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06-29 08:28:52

반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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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교리에 대한 비판
3.1. 윤회에 대한 비판
3.1.1. 반론
3.2. 여성 차별
3.2.1. 반론
3.3. 과학성에 대한 논란
3.3.1. 반론
4.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
4.1. 반론
5. 일본 불교승병제국주의 협력 논란6. 로힝야족 학살 옹호및 적극적인 참여
6.1. 미얀마 불교에 대한 옹호 의견.6.2. 옹호에 대한 반박
1. 한국 불교의 친일 논란
1.1. 황우석 사건 당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모함1.2. 달라이 라마신사참배 논란
2. 방생 문화에 대한 비판3. 현재4. 기타 불교의 비행5. 함께 보기

1. 개요

反佛敎. 불교에 대해 적대/반대하는 태도이다. 반종교의 한 종류.

2. 역사

삼국시대통일신라, 고려 때까지는 불교국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여말선초의 유학자들은 고려 망국의 원흉으로 불교계의 타락을 꼽으며, 이후 조선 500년간 반불교에 입각한 숭유억불을 국시로 간주하였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간헐적으로 불교 우대적인 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주류는 반불교 성향이 강했다. 승려의 신분은 사회적으로 팔반사천(八般私賤)으로 격하되었고 도성 출입도 금지되었다[1]. 따라서 우리 역사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은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에서는 오히려 망국으로 이끈 유교에 대한 반감이 더 높고, 사회적으로는 개신교의 영향력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훨씬 거대하고 그에 따른 문제는 매우 극단적인 수준이기 때문에 반불교 정서는 상대적으로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중국의 경우, 불교가 전파되던 초기에 불교에 대한 비판이 극심했다. 비판 세력의 주체로는 유학자들이나 도교의 신봉자들이 있었다.

한(漢)의 유학자 한유(한유) 불교 비판은 당시의 반불교적 분위기를 엿보게 해준다. 그가 저술한 〈논불골표〉의 논술에서 보면 한유의 배불논리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중국에 불교가 수입되기 이전에는 역대의 군주가 다 장수하였고 국가가 태평했다. 백성들은 즐겁고 행복한 시대였으나 불교가 수입되어 융성해진 결과 어지러워지고 멸망하여 재앙이 많은 시대가 되었다. ② 부처는 오랑캐이고 불교는 오랑캐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중국과는 언어와 풍속이 다른 것이다. ③ 불교는 군신 간의 의나 부자간의 정 등 일상적인 윤리를 알지 못한다. ④ 이마를 불태우고 손가락을 지지는 등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또 경제 관념도 엉성하여 생업에도 종사하지 않게 된다. ⑤ 죽은 자의 뼈 등은 삶에 있어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 오히려 멀리해야 할 것이다. #

3. 교리에 대한 비판

3.1. 윤회에 대한 비판

若有故作業,我說彼必受其報,或現世受,或後世受。若不故作業,我說此不必受報。
만일 일부러 짓는 업이 있으면, 나는 그것은 반드시 과보를 받되, 현세에서 혹은 후세에서 받는다고 말한다. 만일 일부러 지은 업이 아니면, 나는 이것은 반드시 그 보를 받는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ㅡ중아함15경 사경(思經) 업상응품(業相應品)[2]

불교는 모태가 되는 바라문교(브라만교)와 더불어 윤회설을 주장하는 종교 중 하나인데, 윤회설의 비판점은 '불평등 합리화'라는 차원에서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우선 명심해야 할 것은, 전근대 시기에서 신분제는 사회가 유지되는 데 공통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특정 인물들이 지식과 무력, 재화를 독점하고 사람을 부리던 때였고, 종교는 이를 합리화하는 도구였다. 당연히 전근대사회의 종교였던 불교도 분명히 여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물론 분명한 점은, 불교의 업설은 불교 이전의 전통 바라문교의 업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보되어 있다. 바라문교의 업설이 더 높은 카스트로 올라가기 위해 카스트 제도에 복종하라는 정치적 의도가 다분했다면, 불교의 업설은 윤리적인 색채가 강하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은, 악업은 고통을 장기적으로 일으키는 어리석음의 행위이고, 선업은 그 반대로 궁극적으로 행복과 자유를 초래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바라문교든 불교든 힌두교든 중요한 문제점은 업과 윤회라는 개념에 있다. 이것은 정치적인 관점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치명적인 결함이다.

말하자면 이들 자체가 차별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악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물론 불교의 업설은 어느 계층이든 수행과 선업을 쌓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나, 문제는 인과 자체가 전생과 후생을 초월한다는 데 있다. 즉, 현생에 겪는 고통은 전생에서 비롯될 수 있다는 논리 때문에 현생의 차별과 불평등이 합리화될 수 있다. 그리고 교리상으론 죽음과 함께 몸이 부서지며 기억이 단절되기 때문에 전생의 기억이 후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합리상으로 볼 때 시체가 뭘 기억하고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엔 기억나지도 않고 뭔지도 모르는 전생의 죄 때문에 현생에서 고통받아야 한다는 막장스러운 상황을 인정한다는 게 될 수 있다.

물론 윤회설을 주장하는 불교힌두교 같은 경우 지금 살면서 내가 전생에 좋은 선업을 많이 쌓아 좋은 집안에 태어났다고 다른 생명이나 자기보다 낮은 위치의 사람을 괴롭히거나 하면 악업이 쌓여 그 과보로 다음 생에서 좋지 못하게 된다고 하지만, 사회적인 차별과 지금 현재의 괴롭고 힘겨운 상황과 대우를 당사자 본인의 탓만으로 돌리는 데 이용되기 쉬운 것도 사실이다. 제아무리 석가가 전생의 악업을 현세에서 어떻게 풀어들일 수 있다고 한들, 전생의 업 때문에 나온 현세 자신의 개막장스러운 출신적 상황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모순은 피할 수 없다.

불교환생설에 따르면 왕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기 때문이고, 귀족으로 태어난 것은 왕만큼은 아니어도 역시 전생에 쌓은 공덕이 많았던 것으로 합리화하기 유리하고, 여기에 왕즉불 사상까지 가면 지배자는 불교를 후원하는 만큼 무제한적인 충성 세력과 집권의 합리화가 가능하다. 실제로도 그런 이유로 과거 왕실에서 불교를 많이 후원했던 것 또한 사실.

다만 이러한 불평등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불교 내에서 존재한다. 불교 민주주의가 바로 그러한데, 정확히 말하자면 불교 중에 민주성에 적합한 부분을 따와 민주주의와 융합하려는 움직임이다. #, #

3.1.1. 반론

기본적으로 불교는 현실주의적인 종교이다. 한번 지은 악업을 벗어날 수 없는 기계론적 숙명론은 불교라기보다는 차라리 불교에서 영향력을 끼친 자이나교에 가깝고, 석가는 스스로의 의지로도 언제든지 악업에 대한 연기를 끊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간단한 이유인데, 불교 자체가 모든 업에서 벗어나기 위함인데 만약 한번 지은 악업을 피할 수가 없다면 불도적 수행이고 뭣이고 다 의미가 없기 때문.

또한 업에 대한 논리는 결국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로 향하게 된다.# 석가는 앞으로 다가올 때를 향하면서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운명을 극복할 수 있고 개척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과 자유의지를 설파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현세의 업은 현세에 풀고, 과거의 업일지라도 현세에서 언제든지 풀 수 있다는 것이다.

기타 동국대 불교학 교수의 업보윤회설 견해도 참고할 만하다.#

참고로 불교는 여타 다른 종교보다 저승에 대한 묘사가 다양하다. 즉 인과응보의 평등성을 묘사하기 위해서 현실에 쌓은 업은 다양한 저승에서 갚아 윤회해서 돌아온다는 교리가 존재한다.

