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국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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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0313f,#ce4e5c 대일본제국[1]대일본 제국이라고 쓰는 경우도 가끔 있다.] [ruby(大, ruby=だい)][ruby(日, ruby=にっ)][ruby(本, ruby=ぽん)][ruby(帝, ruby=てい)][ruby(國, ruby=こく)][2] | Empire of Japan}}}[3] | |||||||
국기[4] | 국장 | ||||||
八紘一宇 팔굉일우[5] (1940-1946) | |||||||
상징 | |||||||
국가 | 기미가요 | ||||||
위치 | |||||||
■ 본토 | ■ 식민지 및 위임통치령 | ■ 괴뢰국 및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점령지 | |||||||
1868년 1월 3일 ~ 1947년 5월 2일[6] | |||||||
성립 이전 |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 | ||||||
에도 막부 | 연합군 점령하 일본 | ||||||
에조 공화국 | |||||||
류큐 왕국 |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 ||||||
역사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1867년 대정봉환 • 1868년 왕정복고의 대호령, 메이지 유신 • 1879년 류큐왕국 강제 병합 •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 공포 • 1890년 대일본제국 헌법 시행 • 1894년 청일전쟁 개전(~1895년) • 1904년 러일전쟁 개전(~1905년) • 1910년 대한제국 강제 병합 •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1925년) • 1923년 관동 대지진 • 1929년 대공황 • 1931년 만주사변 • 1932년 만주국 건국 • 1936년 2.26 군사반란 발생 • 1937년 중일전쟁 개전(~1945년) •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1945년) • 1945년 연합국에 항복, 연합군의 본토 점령 • 1946년 일본국 헌법 공포 •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 | }}}}}}}}} | |||||
지리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 위치 | 아시아, 오세아니아, 북아메리카[7] | |||||
영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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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헤이안쿄 (1868년)[8] 교토부 (1868년~1869년)[9][10] 도쿄부 (1869년~1894년)[11][12][13] 히로시마현 (1894년~1895년)[14][15][16][17] 도쿄부 (1895년~1943년) 도쿄도 (1943년~1947년)[18] | ||||||
면적 | 675,114km² (1933년) 8,510,000km² (1942년)[19] | }}}}}}}}} | |||||
인문 환경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 인구 | 105,200,000명 (1940년)[20] | |||||
민족 | 야마토족, 한민족, 한족, 류큐족, 아이누족, 윌타족, 니브흐족, 대만 원주민 등 | ||||||
언어 | <colbgcolor=#fff> 공용어 | 일본어 | |||||
지역어[21] | 대만어, 관화, 객가어, 한국어 | ||||||
문자 | 한자, 가나 문자 | ||||||
국교 | 국가신토 (사실상)[22] | ||||||
군대 | 일본군 | }}}}}}}}} | |||||
정치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1868~1889) 신권 정치 (1868~1945) [23] → 입헌군주제 · 과두정 (1889~1918) →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1918~1932) → 군사독재 (1932) → 입헌군주제 · 의원내각제 (1932~1940) → 군사독재 · 익찬 체제 (1940~1945) → 연합군 점령하 군정 체제 (1945~1947) | |||||
국가원수 | 천황 | ||||||
역대 천황 | 메이지 천황 (1868~1912) 다이쇼 천황 (1912~1926) 쇼와 천황 (1926~1947) | ||||||
정부수반 | 태정대신[24] → 내무경 → 내각총리대신 | ||||||
행정부 | 태정관 → 내각 | ||||||
입법부 | 일본 국회(귀족원, 중의원) | ||||||
주요 내각 총리대신 |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사이온지 긴모치 오쿠마 시게노부 가쓰라 타로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 }}}}}}}}} | |||||
경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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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위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fff> 연호 | 메이지 (1868~1912) 다이쇼 (1912~1926) 쇼와 (1926~1947) | |||||
시간대 | UTC+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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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일본 제국(日本帝國) 또는 일제(日帝)는 메이지 유신 이래 일본 열도와 그 식민지를 통치했던 국가이다. 1868년 1월 3일부터 1947년 5월 2일까지 존속했다. 동양에서 최초로 근대화에 성공한 뒤 아시아 각국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으로 인한 연합군의 점령 이후 일본국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체제가 붕괴되었다.[26]
2. 상징
2.1. 국호
이름 '일본'의 유래에 대한 내용은 일본/국호 문서 참고하십시오.
국호인 '대일본제국([ruby(大, ruby=だい)][ruby(日, ruby=にっ)][ruby(本, ruby=ぽん)][ruby(帝, ruby=てい)][ruby(国, ruby=こく)])'[27]은 1889년에 공포된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법적 근거를 찾을 수 있으며, 1890년, 헌법이 시행되면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이라는 국호를 칭하였다.
처음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천황에게 제출한 헌법안에서는 '일본제국(日本帝國)'으로 표기되어 있었지만 헌법안을 심의하는 추밀원회의의 석상인 테라시마 무네노리(寺島宗則) 부의장이 황실전범에 '대일본(大日本)'이라 되어 있으므로 문체를 통일하기 위해 헌법에서의 표기를 이로 바꾸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헌법 기초자인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 서기관장은 국명에 '대(大)'를 붙이는 것은 스스로를 존대하는 경향이 있어 대내외에 발표하는 헌법에 '대(大)를 써서는 안된다고 반대했으나 결국 추밀원 의장이었던 이토 히로부미의 재정에 의해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으로 결정되었다.
대일본제국이라는 국호가 대정봉환 때부터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 이전까지만 쓰인 것은 아니다. 일례로 대정봉환 이전인 1854년, 에도 막부도 미일화친조약을 맺을 때 제국일본(帝國日本)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였다. 다만 에도 막부가 자국에 대한 국호를 공식적으로 통일한 것은 아니어서 일본(日本), 일본국(日本国), 대일본국(大日本国), 제국일본(帝国日本), 제국대일본(帝国大日本), 일본제국(日本帝国), 혹은 그냥 간단히 제국(帝国)[28] 등의 국호를 모두 사용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대정봉환으로 천황에게 권력이 넘어갔을 때에도 달라지지 않아, 여전히 정식 국호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상태로 넘어가고 저 위의 여러 호칭들이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 모두 쓰였다. 그러다가 1936년이 되어서야 모든 공문서에서 국호를 대일본제국으로 통일하였고, 항복 이후에 일본국 헌법이 공포, 시행되기 전까지 내부 공문서나 외국과의 조약에서 대일본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한다.
당시 일본 제국은 국호 앞에 '대(大)'자를 붙여서 대일본제국(大日本帝国)이라고 칭했으나 현대 한국에서는 '일본제국'[29]이나 '일제' 또는 '제국주의기 일본'[30]라는 표기를 많이 쓴다. 사실 일제는 대일본제국의 줄임말이 아니라 일본의 제국주의 혹은 제국주의 세력을 일컫는 단어에서 비롯되었지만 한국에서는 이 당시 일본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한국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용어로 <일제 강점하 반민족 행위 진상 규명에 관한 특별법>에서처럼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일본 내에서는 주로 좌익들이 일제라는 말을 쓰고 우익들은 이 말에 반감이 있으며, 많은 일본인들은 이 시기의 일본도 그냥 일본이라고 한다.[31]
일본 국내에서는 메이지 시대의 판례나 규정 및 법령이 지금까지도 효력이 있는 경우가 많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처음 지낸 내각총리대신의 직책도 현재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고 의원내각제나 양원제, 정당제 또한 19세기에 신설된 것들이 지금까지 이어져 왔기 때문에 별개의 국체로 취급하지 않는다. 현지에서는 이때의 일본을 그냥 근대기의 일본 또는 메이지 ~ 쇼와 전전(戰前) 시기의 일본으로 취급한다.
현대 일본에서는 에도 시대 이후의 시대를 연호+시대로 지칭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고,[32] 이때의 일본을 "이전의 일본이나 이후의 일본과는 차별적으로 존재한 대일본제국이라는 독자적인 국가"로 생각하지 않는다.[33]
한국에서 당시 정식국호인 '대일본제국'이 아닌 통칭인 '일본 제국'을 사용하는 이유는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고대 로마의 경우 왕정이었을 때를 로마 왕국, 공화정일 때를 로마 공화국, 제정이면 로마 제국이라고 하듯 국체로서 'Empire of Japan' 혹은 'Japanese Empire'[34]를 '일본 제국'이라고 칭하는 것이 틀린 표기는 아니다. 일본 뿐만 아니라 당대 제국 또는 식민제국의 이름을 '국호(약칭)' + '제국'으로 부르는 용례는 많다. 당장 '오스만 제국'의 경우에도 정식 국호는 '숭고한 오스만 국(Devlet-i ʿAlīye-i ʿOsmānīye, Sublime Ottoman State)'에 가깝지만 오늘날에는 튀르키예 내부에서도 '오스만 제국(Osmanlı İmparatorluğu, Ottoman Empire)', 일본에서도 '오스만 제국(オスマン帝国)' 이라고만 부르며 '숭고한 오스만(崇高なるオスマン)'이라든지 '대 오스만(大オスマン)'이라는 명칭은 아예 사용하지 않거나 그 연원을 자세하게 밝힐 때에만 쓴다.
아울러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의 고유명사를 어떻게 표기할 지는 언어의 사회성에 근거하여 도의적 합의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마치 아돌프 히틀러 집권기 나치 독일을 당시의 정식 명칭인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으로 부르지 않는 것과 같다.[35] 일본에서도 '일본 제국'이라는 용어는 종종 쓰였으니 역사성이 없는 명칭인 것도 아니다. 정 반대로 한국어에서도 '대-' 자를 붙여서 부르는 예시로는 '대영제국'이 있는데, 이 경우는 한자어 명칭 문단 참조.
2.2. 국기
자세한 내용은 일장기 문서 참고하십시오.일장기 | |
공식 명칭 | 일장기 [ruby(日, ruby=にっ)][ruby(章, ruby=しょう)][ruby(旗, ruby=き)] |
속칭 | 히노마루 [ruby(日, ruby=ひ)]の[ruby(丸, ruby=まる)] |
채택일 | 1870년 2월 27일 (관습상[36]) |
2.3. 국가
자세한 내용은 기미가요 문서 참고하십시오.3. 역사
1867년 대정봉환을 통해 천황에게 권력과 정권이 이양되고, 1868년 1월 3일에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의 발표를 통해 500여 년 전의 겐무 신정 때처럼 에도 막부와 함께 막부의 구시대적 직책인 정이대장군, 섭정, 관백 등을 싸그리 폐지하면서 성립되었다. 메이지 유신이라 불리는 개혁개방을 통해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여, 동양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했다.[37] 1889년에는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고 이듬해인 1890년 제국의회가 개설되어, 입헌군주제의 기틀이 완전히 마련되었다.
일본 제국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를 표방하여, 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자 청나라, 러시아 제국 등 주변국과 전쟁을 거듭하며, 그 과정에서 러일전쟁의 승전을 통해 비유럽권 국가가 최초로 근대 유럽 열강을 상대로한 전면전에서 승리하는 역사적 의의를 남겼다.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은 타이완섬, 남사할린, 만주의 조차지 다수의 식민지를 할양받았으며 뒤이어 한반도까지 강제로 병합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협상국 측에 가담하여 승전하고, 전후 국제 연맹의 상임 이사국이 되었으나, 대공황을 계기로 총리가 암살되는 등 정치적 혼란이 일어나 결국에는 군부가 권력을 잡는 군사독재 및 천황제 익찬 국가로 전락하였다.[38] 이후 국방 및 전쟁 업무의 수행이 국가의 최우선 목표가 되는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선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같은 파시즘 국가와 손을 잡고 추축국의 일원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이때 자행된 전쟁 범죄는 현재의 외교 관계까지 영향을 미친다.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국에 패배하여, 포츠담 선언을 기초로 한 무조건 항복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에 황실과 정부가 종속되었고, 1946년 11월 3일에 일본국 헌법이 공포,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됨으로써 체제가 붕괴되었다.
3.1. 대정봉환 이전
자세한 내용은 대정봉환 문서 참고하십시오.1868년(게이오 4년) 왕정복고의 대호령[39] |
에도 막부는 청나라, 조선, 류큐 왕국 등을 비롯하여 역사적으로 알고 지냈던 주변 극소수의 국가와 네덜란드를 빼면 통상 교역을 금지한 해금(海禁) 정책을 폈다. 이는 도쿠가와 막부의 영향력 강화에 기여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이 지속적으로 밀고 들어오자 점차 해금 정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당시 일본 특유의 정치 체제인 幕藩体制(막번 체제)를 먼저 알아야 한다. 에도 막부는 다이묘가 다스리는 번(藩)들의 자치를 제한적으로 인정하면서 이들을 참근교대 제도 등을 통해 막부에 철저하게 종속시키고 번들의 경쟁을 이끌어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중앙 집권적 효과를 노리는 정도에 그쳤다.
시간이 흐르며 점차 에도 막부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반대로 지방 번들의 세력들이 성장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력이 강해진 번을 웅번이라고 하는데 이 웅번들 가운데서도 특히 사쓰마, 조슈, 도사, 히젠 4개 번이 그 기세가 가장 강대하였다. 이들은 막부가 금지한 서구 열강과의 밀무역으로 근대적인 산업 시설이나 무기들을 도입하였고, 재정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에도 막부는 다시금 왕년의 전성기를 회복하고자 3대 개혁을 폈지만 모두 실패했다. 경제의 혼란, 무사(특히 하급 무사)의 잉여화, 새로운 문물과 학문에 따른 정치적 각성, 페리 제독의 함포 외교, 조슈 정벌 실패 등 여러 사건이 이어진 끝에 에도 막부는 그 정치력을 잃었다. 위에 말한 웅번들이 막부의 몰락에 한몫을 담당했다. 졸지에 사면초가 신세가 된 에도 막부는 도사 번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정봉환을 단행하였으나, 사쓰마 번 등 급진파는 이후로 에도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에게 내대신 사직과 막부령 반납을 지속적으로 강요했다. 동시에 쿠데타를 일으켜, 구 막부파가 지키던 교토어소를 점거하고 내대신 요시노부가 없는 상태에서 신정부를 출범한다. 이윽고 메이지 천황에게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선언하게 하면서 요시노부를 정치권에서 완전히 내쫓는 데 성공한다.
이후 1868~1869년 사이에 벌어진 보신전쟁을 통해 구 막부 잔당들을 완전히 몰아내어, 새롭게 정치판의 강자로 떠오른 웅번들은 판적봉환[40]과 폐번치현[41]을 단행(메이지 유신)했다. 그리고 지방 영주가 스스로 중앙 귀족에 올랐다.
3.2. 제국의 탄생
1872년 영국 런던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을 찍은 사진 |
새로운 웅번들은 자신들의 정치 권력을 강화하려고 천황을 이용했다. 이는 명분적으로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막부의 최고 권위자는 일본어로 장군을 뜻하는 쇼군인데, 형식적으로는 일본의 주인은 천황이었고 쇼군은 그저 천황의 대리인으로서 천황에게 권력을 위임받아 일본을 다스릴 뿐이었다. 그리고 700년 사이 7만 평[42] 남짓한 땅을 받고 살아가던 천황은 순식간에 일본 최고 정치 권력의 정점에 등극했다. 이 뒤에는 엄청난 정치 공작이 있었다. 철저한 중앙집권체제, 이른바 만세일계(万世一系)의 사상이 일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났다.
메이지 유신을 전후하여 이들은 서구 열강을 보고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을 크게 느꼈고, 이와쿠라 사절단을 꾸려 유럽으로 보냈다. 이와쿠라 사절단의 목표는 2가지였다. 하나는 서구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다시 교섭하여 평등 조약으로 바꾸기, 다른 하나는 서구 열강들의 정치 체제를 공부하여 일본에 도입하기. 그러나 일본 자체의 정치 역량이 모자랐던 까닭에 1번째 임무는 실패한다. 대신 그들은 2번째 임무를 성공적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정치 핵심부의 해외 사절 경험은 일본 정치에 그대로 넘어왔다. 예컨데 이토 히로부미는 독일로 넘어가서 헌법을 공부하고 온 바 있다.
그래서 헌법은 독일 프로이센 법을 채용하고, 민법은 프랑스인 보아 소나드를 법률 고문으로 초빙하여 프랑스 법을 채용하여 만들었다.[43] 다만 서구 법률을 받아들이면서 시민의 권리나 권익에 관한 사항 중 일부는 지배 계층의 편의에 맞게 취사선택 및 변형 채택되었고[44] 천황의 권한을 확고히 하는 등 온전한 민주주의적 헌법이라 보기는 힘들었으며 선거권도 1889년 중의원 선거가 처음 치러졌을때부터 1920년대 내지에 살던 25세 이상 남성에게[45] 보통 선거권이 주어질때까지 소수의 상류층 내지 중산층이나 가졌던 것이고, 다수의 하층민들은 중의원 투표권을 가질수조차 없었다. 그러하니 식민지 주민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질 껀떡지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식민지인들도 일본 내지에 거류하게 되면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선거 포스터에 보면 한글이 같이 표기된 포스터들이 발견되는데 내지의 재일 조선인들의 투표 안내를 위한 것이다.[46]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 조선 출신의 제국의회 의원으로 친일파 박춘금이 있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비민주적인 정부다보니 그 과정에서 지역 중심 인사가 횡행하였고 부정부패가 심했다. 특히 이들이 시도한 위로부터의 개혁은 서구 문물의 도입과 국민 의무 교육의 시행으로 정치 제도와 시민 문화를 바꾸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지역주의가 사라지고[47] 전 국민이 황국신민으로 일체화하면서 아래의 비판 능력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봉쇄했다. 또한 지극히 혼란한 상황인지라 상층부의 권력 다툼도 늘 일어났고, 금방 내각을 개편했다. 자국의 상황에 맞는 성찰 없이 외부로부터 그대로 이식한 서양식 정치가 보수적인 일본에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3.3. 전성기
러일전쟁 당시 정치풍자 그림엽서 |
또한 러일전쟁 승리 후 한반도를 기반을 군사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철도와 교통망을 개설하고 동시에 식민지가 된 조선에서 합법적으로 약탈하며 국력을 쌓으면서도 만주 군벌 장쭤린과 밀착[48]하며 만주를 먹기 위해 후원국으로 도와주면서도 관동군을 창설해 중국 대륙을 야금야금 먹기 시작한다. 일본의 식민지 대상이었던 대한제국과 같은 국가들은 당시 일본군에 비해 한 주먹거리도 아닐 만큼 군사력이 빈약하였고, 점령하는데 별 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며 일본과 그나마 붙을 수 있는 아시아의 군대는 무장력을 지닌 장제스의 국민당군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사라예보 사건을 기점으로 발발하여 유럽전역에 펼쳐진 제1차 세계 대전과 이후의 짧은 전간기 사이, 모든 유럽이 전쟁물자 생산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일본에 발주를 넣었고 군수물자를 수출하던 일본은 호황을 맞이했다. 일본은 이로써 러일전쟁에서 입은 손실을 어느정도 만회했고, 그동안 외국에 진 모든 채무를 갚은 것과 동시에 수십억 엔의 순채권국이 되어 장차 긴 전쟁을 치를만한 국력도 쌓을 수 있었다.
이후 중일전쟁 이전까지는 호황의 부가 효과로 서민 경제도 어느 정도 나아지는 효과를 얻었는데 이때가 일제의 전성기였고 문화적으로도 번성하던 시기였다.
이 다이쇼 시대는 아무래도 '그래도 그 때는 우리가 잘나갔지'라는 향수가 있어서 그런지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와 함께 일본 서브컬처 등에서 꽤나 낭만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해 나오는 제국 시대 일본의 풍경화나 그림들도 대부분 이 때를 묘사했다. 이런 경향을 일컬어 다이쇼 로망이라고도 한다. 1925년, 보통선거법 도입을 통해 중의원 선거권을 모든 25세 이상 신민(외지인 포함)으로 확대했다. 다만 외지 조선, 대만에는 선거구가 설정되지 않아서 엄밀히는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참정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있어도 행사를 못 했다. 내지에 살면 재산 여하나 본적에 관계없이 선거에 참여했다. 이후 1945년 3월에 조선 및 대만 중의원 선거구를 각 23석, 5석을 할당하려 했었고, 실행 직전까지 갔으나 종전으로 인해 지배권을 잃어 무산된다.
