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1:42:32

오일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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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명칭3. 1970년대 오일 쇼크의 역사
3.1. 제1차 오일 쇼크3.2. 제2차 오일 쇼크3.3. 오일 쇼크의 결과와 영향3.4. 오일 쇼크의 종결
4. 2014년 이후의 역 오일 쇼크
4.1. 2020년 마이너스 유가 사태
5. 관련 문서

1. 개요

오일 쇼크(oil shock) 또는 석유 파동, 석유 위기(oil crisis)의 일반적인 의미는 '현대 인류 문명이 사용하는 에너지원 가운데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석유 수급에 생긴 문제로 인해 국제 유가에 혼란이 발생한 것'을 가리키지만 대개 별다른 수식어가 없으면 1970년대에 발발한 역사적인 오일 쇼크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1970년대의 오일 쇼크는 각각 1973년에 발생한 제1차 오일 쇼크와 1979년에 발생한 제2차 오일 쇼크로 세분화되며 전자는 아랍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 정책으로, 후자는 이란 혁명에 따른 정치적 불안으로 석유 공급 부족 및 가격 폭등이 일어나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사건을 가리킨다.[1] 이 사태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 종전과 브레튼우즈 체제[2] 성립 이래 서방 선진국들이 누려 오던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중산층 확대 등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종말이 찾아왔으며 중동 지역에서의 격렬한 정세 변화로 인해 여러 전쟁이 발발하였다. 한국에서는 중동 산유국의 건설 수요 확대로 인해 근로자들이 대거 중동으로 파견되어 '중동 붐'이라는 키워드가 유행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2. 명칭

어휘 '오일 쇼크(oil shock)'는 보다 일반적인 석유 파동 및 유가 혼란을 가리킬 때 사용되며 1970년대에 발생했던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지칭할 때는 '오일 크라이시스(oil crisis)'를 사용할 때가 많다.

'오일 쇼크' 쪽을 일본의 시사 용어에서 유래한 재플리시인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오일 쇼크 역시 1970년대 석유 파동 당시 뉴욕 타임스에서 사용하면서 널리 보급된 말로, 이는 현재도 석유 공급에 의한 파동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널리 쓰이고 있다.

3. 1970년대 오일 쇼크의 역사

3.1. 제1차 오일 쇼크

제1차 오일 쇼크 또는 제1차 석유 파동, 1973년 석유 위기(1973 oil crisis)는 1973년부터 1974년에 걸쳐 발생한 오일 쇼크다.

이 오일 쇼크는 아랍 지역의 산유국들이 대대적으로 석유 무기화 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면서 발생했다. 제4차 중동전쟁이 시작되면서 OPEC이집트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리비아 아랍 공화국, 이라크, 이란 제국, 시리아, 튀니지가 손잡고 석유를 감산하는 동시에 원유 가격을 인상했다. 여기서 4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을 지지했던 미국, 영국, 캐나다 자치령, 네덜란드 같은 나라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고 4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권을 지지했던 프랑스, 서독, 일본, 대한민국 같은 나라들이 수혜를 많이 입었다.

제3차 중동전쟁 시절부터 아랍권이 석유 무기화를 시도했으나 크게 실패한 적이 있었다. OPEC에서 석유 금수 조치를 결의하고 수출을 중단했으나 이란 제국아프리카 지역,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베네수엘라, 미국까지 증산하면서 효과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시장점유율을 크게 상실했을 정도로 손해를 막심하게 입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OPEC는 시장 점유율 회복을 위해 증산을 해 원유를 헐값에 팔아야 하기도 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 오일 쇼크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부 장관이었던 아메드 자키 야마니[3]였다. 그는 제3차 중동전쟁 시절 OPEC의 석유 금수조치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반대했던 선구안이 있었는데 완전한 석유 금수란 불가능하며 부분적인 금수조치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그의 주장대로 되었고 그의 발언권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제4차 중동전쟁을 시작하면서 그는 금수 조치가 아닌 매월 단 5%만 감산해도 시장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3차 중동전쟁 시절의 금수 조치가 아니었기 때문에 OPEC 회원국들의 참여도도 높일 수 있었다. 이 전략은 성공적으로 맞아 들어가 1배럴 당 2.9달러였던 원유가는 한 달 만에 12달러에 이르렀으며 이는 현재 달러 가치로 환산하면 14.5달러에서 55달러로 폭등한 것이었다. 당장 세계 경제는 헬게이트가 활짝 열렸다. 그리고 당시 친미 국가였던 베네수엘라인도네시아[4], 나이지리아와 비 OPEC 국가인 소련도 이 틈을 타 석유 가격을 대대적으로 인상했다. 이 석유 무기화 전략으로 아랍은 제4차 중동전쟁에서 일본과 유럽공동체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한국도 1973년 12월 17일 아랍을 지지한 적이 있다.

중동과 베네수엘라, 가봉 등의 산유국들은 말 그대로 역사적인 호황기에 접어들었고 세계 최대의 산유국 중 하나였던 소련도 꽤나 쏠쏠하게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기존의 저유가가 상식이었던 시대의 세계 경제, 특히 미국과 영국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물론 그와 상관없이 다국적 석유 기업들이나 미국, 캐나다[5] 내에서도 석유 생산으로 먹고 살았던 지역은 나름대로 짭잘하게 이득을 보기는 했다. 그러나 석유 기업들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는데 당시 영국과 미국이 주도하는 석유 메이저 세븐 시스터즈는 자국에 석유를 우선 공급하지 않아 큰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영국과 미국에 석유를 우선 공급해 경제 충격 완화를 시도했다가 OPEC 산유국들의 추가 보복이 두려웠을 뿐더러 냉전 시대 산유국이었던 소련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미국과 영국과 그의 우방국들에게 공평하게 분배하는 것이었다. 이를 두고 에너지 역사 전문가 다니엘 예긴이 1991년에 쓴 에너지 역사 관련 유명한 서적인 The Prize에서는 equal misery 내지는 equal suffering이라 불렀다. 중동 산유국들이 경제 타격을 입히려고 했던 표적은 미국과 영국 그리고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 미국, 영국의 우방국들이었다. 참고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지지 성명을 내보낸 일본, 한국, 유럽공동체에 5% 감산유예를 해준 적이 있다.

