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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병영부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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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명하복
2.1. 내무생활2.2. 장교들의 하극상
3. 구타
3.1. 원인3.2. 실태3.3. 폐해
4. 휴가, 휴식과 재충전의 박탈
4.1. 잘못된 보상 : 음주, 약물, 일본군 위안부, 가혹행위4.2. 반론
5. 부정부패 및 비리6. 원인7. 한국군에 끼친 각종 악영향8.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9. 서브컬처10. 다른 나라의 사례
10.1. 구타10.2. 전투 후 재정비
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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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이지 유신 때 창설된 일본군의 포악성과 일본군 병영의 부조리는 제2차 세계 전쟁에서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줄곧 이어져 제2차 세계 전쟁에 참가한 군대들 가운데 일본군의 포악성과 폭력성은 가장 지독했다.

창의성을 말살한 간부 육성교육, 군 내 고위층 인사들의 교류와 토론 차단으로 인한 질적 저하, 폭력을 통한 강압적 통제가 합쳐져 일본군의 암덩어리로 자리잡았다.

당시 일본군의 막나가던 똥군기를 집약해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하나야 타다시.

중일전쟁에 5년간 종군한 모리가네 센슈는 이러한 일본군의 똥군기를 가리켜 '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 편에 더 가까웠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전장에 투입되거나 장기간에 걸친 초긴장 대치상황이면 구타는 없으니까 낫다고 여길 정도였다.

원칙적으로 군대에서의 폭력은 엄금되었으나,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주로 교육과 훈련을 빙자하여 이루어졌다. 구타로 인한 사망자나 자살자가 나오거나 탈영병이 발생하면 헌병대가 출동했고 이는 간부들의 인사고과에 악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간부들은 '적당한 선'에서 군기를 잡을 것을 요구하였다. 대개 신병인 이등병 생활 6개월 중 많이 벌어졌고, 진급을 하면 그 강도는 약간 낮추어졌다. 일본식 똥군기는 악명이 높았던게, 단순히 육체의 고통만 주는게 아니라 정신적인 수치심까지 안겨주는 데에 있었다.

일본 육군은 한국군이나 미군과 달리 따로 훈련병이라는 제도가 없었고[1] 입대하는 그날부터 이등병이었으며, 이등병이 된 날로부터 6개월간 내무생활과 신병훈련을 겸하여 하였다. 창작물에서 일제강점기에 일본군 이등병이 전쟁터에 나오는 것은 전쟁 초반에는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끝날 무렵에는 군인도 아닌 군무원도 죽창 쥐어주고 싸우라고 할 정도인 상황에서 그 정도는 일반적이었다.

일본군이 이러한 내무부조리들은 그렇게까지 문제삼지는 않았던 원인은 당시 일본 사회가 어렸을 때 가정에서부터,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나 직장에서도 구타와 갈굼이 심했기 때문에 군대의 영내폭력 역시 그런 것의 연장선으로 보았고, "이 정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게 어찌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겠느냐?" 하는 사회적 심리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 자신의 고향 동네에 있는 군부대에 입대하였는데, 지역사회 특성상 친인척, 선후배 등이 엮여있었고, 친척 서열, 사회 서열이 군 계급을 앞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 내무부조리, 가혹행위를 하사관들이 조장한 면도 없지는 않다.

내무부조리도 지역마다, 부대마다 차이가 있었고 동북 지방의 일본군의 기강은 느슨한 편이었고, 다른 부대들도 실전에 나가면 풀어지는 성향이 있었다 한다.

2. 상명하복

명령은 겸손하게 실행한다. 결코 당부당을 논하거나 그 원인과 이유 등을 질문하는 것을 불허한다.
군대내무령 11항
하급자는 상관의 명령에 승복하고 그것은 짐이 직접 명하는 것으로 알라.
군인 칙유

위 두 문구는 상급자의 부당한 명령조차 합리화시키는 근거가 되었다. 그냥 책에 나오는 문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관의 명령에 원인과 이유를 질문하거나 당부당을 논할 경우 '천황 폐하로부터 계급을 받은 선임병에게 감히 말대꾸한다'는 이유로 머리를 몽둥이로 두들겨패서 실명하도록 때리거나 묶어놓고 채찍으로 기절할 때까지 때리는 등 혹독하게 대했다. 그러다 죽으면 '전투 중 전사했다'는 식의 적당한 이유를 대고 고향에는 전사통지서를 보내는 걸로 끝이었다.

일본군에서 무기를 개조하려면 보직을 걸어야 했다. 치하의 방어력을 올리기 위해 철판을 덧댄 지휘관이 '천황의 하사품을 훼손한 죄'로 보직해임 당한 사례가 있다.[2]

평소부터 일본군 지휘관들은 부하들에게 욕설, 폭언, 구타를 하는 등 거의 짐승 대우를 했고, 지휘관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 되면 한 명의 부하라도 더 살리려고 최선을 다하기보다는 부하들을 내버려두고 서슴없이 적전도주를 했다. 또 부하들의 생명을 아무렇지 않게 여겼기에 옥쇄, 반자이 돌격에 집착했다. 옥쇄를 금지시킨 지휘관은 미야자키 시게사부로[3], 쿠리바야시 타다미치[4] 등 소수 뿐이었다. 연합군들은 옥쇄나 반자이 어택을 선택한 일본군 부대는 상대적으로 쉽게 소탕했으나 옥쇄를 금지하고 땅굴, 정글전을 통해 끈질기게 저항하던 위의 소수 지휘관들의 부대에게는 엄청난 피해를 봐야 했다.

2.1. 내무생활

이등병으로 6개월간 내무생활과 교육을 받은 뒤 연대장의 교육검열을 통해 합격자는 일등병으로 진급하였다. 어지간한 고문관, 범죄자, 환자를 빼고는 99% 이상 정시진급하였고, 재수하면 6개월 뒤 재검열을 받는데, 이 때는 무조건 진급시켰다.

그 후 일등병으로 1년을 복무하면 상등병으로 진급시험을 봐야 했는데, 중대당 재수, 삼수, 사수 하는 경우가 수두룩했다. 고참 일병들에게는 '일등병님'이라는 존칭 대신 '2년병님', '3년병님', '고년병(古年兵)님' 등으로 호칭해야 했는데, 이는 장수생 일병들을 우대하기 위함이었다. 대개는 재수하지 않고 상병으로 정시진급한 병사들은 고년차 일병들을 고참으로 우대해야 했고, 심지어는 일병들이 상병들을 구타하기도 했다.[5]

상등병이 되면 연차와 무관히 '상등병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상등병 전역자는 군에서 적응잘하고 체력이 건강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져서, 결혼이나 취업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일부 부대는 이를 배려하여 장수생 고병들이 전역시, 전역 당일 상병으로 진급시켜주고 동시에 제대시켰는데, 이런 상병들은 '영문(營門) 상등병'이라고 비웃음을 당했다.

철저한 계급주의에 입각한 상명하복도 엉터리로 지켜졌는데, 한국군과 달리 일본군은 월별 동기제가 아니라, 연간 전후반기 동기제였다. 즉 1-6월 입대자가 동기, 7-12월 입대자가 동기다. 앞서 말했듯 빡빡한 상등병 진급으로 인해 계급과 짬밥이 어긋나는 현상이 빈번하였고, 부대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개 후임 상등병은 선임 일등병들에게 존칭을 써야 했고, 계급으로 억누르려다 보면 맞기도 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경례는 장교 및 준사관에게만 한다. 그러나 일본군은 특유의 똥군기 때문에 하사관들과 고참병사들에게도 경례를 하였다.[6]

내무생활은 이전의 한국군과 유사하였는데, 내무반은 중간에 통로가 있고 14-16인의 병사가 마주보게 침상이 놓여있었다. 하사관들도 내무생활의 의무가 있었는데, 몇 개의 사병 내무실 사이에 한두개씩 작은 하사관실이 있었고, 4-6인 정도의 오장, 군조급 하사관들이 같이 내무생활을 했다. 조장부터는 독실을 쓸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있는 기혼의 조장들은 영외거주가 가능했고, 이런식으로 조장들이 영외로 나가면 운좋게 고참 군조들이 독실을 쓰기도 했다. 헌병은 대민업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병사들도 영외거주를 하였다.

평시에는 소대, 분대의 편제가 없었고 전시에만 존재했으며, 각 내무반의 반장은 군조급 하사관이 맡았다. 그러나 일과시간 이후에는 특별한 일 없이 병사들의 내무반에 가는 것을 꺼려서, 고참 상등병들이 사실상 내무반장 행세를 했는데, 이들을 '밤의 내무반장'이라고 불렀다.