3.2. 여성 차별

一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各各器盛食在道側,胡跪授與沙門。
첫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모든 시주[3]들이 항상 그릇그릇마다 음식을 담고 길 가에서 무릎을 꿇고 스님들께 공양할 것이다.
二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與衣服卧具逆於道中,求沙門受用
둘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모든 시주들이 항상 의복·침구 따위를 시주하되, 길에서 맞이하여 스님들이 받아 쓰도록 할 것이다.
三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等常應乘象馬車乘在於道側,以五體投地求沙門蹈而過。
셋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이 항상 코끼리나 마차를 타고 있더라도 길 가에서 오체투지함으로써 사문이 밟고 지나가도록 할 것이다.
四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在於路中,以發布地求沙門蹈而過。
넷째, 만약 여인네가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마땅히 길에서 머리카락을 땅에 펴 스님이 밟고 지나가도록 할 것이다.
五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恭敬心,請諸沙門至舍供養。
다섯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공경심으로 스님들에게 집으로 와서 공양하기를 청할 것이다.
六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見諸沙門常應恭敬心凈掃其地,脫體上衣布地令沙門坐。
여섯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공경심으로 자리를 깨끗이 하고 상의를 벗어 땅에 펴 스님이 앉도록 할 것이다.
七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脫體上衣拂比丘足上塵。
일곱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상의를 벗어 비구의 발의 먼지를 털 것이다.
八者若女人不出家者,諸檀越輩常應舒發掃比丘足上塵。
여덟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시주들은 언제나 머리카락으로 비구의 발의 먼지를 털 것이다.
九者若女人不出家者,沙門威德過於日月。況諸外道豈能正視於沙門乎?
아홉째, 만약 여인들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사문의 위덕은 태양과 달에 버금갈 것이니, 하물며 외도들이 어찌 능히 사문들을 똑바로 볼 수 있겠는가?
十者若女人不出家者,佛之正法應住千年,今減五百年。一百年中得堅固解脫。一百年中得堅固定。一百年中得堅固持戒。一百年中得堅固多聞。一百年中得堅固布施。初百歲中有解脫堅固法。
열째, 만약 여인이 출가하지 않았다면 부처님의 정법은 마땅히 천년을 머무를 것이지만, 이제 오백년으로 감하였다.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해탈을 얻을 것이고 일 백 년 중에는 견고한 정(定)을 얻을 것이며, 다시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지계(持戒)를 얻을 것이다. 또한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다문(多聞)을 얻을 것이며 마지막 일백 년 중에는 견고한 보시(報施)를 얻을 것이다.
ㅡ<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4]

위의 비니모경의 내용은 아함경 116경 구담미경(임품)을 풀이한 내용이다.[A] 석가모니의 이모이자 계모인 마하파자파티와, 이하 500명의 샤카족 여인들이 출가하려고 하자 내내 거절하다가 아난다의 간곡한 부탁으로 할 수 없이 이런 말을 하면서 들어준 것이다. 애초에 석가는 "여자도 성불할 수 있지만 세상에 대한 애착이 너무 강해 어렵다"는 입장이다. 끝내 석가는 비구니를 받아들여놓고도 후회하면서 아난다를 가루가 되도록 까버렸는데. 이를 옳긴 게송이 이렇다.
安住於此中 悉能達解義,第二百歲中 復有堅固定,第三百歲中 持戒亦不毀,第四百歲中 有能多聞者,第五百歲中 復有能布施,從是如來法,念念中漸減 如車輪轉已,隨轉時有盡 正法所以隱,阿難之愆咎 為女人出家,勸請調御師 正法應住世,滿足於千年 五百已損減,餘者悉如本,是故五百歲 五法興於世,解脫定持戒 多聞及布施。
처음의 백 년 가운데는 해탈견고법이 있어 이 가운데 안주하면 모두 능히 해탈의 의미를 통달할 것이며 두 번째 백 년 중에는 다시 견고한 정(定)이 있고 세 번째 백 년 중에는 지계(持戒)가 역시 무너지지 않으리, 네 번째 백 년 중에는 많이 들은 제자가 있으며 다섯 번째 백 년 중에는 다시 보시가 있다네. 이와 같은 여래의 법을 쫓아 시시각각으로 점차 없어짐은 수레 바퀴가 구른 뒤에 구르는 것이 다하는 것과 같다네. 정법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난의 허물과 잘못이니 여인을 출가시키도록 부처님께 권청한 것이라네. 정법은 마땅히 세간에 머물러 천 년을 채울 것이었건만 오백 년이 이미 감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본래와 같노라. 그러므로 오백 세 동안은 다섯 가지 법이 세간에 흉하리니 해탈과 정과 지계 다문 그리고 보시이니라.#

어쨌든 석가는 비구니를 받아들이기 위해 팔경법(팔존중법, 팔경사법)을 만들긴 했다. 내용은 이러하다[6][A]
① 출가한 지 100년이 된 비구니라도 바로 그날 계를 받은 비구에게 먼저 합장해야 한다.
② 비구가 없는 장소에서는 안거를 해서는 안 된다.
③ 1달에 2번씩 비구 승단에 나아가 계율을 반성하고 설교를 들어야 한다.
④ 안거를 마친 뒤에는 비구들에게 나아가 안거 중의 잘못을 참회하고 의심난 일들은 물어야 한다.
⑤ 중대한 죄를 범했을 때는 대중의 처소에서 떠나 보름 동안 별거해야 한다.
비구니가 되려는 자는 2년 동안 일정한 수행을 거친 다음 온전한 비구니가 되는 계를 받아야 한다.
⑦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된다.
⑧ 비구니는 비구의 허물을 꾸짖을 수 없지만, 비구는 비구니의 허물을 꾸짖어도 무방하다.

또한, 석가모니사리풋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舍利弗。此八佛土皆悉清淨。無有女人亦無五濁。舍利弗。若善男子善女人住大乘者。聞此八佛名號。受持不忘并為他說。若生三塗八難處者無有是處。若有女人聞八佛名號。自能憶持兼為他說。若更受女身無有是處。
사리불이여. 이 여덟 부처[8]의 정토는 다 청정하여 여자가 없고 오탁(五濁)[9]도 없나니, 사리불이여, 대승(大乘)에 머무는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만약 이 여덟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받아 지녀 잊지 않는 한편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한다면, 그는 삼도(三塗)[10]와 팔난(八難)[11]이 있는 곳에 태어날 이치가 없으며, 여자로서 여덟 부처님의 명호를 듣고 스스로 기억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한다면, 그 또한 여자의 몸을 다시 받을 이치가 없으리라.

女人聞佛名 憶持為他說 盡此女人報 後生不復受 誦持為人說 八佛之名號 得諸功德果 如上之所說
여인이 불명을 듣고서 기억하여 다른 사람을 위해 선설하면 그는 여인의 업보를 다 벗어나 후생엔 다시 여인의 몸 받지 않고 이 여덟 불명을 받들어 외워 선설한 인연으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그 모든 공덕의 과보를 얻으리니,
ㅡ<팔길상경(八吉祥經)>에서#[12]

이 석가의 말씀은 여자는 불국정토에 존재할 수 없는 만큼 삿된 것, 아니, 재앙 혹은 악마로 본다는 의미이며, 불도를 지니고 선행을 베풀고 그 가르침을 베풀면 정토에 남자로 태어난다는 이야기다. 결국 여성은 성불할 수 있어도, 여성의 몸으로 부처가 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입장이다. 교리 자체가 구원론까지 여성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는 셈이다. 심지어 약사여래에겐 전여득불(轉如得佛)이라 하여 여성이 불리한 조건으로 성불할 수 없다면 남성으로 태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서원이 있으며, 초일명경 등에서는 여자가 선업을 쌓아 내생에 남자로 태어나라는 등의 막장 교리도 있다.#

석가모니 당대의 여승들은 비구니 법계를 받고 잘 수행했다고도 한다. 당장에 남방불교의 경전 중에는 깨달은 남자 비구승들의 시모음집인 장로게와 더불어 여성 수행자들의 시인 '장로니게'가 같이 존재한다.# 물론 비구들이 지켜야하는 250계보다 더 많은 항목을 담은 비구니 348계가 있었으나, 여기에 대한 반발은 보이지 않았다. 당시 기준으로 볼 때,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출가시켜 수행공동체를 운영하게 한 것 자체가 파격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성의 출가 허락 이후로 비구와 비구니와의 갈등도 매우 심한 것도 사실이었다. 당장 석가의 십대제자이자 훗날 1대 종정(宗正)인 마하가섭이 비구니들과 제일 다투어 싸웠고, 비구니들은 마하가섭을 개무시해서 아난다만 따랐었다.# 비구니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이를 들여온 아난다도 세트로 까이고 있었던 실정.

