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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시 바타 | 에드바르트 베네시 | 오토 비흐테흘레 | 야로슬라프 사이페르트 | 즈데네크 스베라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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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데스틴 | 야로미르 야그르 | 마리아 테레지아 | 카렐 크릴 | 밀로스 포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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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스타 부리안 | 로만 셰브렐레 | 이반 흘린카 | 카렐 하블리체크 보로프스키 | 다니엘 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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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다 호라코바 | 블라디미르 멘식 | 야로슬라프 하셰크 | 알폰스 무하 | 얀 에반겔리스타 푸르키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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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벨 네드베드 | 얀 얀스키 | 프란티셰크 크리지크 | 얀 젤레즈니 | 얀 팔라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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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라 차슬라프스카 | 레오시 야나체크 | 알로이스 이라세크 | 야로미르 노하비차 | 얀 마사리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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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후밀 흐라발 | 얀 네루다 | 요세프 융만 | 그레고어 멘델 | 프란츠 카프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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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티셰크 토마셰크 | 스바티 보이테흐 | 요제프 비찬 | 요세프 카예탄 틸 | 루시에 빌라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카렐 히네크 마하 | 스바타 루드밀라 | 볼레슬라프 볼리프카 | 루돌프 2세 | 요세프 도브로프스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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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프 라다 | 루돌프 흐루신스키 | 바츨라프 2세 | 마들렌느 올브라이트 | 아네타 랑게로바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오타카르 1세 | 루드비크 스보보다 | 도미니크 하셰크 | 얀 루쳄부르스키 | 밀란 바로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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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마르티나 나브라틸로바 | 헬레나 루치지코바 | 파벨 티그리드 | 엘리슈카 프르제미슬로브나 | 밀란 쿤데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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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레메크 | 볼레슬라프 1세 | 마그달레나 도브로밀라 레티고바 | 미콜라시 알레시 | 에밀 홀룹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프란티셰크 파이틀 | 클레멘트 고트발트 | 즈데넥 마테 | 조지 보스코벡 | 마르타 쿠비소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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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지나 보흐달로바 | 밀로슬라프 지메크 | 지그문트 프로이트 | 사모 | 밀로시 제만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 |||
<colbgcolor=#d7141a><colcolor=#ffffff> 출생 | 1850년 3월 7일 | ||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관령 괴딩 (現 체코 남모라바주 호도닌구 호도닌) | |||
사망 | 1937년 9월 14일 (향년 87세) | ||
체코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라니 (現 체코 중앙보헤미아주 클라드노구 라니) | |||
국적 | 체코슬로바키아 | ||
재임기간 | 초대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
1918년 11월 14일 ~ 1935년 12월 14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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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샬롯 가리그 마사리크 (1878년 결혼 1923년 사별) | ||
자녀 | 5명 | ||
학력 | 빈 대학교 (철학 / 박사) | ||
정당 | 국민자유당 (1890–1893) 체코 진보당 (1900-191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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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국부.2. 일생
1850년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왕국 모라바 변경백국과 헝가리 왕국 북부의 접경 지역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슬로바키아인, 어머니는 독일화된 체코인이었다. 이후 모라비아 중심부로 이사했다. 그의 이러한 배경은 체코와 슬로바키아 모두를 고향으로 인식하게 했고 훗날 그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통합을 지지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슬로바키아어의 방언을 모어로 구사했으나 어머니에게 독일어와 체코어를 배웠고, 고전 언어인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독학했다. 또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러시아어, 영어도 배워 문서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빈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했다.189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9살 체코인 소녀를 죽인 혐의로 사형에 처하게 생긴 한 유대인을 변호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서는 정치적 입장을 막론하고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기에 피고가 소녀를 죽였다는 이유가 턱없이 허무맹랑함에도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모두가 그의 사형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마사리크는 이것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이유로 홀로 유대인 편에 섰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혐의를 못 벗었고 형벌은 겨우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낮춰지는 데에 그쳤지만, 이 일로 마사리크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1897년 그는 자신과 정치적 관점을 같이 하던 지식인들과 더불어 ‘현실주의 모임’을 발족시켰다. 