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한민국의 과거 북파공작부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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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해군의 APD[1]-127 USS Begor 함의 상륙용 주정에 탑승한 유격대원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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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도 유격대는 한국 전쟁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 소속 제8241부대 주한합동고문단(Joint Advisory Commission in Korea, JACK)이 창설한 1951년 3월부터 1952년 12월까지 존재했던 유격대다. 부대의 위치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태종대에 있었다. 이들은 한국군이나 미군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았던, 민간인 신분으로 고용된 군번 없는 용사들이었다.[2]자원자 1,200여 명을 중심으로 1951년 3월 극비리에 창설했다. 주 구성원은 함경남북도와 강원도 출신 피난민 청년들로, 이들은 3~4개월 동안 특수훈련을 받고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북도 일대에 공중/해상으로 침투해 비정규전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이 주둔했던 태종대 공원 안에는 영도 유격대를 기념하는 추모비가 있고 산 중턱에는 그 시절에 쓰던 연병장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 부대는 Y부대[3], 파라슈트 부대 등으로도 불렸으며 적 사살 4,800여 명, 무기류 노획 1,100여 건, 군사통신 시설 파괴 855곳 등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1952년 12월 정전협상 분위기가 무르익자 CIA 측은 부대를 해체해버렸다.#
이 부대에서 근무했던 기간병들, 그리고 상당한 수의 생존자들이 있었음에도 CIA가 지난 수십년동안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던 탓에 단지 카더라식 소문으로만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공식적으로는 그 존재가 인정되지 않았던 베일에 쌓인 부대 취급을 받아왔다.[4] 2007년, CIA는 기밀해제한 29페이지 짜리 문서 'CLANDESTINE SERVICES HISTORY: THE SECRET WAR IN KOREA'#를 통해 자신들이 한국 민간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북한으로 투입해서 각종 비정규전을 수행하게 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이후 JACK에서 근무했던 담당관들의 증언과 사료들도 많이 풀려서 현재는 자료를 찾기가 정말 쉬워졌다.#
2000년대 들어 한국에서는 뒤늦게 영도 유격대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태종대 부대 기념비, 전우회 모임이 활성화된 것도 전부 이 시기부터다. 2016년에는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결국 무산됐다.
2023년, 국방TV에서 영도 유격대를 소재로 한 4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다.
2. 활약상
한국전쟁 때 CIA는 두 개의 외견상 독립적인 조직을 운영 했는데, 하나는 조지 오웰(George Aurell)이 지휘한 OSO(Office of Special Operartion)와 한스 토프(Hans Tofte)가 이끄는 OPC(Office of Policy Coordination)가 그것이다. OSO가 스파이에 의한 첩보를 주로 담당하였고, OPC는 비밀공작활동을 주로 담당하였다. 이 두 개의 조직은 이후 JACK으로 통합되었다.
이들의 거점은 부산 영도에 있던 베이커 캠프였다. JACK 산하의 기간병들은 전원 2차대전에 참전했던 베테랑들로 더치 크래머(Dutch Kramer), 톰 커티스(Tom Curtis), 조지 애치슨(George Atcheson), 조 파그넬라(Joe Pagnella)라는 CIA의 선임 CO(Case Officer. 담당관)들이 훈련과 작전수립, 지휘 등을 맡았다고 한다. 유격대원들은 JACK을 '한·미 합동 고문 첩보부대'라고 불렀다.
OSO는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인 공작원을 모집하였는데, OSO팀들은 남과 북에 모두 존재 했었다. 토프(Tofte)는 그 당시 부산 영도에 있는 CIA OPC 캠프를 지휘하기 위해 한철민을 기용하고, 이 영도부대의 주 임무는 적진 후방에서 적을 교란하는 유격대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를 위해 주로 이북 출신 피난민들을 공작원으로 양성하게 된다. JACK에서는 한국인 공작원들을 SMG(Special Mission Group)라고 칭했다.
