교통로가 남쪽의 푸와를 거치며 일대의 상업 중심지도 그곳으로 옮겨졌고, 이러한 상황이 맘루크 왕조 때까지 이어지며 라쉬드는 쇠락하였다. 13세기 역사가 아불 피다는 도시가 자신의 입보다 작다며 비꼴 정도였다.
십자군 전쟁기에 프랑스 인들은 이곳을 '렉시'로 불렀고, 1249년 7차 십자군 당시 일시 점령하였다. 십자군에게 파괴된 다미에타를 재건하던 와중에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는 1262년 라쉬드 서북쪽 3km 지점 나일 하구에 성채를 세우고 외적의 침입을 감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1426년 술탄 바르스바이의 키프로스를 침공 시에 맘루크 함대는 나일 강을 따라 라쉬드에 집결한 후 출정하였다. 대십자군 기지가 된 것에 대한 보복인지 이후 라쉬드는 로도스 기사단 함대의 습격에 시달렸다. 따라서 술탄 자크마크는 라쉬드 성채에 다수의 수비대를 배치하였다.
1479년 술탄 카이트베이는 성채를 보강하였고, 시가지에도 성벽을 쌓았다. 이후 라쉬드 성채는 알렉산드리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카이트베이 요새로 불렸다. 1516년에는 술탄 깐수 알 구리가 재차 보강하고 외벽을 쌓았다. 1799년 프랑스 군의 점령 당시 동행한 한 학자는 성벽의 돌에서 여전히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발견할 수 있다고 기록하였다. 아부 키르 전투 8일 전인 1799년 7월 17일, 프랑스 군은 방치된 라쉬드 성채를 점령하였다. 보수 도중 피에르 부샤르 중위[3]가 15세기 맘루크 조의 축성 당시 성돌로 쓰인 로제타 석을 발견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보수를 마친 후 성채에는 나폴레옹의 부하 토마스 줄리앙의 이름이 붙여졌다. 2년 후 성채는 영국-오스만 연합군의 짧은 포위와 포격 후 탈환되었다.
2.2. 라쉬드 전투 (1807년)
시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1587년 오스만 시기 맘루크가 세운 자글룰 사원. 244개의 기둥이 있고, 1807년 저항의 중심이었다. |
잘 알려져 있듯이 프랑스 군은 1799년 이집트를 점령한 후 1801년 오스만-영국군에 패해 돌아갔다. 그럼에도 1806년 나폴레옹이 유럽의 패권을 쥐자 오스만 술탄 셀림 3세는 그와 동맹하여 러시아에 맞섰다. 이에 영국은 1807년 이집트를 침공해 오스만 조를 압박하려 하였다. 7년 전 이집트 수복을 도우며 오스만 군의 무능함을 경험한 영국군은 총독 메흐메트 알리와 맘루크 세력이 맞서던 틈에 손쉬운 점령을 예상하고 후자와 동맹한 후 6천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3월 말엽 별 저항 없이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한 영국군 사령관 알렉산더 맥켄지 프레이저는 라쉬드 주재 영국 공사의 설득에 따라 나일 강을 이용한 원활한 보급을 위해 일대의 수운을 통제하던 그곳을 점령하기로 결심, 2500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라쉬드에는 총독 알리 베이 앗 셀라니키 휘하 7백여 수비대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한편 현지 종교 지도자인 셰이크 하산 크레레는 군중을 모아 선동하고 선박을 나일 강 동안으로 옮기게 하여 결사 항전 의지를 불살랐다.
그후 4월 12일 밤 카이로에 당도한 메흐메트 알리는 영국군이 방어력이 약한 라쉬드를 다시 노릴 것이라 여기고 타부조글루 휘하 5500의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의 예상처럼 이미 4월 3일 알렉산드리아에서 파견된 4천의 영국군은 라시드 남쪽 6km 지점 나일 강변 마을인 알 함마드를 장악하고 라시드에 대한 포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4월 7일 도시를 포위한 영국군은 육지와 함상 양면에서 포격을 가하였고, 이로써 항복을 유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라시드 수비대는 항복 요구를 일축하고 12일간 포격을 견뎠다. 한편 이집트 군은 나일 강 동안에 포대를 설치하고 알 함마드의 영국군 진영을 포격하였으나 곧 격퇴되었다. 그러던 4월 20일 이집트 기병대가 우선 당도하여 알 함마드의 영국군을 기습해 승리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나일 강 동안에 주둔하던 타부조글루의 본군은 21일 새벽을 틈타 강을 도하, 영국군을 포위 섬멸하고 알 함마드를 수복하였다. 3시간 동안의 전투 끝에 알 함마드에 배치된 800여 영국군 중 맥클라우드 대위와 타를레톤 대위 등 대부분이 전사하였고, 400여 생존자들은 항복하여 이집트 군의 포로가 되었다. 충격적인 결과에 영국군 지휘관 스튜어트는 라쉬드 포위를 풀고 대포마저 포기한 채로 최대한 신속히 아부 키르의 본영을 향해 철수하였다. 영국군은 이드쿠 호수에서 반격에 성공할 때까지 라시드 주민들을 중심으로 한 현지인들의 습격에 시달렸다. 그후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한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독립 인정을 대가로 무역 정상화와 인도와의 교통로에 대한 안전 보장을 약속하며 협상을 제시하였다. 영국 정부는 비록 이집트의 독립까지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무역 재개와 알렉산드리아 주둔군 철수에 합의하였고, 9월 25일 영국군은 시칠리아로 철수하였다.
2.3. 근대 ~ 현대
라쉬드 시내 19세기 무렵 고택 |
16세기 들어 무역 도시로 부활했던 라쉬드는 1820년 마흐무디야 운하의 개통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중요성이 부상되자 다시 침체되었다. 그래도 비교적 깔끔한 시가지와 18세기 무렵 세워진 오스만식 저택들로 영국인 휴양객들이 자주 방문하며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70년대 3만에 불과했던 인구는 80년대 들어 증가히기 시작해 2020년대 7만으로 늘어났다.
3. 볼거리
- 아부 만두르 모스크
- 성 마르코 교회
- 압바시 모스크
- 자글룰 모스크
[1] 해안 자체와는 약 10여 km 떨어져 있긴 하다.[2] 옆동네인 다미에타에서 십자군이 물러난 날을 기념하는 것과 비슷하게 외세 격퇴를 기리는 것[3] 그 역시 로제타 석을 그대로 성채의 기단으로 활용하려 했다고.. 거기서 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