마사리크는 민족문제에 지나치게 집착하기보다는 경제 및 사회문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연방화 시키기에 앞서 민주화부터 선행시키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설정했다. 이후부터 마사리크는 체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현실주의적 원칙들을 적용시키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체코 민족의 정치적 과제를 휴머니즘적 이상을 지향하던 체코정신과도 접목시키려고 했다. 특히 1895년에 출간된 ‘체코문제’에서 마사리크는 보헤미아의 체코인과 독일인이 협력하여 보헤미아 지방이 오스트리아 제국 내에서 독립적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오스트리아 제국의 존속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마사리크가 팔라츠키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Austroslawismus)를 추종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점차적으로 마사리크는 자신의 정치적 이념과 사상을 현실정치와 접목시켜야 한다는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고 그것을 실천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자신이 교수로 봉직하던 프라하 체코 대학교의 구성원들과 더불어 1900년 ‘현실주의당(realisticka strana)’을 창당했는데 이 당은 자신이 발족시킨 ‘현실주의 모임’을 확대·개편시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사리크가 주도한 이 당은 1907년 일반선거제의 도입을 요구했는데 그러한 것은 슬라브 민족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50% 이상이라는 현실적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이 당은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자치권 획득을 지향하는 민족들 모두를 지원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같은 해 실시된 제국의회선거에서 마사리크는 사회주의자들의 지원을 받아 빈 제국의회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사리크 개인이 당대의 정치, 사회, 문화 전반에 미쳤던 영향력과는 달리 현실주의당의 영향력은 미약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7년부터 1914년까지 현실주의당의 의원으로 활동한 마사리크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정치적 목적을 정확히 파악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여기서 마사리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했다. 즉 그는 개혁을 위한 모든 제안들이 위정자에 의해 거부되었고 특히 슬라브 민족에 대한 자치권 부여 등은 논의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1] 실제적으로 이 당시 빈 정부는 민족문제에 대한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그것을 실행할 능력도 갖추지 못한 무능한 정부였다.[2]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왕위계승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에 대한 저격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직접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렇게 시작된 세계 대전은 체코 민족과 그들의 정치가들을 매우 당혹스럽게 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체코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문화적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민족이 기존의 독일화적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이들은 권력의 집중화와 관료주의적 행정체제에 대해 불만을 가졌지만 가까운 장래에 체코 민족 역시 제국 내에서 자신들의 역량에 적합한 자치 및 평등을 확보할 수 있다는 희망적 믿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체코 민족 문제에 대해 외면하는 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후계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가 생전에 슬라브 민족의 자치와 평등을 강조한데다 실제로도 그런 행보를 보여왔기에 보헤미아 왕국이라는 뿌리깊은 원한 문제만 해결한다면 분명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사망했고 그로 인해 전쟁이 발발하자 체코 민족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선택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그것은 이들로 하여금 기존의 친오스트리아슬라브주의적 관점을 포기하게 하는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후부터 마사리크는 국내외 정세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데 주력했고 전쟁이 발발한 이상 마지막 황제였던 카를 1세가 슬라브 민족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과 별개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에서 체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도 확실하게 인지했다. 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이길 가능성이 없으며, 이대로 가면 체코인도 전범 신세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 그는 반합스부르크 항쟁을 통해 체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독립을 위해 필요한 방법도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마사리크는 영국의 수도인 런던으로 망명하여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외교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마사리크는 체코인들에게 당시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슬로바키아와 통합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사리크는 독일 제국군과 싸우는데 투입하겠다는 명목으로 러시아 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협상하여 당시 러시아에 투항하여 잡혀있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병사들을 모아 1917년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라는 별도의 부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1918년 미국으로 가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호소했다. 당시 언론들은 그의 뉴욕 입성을 대서특필했으며 약 150,000명에 달하는 체코계 미국인, 슬로바키아계 미국인들이 그를 환영하는 인파를 이뤘다.
1918년 10월 18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선언했고 10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 카를 1세도 이를 수락했다. 이후 귀국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건국하고 1918년 11월 14일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무려 17년간 대통령 자리에 있다가 1935년 12월 14일에 물러나고 2년 뒤인 1937년에 사망했다.