2.2. 장교들의 하극상

이런 상명하복이 제대로 지켜졌느냐도 계급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병 상호간에는 상명하복이 꽤 심할 정도로 지켜졌고, 하사관과 병 사이에도 마찬가지였다. 장교와 하사관 사이에도 상명하복이 지켜지는 편이었다. 문제는, 장교들 사이에서는 꽤 심할 정도로 하극상과 독단 행동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육군이 특히 심한 편이었는데, 대놓고 말하자면 기 세고 똘끼 강한 놈이 계급 쌈싸먹고 다 이기는 분위기로 상명하복의 절도있는 명령체계와는 한참 먼 현상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단적으로 5.15 사건2.26 사건 등을 봐도 젊은 장교들이 깽판을 치고 정부의 고관을 죽이고 있는데, 윗사람들은 대신 변명해 주기에나 바빴다. 그나마 2.26 사건의 경우는 천황이 직접 '저놈들 다 죽여라'라는 식으로 나서서 어느정도 처리가 된 경우일 뿐이다.
  • 일단 중좌에 불과했던 츠지 마사노부가 가능성이 없는 작전을 입안하고, 상관들을 무시하면서 돌아다녔음에도 누구 하나 말리는 놈이 없었다.
  • 혹장으로 유명했던 하나야 타다시도 기가 센 부하 장교가 대놓고 들이받으면 한 마디도 못 하고 입을 다물었다.
  • 오키나와에서 참모장을 하다가 할복한 조 이사무는 하나야 못지 않은 혹장으로 유명해서, 부하들 보는 앞에서 지휘관들의 싸대기를 날리는 일도 서슴치 않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그만큼 상관한테 잘 복종했냐면 그건 전혀 아니었다. 당시 고급참모로 같이 근무하던 야하라 히로미치와 대화하던 내용이 나온 책에 따르면, 자신이 남방에 있을 때 맨날 근무시간에 술쳐먹고 다니고, 상부에서 뭐라고 하면 매번 맞장뜨던 일들을 자랑하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 윗사람에게 들이받을 깡이 없는 사람이라도, 못할 것 같은 명령을 적당히 넘기는 뻔뻔함과 혼나면서도 실실 쪼갤 수 있는 두꺼운 낮짝이 있으면 또 이게 먹혔다. 최전선에서 적전도주를 하고도 큰 처벌 없이 살아남은 도미나가 교지가 그 예시.
  • 무다구치 렌야는 패전으로 후퇴한 뒤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가는 장교들을 데려다놓고 오랜 시간 훈시를 한 끝에 몇 명의 장교가 쓰러져 죽은 적이 있다. 이렇게 부하들한테는 가혹한 그였지만, 사나다 조이치로가 대놓고 임팔작전을 까거나 작전 실패시 사토 중장의 항명에도 열이나 낼 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을 정도였다.

저런 판에 상의하달이 제대로 될 리가 없고, 상의하달이 제대로 안 되는 조직에서 상명하복이란 게 엄격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당연한 사실이다. 제대로 된 상명하복 하에서는 유조구 사건이나 노구교 사건은 일어날 수도 없었다.

3. 구타

"병영은 형무소와 지옥 사이에서 지옥에 더 가까웠다."
― 모리가네 센슈, 중국 전선에서 5년간 종군했던 일본 육군 병사

아래 만화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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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겐>에서 묘사된 일본 육군의 폭력. 이것 뿐만이 아니라 1권의 나카오카 고오지의 훈련소 생활에서도 나온다. 만화적 과장이 다소 들어있지만 저런 일들이 실존했고 비일비재했다.

군대 내의 가혹행위구타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다른 나라 군대에서는 이런 것들이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고 또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같은 추축국인 독일은 구타는 가능한 금지하는 문화가 제1차 세계 대전 때부터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아예 조직을 굴리는 기본적인 논리가 바로 이런 똥군기 구타와 가혹 행위였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3.1. 원인

일본군은 단기간에 사병들의 충성심을 고양하고 통제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구타를 묵인했다. 영화 '받잡아아뢰옵니다 천황폐하님'을 보면, 갓 입대한 신병들은 덴노 헤이카란 말 나오기 전에 차렷자세로 있는것도 죄다 모르는데다, 정작 그거 가르쳐주는 장교도 그게 당연하다는 듯 설명해준다. 애시당초에 천황에 대한 경애 자체가 사회 분위기에 그다지 깊이 박히지도 않았을 뿐더러, 결국 그런 것들을 처음 배우게 되는 곳이 주로 군대이며, 이러다보니 군대에서 똥군기라는게 있지도 않은 천황의 권위에 대한 충성심을 억지로 만들어내는 도구라는 방증이다.[7]

이게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랜 기간 중앙집권이 유지되던 중국, 한국, 베트남과 달리 일본은 헤이안 시대 이후로는 아예 천황이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지방 분권적인 막부 체제가 오래 유지되었으며, 그 헤이안 시대조차도 관백, 인세이 등으로 인해 천황의 권력이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즉, 천황이 무려 1,000여년 가까이 정치든 사회든 직접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8] 최초로 장기적인 열도 통일이 되었다는 에도 막부 때조차도 다이묘 등 사무라이들이 아니고서야 막부를 신경쓸 일은 아예 없었고, 자기 영주만 간신히 보고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1천년간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로 모습을 안 보이다가 자기 의지도 아니고, 막부 타도를 외치는 토막 세력에 의해서 반 강제적으로 최고 통치자 자리에 앉게 되었으며, 이후에도 내내 근대화 세력에 끌려다니기만 하는 천황을 일본 국민들이 따를 리가 없었다. 심지어, 메이지 유신 직후에도 일본인들은 '일본인' 이라는 인식보다 '사쓰마 인', '조슈 인' 등 자기가 속한 번 출신에 대한 지역민 의식이 훨씬 강했으며, 이는 21세기인 현재까지도 여전하다.[9]

이런 상황에서 짧은 기간 내에 천황이라는 새로운 최고 통치자에 대한 권위를 체계적인 설명을 통해 인식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했으며, 당연히 '모르면 외워라' 라는 식의 폭력을 동반한 강제적인 주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예로 독립 당시의 미국을 생각하면 된다. 미국 역시 독립 직후에도 '미국인' 이라는 인식보다는 '버지니아 인', '조지아 인' 등 자신들의 주를 독립된 국가로 인식하는 동시에 지역민 의식이 강한 편이었다. 미국인들이 주의 범위를 넘어 '미국인' 으로서의 국민의식이 잡히게 된 시기는 남북전쟁 이후였다.

3.2. 실태

일본에서는 당시 군대 뿐만이 아니라 가정, 각급 학교, 사회, 직장 등에서도 폭력이 만연하였다. 군대도 그런 폭력의 연장선에 불과했다.

사단장은 대개 칙임관이었기 때문에 군단장 이상의 기분이 나빠도 사단장을 때리는 것은 힘들었다. 칙임관은 형식상 천황이 임명하는 것이므로 칙임관을 때리는 것은 천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동이 된다. 그러나 연대장부터는 사병들이 보는 앞에서 사단장에게 주먹으로 뺨을 얻어맞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연대장 이하 하급 장교들, 하사관, 병졸들에게 차례차례 구타의 내리갈굼이 있었다. 하급 병사도 자기들끼리 만만한 상대를 두들겨 패는 구타의 쉼 없는 고리가 군 생활을 지배했다.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회고에 의하면,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해군 경리장교로 배치받은 직후 고참이라는 놈이 나카소네와 그의 동기를 한 줄로 세운 다음 차례로 주먹으로 뺨을 갈기면서 이것이 하급자를 다루는 법이라고 가르쳐 줬단다. 이게 그 놈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것이었다고.

'권한 없는 고참병에 의한 구타' 나 '군형법등의 명확한 근거 없는 체벌' 따위는 오히려 체벌의 근거와 체벌을 받게 되는 상황을 불분명하게 만드는데 체벌을 받고 싶지 않다면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지를 인식시켜야 하는데, 무슨 이유로 어떤 체벌을 받는지가 불분명하고 불명확해지면 '어차피 재수 없으면 체벌받는거다' 라는 인식이 생겨버리게 되고, 이 경우 병사가 지휘관의 명령에 따를 동기가 사라지게 되니 오히려 본래의 목적을 크게 저하하게 된다.