하지만 비구니는 이 팔경법으로 인해 종단에서 오랫동안 차별을 받고 있으며 비구(남성 승려)의 똥군기에 시달리면서도 그들 대신에 궂은 일을 하느라 불경 공부나 설법을 듣는 등의 수행이 쉽지 않으며 종단의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도 쉽지 않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로 넘어와서 자유주의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적극적으로 비판을 받았으며, 한국불교 조계종단의 경우 아직도 남성 승려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며 진보적인 비구니들이 참종권을 확보하기 위해 애쓰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어떤 불교 옹호론자들은 법화경을 예로 들며, 법화경에서는 용녀(인간이 아닌 짐승, 남자가 아닌 여자)가 부처로 성불하는 것을 보고, 불교가 여성 평등을 주장한 종교라고 변론하기도 한다. 확실히, 용녀가 성불하는 장면은 남녀평등적이라고 보일 여지가 있으나, 중요한 것은 그 법화경은 석가모니가 그 전에 했던 모든 설법을 부정하면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법화경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면, 불교도들은 우선 법화경만 남기고 모든 경전을 없애버리고 가야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애초에 법화경 자체를 경전으로 인정하지 않는 다른 불교 교파는 논외) 비불교도 시점에서는 사실상 얼렁뚱땅이다 할 정도로 법화경도 경전으로 인정하고, 다른 불교 경전들도 경전으로 인정하는 어물어물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13] 이 문서에서 예시로 든 것과 같은 여성차별적 구절들이 여전히 불교계에서는 유효한 구절이라는 것이다. 근데 법화경에서도 용녀가 순식간에 남자로 변화는 과정을 거쳐서 성불한다. 즉 용녀-부처가 아니라 용녀-남자-부처 중간에 남자를 거쳐서 성불을 한다. 당시에는 여자는 성불 할 수 없고 남자로 다시 태어나야 성불 할 수도 있다고 봤다. 용녀의 이야기는 아마 여자계층을 포용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계층 또한 끌어 안을 절충안 같은 이야기라는 해석도 있다.

그리고 설령 법화경을 어떻게든 인정하더라도, 당장 불교 종단에서 여성을 대하는 것이 법화경에 따라 동등하게 대우를 하지 않으니 의미가 없는 노릇이다.

3.2.1. 반론

팔경법은 석가의 고육지책이라는 해석이 있다. 평등을 외치던 석가가 당시 남성 제자들의 성관념의의 한계에 부딪쳐 겨우 합의안을 만들어 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 석가는 천대받던 수드라 및 불가촉천민마저도 출가시켜 제자로 삼았다.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이 우팔리는 왕궁 이발사 출신으로 천민 출신이었으나, 부처의 사후에 율의 계승자로서 교단의 중요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런 석가가 여자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따윈 없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여성을 부정하던 석가래도 비구와 비구니를 차이는 있으나 나름 동등하게 봐주었다. 당장 아함경 제자품만 보더라도 석가의 자기 제자 자랑 목록인데 거기서 비구와 비구니를 같이 자랑하고 있다(...) 즉 불도에 든 이상은 남녀에 차별은 많으나 다 같은 동도로 보는 셈이다.

여기에서는 동국대 불교학과 해주 스님이 팔경법은 부파 불교 말기에 비구 중심 승단에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 당장 아함경이 이 시기 때 경전이다.

불교의 다양한 경전들은 오랜 역사 속에서 다양한 장소와 문화권에서 형성되어왔기 때문에, 여러 경전들을 비교하다보면 모순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남존여비적 문구가 발견되는 한편, 어떤 경전에서는 남녀평등의 정신이 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동북아시아 불교에서 널리 숭앙된 법화경의 경우, 법화경에서는 용녀(인간이 아닌 짐승, 남자가 아닌 여자)가 부처로 성불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승만경의 경우에는, 여성 재가신자인 승만부인이 부처가 되기 위한 서원을 세우는 내용이 나오며, 부처가 될 자격을 갖춘 제자로 등장한다. #

3.3. 과학성에 대한 논란

불교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가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고 주장하며 때로는 과학적이거나 철학적, 혹은 무신론이라고까지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달라이 라마가 적극적으로 밀고 가는 설이기도 하다. # 실제로 불교는 자기네들 가르침을 과학과 결부시켜서 합리화하려는 학술적, 포교적 움직임이 왕성하다. # # # 또한 무아론까지 들먹이면서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까지 접목하는 등 유사과학적인 접근까지 허다하다. # # #

실제로 20세기 초 흥미롭게도 양자역학과 동양철학을 접목시키려는 움직임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닐스 보어 등이 그 대표적. 다만 유의할 것은 기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도가 크게 늘면서 불교 뿐만 아니라 도교의 음양론부터 유교주역까지 두루 실험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들은 종교를 자신의 도구로서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것이다. 처음부터 양자역학이 서양식 관념인식에서 생각하니 답이 없어서 동양사상에서 힌트를 얻고자 접근했을 뿐이었지, 진심으로 동양사상에서 도를 얻고자 접근하진 않았다. 그래서 이들의 불교 및 동양사상에 대한 이해에는 편파적이고 부족한 부분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 불교 측에서 이들을 들먹이면서 자신의 종교를 홍보하는 건 처음부터 오류였던 셈이다.[14]

하지만 위에서 보면 알겠지만 이는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일 뿐, 불교의 교리는 위의 환생설처럼 반증 불가능한 것도 많다. 또한 불경의 내용은 영적인 수련과 철학적인 사유로 저작되기에 형이상학적인 내용도 많은데, 과학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특정 이론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주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불교를 과학으로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는 셈. 또한 불교의 내용이 보다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에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고, 때문에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사실 어느 종교나 그 종교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종교와 철학이 융합하는 경우는 존재한다.

물론 불교 내에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이제열 불교경전연구원장은 이런 불교의 행태를 창조과학과 똑같은 짓이라 지적했다. #

3.3.1. 반론

불교계 내에서도 현대사회에 적응하고 발전해나가려면 현대과학의 결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오류로 밝혀진 낡은 내용들을 버려야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달라이라마.
"나는 더이상 수미산을 믿지 않는다. 이는 사성제(四聖諦 苦集滅道)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주론이 아니라) 사성제에 있다. 부처는 인도와 태국의 크기를 잰 적이 없다. 부처는 지질학자가 아니다. (사성제는) 지구가 구형인지 평평한지와 관계 없다. 하하하하. 빅뱅이론을 우리 불교도들은 매우 쉽게 받아들인다.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빅뱅은 한 차례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전, 그그전...' 하는 식으로 무한 번 있었다. 하나의 빅뱅이 일어나려면 원인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직전의 빅뱅이다. 그런 식으로 끝없이 과거의 빅뱅으로 연결된다. 불교 우주론은 성주괴공(性住壞空)이 끝없이 반복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과학과 기술을 좋아했다. 인도로 망명한 후에 과학자들과 대화와 토론을 했다. 어느 날 한 미국인 선불교도에게 '과학자와 토론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자 그가 말했다. "조심하세요. 과학은 종교를 살해합니다." 그때 산스크리트어 불경이 생각났다. 부처님은 "내 말을 나에 대한 귀의나 믿음을 이유로 받아들이지 말고 철저히 조사하고 실험해 본 다음에 받아들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과학자들과의 대화는 전혀 위험한 일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이 아직도 불교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더이상 수미산은 믿지 않는다. 그런다고 불교가 위태로와지는 것은 아니다. 하하하하 하하하. 기본적으로 사성제와 순수한 의식과 이런 (수미산을 믿는) 무지의 제거 가능성에 대해서, 현명하고 실제적인 과학자들은 그냥 부인하지 않고 흥미를 보인다."#

달라이라마는 Mind and Life라는 과학자, 심리학자, 교육자 등과 불교학자들이 교류하는 컨퍼런스를 장시간 주최해왔으며, 유사과학적인 연구가 아닌가하는 의심과는 달리 이 컨퍼런스에는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참석하였다.

