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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富察傅恒 (푸차 푸헝)1723년 ~ 1770년 (향년 47세)
청나라의 정치인, 군인
2. 생애
건륭제의 첫 황후인 효현순황후의 남동생이자 건륭제의 처남. 부찰 부항은 부찰 이영보의 자식 중 막내인 9남으로 태어났다. 부항은 건륭 5년부터 시위[1]로 일했고, 건륭 7년에 어전시위에서 내무부 총관, 원명원 사무 관리로 승진했으며, 다음해에 내무부 총관에서 호부 우시랑으로 옮겼고, 건륭 11년에는 군기대신, 호부 우시랑(곧 좌시랑으로 바뀜), 내대신에, 그 다음해에는 호부상서, 난의위(銮仪卫)[2] 장위대신(掌卫大臣), 의정대신, 전시독권가(殿试读卷官), 회전관(会典馆) (법/경전 관련 모임기구) 부총재(副总裁)와 정총재(正总裁)가 되었으며, 또 다음해에 누이였던 효현순황후가 사망하면서 태자태보에 올랐고, 이후 대소금천과의 전쟁에 파견되면서 일등충용공(一等忠勇公)의 작위를 받았다.부찰 부항은 만주 귀족인 엽혁나랍씨와 결혼했다. 게다가 부인 나라씨는 당시 청 제일의 미녀로 유명했고 집안 또한 강희제 때 권신인 엽혁나랍 명주의 증손녀로 만주팔대가 출신이었다.[3][4] 부항과 그녀는 매우 금슬이 좋았고, 3남 2녀를 두면서 행복하게 살았다.[5] 부항은 건륭 34년 미얀마와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악성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돌아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죽었다. 건륭제는 부항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친히 그의 저택으로 갔다. 이후 가경 원년에는 3남 복강안이 사망하면서 군왕으로 증작[6]하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여담으로 이후 실제 역사에서 부항의 차녀는 숙가황귀비가 낳은 건륭제의 11황자 화석성칠친왕 영성[7]의 적복진이 되는데, 부항의 딸인 적복진 부찰씨는 만주 상3기이자 효현순황후의 조카로, 영성은 건륭제 슬하의 황자들 가운데에서 정실부인의 출신성분이 가장 좋은 황자 중 하나였다. 차녀를 비롯해 부항의 자식들은 대부분 황실과 혼인했다. 그 중 아들 복강안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공주와 혼인하지 않았지만 건륭제의 신임을 가장 많이 받았고 죽어서 군왕이 된다. 다른 자녀들도 모두 총애를 받았는데, 장남은 복령안(福靈安)[8]은 부마(駙馬) (건륭의 사촌 유군왕 홍경 愉郡王 弘慶의 사위), 둘째 복륭안(福隆安)[9]은 부마(駙馬)(건륭의 4황녀 화석화가공주의 남편)-일등용공(一等忠勇公)-태자태보-병부상서-군기대신, 막내 복장안(福長安)[10][11]은 일등성정후(一等誠靖侯)-호부상서-군기대신, 자매 중 다른 1명은 철모자왕(鐵帽子王)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의 후손, 화석예공친왕 순영(和碩睿恭親王 淳穎)의 적복진이 되었다.