사실 일본군도 원칙상 구타는 금지되었으나, 문제는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실제 하급자를 구타했다고 처벌받은 사례가 흔하지 않다. 장교, 하사관들부터가 고참병들에게 '가급적 상처나지 않게 구타하라'고 주문하였는데, 구타로 인해 불구가 되거나 부상이 심해서 훈련을 못받을 정도가 되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내무부조리로 인해 자살, 사망, 탈영 사고가 나면 헌병대가 출동을 했고, 이렇게 되면 해당 부대 간부들의 인사고과에 문제가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하사관들은 병들의 옆방에서 내무생활을 하였는데, 너무 심하게 패는 소리가 나면 '잠좀자자, 조용히 패라'라고 간접적으로 말리는 척만 하였다. 그리고 하사관들이 병영부조리를 조장한면도 없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대개 각자 살고 있는 지역별 주둔부대에 입대하였고, 그러다보니 친인척, 학교, 직장, 사회의 선후배들이 섞여있었기 때문에, 군 계급을 무시하고 사회서열을 따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사관들이 구타를 조장한 면이 강하다.

게다가 강한 군기를 핑계로 병사들에겐 폭력을 당하고도 불만이나 하소연을 할 권리조차 박탈됐다. 구타 정도도 못 견디는 약골이 실전 상황은 어떻게 견뎌내겠냐는 정신 나간 논리 아래 구타를 피하거나 고통을 호소하면 하극상으로 취급하여 더 강력한 폭력을 행사했다. 복장, 내무생활, 군기, 기타 모든 핑계가 폭력을 정당화했고, 수많은 암기사항을 강요하며 암기를 못하면 때리는 식으로 폭력의 방식이 연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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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의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10]

일본 해군은 아예 '군인정신주입봉(軍人精神注入棒)'이라는 구타 전용 몽둥이까지 애용했다.이쯤되면 완전 곤장, 태형이다. 군인정신주입봉에 맞을 때 하급병들은 한 줄로 죽 늘어서서 다리 가랑이를 벌리고 양손으로 발목을 잡아 엉덩이를 내미는 자세를 취해야 했다. 그럼 상급병이 온 힘을 다해 군인정신주입봉을 후려갈기는데, 하급병은 앞으로 쓰러지자마자 즉시 일어나 다시 자기가 맞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영화 <남자들의 야마토>에서 보면, 해치를 안 닫은 주범이 누군지 추궁하다가 일반 사병을 때리려고 하는데 그것을 후임에게 시킨다. 그러자 그 후임이 "싫습니다" 하고 하자 "뭐 임마?" 하면서 "모범을 보여주지" 하고서 만세정신주입봉이 부러지자 나중에는 쇠파이프로 때리려 한다. 그리고 그 이후에 후임이 "아놔 뼈 부러지잖아" 하며 그 상관을 구타한다.

이 외에도 차렷 자세로 세워 놓고 명치를 위로 올려치기, 엎드려 뼏쳐 시켜놓고 다리 차서 넘어뜨리기, 아예 날을 잡아 손을 보기로 작정하고 상급병 여럿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주먹과 발로 뭇매 때리기 등이 난무했으니, 일본군 내에서 구타로 인한 의문사가 끊이지 않았던 것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11]
鬼の山城、地獄の金剛、音に聞こえた蛇の長門
귀신 야마시로, 지옥 공고, 소문난 뱀 나가토
日向行こうか、伊勢行こか、いっそ海兵団で首吊ろか
휴우가에 갈까, 이세에 갈까, 아예 해병단에서 목이나 맬까
地獄榛名に鬼金剛、羅刹霧島、夜叉比叡
지옥 하루나에 귀신 공고, 나찰 기리시마, 야차 히에이
乗るな山城、鬼より怖い
타지마라 야마시로 귀신보다 무섭다

함선 내의 가혹행위를 두려워한 일본 해군 수병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노래. 함내 가혹행위는 배가 크고 강할수록 심해져서 전함에서 정점을 찍었다고 한다. 반대로, 생활 여건이 열악한 잠수함은 구타, 가혹행위가 드물고 분위기가 밝으며 상하간 격차가 적어, 2차대전 중 사상률이 매우 높은 함종이었음에도[12] 전출 희망자가 거의 없다시피했다.

일본군은 자기들끼리 뺨을 때리도록 시키기도 했다. 병사들끼리 조금이라도 망설이거나 봐주려고 하면 바로 고참이 "시범을 보여주겠다!"며 주먹으로 죽빵을 날리거나 슬리퍼로 얼굴을 사정없이 갈겨대기에,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그걸 면하려면 서로 죽기 살기로 때려야 했다.

직접적인 구타 외에도 구보나 각개전투를 몇 시간씩 쉬지 않고 시킨다거나, 받들어 총 자세로 몇십 분씩 세워놓는 식의 가혹행위 또한 일상이었다. 이 지경이다 보니 하급병들은 차라리 부대가 전투에 투입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을 이전처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어 구타는 그나마 후방에 있을 때보다 좀 잦아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도 행군 중에 무거운 것은 무조건 하급병들이 들어야 한다거나, 식량이 떨어지면 아사자 비율은 하급병으로 내려올수록 급증하는 등의 부조리는 어김없이 나왔다. 1900년대 초반 일본군의 신병 훈련을 참관한 서양인은, 행군 훈련에서 탈진으로 사망자가 여러 명 나왔는데도 부대가 아무 일 없었던 듯 돌아가는 광경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구타는 사병들뿐만 아니라 고급 장교들 사이에서도 일반적이었다. 일례로 난징 대학살의 주범이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수석참모로 사실상 전투를 지휘한 전쟁 범죄자 조 이사무(長勇) 중장은 연대장이나 여단장급(영관급) 장교들까지도 전 부대원이 보는 앞에서 직접 주먹으로 뺨을 갈겼다. 당연하지만 이건 지휘관의 권위를 손상시키고 부하 병사들에게 우습게 보이게 만들어서 각급 지휘관의 권위가 절대적이어야 하는 전시에는 말 그대로 미친 짓이다.[13]

더욱더 심각한 건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가담하지 않는다고 명령 불복종이라는 이름으로 그 부하를 구타하는 짓을 했다는 거다. 자세한 건 기무라 헤이타로타치바나 요시오 문서로. 이런 행동은 범죄 은폐에 유리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부하들 역시 이런 범죄행각에 끌어들임으로써 혼자만 깨끗하다는 인식을 지우고 공범자 인식을 키우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3.3. 폐해

이런 참혹하기 그지없는 일본군의 구타와 병영부조리의 실태는 이미 당시 일본 사회 안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으며, 당연히 일본 청년들이 병역기피를 하는 중요한 이유였다. 부모들도 자식들이 군대에서 학대당하는것을 원하지 않아 필사적으로 자식을 군대에 보내지 않으려했고 이에 도망쳐 숨어버려 실종자로 처리되거나, 도피유학이민, 고의로 자해하거나 범죄자가 되어서까지 징병을 모면하려는 청년들이 속출했다.

그리고 위의 서로 뺨을 때리게 시키는 행위의 결과로, 전쟁 후의 일본에서는 아직 젊은데도 왼쪽 귀가 잘 안 들리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게다가 전투 중에도 이러한 폭력과 가혹 행위로 병사들을 통솔할 수는 없었기에 전투 중에는 잠깐 폭력의 고리가 느슨해졌는데, 이 때에는 병사들에 건 통제력도 느슨해져 학대로 인해 불만이 폭발한 병사들이 탈영하거나 범죄를 저지른다는 큰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감시의 눈길이 없어진 일본 병사들은 자발적으로 적과 싸우지 않고, 그야말로 뿔뿔이 흩어져 전투력이 형체도 없이 소멸하는 때도 있었다. 특히 학대당한 후임이 원한이 있던 선임을 전쟁 중에 쏴 죽이고 적에게 죽은 걸로 은폐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부사관이나 장교까지 처벌을 두려워해 탈영해서 마적단이 된 사례도 있다. 그리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내무생활의 불만해소 차원에서 일본군은 을 이용했는데, 심한 음주로 벌어지는 폭행과 싸움 등의 각종 사고도 큰 문제였다.