중동의 석유 감산은 제4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974년 3월이나 되어서야 감산을 중단했다. 1차 오일 쇼크 이후 사우디아라비아는 스윙 프로듀서(석유 시장 질서 주도국)의 지위를 얻었고 이를 주도한 아메드 자키 야마니 사우디아라비아 석유부 장관은 이후 미스터 오일, 석유 황제라는 별명이 붙었고 1986년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었던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그를 경질할 때까지 석유 수출국 기구(OPEC)와 세계석유시장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한민국은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미국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바람에 한남동모스크 부지를 제공하고[6] 제4차 중동전쟁에서 아랍권을 지지하는 등 아랍권과 관계를 쌓아 가던 시기였기 때문에 1차 오일 쇼크의 여파를 상대적으로 덜 받았지만 그래도 중화학공업을 육성하던 초기[7]였기에 자칫 중단될 뻔했다. 오일 쇼크가 절정에 달했던 1980년에 가려질 뿐이지 이때도 커다란 시련을 맞이했다. 1981년 5월 25일 이전까지[8] 월요일-토요일 아침방송이 전면 중단되었고[9] 1973년 3.2%였던 물가 상승률이 1974년과 1975년에 걸쳐서 연 25%로 상승해 서민들은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여러 나라가 1973년 대비 성장률이 2~3배 이상 폭락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는 것에 반해 대한민국의 성장률은 1974년, 1975년에 9.5%와 7.8%를 기록해 상대적으로 나았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원유 도입 값이 3배나 폭등해 무역적자액이 폭등하여 달러가 흐르는 중동에 기업들이 진출해 많은 액수를 벌어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앞서 서술했듯이 제4차 중동전쟁에서 중동을 지지하는 등 중동과 관계를 쌓아온 덕분에 중동에서 벌어 온 막대한 외화를 통해서[10] 예상외로 빠른 시일 내에 1차 오일 쇼크를 극복하게 되었으며 1977년에 1인당 GNP 1,000달러를 돌파하였다. 하지만 외화가 많이 들어온 것은 좋았는데 유동자금이 대거 자산시장으로 쏠리면서 부동산 투기붐과 주식 광풍(주로 건설주)이 불고 주요물자의 품귀 현상이 만연하면서 물가상승률은 1970년대 중후반 내내 10%대를 유지했다. 하지만 인플레를 감안한 1인당 소득이 크게 상승하였다. 자세한 것은 여기를 참조. 1차 오일 쇼크 이후 "대한민국은 중동 정세에 대해 일절 거론하거나 개입하지 않으며, 중동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일절 거론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가 대한민국과 중동 간 외교의 기본적인 기조로 자리잡았다.

여담으로 1970년대 말에 지어진 아파트의 대다수가 엘리베이터 격층정지형태로 지어졌는데 이것도 바로 오일 쇼크의 뼈아픈 유산이다. 2020년대 들어 금싸라기 땅으로 변모한 여의도의 광장아파트라든가 전국 각지에 퍼진 삼익아파트 계열 아파트(부산 광안리 인근 삼익비치타운 등)의 다수가 이런 요상한 형태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9층에 내리면 9층과 10층 사이의 계단참 부분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후 9층은 내려가고 10층은 올라가야 하는 형태다.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아파트 중에는 수서 신동아아파트[11](1992), 시지 천마타운(1994), 만촌보성타운(2002)가 이런 형태다.

또 석유를 연료로 쓰는 자동차 산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일명 '말레이즈 시대'[12]라고 불리는 암흑기가 미국에 찾아왔다. 이 시기에는 1960년대 이후로 도입, 강화된 환경규제, 안전규제, 연비규제, 심지어는 엔진 출력 측정기준의 변동까지 겹치는 바람에 전통적으로 연료를 많이 먹는 대배기량 위주의 자동차들을 만드는 미국 제조사들은 울며 겨자먹기로 차의 배기량을 낮추고 연비를 올려야만 했다. 그래서 이 시기에 개발되어 1970년대 중후반에 출시되거나 연식변경을 거친 미국산 자동차들은 대부분 전 세대 통틀어서 유난히 엔진이나 배기량, 마력이 줄어든 모습을 볼 수 있다.[13] 또한 원가절감을 위해 차량 대부분의 품질이 전체적으로 하락했으며,[14] 개발비를 줄이기 위한 뱃지 엔지니어링 역시 성행하는 등 여러모로 미국 자동차 산업의 쇠퇴를 불러왔다.

한국에서는 위 말레이즈 시대만큼 큰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자동차를 사용하는 택시 업계에 영향이 미쳤는데, 1973년 박정희 정부는 연료 절약을 위해 개인택시 기사들에게 3일 중 1일은 무조건 쉬게 하는 택시 부제를 실시했다. 이 택시 부제는 석유파동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가 2022년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이 택시 부제 폐지를 선언하면서 49년만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한편으로 한창 경제성장 일로에 있었던 일본에는 한동안 헬게이트가 열렸다. 거리의 네온사인까지 꺼 버릴 정도로 긴축에 들어갔는데 당시 신인 만화가였던 모토미야 히로시의 작품에서 '북내륙(호쿠리쿠) 석유 비축기지'가 소재로 쓰이는 등 당시로서는 꽤나 대사건이었다. 특히 많이 오른 게 일본이 수입에 의존하는 종이였기 때문에 당시 서적, 잡지 류는 페이지 수가 절반으로 줄었으며 휴지 값이 폭등해서 신문지로 뒤를 닦았다, 물로 씻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래서 1차 오일 쇼크를 경험한 세대는 이때의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서 무슨 일만 터지면(예: 걸프 전쟁) 휴지를 사재기하곤 했다.[15] 그러나 오일 쇼크 이후에도 일본 제품의 대서방 수출이 계속 쾌조를 보였기 때문에 사실상 21세기에는 그 존재감이 묻혔다. 더 무시무시했던 건 당시 일본 기업들의 경영자들은 고용과 임금을 삭감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임금을 높이고 고용을 늘렸다는 것이다. '나도 열심히 노력할 테니 여러분도 함께 믿고 노력해 주세요.'라는 의지의 표현이었다고 한다. 경기가 조금만 어려워져도 고용과 급여가 삭감되는 21세기와 비교되는 대목이다.[16] 특히 특촬 팬과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 일을 상당히 꺼림칙하게 생각하는데 이 1차 오일 쇼크로 인해 당시 인기의 정점을 누리고 있었던 특촬이 제작비 인상으로 작업 환경이 많이 악화되었고 그로 인해 당시 수많은 특촬 작품의 제작 명맥이 끊어지고 작품의 질이 떨어지는 결과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1차 오일 쇼크는 어찌어찌 저예산 연출을 사용해 넘겼지만 2차 오일 쇼크 때는 많은 회사가 특촬물 제작을 접어 버렸다.[17] 대신 자원은 별로 안 들어가고 인건비가 대부분인 애니메이션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의외로 빨리 극복은 되었는데 엔화가치를 의도적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수출경쟁력을 유지했고 일본 자동차가 연비 향상에 성공하면서 미국 시장을 잡아먹는 등의 호재가 잇따랐기 때문이다.

서유럽은 나라마다 각각 다른 수준의 영향을 받았는데 네덜란드 같은 경우 완전한 엠바고를 받아서 배급량 이상의 전기를 사용한 이들에 대해 감옥 형량을 선고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들어섰으나 프랑스영국과 같은 경우는 중동전쟁 당시 개입을 중단하고 미국의 자국 기지 사용을 막은 대가로 지장 없이 석유를 공급받았다[18]. 이렇게 각각 제재의 수준이 달랐기 때문에 유럽 공동체는 오일 쇼크 대책 마련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다만 오일 쇼크는 공급 지장보다는 가격 증가로 유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데 전세계적인 석유 가격 증가는 원자재 가격 증가로 다가왔고 이로 인해 서유럽은 경제 불황을 겪었다. 특히 프랑스와 같은 경우 이 오일 쇼크로 인해 자국의 전후 황금기인 영광의 30년을 끝맺었고 서유럽과 미국, 캐나다의 전후 베이비붐도 196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종결되는 나라들이 늘어나는 양상을 보였는데 대체로 이 시기에 끝을 맺어 대부분의 서유럽, 북미 국가들이 저출산에 들어섰다.