[1] 처음 남영시위(蓝翎侍卫)에서 이등시위(头等侍卫)로 승진[2] 금의위 같은 특별사법기구[3] 건륭제의 후궁인 서비 예허나라씨의 동복 자매로, 서비의 둘째 언니가 부항의 부인이다.[4] 부항의 가문인 부찰씨도 명문가로 고조부 합시칠(高祖 哈什屯)은 의정대신, 증조부 미사한(曾祖 米思翰)는 청 초기 중신으로 내무총관과 예부시랑을, 강희제 친정 직후에 호부상서와 의정대신을 역임하였으며, 백부 마제(伯父 馬齊)는 강희8년 공부원외랑을 초임으로 산서순무, 좌도어사, 병부상서, 호부상서, 무영전대학사, 보화전대학사, 태자태부 등을 역임한 삼조원로(三朝元老)였다.[5] 4남 복장안은 첩 이씨의 소생이다.[6] 아들을 군왕으로 추증했는데, 아비를 그보다 낮게 하는 법도 없고, 유교에서 원래가 아들의 공으로 아비를 올리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였다.[7] 조선인 출신 김신다리의 후손인 숙가황귀비 금가씨의 소생.[8] 건륭 12년 다라액부(多羅額駙)가 되었으나 준가르 토벌에 참전하면서 건륭 26년까지 혼례가 연기, 건륭 21년 삼등시위(三等侍衛), 건륭 24년 이등시위(二等侍衛)에서 일등시위(頭等侍衛)로 승진, 건륭 26년 3월 다라유군공왕 홍경(多羅愉恭郡王 弘慶) (강희제의 황15자 다라유각군왕 윤우(多羅愉恪郡王 允禑)의 아들의 적장녀와 혼례, 건륭 27년에 雲騎尉의 작위를 얻었으나, 건륭 31년에 사망[9] 건륭 23년에 화석액부(和硕额驸)화석공주의 부마, 건륭 25년 3월에 순혜황귀비 소씨의 소생 화석화가공주(和硕和嘉公主)와 혼례(2년전 '액부'는 부마로 삼을 예정이라는 공지), 건륭 33년 병부상서(곧 공부상서로 바뀜) 겸 군기대신, 건륭 35년 아버지 부항 사망시에 큰형 복령안이 이미 사망한 상태라 일등충용공(一等忠勇公)의 작위을 계승, 건륭 38년 태자태보에 올랐으며, 건륭 41년 공부상서에서 병부상서로 옮겼고, 건륭 49년에 사망[10] 복강안과 동일한 외형이기에 건륭제가 어릴때부터 궁중에서 키웠으며, 후에 藍翎侍衛이 되었다. 건륭 44년 공부우시랑이면서 정황기 한군기 부도통(正黃旗漢軍副都統)가 되었고, 건륭 45년 군기처로 파견 학습를 시작하면서 상으로 자금성에서 기마를 허가 받았으며, 건륭 48년 호부좌시랑, 건륭 49년 5월 난의위 장위사 대신(鑾儀衛 掌衛事大臣)이 되고, 6월 내대신에 올랐으며, 7월 군기장경으로 감숙 회족의 반란 진압에 나갔다. 건륭 51년 윤7월 호부상서에, 12월 정백기 한군기 부도통(正白旗漢軍副都統)에, 건륭 53년 3월 몽군기 양홍기 도통(鑲紅旗蒙古都統)에서 만주 정홍기 도통(正紅旗滿洲都統)로 옮겼으며, 건륭 55년 태자소보(太子少保), 건륭 59년 만주 양백기 도통(鑲白旗滿洲都統)으로 승승장구하였으나, 가경제 즉위 이후에 뉴호록 화신의 당으로 분류되면서 끈떨어진 신세가 된다. 가경 3년 일등후작(一等侯爵)에 봉하여지고(이때는 건륭제가 상황제로 존재), 가경 11년 위장총관(圍場總管), 가경 12년 열하 부도통(熱河副都統)로 고치고, 가경 13년 고북구 제독(古北口提督)를 대리하며, 가경 14년 위장총관(圍場總管) 겸 마란진 통병(馬蘭鎮總兵) 및 내무부 총관 대신(總管內務府大臣)으로 고치고, 가경 18년 마란진 총병(馬蘭鎮總兵) 겸 고북구 제독(古北口提督), 가경 20년 한군기 정황기 부도통(正黃旗漢軍副都統) (1년전 만주 정람기 부도통(正藍旗滿州副都統)) 및 건예영 총통대신(健銳營總統大臣), 가경 22년 사망[11] 복장안은 위에 3명의 형들이 정실 나랍씨에 소생인 것과는 달리 첩실 이씨의 소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