폐해가 너무 심각하다 보니 맛이 갈 대로 간 일본군마저도 구타의 심각성을 어느 정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군 수뇌부는 1920년대부터 '병영에서 한 솥밥 먹고 사는 전우들은 다 가족이다'라는 의식을 교육시킴으로써 병영 문화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구타로 인한 사망사고, 자살사고, 탈영사고가 나면 헌병대가 조사하고, 지휘관들은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받았다. 그래서 간부들은 '가급적 적당한 선에서' 군기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문제는 이럼에도 가혹행위가 계속되었으며 간부들과 고참병들의 폭력이 심각했는데 한국군에서는 1990년대까지 격오지 및 변두리에 위치한 군부대와 2010년대 중반까지의 밤에 점호를 하기 1시간 전부터 주로 이루어졌다.

결국 너무 폐해가 심해서 일본군도 1944년에 대본영의 명령으로 구타나 영내폭력을 금지시키는 발표를 하는 등 내무생활에서 구타와 폭력을 추방하려 했으나 이미 구타와 가혹행위가 너무 빈번했고, 이 시점에는 군인들의 자질도 많이 떨어진 상황이라 고쳐지지가 않았다.[14] 그러다가 종전 이후 일본군이 강제 해산되어 더 이상의 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4. 휴가, 휴식과 재충전의 박탈

일본군도 규정상으로는 1년에 20일 정도의 정기휴가를 분명히 보장했다. 비교를 위해 설명하면, 한국군의 경우 육군 병은 8박 9일간의 정기휴가 3번, 해군은 육상 근무자 기준 기본 연가[15]에 6주당 2박 3일, 공군은 6주당 2박 3일 + 근무 시간에 따라 추가되는 외박이 보장된다. 간부의 경우 공무원에 준하여 1년에 연가 21일을, 병가와 공가는 별도로 사용할 수 있다.[16]

물론 일본 본토나 조선 등 전쟁 없는곳에서는 휴가도 잘 나왔고, 병졸에게는 외박은 특별한 사유없이는 금지되었으나 주말 외출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하사관들은 주중에도 외출이 가능했고, 주말에 당직근무만 없으면 외박도 자유롭게 하였다.

문제는 부대가 전장에 한 번 나가면 그 부대에서는 본토로 다시 철수할 때까지 휴가가 아예 없었다는 점이다.[17] 태평양에서 휴가 나와봤자 갈 곳도 없는 코딱지만 한 섬들에 주둔했던 부대들이야 그랬다 치더라도, 사이판처럼 비교적 크고 일본 민간인들도 꽤 거주하는 섬에서도, 심지어 대륙인 중국 전선이나 버마 전선에서도 어디를 막론하고 휴가가 일체 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전방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부대를 후방으로 빼내서 휴식을 취하게 해주고 재충전을 시킨다는 개념도 거의 없었다.[18]

"전쟁 중인데 휴식이라니 이게 무슨 배부른 소리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평시보다 극심한 피로를 겪는 군인들은 비전시일 때보다 전시에 휴식을 잘 취해야 한다. 당시에도 대부분의 강대국 군대들은 장병을 전쟁터에서 휴식 없이 몰아세우면 어느 순간에 육체적, 정신적 피로로 극한에 몰려서 산송장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휴식, 휴가 등의 재충전 과정도 매우 중요시했다. 훈련도가 높고 중요한 전력이 되는 인원, 부대일수록 더욱 휴식에 신경 썼고, 조종사 같이 임무 수행에 최상의 컨디션이 보장되어야 하는 경우에는 몇 시간 실전 임무 뒤에는 휴식 기간을 가지도록 배려가 되어 있다. 이런 특수병종이 아니더라도, 일선에서 피해가 심한 해당 제대(대대 - 사단) 전체를 상급 부대의 예비 부대로 지명, 후방으로 빼내어 수 일에서 수 주동안 쉬게 해줬다.

전투가 급하더라도 재충전을 위한 휴식은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예비 부대를 만들어 작전 도중에 군대를 교체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어느 군대나 예비병력을 상당한 규모로 유지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기존 투입부대의 휴식 과정에서의 전선 유지다. 아무리 백만대군을 꾸린다고 해도 그 대군 전부를 한꺼번에 전장에 보내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군인들의 사기 진작과 적절한 휴식이 이렇게 중요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 군대 중 오직 일본군만 일단 한 번 전선에 나오면 휴가가 절대 없었다. 휴가는 고사하고 현지에서의 외박이나 외출도 도저히 더는 영내에 병사들과 수병들을 잡아둘 수 없을 정도로 군기가 해이해진 막장스런 상황 같은 정말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일본군은 고급 장교들을 위한 클럽이나 기생집은 전선 코 앞에까지 줄줄이 들어서는, 제정신이 있는 군대라면 상상도 못할 짓은 태연히 저지르고 있었으니, 병영 안에 통조림처럼 갇혀서 이 기막힌 꼬라지를 지켜봐야 했을 병사들과 하사관, 하급 장교들이 무엇을 느꼈을 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일례로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 중에 사령부 옆에 기생집 차려놓고 5시면 기생집으로 칼퇴근했다거나, 필리핀에서 타이완으로 적전도주해온 도미나가 교지가 자기 차에까지 기생을 태우고 다녔다는 일화들이 존재한다.

당시 일본군 장교들도 이런 불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었다. 평소에야 가혹행위를 통한 억압적인 분위기로 병사들의 반발을 억제할 수 있었지만, 그 통제가 느슨해질 수 밖에 없는 전장에서는 부대가 일시에 붕괴될 가능성도 있었다. 또한 그랬다간 자기들 목숨부터 위험해질 게 뻔하기에 휴가를 못 보내주는 대신 영내에서 병사들의 스트레스를 풀어줄 방안을 강구하기는 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아주 악랄했다.

4.1. 잘못된 보상 : 음주, 약물, 일본군 위안부, 가혹행위

'술에 관대한 문화'가 군인들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마찬가지. 술 강요회식 등은 요즘도 안 좋다.

일본군 위안부도 강제로 끌려나온 점령지 여성들에게서[19] 강제로 성을 착취하여 스트레스를 풀라는 말이니 제정신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이다. 위의 구타 항목에서 적었듯이, 애초에 그 스트레스를 주입한 게 자신들이다. 구타의 내리갈굼이 최말단 병사까지 내려오면 더 이상 갈 데가 없으니, 위로 폭발할까봐 이런 식으로 그들이 폭력성을 분출할 대상을 내어준 것뿐이다.

이처럼 일본군이 병사들의 불만에 대한 불안 때문에 한국인, 중국인, 동남아인 등 식민지와 점령지의 민간인에 대한 가혹 행위를 적극적으로 명령하거나 또는 암묵적으로 조장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일본군 장교들의 회고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의 총부리를 언제 자기가 속한 일본군 자체로 돌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일본군의 악행을 한층 더 부추겼던 것이다.

대표적으로 오키나와에 진주한 미국 해병대 중 일부가 민간인에게 강간이나 살해 등을 자행했다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대체적으로 미군은 일본군보다는 훨씬 더 주민들에게 잘 대해줬다'고 평가했다는 증언이 있다.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미군이 주민들을 학살할 것'이라고 세뇌시켜 놓아서 오키나와 전투 중 많은 주민들이 미군을 피해 동굴 등지로 숨었지만, 전투 후 주민들을 구호하는 미군들에게 놀랐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 이 증언자는 물과 식량도 없이 며칠을 동굴 속에 숨어있다가 미군들에게 구조되었는데, 한 미군 병사가 자기 수통을 꺼내 자기가 먼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건네주어서 독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그제서야 안심하고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군이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허위로 세뇌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증언 중엔 '동굴 속에 숨어있는 동안 아기가 울어대자, 조용히 시키라고 다그치던 일본 장교가 아기를 죽였다.'는 일본군의 만행도 적혀있다.[20] 피난용 민간인 방공호에서 주인공 가족의 갓난아기인 막내가 울자 본토에서 온 일본군이 강제로 빼앗으려 했고, 어머니와 현지 교사가 말리자 "이래서 오키나와 놈들이 나약하다는 거다. 이 전투에서 지면 다 오키나와 놈들 책임이다"며 막말을 쏟아냈고, 이에 격분한 교사가 "당신들은 오키나와를 지키러 온게 아닌가요. 근데 왜 우리를 이렇게 박대합니까"고 정곡을 찌르자 쏴 죽이려 한다.[21] 비록 당시에 일본이 오키나와 주민을 식민지가 아닌 점령지 주민 취급했다지만, 법적으로는 엄연히 일본 국민인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이랬으니 중국인, 한국인, 동남아인들에게 잔혹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셈이다.

