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랑카 내전 | ||
기간 | ||
1983년 7월 23일 ~ 2009년 5월 19일 | ||
장소 | ||
스리랑카 전역 | ||
교전국 및 교전 세력 | 스리랑카 민주 사회주의 공화국 인도 평화유지군(1987~1990) |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 |
지휘관 | 주니우스 리차드 자야와르데네(2대 대통령) 라나싱헤 프레마다사†(3대 대통령)[1] 딩기리 반다 위제퉁가(4대 대통령) 찬드리카 쿠마라퉁가(5대 대통령)[2] 마힌다 라자팍사(6대 대통령)[3] 사라스 폰세카(18대 육군참모총장)[4] 라지브 간디†(6대 총리)[5] |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창설자/1대 지도자) 셀바라사 파트마나탄(2대 지도자) 틸라이얌팔람 시바네산†(해군사령관)[6] 샨무갈린감 시바샨카르†[7] 발라세가람 칸디아르†[8] 바이틸링검 소르날링엄†(공군사령관)[9] 고팔라스와미 마헨드라라자[10] |
지원국 |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중국 파키스탄 이란 영국 호주 유럽 연합 북한 | 소련(1983~1991) 북한[11] |
결과 | ||
LTTE의 항복, 스리랑카군의 승리 | ||
병력 | 스리랑카군 15만 9천 명[12] 인도 평화유지군 10만 명 | 3만 명[13] |
피해 | 스리랑카군 28,708명 전사 111,655명 부상 민간인 10만 명 이상 사망 민간인 7만 명 이상 실종 인도 평화유지군 1,165명 전사 6,009명 부상 | 27,000명 전사 11,644명 포로 |
영향 | ||
라자팍사 가문의 장기집권 스리랑카 경제 파탄 2022년 스리랑카 경제위기 발생 원인 일부 제공 |
[Clearfix]
1. 개요
LTTE 반군과 교전을 벌이는 스리랑카군 | LTTE 병사들 |
1983년 7월 23일부터 2009년 5월 19일까지 스리랑카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스리랑카 정부군과 소수민족인 타밀족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 반군 사이에서 일어났다. 내전 기간이 무려 26년이나 된 관계로 스리랑카는 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오늘날까지도 내전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담으로 남아시아판 월남전이라고 부를 정도로 여파가 컸다.
2. 배경
▲ 스리랑카 지도
인도양 남단에 위치한 실론 섬은 약 2천 년 전부터 실론 섬 북동부 지방과 인도 남부 지역에서 살았던 타밀족과 기원전 540년경 인도 북부에서 건너온 아리안족 계통 민족과 스리랑카 원주민인 베다인의 혼혈인 싱할라족들이 살고 있었다. 실론 섬의 타밀족들은 인도의 힌두교를 믿으며 불교를 신봉하는 싱할라족들에게 저항하기도 했었으나 이들은 불안정하지만 평화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실론 섬은 1815년 대영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싱할라족은 영국에 격렬하게 저항했고[14] 싱할라족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한 영국은 그 대신 타밀족의 지지를 끌어냈다. 이후 영국은 싱할라족과 타밀족끼리 대립과 분열을 부채질하여 실론 섬을 지배하였다. 거기다가 영국은 인도 남부 지역에서 살고 있던 타밀족들을 차밭에 쓸 노동 인력으로 끌어와 이주시켜 싱할라족의 분노를 더욱 부풀리기까지 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강대국들이 소유하고 있던 해외 영토와 식민지에서 탈식민주의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면서 실론 섬 역시 1948년 '실론'이라는 국호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독립 과정에서 실론의 모든 주요 권력들은 다수 싱할라족들이 장악하였고 이들은 소수 타밀족들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펼쳤다. 실론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다시피한 싱할라족들은 근현대 시대에 이주해온 타밀족들에게 시민권을 의도적으로 부여하지 않으면서 선거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줄였고, 실론 국내의 타밀족들에게 타밀어 사용을 금지하고 싱할라어 사용을 강요하는 한편, 군대와 경찰, 장관 역시 타밀족들이 차지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였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요르단 강 서안 지구과 가자 지구에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살던 마을을 파괴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세우듯이 타밀족들이 거주하는 실론 섬 북부, 동부 지역에 싱할라족들을 대거 이주시켜 타밀족 마을을 부수고 싱할라족 정착촌을 세웠다. 스리랑카 정부가 내전 발발 전에 타밀족 지역 내에 세운 싱할라족 정착촌들은 내전이 발발하자마자 싱할라족 주민 구성원들 대부분이 분노한 타밀족들의 보복에 마을이 파괴당하고 대거 추방, 학살당하면서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교육 정책에서도 인구 비례를 적용해 타밀족들을 억눌렀다.
