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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별 내셔널리즘* |
1. 개요
아랍인 정체성을 내세우는 내셔널리즘을 의미한다. 19세기 후반에 아랍을 지배하던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서양의 내셔널리즘을 받아들여 형성된 사상이다. 이 때문에 초창기 아랍 내셔널리즘은 아랍계 기독교인과 아랍계 무슬림들이 종교 차이를 떠나서 서로 화합할 것을 강조하였었다.1945년 아랍 연맹 설립의 동기가 되었다.
2. 역사
원래 아랍(Arab; عرب)이라는 단어는 유목생활을 하는 베두인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였고 당시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서로 같은 아랍어를 쓴다는 생각만 있었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민족주의가 발달한 것은 아니었다. 아랍인이라는 민족 정체성은 언어와 문화가 완전히 다른 페르시아인들과 자신들을 구분할 때나 사용하는 모호한 수준이었다.모국어가 아랍어인 경우 자신이 예언자 무함마드가 말했고 경전 쿠란에 적힌 아랍어를 사용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19세기 이전 이슬람 예배 언어로 쓰이던 아랍어는 이른바 알 푸스하(Al fusha)라는 꾸란의 전통 아랍 문어체였고, 아랍인들은 일상생활에서 암미야(Ammiya) 즉 각 지방 방언에 해당하는 구어체를 모어로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서민들이 쓰는 구어체 암미야는 지방에 따라 제각각이었으며 서로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다만 아랍 무슬림들의 경우 쿠란을 통째로 암송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1] 방언이 서로 다른 경우에는 꾸란에 나온 아랍어 즉 푸스하로 소통할 수는 있었다.
19세기 초에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고 당시 이집트인들과 이들에 영향을 받은 시리아인들은 오스만 튀르크와 다른 정체성을 내세우는 과정에서 자신을 “야만스런 튀르크인과 구분되는 이슬람 문명의 시초” 아랍이라고 재정의한 것이 아랍 내셔널리즘의 시초이다. 이 과정에서 중세 이슬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의 반튀르크 아랍 우월주의는 근대 이슬람 근본주의자와 아랍 민족주의자 양쪽에서 모두 재해석되었다. 시리아 출신 문인 알 카와키비는 아랍인이 부패한 튀르크인의 지배에서 벗어나 이슬람 세계에서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초기 학자 중 한 사람이다. 이러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는 18세기 이슬람 한발리파 신학자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합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다. 물론 이런 성향은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만 국한되지는 않았고 수단의 경우 '튀르크인들은 적그리스도의 무리로, 오스만 제국이 장악한 성지 메카와 메디나를 아랍인들이 회복해야 진정한 성지순례가 의미가 있다'라고 주장한 극렬 반튀르크주의를 주장한 마흐디 운동 같은 경우도 있었다.
이집트 지식인들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침공 당시 더 이상 이슬람 문명이 서구보다 과학력과 기술력이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지식인들이 빨리 각성한 이유로 인도와 함께 이슬람 모더니즘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집트의 문인 타하 후세인은 예언자 모세와 그의 이스라엘인 추종자들을 비하하고 이집트 파라오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당시 이슬람계 입장에서 대단히 파격적인 소설을 쓰기도 하였다. 이집트의 이슬람 모더니즘은 이웃한 레반트에 바로 영향을 미쳤으며[2] 20세기 초에는 이라크, 마그레브까지 전파되었다.
다른 문화권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자주 충돌했던 경우와 달리 아랍 민족주의는 아랍 사회주의와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이는 당시 아랍 민족주의와 아랍 사회주의가 모두 '서방 제국주의자들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아랍계 기독교인이나 아랍 무슬림 할 것 없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아랍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바트당의 핵심인물이었던 미셸 아플라크는 아랍계 정교도 기독교인이지만 예언자 무함마드에 대해 아랍인들의 민족 영웅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며, 시리아와 이라크 지식인들에게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이렇게 인기가 많던 바트주의도 6일 전쟁에서 아랍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인기가 점차 시들해졌고, 현재는 이슬람주의에 밀려 바트당 잔당들은 미국이나 러시아같은 강대국에 매달려 겨우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라비아 반도는 와하비즘이 강세였기 때문에 아랍 내셔널리즘이 좀 더 배타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었다. 초창기 이집트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한 아랍 내셔널리즘이 기독교와 이슬람의 화합을 추구했던 것과 다르게 오늘날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이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을 후원하면서 아랍 내셔널리즘보다는 아랍 우월주의, 걸프 아랍 우월주의에 해당하는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14세기 이슬람 신학자 이븐 타이미야는 아랍어 푸스하 이외에 다른 언어들 이를테면 페르시아어나 튀르크어, 쿠르드어 등을 사용하는 것은 순수한 이슬람적인 사고방식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다고 주장하였고, 와하브파 학자들은 이를 핑계로 아라비아 반도 방언을 사용하는 자신들이야말로 순수한 무슬림이고 이란,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터키 등지의 다른 무슬림들은 자신들보다 못한 2류라는 식의 종교 근본주의와 결합된 형태의 민족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3] 대표적인 예로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이 모로코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겨놓고 "오늘은 모든 무슬림들이 축하해야 할 날입니다."라고 말했다가 같은 아랍 국가인 모로코에서 무슨 엉뚱한 소리하냐고 항의했었다.