한편, 당대에는 연합군, 독일군, 일본군, 일본 사회에 이르기까지 히로뽕을 피로 회복제로 다량 지급했다. 지금이야 히로뽕, 즉 메스암페타민마약으로 취급하지만, 당대에는 위험성이 잘 알려지지 않아 일반인들도 거리낌없이 사용했다. 이는 전시에 수많은 마약 중독자들을 양산하여 전후에도 사회 문제가 되었다.

4.2. 반론

다만 일본군의 경우에는 휴가를 '안' 보내주는 것 뿐만 아니라, '못' 보내주는 면도 있었다. 잔혹한 구타와 상급병들의 학대에 시달리던 하급병이나 조선, 대만 출신 병들을 휴가라고 내보내줬다간 그대로 도망쳐 일본이 패망할 그 날까지 나타나지 않을 게 불보듯 뻔했기 때문. 설령 상급병이라도 '휴가다!' 하고 비무장 상태로 영외에 나가 돌아다니다간 일본군의 학살, 강간, 약탈에 원한이 골수에 맺혀있는 현지인들한테 쥐도 새도 모르게 살해당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22]

그리고 위의 서술도 어느 정도 과장된 면이 있다. 물론 중국 전선의 경우, 1940년대 들어서는 전역하지 못하고 몇 년씩 복무한 군인들도 있었다. 하지만 1944년 이전의 일본군은 기본적으로 소집 - 파병 - 해제와 전역 - 재소집 등을 반복하는 군대로, 위에서 말한 다른 나라 부대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애초에 휴식, 보충, 재충전, 재배치 등의 개념을 일본군이라고 모를 리가 없었고, 실제로 전선이 말도 안 되게 확장되기 이전까지는 부대의 순환이나 현역병의 전역, 소집된 예비역들의 소집해제 등이 그럭저럭 이뤄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남방전선에 주둔중인 일본군이 휴가는 커녕 외출 외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는지는 자료를 통한 교차검증이 더 필요하다.

태평양의 섬들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의 경우, 애초에 전투가 닥치기 몇 달 전쯤에 주둔해서 부랴부랴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게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전투가 일어난 곳은 옥쇄를 하고, 전투가 없던 곳은 미군의 잠수함 등에 발이 묶여서 다른 데에 가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 종전을 맞이했다. 이러니 휴가를 보내주냐 마냐를 논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예를 들어 사이판에 일본군이 제대로 주둔한 것은 1944년 2월 이후였다. 그리고 사이판 전투는 6월달에 일어났으니, 당장 언제 미군이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판에 그 곳에서 휴가니 외출, 외박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타라와 같이 작은 환초가 아니라 팔라우나 사이판, 괌 등 섬이 크고 민간인들이 좀 살던 곳이라고 해도, 미군의 상륙을 대비하기 시작하면서는 병영과 민간을 구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전후 현지에서 생존한 민간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민간인들도 매일 동원되어 토치카와 진지를 구축하고, 싸울 만한 연령의 남자들은 현지에서 징집되는 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외출과 외박이 의미가 있을 수가 없다.

반면 실제로 외딴 곳에 주둔하다가 전투를 치렀던 인원들을 가능하다면 후퇴시키고 후방 재배치나 전역 후 재소집시킨 사례도 있다. 과달카날이나 키스카 섬 등이 그 예시.

결론적으로, 일본군 중 휴가나 외출, 외박이 없는 부대들이 존재했던 가장 큰 이유는 급속한 전선의 확대, 그리고 고립된 곳이 많았던 태평양 전쟁의 특성상 이런 휴식과 재배치가 전혀 가능하지 못한 곳에 배치된 부대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5. 부정부패 및 비리

군대는 잔인해, 이젠 내가 자네에게 그것을 말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 내지의 군대는 뼛속까지 속속들이 썩었어. 해외에서 근무했을 때, 난 내지의 군대만큼은 명예와 위엄이라는 오래된 전통을 지키는 줄 알았었지. 불행히도 귀국 후 나는 그 말이 완전히 거짓이라는 사실을, 현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추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네. 처음엔 나도 장교로서 할 수 있는 한 품위를 지키려고 노력했었지. 그런데 바로 그게 내 몰락을 초래했다네. 난 내 마음을 다해 군을 사랑했네. 그래서 군대를 조롱하거나 좀먹는 놈들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나는 소령들과 대령들, 연대장과 사단장 같은 커다란 장애물들과 부딪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었다네. 오직 상관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최우선이었어. 장교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도 기쁘게 해주어야만 했지... 나는 부대 하사관들 중 최선임자였던 보급계 하사관과 아는 사이였네. 그런데 그의 부인은 대대장의 집에서 떠날 수 있는 날이 없었지. 왜냐면 그녀가 거기 들락날락하면서 여러 가지 일을 봐주지 않으면 남편이 결코 진급할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 모습들이 날 너무나 부끄럽게 했네... 배급받은 보급품들은 곧바로 사령관에게 직행했고 그는 그것들을 사적인 선물용으로 다 써버리곤 했지... 자네도 시모라이 중위를 알고 있겠지? 그놈은 자기 부대원들한테 자기 집을 짓게 하고는 지금 거기서 살고 있어. 난 이런 부패를 참을 수가 없었네. 그래서 뭔가를 해보려고 애썼지만, 난 곧 지칠 대로 지쳐버렸어. 그건 한 사람이 하기엔 너무나도 큰 일이었지... 난 결국 해임당하고 병들어버렸네. 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었지.
― 노마 히로시, <진공지대> 中

노마 히로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징집되어 필리핀중국 북부 전선에 참전했으며 반체제 사상을 지녔다는 이유로 오사카 군 형무소에 투옥되었다(1943~44). 전후 군대에서 자신이 겪었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일본의 2차 대전 후 쓰여진 전쟁소설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진공지대>를 집필하였다.

일본군은 외형적 군기의 확립에는 변태적으로 집착했음에도, 정작 정말로 군기가 엄히 선 군대라면 가장 먼저 근절시켰을 부패와 비리가 내부에서 만연했다. 장교들은 사병들의 식단부터 시작해 뜯어먹을 수 있는 모든 군수품을 중간에서 착복했고, 장교의 계급은 곧 그 장교 가족의 계급이었으며, 하급 장교의 가족들과 사병들은 상급 장교들의 사적인 일에 동원되어 노예처럼 부려졌다.[23] 안 그래도 일본 제국의 국력 자체가 부실한데다, 중요한 건 물자가 아니라 정신력이라는 병맛나는 생각이 충만한 군대가 일본군인데, 그나마 쥐꼬리만한 군수품도 중간에서 사정 없이 여기저기서 뜯어먹히니, 근위사단이나 전함 야마토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거의 모든 부대에서 군수품이 모자라지 않을 날이 없었다.

그리고 하사관이나 상급병들은 하급병들에게 다른 중대에 몰래 들어가서 모자라는 보급품을 구해올 것을 묵시적으로 강요했다. 도둑질할 배짱이 없거나 양심의 가책 때문에 보급품을 훔쳐오지 못한 병사병신 취급을 받고 구타를 당했으며, 약삭빠르고 뻔뻔하게 보급품을 슬쩍해와 중대에 나눠 준 병사는 큰 칭찬을 듣고 똘똘한 병사로 대우받았다. 일단 한 번 보급품이 없어지면 도둑맞은 병사 역시 좋건 싫건 도둑질로 숫자를 채워 놓아야 했다. 간단히 말해 군대에서 도둑질을 배운 격이라 보면 된다.

일본군에서 모든 보급품은 국가의 재산이기도 했으나 명목상으로는 천황의 하사품이었기 때문에, 일개 병사가 천황의 하사품을 잃어버린다면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순진한 장교는 거의 없었다. 정말로 보급품을 천황의 하사품이라 여겼다면, 감히 어떻게 그 하사품을 빼돌려 자기 배를 채울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런 내부 사정 때문에 일본군 부대 간에는 서로 훔치고 도둑맞는 악순환의 고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일본군의 성전이자 모든 병영부조리의 근거였던 군인칙유에는 "군인은 충절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고 적혀있었지만, 병사들은 상급자가 없을 때마다 "군인은 요령을 다함을 본분으로 삼는다"라고 자기들끼리 비웃곤 했다.