전통불교 교리들 중 여러가지가 현대과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미국의 불교학자 도널드 S.로페즈 박사는 불교의 관점에서 연구를 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Buddhism and Science : A Guide for the Perplexed (Buddhism and Modernity)#

현시점에서 볼 때 서구권을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불교와 과학과의 상호교류 가능성에 대한 연구는 단순히 창조과학이나 유사과학으로 치부될 일만은 아니다. 국내에서도 서구의 연구 성과를 받아들여, 카이스트 대학교에는 18년 3월에 명상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그 소장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초기부파불교를 전공한 미산스님이다.



미산스님이 카이스트 명상과학연구소에서 발표한 강연. 보다시피 전통적인 불교교리보다는 명상을 키워드로 접근하고 있으며, 요새 성행하는 통섭 및 융복합 연구의 관점이지 불교교리를 모두 과학으로 증명하려는 경향은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단순히 양자역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 하면서 현대과학이 곧 불교의 진리를 밝힌다며 호가호위하면서 불교를 홍보하는 과거의 견해를 반성하고, 명상과 심리학, 그리고 윤리학의 관점에서 다각적으로 과학과 접촉이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4. 정치적 폭력에 대한 비판

평화의 종교라는 미명과 달리, 불교 또한 정치적 폭력 세력으로 변질하여 타 종교권에 대해 문화 등으로 침략을 행한 적이 있으며, 한국, 중국,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준 선불교의 무아론, 열반론, 번뇌론이 전체주의 파시즘에 적합하다는 주장도 제기된 적 있다. 실제로 난징대학살중국인의 번뇌를 없애주는 일본 불교의 자비라며 정당화한 적이 있다.#

일각에서는 일본 불교만의 특징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일본 불교의 폭력 그 이전부터 불교가 어느 정도의 폭력성이나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실제로 불교의 교조인 석가모니도 기존 바라문교의 승려들의 교리와 수행을 외도(外道)라 비하하며[15] 기존 바라문교의 분노를 샀다. 사실 불교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라는 것도 우리가 진리이니 관용을 베푼다는 의미가 크다.[16]

게다가 석가는 범망경(梵網經)에서 근본적인 입장은 타종교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으므로 존중해야한다고 하지만 [17] 실제로 범망경에서 그런 구절이 없으며, 되려 대승불교 입장에선 전분사견(全分邪見)중에 하나인 잡사견(雜邪見)에 해당될 수 있다.
넷째 잡사견(雜邪見)이라 함은, 여기에 또 네 가지가 있다. 하나는 치우치게 고집 하는 것이니, 대승에 집착하여 소승을 비방하거나 치우치게 일부를 고집 하는 것이다. 둘은 여러 가지로 믿는 것이나. 비록 불가의 정법을 저버리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외도의 말한 바에도 역시 도리가 있다”고 말하고, 또 “귀신에게도 거룩한 힘이 있다”고 말하며, 마치 “유가(儒家) · 도가(道家) · 불가(佛家) 세 종교가 한결같이 일치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셋은 잠시 동안 소승을 생각하는 것이나, 작은 도(小道)에 의하여 의혹을 끊으려고 한 연후에 다시 대승의 행을 닦는 것이다. 넷은 뜻을 생각하며 치우치게 그르치는 것이니, 소리를 따라 뜻을 취하면서 다섯 잘못(五過)을 일으키는 따위이다.#

물론 불교계에서는 살생을 금지하는 평화적인 구절 등을 언급하며 "저건 불교가 아니다. 일부의 문제다."라며 변호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불교에서도 대승불교가 흥기한 이후, 방편론의 강조와 함께 자기 방위적 물리력 행사에 대해서까지 무작정 반대하지는 않았다. 승병이 발호해 무력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고 아케치 미츠히데가 "무장의 거짓말은 무략이라 하고, 승려의 거짓말은 방편이라고 하니, 그 사이에 끼인 백성들만 가엾구나"고 한탄했다는 것이 유명.

문제는 이런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전부 기독교 광신도로 매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인 기독교인 중에 불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본 문서에서의 불교 비판의 출처는 무신론자들이나 회의주의자, 불교 승려들인 경우가 많다. 이들은 기독교인도 아닐 뿐더러 특정 종교를 위해서가 아닌, 지식과 이성으로 불교의 자화자찬을 비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불교인들은 이들의 비판을 수용하기보다는 아무런 근거없이 기독교의 스파이로 몰아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4.1. 반론

석가의 바라문교 비판은 어디까지나 지성적인 비판이었고 정치적인 폭력이나 물리적인 압력을 가하는 데에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비판들은 대부분 합리적인 비판이었다. 사실 석가가 바라문교를 외도라고 욕하는 것은, 기독교로 치자면 예수가 바리사이나 사두가이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하는 것과 매한가지다. 또한 타 종교에 대한, 특히 기존 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종교가 성립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건이다. 새로운 사상이든 종교이든 기존의 것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매개로 탄생하므로. 즉, 종교인 만큼 자기 종교에 대한 우월의식은 어느정도 지닐 수 밖에 없다는 태생적 한계는 지니고 있다.

또한 특히 불교계 내에서는 이단이라는 개념이 약한 것도 생각해보아야 한다. 대표적으로 동북아시아의 전통 불교계는 선종을 제외하고는 다양한 종파가 공존하고 있는 구조였다. 이는 당연한 것이, 불교의 구원체계 자체가 독자성을 띄고 있으며 무슨 가르침을 받던 간에 적멸만 이루면 상관없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교리에 대해서 개방적인 상황이다 보니 대승 불교만 하더라도 다소 자유로운 철학적 사유가 마음껏 합쳐져서 다양한 종파가 태어나 발전할 수 있었다. #

이러한 정신은 아함경에서 석가의 말씀에서 비롯될 수 있다.
我不與世間諍,世間與我諍。所以者何? 比丘! 若如法語者,不與世間諍。
나는 세상과 다투지 않는다. 세상이 나와 다투는구나. 무슨 까닭인가? 비구들이여! 만일 법다이 말하는 사람이라면 세상과 다투지 않기 때문이다.
雜阿含 제2권 37, 「我經」에서#

이러한 정신은 불교를 국시로 했던 아쇼카 왕의 통일왕조의 정책에서도 드러난다.
인도 역사상 최초로 통일 국가를 완성한 후 불교의 정법에 의한 정치를 이상으로 했던 아쇼카(B.C.272∼232 재위) 왕도 비문 칙령에서, “자신의 종교만을 존중하고 다른 종교를 비난하지 말라.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종교를 성장시킬 수 있으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도 도움을 주는 것이다. 행동이 그와 같지 않으면 자신의 종교의 무덤을 파는 것이며 또한 다른 이의 종교에 해를 끼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른 모든 이의 종교의 교의에도 귀기울이도록 하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관용과 이해의 정신은 불교가 2500년에 거친 긴 역사를 통해서 전쟁과 어떠한 박해의 사례도 없게 하였던 것이다. [18]

5. 일본 불교승병제국주의 협력 논란

욕망의 이승을 오늘 하직하고 미타의 곁으로 가는 기쁨이여
도조 히데키의 유언#
자비심으로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더 나은 보살행은 없다.
승려 난텐보 [B]
선에는 특별한 교리도 철학도, 일련의 개념도 지적인 법칙도 없다. ……
선은 아나키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민주주의, 무신론이나 관념론,
혹은 어떤 정치적·경제적 독단론과도 결합할 수 있다.
ㅡ 승려 스즈키 다이세쓰 데이타로 [B]
동아시아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기 위해 불교의 대자대비 정신을 발휘하여 우리는 때로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게 한 명을 죽이는"자비의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다. 대승불교는 이를 매우 진지하게 승인한다.
일본의 불교 지도자
ㅡ 크리스토퍼 히친스의 증언

