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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웅우 왕조 တောင်ငူမင်းဆက် | |||||
1580년대의 최대 강역 | |||||
1510 ~ 1752 | |||||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잉와 왕국 | 꼰바웅 왕조 | ||||
위치 | 미얀마, 태국, 라오스,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 ||||
수도 | 따웅우 (1510~1539) 페구 (1539~1599) 아바 (1599~1613) 페구 (1612~1635) 아바 (1635~1752)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만달라 체제 | ||||
인구 | 2,313,300명 | ||||
종교 | 상좌부 불교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사건 |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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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얀마의 왕조. 영문으로는 Toungoo 혹은 Taungoo라고 표기한다.따웅우 왕조는 16세기 따빈슈웨티 왕이 세웠다. 따빈슈웨티 왕과 그의 뒤를 이은 바인나웅 왕의 재위기에 옛 버간 왕국의 영토들을 통합하였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미얀마 북부에서 독립적으로 살던 샨족을 미얀마에 복속시켰다. 바인나웅 대왕은 란쌍 왕국, 란나 왕국, 시암, 마니푸르 등을 연이어 정복하였고, 덕분에 바인나웅 왕 치하의 따웅우 왕조는 당대 동남아에서 가장 영토가 넓고 강력한 제국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따웅우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끈 바인나웅 왕 사후 따웅우 왕조는 급격히 쇠퇴했고, 결국 바인나웅 사후 18년 만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며 거의 망하기 직전 수준으로 내몰린다.
그러나 따웅우 왕조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왕족 출신이었던 냥얀 민과 그의 아들 아나욱페룬은 따웅우 왕조의 잔존세력들을 이끌고 옛 제국의 고토들을 어느 정도 회복하는 데에 성공했다. 아나욱페룬 왕 시기의 따웅우 왕조는 옛 바인나웅 시대에 비하면 훨씬 작지만 더더욱 안정적인 왕국을 구축할 수 있었으니, 이 시기의 따웅우 왕조를 이전과 구분하여 '부흥 따웅우 왕조'라고 부른다. 부흥 따웅우 왕조는 부족장들의 연합에 더 가까웠던 이전 시기의 취약한 행정력을 보완하기 위해 왕위를 세습제로 바꾸었고 국토 전역에 지방관들을 파견하며 안정적인 국가를 운영했다. 덕분에 부흥 따웅우 왕조는 이전보다 영토는 조금 적을지 몰라도 거의 80여년 가까이 경제적인 발전과 중흥기를 이룩할 수 있었다.
부흥 따웅우 왕조 역시 궁정 암투와 부정부패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1720년대부터 친드윈 강 인근에 사는 메이테이인들이 국토를 유린하며 약탈을 일삼았고, 치앙마이에서는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났다. 메이테이인들의 습격은 1730년대에 정점에 달해 나중에는 미얀마 중부 지역까지 대놓고 습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1740년대에는 미얀마 남부의 몬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하라와디 왕국을 세웠다. 하라와디 군대는 1752년 따웅우 왕조의 수도인 아바를 함락했고, 이로써 266년에 걸친 따웅우 왕조의 역사도 끝난다.
2. 역사
바인나웅 대왕 | 따웅우-아유타야 전쟁 |
민찌 뇨 왕의 아들인 따빈슈웨티 왕은 즉위 이후 미얀마 대부분을 정복했다. 따빈슈웨티 왕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치며 이라와디 삼각주와 한따와디 왕국의 수도였던 바고를 점령했고, 1544년에는 바간에서 전(全) 미얀마의 대왕으로 대관식을 치렀다. 따빈슈웨티 왕이 대관식을 치를 시점의 동남아시아의 정세 판도는 급변하고 있던 시점이었는데, 북쪽에서는 샨족이 새로운 왕국을 세워 미얀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 아유타야 왕국은 차오프라야 강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대대적인 충돌이 불보듯 뻔했던 시점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쪽의 해안가에서는 포르투갈 상인들이 쳐들어와 말라카를 점령하면서 미얀마의 앞날은 한 치 앞길도 보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워졌다.