이렇게 군인정신주입봉은 군법보다 가깝고, 비열한 놈일수록 이득을 보며, 선랑한 이는 짓밟히고, 약한 자는 먹잇감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군인정신주입봉으로 맞아가며 문자 그대로 뼈저리게 느껴온 일본군 병사들은 먹은 짬밥에 정비례해 양심이 메말라갔다. 결국 그들은 자기나 자기가 속한 부대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불이익과 고통을 주는 행동을 아주 자연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6. 원인

멀리 거슬러 올라가 보면 프로이센식의 엄격한 내무규율과 강한 군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일본 제국은 당시 농민과 구 사무라이 출신이 대부분이던 일본군을 단기간에 근대화한 군대로 발전시키기 위해 프로이센식 군제를 도입했고, 그 전의 프랑스식의 자율적인 군사 제도보다 일본 무가 사회의 분위기에 더 잘 맞아떨어지는지라 일본군 안에 급격히 퍼져 단기간에 근대화한 일본군의 모체로 거듭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을 주었다. 특히 프로이센 등의 18세기 당시 엄격한 군기의식은 전열보병을 이용한 당시 전투방식에 기인한 바가 크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구 시대의 이런 측면은 독이 되기 시작한다. 전열보병 문서로.

일본군의 구타 자체가 최소 전국시대부터 유구하게 전해 내려오는 악습 중 하나라는 설도 있다. 애초에 센고쿠 다이묘였던 오다 노부나가가 가신 아케치 미츠히데를 폭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래서 이를 미츠히데가 반란을 일으킨 원인 중 하나로 보는 시선도 있다. 사실 그 시대에 구타만으로 끝나면 정말로 크게 봐주는 거고 대부분 그냥 즉결 처분하기 일쑤여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 항목을 보다시피 일본군은 겐페이 전쟁부터 센코쿠 시대까지 하도 서로 치고 박아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으로 보이는 인명 경시풍조가 너무 오래 지속되었다. 그나마 에도 시대에 안정화가 되나 했더니 막말의 난세..

일본 선불교가 종교적으로 영향을 끼쳤단 주장도 있다. 일본 선종은 한국과 매우 달라서 승려들에게 엄격한 군기를 강요했고, 고참승이 신참승[24]을 마구 갈구고 구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관련 블로그.

기타 영향을 들자면, 일본군은 지금 한국과는 달리 무작위배치가 아니라 자기 고향에 있는 군부대로 입대하였다.[25] 이렇게 하다보면 입대해보니 사촌형, 사촌동생, 친척, 친구, 직장선후배들이 섞여있을 확률이 높다. 군 계급의 위계서열을 따르지 않고 사회계급을 따르는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계급이 깡패가 되게 한 요인도 있다.
"메이지 시대 일본군 창설기에는 천황 숭배 교육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군기가 세워지지 않았다. "만세일계인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천황에게 위대한 권위가 있다는 거지. 하지만 메이지 시대 초기의 일본인들에게 그러한 신화가 천황에게 목숨을 바쳐야 하는 이유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어? 누군지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죽을 각오가 되겠어? 그래서 군 지휘부는 폭력으로 철저한 군기 확립을 하려고 한 거야.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을 납득시키는 방법으로는 폭력이 제일 쉽지."
카리야 테츠일본인과 천황

카리야 테츠의 만화 일본인과 천황에 따르면, 일본군 창설 당시 번주(藩主)에 충성하는 체제에서 국왕(천황)에게 충성하는 체제로 만들기 위해,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권위를 세우기 위해 구타를 묵인했다. 실제로 이러한 구타에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 중 하나가 메이지 덴노가 내린 상관의 명령을 곧 천황의 명령으로 규정한 군인칙유로, 일본의 근대화는 껍데기였을 뿐임을 말해준다.

사실 일본에서 천황은 빠르면 헤이안 시대, 늦어도 가마쿠라 막부가 자리잡은 이후부터 메이지 유신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실권은 헤이안 중기부터 말기까지는 후지와라가나 타이라가를 비롯한 섭정가에, 가마쿠라 막부와 아시카가 막부를 거쳐 전국시대까지는 막부의 쇼군에게 있었고,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는 명분조차도 쇼군에게 이양되었으며, 왕실은 돈있는 귀족이나 영주들에게 서예 작품을 팔거나 하는 식으로 따로 경제활동을 해야 했다.[26] 무로마치 막부 시절엔 막부 쇼군이 명나라 황제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받아 일본을 동아시아 책봉-조공 질서에 편입시키기도 했다니[27] 자국 황제(천황)는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던 셈.[28]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조차도 에도 막부의 무능력함과 부패한 쇼군 일가에 대해 다이묘들이 불만을 품고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쇼군에 대항할 목적으로 오랫동안 찬밥신세였던 천황을 얼굴마담용으로 들고 나온 사건일 뿐, 이 과정에서 천황이 주도적으로 한 일은 거의 없다.[29] 즉, 애당초 고대 일본부터 메이지 유신까지 약 1000여년 가까이 천황은 아주 예쁜 껍데기와 쓸모 있는 껍데기 사이를 왔다갔다 했고, 메이지 덴노는 사실상 실권이 없어서, 다이쇼 덴노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등의 이유로 메이지 유신 이후까지도 천황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랬던 천황을 갑자기 '만세일계의 천황'이라는 식으로 없는 권위를 세우려고 하니 당연히 먹혀들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천황의 권위를 받쳐주는 것은 구타였다.

관련 영상 : 아키히토 vs 아베: 상징천황과 초국가주의 [한겨레 다큐]

영상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일제의 만행은 천황제라는 극도의 권위주의 체제와 선민사상이 빚어낸 참극이라는 것이다.

7. 한국군에 끼친 각종 악영향

한국군에 잔존하는 병영부조리의 상당수가 일본군의 제도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군은 일본군의 잔재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징병제와 30여년간 지속된 군사독재의 영향으로 군대에서 끝나지 않고 민간에서까지 일상화되어 버렸다. 심지어는 구 일본군의 가혹행위, 얼차려 수법까지도 이어지는 게 있다! 한국도 옛 일본처럼 군대뿐 아니라 가정, 각급 학교, 사회, 직장에서도 폭력이 만연했기 때문에...

한국군도 1980년대까지는 병영부조리와 가혹 행위가 군대에서 당연한 것으로 치부되었고, 가혹 행위로 야기된 자살도 언론 검열에 의해 쥐도새도 모르게 덮어졌다. 당시에는 가혹 행위가 군인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이 만연했으며, 지금처럼 가혹 행위가 지탄받게 된 것은 다소 최근의 일이다. 국군의 창설기에 구 일본군 식으로 양성된 한국인 장교가 대량으로 들어왔으니 20세기 후반까지도 군대에서는 이러한 구타가혹행위가 줄을 이었다. 530GP 사건 외에도 대표적으로 2014년 발생한 제22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제28보병사단 폭행사망 사건이 있다. 잔재를 없애려는 노력은 수십년 동안 지속되고 있지만, 국방부의 이러한 행동은 해방 후 67년이 지난 2012년이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하다못해 일본군의 영향을 짙게 받은 한국군에서 구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최소한 인식하고 있고 개선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 한국군에서 터져나와 국민들을 격분하게 하는 문제점들도 과거에는 드러나지도 않았다.

8.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

박완서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라는 책에 자기가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이 서로간에 뺨을 때리는 벌을 자주 줬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단편소설 <사수>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과 평생을 악연으로 얽히고 결국은 사형수와 집행자 관계로 만나는 친구가 어릴 때 주인공과 수업 종료 몇 분 전에 떠들다 걸렸는데, 선생이 이 짓을 시켰다. 처음엔 미안한 마음이 앞섰지만 맞을수록 오기가 생겨서 결국은 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다. 위의 사례들은 일제강점기에 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이니 일본 군국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아도 틀린 해석은 아닐 것이다.

1930년대부터 일본군은 군대 본연의 업무 수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도 치외법권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일본제국 경찰과 본격적으로 충돌한 시초가 1933년의 오사카 고스톱 사건이다.

9. 서브컬처

배경은 1931년도의 일본군인데 하는 가혹행위는 별 차이가 없고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주 익숙한 장면이 많이 나온다. 拝啓天皇陛下様(받잡아아뢰옵니다 천황폐하님)라는 영화인데, 저기 나오는 내용이야 그렇다쳐도 실제로는 '군대도 사람 사는곳이다... ' 운운하는 내용의 영화로 군국주의 비판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남자는 괴로워' 시리즈의 주인공 역이었던 '아츠미 키요시'가 고문관 신병역으로 나왔다.