오일 쇼크의 악영향은 빈국과 부국을 가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중미 국가들은 농업에 크게 의존했는데 오일 쇼크는 유류비 급등 및 화학 비료 생산 감소를 초래했고 이것은 다시 식량생산 감소로 이어져 국민들은 엄청난 민생고에 시달렸다. 이 경제난은 좌익 반군 결성 및 재부흥과 그에 따른 내전 발발 및 격화라는 또 다른 결과에 일조했다. 과테말라니카라과의 좌익 반군은 1970년대에 급격히 세를 늘렸는데 니카라과에서는 아예 정권을 뒤집어 버렸다. 엘살바도르에서도 1970년대에 좌익 반군이 결성되어 내전을 벌였다.

3.2. 제2차 오일 쇼크

제2차 오일 쇼크 또는 제2차 석유 파동, 1979년 석유 위기(1979 oil crisis)는 1979년부터 1981년에 걸쳐 발생한 오일 쇼크다.

제2차 오일 쇼크의 원인은 1979년 이란 혁명으로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주의에 입각한 공화국 신정부가 수립된 것이었다. 제1차 오일 쇼크를 경험했던 원유 시장은 이란에서 발생한 이슬람 혁명의 향방이 중동 산유국들의 장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경각심과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이란은 1978년 12월 당시 혁명으로 인한 파업으로 하루 6백만 배럴 분량에 달했던 석유 생산량을 2백만 배럴까지 축소했으며 혁명 직후에는 또 다른 산유국이었던 소련이 이란의 이슬람 혁명의 여파를 차단[19]하기 위해 이웃 국가인 아프가니스탄친소 정권을 지원하여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다. 이듬해에는 이라크의 이란 침공으로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하면서 불과 몇 달 만에 유가는 배럴당 40달러선까지 치솟았다.

그런데 이란 혁명 직후인 1979년 3월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하면서 다시 이란 내 원유 생산을 늘렸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북해와 멕시코만 등에서 발견된 유전을 통해 원유 생산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 올라간 원유 가격은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이는 산유국들의 공급이 안정적으로 회복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상승하자 상승한 가격 그대로 원유 가격을 고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물가는 상승하면서 실업 등의 문제는 오히려 심각해지는 스태그플레이션이 나타났으며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급작스럽게 불어난 달러를 미국 은행으로 회수하기 위해 금리를 21%까지 인상했다.[20] 이 결과 미국에 잔뜩 외채를 끌어다 국내의 산업화를 진행하고 있던 대한민국이나 폴란드 같은 비산유 개발도상국들은 졸지에 빚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상황을 맞이했고 경제가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이 당시의 고금리 정책은 오일 쇼크가 끝난 뒤에도 지속되어서 1980년대 중남미[21]동유럽 외채 위기의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된다. 루마니아에서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문서에 나오는 "수입은 안 하고 수출만 하는 정책"과 비슷한 경제 정책이 동유럽과 중남미에서 널리 펼쳐진 때가 바로 1980년대의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본적인 복지 지출마저도 줄이면서 국민들의 삶이 막장화된 건 덤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공산권 붕괴에도 오일 쇼크가 알게 모르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60년대 이후 동독, 체코슬로바키아를 위시로 동유럽 국가에서는 경제성장률 둔화 현상 극복과 수출 증대를 위한 투자를 늘리기 위해 서구권으로부터 많은 빚을 끌어모았는데 당장은 경제적으로 크게 윤택해졌지만 문제는 갑작스럽게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수출액이 줄어듬에 따라 세수가 줄어들고 갚아야 할 부채가 급증하면서 재정 문제가 심각해짐에 따라 긴축 재정을 시행하는 상황이 찾아왔다는 것이다. 인민들 입장에서 서구권에 비해서 자유를 누리지 못하던 차에 그나마 누려 왔던 복지가 축소되었는데 선거로 정권을 심판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자연스레 불만이 쌓이고 쌓이면서 공산 정권을 지탱하던 토대가 취약해졌고 그나마 버텨 주던 소련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인한 군비 증가,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로 인한 막대한 복구 비용에 후술할 1986년 유가 폭락까지 맞이하면서 동구권 국가들은 물론이고 자국민들조차 먹여 살리기 힘들어져 결국 1980년대 말에 공산권이 붕괴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영국의 마거릿 대처 내각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1981년 런던국제석유거래소를 설립했고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 시절이었던 1983년에 뉴욕상품거래소에서 원유 선물 거래를 취급하면서 수급 불균형이 들통나기 시작했다. OPEC는 이에 대응해 1983년 감산에 합의하고 가격도 배럴당 34달러에서 29달러로 완만하게 인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스윙 프로듀서로서 홀로 감산을 했던 덕분이었고 사우디아라비아 외의 다른 OPEC 회원국들은 감산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 이란과 이라크는 전쟁 중이라 감산할 턱이 없었고 그러다 보니 다른 회원국들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비 OPEC 회원국들의 북해, 멕시코만 유전은 합의 대상도 아니라 감산할 이유가 없었고 소련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감산할 수 없었다. 2년 동안 감산 고통을 홀로 감내한 사우디아라비아는 결국 1986년에 석유 치킨 게임에 참전해 생산량을 1일 200만 배럴에서 1,000만 배럴로 증산했다. 1985년 배럴당 30달러였던 유가는 1986년 7달러까지 폭락하면서 2차 오일쇼크는 역쇼크로 막을 내렸고 사우디아라비아의 파흐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는 아메드 자키 야마니 석유부 장관에게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그 해 경질시켰다.

1979년 상반기부터 원유 도입값이 인상되어 하반기 들어서 오일 쇼크의 조짐이 보여 박정희 정권 몰락의 원인들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특히 이 시기 한국 경제는 석유 의존도가 높은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면서 연간 제조업 성장률이 20% 이상을 상회해 1차 석유 파동 당시보다 석유 의존도가 훨씬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더욱 타격이 컸으며 물가 상승률도 1978년에 14%에서 1979년는 18%로 상승하였으며 고도 성장을 뒷받침하였던 역대 최고의 설비 투자 증가율은 꺾여져 파산, 해고가 급속히 늘어 본격적인 불황으로 접어들었다. 1979년에는 8.7% 성장을 하였지만 1980년 1분기에 전후 최초의 역성장인 -1.6%, 물가상승률이 29%로 급등해 1차 오일 쇼크 때보다 극심한 경제적 시련을 겪었다. 제5공화국의 병크라고만 알려진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도 알고 보면 오일 쇼크로 인한 자동차 수요 급감이 한몫했다. 이러한 불황을 능가하는 상황은 외환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998년이었다.

이때 한국 경제가 얼마나 어려웠느냐면 1979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6면에 의하면[22] 한동안 사라졌던 물레방아가 다시 등장하고 어선은 경비를 줄이려고 돛을 달고 출항한다는 내용이 실렸으며 7면에는 공단에 감원 바람이 불고 조업을 중단하는 업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담겨 있다. 아울러 노동청이 1979년 6월 20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1979년 5월 말까지 임금 체불액은 136억 300여만 원(296개 업체)으로 1978년 같은 기간의 체불액 19억 5,100여만 원(240개 업체)의 무려 7배에 이르렀다.