포르투갈인들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 상인들과 교류하면서 미얀마가 막대한 부를 남기기 시작하자, 유럽과의 중계무역의 중요성을 절감한 따빈슈웨티 왕은 수도를 해안과 가까운 바고로 천도했다. 또한 서쪽에 있는 라카인 주[1]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모았다. 따빈슈웨티 왕의 군대는 라카인 주 병합에는 실패[2] 했지만 대신 미얀마 남부 지역을 석권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여러 차례 전쟁을 치른 따빈슈웨티 왕은 그대로 군대를 이끌고 동쪽의 아유타야 왕국으로 향해 또다시 전쟁을 치렀다. 따빈슈웨티 왕은 적의 사령관들을 전사시키는 등 대승을 거두었으나 왕국의 심장부였던 아유타야를 함락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미얀마로 돌아온 따빈슈웨티 왕은 1550년 암살당했다.[3]
따빈슈웨티 왕이 암살당한 직후, 그의 이복형이었던 바인나웅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따웅우 왕조는 이 바인나웅 왕의 재위기에 그야말로 국력을 만방에 떨치기 시작한다. 1550년 즉위한 바인나웅 왕은 30년에 걸쳐 재위하면서 한국사로 치면 광개토대왕과 비슷하게 수많은 정복 사업을 펼쳤다. 1560년에는 서쪽의 마니푸르 지방을 공략했고, 1564년에는 숙적이었던 아유타야 왕국을 끝내 무릎꿇렸다.[4] 1570년대에는 현대 라오스 지방에 자리잡고 있던 란쌍 왕국을 쳐 무너뜨렸다. 덕분에 따웅우 왕조는 현대 라오스, 태국, 미얀마를 모두 합친 것보다도 더 거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다. 당시 따웅우 왕조 치하의 미얀마는 동남아 역사상 최대, 최강의 제국이었으며, 그 명성은 심지어 대륙 너머 명나라에까지 알려질 정도였다.
2.1. 부흥 따웅우 왕조
그러나 강성하던 따웅우 왕조 역시 바인나웅 왕 사후 쇠퇴하기 시작했다. 당시 바인나웅 왕은 죽기 직전 끈질기게 저항하던 북부의 아라칸 지역을 평정하기 위해 전쟁을 준비 중이었다. 그러나 바인나웅 왕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아라칸 원정은 무위로 돌아갔고, 미얀마는 숙원이던 아라칸 정복은 미룰 수밖에 없었다. 군재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바인나웅이 사망하자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바인나웅의 철권통치에 고세율 정책에 지역 토후과 귀족들이 강력히 반발했던 것이다. 특히 아유타야의 흑태자 나레수안은 따웅우 왕조의 군대를 모조리 쓸어버리고 심지어 미얀마 본토로 진격해왔고, 꼰바웅 왕조는 바인나웅 재위기에 정복했던 남쪽 지방 대부분을 내주고 북쪽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연이은 반란으로 당시 따웅우 왕조는 크게 3부분으로 쪼개지게 된다. 북부의 도시 잉와를 중심으로 한 세력, 중부의 삐와 따웅우를 중심으로 한 세력, 포르투갈인이었던 필리페 데 브리투[5]가 점령한 남부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개중 세력은 북부의 잉와 중심 세력이 가장 강했다. 나레수안은 북쪽 잉와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진군했으나 그만 사망해버리며 따웅우 왕조는 한숨 돌릴 여유를 가졌다.
잉와를 중심으로 한 북부 세력은 아나욱페룬[6] 왕의 통치 하에 중부의 삐와 따웅우 지방을 다시 복속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또한 1613년 마지막으로 남은 남부의 포르투갈 세력들도 몰아내면서 결국 미얀마를 다시 통일했고, 이 시기부터의 따웅우 왕조를 이전과 구분하여 '부흥 따웅우 왕조'라고 따로 부른다.[7] 부흥 따웅우 왕조는 영토 면적에서만 따지면 이전보다 확연히 줄어들었을지 몰라도 행정시스템을 확립하고 계승제도를 바로세우며 구조적으로는 훨씬 안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감당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확장에 확장만을 거듭했던 옛 바인나웅 시절의 따웅우 왕조에 비하면 훨씬 지속가능성이 높았다는 말.