일본의 경우, 센코쿠 시대엔 말이 승병이지 무사들이 승려인 척했던 게 태반인[21] 소헤이처럼 전쟁의 도구로 쓰였다. 그리고 도쿠가와 막부 시기에 불교 측에서 "부처극락 야소지옥"을 외치며 일본 내 가톨릭 신자들을 박해한 기록도 있다.[22]

일본 불교 지도자들은 일본군국주의에 사상적 바탕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군국주의에 뛰어들어 행동하기도 했다.[23] 대표적인 것이 일본 식민지에 대한 불교 전도 사업인데, 일본의 주요 불교도들은 "중국아시아 나머지 지역의 불교는 후진적이고 수동적이며 사회적 요구에 무관심한 반면에, 일본 불교는 능동적이고 사회 참여적이며 과학적이기 때문에, 일본 불교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참된 불교"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일본의 참된 불교를 아시아의 민족들, 심지어 서양인에게까지 전할 의무가 있다고 느꼈다. 또한 식민지 곳곳에 전파된 일본 불교의 은 그 지역의 일본군에게 든든한 사상적 뒷받침이 되었다.

이 문제는 일본 조동종 승려였던 종교학자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rian 'Daizen' Victoria)가 쓴 『전쟁과 선(禪)』(Zen at War), 그리고 『불교 파시즘』(Zen war stories)을 통해 제기되었다. 이 두 책에서는 일본 불교가 어떻게 전쟁을 옹호했는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도조 히데키는 선불교의 생사일여(生死一如)라는 구결을 해석해서 《전진훈(戰陣訓)》을 내서 군인들에게 옥쇄를 강요하던가[24] 사형 직전에도 어떤 반성도 안하고 정토종으로 개종한 이유도 불심과 염불만 있다면 누구든 성불할 수 있다는 정토종 특유의 교리 때문이었다.[25] 이보다 더 쇼킹한 경우가 있는데, 승려 도모마쓰 엔타이는 《유족독본(遺族讀本)》을 내놓으면서 남편이 전사한 건 누구의 책임도 아닌 자업자득이라는 마구니도 지옥에 실직할 고인드립을 저지르고 다녔다.#

일본 불교 특유의 폭력적인 승려 양성 문화도 일본군 병영부조리에 영향을 끼쳤다는 설이 있다. 실제로 묵조선(조동종)과 진언종에서는 사찰 내 똥군기가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는 편이다. 물론 불교가 일본군 병영부조리의 전적인 원인이 된 것은 아니지만, 문화적인 영향을 끼친 책임을 부정할 순 없다.

스즈키 데이타로, 야스타니 하쿠운 등 불교 지도자들은 전쟁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제국주의의 편에서 노력함으로서 전후 일본에서 좌익 정당이 성장하지 못하게 막았으며 일본회의우익 단체의 기반이 됨으로써 애국심을 고취하고, 일본이 전쟁 당시 잔혹 행위를 저지른 것이나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고 암시하는 것을 모두 교과서에서 제거하려 했다. 도리어 서양에 불교를 전파하며 "너희 서양의 기독교는 폭력적이며[26] 우리 불교가 참되고 평화적인 종교"라며 포교했는데, 68운동 당시 기독교 전통을 거부하고 오리엔탈리즘에 영향을 받은 서양인들이 일본 불교의 전략에 제대로 낚여버렸다.[27] 아직도 일본에서는 타 종교를 깎아내리며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식이라는 반응 및 언플이 많다.# # # # #

그러나 현재 일본에선 불교 사찰이 문을 닫고 있다고 한다. 일본 불교가 유럽의 기독교를 몰락시키는 데 결정타를 날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과응보라고도 볼 수 있는 셈. ##

6. 로힝야족 학살 옹호및 적극적인 참여

미얀마의 불교는 현재 버마족 군부가 행하는 로힝야족 학살을 찬성하며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는데, 먼저 불교계가 무조건[28] 미얀마를 옹호한다고 보는 것은 편견임을 밝힌다. 하지만 버마인이 아닌 불교 신도들도 몇몇이 로힝야족을 종교적으로 증오하는 건 사실이며, 불교계에서도 버마 불교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데, 이러한 불교 프레임이 로힝야 학살을 옹호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여기서는 의견이 갈린다.

6.1. 미얀마 불교에 대한 옹호 의견.

로힝야 사태는 과거 벵골인이었던 로힝야족영국의 식민지배 시절 영국의 비호 아래 이주하여, 미얀마인들의 토지를 빼앗고 박해를 가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즉, 이 문제는 19세기 영국의 제국주의 정책과 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이 가장 큰 원인이다. 또한 로힝야 족의 무제한적인 인구 증가는 실제로 기존의 미얀마인들의 문화와 사회에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

사태의 핵심은 로힝야 족의 토지에 대한 소유권과 거주권 등을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지 여부이다. 친일파 토지 환수 문제와 비슷하게 사법적인 수단으로 접근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불교계 언론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영국이 분쟁의 씨앗을 뿌린 민족분쟁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본다. 그 외에 늘어나는 로힝야 인구와 이에 비해 사라져가는 버마인들의 정체성과 불교를 지켜야하는 의무감, 불교민족주의와 미얀마 군부의 야욕 등도 원인으로 꼽고 있다. 즉, 버마족과 로힝야족 모두가 피해자라고 보고 있으며 불교 교리적인 영향은 적거나 아예 없다고 보고 있다. ### 즉, 불교의 자체의 잘못은 아예 아니라는 것.

게다가 네이버 등에서는 극단적인 댓글이 판치고 있었다. ###

6.2. 옹호에 대한 반박

위의 옹호의견은 버마족=불교=선, 로힝야족=이슬람=악이라는, 편견에 기초한 이분법적인 프레임에 의존하고 있다.

첫째, 버마족은 불교를 믿는 평화 민족이 아니다. 과거 버마족은 인도네시아같은 불교 국가인 태국을 공격하고[29], 타 민족을 학살한 전과가 있다.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끝없이 미얀마의 민족주의에 영향을 끼쳐온 미얀마 불교가 이 문제에 연관이 없다고 볼 순 없다.

둘째, 로힝야족이 버마족을 학살한 원인은 이슬람 신앙보다는 버마족이 일본군과 협조하여 로힝야족의 땅을 환수한 것이 크다. 일제의 동남아시아 침략이 시작되자 미얀마인들은 영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하고 일본군에게 협조적으로 대했다. 영국에 의해 땅을 빼앗기고 벵골인과도 차별받던 처지가 나아질 것이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귀축영미의 아시아 침략으로부터 동아시아를 해방하고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겠다는 선전을 하던 일본군은 이들에게 땅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고 점령지의 벵골인들의 농장을 해체하여 땅을 다시 미얀마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이에 이미 그 지역에서 거의 100년을 살아온 로힝야족도 자연히 일본과 미얀마인들에게 앙심을 품었다.

영국은 이런 분노를 대일항전에 있어 전선 유지에 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로힝야족을 무장시켰는데, 이런 영국의 의도와는 반대로 로힝야족은 일본군과 싸우는데는 별 관심이 없고, 농토를 돌려받은 미얀마인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1942년 아라칸주에서만 아라칸인들을 2만명이나 죽였다. 분명 로힝야족이 버마족을 학살한 것은 악행이 맞지만, 버마족도 극악무도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과 잠깐[30]이나마 협력했고, 이슬람 신앙이 로힝야족과 버마족의 갈등에 영향이 없지는[31] 않겠지만 단순히 이슬람에 미친 광신도 테러리스트들이 불교인들을 죽였다는 불교신자들의 주장은 비약이 크다.