3.4. 군국주의의 대두와 군부의 폭주
러일전쟁을 치르고 열강대열에 오른 후 이때 생긴 채무도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전부 상환하고 흑자를 남기며 일본의 성장이 가시화되자 종전까지 일본을 밀어주던 서구 열강들이 일본을 점차 견제하기 시작했다. 일례로 세계대전의 되풀이를 막자는 취지 하에 체결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일본도 열강들의 압박으로 조인하였다. 하지만 몇몆 제약이 있었어도 일본은 계속된 군비 확장을 시행했고 이 과정에서 농민들에게서 걷는 세금이 점점 높아졌다. 이러자 가계가 위험해진 농민들은 가문을 이을 후계자를 제외하고는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쿄와 같은 대도시로 몰려가 하층민을 이루기 시작했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마구 나눠준 채권의 가치가 폭락할 것이란 소문이 돌면서 1927년 초에 전국적 대공황[49]이 발생했는데 이것을 시작으로 하층민의 대부분인 청년 세대가 "부패한 정권을 무너뜨릴 혁명"을 요구하기 시작했지만, 연이어 1929년에 발생한 세계 대공황으로 2연타를 맞으며 일본 경제가 보이지 않는 수렁에 침식하였다. 이런 상황에 군부가 정치에 관여하며 폭주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군부가 폭주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의 부국강병 정책의 부작용이었다. 부국강병의 정석은 본래 외세에 맞설 국방력만 있다면 선경제, 후군대이지만 막 문을 열었을때는 이미 서양 열강이 일본군대보다 강했기에 일본은 선군대, 후경제에 가까운 선군정치가 먼저였고 개화시기 군 장교들은 국가가 직접 양성하고 외국인 강사에게 직접적으로 배운 신 엘리트 계층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며 당시 일본 제국의 육사와 해사는 일본내 제국대학과 맞먹는 위상을 지녔을 정도다. 이러다 보니 도조 히데키와 같은 사관생도 출신들은 황족에 대한 비뚤어진 충성심과 자신들은 일본제국의 엘리트 계층인 만큼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는 의식이 팽배한 상황이었다.
미국은 공공 건설, 일자리를 늘려 고용률을 높이는 뉴딜 정책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위시한 서유럽 강대국들은 자국 식민지를 이용한 블록 경제를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하는데 성공했지만, 일본은 그럴 만한 나라가 주변에 별로 없었을 뿐더러 처음부터 경제 체제가 미약했다.[50] 이런 상황에 분노하기 시작한 군부 내 급진층은 조금이라도 온건적 혹은 중도적인 것으로 판단되는 총리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며 폭주하기 시작, 일본 제국 육군과 일본 제국 해군이 엮여 두번에 걸친 쿠데타를 시도하게 된다. 1932년에 거국내각이 조직되면서 일본을 움직일 통합된 통치구조가 형성되었고 두 차례의 쿠데타 미수로 일본의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은 분쇄되고 기타 잇키 등이 처형되었으나 1937년 고노에 후미마로가 집권하여 정당정치를 부정하고 군대에 굴복하게 된 일본 제국 정계는 결국 중일전쟁으로 폭주, 일본의 경제력으로는 감당할 수도 없는 몰락의 시발점인 총력전을 선택하게 된다. 관련해서 천황제 파시즘 문서 참조.
1931년 이시와라 간지를 비롯한 일부 장교들이 천황의 재가 없이 멋대로 일으킨 만주사변을 막지 않은 일본 제국은 고작 연대장에 불과한 무타구치 렌야가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킨 전범 행위도 처벌하기는커녕 기회로 여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는 꼴도 묵인했고 결국 폭주하는 군부를 제어하지 못해 문민통제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나라가 군부에 먹히고 말았다. 이후 군부를 대표하는 도조 히데키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정권을 잡기에 이르렀다.
일본 제국은 만주사변을 통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내세워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전쟁준비를 위해 1934년 워싱턴 군축조약을 탈퇴하며 폭주 드라이브를 전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그리고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을 발단으로 중국과의 전쟁에 돌입했다. 전쟁 초기 해/공군 부문에서 일본에게 열세였던 중국 국민당군은 일본군에게 제해권, 제공권 둘 다 잃어버렸고 특히 제공권을 잃어버렸기에 국민당 육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일본군은 밀어붙이며 지속적인 확장 정책노선을 밟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는 항복은커녕 충칭으로 정부를 옮겨 끝까지 항전한다.
한편 중일전쟁이 발발한지 꽤 된 시점에서, 충칭을 임시수도로 할 만큼 몰리자 미국은 최대시장이기도 한 중화민국이 패망하여 사라지기를 바라지 않았기에 중국을 지원하며 일본에게 철광석 수출을 제한한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을 멈추지 않았고, 일본이 선을 넘었다고 판단한 미국은 일본에게 만주 지역을 제외한 중국 내 모든 곳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고 이를 이행을 하기 전까지 석유 등 군수물품에 쓰이는 주요 자원 수출을 금지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때 일본은 석유 수출의 90% 이상을 미국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원 옥죄기를 통한 최후통첩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막대한 돈과 인력을 들여 영토를 확장한 일본이 미국이 경제제재를 한다고 "예 바로 만주지역까지 후퇴하겠습니다." 라며 들을 리가 만무했다. 그래도 석유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기에 석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은 동남아시아의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에 있는 유전에 관심을 가졌는데, 문제는 이 지역으로 가려면 미국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통과해야 했다. 일본은 내부 회의 끝에 동남아 유전도 먹고 단기적으로 미국 태평양 함대를 괴멸시켜 향후 미국과의 강화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목표 하에 남방작전과 진주만 공습을 준비한다. 일본군은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에게 연합함대 사령관장을 맡겼고 이소로쿠는 일단 맡게된 작전이니 일격필승을 다짐하며 일본계 미국인들 중 일본에 협조적인 이들을 포섭하여 하와이 진주만에 대한 정보를 철저히 모으면서 지형 미니어쳐까지 만들며 그 유명한 진주만 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수많은 군함들을 격침시켜 미 태평양함대에 일격을 먹이는 데에 성공했고 이때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패배하고 미국에서 원자폭탄을 맞기 전까진 말 그대로 폭주했다.
그런데 일본은 모종의 이유로 선전포고문 전달이 늦어지는 바람에 선전포고 없이 전쟁을 걸게 되었다. 정확히는 일본 제국은 진주만 공습 전 일본 제국정부 대미통첩각서를 주미일본대사관에 보냈지만 이 문서는 선전포고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애매한 문서였고, 그나마도 쓸데없이 너무 긴데다가 암호문이라서 주미일본대사관이 해독, 번역하는데 시간이 걸렸다. 느닷없이 기습을 당한 미국은 국민들의 대대적인 반일, 참전 여론을 등에 업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한편 일본은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남방작전을 개시한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할 때쯤 동남아시아를 지배하던 유럽 열강은 프랑스, 네덜란드처럼 나치 독일에게 본토가 아예 점령당했거나, 독일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영국도 나치 독일에 항전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 때문에 유럽 열강들은 동남아시아에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 밖에 없었고, 배치된 장비도 M2A4 경전차, M3 스튜어트, 마몬-헤링턴 경전차들, 유니버설 캐리어 등이 주력 전차, 장갑차일 정도로 2선급 장비였기에 사실상 빈 집에 가까웠다. 일본은 동남아시아 주재 영국군의 삽질과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전략적인 전격전으로 영국령 동남아 식민지를 점령했으며, 이후 필리핀 주둔 미군도 패배하며 기세를 탄 일본 제국은 중국의 절반 뿐 아니라 동남아 전역까지 휩쓸었다. 서구 열강들의 2선급 전력들을 상대로 이긴 일본 제국은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며 내친 김에 인도와 남태평양까지 쭉쭉 진출했다. 1942년, 일본 제국은 동북아에서 동남아, 남태평양까지 이르는 최대판도를 형성하였다. 태평양 전쟁 개시 뒤 귀축영미라는 단어가 유행했는데, 귀신과 짐승같은 영국과 미국이라는 뜻이다.
3.5. 몰락
사실 일본 제국의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 미국에 유학하거나 공무를 본 자들은 미국의 산업 능력과 그 잠재력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력상 차이가 있더라도 하와이에 주둔한 미 태평양함대와 같이 주요 전력에 선제 공격을 취해 전투불능으로 만든다면 미국은 함대재건에 오래 걸리며 함대를 재건하는 동안 일본은 확보한 제해권으로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본토 공격카드를 내기가 가능하기에 항공모함과 전함을 궤멸시키고 나면 미국 측이 적극적으로 평화 협상 테이블에 나올 것이라 오판하였다.이는 러일전쟁 당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당시 일본군이 러일전쟁의 진상을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는 것이다. 아니면 알면서도 애써 정신승리 했거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협상장으로 나온 진짜 이유는 쓰시마 해전과 같은 일본군의 전력 우세 때문이 아니었다. 이 당시 상황이 더 안 좋은 것은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이었다.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를 통해 사기를 높이긴 했지만, 전쟁 치른다고 영국과 미국에게 빌린 차관이 이미 국가재정으로 갚기에도 벅찰 정도로 한계에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러시아는 전쟁 자체는 계속 치를 수 있었지만,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외국과의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내부 혼란부터 해결해야 될 지경이 되었다. 그리고 당시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건설은 간신히 완료만 된 상황이고 기타 인프라는 아직 완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통한 유럽에서의 보급에도 차질이 심각했다. 즉 러시아의 국력이 100, 일본의 국력이 60이었다고 해도, 러시아는 유럽 쪽에 70, 아시아 쪽에 30으로 나뉘어 있고, 유럽에서 30을 더 끌고 와서 일본을 대적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거기다 이미 러시아는 일본의 배후에 자신들의 태평양 진출을 고깝게 보는 영국과 미국이 일본이 밀리려고 한다면 지원할 의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협상장에 나온 것이다.
다만 일본 제국이 전쟁을 시작한 시점에도 미국 태평양의 해군력은 일본 제국 해군력에 크게 뒤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각에 알려진 것과 달리 일본 제국 해군력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으로 인해 당시 시대상 주 전력인 전함 보유수를 제한받았기에 어떻게 해야 군축조약에 걸리지 않고 전력을 상승시켜야 하나 라는 깊은 고민 끝에 당시 영국, 미국 등이 잃어도 개의치 않던 항모를 이소로쿠 제독을 포함한 일부 제독들이 눈여겨보기 시작, 집단운용과 구축함의 화력을 높이기 위한 산소어뢰 같은 연구를 하였다. 물론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나와 제약이 사라지자 바로 야마토급 전함을 건조하는 큰 삽질을 한다. 게다가 전함도 당시 영일동맹을 통해 영국으로 부터 편의를 받은지라 공고급 순양전함, 나가토급 전함을 자력으로 만들 정도의 건조기술 덕에 연합함대는 당시 미 태평양함대의 해군과 나름 비빌만한 정도였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참패를 했어도 압도적 우세에서 비교적 우세로 낮춰졌을 정도였다.
게다가 F2A 버팔로, F4F 와일드캣으로 구성된 미국의 주력 함재기들은 제로센에 비하면 속도와 선회력 면에서 뒤떨어졌고 F4F만 상대가 가능했다.[51] 게다가 일본군은 중일전쟁과 말레이 해전을 통해 나름 실전경험이 풍부한 베테랑급 조종사들까지 있었기에 이들은 침착하게 진주만 습격 때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강화협상에 나오기는커녕 매우 분노한 미국은 압도적인 공업기반과 미국 본토에서 나오는 막대한 자원을 이용하여 1년간 시간을 들인 뒤 전시공업 체제로 넘어간 이후로는 함선과 함재기 등 엄청난 물량을 찍어내며 양적인 열세는 물론 질적인 열세를 극복하였다.[52] 한편 선전포고 없이 공격을 당한 미국은 전국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으나 이내 분노[53]로 바뀌었으며 정치권도 이 여론을 의식하여 일본 제국에게 항복 제스쳐나 다름없는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는 것을 거부한다. 일본이 선전포고를 하자 나치 독일도 선전포고함에 따라 미국은 자연스럽게 연합군에 가입하여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포함한 추축국을 무너뜨리기로 결정[54]한다. 미국의 국가기반은 넘쳐나는 자원을 바탕으로 한 공업력으로 인해 세계 초강대국인 영국을 넘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초강대국으로 넘어갈 잠재적인 기반이 큰 나라였고 계기만 있다면 초강대국으로 바로 들어갈 수 있던 상황이었다.
반면 일본 제국의 정권을 잡은 군부는 육군/해군으로 파벌이 더 심화되어 서로 이득이라는 파이를 더 차지하기 위해 육군/해군과의 대립이 심화되었고 같이 싸워도 모자랄 판에 반목하며 정보조차 공유를 안 하고 육군이 보급용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사사건건 서로 견제하느라 바쁜 개판인 상황이었다. 내지에서 나오는 자원은 전혀 없었고 당시 아시아 중에서는 가장 발전한 공업국가였으나 미영 열강과 비교한다면 공업기술은 매우 뒤떨어졌다. 오죽하면 자국에서 개발 및 양산한 치하 중전차마저 스튜어트 경전차에 비해 성능이 열등했을 정도였다. 더욱이 1937년부터 발발한 중일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미국과의 장기전은 필패뿐이었다.
물론 진주만 공습으로 선제공격을 한 상태였으며 전쟁 초기에는 나름 해군 주력함대가 나름 열강들에게 비빌수 있던 일본 제국 해군이 우세를 점했다. 그러나 일본 제국 해군의 자만과 미군이 승률을 높이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한 끝에 미드웨이 해전에서 정규항모 4척을 전부 소실하는 대실패와 파일럿과 같은 고급인력 1회용 취급, 대책없는 확장으로 인해 방어전력이 너무 분산된 나머지 과달카날 전역의 패배를 시작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반면 미국은 1년간 전시공업 체제 전환이 마치자 미국 본토의 막강한 산업력을 기반으로 세를 불려가기 시작하여 뉴기니, 괌, 필리핀, 사이판 등의 점령지를 차례로 되찾고, 우수한 무기로 인해 개개인 전투력마저 압도되다 보니 수세에 몰린 일본 제국은 이오지마 섬과 내지의 일부인 오키나와마저 뺏겨 수도권을 포함한 전 국토가 미 육군항공대 폭격기들의 사정권에 들어 공습으로 도쿄가 불바다가 되는 등 전황이 갈수록 불리해졌다.[55] 그렇다고 미군의 전략폭격기 B-29를 격추하고 싶어도 갈 수 있는 고도제한의 격차가 심해서 B-29가 고도를 높이는 순간 제로센들은 쫓다가 돌아올 수 밖에 없었으며, B-29 자체의 보호 무장과 이를 호위하는 제공기들의 존재로 인해 B-29는 일본 본토 공습 당시 추락하는 일이 엄청 적었다. 이는 독일 본토 항공전 당시 미국, 영국의 공군에게 여전히 위협적이었던 독일의 공군력, 방공 능력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이렇게 본토 상황도 나쁜데 동맹국 나치 독일이 패망하고 연합군의 주역인 미영중은 포츠담 선언을 통해 무조건 항복이라는 최후통첩을 권고한다.[56] 그러나 일본 제국은 천황제 유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전쟁 이전 식민지 유지, 천황제 유지, 자국에 의한 무장해제, 전범을 자신들이 재판 등등 연합국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조건을 걸며 조건 있는 항복을 끌어내기 위해 끝까지 1억 총옥쇄를 주장하며 결호작전을 짜며 항복을 거부한다. 한편 이오지마, 오키나와 전투에서 너무 큰 피해를 입은 미국은 이런 일본 제국의 모습에 몰락작전 내용을 구상하면서도 상륙군의 안전을 위해 원자폭탄을 떨군다라는 발상을 한다. 결국 미국은 몰락작전 시행 전 새로 개발한 원자폭탄의 위력을 보기 위해 맨해튼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한 원자폭탄을 일본 본토에 떨구기로 결정했고, 일본은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원자탄 폭격을 한 발도 아니고 무려 두 발이나 맞았으며, 설상가상으로 동맹국 간 회의에서의 약속에 따라 아시아에 영향력을 만들기 위해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대일 전쟁에 참가하자 쇼와 천황과 항복파 장교들은 반대파의 저항을 무릅쓰고, 천황의 옥음을 녹음하고 우익 청년장교들의 방해를 해친 끝에 마침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며 전쟁은 1945년 8월 15일 부로 끝나고 미국 전함 미주리 함교에서 일본 대표단이 무조건 항복문서에 공식 서명함으로써 일본의 항복이 이루어져 일본 제국은 패전을 맞이하였다. 이후 모든 식민지는 연합국에 의해 강제적으로 독립하였고, 타이완과 남사할린 등 제국주의 시기에 강탈한 영토는 중화민국, 소련에, 제2차 세계 대전기의 점령지 역시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구 열강에 다시 반환되었다. 그 중 류큐 제도, 오가사와라 제도, 쿠릴 열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고 미국은 미일동맹의 개선에 따라 이들 점령지를 일본에 돌려주었으나 소련은 이들 지역을 모조리 자국령으로 삼아 현재까지 일본과 갈등을 빚고 있다.
GHQ의 통치를 받던 1946년 11월 3일에 일본국 헌법이 공포, 1947년 5월 3일에 시행되었다. 일본의 주권은 GHQ에 완전히 종속되어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연합국의 관리체제에 있던 보호국이었지 주권국이 아니었다.
GHQ는 전쟁을 최종 승인한 쇼와 천황에게 전쟁 책임을 직접 묻지는 않았으며, 천황과 황실이 일본 국민에 대해 가지는 상징성을 인정하였다. 미국의 상층부에서는 천황제의 폐지가 일본에게 엄청난 반미 반서방 감정을 양성할 것이라 판단하였다. 당시 미국등 연합군측에서는 패전의 책임을 이유로 쇼와 천황을 전범재판에 올려 폐위시키고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천황을 법정에 세우거나 천황제를 폐지하진 않되 쇼와 천황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태평양 육군 사령관인 더글라스 맥아더가 이를 제지했다. 결과적으로 천황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전전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입헌군주로서의 상징적 존재로 만들기로 방침을 결정하여, 맥아더가 쇼와 천황을 만나 인간선언을 요구한 끝에[57] 천황은 '국민 통합의 상징'일 뿐 아무런 정치적 권력이 없고 정치적 논란을 불러올 발언을 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 또한 쇼와 천황 사후 즉위한 아키히토는 어릴 때 전쟁을 겪었기에 전쟁이라면 진절머리 나서 정계와는 거리를 많이 두며 이러한 기조는 현 천황인 나루히토도 유지한다. 심지어 천황을 정치적 논란에 끌어들이려는 사람들이 암살 위협을 받으며 때문에 천황 본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궁내청이 제한한다.
4. 대일본제국 헌법
자세한 내용은 대일본제국 헌법 문서 참고하십시오.1889년(메이지 22년) 헌법 반포 약도 |
새 황거에서의 헌법 발포식 그림(아다치 깅코 安達吟光 그림)[58] |
대일본제국 헌법(大日本帝國憲法)은 1889년(메이지 22년) 2월 11일[59]에 공포되어 1890년(메이지 23년) 11월 29일에 시행된 근대 입헌주의에 기초한 일본 최초의 근대적인 헌법이다. 현대에는 공포 당시의 천황인 메이지 천황의 이름을 따서 메이지 헌법(明治憲法)이라 부르거나 단순히 제국 헌법(帝国憲法)이라고도 부르며, 현행 일본국 헌법과 대비해서 구 헌법(旧憲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는 1876년 제정되어 1878년 정지된 오스만 제국 헌법을 제외하면 아시아 최초의 근대 헌법이다. 제73조 개헌 절차를 거쳐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시행되었다.