이러한 싱할라족의 타밀족 억압과 차별에 타밀족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결국 정부의 타밀 정책에 맞서고자 정당과 단체 등을 만들어 시민권 확대와 자치권 확대, 타밀족 차별 정책 폐지 등을 요구하였고 타밀족 출신 국회의원 입후보자를 주요 총선과 지방 선거 등에 내보냈다. 1960년대에는 몇차례에 걸쳐 어느 한 정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기에 몇차례 캐스팅보트를 행사하기도 했지만 통일국민당과 스리랑카 자유당을 비롯한 양당은 싱할라 민족주의와 타밀족과의 연합정부 설립사이에서 간을 보던 상황이었고, 결국 근본적인 상황은 크게 변화한게 없었기 때문에 타밀족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1972년 국호도 실론에서 싱할라어인 스리랑카(Sri Lanka)로 변경되고 스리랑카 정부의 싱할라족 중심의 정책이 더욱 더 강화되어 타밀족 억압이 더 강력해지자, 점차 스리랑카 타밀족 사회에서도 폭력적인 무력 투쟁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타밀족 독립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강경 세력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스리랑카 타밀족 사회는 평화적으로 정부와 타협하여 자치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온건 세력과, 무력으로 스리랑카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타밀족만의 타밀 민족 국가 수립을 주창하는 강경 세력으로 분열되기 시작했고, 1977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참패하고 통일국민당이 재집권하는 과정에서 타밀족의 독립을 주창하던 타밀연합해방전선이 자유당을 제치고 제1야당이 되었다. 그렇게 되자 싱할라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며 타밀족들을 죽이거나 북동부지역으로 추방시켰는데 이는 타밀족들의 원한을 더욱 강화시켰다.
프라바카란 사진. 뒤의 깃발은 타밀 엘람 깃발.
그리고 1976년 무력을 통한 타밀족 독립 국가 건설을 주창하는 벨루필라이 프라바카란(Velupillai Prabhakaran) 등 일단의 급진적 타밀족 강경 인사들이 타밀 엘람 해방 호랑이(LTTE, Liberation Tigers of Tamil Eelam)이라는 이름의 반정부 게릴라 저항 단체를 결성했다. 결성과 함께 LTTE는 인도 타밀족들의 자금 지원, 소련과 동유럽 국가 등의 무기 및 군사 고문단 등의 지원을 받으며 게릴라전과 폭탄 테러 등으로 스리랑카 정부 청사와 경찰서 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LTTE의 세력은 온건파 타밀 세력들에 비해 상당히 그 힘이 미미하였다. 애초에 시작이 민병대 비슷한 것이었으니 국가의 정규군과 비등한 화력이나 인력을 갖추는 것은 불가능했다.
3. 내전의 시작
▲ 1983년 반타밀 폭동
1983년 7월 LTTE는 스리랑카 북부 자프나 반도를 순찰하고 있던 정부군 13명을 사살하였고 이에 격분한 싱할라족은 스리랑카 전역에서 폭동을 일으켜 3,000여 명에 달하는 타밀족이 학살당했다. 당시 스리랑카의 대통령이었던 주니우스 리처드 쟈아와르데네가 이 상황을 제대로 수습하지 않자 결국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던 온건파는 힘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온건 노선을 추구했다 정치적으로 몰락했던 스리랑카의 타밀족 전직 인사들은 LTTE를 굉장히 싫어한다. 그 결과 LTTE는 급속도로 힘을 키워 스리랑카 타밀족의 주도권을 장악하였고, 수많은 타밀족 자원병들의 증가로 LTTE는 스리랑카 전역에서 대대적인 무장 봉기에 돌입하면서 결국 스리랑카는 타밀족 LTTE 반군과 싱할라족 스리랑카 정부군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군사력이나 규모에 있어서 LTTE는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열세였고 이들은 북, 동부 타밀족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전과 야간 기습전 등으로 스리랑카 정부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LTTE는 스리랑카 북, 동부의 싱할라족 정착촌을 공격하여 비무장 싱할라인들을 학살하고 정부군도 타밀족들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내전의 양상은 보복에 보복을 거듭했고 1985년과 1986년에 들어서면서 내전은 더욱 치열해졌다.
4. 인도의 개입
한편 이런 스리랑카의 종족 분쟁 상황은 스리랑카의 인접국이었던 인도에게도 큰 파급력을 일으켰다. 사실 인도 역시 인도 남부 지역에 1억 명 가까이 되는 타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 인도의 타밀족들은 북인도 중심의 중앙정부의 힌디어 공용어화 정책에 맞서 정부의 힌디어 공용어 정책을 무산시키고 타밀어를 공용어로 지정하였고 북인도 중심의 인도 정부의 정책에 매번 반기를 드는 등 인도의 타밀족 역시 북부 인도에 대한 정서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스리랑카의 내전 상황을 방치하여 스리랑카의 타밀족들이 독자적인 타밀족 독립 국가를 수립하거나 싱할라족이 지배하는 현 스리랑카 정부를 전복시킬 경우 그 영향력이 인도 타밀족에게 미쳐 분리 독립 운동을 고무시키고 나아가 다른 인도 내 종족들과 타 지역들에게까지 영향력이 닿아 인도의 국가 분열로 이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스리랑카 정부를 간접적으로 지원하였다.이러한 인도의 간접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스리랑카의 내전 상황은 더욱 격렬해졌고, 결국 내전이 장기전 태세로까지 번지자 인도 정부 내부에서도 내전 중인 스리랑카에 군대를 파병해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1987년 스리랑카 리처드 자야와르데네 대통령과 인도 라지브 간디 총리 등 스리랑카와 인도 양국 정상은 내전이 진행 중인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들의 인도군 주둔과 LTTE의 무장 해제,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을 골자로 하는 인도-스리랑카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동년 평화유지군 형태의 인도군 조직인 '인도 평화유지군(IPKF)'이 결성되었고 이들 IPKF는 인도-스리랑카 협정의 내용대로 LTTE의 무장해제와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 달성을 목표로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파병, 주둔하면서 인도는 스리랑카 내전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인도는 스리랑카에게 IPKF 인도군을 주둔시키는 대가로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에 주둔중인 스리랑카군 완전철수와 주둔권, 지역 치안권, 평시 교전권과 전시작전통제권을 인도 측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는 그런 권리를 인도에게 넘겨 줄 수 없다고 반발하였으나 인도는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고 결국 비상시 교전권과 전작권 등을 제외한 채 모든 권리들을 사실상 인도 측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 LTTE 반군을 상대로 교전을 벌이는 IPKF 인도군
그러나 스리랑카 정부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던 LTTE는 급기야 IPKF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스리랑카 내전은 IPKF와 LTTE 반군간의 전쟁으로 번졌다. 이에 IPKF는 공격헬기와 전차 등을 동원해 LTTE 반군들을 진압하려는 여러 진압 작전들을 펼치기 시작했고 LTTE는 IPKF에게 열세로 밀리기 시작했다.