당시 모든 물가를 통제하던 한국 정부는 1979년 3월에 국내 석유제품 가격을 9.5% 인상한 데 이어 7월에 다시 59%나 올렸고 전력요금도 35%나 인상했다. 최종적으로 1979년 소비자물가 인상률은 18%나 됐다.

1979년 4월 9일자 동아일보는 '과(過) 성장 16년 황(黃) 신호 걸린 한국경제'라는 제목으로 시리즈물을 연재했는데 기사에 소개된 중견 섬유업체 기능사원 M 씨(36)의 사연은 당시 중산층의 대표적인 삶으로 여겨진다.
"공고 졸업인 M 씨 봉급은 세금 등을 빼고 나면 월 15만 원. 이것으로 노모와 어린 두 자녀, 아내 그리고 고교생인 남동생 등 6식구 생계를 꾸려가면서 작년 봄까지만 해도 월 2만 원씩을 저축했으나 올해에는 저축은커녕 다달이 생계를 잇기조차 어렵다. 경제는 해마다 고도성장을 한다는데 어째서 물가는 엄청나게 오르기만 하는지, 왜 갈수록 살기가 어려워지는지 의문에 잠기게 된다. 고도성장에 회의를 품는 사람은 M 씨뿐이 아니다. 작년 이래 엄청난 물가고와 유례없는 투기 붐, 걸핏하면 빚어지는 생필품 파동에 시달려온 저소득 서민들은 누구나 과연 고도성장이 무엇을 가져다주는 것인가라는 의문에 잠겨 있다."

자고 나면 물가가 오르니 사재기도 판을 쳤다. 1979년 7월 11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유류 값 및 전기요금 인상에 이어 관련 제품 값도 최고 48%까지 인상 발표되자 아파트 등 고급 주택가 수퍼마켓 상가 등에서는 비누 화장지 설탕 식용유 등 생필품을 리어카와 용달차로 한 차씩 사들이는 '사재기'가 또다시 극성이고 버스요금 인상설에 자극돼 미리 쇠표(토큰)를 사두려는 시민들이 판매소에 줄을 이었다."

3.3. 오일 쇼크의 결과와 영향

  • 중동 지역의 대두
    두 차례의 오일 쇼크를 계기로 석유 수출국 기구 아래 뭉친 중동권은 국제 무대에서 어느 정도 발언권을 얻게 되었다. 물론 서방과의 첨예한 대립각을 세우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더 이상 제국주의의 유산 아래 휘둘리지 않는다는 선언을 한 것이나 다름 없는 사건이었다. 특히 이스라엘중동전쟁에서는 승리했으나 오일 쇼크로 역관광을 타면서 운신이 굉장히 조심스러워졌다.[23]

    흔히 구() 7공주(Seven Sisters)라고 불리는 당시 앵글로 페르시안 석유,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 뉴욕 스탠더드 오일, , 쉐브론, 걸프 오일, 텍사코 등을 위시한 다국적 기업(IOC: International Oil Companies)들이자 지금의 슈퍼메이저의 전신인 기업들은 전세계 석유고의 85%를 장악하고 있었으나 오일 쇼크 이후의 현재 슈퍼메이저는 고작 5% 정도를 가지고 있으며 산출량은 10%에 불과하다. 이들에게서 국유기업으로 넘어간 석유고는 현재 전세계의 88%에 달하며 그 중 가장 큰 7개 회사인 신() 7공주-사우디 아람코, NIOC(National Iranian Oil Company), INOC(Iraq National Oil Company), PDVSA(Petroleos de Venezuela), 가즈프롬, CNPC(China National Petroleum Corp.), 페트로브라스(브라질), 페트로나스(말레이시아) 등 National Oil Companies (NOC)-는 매장량의 40%, 생산량의 1/3를 쥐고 있다. 국영회사들은 매출에서는 수직독점 체계를 완성한 슈퍼메이저들에게 뒤떨어지나 절대적 석유고를 가짐에서 나오는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튀르키예는 1960년대 대한민국과 비슷한 시기에 공업화를 이루기 시작해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체적으로 자동차도 생산하고 전통적인 섬유산업을 기계화시켜 오늘날까지도 주력산업으로 육성시키고 있었지만 두 차례에 걸친 석유 파동으로 나락으로 떨어졌다. 참고로 1971년 미국이 금태환을 거부하자 그동안 달러에 고정환율제로 운영하던 튀르키예는 외화 고갈로 더 이상 그렇게 운영이 불가능해져 변동환율제를 실시했다. 그 결과 튀르키예 리라의 가치는 1971년 1달러=9리라에서 1980년에는 1달러=90리라, 1988년에는 1달러=1,300리라, 그리고 2005년 디노미네이션 직전에는 1달러=149만리라로 폭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튀르키예는 당시 어떻게 해서든 중동 국가들이랑 쇼부를 쳐서 원유 공급만큼은 유지하려고 했던 대한민국과는 달리 NATO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속해 있었고 중동과의 관계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대한 나쁜 기억도 있고 세속주의와 서구화의 길을 걷는 튀르키예와 이슬람 신정주의 체제였던 중동 산유국들의 차이도 있어 관계가 정말 최악이었기 때문에 이슬람 형제들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현재도 튀르키예는 원유를 중동 국가에서 직접 사 오지 못하고 미국이나 유럽, 중국, 일본, 한국에서 재가공한 석유를 수입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옆나라인 시리아, 이라크에 비해서 유가가 터무니없이 비싸다. 유럽 국가 기준으로 해도 튀르키예의 유가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 신자유주의(neoliberalism)의 보급과 불안정의 시대 개막
    오일 쇼크는 '효율적인 경제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수정자본주의라는 통칭으로도 불렸던 종래의 복지국가론을 침몰시키고 신자유주의 정책의 보급을 확대시켰다. 마침 복지국가론 자체의 문제도 지적받고 있었으며, 파동으로 기존의 필립스 곡선[24]에 기반한 경제 이론은 큰 타격을 받았다.

    브레튼우즈 체제 아래 금본위제도의 붕괴와 석유 파동으로 인해 제2차 세계 대전의 상처를 회복하고 경제적인 성장을 맛보던 유럽 내 약 25년 간 '영광의 시대'는 무너지며 케인즈주의 경제학파가 심한 타격을 받고 정계 주류에서 밀려났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레이거노믹스)와 영국의 마거릿 대처 정권(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왔고, 원자재값 하락이 고금리와 겹치면서 좌파 정권이 득세하던 중남미와 아프리카, 동유럽 국가에도 신자유주의 정책이 시행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파동의 여파와 경제 효율성에 대한 의식은 중국과 소련의 개방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제2차 석유 파동 당시인 1979년부터 덩샤오핑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기치로 내세우며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는 정책을 펼쳤으며, 소련의 경우 하술하듯 산유국으로서 파동 진행기에 일시적인 호황을 누렸다가 석유 파동의 종결 직후 원유 증산 치킨게임으로 다시 유가가 급락하자 심각한 불황에 빠졌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중심으로 글라스노스트 · 페레스트로이카가 단행되었다.