셋째, 결국에는 미얀마 불교의 행위도 과거 기독교, 이슬람, 힌두교 등이 행했던 종교간 보복과 서로의 악행에 대한 앙갚음을 하는 것 뿐이다. 미얀마 불교의 논리대로라면 과거 기독교가 행했던 십자군 전쟁종교재판 또한 이슬람의 침략과 로마 제국의 박해에 고통받던 기독교의 보복으로 정당화되고, 알 카에다, ISIL의 테러행위 또한 서구 국가에 당했던 식민지배에 대한 보복으로 정당화될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 신자들이 자신의 종교에 대해 내세운 것은, "타 종교의 종교 전쟁과 상호간의 보복[32]은 그들이 그냥 사악해서 행한 것이고, 우리 불교는 증오와 원한의 연쇄와 업보를 끓는 평화적인 종교"라며 선전한 데 있다. 그런데 미얀마불교는 증오와 원한의 연쇄와 업보를 불교의 이름을 빌어 정당화하고, 그러한 정당화에 대한 비판마저 불교 신자들은 "불교는 평화의 종교"라는 편견으로 차단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불교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옹호만큼 만만찮다. 조계종과 신대승네트워크가 타 종교와 운동권과 힘을 합쳐 반대 시위를 펼쳤고, # 거기서 신대승네트워크는 로힝야족 난민 인권실태에 대한 강연회를 열기도 했다. #

1. 한국 불교의 친일 논란

佛敎中央敎務院
慰問金募集

시내 수송정(壽松町) 조선불교중앙교무원(朝鮮佛敎中央敎務院)에서는 비상시국을 극복하기 위하야 부내 각 사암(寺庵)과 포교소(布敎所)를 위시하야 황군 위문금을 모집중이든 바 우선 二白五十一원 六十一전을 경성부윤을 통하야 헌납하였으며 게속하야 전 조선 一千五百여 사찰 승려(僧侶)와 신도 二十三萬명을 총동원하야 황군원호에 유루 없도록 지령을 발하고 위문군 모집, 출동부대 송영접대, 출동군인가족 유족의 위문격려 등 총후의 임무에 성심을 다하고 있다.

1937. 09. 02. 동아일보#

일단, 당시 국내의 모든 종교가 친일논란에 벗어날 수 없다는 전제를 깔고 시작을 해야 한다. 친일 문제는 당시 한국의 모든 종교가 거의 피해가기 힘든 주홍글씨와 같다고 볼 수 있다.[33]

그렇지만 불교는 가장 일제와 마찰이 적었고, 개화사상가이자 친일 승려이동인의 적극적인 협력도 있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일제에 순응적인 종교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조선은 망할 때까지 숭유억불을 유지하고 있었기에 불교의 자유에 제약이 심했던 데다, 임진왜란승병 활약 이후로 조선 후기에 불교의 자유가 조금이나마 허용되긴 했어도 아직까지도 승려의 사회적 입지는 천민이었다. 게다가 일본도 막 신토를 앞세운 폐불훼석으로 불교가 많이 된서리를 맞아 침체되어 있었다 뿐이지, 한국보다 불교가 주류였던 사회다 보니, 조선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불교를 내세워 접근하기 딱 좋았다.

어느 시대나 상대국에 침투할 때는 상대국의 반발이나 경계심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상대국과 자국의 공통점을 찾아내 그 방면으로 접근한다던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일본의 경우는 단지 그 수단 가운데 불교가 있었을 뿐이므로 불교가 마냥 일제에 순응적이고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던 종교로 보기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조선 불교 입장에서는 조선 왕조 당시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억압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조보단 일제가 낫다"는 생각을 가진 승려들이 많았다.

독립운동도 다른 종교계보다 불교계가 가장 소극적이었다는 주장도 많은데, 3.1운동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이 가장 낮았고[34] 내세울 만한 독립운동가들 또한 한용운백용성, 김법린 정도 밖에 없다는 것.[35][36]

이완용은 사찰령 이후, 조선 불교를 옹호하기 위한 명목으로 1917년 2월 불교옹호회를 설립하였지만, 실제로는 조선인을 일제에 충실한 신민으로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불교 옹호회는 불교 신자인 조선 귀족들이 주로 맡았고,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해 해산되었다. 이완용은 후에 조선총독부가 개설한 삼십본산연합사무소란 불교계 중앙 기관에 평의원장으로 활동하였고, 삼십본산연합사무소가 폐지된 후 조선불교중앙교무원으로 개편되어 민족주의 성향의 불교인들을 겁박해 완벽한 친일 성향의 기관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즉, 이완용은 총독부와 함께 조선내 불교의 친일화의 기틀을 어느정도 닦아놓은 셈이다.

이종욱승려로 활동하면서 월정사 주지 등을 역임했다.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고, 1937년에는 여러 본산의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의 설립을 계획하고 있던 중에 총본산건설위원회의 대표직을 맡기도 했다. 이종욱은 창씨개명에까지 참여하여 廣田鍾郁(히로타 쇼이쿠)라는 일본식 이름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미군정 시기 미국에 충성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친일단체 국민회에 몸담은 적이 있다. 광복 이후에도 친일 행적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고 1951년에는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불교계 대표인 중앙총무원장을 지내며 떵떵거렸다.

최범술은 한때 덴노 암살을 모의했으며 항일비밀단체 '만당(卍堂)'[37]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으나, 실체적인 활동도 하지 못하고 일제에게 압력만 받고[38] 변질되어 북지황군위문단이라는 관립 친일 불교단체에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친일 행적은 책임지지 않았고, 독립운동 경력만 인정받아[39] 대한민국 초기에 제원의원으로까지 활동하게 되었다.

권상로는 "소헤이(僧兵)처럼 한국의 승려들도 태평양전쟁에 지원병으로 참전해야 한다"는 소리를 지껄였고, 일본 승려인 누카리야 가이텐과 함께 불교계에까지 식민사관을 퍼뜨리는 데 일조했다.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불교서적과 연구를 해왔으며, 심지어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 했다.아래의 위키백과 권상로 문서를 찾아보면 더 많은 정보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변설호는 일제가 사명당 비석을 네 토막내는 데 일조했음에도 단죄받지도 않고 89살까지 천수를 누리고 살았다.

위의 인물들 이외에도 이회광 등의 친일 불교인사들이 많은데, 이들의 친일 행적은 다른 친일인사들이 그러했듯 청산되지도 처벌되지도 않았다. 한국에서 불교계의 친일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비판을 가하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인 1993년태고종 승려인 임혜봉이 <친일불교론>(상하2권)을 펴내면서의 일이다.## 임종국 선생이 명저 <친일문학론>을 발표한 것이 1966년. 친일불교론을 처음 펴낼 때에도 친일인사로 거론된 후손들이나 관련자들의 항의소동으로 출판이 1년간 유보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으며, 2005년 출간한 <친일승려 108인>에서 친일행적을 밝혔던 최범술의 유족에게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기도 했다(판결은 무죄).# 임혜봉은 이밖에도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의 편찬위원을 맡았고,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등 일제강점기 당시 불교계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연구해 저서를 내고 있다.

1.1. 황우석 사건 당시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모함

2005년 황우석 사태 당시, 단지 황우석이 불교 신자라는 이유로(...) "개신교천주교가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방해하려 황우석을 모함했다"음모론에 낚인 당시 은해사 주지 법타 스님 등 불교 신자들이 "일제 시대 당시 친일했던 천주교가 불교 신자인 황우석을 모함하고 있다"는 주장을 한 적 있다. 조계종 총무원장 지관 스님 역시 황우석을 옹호했다.