▲ M16 소총으로 무장하고 전선을 둘러보는 LTTE 반군 대원.
그러나 이러한 IPKF의 진압 작전에도 불구하고 LTTE는 좀처럼 저항을 멈추려 들지 않았고 결국 이런 인도군의 스리랑카 내전의 군사적 개입은 스리랑카의 평화 정착은커녕 타밀족과 싱할라족간의 민족 분쟁만 더욱 악화시켜 버렸다. 더욱이 스리랑카에 주둔 중이었던 IPKF 병사들은 현지 주민들과 민간 여성들에 대한 성폭행과 인권 유린, 약탈, 학살 등 반인륜 범죄를 일삼으면서 결국 IPKF는 그나마 남아 있었던 현지주민들 사이에서도 인도 평화살해군, 민간인 학살군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되었다.
더욱이 스리랑카 현지 상황에 대해 잘 모르던 스리랑카 파견 인도군 장성들의 행태와 개입 초 스리랑카로부터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의 군대 주둔권과 전작권 등을 사실상 빼앗아 독점한 인도의 개입은 한계를 드러냈고 결국 주둔권을 제외한 교전권과 전작권 등을 스리랑카에게 돌려준 뒤 스리랑카군까지 끌어들여 스리랑카군과 합동으로 LTTE 반군 진압을 시도했지만 LTTE를 굴복시키는 데 실패하였다. 더욱이 끊이지 않는 LTTE의 공격으로 IPKF 역시 사상자들을 여럿 냈다.
▲ 스리랑카에서 철군하는 인도군.[15]
결국 1990년 3월 라지브 간디 총리의 뒤를 이어 인도 총리가 된 비슈와나트 싱 인도 총리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한 채 스리랑카에 주둔하던 인도군 병력을 철수시켰다.[16]
결국 1천 명에 달하는 전사자 및 2,250명이 넘는 부상자를 낸 채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인도가 스리랑카 내전에 무력 개입을 중지하자 목적을 잃어버린 IPKF는 해산되고 말았다. 그리고, 인도군을 파병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LTTE는 1991년 라지브 간디 전 인도 총리를 자폭 테러로 암살해버렸다.
5. 인도군 철수 이후
▲ 1991년에 촬영한 LTTE 반군 병사들.
그러나 인도는 철수 과정에서 인도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스리랑카 북동부 지역의 군대 주둔권과 치안권을 스리랑카 정부에게 넘기지 않은 채 급히 스리랑카에서 철수해 버렸고 결국 인도군이 떠나고 난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은 공백 상태에 빠졌다. 한편 인도가 스리랑카에서 철수하자 이에 LTTE는 공백 상태에 빠진 스리랑카 북, 동부 지역을 재빠르게 점령했고 스리랑카 정부군과 전투를 재개하면서 스리랑카는 다시금 내전이 벌어졌다. 이에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 진압 작전을 벌였고 LTTE 역시 스리랑카 정부군에 맞서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스리랑카는 정부군과 LTTE 반군 간 전투와 상호 간 학살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한편 정부군과의 내전 기간 동안 LTTE는 1987년 인도의 스리랑카 내전 개입을 결정한 라지브 간디 인도 총리를 1991년 총선거 유세차 타밀나두에 왔을때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하고 1993년에는 노동절 행사에 참석했던 라나싱헤 프레마다사 스리랑카 대통령을 자살 폭탄 테러로 암살하는가 하면 1999년에는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5대 대통령에도 자살 폭탄 테러를 감행해 중상을 입히고 여러 유력 정치 인사들을 암살하는 등 LTTE는 일개 반군 조직에서 벗어나 폭탄 테러와 암살도 서슴치 않는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로 전 세계적인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LTTE 해군인 Sea Tigers
LTTE 공군인 Air Tigers
그러던 1991년 12월 25일 LTTE에게 큰 위기가 닥쳐왔다. 1976년 결성과 더불어 LTTE에게 지원을 해 주던 소련이 붕괴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TTE는 인도 타밀족들의 자금 지원 하에 어렵게나마 세력을 유지하였고 심지어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해외에 거주하는 타밀족 이민자들의 자금 원조도 받아 내었다. 인도 타밀족들과 기타 해외 거주 타밀족 이민자들의 지속적인 자금 지원으로 LTTE는 정부군과의 군사력 전력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했다.