헌법 발포의 칙어에서 "불마(불멸)의 대전"(不磨ノ大典)이라고 명시했기 때문인지 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한번도 수정이나 개정된 일은 없었다. 또한 청나라의 흠정 헌법 대강, 대한제국의 대한국 국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상세 내용은 대일본제국 헌법 문서 참조.
5. 정치
5.1. 내각
일본 제국은 독일 제국이 그러했듯 행정부의 권력이 막강하였다. 천황의 신임을 받는 내각과 관료 집단의 위상은 중의원보다 우세하였다. 특히나 군주의 권위는 독일 제국보다 높지만 실권은 훨씬 못 미치는 기형적인 구조는 내각의 독재적인 행정력을 만들어내었다. 내각은 초기에는 율령제의 태정관으로 구성되어 주요 번벌과 다이묘들의 회의체로 시작하여 이후에는 집단지도체제로 구성되었다가 제1차 이토 내각이 수립되며 내각제로 개편된다. 다만 이때도 연대책임이 핵심인 내각제임에도 총리의 사표만 수리하고 잠정 총리를 임명하는 등 초기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내각제의 기간이 길어지며 차차 일본 제국만의 헌정 질서가 수립된다.5.1.1. 대명강하
일본 제국의 정치를 논하는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대명강하 시스템이다. 일본 제국 헌법은 총리의 선임 방식을 명확히 규정짓지 않고 단지 천황의 임명권만 명시했다. 이럴 경우 비슷한 나라인 영국을 살펴보자면 총선 이후 제1당 대표를 자동적으로 국왕이 총리로 임명하는 시스템이다.하지만 일본은 정당정치, 의회제보다 내각이 먼저 설립되었고 당시 정치가들 대다수와 메이지 천황도 정당 정치와 의회 설립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자의적으로 총리를 임명하기엔 조정이 천년간 실권이 없었기에 누가 적합한 인물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기에 원로라 불리는 메이지 정부의 수장급 정치가들에게 총리 후보를 추천받고 해당 인물을 임명하는 대명강하 시스템이 생겨났다.
초기 원로들은 의회의 눈치를 봐 가면서 자신들에게 우호적 인물을 총리로 임명하거나 원로들 중 한 명을 총리로 지명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가 끝나고 다이쇼 시대에 접어들어 원로들도 노쇠해지거나 사망하였고 국민들도 헌정을 거스르는 총리 지명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이쇼 초기 원로는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사이온지 긴모치 2인만이 생존해있었다. 1918년 호헌운동으로 원로 중심의 가쓰라 내각이 붕괴하면서 사이온지 긴모치는 선거에서 제1당 대표 하라 다카시를 총리로 지명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시작된다. 그러나 입헌정우회 내각이 붕괴한 이후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육군 내각이 들어서기도 하고 해군 출신 총리를 내새운 정당 내각이 들어서는 변칙적인 상황이 생겼다.
끝내는 보수파들이 귀족원 내각을 옹립하여 반동 정치를 펴는 일이 벌어지나 호헌 3파(입헌정우회, 헌정회, 혁신구락부)에 의해 쫓겨나며 다이쇼 데모크라시가 완전히 정착된다. 이후 헌정회(입헌민정당)과 입헌정우회가 정권 교체를 이어가나 군부의 폭주로 일어난 5.15 사건으로 임시적인 군사정부가 들어서고 위기를 느낀 사이온지 긴모치는 해군 장성 출신 사이토 마코토를 총리로 임명하며 거국일치내각 시대를 맞이한다.
1940년 마지막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가 사망하나 이때는 이미 통제파와 대정익찬회가 정권을 찬탈한 후였고 이후 추밀원과 내각의 협의로 후속 총리를 임명하다가 대일본제국 헌법이 현행 일본국 헌법으로 대체되며 대명강하 제도는 사라진다.
6. 군사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군| 일본군 ]] 日本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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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일본 제국 최대 영토 지도[60][61] |
"(일본은) 금융자본주의 국가로서의 제국주의 실행자라는 실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이데올로기 면에서는 이미 훌륭한 제국주의 국가였다."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 강상중,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95p
일본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식민제국으로 성장하여 제국주의 열강 중 하나가 되었다.
위 이미지는 1942년 과달카날 전투 직전의 판도로, 서쪽으로는 버마 (현 미얀마) 일대를 대부분 점령했고, 동쪽으로는 알류산 열도[62] 남쪽으로는 솔로몬제도 일부를 점령했다. 중국전선에서는 구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수도였던 남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중국해안을 점령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1942년 말부터 시작된 연합국의 반격에 이 판도는 붕괴되었다.
탄생 직후부터 계산하면 일본 제국의 판도는 수십 년(78년)이다. 하지만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자신들이 침략하는 국가와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아시아 국가였다.[63] 열강이 된 이후에도 일본은 체급[64][65]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고 최대 패권을 갖추기까지 매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만 어디까지나 서구 열강에 비해 그렇다는 것이지 아시아에서는 이미 그때 독보적 역량을 가진 국가였다. 최대 영토를 갖춘 것은 1942년 중엽 남방작전이 끝난 이후이다.
일본의 식민지와 점령지를 아우르는 일본 식민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해체되었다.
아래는 일본 식민지들과 점령지를 획득한 순서로 나열.
7.1. 타이완 섬
자세한 내용은 대만일치시기 문서 참고하십시오.1894년 일본 제국은 청나라와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청일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승전의 대가로 타이완 섬을 할양받았다. 대만인들은 타이완 민주국을 세워 저항했으나, 일본군에 의해 진압당한다.
7.2. 한반도
자세한 내용은 일제강점기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조선총독부 문서 참고하십시오.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875년 9월 20일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 |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 |
1884년 12월 4일 | 갑신정변 |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 |
1885년 4월 18일 |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 |
1894년 7월 23일 | 갑오사변 |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 |
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 |
1895년 4월 17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 |
1895년 4월 23일 | 삼국간섭 |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 |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 |
1896년 5월 14일 | 베베르-고무라 각서 |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 |
1896년 6월 9일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 |
1897년 10월 12일 | 대한제국 선포 |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 |
1898년 4월 25일 | 니시-로젠 협정 |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 |
1902년 1월 30일 | 1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4년 1월 21일 | 대한제국 중립선언 |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 |
1904년 2월 8일 | 러일전쟁 |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및 경운궁 점령 | |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 |
1904년 5월 31일 | 대한시설강령 발표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 |
1904년 8월 22일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 |
1905년 4월 1일 | 한일통신기관협정서 |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 |
1905년 4월 16일 | 대한제국군 감축 |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와 진위대 감축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2일 | 2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3일 |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화 을사의병 발발 | |
1907년 7월 20일 | 고종 황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 |
1907년 7월 24일 |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 |
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군 해산 |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
1909년 7월 12일 | 기유각서 |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화 | |
1909년 9월 1일 | 남한대토벌 |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 |
1909년 9월 4일 | 간도협약 |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 |
1910년 6월 24일 | 한일약정각서 |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 |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일본 제국은 운요호 사건과 그로 인한 강화도 조약(1876. 조일 수호 조규) 체결로 조선을 상대로 처음 제국주의적 모습을 드러냈으며,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후 조선에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톈진 조약[66]을 명분으로 들며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후 벌어진 청일전쟁(1894)의 승리를 계기로 조선에서 청의 영향권을 밀어내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쥐기 시작한다.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잠시 상실하지만, 러일전쟁의 승리와 을사조약 체결(1905. 대한제국의 외교권 강탈)로 결국 한반도를 손아귀에 쥐게 된다. 이윽고 1910년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이른다.
7.3. 관동주
자세한 내용은 관동주 문서 참고하십시오.일본 제국은 청일전쟁 직후 청나라로부터 대만과 같이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인해 철수한다. 이후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의 조차지인 뤼순 및 다롄을 점령하고, 관동주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이후 이곳은 일본군의 중국 대륙 침략의 거점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의 발해해 인근 보하이만에 엄청난 석유가 나오기에 과거 일본제국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미국과 전쟁할 일도 없어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다.
7.4. 톈진시
자세한 내용은 톈진 조계 문서의 일본령 톈진 (1898 ~ 1945) 부분을
참고하십시오.청일전쟁 이후 조차하게 된 현 중국 톈진시 일부의 조계이다.
7.5. 사할린 남부
자세한 내용은 일본령 가라후토 문서 참고하십시오.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1943년 이후 내지에 편입된다. 원래 거주하던 인구가 작아 일본이 지배한 식민지 중 거의 유일하게 일본인 인구가 원주민을 압도했다.
7.6. 미크로네시아
자세한 내용은 남양 군도 문서 참고하십시오.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영일동맹을 근거로 협상국 측으로 참전해 독일 제국의 식민지인 미크로네시아와 교주만을 점령하였다. 이후 교주만은 중화민국에 반환하지만, 미크로네시아는 남양제도라는 이름으로 위임통치령으로 삼았다.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의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7.7. 중국 대륙
자세한 내용은 일치시기(중화민국)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왕징웨이 정권 문서 참고하십시오.
7.7.1. 만주
자세한 내용은 만주국 문서 참고하십시오.1931년, 일본의 관동군은 천황의 재가와 정부의 허가도 없이 류탸오후 사건을 이유로 들어 중화민국의 영토인 만주를 점령했다.(만주사변) 그러나 뒤늦게 알아차린 일본 정부는 '어쩔 수 없다'라는 걸로 애써 무시했다. 그 결과 이미 축출당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를 초대 황제로 하여 1932년 괴뢰국인 만주국이 설립되었으며,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게 된다.
7.8. 동남아시아
1941년 9월 비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군대 주둔을 허가받아 일본군은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를 자신들의 영향권 하에 두고, 그해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감행함으로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괌, 버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동티모르 등 서구 열강들의 동남아시아 식민지나 해외 영토를 전부 손에 넣었다.일본은 동남아시아를 크게 두 권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먼저 추축국의 적국인 영국, 미국 등이 지배하던 필리핀,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 홍콩은 완전히 빼앗아 군정을 실시하고 일본 마음대로 조종하는 괴뢰국을 세웠다.
반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는 이 당시 프랑스가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도 따지자면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므로 통치권을 완전히 빼앗진 않고,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시스템을 인정하는 식으로 간접 통치했다.
그러다 프랑스 본토를 연합국이 탈환하면서 일본도 더 이상 이런 이중적인 통치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명호작전을 통해 일본 제국은 형식적으로 남아있던 프랑스를 완전히 몰아내고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 라오스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8. 교육
일본 제국의 교육 제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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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 대학 | |||||
대학원 | 대학원 (연구과) | |||||
당시 구제전문학교는 단기대학 · 고등전문학교 과정에 상당하지만 공식 학위가 나오지 않는 고등교육기관. 구제대학 학부를 누적 수학 연령으로 따지면 신제 석사와 동일. | ||||||
[C] 일반적으로 구제중학교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통합해서 운영했다.[A] 구제중학교가 남자학교이니 고등여학교는 구제중학교의 여학교 버전이다. 교육과정은 동일하다[B] 소학교 졸업자들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제공함. 재정 문제로 일반화되지는 못했다.[B] 소학교 졸업자들 대상으로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교육을 제공함. 재정 문제로 일반화되지는 못했다.[C] [A] 구제중학교가 남자학교이니 고등여학교는 구제중학교의 여학교 버전이다. 교육과정은 동일하다[D] 1943년 사범학교령을 통해 모든 사범학교에 대하여 전문학교급으로 승격하고 본과와 예과를 만듦.[D] [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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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에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 예과, 전문학교, 대학 등을 그런 이름으로 불렀지만 패전 이후의 제도 ('신제 고등학교')와 구분하는 의미에서 구제고등학교 등 '구제'를 붙여서 칭한다.
일본제국 학제(左) - 현대 일본 학제(右) 비교 |
일본 제국의 학제는 오늘날처럼 소-중-고-대 방식의 단선형 학제가 아니었고 학교의 종류에 따라 차이가 많았다. 또 이름도 자주 바뀌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상급학교 진학코스는 초등교육(소학교) 6년, 중등교육(구제중학교) 5년, 고등교육(구제고등학교) 또는 구제대학 예과 3년, 구제대학 학부 3년이었다. 이외에 의학부 등 특정 학부는 4년 코스였으며, 1920년대 이후 수학연한 단축을 위해 구제중학교와 구제고등학교를 합친 7년제 고등학교를 만들면서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자에게도 기존의 3년제 구제고등학교 또는 구제대학 예과 합격시 조기졸업이 가능한 것 등 몇 가지 예외가 존재했다.[67] 사립대학의 경우 예과를 거쳐 진학하는 학부와 별도로 구제중학교 졸업생이 바로 진학할 수 있는, 구제전문학교격에 해당하는 부속 전문부가 있었다. 또한, 구제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제국대학과 관립의과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구제대학에 이르기까지 상급학교 진학을 목표로 하는 엘리트 코스 외에도 개별 단계에서 실업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었다. 의무교육격인 소학교(보통학교) 졸업 후 구제중학교로 진학하는 대신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사가 되거나, 실업학교(공업학교, 농업학교, 상업학교 등등)로 가서 직업교육을 받을 수도 있었다. 이 실업학교도 구제중학교와 동일한 5년제 '갑종'실업학교가 있었고, 그보다 수학연한이 짧은 을종(3년제) 학교 과정도 병존했다.[68] 또한, 구제중학교 과정의 하위버전인 2년제 고등소학교도 존재했다.
그리고 사범학교의 상위 단계인 고등사범학교와 실업학교의 상위에 고등실업학교 등의 구제전문학교가 존재했다. 고등사범학교는 기본적으로는 사범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선발하여 중등교원(구제중학교 교사 등)을 양성하는 학교였으며, 고등실업학교는 농업학교, 공업학교, 상업학교 등 갑종 실업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선발해 해당 분야의 실무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다. 또한 구제전문학교에는 고등실업학교를 제외하고도 의학전문학교나 법학전문학교 등 구제중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입시를 실시해 의학, 법학 등을 교수해 의사, 변호사[69] 등을 길러내는 학교도 있었으며 이러한 코스들이 분리 정립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중학교 졸업 후에 고등상업학교와 같은 고등실업학교로 진학하기도 하고, 실업학교 졸업 후에 구제고등학교로 진학하기도 하는 등 이동이 가능했다.
그 위에는 구제대학이 있었는데, 관립 종합대학인 제국대학과 관립단과대학들이 있었고, 기타 공립 사립 대학들도 혼재되어있었다. 구제대학(학부)은 구제고등학교 또는 대학예과를 졸업한 자가 입학하는 곳이었으나 특히 관립단과대학의 경우는 고등실업학교가 승격되는 식으로 설립된 곳들이고, 그에 따라 고등실업학교 졸업생에게 문호가 개방되어있는 정도가 컸으며 TO가 구제고교 졸업생과 동일한 수준으로 부여되는 관립대학도 존재했는데, 모든 학교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마다 다르고 또 때에 따라 달라졌다. 심지어 제국대학의 경우도 구제고교 졸업생인 지원자 수가 모집정원에 미달하는 경우 구제전문학교 졸업자나 그에 상당하는 학력 보유한 자 중에서 전검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입시자격을 부여하는 등 지금의 시선에서 보면 매우 복잡한, 유럽식 복선 학제를 취하고 있었다. 현재 제도로 봤을 때는 6-5-2-3의 영국식 학제에 독일의 김나지움, 레알슐레, 하웁트슐레 등의 복선식 시스템이 섞여있었다고 보면 되겠다.
주의할 점은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의 학교 구분도 미국식 시스템이 이식된 현대 한국이나 일본과 다르다. 현대 한국이나 일본의 신제 고등학교는 중등교육기관이지만 일제의 구제고등학교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사실 신제 고등학교는 원래 구 학제에서 중등교육을 담당하고 있던 5년제 구제중학교를 반으로 잘라 초기중등교육(신제 중학교)과 후기중등교육(신제 고등학교) 기관으로 분리시킨 것이고, 구제고등학교는 오늘날 의과대학의 의예과처럼 구제대학의 전공교육 이전에 교양과목을 이수하는, 현재 신제대학의 1~2학년에 해당되는 고등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 한국 일본에서는 미국식 4년제 이상 대학으로 일원화되어있는 고등교육을 구학제에서 담당한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 및 구제대학 그리고 구제전문학교(구제대학 부속 전문부 포함), 고등사범학교 등이 있었다. 기타 고등체신강습소 본과 등 이에 상당하는 특수교육기관도 존재했다.
육해군 장교의 경우 육군은 일본육군유년학교, 일본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출신을 성골로 보았다. 육군유년학교는 응시자격이 만 13~15세, 수험시 학력 불문이었다. 따라서 요구되는 학력 자체는 구제중학교 2학년 1학기 수료 정도였지만 소수의 고등소학교 출신도 합격했다. 전국 각지에 설치되어있던 시기에는 동경의 중앙유년학교를 나오는 것을 최고로 쳤다. 유년학교 출신이 아닌 경우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구제고등학교와 마찬가지로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가 필요했는데 대부분은 5년 졸업 후 응시, 합격했다. 채병덕이 4년 수료 후 합격한 케이스이고 같은 중학교 동기인 이용문은 구제중학교 졸업 후 입학한 케이스이다. 조선인의 경우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재학 중 일본에 관비유학생으로 파견된 이응준 등 일본육사 26~27기까지만 유년학교를 거쳤고, 이후 44기 이형석부터 49기 채병덕, 이종찬 이하 기수는 구제중학교 졸업 후 바로 육사로 진학했다. 왕족인 영친왕 이은은 가쿠슈인에서 육군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육사로 진학했다. 해군에서는 해군예비교, 일본해군병학교, 해군대학 출신이 성골이었으나, 육군에 비해 그 수가 적었고 주요 보직을 독점했기 때문에 해군병학교 출신간의 경쟁이 이뤄졌다. 여기에는 해군병학교 졸업성적이 주요 결정요인으로 작용했다.
8.1.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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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을 통해 내지와 조선의 학제가 완전히 통일되기 전까지 조선의 교육 제도는 일본 내지와 차이가 있었다. 우선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 이전까지는 조선에 있는 각급 초등/중등 학교의 수학연한 자체가 본토와 달랐다.
제1차 조선교육령 1910~1922년 | 제2차 조선교육령 1922~1937년 | |
초등교육 | 보통학교 4년 | 보통학교 6년 |
중등교육 | 고등보통학교 4년 | 고등보통학교 5년 |
고등교육 | 구제전문학교 3~4년 | 구제전문학교 3~4년 경성제국대학 6~7년 |
1915년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 규칙 제정 이전까지 보성전문학교, 연희전문학교 등 조선의 사립 전문학교는 인가를 받지 못해 명칭만 전문학교였을 뿐이었고, 본토의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과 같은 구제전문학교로 대우받지 못했다. 구제대학 진학을 희망시에는 구제중학교 졸업 상당의 학력으로 인정받아야 구제고등학교, 대학예과 입시자격을 얻을 수 있었는데 당시 조선의 보통학교(4년)와 고등보통학교(4년)의 수학연한이 일본 소학교(6년)와 구제중학교(5년)를 합한 것보다 3년이나 짧았기 때문에 고등보통학교 졸업자는 구제중학교 졸업자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일본의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싶으면 구제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해 졸업해야다. 평양고보를 중퇴한 다음 일본 본토의 중학교에 편입하여 제6고등학교, 도쿄제국대학을 거친 정광현[70]이 그 예다.
경성중학교(현재의 서울고등학교), 용산중학교(현재의 용산고등학교) 같은 조선 내의 일본인들이 수학하는 구제중학교의 경우 일본 내지와 동일한 학제를 취했지만, 일본어를 상용했기 때문에 조선인 가정의 자녀는 취학 자체를 보통학교가 아니라 소학교로 해서 졸업한 경우가 아니면 입학은 거의 불가능했다. 소학교에서부터 일본인 학생들과 일본어로 입시를 치러야했기 때문이다. 이런 차별이 조선인들의 불만을 초래했고, 지속적인 반발이 제기되었으며 내지연장주의/동화주의에 입각한 제2차 조선교육령에 가면 수학연한이 통일되는 방향으로 학제가 개편되었다.