사실 이때 황우석에게 낚였던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므로(...) 황우석을 홍호했다는 것이 큰 흠결까지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서 종교를 끌어들였다는 점이 문제가 되는 것. 김수환 추기경의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김 추기경의 친일 논란은 사실무근이라는 쪽으로 판명이 났다. 항목 참조. 본래 이 항목에도 반론이 제시되어 있었지만 김수환 추기경의 항목을 보는 것이 더 자세하다.[40]

당연히 당시 불교계 내부에서도 단순히 불교신자라는 이유로 황우석의 잘못을 옹호하는 것이 맞냐는 반대 의견이 나왔었다. 불교평론의 주간이었던 조성택 고려대 교수는 "한국의 불교인들이 그토록 시달려온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불교인들이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의문이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렇다면 이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경전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4가지 준칙 가운데 하나인 '사람에 의존하지 말고 법에 의존하라'는 준칙은 이 경우에도 해당될 것이다."라며 불교계 주류 인사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황우석을 지지하는 사태에 대해 지적했고# 동국대 윤리문화학과 허남결 교수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사건'의 본질은 과학적 진실성과 연구용 난자의 공급을 둘러싼 도덕성 문제이지 결코 개인의 성품이나 말솜씨, 그리고 그가 신심 깊은 불자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불교계 일각의 황우석 지지자들이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거나 애써 알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반전이라고 하면 반전인데, 황우석원래 가톨릭 신자였으며, 안드레아라는 세례명까지 있었다. ## 이뭐병.

1.2. 달라이 라마신사참배 논란

It should be mentioned that the Dalai Lama visited 1980 also the Yasukuni Shrine for the war dead, including war criminals, in Tokyo which forms a symbolic center for the Japanese right-wing extremists.

달라이라마도 1980년대에 야스쿠니 신사를 방문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한다. 야스쿠니 신사는 전쟁이 죽은 후, 도쿄의 전범을 포함한 일본 극우들의 상징적인 중심이 되었다.
H.H. The 14th Dalai Lama and the Japanese Buddhists An Account and Analysis of Complicated Interactions. Martin Repp #

제14대 달라이 라마신사참배, 그것도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참배를 행했다. 아카이브# 메이지 신사에 참배했다는 말이 있지만# 위와 같이 달라이 라마의 야스쿠니 방문을 인정하고 있는 학술 자료도 존재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에 있어서도 흑역사로 간주되는 사건인데, 어쨌거나 전범들이 안치된 곳이니 만큼 평소 평화를 강조하는 그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외면했다고 보일 소지가 있는 모순적인 행동임은 사실이다. 달라이 라마 입장에서는 단순히 "전몰자들이 모셔진 곳"이라는 정보만 접한 상태에서 모르고 참배했거나 이용당한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반전주의의 상징 같은 존재인 달라이라마의 평소 행보를 생각해본다면 이쪽이 정답.

하지만 티베트 불교의 지도자인 동시에 티베트 독립운동이라는 정치적 운동의 구심점이기도 한 달라이 라마의 입장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없지 않은 것이 세계적으로 중국의 서슬 아래서 티베트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달라이 라마를 초청해 주는 몇 안 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일본이다.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위구르인의 대모로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로 지명된 바가 있던 위구르 독립운동가 레비야 카디르 여사도 2012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여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가 있는데, 양자 모두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논리에서 행한 것이었다는 변론도 제시될 수 있는 것. 한국도 전쟁 피해 당사국이니만큼 달라이 라마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문제가 있고 비판받을 점임은 틀림없지만 티베트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그의 입장에서 참작의 소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달라이 라마는 본 항목에서 거론한 로힝야 사태에 대해서도 "석가모니라면 로힝야인을 도왔을 것"이라며 아웅 산 수지를 향해 로힝야인을 돕는 것이 마땅하다고 미얀마 정부를 비판했기 때문에##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달라이 라마의 흑역사이기는 하지만 달라이 라마의 인격적 문제 또는 반불교 논지까지 끌어들이기는 힘들다는 의견이 있다.

2. 방생 문화에 대한 비판

일단 불교의 방생 문화는 모든 생명이 평등하며 소중히 하자는 주장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문제는, 생명을 잡아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았다가 다시 풀어주는 것이 과연 도덕적으로 올바른가에 있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흉기와 함께 길가던 타인을 납치해 살해 위협을 하다가, 갑자기 풀어주며, "나는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죽을 운명이었던 너를 풀어주겠다."며 주장한다면 말이 되지 않는 논리다.

또한 현대에 들어서는 아예 따로 방생 법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 경우 아주머니들이 물고기나 거북을 판다. 하지만 붉은귀거북이나 배스 등 외래종을 풀어주기도 해서 생태계를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문제점이 제기된다.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나온 생물을 사다가 풀어주는 건 자비라고 보기 힘들다. 막 풀어줬다가 얼마 못 가 떼죽음 당하기도 하고.##

때문에 과거 붉은귀거북이 문제가 되어 네이버 기사에 나온 적 있었는데#, 거기서 한 네티즌이 불교의 방생문화를 비판하자 다른 네티즌들이 "너 기독교인이지?"라며 기독교를 비난하는 답글을 올린 적 있다. 이 네티즌이 기독교인이라서 불교를 공격했다는 증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교 네티즌들의 극성 때문에 위의 댓글은 삭제되어야만 했다. 실제 불교 신자들의 방생문화가 피해를 준 실제 사례가 존재하는데 말이다.

3. 현재

반기독교와 비교할 때 반불교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다소 적은 편이다. 종교의 교리상 선교의 의무가 기독교처럼 강하지 않아 외부에 민폐로 여겨지는 행위도 비교적 덜하기도 하고, 기독교, 이슬람처럼 특정한 을 숭배하는 종교라기보다는 자기 수련에 중점을 두는 철학 개념으로 이해하는 불교도가 많아서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2000년대만 하더라도 넷상에 안티불교 활동이 꽤 있었으며, 특히 한 안티불교 블로그의 상당한 안티활동이 맹위를 떨친 이후로 안티불교 사이트도 몇몇 만들어져 불교의 교리적 비판과 동시에 스님들의 비도덕을 낱낱히 밝혀냈었다. 하지만 불교계에서 훼불행위라며 경계심이 꽤 높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자성의 목소리도 없이 강경하게 대했다. # #

결국 불교측에서 직접 손을 써 안티불교의 중심격인 블로그와 까페까지 폐쇄시켰다 #. 결국 이 때문에 반불교 활동은 지리멸렬하게 흩어졌다. 이렇게 중심 커뮤니티가 망했다고 심한 타격을 입은 이유는, 무신론자들이 대부분인 당시 안티불교 주동자들에 비하여 나머지 참가자들이 대부분 극단적 기독교인인 탓이 컸기 때문이다.

즉, 주동자들은 순수한 불교 비판을 위해 반불교 운동을 시행했다면, 밑에 이들은 안티기독교에 대한 미러링을 위해 반불교를 이용했다.[41] 이들은 다른 군소 안티불교까페를 여럿 만들다가 정작 불교비판 자체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자기 종교에 관한 전도만 하다 보니 별 호응도 못 받았고 폐쇄만 반복하고 사라졌다. 역사와 관련되어 불교를 비판하는 커뮤니티의 경우보다 기독교와 관련하여 불교를 비판하는 커뮤니티는 공감을 사지 못했다.

결국 반불교 운동은 무신론 운동으로 편입하였고, 무신론에서 반불교 성향이 몇몇 보일 정도로 쇠퇴하였다. 현재도 불교 측에선 '불교를 배워야 안티를 하고 공부해도 심오한 교리 때문에 안티 못한다'라는 당당한 입장이다. 사실 교리가 다소 직설적이라 알아듣기 좋은 도가 종교, 아브라함계 종교와는 다르게 불교는 교리 설파에 대해서 현학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일반 신도가 교리에 대한 공부가 쉽지 않고, 거기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쉽지 않다.