심지어는 단순한 반정부 게릴라 저항 단체 수준에서 벗어나 육군, 공군, 해군, 정규군, 민병대까지 갖춘 어마어마한 규모의 무장 단체로 재탄생되었다. 그러다보니 LTTE는 세계 역사상 가장 강한 무장 단체로 등록되기까지 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스리랑카 해군과 LTTE 해군 고속정 간 해전(!)을 벌여 스리랑카 해군 초계함이 격침당하는 일까지 있었다. 특히 LTTE의 해군인 "Sea Tigers"는 스리랑카 해군과의 해전에서 스리랑카 해군 전력의 3분의 1을 격침시켰고, 공군인 "Air Tigers"의 경비행기, 무인기, 전투 헬기는 스리랑카 공군 기지를 공습하여 큰 피해를 주어 스리랑카 전체를 충공깽에 빠뜨릴 정도였다.
한편 LTTE가 폭탄 테러, 게릴라전, 제한적인 정규전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할 정도로 정부군을 위협하자 다급해진 스리랑카 정부는 상당수 국가 예산을 전쟁 비용으로 들여가며 미국, 이스라엘, 러시아, 우크라이나, 아르헨티나, 중국, 파키스탄 등 수많은 나라에서 무기들을 대거 도입해 정부군 전력 강화에 나섰다. 한편 LTTE도 이에 뒤질세라 스리랑카 북, 동부 반군 점령지에서 어린 아이들을 소년병으로 강제 징집시켜 부족한 반군 병력을 채웠고 점령지 타밀족 주민들에게도 치밀한 세뇌 교육과 총기 제공 등으로 이들을 반군의 구성원으로 확보하는 등 군사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며 정부군에게 항거했다. 내전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기에 들어서면서 격렬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스리랑카의 내전을 해결하고자 LTTE 반군과 스리랑카 정부 간 평화 협상도 진행되었으나 대부분 입장 차이로 협상은 결렬을 반복했다.
하지만 결렬에 결렬을 반복하던 터에 기나긴 전쟁에 LTTE 반군은 극심하게 과격해져 이젠 중립을 지키던 기독교나 이슬람 교인들에게까지 공격을 퍼붓는 사태가 터지면서 전세가 역전이 되고 만다. LTTE 반군은 1998년 무슬림이 다수 살고 있는 바티칼로아 주가 원래 타밀족 땅이라고 공격하여 비무장 무슬림 116명을 학살해버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연이어 기독교인에게도 테러를 가하면서 여론적으로 증오를 받고 고립되게 된다. 당연히 아랍권을 비롯한 이슬람 나라들이나 해외 기독교계에서도 종교탄압 테러리스트라고 비난하기에 이르렀다. 덕분에 중립을 지키던 이들도 살기위해서라도 스리랑카군을 돕거나 이들에게 공격받거나 학살당한 피해자 유족들은 분노해 아예 스리랑카군으로 입대하여 싸우기에 이른다. 즉, 스스로 화를 자초한 셈이다.
나아가 내전을 반대하는 동족 타밀인까지 마구 죽이거나 테러를 가하기 시작한다. 즉 아군 아니면 무조건 적이라는 극단적 논리를 보이고 만 것. 이러한 타밀 반군에 대하여 같은 타밀족이지만 테러범이라고 비난하던 타밀족 국회의원인 더글라스 데바난다까지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데바난다는 위에 서술한 1983년 타밀인 학살에 대한 엄중한 조사 및 처벌을 주장하며 스리랑카 측도 이 내전과 테러에 문제가 있다고 중립적으로 대하던 사람이었다. 테러를 당한 데바난다는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이 일 이후, 노골적으로 LTTE을 증오하여 강경파가 되었고 스리랑카군이 벌이는 맹공세에 지지하는 의견으로 돌아섰다.
관련 문서: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 습격 사건
그래도, 이런 어려움 속에서 2001년 7월, LTTE는 콜롬보 국제공항을 습격하여 국영 항공기 4대를 불태우기에 이른다. 다행히 사망자는 없었지만 이 일로 스리랑카 최대 국제공항까지 이런 게 드러나 관광객이 뚝 줄어든 건 당연했다. 반대로 스리랑카 여론은 최대 국제공항까지 참 잘도 쉽게 뚫린다고 신나게 욕하면서 분개한 정부군은 LTTE를 가만두지 않겠다며 반격한다.