1922년 조선교육령의 개정(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와 시행 이후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 규칙이 내지의 전문학교령을 준용함에 따라 조선의 사립 전문학교도 요건을 갖추어 인가를 받았다면 정식 구제전문학교로 인정되었다. 조선 내 전문학교 졸업생은 경성제국대학 본과에 결원이 있을 경우 편입이 가능했으나, 경성제대 예과 출신 학부생과 동등한 취급을 해준 것은 아니었고, 대학예과가 존재한 경성제대 특성상 결원이 많지 않아서[71] 일제강점기 조선 내에서 학사와 박사[72]를 취득할 수 있던 곳은 조선의 유일한 구제대학인 경성제국대학뿐이었다.
조선의 구제전문학교들과 달리 내지의 구제고등학교들은 1920년대에도 고등보통학교 졸업을 구제중학교 졸업과 동등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단순히 수학 연한이 짧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고등보통학교들은 내지의 구제중학교와 달리 농업, 부기, 주산 등 직업교육(手工)을 가르쳤고, 수업 내용도 훨씬 쉬웠다. 영어는 성적이 좋은 학생에게만 가르치거나 알파벳만 가르쳤다. 예를 들어 화학자 이태규는 고등보통학교까지는 조선에서 나왔는데, 거의 매 학기 수석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알파벳을 다 알지 못 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규 교과 과목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에 그쳤다.
와세다대학, 게이오기주쿠대학 등 사립 구제대학의 경우에는 조선에서 구제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면 대학예과를 생략하고 학부(본과)로 입학하게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조선인 학생들이 관공립대학이 아니라 사립대학으로 유학한 이유였다. 뿐만 아니라 사립대학들은 구제대학 승격 후에도 승격 이전 시절의 기존 구제전문학교 과정을 부속 전문부라는 소속기관으로 두고 있어서, 고등보통학교 졸업 학력만 있어도 해당 부속 전문부로 진학할 수 있었다.[73] 전문부는 구제전문학교격으로 구제대학 예과를 거쳐 학부(본과)를 졸업한 자와 달리 학사를 받지는 못했지만, 오늘날 신제대학과 동격의 학교로서 졸업생은 엘리트 대우를 받았다. 구제고등학교/대학예과 3년과 학부 3~4년까지 총 6~7년 이상을 재학해야하는 구제대학 학부까지 다니는 경우는 고등문관시험을 통해 고위관료로 출세를 원하거나 학자가 되고 싶은 극소수 경우였다. 그래서 조선인 유학생이 일본에 유학한 경우는 대부분 사립대학 전문부에서 마쳤다. 'XX대학 전문부 졸업' 같은 식이다.]
그러나 제2차 조선교육령 공포 후 내지동화주의로 전환됨에 따라 고보의 교과 과정 역시 중학교와 맞춰졌고, 보통학교에 취학할 때부터 일본 내지와 동일하게 교육 받은 1910년대 후반 출생 세대부터는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 본토의 구제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예가 많이 늘어났다. 일례로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서돈각은 대구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마쓰야마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역시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민석홍은 서울에서 경기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8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193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등으로 만주, 중국 침략에 나선 일제는 조선을 내지화하였고, 1930년대 후반에 가면 조선의 학제를 완전한 내지연장주의에 입각하여 학교 명칭까지 보통학교→소학교, 고등보통학교→중학교로 내지와 통일시키는 제3차 조선교육령(1938)을 공포하였다.
제2차 조선교육령 1922~1937년 | 제3차 조선교육령 1938~1945년 | |
초등교육 | 보통학교 6년 | 소학교 6년 |
중등교육 | 고등보통학교 5년 | 구제중학교 5년 |
고등교육 | 구제전문학교 3~4년 | 구제전문학교 3~4년 경성제국대학 6~7년 |
1940년대 태평양전쟁 개전 후 일제 말기에는 전시 총력전 체제로 이행하면서 국민학교 6년, 국민학교 고등과 2년으로 초등교육이 개편되었는데, 국민학교 고등과 졸업자의 절반 이상이 취업하거나 가업을 이었고 나머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그래서 고등보통학교만 졸업해도 먹물 취급을 받았다.
9. 일본국 헌법 체제로의 전환
1945년 9월 2일 일본 제국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면서 천황과 내각은 SCAP에 종속되어 실정적으로는 독립국이라고 볼 수 없게 되었지만, 국제법적 절차를 위해 최소한의 주권이 허락된 명목상의 정부만이 1952년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유지되었다.포츠담 선언에 명시된 대로 GHQ는 민주화와 인권이 보장되는 헌법으로의 개정을 일본 정부에게 요구했다. 형식상으로는 대일본제국 헌법의 개헌 절차를 따르고 초안 공표 후에 총선거를 실시했지만 일본에게 명목상의 주권만 있고 사실상의 주권은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의회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물론 타의성과는 상관없이 민주화와 전시체제 종식을 원하는 일본 민중들의 신헌법 지지율은 압도적이었다. 일본국 헌법이 시행된 1947년 5월 3일에 일본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러나 GHQ의 간접 통치는 계속 이어젔으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일본국의 주권은 제한되었다. 조약이 발효되어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고 이후 이러한 절차 덕분에 일본국과 일본 제국은 동일한 국가로 취급되고 있다.[74]
10. 역대 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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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DCA600>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제5대 | |||||
진무 | 안네이 | 이토쿠 | 고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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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안 | 고레이 | 고겐 | 가이카 | 스진 | |||||
<rowcolor=#DCA600> 제11대 | 제12대 | 제13대 | 제14대 | ||||||
스이닌 | 게이코 | 세이무 | 주아이 | ||||||
[[고훈 시대| 고훈 시대 ]] | |||||||||
<rowcolor=#DCA600>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
오진 | 닌토쿠 | 리추 | 한제이 | 인교 | |||||
<rowcolor=#DCA600> 제20대 |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안코 | 유랴쿠 | 겐조 | 닌켄 | ||||||
<rowcolor=#DCA600>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제29대 | |||||
부레쓰 | 안칸 | 센카 | 긴메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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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슌 | 스이코 | 조메이 | 고교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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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쿠 | 사이메이 | 덴지 | 고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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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무 | 지토 | 몬무 | 겐메이 | ||||||
[[나라 시대| 나라 시대 ]] | |||||||||
<rowcolor=#DCA600>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제46대 | ||||||
겐메이 | 겐쇼 | 쇼무 | 고켄 | ||||||
<rowcolor=#DCA600> 제47대 | 제48대 | 제49대 | 제50대 | ||||||
준닌 | 쇼토쿠 | 고닌 | 간무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헤이안 시대| 헤이안 시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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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무 | 사가 | 준나 | 닌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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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토쿠 | 세이와 | 요제이 | 고코 | 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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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고 | 스자쿠 | 엔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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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잔 | 이치조 | 산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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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조 | 도바 | ||||||||
<rowcolor=#DCA600> 제75대 | 제76대 | 제77대 | 제78대 | 제79대 | |||||
스토쿠 | 고노에 | 니조 | 로쿠조 | ||||||
<rowcolor=#DCA600> 제80대 | 제81대 | 제82대 | |||||||
안토쿠 | 고토바 | ||||||||
[[가마쿠라 시대| 가마쿠라 시대 ]] | |||||||||
<rowcolor=#DCA600> 제82대 | 제83대 | 제84대 | 제85대 | 제86대 | |||||
고토바 | 준토쿠 | 주쿄 | |||||||
<rowcolor=#DCA600> 제87대 | 제88대 | 제89대 | 제90대 | 제91대 | |||||
고사가 | 고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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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 | 고니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남북조시대(일본)| 남조 ]] | ||||||
<rowcolor=#DCA600> 제96대 | 제97대 | 제98대 | 제99대 | ||||||
조케이 | |||||||||
[[무로마치 시대| 무로마치 시대 ]] | |||||||||
<rowcolor=#DCA600> 제100대 | 제101대 | 제102대 | 제103대 | ||||||
쇼코 | |||||||||
<rowcolor=#DCA600> 제104대 | 제105대 | 제106대 | |||||||
고나라 | 오기마치 | ||||||||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 |||||||||
<rowcolor=#DCA600> 제106대 | 제107대 | ||||||||
오기마치 | 고요제이 | ||||||||
[[에도 시대| 에도 시대 ]] | |||||||||
<rowcolor=#DCA600> 제107대 | 제108대 | 제109대 | 제110대 | ||||||
메이쇼 | 고코묘 | ||||||||
<rowcolor=#DCA600> 제111대 | 제112대 | 제113대 | 제114대 | ||||||
고사이 | 레이겐 | ||||||||
<rowcolor=#DCA600> 제115대 | 제116대 | 제117대 | 제118대 | ||||||
모모조노 | |||||||||
<rowcolor=#DCA600> 제119대 | 제120대 | 제121대 | 제122대 | ||||||
고카쿠 | 닌코 | 고메이 | 메이지 | ||||||
근현대 | |||||||||
<rowcolor=#DCA600> 제122대 | 제123대 | 제124대 | 제125대 | ||||||
메이지 | 다이쇼 | 쇼와 | 아키히토 | ||||||
<rowcolor=#DCA600> 제126대 | |||||||||
나루히토 | |||||||||
}}}}}}}}}}}} |
<rowcolor=#DCA600> 시호 | 휘 | 즉위년일 | 퇴위년일 |
(↑ 고메이 천황) | |||
메이지 천황 | 무쓰히토 睦仁 | 1867.2.13 | 1912.7.30 |
다이쇼 천황 | 요시히토 義仁 | 1912.7.30 | 1926.12.25 |
쇼와 천황 | 히로히토 裕仁 | 1926.12.25 | 1989.1.7 |
(↓ 아키히토) |
11. 역대 대장경 및 내무경
내각총리대신 제도 출범 전의 명목상 일인지하 만인지상은 태정대신이었으나, 태정대신은 상징적 명예직이었을 뿐 실권은 대장경과 내무경이 갖고 있었다.대장경은 일본 재무대신의 전전신격 관직으로 현 재무성의 전신인 대장성의 장관[75]이었다. 또한 당시 대장성과 민부성의 합병과 분리가 반복되었고 대장경이 민부경을 겸하기도 하였기에 내무경 이전 사실상의 정부수반이었다. 훗날 내무성이 설립되자 실권은 내무성의 장관인 내무경에 넘어가게 된다.
<rowcolor=#ffffff> 대수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1대 | 마쓰다이라 슌가쿠 松平春嶽 | 1869.9.16[76] | 1869.9.29 |
2대 | 다테 무네나리 伊達宗城 | 1869.10.16 | 1871.6.14[77] |
민부경 | 오키 다카토 大木喬任 | 1870.7.10 | 1871.9.11[78] |
3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1.8.13 | 1873.10.12 |
4대 |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 1873.10.25 | 1880.2.28[79] |
5대 | 사노 쓰네타미 佐野常民 | 1880.2.28 | 1881.10.21 |
6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 1881.10.21 | 1885.12.22 |
내무경은 내무성의 수장으로 근대적 내각제가 성립되기 전 일본의 실권자 기능을 했다.참고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rowcolor=#ffffff> 내무경 (1873년~1885년) | |||||||
초대 오쿠보 도시미치 | 2대 기도 다카요시 | 3대 오쿠보 도시미치 | ||||||
4대 이토 히로부미 | 5대 오쿠보 도시미치 | 6대 이토 히로부미 | ||||||
7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8대 야마다 아키요시 | 9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rowcolor=#ffffff> 내무대신 (1885년~1947년) | ||||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초대 야마가타 아리토모 | ||||||
2·14대 사이고 주도 | 3대 시나가와 야지로 | 4대 소에지마 다네오미 | 임시대리·5대 마쓰카타 마사요시 | 6대 고노 도가마 | ||||
7대 이노우에 가오루 | 8대 노무랴 야스시 |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 11대 가바야마 스케노리 | ||||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 10·13대 이타가키 다이스케 | 2·14대 사이고 주도 | 15대 스에마쓰 겐초 | 16대 우츠미 타다카츠 | ||||
17대 고다마 겐타로 | 18대 가쓰라 다로 | 9·12·19대 요시카와 아키마사 | 20대 기요우라 게이고 | 21·23·25대 하라 다카시 | ||||
22대 히라타 도스케 | 21·23·25대 하라 다카시 |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 21·23·25대 하라 다카시 |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 ||||
24·27대 오우라 가네타케 | 26·28대 오쿠마 시게노부 | 29대 이치키 기토쿠로 | 30·34대 고토 신페이 |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 ||||
32대 도코나미 다케지로 |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 30·34대 고토 신페이 | 31·33·35대 미즈노 렌타로 | |||||
36대 와카쓰키 레이지로 | 37대 하마구치 오사치 |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 39대 다나카 기이치 | |||||
40대 모치즈키 게이스케 | 41대 아다치 겐조 | 42대 나카하시 토쿠고로 | 43대 이누카이 쓰요시 | |||||
38·44대 스즈키 기사부로 | 45대 야마모토 타츠오 | 46대 고토 후미오 | 47대 우시오 시게노스케 | 48대 카와라다 카키치 | ||||
49대 바바 에이이치 | 50대 스에츠구 노부마사 | 51대 기도 고이치 | 52대 오하라 나오시 | 53대 코다마 히데오 | ||||
54대 야스이 에이지 | 55대 히라누마 기이치로 | 56대 타나베 하루미치 | 57대 도조 히데키 | 58대 우자와 미치오 | ||||
59대 안도 기사부로 | 60대 오다치 시게오 | 61대 아베 겐키 | 62대 야마자키 이와오 | 63대 호리키리 젠지로 | ||||
64대 미츠치 추조 | 65대 오무라 세이이치 | 66대 우에하라 에츠지로 | 임시대리 가타야마 데쓰 | 67대 키무라 코자에몬 | ||||
폐지 | ||||||||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 }}}}}}}}} |
<rowcolor=#ffffff> 대수 | 이름 | 임기시작 | 임기종료 |
1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3.11.29 | 1874.2.14 |
2대 |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 | 1874.2.14 | 1874.4.27 |
3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4.4.27 | 1874.8.2 |
4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1874.8.2 | 1874.11.28 |
5대 | 오쿠보 도시미치 大久保利通 | 1874.11.28 | 1878.5.15 |
6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1878.5.15 | 1880.2.28 |
7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 1880.2.28 | 1881.10.21 |
8대 | 야마다 아키요시 山田顕義 | 1881.10.21 | 1883.12.12 |
9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 1883.12.12 | 1885.1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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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이토 히로부미 | 구로다 기요타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rowcolor=#c3c965>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토 히로부미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rowcolor=#C3C965> 제13대 | 제14대 |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 ]] | ||||
<rowcolor=#C3C965>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사이온지 긴모치 | 가쓰라 다로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라 다카시 | 다카하시 고레키요 | 가토 도모사부로 | |
<rowcolor=#C3C965>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야마모토 곤노효에 | 기요우라 게이고 | 가토 다카아키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전전 ]] | ||||
<rowcolor=#C3C965>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와카쓰키 레이지로 | 다나카 기이치 | 하마구치 오사치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rowcolor=#C3C965>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이누카이 쓰요시 | 사이토 마코토 | 오카다 게이스케 | 히로타 고키 | |
<rowcolor=#C3C965> 제33대 | 제34대 | |||
하야시 센주로 | 고노에 후미마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전시 ]] | ||||
<rowcolor=#C3C965>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아베 노부유키 | 요나이 미쓰마사 | |
<rowcolor=#C3C965> 제38·39대 |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전후 ]] | ||||
<rowcolor=#C3C965>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제46대 | |
시데하라 기주로 | 요시다 시게루 | 가타야마 데쓰 | ||
<rowcolor=#C3C965> 제47대 | 제48-51대 | 제52-54대 | 제55대 | |
아시다 히토시 | 요시다 시게루 | 하토야마 이치로 | 이시바시 단잔 | |
<rowcolor=#C3C965> 제56·57대 | 제58-60대 | 제61-63대 | 제64·65대 | |
기시 노부스케 | 이케다 하야토 | 사토 에이사쿠 | 다나카 가쿠에이 | |
<rowcolor=#C3C965> 제66대 | 제67대 | 제68·69대 | 제70대 | |
미키 다케오 | 후쿠다 다케오 | 오히라 마사요시 | 스즈키 젠코 | |
<rowcolor=#C3C965> 제71-73대 | 제74대 |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다케시타 노보루 | |||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시대 ]] | ||||
<rowcolor=#C3C965> 제74대 | 제75대 | 제76·77대 | 제78대 | |
다케시타 노보루 | 우노 소스케 | 가이후 도시키 | 미야자와 기이치 | |
<rowcolor=#C3C965> 제79대 | 제80대 | 제81대 | 제82·83대 | |
호소카와 모리히로 | 하타 쓰토무 | 무라야마 도미이치 | 하시모토 류타로 | |
<rowcolor=#C3C965> 제84대 | 제85·86대 | 제87-89대 | 제90대 | |
오부치 게이조 | 모리 요시로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아베 신조 | |
<rowcolor=#C3C965> 제91대 | 제92대 | 제93대 | 제94대 | |
후쿠다 야스오 | 아소 다로 | 하토야마 유키오 | 간 나오토 | |
<rowcolor=#C3C965> 제95대 | 제96-98대 | |||
노다 요시히코 | 아베 신조 | |||
[[레이와 시대| 레이와 시대 ]] | ||||
<rowcolor=#C3C965> 제98대 | 제99대 | 제100·101대 | 제102·103대 | |
아베 신조 | 스가 요시히데 | 기시다 후미오 | 이시바 시게루 | |
← 태정대신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 }}}}}}}}} |
<rowcolor=#c3c965> 대수 | 이름 | 임기 시작 | 임기 종료 | 재임기간 | 비고 |
메이지 시대 | |||||