    이후 세계 경제는 유동적인 자본의 흐름에 크게 의존하는 '불안정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며 현재까지도 유동성 위기가 하나의 화두로 제시되고 있다.
  • 서방 국가의 상호 협력 강화와 G7의 결성
    오일 쇼크는 서방의 경제 선진국들로 하여금 기존의 공산권 진영 외에도 제3세계의 각지에서 '자신들을 위험에 처하게 하려는 세력'들에 대항하여 종래의 자본주의 질서를 지켜내야 한다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는 미국을 제1극으로, 서유럽을 제2극으로, 그리고 일본을 제3극으로 하여 긴밀하게 협력한다는 외교관(外交觀)인 '삼극주의(Trilateralism, 三極主義)'를 발생시켰다. 1973년 미국, 일본, 서독, 영국, 프랑스 5개국 수뇌가 모인 G5 정상회의가 처음 개최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와 캐나다가 참가하며 G7이 되었고 이 정기 회담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재계에서도 삼극위원회와 같은 민간 회의 기구가 설립되었다.
  • 에너지 전담 기구 설립
    한, 미, 일 등 주요 국가에 에너지 관련 부서가 생기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으며[25] 중동 산유국들을 불신한 주요 국가들이 석유를 항상 적정분을 비축하면서 역 오일 쇼크가 계속 벌어지는 사태도 터졌다.

3.4. 오일 쇼크의 종결

한편 오일 쇼크가 끝날 무렵에는 그 동안 호황을 누리던 상당수 산유국들의 경제가 붕괴하고 격변기를 겪었다. 상술한 사우디아라비아의 1986년 석유 치킨 레이스로 영국과 미국의 석유 업체들도 큰 피해를 입었는데 영국의 북해 유전은 심해 유전이었으므로 채굴비가 비쌌기 때문에 무지막지한 증산에 버티지 못했고 미국의 석유 업체도 가격 하락에 버티지 못하여 줄줄이 도산하였다. 당연히 영국과 미국 입장에서는 자국의 석유업체가 줄줄이 망해가는 것이 좋을 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26] 치킨 게임이 장기화되자, 당시 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가 직접 나서서 가격 전쟁을 끝내려고 했다. 결국 조지 H. W. 부시는 1986년 4월에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관세 부과 의지를 천명해 사우디아라비아를 압박하였으며 일본 역시 미국이 관세를 부과한다면 같이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공조하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다 같이 감산하지 않는다면 증산 기조를 유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1986년 하반기부터 OPEC 회원국들과 산유국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힘에 밀려 감산에 합의하였고 1987년 유가가 18달러 선으로 다시 오르면서 안정되었다. 이때의 석유 전쟁은 3차 오일 쇼크로 불리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석유값 하락으로 물가 상승률이 떨어지면서 경제가 살아나는 효과[27]가 커서 묻혔다. 세계 각국의 석유업체와 산유국들의 경제가 급속히 부실해졌다.

이후에 석유값이 다시 오르기는 했지만 1981년의 고점에 비해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그 결과 재정적으로 취약했던 알제리, 멕시코, 베네수엘라, 소련은 재정 수입이 크게 줄어들어 줄줄이 경제적으로 파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전쟁 중이던 이라크에도 발등이 떨어진 건 마찬가지라서 결국 이란과 전쟁이 무승부로 끝난 후 이라크는 이를 메꾸려 쿠웨이트를 침략했지만 압도적으로 참패, 경제 제재까지 받으면서 나라 전체가 완전히 몰락했다. 다만 모든 산유국이 망테크를 탄건 아니라서 충분히 채굴 단가가 낮은 나라들이었던 사우디아라비아리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은 오일 역쇼크의 시기에도 여전히 부유한 국가들이다.

유가는 1991년 걸프 전쟁 때 잠깐 급등했다가 전쟁 종결과 함께 다시 배럴당 10달러대로 내려갔으며 1998년 아시아 외환위기 때는 9달러까지 떨어졌다. 그러다가 1999년부터 유가 하락에 따른 경제난에 지친 산유국들이 감산에 나서면서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21세기 들어서는 중국과 인도, 인도네시아, 브라질 등 인구 대국들의 경제 성장으로 인한 에너지 소비 급증으로 인해 2008년 봄에는 석유값이 배럴당 100달러를 훨씬 넘어 150달러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대침체가 몰아친 2009년을 제외하면 2014년 중반기까지도 꾸준히 100달러의 고유가를 유지했다. 물가 상승률을 감안해 보더라도 이 시기의 유가는 2차 오일 쇼크 때를 넘어선 수준이었지만 그동안 대체에너지 개발과 에너지 효율성 증대로 석유의 비중이 과거에 비해서 떨어졌고 각 국가들의 석유 비축분, 그리고 셰일 가스 생산으로 그 충격을 상당 부분 흡수했기 때문에 3차 오일 쇼크라고 불리지는 않는다.[28]

1차 오일쇼크는 반쯤 뜬금없게도 미국의 전투기 F-16F/A-18의 탄생 원인이 되기도 했는데, 미국이 한참 F-14F-15를 세상에 선보이던 때에 이 사건이 터졌기 때문.[29]

안 그래도 F-14와 F-15 모두 고가의 공대공 전투를 통한 제공권 확보 전문 전투기였던지라 값싸고 공대지 공격을 비롯한 여러 잡일(?)에 쓸 새 전투기가 필요했던 차에 이 사건이 터져버렸고,

미 공군은 이 기회에 <값싸고, 기름 덜 먹고, F-15보다 더 여러 일에 마구마구 굴릴 수 있을정도로 다목적성과 경제성을 보유한>, 소위 '로우급 전투기'를 뽑는 경량형 전투기 사업(LWF, Light Weight Fighter)을 개시한다.[30]

그렇게 이 1차 오일쇼크로 인해 탄력을 받은 LWF 프로그램은 YF-16과 YF-17, 이 두 가지 기체가 경쟁하게 되고, 이후 예상되다싶이 YF-16이 운 좋게 2차 오일쇼크를 1년 앞둔 1978년 F-16이 된다.

물론, 이 사업에서 F-16에 밀려 탈락한 YF-17 또한 한 단계 더 진화해 미 해군이 (F-14에 비해 상대적으로)가볍고, 값싸게, 다목적으로 굴릴 전투기를 찾을 용도로 시작한 NACF 사업에서는 F-16의 함재기형인 V-1600을 떡발라버린 채 F/A-18 호넷이라는 이름으로 채용이 되고, 이 F/A-18은 현재 대형화된 F/A-18E/F 슈퍼호넷으로 현재까지 미 해군 주력 함재전투기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4. 2014년 이후의 역 오일 쇼크

2014년 후반기 이후 석유값이 급속도로 떨어지면서 산유국들을 중심으로 비상이 걸렸다. 셰일 가스를 본격적으로 채굴하면서 미국의 석유 공급이 급속도로 증가하였고 여기에 석유 시장에서의 점유율을 유지하려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지역 산유국들도 석유 공급을 늘리는 치킨 게임을 벌여서 유가가 급속도로 떨어졌다. 예전과 다른 건 미국이 이번엔 치킨 게임에서 밀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산량이 딸려 유가를 맞출 수 없던 업체들은 생산 중지를 외쳤으나 전반적으로는 엄청난 채굴 효율 증가로 인해[31] 미국도 밀리지 않고 생산량을 늘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오히려 OPEC 국가들 중 생산성이 떨어지는 국가들이 직격탄을 맞았는데 석유 수출에 경제를 의존하던 베네수엘라, 알제리 등 개발도상 산유국들은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입었고 한때 신흥 경제 강국을 뜻하는 '브릭스'의 축이었던 브라질러시아 역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때문에 대침체 이후 간신히 회복세를 보이던 세계 경제는 이런 경제 위기의 연쇄 효과로 심각한 불황을 맞이했다.