Y부대의 인원은 약 1,200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다. Y부대는 작전 지역별로 강원도 북부와 함경남도 남부를 맡은 황룡 관구(Yellow Dragon), 함경남도 중부를 맡은 청룡 관구(Blue Dragon), 함경남도 북부와 함경북도 남부를 맡은 백호 관구(White Tiger), 함경북도 북부를 담당한 오봉 관구(Owl) 총 4개의 부대로 나뉘어졌다. 대원들 대부분은 함경도, 강원도 출신의 월남자들이었다. 이들은 고향이 어디냐에 따라 관구가 정해졌다. 유격 대원들의 연령층도 매우 다양해서, 16세의 중학생부터 50세 이상의 중년층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들은 북한에 대한 적개심이 매우 강했으며, 지휘부는 이들에게 월급을 지급하려 했지만 대원들은 약간의 피복비를 제외하면 월급이나 수당을 전혀 받지 않았다.[5]
1951년 2월, 약 150여명의 인원이 훈련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주일미군 기지에서 약 1개월간 비정규전 교육을 받고 돌아와 부대 교관, 기간병이 됐다. 1951년 4월이 되자 부대의 인원은 약 1,400명으로 늘어났다. 영도는 일종의 치외법권이 적용되는 곳으로 변했다. 보안 또한 매우 엄격했으며, 가끔씩 들어오는 민간인들이 기간병들에게 두들겨 맞고 쫒겨나기도 했다.[6] 유격대원들은 신분증이 없었으며, 군번 또한 한국군에 속하지 않고 미군이 발급했다. 대원들은 입대와 동시에 오로지 군번과 가명만 사용해야 했다. 기밀누설을 방지하기 위해 대원들은 자신이 속한 지역대 외의 다른 관구 부대와의 접촉도 금지됐다. 훈련을 마치면 실전경험을 쌓도록 할 명목으로 태백산이나 지리산으로 보내져서 빨치산 토벌에 투입되기도 했다.
2.1. 육상대
1951년 4월 29일, 훈련을 마친 140명의 선발대가 함경남북도 및 강원도 북부 지역[7]에 최초로 투입됐다.당시 사기는 매우 높았으며, 너도 나도 먼저 투입되기를 희망하며 경쟁했고 호명되지 못한 대원들은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현지 출신으로 이뤄진 대원들은 40~60명 규모의 대(隊, Group)로 조를 이뤄 검은색으로 도색된 수송기에 나눠 타고 낙하하여 지정된 DZ에 집결하였다.[8]침투에 성공한 유격대원들은 현지 반공인사들을 포섭하고 근거지를 구축한 뒤 북한군과 내무서원들을 상대로 사보타주와 게릴라전을 펼쳤다. 필요하다면 본부에 요청하여 CAS 임무까지 수행했다. 이들의 계획은 북한지역 곳곳에 장기주둔하면서 공산군의 전력을 약화시키고 언젠가 다시 북진해올 유엔군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북한군은 Y부대를 '한파 부대', 유격대원들은 '산돼지', '물쥐'로 부르며 매우 성가셔했다. 북한 측은 Y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전방사단을 빼내서 후방경계로 돌리고, 12살 밖에 안되는 어린이들까지 동원하여 유격대원들을 색출하려 했다.
침투한 대원들은 기대이상의 성과를 내면서 활약했으나, 북한군의 추격과 보급품 부족등으로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고 생존율은 극히 낮았다. 일단 이들이 투입된 지역은 한반도에서도 제일 거칠고 험준한 함경도와 개마고원 일대였다. 겨울이 되면 허리까지 쌓이는 눈을 헤쳐가며 해발평균 2천 미터가 넘는 산봉우리들을 넘나들어야 했던 유격대원들은 북한군의 총알에 맞아 죽거나, 얼어죽거나,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어 죽어갔다.[9] 게다가 당시 대원들이 지급받은 장비들로는 장기작전을 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특히 무전기의 경우, 내구도와 성능이 태백산맥의 산봉우리들을 뚫고 통신을 연결하기 힘들었다. 정기적으로 본부에서 보급품을 낙하산으로 투하해줬지만, 경험이 부족한 파일럿들이 대공포 맞을 걱정에 높은 고도에서 아무데나 던지고 갔기 때문에 회수율은 극히 낮았다.[10]
침투 초기에는 아직 현지에 반공인사들이 상당수 남아있었다. 유격대원들도 곧 연합군이 원산에 다시 상륙할거라고 선무공작을 펼치고 다녔고, 이를 진심으로 믿고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주민들이 꽤 많았다. 태극기를 흔들며 반겨주는 곳도 있었으나,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됐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대부분의 주민들이 Y부대에게 등을 돌리고 북한측 토벌부대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다. 현지 출신으로 이뤄진 대원들은 아직 그곳에 남아있던 가족이나 친인척들, 지인들과 재회하기도 했다. 유격대원들은 이들을 최대한 회유하거나, 아니면 탈출할 때 함께 데려가려고 시도했으나 결국 대부분 실패했다.[11] 시간이 흐르자 반공인사들도 점차 자신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변절하여 공산당에게 붙기 시작했고, 이때 대원들 상당수가 서운한 마음과 원망을 감추지 못했다. 