이렇게 내전이 극렬해지면서도 스리랑카 정부와 LTTE 반군 간 평화협상은 2002년 노르웨이의 중재 하에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LTTE는 타밀족의 피해가 막심하다보니 정부와의 협상 과정에서 타밀족 분리 독립 입장을 포기하겠다는 입장을 내비쳤고 동시에 반군의 무장 해제와 제한적인 자치권이라도 받아들이겠다며 결성 초기 내걸었던 분리 독립 노선을 포기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LTTE의 무장 해제와 스리랑카 국내 타밀족 자치 정부 수립 등을 골자로 하는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내전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 등 외부 국가들의 중재 하에 휴전 협정이 맺어졌음에도 불구하고 LTTE는 휴전 협정의 내용대로 무장 해제를 준수하지 않았다. 거기다 스리랑카 정부 역시 LTTE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휴전에 합의하면서 약속했던 타밀족 자치 정부 수립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거기다 휴전 와중에도 정부군과 LTTE는 서로를 꺾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였고 가끔씩 정부군과 LTTE 반군끼리 총격전이 벌어지는 등 내전이 재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6. 길었던 전쟁의 종식
정부군과 반군의 불안정한 대치 상황은 LTTE가 정치적 자살골을 몇 차례나 넣으면서 정부군에 유리하게 기울었다. 시작은 2004년 3월 비나야카무르티 무랄리타란(Vinayagamoorthy Muralitharan)[17]의 이탈이었다. 당시 LTTE 반군 대령으로서 동부 전선을 지휘하던 그는 6천명이 넘는 휘하 병력을 이끌고 정부군과 협상에 나섰는데, 총사령관이였던 프라바카란은 이러한 정부군과의 협상을 허락, 승인하지 않고 무랄리타란 부대를 공격했다.[18] 결국 총사령관의 공격에 분노한 무랄리타란은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항복하여 LTTE에 관한 주요 정보들을 모두 제공해버렸다. 이 일로 2004년부터 LTTE 요충지에 대한 정보가 상세히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넘어가면서 LTTE는 전선에서 큰 타격을 받고 만다.한편, 2004년 12월 인도양 일대를 강타한 2004년 남아시아 대지진은 스리랑카에도 큰 피해를 입혔는데, 동부 해안지대가 거점인 LTTE 역시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2005년 12월 스리랑카 대통령 선거에서 강경파인 야당 후보 마힌다 라자팍사가 온건파인 여당 후보 라닐 위크레메싱게를 상대로 신승을 거두었다. 여기에서도 LTTE는 자살골을 하나 더 넣었는데, 자기 점령지의 투표 자체를 거부하여 라자팍사가 근소한 차이로 승리를 거두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19] 라자팍사는 LTTE 무력 진압을 통한 내전 종식을 공약으로 내걸었던 사람이었고 대선 이후 새로 들어선 라자팍사 정부와 LTTE 반군간의 갈등이 격화되면서 불안한 평화는 위기로 치달았다. 이 상황에서 LTTE는 수차례 자살폭탄테러를 저질러 스리랑카군의 요인을 암살하거나 부상입히는 마지막 자살골을 넣었다. 이것은 스리랑카 정부 내 강경파의 입지를 강화시켰고, 반대급부로 온건파의 입지를 더욱 약화시켰다.
라사팍사 정부는 공약대로 이듬해 2006년 7월 자살폭탄테러를 이유로 LTTE를 다시 공격하여 내전이 재발했다. 더불어 스리랑카는 외교전으로도 나서서 미국을 주축으로 한 나라들이 타밀족의 자금력을 막고자 금융을 동결시켜 이들에게 큰 타격을 안겨 줬다. 2007년 스리랑카 정부군은 LTTE가 점령한 반군 점령지를 하나씩 무력으로 뺏어 점령해 나가는 전술을 사용하여 LTTE 세력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 LTTE는 스리랑카 북부와 동부 지역에 구축해 왔던 점령 지역들을 하나둘씩 잃어버렸다. 결국 LTTE는 동부 지역들 대부분을 상실했고 2008년 라자팍사 정부가 2002년 체결되었던 LTTE와의 휴전 협정을 파기하면서 분쟁은 더욱 심각해졌다.
2007년 봄 대통령 라자팍사는 이전에 정부군에 항복했던 무랄리타란을 각료급인 국민화해부 장관으로 임명하여 LTTE 와해 공작에 나섰다. 2008년 5월에는 한해 전 LTTE에 공세를 펼쳐 빼앗은 동부 지역의 행정책임자로 무랄리타란을 임명했다. 무랄리타란은 지금도 정부 요직에서 잘 지내며 그를 비롯해 항복한 타밀 반군 측 다수는 스리랑카군 정규군으로 임용되어 장교가 되어 LTTE와 싸웠다. 게다가 무랄리타란의 이탈은 LTTE의 지도부를 분열시켰다.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프라바카란은 조직을 이탈하려는 움직임에 대해 암살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잔혹하게 대응해왔는데, 무랄리타란이 스리랑카 쪽으로 넘어가 권위에 큰 손상을 입었다. 무랄리타란의 이탈을 계기로 내부 분열도 터지면서 여러 세력으로 나누어져 서로 싸우고 더 나아가 LTTE 반군 병사들과 지휘관들이 반군 점령지와 전선에서 탈영하거나 스리랑카 정부군에 속속 항복, 귀순하며 스리랑카 정부군에 합세해 LTTE를 배신하기까지 했다.
▲ 2000년대 내전 말기 LTTE 반군의 점령지 상실. 짙은 녹색으로 칠해진 곳이 내전 당시 LTTE 반군이 점령, 통치했던 지역이다.
2008년 말 스리랑카 정부군은 대대적인 LTTE 토벌 공세에 돌입하였고 2009년 1월 2일 LTTE의 최대 거점지인 북부 킬리노치치를 공격하면서 내전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그리고 동년 1월 25일과 2월에는 물라이티부와 LTTE의 지휘본부가 있었던 중요 지하 벙커들까지 정부군에게 함락되면서 LTTE는 패색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 킬리노치치와 물라이티부 등 상당수의 거점을 빼앗기게 된 LTTE 측은 라자팍사 대통령에게 휴전 협상을 제안했지만 라자팍사 대통령은 LTTE의 이러한 협상 제안을 거부했고 오히려 LTTE가 점령하고 있는 스리랑카 북부 지역에 대해 전투기 공습과 무제한 포격 등으로 반군 진압을 더욱 밀어붙였다.