10. 다른 나라의 사례

어 퓨 굿 맨, 풀 메탈 자켓미국 해병대를 다룬 영화에서도 가혹행위로 인한 사고나 자살 사례가 나오고, 현대 러시아군에서도 데도브쉬나라고 불리는 선임병들에 의한 가혹 행위로 불구가 되는 사례가 종종 있다. 국군의 부조리는 일본군 외에도 미군의 병영부조리를 물려받은 것도 있다.(직각식사) 그 외에 제정 러시아군의 고문 기술 등을 물려받았다는 주장도 있다. 또 국군의 악습은 광복 직후의 혼란상 등 환경적인 이유도 한 몫 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이에 대해 광복 직후의 혼란상이 70여년 연속적으로 이어지면서 사망을 유발한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반론도 있다.

부하를 병영부조리에 가담시키고 이를 거부하면 괴롭히는 것은 범죄 은폐에 유리하다. 이는 베리야[30]도 부하들을 직접 고문과정에 참여시킴으로써 활용했다. 이 때문인지 현대 형법에선 개인 범죄보다 2인 이상의 조직 범죄에 대해서 더 강한 처벌을 한다.

10.1. 구타

가혹한 체벌이 성행하던 수백년 전 전열보병 시대와 비교하더라도 일본군의 구타가 훨씬 후진적이다. 우선 전열보병 시대의 체벌은 어디까지나 군형법상의 처벌이지 비합법적인 구타가 아니었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아무런 권한 없는 고참병 따위가 아니라 장교가 직접 선고하고 공개적으로 집행하며, 심지어 이 행위엔 집행 도구나 횟수도 정해져 있었다. 물론 이러한 체벌의 강도 자체는 채찍질 수십에서 수백 대 수준으로 한 번 당하고 나면 초주검이 될 정도라 구타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군법의 테두리 안에서 집행되는 것이었고, 군의관이 옆에서 횟수를 세다 일정 횟수 이후에는 멈춰서 치료도 하고 최대한 죽거나 장애를 입는 일을 피하게 했다. 또한 이후 이런 태형에 관한 사항을 군법에서 없애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사실 이러한 특징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전열보병 시대의 전투란 기본적으로 명중율이 낮아서 그나마 덜 맞기는 하지만 비오듯 쏟아지는 총알 속을 상대가 맞히기 쉽도록 대열까지 짠 상태에서 걸어가는 것이고,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죽음의 공포 앞에서 명령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다.[31] 따라서 이런 가혹한 명령을 주저 없이 수행할 정도의 군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니가 명령대로 돌격하면 운 좋으면 살고 운 나쁘면 죽는데, 명령을 거부한다면 넌 반드시 지휘관 손에 맞아 죽음.' 이라고 각인시킬 정도로 가혹한 체벌이 필요했던 것. 즉 반인권적이고 비인도적이기는 하나 일단 일말의 합리성은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은 장교간에도 하급자에 대한 구타가 성행했지만, 근대 유럽에서는 19세기까지는 결투가 빈번했기 때문에 하급자라 해도 장교 계급인 부하를 함부로 대했다가는 악에 받친 부하에게 결투 신청을 받고 사이좋게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장교끼리 막 대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결투에서 지면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할 수도 있고, 이겨도 군법에 따라 처벌이나 좌천을 면키 어려우며, 거부하면 겁쟁이로 몰려 상류 사회에서 매장 당했다. 거기다 장교끼리는 계급 차이가 나더라도 서로를 귀족이나 신사로서 존중하는 유럽의 사회 문화적 배경이 있기도 했다. 도리어, 당시 귀족들은 나름대로 교양인 행세를 해야 존중받았지, 아무데서나 욕설하고 주먹질하는 인간은 귀족, 신사로 봐주지 않았다.

10.2. 전투 후 재정비

전투 후 휴식은 미국군, 중국군, 영국군, 프랑스군, 소련군 군, 독일군 등에서는 상식적이었다.

미국의 대표적인 정예부대인 육군 공수부대는 작전이 끝나면 다른 부대와 교대하여 후방으로 빠진 뒤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음 작전에 최상의 상태로 투입되도록 했다. 해병대의 경우도 태평양에서 극심한 전투가 끝나면 역시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빠져서 충분히 쉬게 하였고, 근무환경이 열악한 잠수함 승조원들은 1개월 작전하고 돌아오면 몇 주간 순번을 나눠 휴가를 보내다가 복귀 후에도 근 2달 정도는 출동 준비 명목으로 편한 일을 하며 보내게 해줬다. 더 나아가, 현대 미 해군 전략원잠은 승조원을 레드, 블루의 2개조로 TO보다 2배를 뽑아 편성해 1회씩 교대 출동을 하며 휴식과 교육훈련, 정비의 시간을 준다. 한 배에 함장도 두 명이 배치되어 교대로 타고 내린다.

태평양 전구는 유럽 전구와는 다르게 휴식의 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 어느 섬을 점령한 다음 차기 목표의 섬을 공략하는데는 육, 해군을 융합한 정교한 입체계획이 필요했고 보통 수 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유럽 전선보다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더 많았기 때문에 섬을 점령하는데 투입된 부대는 작전이 끝나고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같은 후방지역, 마리아나 제도, 그게 안된다면 기존에 확보한 전진기지가 있는 섬 중에 괜찮은 곳에서 몇 달간 주둔하면서 병력 보충[32]과 재훈련을 실시했다.

동부 전선의 독일군도 1944년에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동부 전선 자체가 사실상 붕괴되기 전까지는 큰 피해를 입은 부대는 후방으로 빼서 재보충과 휴식을 주거나, 일정 기간 전선에서 복무한 군인에게는 휴가를 챙겨주도록 했다.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전황이 막장이 되어 충분한 휴식과 재편성 없이 마구 밀어붙이긴 했으나, 1945년 3월에도 일부 휴가를 보내는 인원의 수기가 나오는 등 어떻게든 휴가를 될 수 있는대로 챙겨줬다.

프랑스-독일 혼혈 독일군 병사인 기 사예르의 수필이라고 할 수 있는 <잊혀진 병사>에서도 화자가 정식으로 허락받은 휴가가 전선 상황이 악화되어 취소되자 장교에게 조용하게 항의하는 장면이 있다. 물론 항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옆의 친위대 장교가 주인공 분대의 활약을 보고 전송한 추천서를 들먹이며 진급으로 퉁치면서전선에 복귀한다. 그 이전에도 휴가를 가는 장면이 나온다. 보통 열차를 타고 본토의 고향이나 혹은 안정적이고 기후도 좋은 프랑스 등 후방 점령지에서 몇주씩 휴가를 보내다 역순행 열차편으로 복귀했다.

하다못해 중국조차도 1년 중 4개월은 전면 대치, 4개월은 적군 후방 유격, 4개월은 아군 후방기지에서 재훈련이라는 개념을 두어서 일정한 기간마다 군인들을 순환시키려고 했다.