부흥 따웅우 왕조는 내부 결속에만 신경쓰며 바인나웅 시절처럼 밖으로 정복을 나간다는 등 외부에 신경을 쓰는 모습은 거의 보여주지 않았다. 미얀마는 이 시기 적당히 폐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된 충돌이라 해보았자 1631년 태국 북부의 란나 왕국 재정복과 이후 란나를 탈환하려는 아유타야 왕국과의 충돌 정도였다.[8] 아나욱페룬 왕의 아들인 탈룬 왕은 1629년부터 1648년까지 재위하면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다독였다. 탈룬 왕의 전후복구 정책은 어느 정도 1635년에 실시된 호구조사에 의하면 당시 따웅우 왕조의 젖줄이던 이라와디 삼각주에 살던 인구수가 거의 2백만에 달할 정도였다고 한다.
약 150여 년 동안 존속한 부흥 따웅우 왕조는 1752년까지 존속했다. 1740년대에 따웅우 최후의 왕이었던 마하다마야자 왕의 재위기에 평소 미얀마에 불만이 많았던 바고 지방의 몬족들이 동남아를 노리던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무너져가던 따웅우 왕조는 이들을 막을 힘이 없었고,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몬족은 새롭게 부흥 한따와디 왕국을 세웠다. 1750년 부흥 한따와디 왕국군은 따웅우 왕조의 수도인 잉와로 진격했고, 결국 1752년 잉와가 한따와디 왕국의 손에 떨어지며 266년에 걸쳤던 따웅우 왕조는 완전히 역사의 뒷막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10여년 뒤 한따와디 왕국도 슈웨보 지방의 영주였던 알라웅파야에게 멸망당했고, 알라웅파야는 미얀마 최후의 왕조인 꼰바웅 왕조를 세웠다.
[1] 현대 미얀마 북부의 주. 현재까지도 미얀마의 주류 지방들과 문화가 이질적일 정도로 당시에는 거의 다른 문화권에 속했다.[2] 그럴 수밖에 없는게 당시의 라카인 지역은 민 티카, 민 바지 등 명군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고 서쪽의 강대국인 벵골 술탄국을 처절하게 몰락[9]시킬 정도의 군사 강국에다가 수도인 므락우와 주요 무역항인 치타공을 통한 국제무역으로 부유해져 한창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3] 포르투갈 근위장교와 사냥하다가 암살당했다고 전해진다.[4] 이 전쟁을 백상전쟁이라고 부른다. 따웅우 왕조가 침략할 핑계를 만들기 위해 아유타야에게 왕권의 상징인 흰 코끼리 2마리를 내놓으라고 명령했고, 미얀마의 속셈을 훤히 알고 있던 아유타야가 이를 거절하며 일어났기 때문.[5] 필리페 드 브리투는 아라칸 왕국의 사령관으로 나레수안을 물리치기 위해 남부 버마로 왔다가 독립하고 몬족을 통합하고 자신만의 왕국을 세웠다. 미얀마에서는 파불자 응아 진까로 알려져 있는 인물로 인도 고왕의 포르투갈 부왕에게 사절을 보내 복속한 후 부왕의 딸와 결혼했던 인물이다.[6] 바인나웅 대왕의 손자. 22년간 재위하면서 바인나웅 사후 혼란스러웠던 미얀마를 재통일하는 업적을 남겼다.[7] 정확히 구분하자면 1597년부터 1752년까지[8] 그 외에도 미얀마로 도망온 남명 최후의 황제 영력제를 청나라에 그대로 넘겨준 사건 정도가 있는데, 이는 합의간에 평화롭게 끝냈기에 충돌이라 하기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