3. 평가
오랜 외세의 지배를 끝내고 마사리크에 의해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는 후에 나치에게 점령당하고 나치가 망하고 난 후엔 나라 자체는 되찾았으나 공산화되고 말았다. 공산정권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1990년까지 지속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 참조). 이 공산정권 시절 동안 마사리크는 '서방 제국주의의 하수인'이라 격하되었다. 민주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는 2년정도 지속되다가 1993년 1월 1일 0시에 해체되고 만다. 그가 건국한 체코슬로바키아는 해체되었지만, 그 국체는 체코로 계승된다.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민주화된 이후 재조명받기 시작하여 지금은 체코를 건국하고 체코 민족의 방향을 제시한 국부로 존경받고 있으며, 체코의 지폐 중 최고액권 체코 5000코루나에 그의 얼굴이 들어가 있다.
4. 기타
그의 아들인 얀 마사리크는 1940년 체코 망명정부 시절부터 체코의 외교를 주도하였고 1945년 체코로 돌아와 외무장관직에 있었으나, 공산화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1948년 3월 10일 의문의 추락사를 당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고사, 공산당에 의한 타살, 자살설이 대립하고 있다.1919년, 마사리크가 워싱턴 D.C.에서 활동할 때, 그 당시 구미위원부로 활동하던 이승만과 자주 회합하고 만나서 의견을 교환했으며, 이때 그는 이승만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이승만은 그의 투쟁 방식을 벤치마킹하여 외교를 통한 독립과 그 구체적인 실행 방안에 대한 전략의 얼개 및 골격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3]
5. 관련 문서
[1] 이미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보헤미아 왕국의 입지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전후하여 점점 내려오고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자신을 배신하고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의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를 보헤미아 국왕으로 옹립했던 보헤미아 귀족들에게 내심 원한을 품어 보헤미아 왕국의 발전과는 별개로 그들을 고깝게 보아 점점 무시했고 그녀의 후손들도 마리아 테레지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엇보다 보헤미아 왕국이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보다 우선시되었던 것은 보헤미아 왕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선제후였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어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제위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는데 30년 전쟁에서 패전하면서 독일에서의 영향력 행사가 사실상 좌절되고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보헤미아 왕국이 갖는 정치적 중요성도 사라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30년 전쟁 패전 이후 동방으로 눈을 돌리며 합스부르크 제국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나폴레옹 전쟁 도중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되면서 이전까지는 그래도 명목상으로는 동등한 동군연합이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 객체가 된 것도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이 낮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체코인의 위상이 높았던 것은 어디까지나 체코인 스스로 노력해서 입지를 다졌던 것이지 합스부르크 가문 군주들은 보헤미아 왕국과 슬라브인을 끝까지 지배의 대상으로 여겼을 뿐 동등한 정치적 파트너로 대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당장 프란츠 요제프 1세만 해도 대타협으로 헝가리인과 크로아티아인의 정치적 위상은 높여주었지만 체코인을 위시한 슬라브인의 동등한 주권 요구는 죽는 날까지 묵살했다. 그나마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을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슬라브인의 동등 내지 자치 등의 주권 확대를 내세우며 대오스트리아 합중국 방안을 내놓으면서 마리아 테레지아 이래로 내려온 갈등을 내려놓고 자치권을 상당히 갖거나 보헤미아 왕국이 아닌 슬라브 민족의 하나로 예비 합중국 구성원으로 대우 받을 여지와 명분이 있었겠지만 그런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 사건으로 암살당하고, 뒤를 이은 카를 1세에게는 보헤미아 문제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2] 물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미 입헌군주국이였고, 황제의 권위가 강한 편이라지만 독일보다 의회의 권한이 강력한데다 헝가리도 문제였으므로 합스부르크 왕가 입장에서는 할말이 없는건 아니다. 문제는 장기 통치한 프란츠 요제프 1세 본인이 이런 문제를 개선시키려고 하긴 커녕 악화시키는데 일조하고, 그나마 개선시키려고 한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사라예보 사건으로 갑작스레 사망하고 말았다.[3] “맥아더情報의 壽命 : 48時間”, 《月刊中央》, (중앙일보사): p. 247-255. 1968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