1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1차) | 1885.12.22. | 1888.4.30. | 2년 130일 | 역대 최연소 총리 (44세/1841년생) 역대 최장 재임 4위[80] |
2대 | 구로다 기요타카 黒田清隆 | 1888.4.30. | 1889.10.25. | 1년 178일 | |
권한대행 | 산조 사네토미 三條實美 | 1889.10.25. | 1889.12.24. | 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3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1차) | 1889.12.24. | 1891.5.6. | 1년 133일 | 육군 출신 |
4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1차) | 1891.5.6. | 1892.8.8. | 1년 95일 | |
5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2차) | 1892.8.8. | 1896.8.31. | 4년 23일 | |
권한대행 | 구로다 기요타카 黒田清隆 (2차) | 1896. 8.31. | 1896.9.18. | 추밀원 의장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6대 | 마쓰카타 마사요시 松方正義 (2차) | 1896.9.18. | 1898.1.12. | 1년 116일 | |
7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3차) | 1898.1.12. | 1898.6.30. | 169일 | |
8대 |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1차) | 1898.6.30. | 1898.11.8. | 131일 | |
9대 |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縣有朋 (2차) | 1898.11.8. | 1900.10.19. | 1년 345일 | 육군 출신 |
10대 |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4차) | 1900.10.19. | 1901.5.10. | 203일 | |
권한대행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 1901.5.10. | 1901.6.2. | 추밀원 의장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공작 출신 | |
11대 | 가쓰라 다로 桂太郎 (1차) | 1901.6.2. | 1906.1.7. | 4년 220일 | 육군 출신 역대 최장 재임 2위[81] |
12대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1차) | 1906.1.7. | 1908.7.14. | 2년 189일 | 공작 출신 |
13대 | 가쓰라 다로 桂太郎 (2차) | 1908.7.14. | 1911.8.30. | 3년 47일 | 육군 출신 |
14대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2차) | 1911.8.30. | 1912.12.21. | 1년 114일 | 공작 출신 |
다이쇼 시대 | |||||
14대 | 사이온지 긴모치 西園寺公望 (2차) | 1911.8.30. | 1912.12.21. | 1년 114일 | 공작 출신 |
15대 | 가쓰라 다로 桂太郎 (3차) | 1912.12.21. | 1913.2.20. | 61일 | 육군 출신 |
16대 | 야마모토 곤노효에 山本権兵衛 (1차) | 1913.2.20. | 1914.4.16. | 1년 55일 | 해군 출신 |
17대 | 오쿠마 시게노부 大隈重信 (2차) | 1914.4.16. | 1916.10.9. | 2년 177일 | 제1차 세계 대전 |
18대 | 데라우치 마사타케 寺内正毅 | 1916.10.9. | 1918.9.29. | 1년 355일 | 육군 출신 초대 조선 총독 |
19대 | 하라 다카시 原敬 | 1918.9.29. | 1921.11.4. | 3년 37일 | 첫 입헌정우회 정당내각 구성 암살됨 |
권한대행 | 우치다 고사이 内田康哉 (1차) | 1921.11.4. | 1921.11.13. | 외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20대 |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橋是清 | 1921.11.13. | 1922.6.12. | 211일 |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
21대 | 가토 도모사부로 加藤友三郎 | 1922.6.12. | 1923.8.24. | 1년 73일 | 해군 출신 |
권한대행 | 우치다 고사이 内田康哉 (2차) | 1923.8.25. | 1923.9.2. | 외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 |
22대 | 야마모토 곤노효에 山本権兵衛 (2차) | 1923.9.2. | 1924.1.7. | 127일 | 해군 출신 |
23대 | 기요우라 게이고 清浦奎吾 | 1924.1.7. | 1924.6.11. | 156일 | 2차 호헌운동 |
24대 | 가토 다카아키 加藤高明 | 1924.6.11. | 1926.1.28. | 1년 231일 | 다이쇼 데모크라시 |
25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若槻禮次郎 (1차) | 1926.1.30. | 1927.4.20. | 1년 80일 | 1월 28일부터 동월 30일까지는 내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장제스의 북벌 |
쇼와 시대 | |||||
25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若槻禮次郎 (1차) | 1926.1.30. | 1927.4.20. | 1년 80일 | 1월 28일부터 동월 30일까지는 내무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장제스의 북벌 |
26대 | 다나카 기이치 田中義一 | 1927.4.20. | 1929.7.2. | 2년 74일 | 입헌정우회 정권 육군 출신 장작림 폭살사건으로 인한 불명예 사임 |
27대 | 하마구치 오사치 濱口雄幸 | 1929.7.2. | 1930.11.14. | 1년 235일 | 입헌민정당 정권 암살 미수로 부상을 입어 1930년 11월 14일부터 1931년 3월 10일까지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총리 권한대행 |
권한대행 | 시데하라 기주로 幣原 喜重郎 | 1930.11.14. | 1931.3.10. | 외무대신으로서 116일간 총리 권한대행 | |
27대 | 하마구치 오사치 濱口雄幸 | 1930.3.10. | 1931.4.14. | 35일[82] | 입헌민정당 정권 암살 미수로 부상을 입어 1930년 11월 14일부터 1931년 3월 10일까지 외무대신 시데하라 기주로가 총리 권한대행 |
28대 | 와카쓰키 레이지로 若槻禮次郎 (2차) | 1931.4.14. | 1931.12.13. | 243일 | 입헌민정당 정권 만주사변으로 인한 사임 |
29대 | 이누카이 쓰요시 犬養毅 | 1931.12.13. | 1932.5.16. | 155일 | 입헌정우회 정권 암살됨 |
권한대행 | 다카하시 고레키요 高橋是清 | 1932.5.16. | 1932.5.26. | 대장대신으로서 총리 권한대행 암살됨 | |
30대 | 사이토 마코토 齋藤実 | 1932.5.26. | 1934.7.8. | 2년 43일 | 해군 출신. 제3, 5대 조선 총독 암살됨 |
31대 | 오카다 게이스케 岡田啓介 | 1934.7.8. | 1936.3.9. | 1년 245일 | 해군 출신, 2.26 사건 |
32대 |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 | 1936.3.9. | 1937.2.2. | 330일 | 문관 총리 A급 전범으로 사형됨[83] |
33대 | 하야시 센주로 林銑十郎 | 1937.2.2. | 1937.6.4. | 122일 | 육군 출신 "먹튀" 내각 |
34대 |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 (1차) | 1937.6.4. | 1939.1.5. | 1년 215일 | 공작 출신 역대 최연소 총리 2위(46세) |
35대 | 히라누마 기이치로 平沼騏一郎 | 1939.1.5. | 1939.8.30. | 237일 | 법관 출신 A급 전범으로 기소 |
36대 | 아베 노부유키 阿部信行 | 1939.8.30. | 1940.1.15. | 138일 | 육군 출신 제9대 조선 총독 |
37대 | 요나이 미쓰마사 米内光政 | 1940.1.16. | 1940.7.22. | 188일 | 해군 출신 삼국 동맹 조약 반대파 |
38대 | 고노에 후미마로 近江文麿(2차) | 1940.7.22. | 1941.7.18. | 361일 | 유일하게 자살한 총리 |
39대 | 고노에 후미마로 近衛文麿(3차) | 1941.7.18. | 1941.10.16. | 92일 | |
40대 | 도조 히데키 東條英機 | 1941.10.18. | 1944.7.18. | 2년 274일 | 육군 출신 A급 전범으로 사형됨 |
41대 | 고이소 구니아키 小磯國昭 | 1944.7.22. | 1945.4.7. | 259일 | 육군 출신 제8대 조선 총독 |
42대 | 스즈키 간타로 鈴木貫太郎 | 1945.4.7. | 1945.8.17. | 132일 | 해군 출신 역대 최고령 취임 총리(77세) |
12. 평가
긍정적인 면도 없진 않지만, 일본의 몇몇 우파 정도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 부정적인 평가가 강세이다.[84] 이런 역사적 평가에는 일본 제국이 추축국으로서 군국주의의 선봉에 섰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분명 당대에는 주요 강대국 중 하나였지만, 극단적 집단주의를 내세우며 인권과 같은 현대적 가치를 무시하였기 때문에 현재에는 평가가 아주 나쁘다.'근대 일본'이 'medievalism'이라고 쓰여진 불상을 딛고 서서 러시아를 위협하고 있다. |
그러나 일본 제국은 그 이상으로 사상, 사회, 정치의 자유화와 국민 계몽에까지는 도달하지는 못했다. 일본 제국은 오히려 신장한 국력을 휘두르며 제국주의,[85] 군국주의의 길로 폭주했다. 그 결과, 엄청난 규모의 전쟁과 학살을 일으켰고 그러한 폭주의 끝에 일본이 맞이한 말로는 패전과 국가 해체였다.
관료제 아래에서 치밀하고 조직적인 악행을 저지른 나치 독일과 비교해 일제의 만행은 전근대적 국가의 미성숙함에서 온 바가 컸다. 일본은 독일처럼 특정 인종을 아예 멸종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전쟁수행능력을 대폭 낮춘 뒤 차후 일본의 괴뢰국으로 만들 계획이었다.
하지만 2차 대전기 일본 제국이 일으킨 피해는 나치 독일에 비견된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실제 일본 제국은 중국, 동남아 등지에서 약 3,000만 명을 살해하여 유럽 각지에서 약 4,000만 명을 죽인 나치 독일에 버금가는 인명피해를 야기했다.[86] 따라서 전쟁의 의도가 나치 독일에 비해 조금 덜 악하다고 하더라도[87] 일제가 저지른 수많은 전쟁범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일제가 저지른 전쟁범죄의 잔혹성은 크메르 루주와 비슷, 아니 그 이상이라 봐도 될 정도로 극악하기 그지없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은 일본과의 감정의 골이 매우 깊었다. 물론 대만은 당시 일본이 자국의 선진성을 홍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식민지배 정책을 펼쳤으며, 타이완 섬 이외의 모든 영토를 잃어버려 강도높은 친미 및 친일 정책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과 더불어 비교적 빠르게 감정이 회복된 편에 속한다. 이는 중국국민당의 독재에 대한 반작용 때문이기도 하다. 이 외에도 구 남양군도 소속의 태평양 제도 국가들과의 관계도 아주 좋은 편이다. 일본군 전사자 추모비를 찾아보기 쉬우며 팔라우는 일부 지역에서 일본어가 공용어이다. 팔라우어에서는 일본어의 깊은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반면 한반도의 경우 말할 필요도 없는데 한일관계 항목 참조. 한국은 공산 진영을 제외하면 독립축하금 명목의 축소된 배상과 차관이 타결되고 나서야 가장 늦은 관계 회복, 국교 수립에 나설 수 있었다. 한일협상 참조.
식민지배 피해국인 한반도와 전쟁 피해국인 중국,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은 이 당시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어 마찬가지로 전후 일본에 대한 감정의 골이 매우 깊었으며 이를 회복하기까지 일본의 배상, 원조에도 불구 수십년의 시간이 걸렸다. 다만 21세기 중국이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분쟁에 강도 높은 무력행사를 동원하면서, 동남아 여러 국가는 대미 외교창구로서 일본을 활용하고 있고 최근에는 남중국해에 자위대 군함이 들어갈 정도로 우호적 관계를 구축한 국가도 꽤나 있다.[88] 또한 인도네시아나 인도에서는 일본 덕분에 독립이 가능했다고 여기는 사람들로 인하여 평이 비교적 좋기도 하다. 특히 인도는 일본 제국이 자국에서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찬드라 보스와 그의 자유 인도 임시정부 후원자였기 때문에 평가가 상당히 긍정적이다. 일본군이 인도 영내를 점령한 적도 별로 없고. 전후의 도쿄 전쟁범죄 재판에서는 인도인 판사가 홀로 일본은 무고하다고 옹호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일제에 의해 유럽 본토가 직접적인 피해를 받은 건 거의 없기 때문에 종종 서양인들이 이런 일본 제국에 대해 다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인다. 대표적으로 유튜브에서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2차 대전 군가, 영상들은 경고를 달거나 댓글을 차단하는데 비해서 일본 제국 미화와 관련된 내용은 대응이 훨씬 약하거나 아예 없는 경향이 있다. 인터넷의 보급과 그 파급력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비서양 국가로서 서양제국과 맞서 싸운 일본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멋지게 바라보는 서양인들도 존재한다. 몇몇은 애초에 과거사로 서로 싸우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 한국이나 중국 등 일본 제국에게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것을 두고 지나간 과거를 계속 물고 늘어지는 행태라 여기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구미에서도 논쟁이 있는 제국주의나 식민지배에 비해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알 사람은 나치의 만행을 알듯이 이들도 알며 일부 서양인들 역시 동남아나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일제의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반독 감정과 더불어 반일 감정까지 갖는 서양인도 가끔 있다.[89] 대표적으로 네덜란드가 이에 해당하며, 미국과 호주 역시 진주만 공습 및 포로 학살의 피해를 입는 등 일본 제국과 직접적인 악연이 존재하기 때문에 태평양 전쟁과 가까운 구 세대에는 반일 감정이 종종 남아있다.
한국과 중국의 거센 반일에 비판적인 사람이 많은 이유는 이들은 현대 일본국을 구 일본 제국과 엄연히 다른 국가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당장 유럽에서 나치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하더라도 현대 독일에 대해 이토록 거센 감정을 토로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90]
대만과 동남아 국가들도 장기적으로 중국 견제를 위해 일본에 우호적인 기조로 돌아서면서 현재 대한민국 이상으로 일본에 반감이 심한 나라는 제2세계 반서방 진영의 중국밖에 남지 않았다.[91] 위안부 문제를 제외하면 일본의 전쟁범죄 논쟁에서 한국보다는 중국이 전면에 등장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한국 역시 2020년대에 들어 신냉전이 도래한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2.1. UN 헌장의 적국조항
유엔헌장의 '승인 없는 무력 사용의 대상이 되는 국가'와 관련해 일본 제국이 아닌 현대 일본까지 추축국과 같은 '악의 축'으로 간주되진 않는다. 엄연한 정회원이자 거대 열강으로서 UN의 큰 후원자이기 때문이다. 다만 2차 대전의 승전국(즉 UN을 이끄는 상임이사국)에게 적대한 국가들에 대해 책임을 묻는 적국조항(enemy-state clauses, 敵國條項)이 존재한다.또한, 이러한 조항은 전후 일본이 사죄 차원에서 국제사회에 대한 막대한 지원을 행했고 UN에 가입하여 막대한 분담금을 내는 현재에도 건재하다. 일본이 UN의 적국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나, 헌장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상임이사국 전원의 동의가 필요하며 이들은 적국조항의 필요성과 별개로 구 추축국 국가들의 과거사에 대한 상징으로 해당 조항을 남겨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특히 구 추축국에 의해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겪은 러시아와 중국이 동의할 가능성은 없다. 때문에 일본 내 우파들이 해당 용어의 사용에 불만을 가진다 해도 여전히 존재하는 조항이므로 사용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12.2. 전후 일본의 관점
근대시대 봉건국가에서 단일 국민국가로의 전환을 꾀하여 큰 족적을 남긴 일본 제국의 잔재는 현재의 일본 사회에 짙게 깔려 있다.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는 것이 일본이라는 국가의 현대적 기틀이 당연하게도 이 시기에 기원하기 때문에 그 유산이 국가 전반에 널리 퍼진 것이 당연하다. 전후 미국을 위시한 연합국의 입김이 강했을 때에는 일본 제국 시절의 부정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교육을 폈던 시절도 있었지만, 일본이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열강으로서 완전히 재도약해 서구 국가들을 다시 완전히 따라잡고 그 지위가 안정되기 시작한 1970년대부터 재평가가 이루어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1990년대 들어와서 이전 시대의 좌익 및 전후 우익 사관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불기 시작하여 이런 교육을 도게자 교육 또는 암흑사관 등으로 부르며 "역사는 한쪽 측면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든가, "국민의 반 애국심을 키우는 자학사관이다!"라는 논리로써 역사교육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져 교과서 출판에 큰 변화가 생겼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재성찰이 이루어지면서 일본 제국의 1세기 가량 되는 역사를 통째로 부정하는 투인 이전의 교육을 납득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일본의 우경화 경향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분야가 바로 이 역사 교육으로 2000년대 들어서 문부관삭성은 역사교과서 검정안을 개정할 때마다 20세기 현대사 부분의 분량을 계속 축소하고 특히 제2차 세계 대전기에 행해진 각종 전쟁범죄에서 대한 서술을 점점 애매모호하게 처리한다. 물론 이른바 극우 교과서는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는 점이 경계할 부분이다.
일본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일본 제국은 과오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엄연히 자국 역사의 일부분으로서 긍정하는 경우가 대략 일반적이다. 유럽 열강 국민들의 태도와 같이 제국주의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주제는 되도록 삼가지만 제국 자체의 위세와 그 시대의 분위기(예컨대 일본의 다이쇼 로망과 유럽의 벨 에포크)는 즐기는 경우가 많다. 일본 제국을 회상하며 그 시대의 풍취와 제국으로서의 자신감은 드러내지만 한국 대만 등 식민지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꺼린다.
다만 같은 일본 제국 시대라 하더라도 비판 의식이 적은 1920년대 이전과 달리 1930년대 이후의 급격한 군국주의화는 이러한 제국 로망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92] 이 시대는 일본에서도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다. 일본 우파도 모두 제국의 역사를 통째로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일본 제국 전반기, 중반기의 국가 정체성 형성과 성장은 고평가할지라도 2차 대전기의 행보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경우가 많다. 태평양 전쟁의 명분이 '아시아 국가들의 구원'인데 현대인들이 이러한 주장에 대충 이해는 할지언정 동의할 이유가 만무하다.
12.2.1. 일본의 극우 세력
군국주의와 제국주의를 완벽하게 미화하고 긍정하며, 아예 추종하는 일본 극우 세력이 문제시된다. 대동아 전쟁 긍정론의 일본 극우들에게는 일본의 가장 화려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들은 일본 제국은 올바른 국가였고, "백인 제국주의 침략으로 노예나 식민지 지배 상태이던 아시아 나라들의 해방을 위해 싸운 정의롭고 위대한 일본!", "열강 미국과 세계의 패권을 걸고 진검 승부를 벌인 아시아의 대표 일본!"이라 믿는다. 그러나 현실은 소수의 화족, 재벌, 군부 등을 제외하면 식민지인들은 물론 일반 국민들에게도 괴로웠던 시기인데 소수의 제국주의자 사치와 허영심으로 인하여 일어난 전쟁과 재벌 중심의 경제로 인하여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갔다. 심지어 종전 이후에도 냉전 특수로 인해 재벌들은 주요 기술을 승전국에 제공하고, 고위 관료, 장군들 역시 실험 자료와 다른 자료들을 비밀리에 전부 넘긴 뒤에 살아남았다. 기존의 재벌 그룹은 해체되었지만 전후 다시 만든 재벌들에 적용되는 조항이 아니었기에 대부분 그럴듯한 그룹을 새로 만들어 회장 노릇을 계속 하고 있다. 전쟁 수행 중에는 미군의 민간인 거주지조차 개의치 않는 무차별 공습으로 민간인은 큰 피해를 보았다.고바야시 요시노리는 그의 만화(<전쟁론>, <대동아론>)와 인터뷰 등을 거쳐, "전쟁에서 졌기 때문에 '악', 전쟁에서 이겼으니까 '선'으로 규정했을 뿐이다. 너희들 자식이 싸움 잘하는 골목 대장한테 두들겨 맞고 집에 왔는데 너는 싸움에서 졌으니까 '악한' 놈이라고 자식한테 말할 수 있느냐!"나 "이제까지의 역사관은 이긴 놈들의 논리가 넣어 세뇌한 '자학사관'이다. 일본의 대동아 전쟁은 자랑스럽고 정의로운 전쟁이였다!"라 주장한다. 연합국의 추축국 영토 및 점령지에서 이루어진 전쟁범죄(갈근묘 사건 등)을 고려하면 2차 대전기 연합국과 추축국의 선악 구도는 단지 승전국의 전후질서 확립을 위한 선전이었다는 주장이다.
또한 일본 극우사관에 입각해 일본 제국 시기를 일본의 최전성기로 생각하는 극단주의자들도 있는데,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비록 일본 제국이 당시 명실공히 열강의 반열에 들기는 했지만, 여러 모로 근대화 수준에서 영국이나 프랑스, 독일, 미국 같은 당시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에 비해 부족한 면도 있었고 국력 면에서도 제국주의 열강 중에서 중하위권에 속했다. 도리어 전쟁 말기 그 기형적으로 거대한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미국에 선전포고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그 당시 비슷한 체격으로 평가받은 제국주의 국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일본의 진짜 최전성기로 부르기에 흠이 없는 시절은 막대한 경제력으로 미국을 위협한 1980년대이다. 일본은 참혹한 패전으로 잿더미가 된 상황에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 특수로 재건의 발판을 마련했고 국민들의 노력 끝에 이후 1964 도쿄 올림픽과 1970 오사카 엑스포를 통해 경제재건과 경제강국으로 성장을 알렸다. 이후로도 폭발적인 고도성장을 계속해서 1980년대가 되면 공산권 수장인 소련까지 넘어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엔화가 전세계를 휩쓸던 이 시절부터 버블이 붕괴하기 바로 직전까지가 바로 일본의 진정한 최전성기이다.
물론 일본 제국 시기에 쌓아놓은 유무형의 자산이 오늘날의 일본이라는 국가의 정체성을 구축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는 없다. 현대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일제 때 구축된 기초 과학 기술과 인프라가 뒷받침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 서유럽과 경쟁하는 첨단산업 강국으로 도약한 시기는 분명 1960년대 이후이다.