비중동 지역의 OPEC 국가들은 꾸준히 감산을 주장해 왔고 이로 인해 2016년 초에 들어서야 간신히 석유 생산량 동결을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등의 중동 지역 OPEC 가입국들은 입장을 번복하면서 합의를 이행하지 않을 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4.1. 2020년 마이너스 유가 사태

WTI유 2020년 5월물
2020년 1월 8일 배럴당 64.39달러
2020년 4월 20일 배럴당 -40.32달러[32]

파일:2020년5월물WTI2.png

마이너스 40.32 달러. 오타도, 시스템 오류도 아니다.

2020년 3월 코로나로 인한 수요급감으로 50~60달러대에서 놀던 오일이 40달러대까지 추락했는데 이 수요급감으로 인한 가격폭락을 해결하고자 OPEC을 위시한 산유국들은 긴급 감산 협의에 들어갔다. 당연히 감산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감산 합의에 실패하고 감산실패에 야마가 돌아 버린 사우디가 "이렇게 된 이상 원유생산 풀파워로 가동한다!", "어디 한 번 자본주의 시장논리의 물량맛좀 봐라!"[33]너죽고 나죽자식 초증산 선포까지 해 버렸다. 월요일 개장하자마자 금요일보다 10달러 내린[34] 32달러로 시작한 뒤 순식간에 30달러를 붕괴시키는 대폭락을 겪는다. 하필 이 회의가 주말이라서 금요일에 저가라고 원유선물을 매수했던 개미들은 월요일에 '캐시콜'[35] 이라는 지옥을 겪었다.

이 감산 실패의 원인을 러시아의 셰일가스 업계 고사 전략이라고 보는것은 매우 잘못된 시각이다. 애초에 셰일가스 업계가 도산한다고 쳐도 지층에 묻혀 있는 셰일가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닌데 1차 산업에서 고사 전략을 쓴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고사전략은 반도체처럼 한 번 백기를 들면 다시는 진입할수 없는 자본집중, 기술집약산업에서나 가능한 전략이다. 심지어 미국의 전통적 원유 기업들은 셰일가스 업체가 도산하면 이를 기회로 보고 M&A를 벼르던 참이었다.

감산 실패의 원인은 미국은 반독점법에 의해 감산합의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입장이라 OPEC 같은 감산협의체에 끼지 '못'하기 때문인데 문제는 이렇게 되니 과거 러시아와 중동이 감산하면 미국은 제한 없이 무한대로 생산하며 감산으로 인한 가격 상승의 꿀을 마음대로 빨아먹는 패턴이 매번 반복되었던 것이다. 물론 감산국들도 이런 사태를 진작에 예상했기 때문에 '미국 기업이 참여하지 않는한 감산은 없다'를 고수하고 끝까지 감산을 하지 않았으나 그 결과는 셰일가스 혁명으로 일컫어지는 가격 폭락뿐이었다. 채굴 원유가 원가면에서는 비교도 안 되게 쌌지만[36] 셰일가스업체는 '사기업'이고, 감산협의체들은 국민을 책임지는 '국가'인 만큼 손해보는 쪽은 원유국이었다.[37] 그래서 러시아가 '이번에도 감산하면 그 꿀은 미국이 다 빨아먹는 것 아니냐' 며 감산을 거부한 것이 감산 불발의 원인이었다.

다만 이 저유가는 미국 입장에서도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도 중재에 나섰으나 러시아의 미국 내 원유기업 참여요구에 트럼프는 '우리는 자유시장이다 그들이 알아서 할 것'이라며 대신 감산합의를 안하면 관세부과라는 말로 미국의 힘을 믿고 배짱을 부렸다.[38]

그 사이 원유는 계속 뽑혀 나오고 유가는 하염없이 계속 흘러내렸는데 결국 더 이상의 유가하락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산유국들이 두 손 두 발 다 들고 감산합의를 했으나 코로나로 인한 수요 급감은 상황이 훨씬 심각해서 감산합의에도 불구하고 유가는 하락세를 멈추지 않고 대폭락을 거듭했고 급기야 마이너스 유가 배럴당 -40달러라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을 가격을 맞이했다! 이게 무슨 의미냐면 해당 인도분을 팔려면 석유 한 배럴(약 159L)에 40달러를 받는 게 아니고 덤으로 줘야 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냐면 유가는 보관비용이 들기 때문인데 전세계 오일창고가 모조리 가득차서 넣을 공간조차 없기에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39] 마이너스 유가를 예측한 사람이 극소수 있었지만 그 어떤 누구도 -40달러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는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고작해야 마이너스 한자리에 불과할 것이라고 예측했을 뿐이었다[40].

이로 인해 ETF, 해외선물을 통해 유가 상승에 배팅한 개미들은 -100%를 넘어가는 손실에 줄줄이 삼도천을 건너는 레전드를 찍었다.[41] 사실 개미들도 개념없이 들어간 것도 아닌 게 배럴당 20달러대도 모든 생산자가 만족할수 없는 역사적인 저가였기 때문에 앞으로 상승하리라 보는건 어찌보면 상식이었다. 시장은 항상 상식을 벗어나서 문제였을 뿐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증권사는 마이너스호가라는 개념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비를 해 놓지 않았고 '뭐야 유가 한자리수? 이건 기회잖아?!' 라며 우수수 뛰어든 개미들이 계약당 수천만원에 달하는 상식을 넘어서는 손해를 봤다.[42] 본래 실물인수도 방식[43] 상품의 거래 마감날에는 진입할 수 없었지만 하필 원유 mini라는 상품이 있었는데 이 상품은 실물인수도 방식이 아니라서 진입이 가능했다. 아침이 밝아 오면서 오일 가격은 양수로 전환했지만 이 mini 상품은 마감이 하루 빨랐고 -37.175달러에 확정이 나 버리면서 증권사도, 투자자도 모두 패닉에 빠졌다. 물론 투자에 대한 위험은 전적으로 투자자 본인의 몫이지만 이 경우는 전무후무한 마이너스 호가에 진입해 호가창이 증발해 버려서 손절을 아예 할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특히 개인투자자 비율이 매우 높은 키움증권의 피해가 매우 막대했다. 증권사도, 투자자도 모두 울게 되었다.[44]

다만 이 가격대는 코로나로 인한 수요급감으로 전세계 오일 보관 창고가 가득 찬 상태[45]]에서 거래만기날에 도저히 재고를 풀 곳이 없어 생긴 일시적인 가격[46]일 뿐 전체 오일 가격이 이 정도로 내려간 것은 아니다. 6월물 가격은 20불대를 유지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6월물도 6불대를 보면서 코로나로 인한 경제상황의 심각성을 알렸다.