3. 범아랍주의
자세한 내용은 범아랍주의 문서 참고하십시오.4. 비판
근래 이들을 꺾고 중동의 가장 골치아픈 정치세력으로 등극한 이슬람주의자들에 대한 반발로 아랍 민족주의 '세속' 독재정권들을 또 무비판적으로 옹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막상 '세속'주의 표방하는 아랍 족벌 독재자들이 광신도들과 같이 공존한것도 하루이틀도 아니고, 실질적으로 현지 사회에선 오히려 우리네 정서에서도 그닥 낮설지 않은 적대적 공생이 태반이다. 족벌독재 정권들은 입으로만 세속주의를 표방하며 실제론 정치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당한 이슬람주의 정당, 세력들이 울분을 이집트의 콥트교도 같은 소수자들 박해로 푸는건 평소엔 제대로 막지도 않고, 이란-이라크전, 걸프전때 개박살난 이후 갑자기 '지하드', 살라딘 코스프레를 부쩍했던 사담 후세인 정권 처럼 필요할때는 본인들도 교파주의적, 배타적 대중운동을 실컷 써먹다가 어디 미국 지원금 받을때만 다시 이슬람주의정당들 숙청해놓고 무슨 대단한 광신도들의 대항마들인양 얼굴을 판다. 막상 이슬람주의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항마는 튀니지나 북미 무슬림 처럼 높은 교육열, 건강하고 열정적인 사회 참여, 문화적 풍요 같은 고통스럽고 장기적인 사회개혁밖에 없지만 이슬람주의 막으라고 서방에서 퍼주는 돈이 저리 제대로 된 방향으로 쓰이는 법은 한번도 없다. 이런 이중성으로 국가 발전 따윈 개나 주고 권력을 사유화하고 국가 엘리트엔 전부 자기 족벌, 친족, 측근만 꽂아놓은 다음 이 낙하산들이 나라 전체를 무슨 자릿세 겉는 양아치마냥 굴리면서 일반 서민 입장에선 사회경제적 성공의 꿈도 희망도 안보이는 사회를 만들어 놓으면 그 자리에 꿰차고 들어와 대중의 절망감, 분노를 자양분으로 지하디스트들이 성장하는게 족벌 세속 독재정권과 광신도들 사이에 놓은 현대 중동의 비극이다. 당장 후세인 정권 붕괴 이후 이라크의 대혼란, 잠잠할것 같으면 늘 꼭 한번 사고 터지는 북아프리카의 아랍 vs 베르베르 민족갈등, 남수단과 다르푸르 분쟁, 쿠르드족 문제, 현대 중동의 굶직한 정치 문제 태반은 막상 뚜껑 까보면 근현대 들어와서 이슬람주의자들의 난입으로 문제가 더 심각해지긴 했지만 애초에 그 근원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이 싸지른 경우가 태반이다.아랍 내셔널리즘은 서양의 내셔널리즘의 영향으로 아랍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이 과정에서 옥시덴탈리즘이 확산되어 아랍인들이 전근대에 유럽과 연관되었던 역사가 고의적으로 망각되었다. 아랍권의 반서구주의는 결국 아랍 내셔널리즘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아랍인들은 한 번도 흑인을 차별한 적이 없으며, 사악한 서구 백인과는 완전히 다른 고결한 존재"라는,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프로파간다가 상당수 아랍인들에게 각인되었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이런 낚시를 시도하는 경우가 종종 보이는데, 엄밀히 말하자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극심했던 근대 유럽에서도 알렉상드르 뒤마 같은 경우도 엄연히 존재했다. 지중해 출신 아랍인 상당수는 수염이나 히잡 같은 특유의 복식 대신 서구식으로 입으면 남유럽 사람들과 외양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 이러한 동질성을 바탕으로 아랍권의 청년층이 서구를 모방하고 동화되기 시작하면 아랍민족주의자, 이슬람주의자들 입장에서는 지지 기반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역사왜곡까지 불사하며 아랍인과 유럽인의 차이만을 부각시킨다.