이때부터 내륙에 침투한 대원들은 생존을 위해 상당히 잔인해졌으며, 농사 지을때 필요한 소를 징발해 가서 잡아먹는등 민심을 잃을만한 행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 CIA 지휘부의 수준 낮은 작전역량도 한 몫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게릴라전에 대한 이해도는 걸음마 수준이었다. 이들은 동아시아 특유의 지역적 특성을 무시한 채 '어차피 같은 민족이니까 군복만 바꿔입히면 되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고 기본적인 훈련만 시킨 뒤 투입했다.[12] 항공기도 전문적인 전술수송 경험을 가진 항공부대를 통하지 않고 비전문 파일럿들이 담당해서, 대낮에 훤히 다 보이는 상황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잦았다. 누가봐도 수상한 군인들이 동네에 나타나면 현지 주민들을 부리나케 내무서로 달려가 신고했고, 대원들은 근거지 구축조차 하지 못한 채 토벌 당했다. 이렇게 대원들을 소모품으로 취급하는 작계는 결국 무지막지한 손실로 돌아왔다.[13] 지휘부 측은 이렇게 반복적인 피해가 누적되어도 제대로 된 집계조차 내지 못하였고 그냥 투입하기에만 바빴다. 간혹 가다가 적진을 뚫고 자력귀환하는 극소수의 대원들도 존재했으나 상부는 이들에게서 피드백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고 계속 같은 일을 반복하기만 했다. 하지만 누가봐도 손실율이 심하다는게 확연해지자, 지휘부는 공중투입을 서서히 줄여 나갔다. 그러나 1952년 9월 부대가 해체될 때까지 공중으로 침투했던 수백명에 이르는 유격대원들이 이름석자 제대로 남기지 못하고 북한지역 곳곳에서 쓰러져갔다.
2.2. 해상대
공중투입이 너무 큰 손실을 유발하자, 상부에서는 작전방침을 해안선 근처에서 단기간의 소규모 침투 및 타격으로 전환하였고, 1951년 6월경 해상대가 창설되었다. 해상대는 오박을 대장으로 대원 10인에 불과한 소부대로 출발, 기존 게릴라 대원과 해상대 교육대에서 엄선한 대원들로 구성하여 58명까지 늘어났다. 본래는 토벌군의 시선을 해안으로 돌려 내륙쪽 육상대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 시작되었으나, 1951년 겨울을 기점으로 육상대 상당수가 와해되어 버리자 어쩔 수 없이 해상대를 중점으로 운용하기 시작했다.[14]해상대원의 훈련은 모든 유격훈련과정을 마친 대원들 가운데 수영에 능숙하고 배를 잘 탈 수 있는 대원들을 선발하여 미국 UDT 조지 애치슨 대위(George Atcheson)와 조 패그넬라 상사(James C. "Joe" Pagnella)가 그들이 받았던 16주의 미국 UDT 과정을 대원들에게 전수했다. 이들은 미해군의 정규 UDT 과정에 입교한 사례는 아니지만 최초의 비공식 UDT 교육을 받은 한국인들이다. 영도유격대 해상대 출신의 한인섭 영도부대 전우회장은 후에 “한국 UDT 정식 창설 당시 교관으로 영도유격대 해상대 출신들이 지원나가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영도유격대 해상대 출신의 한인섭 영도부대 전우회장. 베레모엔 한국 UDT 철제 휘장이 붙어 있다. 영도유격대 해상대는 비공식적인 최초의 한국 UDT이자, 공식 한국 UDT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
2.3. 해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이후 영도에 있던 CIA OPC기지는 폐쇄되었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첩보활동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휴전협정 후 무력충돌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CIA는 한국인 공작원을 훈련시켜 인민해방군 해군 함정 나포, 왕가도에 있는 수송저장소 폭파, 상하이와 진남포를 연결하는 해저케이블 절단 등 주로 해상작전을 수행했다.영도유격대와 비슷하게 미국 기관이 한국인들을 활용해서 비정규전을 수행하게 했던 KLO 부대, 즉 제8240부대는 그나마 6.25 전쟁 휴전 후에는 한국군으로 이관되어서 KLO 대원들 중 상당수가 대한민국 육군의 정식 군인 신분을 얻었고 원하는 이들은 그 뒤로 계속 육군에서 군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도유격대는 6.25 전쟁 휴전 후 대한민국 국군으로의 이관이나 편입 조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채 방치되어버려서, 병적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심지어 병역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국군으로 다시 신병으로 입대를 해야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개별명단 기록 자료같은 것도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유공자 지정 등의 혜택을 받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영도유격대는 한국 민간인 청년들로 이루어지긴 했지만 애초에 한국군하고는 무관한 부대였고, 영도유격대를 만들고 운용한 미국측에서도 휴전 후 아무런 보장도 해 주지 않았으며, 사실상 용도 폐기 해 버렸기 때문에 영도유격대 대원들은 고스란히 버림받은 희생자가 된 것이다.