실제로 이 폭락은 마이너스 유가로 마감하지는 않았다. 실제 공급자가 매도를 친게 아니라, 마켓타이밍 전략으로 접근한 선물 트레이더들의 배팅으로 인해 마이너스까지 간 것이라 아침이 밝아오며 양수전환을 했고 실제로는 9달러에 마감하였다. 다만 9달러 역시 정말 말도 안 되는 역사에 남을 가격인점은 분명하다. [47]

이후 코로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해 금리 인하로 유가를 포함한 모든 것의 가격이 살살 오르다가 2021-2022년 우크라이나 위기로 인해 유가가 100달러를 돌파하면서 3차 오일쇼크가 터질 우려가 나왔다. 이렇게 된 건 러시아 제재로 러시아산 석유 공급이 끊기고 앤데믹에 대한 기대로 석유 수요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2년이 살짝 안 되는 기간 동안 석유값이 지하와 하늘을 왔다 갔다 했다. 2022년 6월 3일 기준으로 OPEC+ 국가들의 원유 증산 합의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봉쇄 해제, 증산분이 기존의 러시아 생산 분을 전부 대체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 미국의 원유 비축량이 예상보다 크게 감소하는 등 유가 상승 요인이 더 많아 유가가 120달러를 다시 돌파했다. OPEC 국가들은 물론이고 국내외 여러 기관이나 매체, 전문가들은 7~8월에 150달러를 돌파할 것으로 전망해서 3차 오일쇼크는 이미 시작됐다고 보는 분석이 많다.

그러나 시장의 전망과 달리 2022년 3월과 6월에 정점을 찍은 유가는 경기침체 우려와 중국의 제로 코로나 정책 등으로 수요가 줄어든 데다 인플레와 전쟁을 선포한 미국 연준의 가파른 금리 인상으로 달러가치가 킹달러로 불릴 정도로 급등하면서 가파르게 하락하여 9월 27일 기준으로 80달러 이하에서 거래되었다.

페트로달러 때문에 달러의 가치가 올라가면 유가는 내려간다.[48]

