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40:27

의학전문학교


1. 개요2. 목록
2.1. 관립2.2. 공립2.3. 사립2.4. 조선 소재 의전

1. 개요

일본 제국의 정식 의학교육은 제국대학에서 이뤄졌으나 이를 위해서는 소학교(6년), 구제중학교(5년) 및 구제고등학교(3년)를 거쳐 제국대학 의학부(4년)까지 18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1] 일본 제국은 고등예비교육(구제고등학교)을 받지 않은 구제중학교 졸업생(혹은 4학년 이상 수료)을 선발해 4~5년만에 임상의사[2] 양성을 목표로 하는 구제전문학교인 의학전문학교를 별도 트랙으로 두었다. 일본위키백과 참조.

의사의 인기는 일본 제국에서도 엄청났기 때문에, 그리고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의학사 공급량이 희소했기 때문에 구제전문학교 중에서도 의학전문학교의 인기는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외지인 조선대만의 지방에 소재한 의전에까지 내지의 일본인들이 서로 입학하려고 몰려드는 입시 열풍이 휘몰아쳤을 정도였다고 한다.[3] 의학전문학교들 중 고등중학교(구제고등학교) 의학부로 편입되었던 각지의 관립학교들은 다이쇼 시대에 대학령이 공포된 후 의과대학 설립의 모체가 되기도 했는데, 이 관립6의대는 별도의 예과를 설초하지 않고 구제고등학교 졸업생을 대상으로 입시를 시행했다. 그러자 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하지 못할 성적의 고등학생들 중에는 제국대학 타학부 대신 이 관립6의대를 선택하는 경우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높은 인기에도 부속병원을 포함해 설치와 운영에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의학전문학교 특성상 공급을 급격히 늘릴 수 없었고, 의전 설치는 제한되어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만주 침략과 중일전쟁 그리고 1940년대 태평양전쟁까지 전시 체제로 이행하며 군의관 수요가 폭증함에 따라 각지에 의학전문학교가 신증설되었다.[4] 일본 제국 육군/해군후생성의 요청에 따라 1939년 5월 칙령 공포로 제국대학 의학부 7곳, 관립의과대학 6곳에 임시부속 의학전문부를 부설하기도 했다. 또 1943년에는 전시 비상 조치를 발령해 각지 의학전문학교를 추가 신설하는데 남자를 모조리 군의관으로 끌어가서 의사 부족 사태에 시달리던 상황을 감안해 관립 6개교, 공립 13개교 외에 별도로 아키타현, 후쿠시마현, 야마나시, 고치, 홋카이도 등 공립 여자의학전문학교 7곳을 따로 신설하기도 했다. 미군의 본토 공습이 심각해지는 1944년에는 치과의사를 대상으로 의학전문학교 3학년에 편입시켜 2년만에 의사를 배출하는 편입 제도를 실시했고, 1945년에는 치과의사에게 의전에서 1년 교육만 시키는 임시과 제도를 실시하다가 패전이 가까워질 때에는 아예 치과의사에게도 의사 자격 시험을 칠 수 있게 했을 정도였다. 일본 의학부의 역사 참조.

2. 목록

이하 관립의전 및 주요 공립/사립 의전과 한반도에 설립된 의전만 소개.