3. 관련 문서
[1] 고속수송함이라는 상륙전 지원함이나, 구축함을 개조한 것이라 대수상전이나 대지 함포사격 등은 문제가 없다. 실제로 대한민국 해군도 경남급이라는 이름으로 6척을 도입해서 당시 보유하고 있던 다른 2차대전형 구축함들처럼 운영했다고 한다.[2] KLO를 비롯한 기타 유엔 유격군 산하 부대가 적어도 군 예하에 있었고, 훗날 군적이 인정되었던 것과 비교되는 처사다.[3] 영도(Yong-do)의 앞글자를 따왔다.[4] 1970년대 중앙일보에서 연재기사를 통해 다룬 적이 있다.#. 이 기사의 내용들은 훗날 국방부에서 편찬한 한국전쟁 유격전사에도 포함되는 등, 사실상 공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일단 당대에도 인정이 안됐을 뿐이지,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알음알음 존재가 알려지긴 했었다는 것.[5] 대원들은 돈보다는 자신들의 공적을 인정해주고 법적신분을 보장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다만 미군 고문관들은 그냥 돈으로 해결하려 했기 때문에 그때마다 대원들이 실망했다고 한다.[6] 영도의 위치가 부산이랑 너무 가까웠던 탓에 정부요인들이 낚시하려 왔다가 날벼락을 맞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조차 유격대원들이 폭파훈련을 해대는 소음이 신경에 거슬려서 Y부대를 가리켜 '미군 밑에서 오만방하자게 구는 자들'이라고 경멸하기도 했다.[7] 문천, 안변, 경성, 회양.[8] 해상대가 없던 초반에는 어차피 다 공중으로 투입되었으므로 이들을 별도로 지칭하는 용어가 없었다. 육상대라는 이름은 해상대가 창설되고 나서 구분하기 위해 쓰인 말이다. 다만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51년 4월에 투입된 선발대는 전원 해상으로 침투했다.[9] 본래 함경도는 조선시대에도 4군 6진으로 대표될 만큼 인간이 살아가기 힘든 곳으로 꼽혔다. 주한 유엔 유격군(UNPIK) 소속의 다른 유격대들도 생환율이 낮은 건 마찬가지였으나, 영도 유격대보다는 상대적으로 아군전선에 가까운 곳에서 활동했으므로 귀환하기 훨씬 수월했다.[10] 초기에는 미 극동공군이 군용기를 지원해줬으나 미군과의 연관성을 끊기 위해 민간 항공사와 민간인 조종사를 고용했다. 이들은 숙력도가 복불복이었으므로 특수작전에 대한 전문성이 많이 떨어졌다.[11] 아이들을 두고 갈 수 없다는 부인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홀로 탈출하거나, 투항하라고 권유하는 아버지에게 역정을 내며 그 길로 의절하거나, 북한군 장교가 된 친한 동네형과 야밤에 단 둘이 권총을 겨눈 채 만나 작별인사를 하는등 그야말로 생이별의 현장이 따로 없었다.[12] 물론 대원들이 받았던 훈련들은 여러 군에서 2차대전 때 비정규전을 경험한 인재들을 긁어모아 만든, 당시 기준으로는 꽤 준수한 커리큘럼이었다. 그러나 이런 훈련들도 적진 한복판에서 기약없는 기간동안 목숨을 걸고 작전을 펼쳐야하는 이들에게는 턱없이 부족했다. CIA와 미군은 1950년대 내내 한국과 티베트,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비슷한 삽질을 반복하다가 마침내 자신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고 전문적인 비정규전 부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써내려간 특수전의 전설들은 전부 이 시절의 시행착오 끝에 만들어진 것이다.[13] 대표적으로 1952년 하반기에 공중침투했던 부대들은 DZ에 낙하 직후부터 연락이 두절되어서 전원 전멸 했을 거라고 추정된다.[14] 해상대는 단기타격 위주의 작전 덕분에 공중투입된 대원들에 비해서 생환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다. 게다가 미군과 함께 활동한 덕분에 자료가 꽤 많이 남아있는 편이다. 현존하는 영도 유격대의 자료 상당수는 대부분 이 해상대의 활동을 촬영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