5. 관련 문서


[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오일 쇼크 - 1973년의 아랍 산유국의 석유 무기화 정책과 1978년의 이란 혁명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석유 공급 부족과 석유 가격 폭등으로 세계 경제가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은 일.' 발췌.[2] 구체적으로는 1971년 닉슨 쇼크로 인해 금 태환이 중지된 후 브레튼우즈 체제의 존속과 기축통화인 달러화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스미소니언 협정이 맺어져 스미소니언 체제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던 혼란기였다. 그러나 지속적인 달러 하락과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심화로 결국 제1차 오일 쇼크와 제2차 오일 쇼크 사이 킹스턴 협정(1976)이 맺어지며 현대의 금융제도인 변동환율제가 도입되었다.[3] 생몰년도: 1930~2021, 석유 장관 역임: 1962~1986[4]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인도네시아도 오일 쇼크로 나름대로 쏠쏠하게 이득을 본 나라다. 오일 쇼크가 터지기 전에 1인당 GDP가 100달러에도 못 미쳤을 정도였는데 오일 쇼크를 거치면서 1981년에 600달러 선을 찍었다. 그렇지만 이전에 인도네시아가 위낙 가난한 국가였던 데다가 인구가 많았기 때문에(소련도 인구는 세계 3위권이었지만 적어도 중간 이상은 갔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돈지랄을 자랑하는 걸프만의 부유국들이나 이 시기에 위스키도 국가보조금으로 수입했다는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중산층들은 여름마다 미국으로 휴양을 갔다는 베네수엘라에 비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었다. 사실 이 점은 나이지리아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5] 주로 중서부 지역이 이에 해당되었다. 앨버타서스캐처원 2개주.[6] 물론 명목상으로는 6.25 전쟁 때 병력을 보내준 튀르키예에 대한 보답 차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당시 남북한이 한창 체제경쟁을 벌이던 상황에서 아랍권의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차원이 더 강했다.[7] 인터넷상에서 보이는 혹자의 논지에 따르면 1차 오일 쇼크로 인해 선진국의 산업구조 개편(탈중화학공업)이 추진되었으며 이를 위해 선진국과 IMF의 주도로 개발도상국의 중화학공업이 계획적으로 육성되었고 당시 박정희 정권은 그 프로그램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중화학공업 육성책도 그에 대한 연장선상에 나온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1차 오일 쇼크는 1973년 10월에 터진 것이고 박정희 정권의 중화학공업 육성책이 공식발표된 것은 1973년 1월이다. 실제 검토 시기까지 따지면 훨씬 이른 시기부터 준비되었을 것이며 1973년 초만 하더라도 유가가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중동변수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시간의 선후를 완전히 바꾼 주장이다.[8] 물론 비공식적으로 1980년 하순 중에 풀리기는 했지만 고등학교 교육방송 1시간 30분을 편성하는 정도라 본격적인 아침방송 재개라고 보기에는 좀 뭐했다.[9] 석유파동을 주제로 한 MBC 드라마에서는 제한 송전을 하는 장면, 가족이 죽었는데 휘발유가 없어서 리어카에 시신을 싣고 공덕동 언덕길을 걸어가는 주인공을 보여주기도 했다. 석유 트라우마는 꽤 오래 가서 박정희 시절에는 포항 석유 발견 사건으로 전 국민이 흥분한 적도 있고 전두환 시절에도 청소년 드라마로 산유국 해프닝을 그리기도 했다. 1987년에 동해 6-1 광구에서 가스전을 시추하며 탐사선에서 불을 붙였을 때 모든 매체가 대서특필했다. 1997년 외환 위기 직후인 국민의 정부 시기에도 한국이 산유국이 될 뻔한 가상의 해프닝을 주제로 한 드라마가 방영된 적 있다. 동해 가스전은 산출량이 많지는 않지만 2021년 말에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영남 해안지역에 천연가스를 공급했다.[10] 이 당시 해외에서 들어온 외화의 80% 이상을 중동에서 내보내졌을 정도였다.[11] 여기는 세 층마다 복도식이 있고 중간의 두 층은 계단식이다. 계단식 층을 가려면 복도식 층의 높은 곳에서 내려서 내려가야 하는 형태.[12] 굳이 직역하자면 '불쾌감의 시대'가 된다.[13] 정 모르겠다면 대표적인 머슬카인 포드 머스탱의 74년식 모델의 모습을 다른 세대들과 비교해 보자.[14] 특히 고급차들도 원목 대신 싸구려 합판이나 나무 흉내만 낸 플라스틱을 내장재로 사용하거나, 대시보드에 인조가죽을 넣고 바느질 자국을 찍어내는 등 전체적인 품질이 하락했다.[15] 2010년대 후반 들어 이 세대가 경제를 주도하는 입장에서 은퇴하면서 이런 일은 줄어들었다.[16] 다만 지금도 일본 기업은 고용 자체는 어지간해서는 보장해 주는 편이다.[17] 츠부라야 프로덕션, 센코사, 피 프로덕션은 2차 오일쇼크 때 특촬물 제작을 접어 버리고 액션 영화의 하청을 받거나 저작권으로 추억 장사를 하는 회사로 전락했다. 그나마 토에이는 계속 특촬물을 만들었으며 츠부라야는 1990년대에 다시 제작을 시작했다.[18] 다만 영국은 노동당 정부 해산에 대한 반발로 인해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이어진 석탄 광부들과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인해 연료 부족을 겪었다.[19] 소련은 중앙아시아에 수많은 무슬림 연방 공화국들이 있었고 그들에게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수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20] 당시 폴 볼커 연방준비제도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선 고금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정치권의 압력에도 꿋꿋히 20% 금리를 밀고 나갔다. 그 대신에 고금리의 여파로 극심한 불경기가 닥쳐 왔고 지미 카터 대통령이 1980년 대선에서 로널드 레이건한테 참패하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21] 대표적으로 멕시코는 산유국이라 1980년대 초반에 1인당 GDP 3,000달러선을 찍기도 했다. 그러나 1986년 유가 폭락으로 수출이 별로 늘어나지 않으면서 빚을 도저히 갚지 못하게 되자 자연히 경제가 파탄났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물론 그 대가가 어마어마해서 노동자들의 임금은 크게 깎이고 복지 제도도 무력화되었으며 빈부격차가 어마어마하게 커졌고 투자자유화에 따라서 외부의 충격에 취약해지면서 경제위기도 주기적으로 터져 나왔으며 현재까지도 빈부 격차 문제나 저임금 노동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22] 이상하게도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는 해당 신문의 6면이 7면으로 나와 있다.[23] 일례로 오일 쇼크 이후 스포츠계에서 중동의 발언권이 비약적으로 커지면서 이스라엘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아시아 축구 연맹에서 추방당했다. 이스라엘은 한동안 방황하다가 유럽올림픽위원회, 유럽 축구 연맹에 가입해서 예선을 유럽 국가들과 치르고 있다.[24] 물가 상승과 실업률의 연관 관계를 설명하는 그래프. 분수함수 형태로 돼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두 변수 모두가 값이 커지는 경우는 발생할 수 없다.[25] 일본 - 자원에너지청. 1973.7, 미국 - 에너지부. 1977.10, 한국 - 동력자원부. 1977.12.[26] 미국도 오일 쇼크로 큰 피해를 봤다. 미국은 알래스카처럼 석유가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이 있는데 이 동네는 공화당의 지지 기반이며 전통적으로 석유 자본은 공화당의 돈줄이었다.[27] 1980년대 후반의 3저 호황도 플라자 합의와 함께 이때의 석유값 하락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면서 벌어진 일이다. 다만 중남미나 동유럽의 경제를 살리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외채 액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28] 물론 증산이 아닌 대침체로 인한 수요 감소에 의해서인 것도 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는 고유가는 투기 자본 때문이라면서 증산을 거부하였다. 2009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갈 곳을 잃은 투기 세력들이 석유와 곡물 등 원자재 시장에서 한탕을 노리고 있다는 주장이었다.[29] F-14, F-15는 각각 1974년, 1976년 실전배치되었다.[30] 물론 해당 사업에는 베트남전에서 F-5가 보여준 활약으로 '경량 전투기도 나쁘진 않은데?'라는 시선도 한 몫했다.[31] 채굴기당 일일 생산량이 2010년에는 70배럴이었으나 2015년 기준으로 794배럴에 달했다고 한다.[32]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어디까지나 선물한정 가격이다. 실물가격이 -대로 진입한 것이 아니다.[33] 사우디의 풀파워 생산량은 일 1200만 배럴 이상으로 세계 최대다.[34] 이 수치도 어마어마한 수치다. 원유 1계약의 증거금이 당시 300만원선이었는데 계약당 천만원이 넘는 손실이 단 하루만에 발생한 것이다.[35] 증권사가 요구하는 증거금의 20%미만이 되거나, 오버나잇의 경우 유지증거금을 채우지 못하면 강제청산이 나가는데 이를 '마진콜' 이라고 한다. 캐시콜은 사용자가 갖고 있는 증거금을 넘어서게 되면 돈을 물어내야 하는 걸 캐시콜이라고 한다. 보통 주말을 끼고 오버나잇을 할 때 발생하며 선물은 증거금의 10~50배에 달하는 '레버리지'를 쓰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다만 캐시콜은 정말 극히 드문 케이스이긴 하다.[36] 셰일가스는 기술의 발전으로 내리고 내린게 36달러 선이지만 기존 원유 채굴은 10달러가 채 안 된다.[37] 대표적인 산유국인 러시아의 예산 재정기준은 배럴당 42달러, 중동은 무려 90달러대다. 대부분의 산유국들 역시 석유 의존도가 대단히 높아서 별반 다르지 않는 상황이었다.[38] 사실 트럼프도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였는데 미국 오일협회에 감산의향을 떠 보았지만 미국 원유기업들은 오히려 이를 셰일가스 업체 인수합병 기회로 보고 감산의지가 전혀 없음을 내비쳤다.[39] 전세계 모든 유조선, 정유사 창고가 아주 꽉꽉 가득찬 상태였다.[40] 링크된 기사 댓글만 봐도 마이너스를 예상하자 오히려 기관이 개미들 등쳐먹으려는 수작질 쯤으로 치부하는 여론뿐이었다.[41] 이때 삼성증권에서 발행한 원유 레버리지 ETF는 실제가격차이와 30%가 넘는 괴리율을 보여 거래정지까지 당했다. 즉 개미가 엄청나게 진입했다는 말이다.[42] 이게 얼마나 엄청난 것이냐면 감산 실패로 인한 사우디의 최대증산 선포로 -10달러가 떨어졌을 때도 개미들의 캐시콜이 속출하면서 레전드라고 불렸는데 그 4배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한 것이다. 액수로 따지자면 0달러에 매수했어도 계약당 2,500만원이며 대개 그 위에서 매수했기 때문에 계약당 평균 3,000만원이 넘는 손실이 발생했다. 참고로 해당 상품의 증거금은 300만원선이였고 계약당 100~200만원 벌어도 잘 먹었다는 소리가 나온다.[43] 이런 원자재 상품 선물은 만기까지 들고 가면 현물로 인수하게 된다. 본래 선물시장의 목적이었다.[44] 이후 대부분의 증권사에서는 마이너스 호가를 대비하지 않은 과실이 명백하다 보니 강제청산이 나가는 기준인 총예탁금의 80%손실 혹은 매도버튼을 누른 로그가 있는 회원의 경우 해당 가격대에서 체결이 가능했던 호가로 인정해 주는 선에서 합의하였다.[45] 육상 원유 저장고는 물론이고 유조선까지 꽉 찼다.[46] 이런 현상을 가리켜 백워데이션(backwardation)라고 한다.[47] 1배럴은 158.9리터다. 즉 1달러당 17.5L 정도인 셈이었다. 생수도 12L에 3,000원대인걸 감안하면 석유가 물보다 싼 값에 팔린 것이다.[48] 하지만 미국을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유가가 내려가도 수혜를 볼 수 없었다. 원유를 사려면 미국 달러를 지불해서 사야하는데 미국 달러가 다른 국가들의 화폐들보다 강세이기 때문이다. 2022년 기준 원달러 환율은 1400원을 돌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