휴전 협상 제안이 거부되자, 정부군의 강력한 공세 하에서도 LTTE는 남아 있는 북부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진지 구축과 같은 방어전 등으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전세는 LTTE가 뒤집을 수 없을 정도로 정부군에게 유리해져 있었고, LTTE는 스리랑카 북부 지역 점령지 상당수를 빼앗기고 좁은 해안가 지역으로 내몰려 패색이 짙어졌다.
거기에 정부군은 이스라엘의 협조로 위성 기술을 동원해 LTTE 간부들의 전화나 무전을 도청해 하나하나 찾아내어 싸그리 죽이기 시작한다. 팔레스타인 간부들을 이렇게 죽이던 이스라엘이니 철저하게 정보를 찾아냈다. 일례로 2008년 정부군 폭격으로 온 식구와 같이 몰살당한 통칭 찰스 대령[20]이 있었다. 그의 본명은 샨무르간나탄 라비상키르. 20년 넘게 LTTE 육군 부대 지휘관으로 이름을 날리던 그도 위성 도청으로 위치가 파악되어 스리랑카군이 번개같이 공습해 죽였다. 남은 건 팔과 몇몇 살점 뿐이었다고…
정보조작, 심리전 전문이던 발라세가람 칸디아르, 일명 발라지 대령 역시 찰스가 죽은 지 사흘 뒤에 정보가 노출되었다. 스리랑카 특수부대는 밤중에 기습 작전을 벌여 발라지 대령은 45발이 넘는 총알을 온 몸으로 맞아 사살되었다. 함께 있던 아내도 20발이 넘는 총알을 맞고 죽었으며 12살난 아들도 같이 사살되었다. 집에는 5명 경호원 겸 부하들이 있었으나 이들은 고작 4발밖에 쏘지 못했으며 정부군 특수부대원 1명만 경상을 입었고, 이들도 모두 사살되었다.
샨무갈린람 시바샨키르, 일명 포투 암만(타밀어로 암만은 아저씨, 삼촌이라는 뜻)은 지장으로서 LTTE에서 존경받았던 육군 지휘관이었다. 포투 암만은 스리랑카를 탈출한 뒤 프라바카란과 인도 타밀나두 주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지만, 2009년 5월 18일 스리랑카군에게 위치가 들켜 차에 탄 채로 온 식구와 같이 사살당했다. 프라바카란이 죽기 2시간 전이었다.
그리고 몇 척 안되는 해경 초계정을 빼앗아 조직한 씨 타이거스를 이끌며 압도적인 스리랑카 해군을 상대로 놀라운 전과를 거두고 바다를 통한 보급로를 장악하는 해상전 담당인 틸라이얌팔람 시바네산, 통칭 수사이 대령도 2009년 5월, 차량에 탄 채 스리랑카군 특수부대에게 50발이 넘는 총알을 맞고 사살당했다.
이렇듯이 고위 간부들이 하나하나 위치가 들켜 제거당하고 내전이 LTTE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프라바카란 LTTE 총사령관은 인도 남부 타밀나두 주로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려는 계획을 세웠고 동년 5월 18일 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 인도로 탈출하려 했으나 이 정보를 사전에 알고 대기하던 스리랑카군 전투기의 공습을 받아 결국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그의 시체는 누군지 알아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최대한 비켜나가도록 공습을 가했는데,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수건으로 이마에 크게 낸 상처와 뇌수가 터져나온 걸 가렸다.) 폭격에 맞았지만 시체는 머리와 이마(파편이 이마를 뚫어 즉사)를 빼고 온전했다. 이를 두고 가짜라고 소리가 나왔을 정도며, 그래도 얼굴이나 몸매에서 확실히 그임이 드러났다. 반대로 주변 경호원이나 부하들은 폭사당해 그야말로 시체를 알아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 뒤를 이은 셀바라사 파트마나탄이 '그는 아직 살아 있다'며 부정했고,
이렇게 살아있다고 주장하는 사진도 나왔으나 이 사진은 합성으로 드러났다.
이후 죽은 프라바카란의 시신이 스리랑카군에 의해 공개되면서 LTTE는 완전히 붕괴하였다. 파트마나탄이 남은 잔당을 이끌었지만 모든 게 허물어진 상황에서 소규모의 잔당을 이끌어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7월 22일 무장 해제 및 패배를 선언하고 해산했다. 지금도 유튜브에선 일부 타밀인들이 그가 살아있다고 외치지만 15년도 넘는 세월 속에 살아있다는 정보도 없고 타밀 저항세력도 와해된 상황에서 헛소리로 무시당한다.