결국 아랍 민족주의는 처음에는 제국주의에 시달리던 중동 주민들의 단결을 이끌었지만 나세르를 비롯한 독재자의 정권 합리화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하산 알 반나, 아민 알후세이니 같은 아랍 사상가들은 20세기 초부터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 하에 나치 독일 이데올로기와 손을 잡았으며, 이슬람주의자들과 권력투쟁을 벌이면서 온건하게 시작되었던 아랍 민족주의는 이슬람주의로 대표되는 점점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방향으로 퇴보하기 시작했다.[4] 이는 아랍 세계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결국 이슬람주의자들과 독재 정권간의 아귀다툼속에 정상적인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발언권을 잃는 처참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2011년에 아랍의 봄이 민주정 확립 대신 유럽 난민 사태로 귀결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굳이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의 와하브파 후원이 아니더라도 이슬람 모더니즘이 쇠퇴하고 사이드 쿠틉같은 극단주의자들이 등장하고 이슬람주의가 극우화되면서 아랍 내셔널리즘은 안으로부터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아랍의 주류와 민족과 언어가 달라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었기에 민족국가라는 형태만 유지할 수 있었지 이후 이 나라들은 각자 과거의 외세,독재자,이슬람주의자들이 서로 섞여 극심한 내전을 벌였고 지금까지도 그 여파로 고통받고 있다.
또한 아랍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다보니 중동에 존재하는 다양한 소수민족들에 대한 권리의식이나 차별의식이 전근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수많은 민족들이 사는 중동 전반을 아랍인의 땅이라고 간주하다보니 그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들을 박해하고 집단학살하려는 태도까지 보이는데 하필 나치독일의 영향을 크게 받다보니 이런 민족들을 대하는 태도도 매우 극단적이다.
이라크의 아랍계 기독교인들은 아랍어를 사용하지만 아랍인이 아닌 아시리아인이라고 불리길 원하는 편이다. 이라크에서 ISIS가 발흥하면서 많은 이라크 기독교인들이 미국이나 스웨덴, 독일 등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들은 망명한 지역에서도 이라크 출신이라는 이유로 이슬람공포증에 의한 차별[5]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결국 자신들을 아랍인이 아닌 독자적인 다른 민족으로 분류하기를 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같은 맥락에서 레바논의 마론파 기독교인들 역시 아랍어를 사용하지만 자신들의 정체성을 아랍인에서 찾기를 부정하고 대신 고대 페니키아인의 후손에서 찾는다.
북아프리카 및 서북아프리카 일대에서도 해당 지역 원주민들 중 하나인 이마지헨인들은 아랍에게 고위층에 가까운 자리를 많이 잃은데다 아랍인 위주가 많다보니 차별도 있어 갈등이 심한 편이다. 그래서 베르베르주의를 믿는 베르베르인들도 나타났다.
5. 같이 보기
[1] 아랍인들 중에는 쿠란 전 권을 통째로 다 암송하는 경우도 드물지는 않은데, 이런 사람들을 "하피즈(Hafiz)"라고 부른다.[2] 이슬람모더니즘 1세대 학자 무함마드 압두의 수제자가 바로 살라프파의 시조 라시드 리다이다. 무함마드 압두는 이집트 출신, 그리고 라시드 리다는 시리아 사람이다.[3] 오늘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나 카타르의 와하브파 신도 중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은 남아시아 출신 무슬림들을 같은 무슬림인데다 엄연한 이주노동자인데도 불구하고 대놓고 노예라고 부르면서 조롱하고 멸시하는 편이다.[4] 역설적이게도 이렇게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이론으로 나치의 도움을 받으려고 한 것 덕분에 전후에 이스라엘에 유리한 형국이 펼쳐졌다.[5] 이라크계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면 안 믿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