12.3. 타국과의 비교
서구 열강을 맞아 개항을 한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화로 국력을 증진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선진 공업국이라고 보기 어려웠던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전쟁 특수로 수출이 수입을 추월하면서 만성 무역적자국에서 무역흑자국이 되었다. 당시의 조선이나 중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보다야 훨씬 잘 살았던 중진국 수준이었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구 열강과 미국에 비해서는 한참 뒤처져 있었다.2차 대전 시기 3대 추축국들의 경제 규모 순위를 봐도 독일, 일본, 이탈리아 순인데 독일은 소련과 동급이고 영국은 한급 아래이며 프랑스가 일본보다 근소히 높았다. 즉, 제국주의 열강 중에서는 중하위권에 속했었다는 뜻. 구체적인 숫자로 살펴보면 2차 대전 개전 직전 열강들의 본토 경제 규모는 아래와 같았다. 다만 저 중에 중화민국은 웬만해서는 주요 열강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중화민국은 당시 군벌들이 지방에서 독립왕국 수준으로 할거하여 국민정부의 국토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1위) 미국(8,000억 USD)
2위) 소련(3,590억 USD)
3위) 독일(3,514억 USD)
4위) 중화민국(3,205억 USD)
5위) 영국(2,856억 USD)
6위) 프랑스(1,856억 USD)
7위) 일본(1,694억 USD)
8위) 이탈리아(1,434억 USD)
2차 대전 직전의 일본의 경제력은 지금으로 치면 인도와 비슷하다 보면 된다. 개개인의 국민소득은 타 열강보다 꽤 뒤쳐졌으나[93] 인구는 비교적 많은 편이라 경제 규모가 꽤나 높았다. 개전 직전 프랑스 본토 인구가 4,300만, 이탈리아 4,400만, 영국이 5,500만, 독일이 6,300만 정도였는데 당장 일본은 식민지를 제외한 본토의 자체 인구만 해도 독일보다 많은 7,000만 명이었다. 사실상 일본의 본토로 취급되었던 한반도, 대만 등지까지 다 합치면 1억에 약간 못 미쳤다. 이정도면 한반도와 대만의 인구를 제외하고도 당시 열강 중에서 일본의 인구는 소련, 미국 다음 가는 수준이었다. 현재 인도가 국민 소득은 제1세계 선진국의 10분의 1 정도이지만 인구가 많아서 경제 규모가 큰 것과 흡사하다. 경제 순위를 봐도 위의 문단에 나오는 대로 개전 직전 일본이 세계 7위 규모였는데, 현재의 인도 역시 영국, 프랑스와 비슷한 세계 5~7위권이다. 거기에 일정 수준의 공업력은 있지만 원천기술이 부족해서, 핵심 장비와 부품 그리고 첨단 제품은 최상위권 선진국에 비해서 한 수 아래라는 점까지 흡사하다.[94]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과 비슷한 점으로는 각각 군사력과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아시아 최강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비록 경제적인 면도 상당한 수준이라 두 국가 모두 세계적으로 보면 1인당 GDP와 전반적인 경제 수준은 서구 선진국들보다 좀 낮은 중진국 수준이지만 많은 인구와 공업력 덕분에 총생산량이 높다. 둘다 서구 선진국보단 못하지만 후진국, 최빈국은 아니었고 현재의 라틴아메리카, 러시아(혹은 소련)와 비슷한 소득 수준이었다. 당시 일본의 GDP는 미국의 12%였고 현재 중국 13,136 달러, 미국 85,370 달러로 시기상을 고려하면 국민 개개인도 비슷한 생활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95] 또한 둘다 중공업 위주의 발전을 통해 뛰어난 과학 기술력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자체적인 항공우주 기술과 외국 기업으로 전수받은 수 많은 기술들이 있으며 일본은 자체적으로 전투기(A6M)와 전함(야마토급 전함), 일본군/무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수 많은 자국산 무기를 만들 정도로 서구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의 기술력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군/장비를 보아도 알 수 있듯 현재의 중국도 자국산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력이 있다.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둘다 이러한 국력을 바탕으로 패권주의를 내세워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국가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방을 적대하며 내부의 불만을 외부로 돌리며 내부적으로 강력한 전체주의를 내세우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우월주의를 내세운다는 공통점도 있다.[96] 일본 제국과 마찬가지로 항공기, 첨단 기술 등의 원천기술은 있지만 품질과 성능은 서방 국가에 비해서는 조금 떨어진다는 점도 비슷하다. 일본 제국 경찰, 중국 경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매우 강력한 공권력을 이용하여 자국민을 감시하고 비판적이거나 반대하는 의견을 탄압하며 조선•대만, 위구르•티베트 같은 소수 민족들을 탄압하는 것도 비슷하며 괴뢰국이나 우방국(일본은 만주국과 왕징웨이 정권, 중국은 북한과 파키스탄)을 통해서 패권을 휘두르고 한국을 자국의 패권과 팽창주의의 희생양으로 삼은 점 또한 서로 비슷하다.[97] 다만 이는 당대의 웬만한 열강과 식민 제국들이 하던 일이라 일본 제국과 중국 공산당만의 악행으로 치부할 순 없다. 일례로 프랑스는 하나의 공화국을 명분으로 지방 방언을 극심히 탄압했다.
12.4. 전쟁 피해자들의 관점
나는 당시에 일본인을 죽이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만약 내가 전쟁에서 졌더라면, 나는 전범으로 기소되었을 것이다. 모든 군인들은 자신이 하는 일의 도덕적 측면에 대하여 생각한다. 모든 전쟁은 부도덕하고 당신이 그것을 신경쓴다면, 당신은 좋은 군인이 아니다.
커티스 르메이, 전후 작전의 도덕성에 대한 질문의 답변 출처
커티스 르메이, 전후 작전의 도덕성에 대한 질문의 답변 출처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과 함께 추축국 양대 전선의 대표격 국가로서 전쟁을 주도하고 숱한 전쟁범죄들을 일으켰고 또한 동시에 자국의 민간인들에게도 간접적으로 큰 피해를 입혔다. 오키나와 전투 당시 오키나와 주민의 1/4를 죽음에 몰아넣었고, 커티스 르메이의 무차별 공습에 의해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것을 막지 못했으며 결국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두 개의 도시가 수십만명의 주민들과 함께 증발했다. 이 과정에서 이우와 같은 재일 조선인들도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었다. 르메이 본인도 자신의 작전에 대하여 '패전했다면 전범이 되었을 것, 어차피 모든 전쟁은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발언하였을 정도로 무척이나 참혹한 피해가 이어졌었다. 현재 연합국이 승전하여 그들이 구축한 세계질서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선악구도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점이 종종 거론된다.
하지만 또한 이탈리아 왕국은 추축국의 주역이자 파시즘의 원조이지만 최소한 일제와 나치 독일과 같은 비인륜적인 국가로 여겨지진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탈리아에 관해서는 "전쟁 중에 실책만 가득 저지르고 그다지 한 일도 없는 나라"라는 인식 때문이지만, 또한 이탈리아군이 독일군, 일본군과 같이 조직적인 대규모 학살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98] 물론 이탈리아군도 마냥 깨끗했던 것은 아니고 에티오피아에서의 독가스 살포나 소수민족 탄압 등 악행을 행하기는 했으나 최소한 국가나 군대가 주도해서 대량학살극을 광범위하게 저지른 두 국가에 비하면 훨씬 양호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의 세력이 워낙 미약했고 일반 병사들과 국민 수준의 파시즘 경도 현상도 적었으며 무솔리니 역시 히틀러와 같은 미치광이 학살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제가 나치 독일과 동일선상에서 비판받는 이유는 단지 그들이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규모의 전쟁범죄 때문이다. 나치 독일은 정부 주도로 유대인이라는 민족을 지구상에서 절멸시키기 위해 기계적으로 학살 시스템을 도입해 점령지 내 유대인, 집시, 장애인, 공산주의자 등에 대한 조직적인 제노사이드를 자행했으며, 폴란드 침공과 독소전쟁 당시 우생학에 기반해 슬라브인과 같은 소위 '열등한' 인종(운터멘쉬)을 탄압하고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99] 한편 일본 제국은 난징 대학살이나 마닐라 대학살 등 점령지 내 민간인 대량학살은 물론 의학 발전이라는 미명으로 악랄한 생체 실험을 자행했고 치치시마 섬에서 미군 포로를 대상으로 식인을 행했으며 군인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군 위안부라는 것을 만들어 동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을 취업사기와 강제 납치로 잡아갔고, 점령지 원주민인 동남아인들은 물론 영국, 네덜란드 여성들, 심지어 호주인 포로 등 백인 여성들도 색출했다.[100] 일본 제국이 점령지의 서구권 여성들까지 잡아다 위안부로 썼다는 사실은 명백히 기록으로 남았고, 이는 현대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서 서구 국가들에게 제대로 호소하지 못하는 가장 큰 까닭이다. 워낙 행적이 악랄했던지라 네덜란드나 영국에서도 중장년층 이상에서는 본토를 유린한 독일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본에 대한 반감이 다소 존재한다.
12.5. 학자들의 관점
좋지 않은 다른 예로 20세기의 일본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은 점령한 국가들의 국민들에게 매우 잔혹한 대우를 하였고 정복당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생각이 전혀 없었지요. 일본이 항상 더 높은 곳에 있어야 했고 모든 부와 권력은 자신들이 독차지해야 했습니다. 일본에게 다른 사람들은 피정복민이자 노예일 뿐이었습니다. 반면 로마는 모든 사람들을 로마인으로 받아들였지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로마 제국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강대국이었습니다.
아드리안 골드워시 고대 로마 전투/군사 박사.
아드리안 골드워시 고대 로마 전투/군사 박사.
하지만 20세기 독일이나 일본처럼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에만 기초해서 제국을 세우고자 하는 나라들은 실패하였습니다. 반면 몽골, 로마 제국, 영국은 다양한 민족과 종교를 국가 체계의 토대로 삼았으며 성공했습니다.
잭 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잭 웨더포드 미국 미네소타 주 매칼래스터 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세부 의견에서 차이들은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와 전문가들은 일본 제국에 대해 가혹한 통치, 경직된 일본인 우위의 지배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특히 학자와 전문가들도 유신 시기와 열강으로서의 도약은 긍정적으로 평가할지라도 전전 쇼와시대 군국주의의 일본 제국은 내부규합에 실패한 채 감당불가능한 전쟁에 뛰어든 실패국가로 바라본다. 이 점은 일본 내 우파 세력도 일부 동의한다.
13. 식민통치의 사죄 및 손실보상의 논쟁
일본은 영국과 네덜란드 및 필리핀과 중화민국에 대하여 1940년대에 GHQ의 명령으로 손해배상을 실행했지만, 1951년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1952년의 중일화평조약(中日和平條約)에 따라 미국과 영국과 네덜란드 및 인도와 호주와 중화민국은 일본에 대하여 손해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및 남베트남과 미얀마는 끝까지 손해배상 청구권을 고집한 덕택에 각각 따로 화평조약(미얀마와 인도네시아)과 배상협정(필리핀과 남베트남)을 체결했다. 반면에 한일기본조약에서 일본 정부는 한국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전면부정했지만, 한국의 요청을 마지못해 수용한 미국의 압력으로 은행과 증권과 보험, 연금과 예금과 송금, 주식과 저축과 국채에 대하여 손실보상 청구권만 인정했다. 그러니까 한일기본조약에 바탕한 손실보상이 완벽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박정희 정권의 잘못이다. 여기서 손해배상(reparation)과 손실보상(compensation)은 법학의 관점에서는 다른 개념이다. 예를 들어 유대인 학살에 대하여 손해 배상금을 지불한 서독의 연방정부가 징발과 징용에 대하여 손실 보상금을 지불했다.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바로 시베리아 억류 문제에 관한 일본 정부의 태도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소련군은 당시 일본군의 활동 영역이었던 만주 및 한반도 북부는 물론 내지였던 남사할린, 쿠릴 열도에 침략하여 약 64만 명 정도의 일본군(일부 '민간인' 포함)을 포로로 생포했다. 당대의 국제법에 따르면 이들을 일본으로 송환해야 마땅했지만, 소련은 대부분의 일본인들을 송환하지 않았고,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와 북극의 굴라크로 압송했기 때문에 운이 좋으면 2~4년까지 노역하거나 운이 나쁘면 10~12년까지 노역했으며, 그 결과 최소한 6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끌려갔던 일본인 생존자들은 나중에야 강제노동에 대한 사과와 손실보상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정부는 정식으로 이를 제의할 수가 없었다. 이미 1956년의 일소공동성명(日蘇共同聲明)을 통해 일본과 소련이 다시 수교하는 과정에서 손해배상 청구권과 손실보상 청구권을 모두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본 정부는 어물쩡 시간을 넘기다가 1990년대 소련이 붕괴된 뒤 "1956년에 포기한 것들은 국가(법인)간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손실보상 청구권이었지 자국민 개개인(자연인)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손실보상 청구권을 포기한 것이 전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냥 말 그대로 소비에트 연방의 모스크바 연방정부에 대하여 자연인이 손해배상을 러시아 연방의 민사소송에서 청구할 수가 있다는 것뿐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또한 한국은 전후 '특별 상태국'이었는데 이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준거하며 자세한 경위는 해당 항목을 참조. 냉전 구도에서 공산 진영을 포위할 동아시아 경제 블록을 구축하기 위해 미국은 한국과 일본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으나 이마저도 각국 정부의 입장 차이로 사실상 수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1953년 3차 회담에선 일본 대표인 구보타는 "일본 측도 (한국에)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5년간 벌거숭이 산을 푸르게 바꾸었다든가, 철도를 건설한 것, 수전(水田)이 상당히 늘어난 것 등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다."라 발언하거나 "일본이 조선을 점령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당해 더 비참했을 것"이라는 발언으로 한국을 자극하였다. 다만 실제로 일본이 주장한 역청구권은 일본의 일방적 주장이 아니라 제3자인 GHQ도 당시 가치로 60억 불을 산정하는 등 그 실체가 없다고는 볼 수 없었으며, 일본의 국가재산 뿐만 아니라 일본인의 사유재산까지 한국에 불하한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점령군은 적지의 사유재산에 손을 댈 수 없다는 헤이그육전규칙 제 46조를 위반하였다는 일본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었기에 합의는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이후 답보 상태를 거듭하던 배상 문제는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해 박정희가 집권하면서 급물살을 탔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이후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갔는가에 대하여 한일관계 항목을 참조.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손해배상 청구권을 전면 부정하고 손실보상 청구권만 인정했다. 그 뒤에 일본 정부는 동아시아 각국에게 수많은 ODA를 제공했다. 일본의 원조들 가운데 규모가 큰 몇 가지를 특기하자면 공적개발원조(ODA: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와 아시아 여성기금(Asian Women's Fund) 등이 있는데, 이러한 원조를 받은 동남아권의 전쟁 피해국들은 반일 감정이 비교적 약한 편이다. 이들 국가는 일본 정부의 노력과 별개로 21세기 들어서 다시금 대두된 중국의 팽창문제가 있고 동남아는 일본뿐 아니라 프랑스, 네덜란드등 다른 곳에도 식민지배와 침략등을 받아 그거에 대한 보상과 사과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 비해 많이 다른 상황이다. 특히 중국이 남중국해에서의 영유권 분쟁에서 무력 시위를 동원하며 갈등을 노골화하자 배트남이나 인도네시아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을 통해 이를 견제하고자 했는데, 일본이 이런 국가들을 대상으로 대미 외교 창구 구실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동중국해 영해 분쟁에 미국이 개입한 배경에도 일본의 중재가 컸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이후에는 심지어 자위대 군함이 직접 남중국해에 행차하면서 중국을 견제하기도 했을 정도다. 이런 문제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미국(+일본)이 있어야 중국을 막는다라는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동남아 국가들은 일본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로 이 문서의 내용은 일종의 요약본이며 손해배상과 손실보상에 대하여 한일기본조약 항목에서 조금 더 많이 언급하고 있다, 그 뒤의 한일관계의 흐름은 시계열 순으로 한일관계 항목에서 서술하고 있으며, 전범기업의 스탠스에 대해서는 미쓰비시그룹 항목 참조. 하시마 섬 강제노역의 수혜자이므로 사실상 전범기업의 대표격이다.
14. 대중 매체에서의 일본 제국
주로 나치 독일과 함께 2차 대전 배경 작품의 악역 혹은 반동세력으로 등장한다. 플레이 가능한 진영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라이징 스톰, 배틀필드 V,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 커맨드 & 컨커: 레드 얼럿 3[101], Hearts of Iron 시리즈 등이 있다.대부분 2차 대전 시기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여 악역 혹은 반동세력으로 등장하지만 제국 성립에서 1차 대전·대공황 언저리까지의 행적은 꼭 나쁘게만은 묘사되지 않는다. 전후 질서를 주도하는 서구 열강들의 행적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반제국주의를 다루거나 좌익 작품이 아닌 이상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이게도 묘사된다.
예를 들어 라스트 사무라이는 구 무사 세력이 메이지 정부에 대항한 세이난 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주인공이 합류한 반란군을 선역으로 그리지만, 메이지 천황이나 일본군이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다만 일본 고유의 정신과 전통을 지키고자 하는 천황과 무사들과는 대비되게 급진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오무라'라는 고위 관료는 악역으로 나온다. 결말에는 주인공 일행의 의기에 공감한 메이지 천황이 무사들의 애국심을 치하하고, 오무라도 이에 순종한다.
가끔씩 2차 대전 즈음의 일본 제국조차 선역으로 묘사되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매체는 대제국, 감벽의 함대 등의 극우 성향 대체역사물이 많으며, 적이 외계인, 좀비라도 되지 않거나 전쟁의 참혹한 실상을 말하는 작품이 아닌 이상[102] 상식적으로 연합국 승전국 위주로 대중매체 생산이 이루어지고 그들의 정신나간 사상과 행위들을 볼 때 2차 대전 시기 일본은 나치 독일과 함께 선역 배정은 불가능하다.
731부대의 영향으로 한국의 여러 매체에서는 차우(차량만한 식인 멧돼지)라든가 알파(통제 불가능한 늑대 인간), 강시대소동에 나오는 강시 같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존재가 나타나면, 일제가 그 원흉이거나 어느 정도 관여되었다는 설정이 종종 붙는다.
일제가 항복하기 전날 항복을 반대하는 군인들의 쿠데타인 궁성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를 묘사한 영화가 일본 패망 하루전(원제: 일본의 가장 긴 하루)이다. 전쟁에는 이제 신물이 난 천황과 눈치 보는 관료들, 항복을 저지하려는 혈기왕성한 청년 장교들의 분쟁을 다루고 있다.
배틀필드 배드 컴퍼니 2에선 모든 일의 원흉으로, 2차 대전의 전황을 뒤집기 위해 오버 테크놀로지스런 EMP 병기를 만들어낸다. 물론 그걸로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훗날 미-러 전쟁 도중에 러시아군이 해당 병기를 재현하는데 성공하면서, 미군이 이를 저지한다는 것이 본작의 주요 스토리다.
높은 성의 사나이에서는 2차 대전에서 승리하고 나치 독일과 세계를 양분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 직후 독일과 사이가 틀어져 현실의 소련 포지션으로 냉전 체제에 돌입한다. 독일보다는 상대적으로 인종차별이나 사회의 통제 수준이 덜한데 이는 실제 역사와 비슷하다. 인상적이게도 소설판과 드라마판에서의 일본 제국의 묘사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소설판은 여러모로 오리엔탈리즘을 떠올리는 묘사가 많은 반면, 드라마판은 독일과 비슷하게 민간인 학살이나 저항세력 탄압 등 현실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소설이 쓰여진 시기에서 드라마가 제작된 때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과거 일본 제국의 전쟁 범죄가 역사의 수면 위로 서서히 드러나게 되었다는 증거이다.
그에 반해 같은 대체역사물인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독일에게 토사구팽 당하고 중국과 만주,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들을 모조리 빼앗기며 보호령으로 전락했음이 작중 신문에서 언급된다. 물론 실제로는 이런 시나리오가 불가능했다.[103] 울펜슈타인은 높은 성의 사나이와는 달리 책이나 드라마가 아닌 게임 시리즈이기 때문에 세계관 묘사에 한계가 있다. 따라서 나치 독일을 묘사하는 데 집중하고 타 추축국에 대한 묘사를 생략하기 위해 정해진 설정일 가능성이 높다.