7. 내전 종식 후
파트마나탄은 간신히 해외로 달아났지만 결국 2009년 8월 7일 말레이시아에서 체포되어 말레이시아 정부에 의해 스리랑카로 인도됐다. 이리하여 1983년 싱할라족들의 타밀족 학살로 시작되어 26년 가까이 이어진 스리랑카 내전은 약 10만 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스리랑카 정부군의 승리로 종료되었다.내전은 LTTE의 패배로 종료되었으나 스리랑카 정부는 내전 종결 이후 LTTE 인사들에 유화적이었다. 예를 들면 LTTE의 수장인 파트마나탄은 수감되었다가 2012년 혹은 그 이전 시점에 풀려난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 그는 무력 저항 활동을 완전히 포기하고, 타밀족 주요 거주지인 북동부에서 NERDO(North-East Rehabilitation and Development Organization)를 설립해 타밀족 교육과 지역 재건에 힘쓰고 있다. 관련 인터뷰
비나야카무르티 무랄리타란도 2004년 당시 투항한 그는 영국으로 압송되어 거기서 재판받고 복역했으나 꼴랑 9달 복역하고 풀려나 스리랑카 정치인이 되었다. 그가 재판받은 이유는 타밀 반군 대령이라서가 아니라 1993년 스리랑카 경찰관 포로 113명 학살이라든지 여러 학살 논란이 있기 때문인데, 본인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는 민족화해부 장관을 역임했고 2020년 6월 19일 국회의원 선거에 나와 연설을 하다가
코로나로 스리랑카에서 100여명 죽었지만 저는 화끈합니다. 전쟁 와중에 2천명이 넘게 죽였죠!
라는 헛소리를 하는 통에 스리랑카 내에서 비난을 받자 결국 함부로 말을 막했다고 꼬리내리며 사과 성명을 해야했다. 이 여파인지 결국 낙선했다.그 외에도 더글러스 데바난다는 2019년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내전의 종결이 싱할라족의 타밀족에 대한 강제적인 억압을 통해 이뤄진 것인데다 본질적인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고 스리랑카의 현 정부가 이를 개선할 생각도 전혀 없다. 물론 스리랑카 정부도 오랜 내전으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은 만큼, 타밀족에 대한 회유책도 늘리고 이들 지역에 생활기반 시설도 조금씩 투자하면서 거주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정부 방침에 따르는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더불어 타밀족도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어 친 스리랑카파도 세력이 늘었고 이들은 스리랑카 정부 요직에 등용되며 이들이 타밀 거주 지역을 맡는 게 늘어나고 있다.
내전으로 인하여 스리랑카에는 관광객도 줄어들었다. 전쟁이 한창이던 2000년 초반 KBS에서 스리랑카 바닷가를 취재했는데 벨기에에서 온 백인 관광객이나 겨우 몇몇 피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 벨기에 중년 남성은 인터뷰에서 '자신은 피서 때마다 여길 10년 넘게 왔음에도 총소리 한번 듣지 못한 평화로운 곳이라고 했는데 정작 벨기에에서도 내가 여기로 피서 온다면 사람들은 스리랑카는 전쟁이 한창이라 위험하지 않냐 하는 소리가 먼저 나온다.'고 안타까워했다. 그 지역은 타밀족이 거의 없어서 평화로운 곳임에도 외국에서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았기에 현지 싱할라인들은 인터뷰에서 타밀족을 욕하면서 분노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전으로 인한 경제적인 타격을 받았으며 당연히 스리랑카 다수 서민들 삶은 어려워졌다. 게다가 스리랑카 정부가 오랜 전쟁으로 전쟁세를 특별히 받으면서 스리랑카 다수 여론이 갈등을 빚으면서 정치적 갈등도 빚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타밀족에 대한 차별이 내전의 원인이었음에도 오히려 내전으로 인해 타밀족에 대한 증오 여론은 더 커지고 차별도 더 심해졌는데, 전쟁이 한창일 때 스리랑카 전역에서 타밀족에 대한 차별과 구타가 만연했고 일부에서 학살도 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스리랑카 군인들이 내전이 끝나기 직전 타밀족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주장이 영국 채널4의 리포트에서 제기됐다. #
그러나 지금은 강대국들에 의하여 이들이 테러 분자로 낙인찍히면서 그런 학살도 죄다 잊히고 있다. 스리랑카를 찾아가서 취재한 정문태 한겨레 기자에게 타밀족들은 우리만 모든 비난을 다 받고, 정작 스리랑카 정부가 우리에게 해 온 일은 누구도 알아 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던 바 있다. 이때 정문태 기자가 취재를 위하여 타밀족 구역으로 가려고 할 때 검문소를 지키던 스리랑카군이 가서 지겹게 들을 타밀족의 정당화 헛소리는 무시하라면서 더불어 그런 짓을 옹호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주의를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를 게재했을 때 정작 국내의 반응은 냉담했다. 타밀족은 역시 테러리스트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만연했던 것. 90년대 후반에 중앙일보도 비운의 민족이라고 몇 번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타밀족 반군도 아군 아니면 적으로 여겨 중립을 지키던 이슬람이나 기독교인까지 공격해 학살하는 일을 저지르고 은행 폭발 같은 테러까지 가해 스스로 무너진 자업자득도 있었다. 타밀족 학살만 많이 언급되어서 그렇지 반대로 타밀족에게 학살당한 싱할라인들이나 다른 민족이나 종교인들도 있었다.
2016년에도 여전히 스리랑카는 내전 지역으로 분류되어 여행자 보험이 가입되지 않는 지역이고, 스리랑카 정부는 타밀족 난민의 국외 탈출을 묵인, 사실상 조장하고 있다. 과거 LTTE 점령지에는 군사 시설이 쫙 깔려 있고 타밀족 거주지까지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3개의 검문소를 지나야 한다고 한다.