즉, 현재 불교에 호의적인 분위기는 불교에 대해 비판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정보가 다른 종교에 비해 적다는 것에 있다. 때문에 현재 대부분의 불교신자들은 불교가 과학적, 철학적이며 평화적이고 윤리적이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적인 사례에서 보듯, 제국주의나 극단적 민족주의에 사상적 기초를 제공, 정치적 폭력에 대한 협력, 핵심적인 기본 교리에까지 박혀있는 남존여비 사상 등, 불교가 다른 종교보다 낫다고 보기 힘들다는 비판이 많다. 불교가 다른 종교를 낮추면서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것 자체도 문화 상대주의적으로 볼 때도 옳지 않고, 불교가 비판한 타 종교에 대한 단점이나 위험성은 불교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또한 이러한 비판이 있을 때, 불교신자들이 합리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대해 재고해 보기보단, 도리어 비판자들을 타 종교의 스파이로 몰거나 타 종교의 과오만 강조하며 비판을 차단하려 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불교외의 다른 종교나, 반종교적인 무신론, 종교로 구분되지 않는 이데올로기조차도 비판 대상이 되는 상황에서 불교에 대한 비판만 회피하려는 태도는 공정하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건전한 신앙심을 가지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4. 기타 불교의 비행

종교적 교리와는 상관이 약하거나 없는 차원에서 신자들의 잘못이나 한계점도 불교에서 존재한다. 앞서 있던 친일불교도 있고 후술할 여러가지 비행들이 계속 속출하고 있는 실상이다. 유사불교인들이나 비인가 사찰이 의심스러운 경우를 빼놓고 본다면 다음과 같다.

비인가 사찰이나 유사불교인의 경우 소위 정통파고 할 수가 없어 그다지 신뢰할 수가 없다. 스님이라면 구족계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안 받고 설법하는 꼴이라 기독교로 치자면 이단과 같은 경우다. 한국불교의 주류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에서도 유사 포교당의 영업을 단속해야한다는 목소리가 크다. #

5. 함께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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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량역천(身良役賤). 신분은 양민인데 직업이 천하다는 뜻이다. 승려가 양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승려 자체가 신분과 상관이 없었고 양반 승려 천민 승려도 있었으나 전부 천대받았다.[2] 불교에서 업은 현세에 과보를 받는 업과 후생에 받는 업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의도가 수반되지 않는 업은 그 과보를 온전히 산출하지 못 한다. 그러므로 의도의 개입 여부는 불교 윤리학에서 핵심적인 자리를 차지한다.[3] 음차하자면 단월(檀越, danapati)이다. 사어이기에 시주로 대체.[4] 대정신수대장경 제 53책 100권[A] 범어적 해석은 이 링크를 참고[6] 조선왕조실록사전[A] 범어적 해석은 이 링크를 참고[8] 여래, 응공, 정변지 등을 말한다.[9] 겁탁(전쟁, 기근, 질병), 견탁(사악한 견해, 법도), 번뇌탁(마음에 번뇌가 가득함), 중생탁(사람이 인륜 도덕을 저버리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 명탁(수명이 차례로 단축되는 것)[10] 삼독(三毒)이라고 하여, 성냄, 탐욕, 어리석음을 말한다. 각자 지옥, 아귀, 축생을 뜻하기도 한다.[11] 생, 노, 병, 사, 애별리고(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괴로움), 원증회고(원수와 만나야 하는 괴로움), 구부득고(원하는 것을 못 구하는 괴로움), 오음성고(오온에서의 집착에서부터의 괴로움)[12] 해석은 #[13] 대체적으로는, 법화경이 아닌 다른 경전은 깨달음이 낮은 이를 위한 설법이고,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이들을 위한 설법이 법화경이라는 식이다.[14] 닐스 보어만 하더라도 예전엔 루터교 신자였지만 나중엔 불가지론자로 변모했다.#[15] 석가는 바라문교의 고행에 대해, 태어나 산다는 것 자체가 고행인데 굳이 고행을 해야 하냐며 부질없는 짓이라고 했다. 석가는 지나친 고행은 오히려 제 몸만 버리고 깨달음을 얻는 데는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가르치는 입장이었다.[16] 정확히 말하자면 본지수적에 입각하여 타 종교를 자신의 종교를 하위호환으로 보기 때문이다. 원래 종교(宗敎)라는 말 자체가 '진리의 궁극적인 경지(siddhānta)'이라는 말로 불교를 스스로 높히 부르는 말이었다.[17] 여래는 이미 이러한 여러 견해들의 장단점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보다도 더 휼륭한 것도 알고 있지만 지식에 집착함이 없다.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적멸과 해탈을 얻었다.(남만대장경 6, 52-53)#[18] '모든 종교는 그 자리에 있어야 하며, 그들 모두 순수함과 자제심을 갈구한다(아소카 칙령 Nb7 #)'[B] <불교 파시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B] <불교 파시즘>.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21] 다케다 신겐이나 무사시보 벤케이처럼.[22] 일본 불교는 원래부터 분쟁과 폭력 사태를 일으키며"進者住生極楽 退者無間地獄"(나아가는 자는 극락왕생, 물러나는 자는 무간지옥)을 외치면서 만만찮게 성깔이 있었다.[23] 그 중에서도 특히 앞장선 것이 일련정종이었다.[24] '항상 향당가문(鄕黨家門)을 생각하라,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받지 말아야 하며 죽음으로 오명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따위의 내용.[25] 도죠 히데키의 원래 종교는 국가신토였다.[26] 안창호, 안중근, 여운형, 이상재, 유관순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종교가 기독교였으며, 유럽에서의 수많은 목사와 신부 중에서도 제국주의에 맞서 투쟁한 인물들이 많다.[27] 오리엔탈리즘의 영향으로 불교를 긍정적으로 보는 서양 지식인들은 꽤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리처드 도킨스, 오리아나 팔라치가 그 대표적. 이들이 본 불교는 대개 일본 불교다.[28] 달라이 라마 등은 반대 입장을 밝힌 적도 있다.[29] 이는 태국이 제국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30] 나중에는 일본군의 미얀마인 학살로 반일 국가로 돌아섰다.[31] 실제로 이슬람이 타 종교에 비관용적인가 관용적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32] 사실 이러한 분쟁은 단순히 어느 종교가 악해서 행했다고 보기엔 정치적, 역사적인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한다.[33] 기독교에서는 (기독교 전체로 보면 매우 작은 분율이긴하나) 고신이나 침례회 같이 끝까지 저항한 부류가 있기는 하다.[34] 물론 아예 참여도 하지 못한 가톨릭이나 유교보다는 처지가 나은 편이겠지만.[35] 민족 대표 33인의 종교별 구성은 천도교 15인, 개신교 16인, 불교인 2인이었다. 천도교가 주도한 독립선언에 당시 마침 105인 사건으로 탄압받고 있던 개신교가 적극 참여했고, 가톨릭은 각 단체의 이해관계 때문에 불참, 대종교친일파였던 단군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을 꾸리고 있었다. 유림은 가톨릭처럼 학파별로 참여 여부를 놓고 논쟁하다 뒤늦게 김창숙 등 2인이 참가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이미 모임이 끝나버린 뒤였다.[36] 이외에도 105인 사건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서도 불교의 참여율은 저조한 편이다.[37] 한용운을 당수로 내세운 과격 비밀결사. 이용조, 조학유, 김상호, 김법린등이 창립 멤버였다. 정작 한용운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는 멤버마다 말이 다르다.[38] 애초에 만당의 성향 자체가 과격해서 친일 성향의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 찍혀있었다.[39] 20년대까진 분명히 독립운동 경력이 있었다. 3.1 운동엔 과격시위를 지도했으며, 임시정부와 소통하여 박열이 구입한 폭탄을 운반한 것도 사실이다. 30년대부터는 일제와 친일 불교단체의 압력, 최범술 자신의 친일출신 한계(다이쇼 대학 출신, 삼십본산연합사무소 기초위원)로 인해 실체가 불분명할 뿐이다.[40] 한국 천주교불교와 갈등이 없지는 않지만, 이러한 갈등은 종교 교리를 가지고 일어난 갈등이라기 보다는 특정지역들을 놓고 가톨릭 성지냐 불교 성지냐의 영유권 분쟁에 가깝다. 최소한 한국 천주교나 그 구성원들이 천주교의 이름으로 한국 불교와 구성원들을 공격한 적은 없다.[41] 왜 미러링이냐면, 당시 초기 안티기독교의 주체는 악성 불교도와 환빠였기 때문이다. 이때 이들은 단순히 무신론을 차용할 뿐이었다. 물론 지금의 반기독교 운동은 이들이 쇠퇴하고 나서 무신론자들이 주축이라 이들과 전혀 상관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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