한국산 대체역사물에서는 대다수 원역사보다 좋게 되는 일 없다. 19세기 개항기가 배경이면 주인공이 빙의한 조선에게 동아시아 최강의 열강의 자리를 빼앗기는 정도나 한반도와 만주로의 군사적 진출을 포기하고, 대신 남쪽으로 나아가는 정도로 적당히 끝나기도 하나, 군국주의로 폭주하던 2차대전이 배경일 경우 빚더미에 깔려 한국을 독립시켜주는 게 가장 나은 편이고 해외 열강에 빙의한 주인공에 의해 원 역사 보다 훨씬 많이 두들겨 맞거나 분단되는 건 기본에 심할 경우 몰락 작전으로 국민의 반 이상이 사망하기도 한다. 가장 끔찍한 케이스로 일본인이 아예 싸그리 절멸당하는 경우도 있다.[104] 물론 예외는 있어서, Hearts of Iron IV의 국산 대체역사 모드인 THE LAST EMPIRE에서는 선역으로 묘사되는 일본 제국이 나온다.[105]
시대가 지날수록 국산 대역물에선 일본 제국의 '국력'에 대한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세계관에선 아무튼 한국이 더 셈."으로 퉁쳤던 과거의 대역물과는 달리, 요즘은 한국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일제를 넘어서는지 묘사하는 추세라, 대역물 작가들이 색안경을 벗고 일제를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의 대표적인 예시로 조선에는 쿠데타가 필요해요가 있는데 여기서는 일본 제국이 괜히 말석자리로나마 열강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2010년대 들어 몇몇 일본산 매체들이 일제의 행위를 열심히 미화하거나, 최선을 다해 변명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심지어 서방 매체들까지 이에 영향을 받고는 일제를 마냥 비판하지는 않는 실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거에는 그냥 적국이었다면 지금은 연합군이나 일본군이나 똑같았다고 주장하는데, 이 경우 소련군의 포로 및 민간인 학대와 미군의 강간 및 포로 학대(미군의 일본군 전사자 사체 훼손), 민간인 거주지 폭격 등이 거론된다. 또한 일본군보다는 독일군이 더 악이었다던가 일본군은 어쩔 수 없이 살기 위해서 독일편을 들었다던가[106] 등등이다.
하지만 물론 중국인과 서양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을 조장한 것과, 공식적으로 일본군 위안부와 731 부대 등의 전쟁범죄를 자행하고 종국엔 자국민들을 "1억 총옥쇄" 따위의 말로 선동해서 죽음으로 몰아가게 하는 짓과 연합군의 전쟁 범죄는 절대 동일선상에 놓을 수 없다. 독일과의 비교도 비슷하다. 민간인 학살과 전쟁포로 학대 등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은 매한가지이다. 물론 대체로 독일의 학살은 중앙정부의 주도, 일본의 학살은 군대 중간계급 장교들의 주도라는 차이는 있으나 이는 학살 성격을 학문적으로 탐구한 것이지 어디가 낫다는 의견이 아니다.
이런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전쟁 말기 히키아게샤들이 겪은 고통스러운 추방과 연합군의 학대(재산 압류, 강간, 학살 등)이 재조명 받고 있고, 2차대전기의 역사 때문에 막말 메이지 유신 시기부터의 일본 제국사가 통째로 부정당하는 일이 억울하기 때문일 것이다.
15. 파시즘 국가 여부
중국과 한국에서는 1930년대의 일본 제국이 파시즘 체제였다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분명 일본에도 흑룡회나 황도파 같은 파시즘 단체가 존재했음은 사실이다.그러나 일본 제국을 나치 독일이나 파시스트 이탈리아처럼 온전한 파시즘 국가로 볼 수 있는지는 이견이 존재한다. 파시즘 국가가 맞다는 의견, 파시즘의 요소만을 차용한 단순 권위주의 체제라는 의견, 테크노크라트들을 중심으로 한 테크노파시즘 사회라는 의견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전통적인 시각이고, 두번째는 로버트 팩스턴의 주장이며, 셋째는 제니스 미무라의 주장이다. 최근의 연구로 일본 제국의 혁신관료들이 만주에서 테크노파시즘을 추진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16. 관련 문서
16.1. 일본의 동맹국들(삼국 동맹 조약)
※ 일본 제국의 괴뢰국들도 동맹국 취급이 가능하나 이들은 아래에서 서술함. |
16.2. 일본의 괴뢰국들
일본 제국의 괴뢰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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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기타
- 팔굉일우
- 대동아공영권
- 대일본제국 헌법
- 교육칙어
- 히키아게샤 - 1868년 메이지 유신 뒤 1945년 일본제국의 해체까지 해외에 살다가 귀국한 일본인들.
- 일본군
- 일본 제국 경찰
- 야스쿠니 신사 - 도쿄 치요다 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신전쟁 및 일본 제국 시기 전몰자 200만여 위를 모시고 있는데 예외적으로 막부 측 전사자들의 신위도 모시고 있다.
- 나치 독일-일본 제국 관계
17. 관련 사건
- 메이지 유신(1868)
- 보신전쟁(1868~1869)
- 도쿄 전도(1869)
- 판적봉환(1869)
- 폐번치현(1871)
- 메이지 6년 정변(1873)
- 사가의 난(1874)
-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1875)
- 강화도 조약(1876)
- 서남전쟁(1877)
- 류큐 왕국 합병(1879)
- 임오군란(1882)
- 갑신정변(1884)
- 나가사키 청국수병 폭동사건(1886)
- 오쓰 사건(1891)
- 동학 농민 운동 진압 개입(1894)
- 청일전쟁(1894~1895)
- 삼국간섭(1895)
- 을미사변(1895)
- 의화단 운동 파병(1900)
- 러일전쟁(1904~1905)
- 을사조약(1905)
- 대한제국 군대해산(1907)
- 남한대토벌(1909)
- 경술국치(1910)
-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 21개조 요구(1915)
- 시베리아 출병(1918~1925)
- 3.1 운동(1919)
- 남양 군도 합병(1919)
- 간도 참변(1920~1921)
- 관동대지진(1923)
- 제남 사건(1928)
- 대공황(1929)
- 나카무라 사건(1931)
- 만보산 사건(1931)
- 만주사변(1931)
- 만주국 수립(1932)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
- 5.15 사건(1932)
- 열하사변(1932~1933)
- 하매 협정(1935)
- 진토 협정(1935)
- 기동사변(1935)
- 2.26 사건(1936)
- 수동사변(1936)
- 중일전쟁(1937~1945)
- 할힌골 전투(1939)
- 태평양 전쟁(1941~1945)
18. 외부 링크
[1] 대일본제국 헌법에 따른 공식 국호이다. '국호' 단락 참고. 국체를 나타내는 부분은 띄어서[2] 신자체 [ruby(大, ruby=だい)][ruby(日, ruby=に)][ruby(本, ruby=ほん)][ruby(帝, ruby=てい)][ruby(国, ruby=こく)][3] "(Great) Japanese Empire"나 "Imperial Japan"이라는 명칭 또한 사용된다. 예로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전 대통령도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일본 제국과 미합중국과의 전쟁을 선포할 때 "Japanese Empire" 또는 "Empire of Japan" 등을 섞어쓰는 걸 볼 수 있다.[4] 일본 제국 시기에도 일본의 국기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일장기였다. 별도의 법령 없이 관습적으로 써오던 것으로, 일장기는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 지난 1999년에야 국기법이 제정되면서 법적으로도 규정되었다. 흔히 일본 제국이라 하면 떠오르는 욱일기는 국기가 아니라 일본군의 군기였다.[5]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으로, 일본의 건국신화에서 유래했다. 이전에는 오개조의 어서문이라는 표어를 내세웠다.[6] 1945년 8월 15일 연합군에 항복, 1945년 10월 2일 연합군의 점령, 1946년 11월 3일 일본국 헌법 공포,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 시행.[7] 태평양 전쟁 도중 알류샨 열도에서 전투를 벌였다.[8] 오도이 안쪽의 영역.[9] 1868년 1월 3일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통해 조선의 한성판윤과 비슷한 자리인 교토정봉행(京都町奉行)을 폐지하고, 동년 1월 7일 헤이안쿄의 행정 및 치안 업무를 담당하는 교토시내단속소(京都市中取締役所)를 설치하였다. 동년에 재판소제를 시행하여 이를 3월 12일 교토재판소(京都裁判所)로 개칭하였으며, 마찬가지로 동년에 또 부번현 삼치제를 시행하여 이를 6월 14일 교토부로 재차 개칭하면서 이때부터 교토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행정구역명으로서 기능하게 되었다. 헷갈리면 안 되는 것이, 1868년 6월 14일 이전까지는 행정구역명은 헤이안쿄였으며, 교토부 이전에 언급된 명칭은 모두 관직명 혹은 관청명이다. 아무래도 과도기의 수도이다 보니 담당 관청의 명칭이 매우 자주 바뀐 편이다.[10] 참고로 짧게나마 일본 제국의 수도로 기능할 동안의 교토부의 영역은 현 교토시보다도 작은 기존 헤이안쿄의 영역(오도이 내부)으로 유지되었다. 1868년 말~1869년 초의 특정 시기에 주변 지역을 일부 흡수하긴 했지만 단순히 사소한 경계 조정 수준이었고, 1890년의 부현제 시행을 위해 진행한 기초작업인 1871년의 폐번치현과 1871년, 1876년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부현 통합으로 주변의 여러 군들이 교토부에 병합되면서 본격적으로 확장을 시작하여, 특히 메이지 후반, 다이쇼, 쇼와 시대까지에 걸쳐서 교토부와 교토시가 급속도로 주변 지역을 흡수하게 되면서 현재의 영역에 이르게 된 것이다.[11] 1869년 5월 9일에 천황이 도쿄로 재행(再幸)하여 도쿄성을 황성으로 개칭, 태정관을 도쿄로 옮기고 교토에는 유수관을 설치한 것으로 도쿄 전도(奠都)가 완수되었다. 이름의 경우 도쿄 전도 이전인 1868년 9월 3일부터 이미 칙서(江戸ヲ称シテ東京ト為スノ詔書)를 통해 에도부에서 도쿄부로 이름이 바뀐 상태였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는 전도를 마친 1869년이 아니라 이름에 수도라는 뜻의 한자가 포함된 1868년부터 도쿄부가 사실상 수도였다고 보는 소수의 시각도 있지만, 오히려 당시 대부분의 사람은 1870년대 초반까지도 교토를 정식 수도로, 도쿄는 곧 사라질 임시 수도로 보았다. 이 관점은 도쿄 전도가 진행된지 3~4년이 지난 1872년 7월 5일에 천황이 도쿄에서 교토로 행차한 것을 환행(還幸)이 아닌 행행(行幸)으로 발표하고 나서야 교토 사람들이 드디어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겨우 사라지기 시작했다.[12] 당시의 사료들을 살펴보면, 에도 행차 후 항구 도시의 무역 편의성 및 지지 기반의 교체를 통한 황권 강화를 노린 메이지 천황은 본래 아예 에도로 천도를 할 생각이었다. 당시 교토에 지역 기반이 있던 보수 정치권은 이에 반대하며 굳이 천도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마찬가지로 항구 도시이자 인접한 오사카(나니와)로 가자고 했고, 교토 백성들은 당연하지만 나니와 천도에도 천년 수도를 버리는 것이냐며 반발했다. 그래서 천도(遷都, 도읍을 옮기다)가 아닌 전도(奠都, 도읍을 정하다)로 표현을 순화하고, '도쿄로 행행(行幸, 임금이 궁궐을 벗어나는 것)을 하되, 교토로의 환행(還幸, 임금이 궁궐로 돌아오는 것)은 무기한으로 미룬다'는 꼼수를 부린 것이다. 그러나 전도와 천도 어느 쪽이라도 결과적으로 도쿄가 도읍의 지위를 얻는 것은 마찬가지니, 메이지 천황의 정치적 계산이 통한 것.[13] 원래 일본의 수도로 처음 기능하게 될 당시의 도쿄의 영역은 슈비키 안쪽으로 한정되었다. 폐번치현 이후 주변 지역을 공격적으로 흡수하고, 간척으로 해안가 쪽의 땅을 넓히며 우리가 현재 아는 영역까지 확장된 것.[14] 청일전쟁 발발로 도쿄 궁성 내에 있던 대본영을 1894년 9월 13일 히로시마로 옮겨 설치하면서, 이틀 후인 9월 15일 메이지 천황의 거처를 히로시마로 옮기고, 한 달 후인 10월 15일에는 급하게 마련된 임시의사당에서 제국의회의원을 소집하였다. 이렇게 행정, 입법, 군사 기관이 모두 히로시마로 옮겨지며 1년이 조금 안 되는 기간 동안 히로시마는 일본 제국의 임시수도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후 1895년 4월 17일 일본의 청일전쟁 승리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조인되면서 열흘 후인 4월 27일 메이지 천황이 도쿄로 환행하며 짧은 기간 임시수도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린다.[15] 이때 수도 역할을 한 정확한 행정구역이 히로시마현인지 히로시마시인지는 거의 대부분의 공식적인 기록물에서 현과 시를 구분하지 않고 히로시마라고만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불명확하다. 다만 히로시마현 입성 당시를 기록한 그림, 청일전쟁 도중 양국의 수뇌진의 회담이 히로시마시청이 아닌 히로시마현청에서 열렸다는 기록(58쪽 참고), 이후 히로시마 대본영 터의 관리 권한이 군부에서 히로시마시가 아닌 히로시마현으로 넘어갔다는 기록(4쪽 참고), 당시 군의 여러 기관이 히로시마시 뿐만이 아닌 히로시마현 곳곳에 분포되어 있었던 점 등의 여러 공식적인 기록물로 말미암아 볼 때 수도의 역할을 한 행정구역은 히로시마현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나오는 몇몇 언론 기사 등의 비공식적인 기록물에는 히로시마시를 일본의 임시수도로 보기도 하고, 몇몇 기관이 시외에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중요한 기관은 히로시마 시내에 위치해 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히로시마시가 수도의 행정구역명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아 매우 애매하다.[16] 기존에도 주고쿠 지방의 중심 도시였던 히로시마는 이 일로 임시수도로서의 경험까지 쌓이며 명실상부한 일본의 핵심 군사 도시로 성장하게 되며, 이는 이후 리틀 보이의 투하 장소로 히로시마가 선택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17] 이후 일본이 청으로부터 얻어낸 타이완 섬의 세력을 정리하기 위하여 대본영을 완전히 폐지하지는 않고 교토로 옮겼는데, 메이지 천황도 히로시마를 떠나서 한달이 좀 넘는 짧은 기간 동안 교토를 둘러보다가 1895년 5월 30일 다시 도쿄로 돌아온다. 교토에 남아있던 대본영은 1896년 4월 1일에 해체되었다.[18] 도쿄도제 시행으로 명칭만 변경되었으며, 영역은 기존 도쿄부의 영역으로 유지되었다.[19] 식민지뿐만 아니라 괴뢰국까지 포함한 면적, 최대 강역[20] 흔히 당시 일본 인구를 두고하는 '1억 옥쇄' 운운하는 관용구가 여기서 유래. 내지(73,000,000명 이상)와 조선, 대만, 그 외 태평양 도서 속령(남양군도 등)을 포함했다.[21] 정부 공인 언어 한정.[22] 표면적으로는 제국헌법에 의해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국가신토는 종교가 아니라고 천명하였으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종교의 성질을 띄고 있었다. 불교를 제외한 이교 신자는 비국민으로 매도당했으며, 정부의 압제에 의한 국교적 위치가 강요되었다. 당시 국가신토와 불교의 관계가 조선 시대 유교와 불교의 관계와 비슷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이는 도쿄대학 문학부 명예교수이자 종교학자인 야나가와 케이이치(柳川啓一) 교수의 주장과도 상동하다. 자세한 내용은 국가신토 문서 참고.[23] 헌법에 천황을 주권자로 명시한 신정국가로서의 면모가 있었으며(국가 신토) 일본군은 내각의 통제를 전혀 따르지 않고 오직 천황에게 충성할 의무만 있는 군대였으며 명목상 통수권자도 천황이었다. 결국 패전 이후에는 천황이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인간선언이 이루어졌고 1947년에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천황의 정치권력이 완전히 박탈되고 정교분리가 실현되었다.[24] 율령제에 따라 조정의 최고 수장이지만 역사적으로 적임자가 있을 때만 임명되었고 상당 기간 공석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도 태정대신이 임명된 것은 내무경이 신설된 이후였다.[25] 일부 식민지에서는 조선 엔, 타이완 엔 등을 사용한다.[26] "The Diplomatic History of Postwar Japan" 1st Edition. Makoto Iokibe, 1999. ISBN-13: 978-0415498487. ISBN-10: 0415498481.[27] 일본어 발음은 '다이닛폰테-코쿠'[28] 당시의 공문서 등을 살펴보면 스스로를 그냥 '제국'이라고 칭한 경우도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1941년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국 정부에 전달된 선전포고문 일본어 문서에는 '제국정부는..." 하는 식으로 표현된 부분이 있다.[29]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조[30] '일본 제국주의 시기 고고학 조사의 다양성과 평가', 한국상고사학회 이기성, 2018.[31] 왕조나 국호가 자주 바뀌어오다가 20세기 초반 들어서 현재 살고 있는 국가와 국호가 만들어진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은 왕조도 고대부터 현재까지 그대로이고 국호도 701년 이후로 계속 일본이었다. 따라서 여러모로 한국인이 통일신라, 고려, 조선 등을 각기 다른 국체라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많은 옛 시대들의 일본도 그냥 일본이라고 지칭하면서 현대 일본과 자연스럽게 이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단지 나라 시대, 헤이안 시대, 에도 시대 등의 역사적 구분을 둘 뿐이다.[32] 메이지 유신 때 일세일원제가 채택되었기 때문에 메이지 시대부터 이런 일이 가능해졌다.[33]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도 일본의 역사 문서에서 에도 시대 이후는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 레이와 시대 식으로 설명하며, 대일본제국 문서에서는 "1868년부터 1947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라고 하면서도 본문에서는 "대일본제국이란 일본의 국호 중 하나로 에도 시대 말기에 외교문서에 사용되기 시작하고 1946년경까지 공식 사용되었다. 또한 국호를 '대일본제국'으로 정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본의 호칭 또는 대일본제국 헌법 하의 일본 호칭 중 하나로 취급된다."라는 식이다.[34] 대한제국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Empire of Dai han 또는 Great Korean Empire를 표방했으나 역시 Korean Empire로 통용되었다.[35] 다만 나치 독일의 경우 대부분의 존속기간 동안 독일국(Deutsches Reich)이 정식 국호였고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으로 바꾼 건 1943년부터 종전하는 1945년까지의 짧은 기간이었다. Greater German Reich는 독일 통일 당시의 대독일주의의 의미로 안슐루스 이후의 나치 독일을 일컫는 말로도 쓰인다. 영어로 표기했을 때 아돌프 히틀러가 구상하던 대게르만국과 혼동되는 경우도 있다.[36] 1999년까지 법률로 국기가 지정되지 않았다.[37] 한반도와 중국 대륙은 근대화를 성공시키지 못한채 내전에 빠지거나 주변 강대국들에게 휘둘렸다.[38] 이 시기부터의 일본 제국이 일본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평가되기 시작하는 부분이다.[39] 이 칙령을 통해 바뀐 국체는 국가원수가 황제인 제국이었지만, 해당 조문 상에서는 제정복고가 아닌 왕정복고라는 단어를 썼다. 여기에서의 왕이라는 단어는, 왕도정치처럼 군주를 나타내는 일반명사이다.[40] 다이묘(번주)들의 '영지(領地)'와 '영민(領民)', 즉 '판적'을 천황에게 반환.[41] 지방 통치를 담당하였던 번을 없애고 그 자리에 중앙정부가 통제하는 부(府)와 현(縣)을 설치.[42] 서울시립대 캠퍼스가 8만평이니 현대의 대학교 하나보다도 작은 땅이다.[43]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의 시스템은 1인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 컸고, 대영제국은 의회에 주권을 너무 많이 넘겨주는 것으로 판단됐고, 미국은 너무 급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프로이센 헌법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44] 특히 농업의 소작 계약을 예로 들면 이렇다. 