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1 11:20:23

SC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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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참고 자료

1. 개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6.25 전쟁/화교 참전과 역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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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육군 제4863부대(HID) 소속의 부대. 200명 정도로 구성됐으며 특징은 부대원이 한국화교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대명의 SC는 Seoul Chinese의 준말로 한국에 체류했던 화교란 뜻이다.

2. 역사

6.25 전쟁이 한참이던 1951년 1월 반공 화교를 중심으로 창설하였다. 장교가 없던 탓에 대만군 장교가 파견되어 교육을 맡았다. 본래 장제스는 중화민국군을 한국전에 참전시키고자 하였으나 이승만의 반대와 미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1]

10주간의 양성훈련 후 장병들은 12명씩 조를 나눠 육군방첩부대에 분산배치되었다. 무장공작대원 70명은 전방에 배치되어 중국군과 북한군 사이에서 한국어중국어를 쓰는 식으로 정보 수집 활동을 펼쳤다. 부대 해체 당시 무장공작대원 생존자는 2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일설에 의히면 동부전선 서 중공군을 상대로 중국인끼리의 전투도 있었지만 부실한 기록으로 인해 사실 확인 여부는 불투명하다.

1953년 9월에 부대가 해체된 후 일부가 군에 남아 중공군 포로 설득과 대북방송 중국어 파트 등과 심리전 등에서 종사했다.

제1보병사단 예하 중국인 특별수색대와 SC지대에서 활약했던 한국 화교들은 외국인이라 보상금은 받지 못 했으나 이는 한국인들도 거의 다 마찬가지였다. 1971년 6.25 전쟁에 참전했던 한국 화교들 중 53명이 종군기장을 받았고 1975년에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았으며 2명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200명이 참전해 40명이 전사했는데 이 중 39명이 한국에 매장된 것으로 추측된다.

3. 참고 자료

잊혀진 화교참전용사 추모비라도 세워주오 (세계일보 2014년 6월 24일자 기사)
현충원에 추모비 하나 없지만... 70년전 사선 넘나들던 화교용사들 (오마이뉴스 2020년 6월 23일)
"한국인과 함께 피 흘렸다는 기록 반드시 남겨야" (오마이뉴스 2020년 6월 23일)
제2 조국 지키려다 산화…기록 없이 역사 뒤안길로 ([세계일보 2014년 6월 25일자 기사)
대한민국 위해 목숨 바치고 잊힌 화교 참전용사 300여 명 (월간조선 2022년 기사)


[1] 맥아더는 중공군의 참전이 확인되자 대만군 동원과 중국 만주 폭격을 강력하게 주장하였으며 장제스도 파병에 적극적이었지만 전쟁 확대만을 외치던 맥아더의 호전성과 명령불복종에 질린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전격 해임하면서 대만군 참전은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