11. 관련 문서


[1] 해군은 훈련병 제도가 있다. 각 진주부, 경비부 예하의 海兵団(해병단)에서 신병 교육을 담당했다.[2] 다만 임팔 작전 당시 97식 전차에 격파된 M3 경전차의 추가장갑을 증설하여 효과를 본 사례가 있긴 하다.[3] 임팔 작전 당시 후퇴하는 제31사단의 후미 엄호를 맡음[4] 이오지마 전투의 지휘관.[5] 한국군도 부대마다 군기 문화가 상이하듯, 일본군도 상이했다고 한다. 대부분은 고참 일등병이 고참 행세를 했지만, 철저히 계급순으로 따지는 부대도 가끔 있었다.[6] 남자들의 야마토에 보면 배를 타면 장교에게만 경례하라고 나오는데, 그것이 국제표준이어서 그런 듯하다.[7] 다만 저 영화 설정상 저 중대장이 인격적으로 좋은 사람으로 나오는데, 그래서 저기서도 저렇게 좋은말로 넘어간 건지도 모르지만, 일본군 문화라는 게 신병이라면 못하거나 모르는게 당연한 일이라도 그렇게 좋은 말로 알아듣게 가르치지는 않는다.[8] 중국과 한국, 베트남 역시 다수의 나라로 분열되어 서로 치고받은 적도 있지만, 중국은 원나라 이후로 600년 가까이 통일국가가 유지되고 있었고, 한국은 무려 근 1,000년간[33] 통일국가가 유지되고 있었으며, 베트남 역시 리 왕조 이후 근 900년간 막 왕조의 발호, 남북조시대(베트남)[34], 떠이선 왕조 시대를 제외하고는 항상 통일을 유지해왔으며 분열기에도 최고권력은 군주가 독점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9] 사실 전근대에도 지역민 의식보다 국민의식을 확실하게 가졌던 나라가 중국, 한국, 베트남 뿐이다. 하다못해 이들보다 영토가 훨씬 작고 중화질서 내에 확실히 들어간데다 중앙집권적 문치주의도 일본 본토보다 확고히 자리잡혔던 류큐 왕국도 같은 류큐인이라는 의식보다는 산남인, 산북인, 아마미인, 요나구니인, 미야코인 같은 섬별로 다른 정체성이 자리잡혀 있었다.[10] 쿠로키, 코우사카 등의 이름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아 부사관 등의 간부들을 위해 만들어져 전용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11] 위의 사례 중 명치 올려치기도 있는데, 명치는 심장에서 매우 가까운 급소다.[12] 수상함의 경우 함선이 침몰하게 되더라도 퇴함해서 살아남을 여지가 있지만, 잠수함은 침몰하게 된다면 퇴함이고 나발이고 없이 그대로 수압에 의해 압궤되면서 산 채로 수장되어 버리는 것이다.[13] 이 때문에 이 사람은 사실 자살한 게 아니라 분노한 부하들의 원한을 얻어 살해당하고 자살로 위장당한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14] 소련군도 원한 문제를 제외하면 대민 사고를 많이 친 건 주로 후방에서 뒤늦게 징집한 보충병들이었고, 이들의 상당수는 살인 같은 중범죄만 저지르지 않았을 뿐 살면서 무수한 문제를 일으켜 온 양아치, 갱스터들들이었다.[15] 육군과 달리 해군은 부대 내규로 규제하지 않는 한 개인이 알아서 쪼개 쓸 수 있다.[16]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근무 시간이 끝나고 외출을 한다든가, 출퇴근제 시행 현역병에게는 아예 막아두고 내무반에만 묶어두고 있기에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일본군을 고스란히 답습했다고 할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2018년 8월부터 근무 이후 외출을 시범적으로 시행함으로서 이 부분은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17] 미군도 마찬가지로 전쟁 전엔 장병 개개인에게 보장된 휴가일수가 있었고 되도록 준수하려고 했다. 그러나 개전 후 2차대전에서 일단 해외로 파병된 부대의 장병들은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전쟁 기간 내내 본토로 돌아올 수 없었다. 추측되는 이유로는 전시 체제에서 미군의 전세계적으로 투사될 군사력 수송과 랜드리스로 위시되는 천문학적 규모의 물자 수송등을 위한 수송수단의 효율적인 유지,운용을 위해 장병들의 휴가 수송에 할당할 배, 수송기가 없거나, 기본적으로 대양 너머에 파병된 장병들이 왕복 소요일수와 시간과 거리, 휴가 장병들의 대체 인력의 문제 등이 있을 것이다. 전시 체제에서 본토행 휴가가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해외에 파병된 800만 명이 넘는 미군들 중 공적이 뚜렷한(?) 소수의 장병들이 지휘관의 특별 승인 하에 갈 수 있었던 특권이었고 대다수에겐 적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은 일본군과는 다르게 방법이 있었는데.. 추후에 후술.[18] 언급했듯이 아예 없었던건 아닌게, 과달카날에서 크게 피해를 본 부대는 본국에 돌아와서 일시적인 전역처리가 되기는 했었다. 패전을 숨기려고 헌병대에서 얘넬 감시하고, 또 좀 있다가 다시 영장 나와서 다시 끌려가서 더 무서운 곳에 끌려가고 그러기는 했으니 결국은 이도저도 아니긴 했지만... 과달카날 뿐 아니라 1943년 이전에는 무려 '만기전역'의 개념도 있기는 있어서 2년 군생활이 끝나면 전역을 하기도 했는데, 문제는 전역 이후에 소집령이 나오게 되면 또 군대를 끌려가야 했다는 것... 이렇게 군대를 세 번 갔다가 결국 전사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와무라 에이지였다. 그리고 후술하듯 일본군 부대들 중 재충전 개념이 없었던 건 부대들은 엄밀하게는 안 했다기보다는 못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19] 위안부는 단순히 한국에서만 징집한 것이 아니다. 식민지인 만주나 대만 지역은 물론, 전쟁 당시 점령지에서도 징집해 갔다. 그래서 중국과 당시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 지역에 살던 본국 여성들도 같이 피해를 당했다.[20] 이것은 2003년에 방영한 <사탕수수밭의 노래>라는 드라마에서도 나온다.[21] 참고로 이후 전개는 미군 전차의 포격으로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려 그 일본군은 사망한다.[22] 비슷하게 친위대원의 수필인 폭풍속의 씨앗을 보면 이탈리아전선에서 복무당시 휴가를 나간인원이 실종되었다가 며칠뒤 하수구나 골목에서 시체로 발견된다든지, 주인공이 간발의 차로 놓친 독일군의 노면전차를 저항군이 폭파시킨등, 그나마 서유럽의 유럽인 한정으로는 조금 유하게 나간 나치도 휴가를 나가면 목숨을 걸아야 할 때가 종종 있으나 그래도 프랑스, 이탈리아같은 서유럽이나 동맹국의 경우는 현지인과 잘 어울리는 경우가 더 많다.[23] 이는 고대 로마군 보다도 못한 점이다. 로마군에서는 동료의 장비를 훔치는 범죄에 대해 푸스투아리움이라고 하는 징벌을 내렸는데, 대개 동료들이 둘러싸고 죽을 때까지 몽둥이질을 하는 것이었다. 또한 민간인을 대상으로 절도를 하는 경우 손을 절단했을 정도로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은 확실했다. 그러나 문제는 해방 이후의 한반도에서 남북한 모두 군대 창설시 일본군 및 관동군 출신의 대거 유입으로 이러한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것이다.[24] 일본 불교에서는 갓 출가한 사람을 그냥 신참 혹은 신도(新到)라 부르며, 삭발식이 끝나면 바로 정식 승복을 착용하므로 일반 승려와 행자를 복장으로 구별하는 한국 불교와 조금 다르다.[25] 아마도 타지사람들과 섞이면 지역감정으로 싸움날것을 예방하는 차원같다. 한국군은 훈련소 입대시 본적지가 같은 이들로 편성한다.[26] 심지어 천황이 지나가자 동네 아이들이 돌무더기를 던지는 등의 수난을 겪기도 했다.[27] 명과의 무역을 목적으로 한 조치였기도 했으나, 민족주의가 발흥한 근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꽤 굴욕적인 모습.[28] 다만 그렇다고 덴노가 정말 투명인간 취급만을 받은건 아니다. 덴노가 역대급 치욕의 시대를 보낸 시절은 고나라 덴노로 대표되는 그 전후까지 합쳐 3대 시절로 이 시절의 덴노는 정말로 서예 작품을 파는 식으로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갸야 했고 길거리에서 돌이나 얻어맞는 비참한 신세였다. 하지만 보통은 덴노도 조정도 실권은 없었어도 조정의 관위는 헤이안 시대에도 귀족들의 격을 나누는 기준이나 다름없었고 이는 지배층이 귀족에서 사무라이로 교체된 가마쿠라 시대~센고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천하인이라 불리는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모두 덴노를 아주 대놓고 개무시하지 않아서 적어도 경제적인 지원 정도는 해줬고 덴노가가 쇼군가와 혼사를 맺거나 영지를 받기도 했다. 앞에 언급한 쇼군도 아시카가 요시미츠라고 일본사에서 거의 유일하게 찬탈을 시도하려 했다는 의혹이 있는 쇼군이라 좀 특이 케이스이긴 하다. 물론 그만큼 덴노가 쩌리 취급을 받은건 맞지만[29] 그나마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었을지도 모를 고메이 덴노도 35세로 단명했다.[30] 이 사람은 본인도 친히 고문과정에 참가했다.[31] 물론 그렇다고 본능이 시키는 대로 대열을 흐트러뜨리고 멋대로 은엄폐하면 어디선가 달려올 적 기병대의 칼날에 목이 날아간다. 전열보병의 대열은 곧 고중세의 장창 방진과 같은 역할이므로.[32] 육군과 전쟁 후반기의 해병부대에는 전투일선으로 보충병의 수시증원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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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물론 중간에 무인정권, 여몽전쟁, 홍건적의 난, 왕자의 난 같이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실종되다시피 하고 지방세력이 세력을 떨치던 혼란기는 있었다.[34] 하다못해 이 시절에도 황제만 허수아비일뿐 세도가문들은 확실히 교지국, 광남국의 최고권력을 독점하는 전형적인 중앙집권적 절대군주의 모습을 보였으며 에도 막부의 도쿠가와 가문도 이정도로 권력독점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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