땅주인인 지주와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소작인을 두는 형태가 소작이다. 프랑스 민법의 경우 땅을 빌린 소작인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소작권을 인정받아, 자기 땅이 아닐지라도 지주에 의해 농사를 짓고 있는 땅이 함부로 처분될 수 없었다. 그러나 메이지 정부가 프랑스 것을 본받아 일본민법을 재정할 때는 이 항목을 제거하고 지주의 처분권만 남겨두었다.[45] 여성 투표권은 1945년 종전 직후에 주어졌다.[46] 주간 동아 기사 http://weekly.donga.com/List/3/all/11/63344/1 여담으로 이 기사에서 언급된 마스조에 요이치 소장은 이후 도쿄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47] 보신전쟁과 서남전쟁으로 그 당시에 성행하던 지역주의에 대한 대책으로 내놓은 것이 국가주의를 교육에 몰아준 것이다. 그리고 사실 완전히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전까지 조슈파의 권력독점이 횡행했다.[48] 물론 관동군을 중심으로 만주를 먹을 자신이 생기자 장기말에 불과했던 장쭤린이 탑승하던 열차를 폭파시키는 암살을 통해 처치하였다. 이후 만주군벌을 이은 장쉐량하고 원수관계가 된다.[49] 일명 1927년의 쇼와금융공황과 1930년의 쇼와공황. 이 둘은 다른 사건이지만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쇼와공황 문서를, 후자는 금 해금 문서를 참고할 것.[50] 일본이 보유한 식민지들은 여타 유럽 제국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과는 규모는 물론 성격 자체가 달랐다. 유럽의 식민지들은 공업 개발이 미약했던 반면 풍부한 원자재 공급처였기 때문에 원자재를 가져와 본국에서 제품을 생산한 뒤에 다시 되파는 돌려막기로 어느 정도 근근히 버텨나갈 수 있었지만 일본의 주요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 요동은 정치/군사적 목적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돌려막기가 어려웠고 오히려 본국의 재정을 빨아먹어 손해만 내고 있던 상황이었다. 실제로 조선을 병합한 뒤 조선총독부가 설치된 직후 그해 1년 예산의 90% 이상이 경성(한양)의 상/하수도 기반시설 설치에 소요될 정도였다. 구한말 경성(한양)의 상/하수도의 열악함과 불결한 위생상태는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을 정도로 매우 심각했다.[51] 이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전력만은 무사시나 야마토와 같은 대형 전함부터 미군도 위협적으로 여기던 쇼카쿠와 즈이카쿠와 같은 항모의 존재 등 나름 한끗발 나갔다. 문제는 이러한 전함이나 항모를 운용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석유가 물주인 미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늘 부족했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지휘관들 중 야마구치 다몬과 야마모토 이소로쿠를 제외한다면 하나같이 삽질만 하는 똥별이거나 나구모 주이치처럼 임기응변으로 전략을 짤 수 없는 융통성 없고 고지식한 장군들이 지휘봉을 잡고있는 바람에 결국 이런 전력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정작 최대만수량 기록을 찍은 전함 야마토는 무지막지한 기름비와 거함거포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투입 자체가 줄어 '야마토 호텔' 이라는 드립으로 후세에 비웃음이 될 정도로 제대로 굴리지도 못하였고 결국 전쟁 후반에 들어섰을때 격침되었고, 후에는 제공권과 더불어 제해권까지 싸그리 미국에게 뺏긴 채 영향권을 상실하고 말았다.[52] 이 당시 미국은 전쟁이 발발하자 전시공업 체계로 발빠르게 움직여 총기는 물론 에식스급 항모와 순양함을 빠르게 수십 척을 한꺼번에 계약하였고 그 결과 1달에 1척씩 풀빵 찍듯이 뽑아대고 순양함을 1주일에 1척 씩 뽑아내는 쇼미더머니를 보여주었고, 미국은 이러한 공업력과 제대로 돌아가는 군대를 바탕으로 일본을 짓밟기 시작했다. 미국의 공업력은 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해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했다.[53] 이 당시 인종차별이 만연하였고 백인우월주의도 상당했기에 우수한 인종 백인을 상대로 열등한 황인종이 승리를 거둔 것에 대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이 충격이 곧 인종차별성 분노로 바뀌었다.[54] 식민지로부터 오는 보급로가 끓겨 미국의 지원과 구매한 상품을 받으면서 악착같이 버티던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이 소식에 영국이 이겼다며 기뻐했다는 후문이 있었고 이는 현실이 되었다.[55] 이 전쟁에서 일본이 조금이라도 승산을 가지려면 진주만 공습 직후 중국 쪽 전역을 포기하고 태평양 전선에 모든 전력(특히 항공모함)을 총동원해 제해권 자체를 점탈해야 했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승산을 가지기 위해서일 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략적으로 완전히 이길 가능성은 높지 않다.[56] 소련은 포츠담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때까지도 중립 조약이 유효했고 또한 대일 참전 의도를 숨기기 위함이었다.[57] 쇼와 천황은 천황의 신성성은 말이 그럴 뿐이지 일본 국민들은 어차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며 쑥스러워 했다. <국화와 칼> 참조.[58] 메이지 천황에게 헌법이 적힌 서류를 받고 있는 인물은 당시 내각총리대신인 구로다 기요타카로, 이렇게 군주가 신하에게 하사하는 형식의 헌법을 흠정헌법이라고 한다.[59] 일본의 건국기념일이기도 하다.[60] 1944년 대륙타통작전으로 화중, 화남의 영토가 중국 전선에서 최종적으로 추가되었으나 그땐 버마와 필리핀에서 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 영토는 아니다.[61] 참고로 태국은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긴 했지만 명목상으로 주권국이었으며 일본 제국의 점령지가 아니었다. 다만 당시 상황을 봤을 때 사실상 추축국에 대항했다면 바로 점령당했을 것이다.[62]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았다.[63] 다만 에도 시대 상공업의 발달과 서양 학문의 보급으로 근대화의 발판이 마련되기는 하였다.[64] 1942년을 기준으로 일본의 GDP는 미국의 6분의 1, 독일의 절반에 약간 못 미쳤고 영국과 소련이 일본의 약 2배에 달했다. 그 외 프랑스보단 조금 못했고 이탈리아보단 조금 더 높았다. 다만, GDP를 기준으로 당시의 국력을 논하기는 어려운 것이, 중화민국조차도 일본과 비등한 수준의 GDP를 갖고 있었으나 일본과 같은 군용 장비는 양산하지 못했다.[65] 출처: The Economics of World War II: an Overview in Mark Harrison(1998), 10[66] 청과 일본이 합의를 이루어 맺은 조약으로, 한 국가가 조선에 파병시에는 다른 국가도 동시에 파병할 수 있다는 내용.[67] 구제중학교 4학년 수료자가 고등학교 입시에 합격하는 경우는 4수(四修)라 하여 천재 대접을 받았으나, 그 수는 많을 때에도 전체 합격생의 5~10% 미만이었을 정도로 소수였다고 한다. 7년제를 기본 형태로 삼는 개혁안은 실패하고 사립고등학교 3곳과 유일한 관립고교인 도쿄부의 부립고등학교를 제외한 모든 7년제 구제고교들은 1934년경부터 심상과(4년)를 폐지하고 고등과만 남겨 3년제 고등학교로 바뀌게 된다.[68] 그래서 김태준의 경우 영변농업학교를 다니고 갑종학교인 이리농림학교에 편입해 졸업하였다.[69] 법관과 검사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합격자를 대상으로 채용하는 것이 기본이었다.[70] 윤치호의 사위.[71] 일본 내지에서는 구제고교 졸업예정자들이 도쿄와 교토의 인기학부로 몰리면서 제국대학 중 예과가 있었던 홋카이도제국대학을 제외한 도호쿠, 규슈 등 지방의 제국대학은 구제전문학교 출신이 더 많은 해도 있었다고 한다. 경성제대 졸업생은 90% 이상, 특히 1934년 예과가 3년제로 개편되면서 예과 졸업생이 배출되지 않은 1936년 의학부 신입생으로 모집된 내지의 구제고등학교 졸업생 수십 명을 제외하면 95% 이상이 경성제대 예과 출신으로 구제전문학교 등 기타 학교 출신은 극소수에 불과하다.[72] 구제대학은 예과 포함 6~7년 과정으로서 미국식 석사 과정을 포함한 학석사 통합과정에 상응하여 별도의 석사는 존재하지 않았고, 박사는 아주 영예로운 칭호였다. 제국대학령 참조.[73] 일본제국의 전문학교령에 따르면 구제전문학교는 구제중학교 졸업 또는 그에 상당하는 학력을 가진 자를 입학시킬 수 있었고, 조선교육령 제27조에 “전문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는 연령 16세 이상으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자, 또는 이와 동등 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로 한다.”고 규정해 놓았기 때문이다.[74] 정부 체제와 국내법 질서가 완전히 변경되었음에도, 일본국의 주체성은 일본 제국과 동일하다. “정부의 형태가 변하더라도 국가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Forma regiminis mutata, non mutatur civitas ipsa)라는 국제법의 원칙이 있기 때문이다.[75] 당시 성(省)의 장관은 대신(大臣)이 아닌 경(卿).[76] 8월 15일부터 민부경 겸직.[77] 민부경은 1870년 7월 10일까지.[78] 이후 민부성은 대장성에 합병.[79] 재임 중 내무성이 설립되어 행정수반 기능은 내무경으로 옮겨갔다.[80] 재직일수 2720일. 7년 6개월(171일)이다. 초대 이래 5대, 7대, 10대 일본 총리이기도 했다. 1901년 5월 최종적으로 물러날 때는 60세였다.[81] 2,886일 = 7년 11개월(331일) (11대 4년 7개월, 13대 3년 1개월, 15대 3개월 더)[82] 도합 1년 270일. 시데하라 권한대행 기간 포함시 2년 21일.[83] 전범이 될 만한 근거가 별로 없기에, 희생양의 측면이 있다. 항목 참조.[84] 현대 일본에 우호적인 미국이나 영국 등 서방에서도 일본 제국에 대한 기본적인 논조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이는 해당 국가들의 역사 교과서 등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이들은 직접 일본 제국과 전쟁을 치렀기에, 과거의 적국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할 여지가 없다.[85] 사실 제국주의는 당대에는 그다지 저평가의 요소는 아니었다. 당대에는 백인의 짐과 같이 우월한 민족이 열등민족들을 지배해야 한다는 사상이 팽배했고, 상술했다시피 일본은 그들이 지배하는 아시아 민족들에 비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86] 나치 독일의 피해자 수 - 소련: 2,600만, 폴란드: 600만, 남유럽: 300만, 서유럽/북유럽: 200만, 기타 동유럽: 200만, 유대인/장애인/동성애자 등 독일계 홀로코스트 피해자: 100만 명 등. 일본 제국의 피해자 수 - 중화민국: 2,200만, 네덜란드령 동인도: 400만,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220만, 미국령 필리핀: 100만, 기타 동남아: 100만, 일제강점기 조선: 50만 명 등.[87] 물론 이는 나치의 의도가 상상 이상으로 극악했기에 가능한 말이다.[88] 사실 동남아의 경우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의 식민지였던 기간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같은 일제라 하더라도 한국과는 입장이 다르다.[89] 서양인들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잘 비판하지 않는 이유는 제국주의에 관해서는 그들 자신도 결코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제국주의의 시초는 다름아닌 유럽이다. 일본이 맹렬히 제국주의를 추진한 이유도 유럽 제국들의 중국 침탈을 보고 이들과 동등해지지 않으면 먹힐 것이라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제국주의를 따라가 같은 열강이 되는 것이 국가생존의 방법이라 여긴 것이다.[90] 다만 서구의 인식과는 별개로 일본 제국과 일본국이 완전히 다른 국체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린다. 이는 기존의 나치당 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서독과 동독으로 새로 정부를 꾸린 독일, 기존의 내각제 시스템은 유자하지만 무솔리니를 스스로 내쫓고 왕정을 폐지함으로써 파시스트의 유산을 청산한 이탈리아와 다른 점이다. 애초에 일본 국민들도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 같은 식으로 구분하는게 일반적이지 일본 제국과 일본국을 다른 국체로서 구분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91] 중국의 반일 정서는 한국보다 훨씬 심하다. 실제로 일본의 전쟁범죄와 제국주의의 최대 피해국은 중국이며 중일전쟁 기간동안 무려 2,200만 명의 피해자와 사망자가 발생했다.[92] 일반적으로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어 만주국이 건국된 1931 ~ 1932년, 혹은 군국주의가 가속화되고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6 ~ 1937년이 그 기점이다.[93] 2차대전 당시 주요 열강중에서 일본의 국민소득은 소련 다음으로 낮은 수준이었다.[94] 예를 들어 일본 제국은 항공기 엔진을 만들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 미국에 비하면 엔진 기술이 떨어졌기 때문에, 군용기의 중량을 늘리는 것에 심각한 제약이 있었다. 그 결과물이 한두 방만 맞아도 터져나가는 물장갑의 제로센이었다. 현재의 브라질도 제조업은 있지만, 항공기 제조사 엠브라에르 같은 몇몇 기업을 제외하면 그 품질은 미국,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 등에 비하면 한단계 아래로 평가된다. 이 때문에 브라질 경제는 몇몇 품목의 농축산물(ex.커피, 소고기) 국제 시세와 석유, 철광석, 고무 등 원자재 수출에 좌지우지된다. 다만 엄연히 항모 전단을 굴리면서 아시아 각지에서 싸운 국가이기 때문에, 막연하게 저질 3류 열강으로 치부하는 건 곤란하다.[95] 당시 일본은 열강중 소련 다음으로 2번째로 소득이 낮았고 현재의 중국도 강대국들 중 러시아 다음으로 소득이 낮다.[96] 후기 일본 제국은 대공황으로 험악해진 사회의 불만을 외국으로 향하게 하기 위해 공격적인 대외 팽창을 꾀했으며 서방 국가들보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선전했다.[97] 일본 제국은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았고 중국은 현재의 한국에 지속적으로 내정간섭을 하고있다.[98] 이탈리아보다 준메이저 국가인 헝가리 왕국이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전쟁범죄가 훨씬 더 심했다.[99] 독소전 당시 학살당한 소련 민간인이 천만 단위였고 2차 대전기 소련인의 14%, 폴란드인의 17%, 벨라루스인의 1/4가 목숨을 잃었다. 이는 물론 홀로코스트와 전혀 별개였다.[100] 다만 영국, 네덜란드 또한 해당 지역을 식민지로 삼으려 진출했던 것이기 때문에 순수 피해자인 동아시아의 위안부 피해자들과는 다소 논점이 다르다. 물론 전쟁범죄이자 성범죄라는 점은 변하지 않기에 일본이 크게 비판받는 건 마찬가지다.[101] 이쪽은 욱일 제국으로 이름이 바뀐 채 패러디됐다. 시간여행을 통한 역사개변으로 나치 독일을 없애버리자 소련이 그 역할을 하는 게 전작들의 스토리였는데, 몰락해서 거지꼴이 된 소련이 타임머신의 발명자인 아인슈타인을 역사개변으로 없애버리자 맨해튼 계획이 없어져서 미국에게 핵을 맞지 않고 강성해진 욱일 제국이 실제 역사의 추축국 포지션을 혼자 도맡으며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침공한다. 처음 공개 때는 일제 미화 논란이 있었으나 점점 자료가 나오면서 노골적인 병맛 넘치는 개그 캐릭터 진영으로 희화됐음이 밝혀져서 논란이 가라앉았다. 정확히 욱일 제국은 자기들은 나름대로 진지하나 제 3자가 보기에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레드얼럿 시리즈는 2편부터 모두 개그캐릭터로 나오기에 욱일 제국도 예외는 아니다.[102] 이런 작품에는 간간히 일본군과 군인 개인이 선하게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대표적. 심지어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한국 창작물도 일본 제국의 고위층들을 매우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것과 별개로 일본인 개인들 중에서는 선역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103] 섬나라를 점령하려면 무엇보다 해군이 중요한데, 여러 삽질과 말기의 연료 부족 때문에 저평가 당하지만, 일본 제국 해군은 전함만 수십 척을 보유한 무시 못할 강군이었다. 부실 전함 2척도 겨우 생산하고, 아끼고 아끼다 황새치 따위에 무너진 크릭스마리네가 이들을 무찌르고 일본 열도에 상륙하는 것은 웃기지도 않는 농담이다. 단 이 세계관 속의 나치는 오버테크놀로지를 가진 국가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104] 너무 극단적이지만, 사실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이 강대국이 되는 대체역사물에선 일본 제국과 심지어 다른 시대의 일본까지 멸족 엔딩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고, "그러면 우리가 현실 역사의 쓰레기들과 뭐가 다르냐?" 혹은 "벌은 잘못해야 주는 것 아니냐? 뭘 저지르기도 전에 몰살시키면 뭔 의미가 있냐?"라는 의식이 대역물 독자들에게 퍼지면서 다소 자제하게 되었다. 링크된 작품에서도 현실에선 항일 독립운동가였던 안창호 등, 소수지만 일본인 몰살에 반대하는 이도 확실하게 묘사했다.[105] 이유인즉슨 이 모드는 '19세기 중반~20세기 중반 한일이 뒤바뀌었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관의 대한제국은 식민지 신세는 커녕 만주, 규슈, 홋카이도 등을 통째로 집어먹고 중일전쟁 대신 한중전쟁, 한일전쟁, 태평양 전쟁을 벌이며 난징 대학살 등 원 역사 일제가 벌였던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르는 반면 일본은 보신 전쟁을 분기로 메이지 유신이 이뤄지지 않아 시대에 뒤떨어지는 3류 국가인 에도 막부가 1936년까지 이어지다 일본을 개혁하려는 유신회의 내전으로 국호를 대일본제국으로 바꾸고 일본을 개혁하는데, 앞서 말했듯 대한제국이 규슈와 홋카이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어서 혼슈와 시고쿠만 간신히 영토로 유지하는 실정이다. 이후 태평양 전쟁의 일환으로 대한제국이 일본 제국으로 쳐들어오는데, 쇼와 덴노의 지휘하에 필사의 방어전을 벌인 끝에 미국의 지원으로 규슈와 홋카이도를 되찾고 사악한 대한제국을 패망시키는데 일조한, 2차 세계대전의 당당한 승전국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그것을 증명하듯 이 세계관의 일본은 대일본제국이라는 국호를 21세기까지 유지중이고, 위치 때문에 대체역사물에서 사형당하거나 전쟁통에 죽거나 하는 등 취급이 박한 쇼와 덴노도 여기서는 후손들에게 에도 막부를 뒤엎고 일본을 근대 국가로 탈바꿈시키고 대한제국군을 막아내고 일본 제국을 21세기에 세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경제강국으로 성장시킨 어마어마한 업적으로 인해 일본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 현인신으로써 전 일본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도조 히데키, 고노에 후미마로 등의 원 역사의 전범들도 대한제국에 맞서 일본을 지켜낸 전쟁영웅, 충신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106] 대공황으로 서구 열강들이 폐쇄적 블록경제 체제로 들어서면서 상대적으로 제국의 규모가 빈약한 일본은 줄곧 허덕였기 때문이다. 그와는 별개로 추축국 문서의 결속력 부분을 보면 일본과 독일은 갈라질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독일 편에 선 것이 일본 제국의 선택이었다. 다만 독소전쟁에 한정해서는 일본이 끝까지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저울질했던 것은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