UN은 독자적인 전쟁 범죄 조사팀을 편성해서 2014년 8월 현재 조사 중에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증거 부족 및 여러 사정으로 조사는 난항을 겪고 있는 중이다.
한편 내전을 해결한 점을 어필하며 2선 재선에 성공한 라자팍사는 2010년 3선 연임 법률을 바꾸며 미국과 서구권에서 독재자라는 비난을 받고 낙하산 인사 및 비리에 휘말려 여론의 반발을 일으킨다. 결국 같은 정당이던 전 대통령 쿠마라룽가가 반대하여 다른 정당을 세웠으며 사무총장이자 동료이던 마히드라팔라 사리세나가 이 새로운 정당으로 옮겨가서 2015년 1월 선거에서 라자팍사의 3선을 막아내며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사리세나 대통령은 2017년에 대한민국을 국빈방문 하였다.
2019년 대선에서 마힌다 라자팍사의 동생인 고타바야 라자팍사가 출마하여 논란이 발생했다.# 그리고 대선에서 당선 이후 라자팍사 가문이 장악하면서 대통령 권한 강화가 심화되고 있다.# 그리고 라자파사 가문의 통치로 인해 누적되던 병폐는 내전의 상흔을 완전히 치유하기는커녕 2022년 스리랑카 경제위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8. 관련 문서
[1] LTTE의 폭탄 테러로 사망.[2] LTTE의 자살 폭탄 테러로 오른쪽 눈을 잃었다.[3] 스리랑카군의 총사령관도 겸하고 있다.[4] 내전이 끝나고 2달가량 뒤인 7월까지 직위 유지. 스리랑카군의 뛰어난 지휘관으로서 내전을 종식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자국민의 신망이 두터웠으며. 합동참모의장 등의 요직을 거친 후 2009년 11월 군에서 전역한 후 정계에 입문해 당시 대통령 마힌다 라자팍사와 대권을 겨룰 예정이었으나 뜬금없이 쿠데타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2015년부터 집권한 마이트리팔라 시리세나 제7대 대통령에 의해 2015년 풀려난 후 동년 3월 다시 군에 복귀해 스리랑카군 최초로 원수로 진급하였다.[5] 3대 총리 인디라 간디의 아들. 1991년 LTTE의 자폭 테러로 사망.[6] 해군 부대 바다 호랑이(Sea Tigers)의 수장. 현지에서는 '수사이 대령(Colonel Soosai)'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2009년 5월 정부군과의 교전 중 로켓포에 피격당해 전사했다.[7] 현지에서는 '포투 삼촌(Pottu Amman)'이라는 가명으로 활동.[8] 심리전 담당. 현지에서는 '발라이(Balraj)'이라는 가명으로 활동.[9] 현지에서는 ‘샨카르 대령(Colonel Shankar)'라는 가명으로 활동. 2001년 암살당했다. 스리랑카 정부가 암살한 것으로 추정했으나 스리랑카 정부는 정부 신문을 통해 이를 부정하고 반군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암살되었다고 주장했다.[10] 인도 정보부에 기밀을 누설한 죄로 1994년 사형에 처해졌다.[11]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 암시장을 통해 정부군과 반군 양쪽에 무기를 팔았다.[12] 나중엔 21만까지 증강되었다.[13] 준군사조직 포함.[14] 싱할라인들은 서양인들을 상대로 수적 열세에서도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주며 승리하는 등 어마어마한 전투종족이었다. 싱할라족 참고.[15] 사진 속에서 터번을 쓴 병사들은 시크교인들로 추정된다. 시크교는 운동 및 무술 수련을 권정하기 때문에 인도군에는 원래 인구에 비해서 시크교인이 많고, 장성들도 대부분이 시크교인들이다.[16] 비슈와나트 싱은 전임 총리이던 라지브 간디와 비슷하게 스리랑카 내전 개입을 주장하던 사람이었으나 내전에 파병된 인도군의 피해가 커지면서 인도판 베트남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만들 거냐는 인도 내의 반전 여론에 부딪혀 철군을 단행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4면이 바다에 고립된 작은 섬나라였기에 인도가 마음만 먹고 스리랑카 주둔 인도군의 병력을 더욱 증파했거나 LTTE에 대한 무차별적인 진압 작전을 강행했다면 분명히 인도가 승리했을 것이다. 베트남 전쟁은 라오스와 캄보디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파키스탄, 이란 등 물자보급, 도주를 할 수 있는 육로가 존재했다.[17] 카루나 삼촌(Karuna Amman)이라는 가명으로도 알려져 있다.[18] 최소한의 연락이나 대화조차 안 하고 같은 편을 공격한 것이다![19] 투표 결과 라자팍사는 4,887,152표, 위크레메싱게는 4,706,366표를 차지했다. 득표율은 라자팍사 50.29%, 위크레메싱게 48.43%로 고작 1.86%밖에 차이나지 않았다. 스리랑카 타밀족은 200만이 넘고 그들 중 상당수가 LTTE 점령지에 거주하니, 만일 LTTE가 선거를 보이콧하지 않았더라면 타밀족의 표심을 통해 정말로 결과가 뒤집어질 수도 있었다.[20] LTTE 간부들은 본명을 숨기고 가명을 쓰다 보니 대충 아무개 대령같은 방식으로 각군 지휘관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