2.1. 관립

2.2. 공립

2.3. 사립

2.4. 조선 소재 의전



[1] 게다가 제국대학 의학부 졸업생들은 학위 취득 후에도 의학부 연구실에서 몇 년씩 연구하는 일이 다반사였다(...)[2] 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의사는 의학사로, 차별을 두었다.[3] 경성의학전문학교는 물론이고 이후 설립되는 평양의전과 대구의전, 그리고 함흥의전과 광주의전까지 일본인이 최소 과반수에서 2/3 이상을 차지할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는 당초 조선인 의학교였던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전문학교로 승격시키고 나서 일본인 수험생들이 몰려들자 조선인 비율이 떨어져서 조선의 여론이 악화되는 것을 막고자 민족별 쿼터를 설정해야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44년 개교한 전남도립 광주의전은 신입생 102명 중 조선인이 48명, 일본인이 54명이었다(참조).[4] 조선만 봐도 경성의전과 세브란스의전 밖에 없던 상황에 1933년 대구의전/평양의전, 1938년 경성여자의전, 1944년 광주의전/함흥의전 등이 줄줄이 신설되었다.[5] 1870년 설치된 오카야마번 의학관이 1880년 오카야마현 의학교로 개편. 1888년 제3고등중학교 의학부, 1894년 제3고등학교 의학부로 흡수되었다가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로 독립.[6] 1873년 개설된 사립 니가타병원이 1876년 현립 니가타병원, 1879년 니가타의학교 부속병원, 1889년 시립 니가타병원으로 개편되었고 이를 모체로 1901년 관립 니가타의학전문학교 설립하고 부속의원으로 삼았다.[7] 막부로부터 의학으로가르쳐달라는 의뢰를 받은 네덜란드군 군의관에 의해 1857년 나가사키봉행소 서역소에 설립된 의학전습소를 기원으로 한다.(현재 나가사키대학 의학부의 개교기념일) 1861년 양생소가 개원하여 막부의 핵심 병원 역할을 했으나 메이지유신 이후인 1868년 나가사키부 의학교로 개칭된 후 부침을 거쳐 1877년 현립 나가사키의학교로 개편되었다. 1887년 다시 관립으로 이관되면서 제5고등중학교 의학부가 되었으며 1890년 약학과를 설치하고, 1894년 제5고등학교 의학부를 거쳐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나가사키의학전문학교로 독립.[8] 1874년 설립된 치바현 공립병원을 모체로 1882년 설립된 현립 치바의학교가 1887년 제1고등중학교 의학부가 되어 관립으로 이관되었으며 1894년 제1고등학교 의학부를 거쳐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치바의학전문학교로 독립.[9] 1862년 설립된 카가번 종두소를 기원으로 하는 1870년 카가번 의학관이 1873년 가나자와병원이 되며, 1879년 현립의학교로 문부성 인가를 받은 가나자와의학교는 1887년 제4고등중학교 의학부가 되어 관립으로 이관되었으며 1894년 제4고등학교 의학부를 거쳐 1901년 구제고등학교 학부를 독립시킬 때 의학과/약학과로 구성된 가나자와의학전문학교로 독립.[10] 1899년 대한제국 관립의학교로 설립되어 1909년 대한의원 의육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개편.[11] 1897년 다이호쿠병원 의학강습소(臺北病院 醫學講習所)로 개설되어 1899년 대만총독부의학교(臺灣總督部醫學校), 1918년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臺灣總督部醫學專門學校)를 거쳐 1927년 다이호쿠의학전문학교(臺北醫學專門學校)로 개편.[12] 1928년 일본 최초의 관립 치의학교로 설립된 도쿄고등치과의학교(東京高等歯科医学校)가 전신.1944년 의학과가 추가되어 도쿄의학치학전문학교(東京医学歯学専門学校)로 승격.[13] 1943년 전문학교령에 의거 공립인 도쿠시마현립 도쿠시마의학전문학교로 창설, 1945년 관립 이관.[14] 1871년 오와리번에 개설된 仮病院, 仮醫學校를 기원으로 1901년 설치된 아이치현립의학교가 전문학교령에 의거 1903년 아이치현립의학교가 되었다.[15] 1870년 구마모토 번주였던 호소카와가 나가사키에서 인원을 초빙해 서양의학 병원을 만들고자 하여 1871년 네덜란드인 만스 펠트를 초빙해 번립 의학소를 창설했다. 이는 곧 폐번치현으로 관립의학소 겸 병원(통칭 古城醫學所)가 되며 세이난전쟁으로 소실된 의학교는 1878년 현립으로 재건되었다. 1891년 사립 규슈가쿠인의학부를 거쳐 1896년 사립구마모토의학교, 1904년 전문학교령에 의거 사립 구마모토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21년 공립 이관되어 현립 구마모토의학전문학교가 되었다.[16] 1905년 4월 동인회 파견 평양의학교가 시초이나 1911년 폐교. 이후 자혜의원 의학강습회를 모체로 1923년 평안남도의 지방비로 운영되는 평안남도립 의학강습소가 창설되었고, 1929년부터 전개된 평양의전 설립운동 결과 1933년 예산은 도에서 지방비로 충당하되 교수진 인선 등 인사는 총독부 학무국에서 하는 공립 평양의학전문학교 설립.[17] 1923년 대구자혜의원 의학강습소가 모체로, 1924년 4월 경상북도 도립 대구의학강습소, 1929년 경상북도 도립의학강습소가 1933년 3월 평양의전과 함께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승격.[18] 함흥의 함남도립의원을 모체로 1944년 공립 함흥의학전문학교 설립.[19] 광주의 전남도립의원을 모체로 1944년 공립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20] 광혜원제중원을 모체로 한 제중원의학교(1899년)이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편하고, 1917년 전문학교(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인가.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가 해방 이후 세브란스의전으로 복귀.[21]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로 설립되어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인가.[22] 1899년 대한제국 관립의학교로 설립되어 1909년 대한의원 의육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를 거쳐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개편.[23] 광혜원제중원을 모체로 한 제중원의학교(1899년)가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개편하고, 1917년 5월 14일 재단법인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의 인가를 받아 사립학교로 인가. 192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문학교로 인가를 받고(개교개념일 1922년 5월 15일), 1923년 2월 24일 의학전문학교 상당 학교로 지정 고시(조선총독부). 1934년 4월 10일 문부성 고시로 의사법 제1조에 해당하는 정식 의학전문학교로 지정. 태평양전쟁 발발 후인 1942년 아사히의학전문학교로 개칭되었다가 해방 이후 세브란스의전으로 복귀.[24] 1905년 4월 동인회 파견 평양의학교가 시초이나 1911년 폐교. 이후 자혜의원 의학강습회를 모체로 1923년 평안남도의 지방비로 운영되는 평안남도립 의학강습소가 창설되었고, 1929년부터 전개된 평양의전 설립운동 결과 1933년 예산은 도에서 지방비로 충당하되 교수진 인선 등 인사는 총독부 학무국에서 하는 공립 평양의학전문학교 설립.[25] 1923년 대구자혜의원 의학강습소가 모체로, 1924년 4월 경상북도 도립 대구의학강습소, 1929년 경상북도 도립의학강습소가 1933년 3월 평양의전과 함께 공립 대구의학전문학교로 승격.[26] 1928년 조선여자의학강습소로 설립되어 1938년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인가.[27] 함흥의 함남도립의원을 모체로 1944년 공립 함흥의학전문학교 설립.[28] 광주의 전남도립의원을 모체로 1944년 공립 광주의학전문학교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