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로마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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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로마 라틴어: ROMA ANTIQVA 그리스어: ΑΡΧΑΙΑ ΡΩΜΗ | ||||||||||||||||||||||||||||||||||||||||||||||||||||||||||||||||
군기 | ||||||||||||||||||||||||||||||||||||||||||||||||||||||||||||||||
트라야누스 사후 최대 강역[1] | ||||||||||||||||||||||||||||||||||||||||||||||||||||||||||||||||
고대 로마 강역의 변천사[2] | ||||||||||||||||||||||||||||||||||||||||||||||||||||||||||||||||
<colbgcolor=#9f0807> 서기전 753년~서기 476년 중세 로마: 서기 476년~서기 1479년[3] | ||||||||||||||||||||||||||||||||||||||||||||||||||||||||||||||||
시대사 | ||||||||||||||||||||||||||||||||||||||||||||||||||||||||||||||||
로마 왕국 기원전 753년~기원전 509년 | ||||||||||||||||||||||||||||||||||||||||||||||||||||||||||||||||
로마 공화국 기원전 509년~기원전 27년 | ||||||||||||||||||||||||||||||||||||||||||||||||||||||||||||||||
로마 제국 기원전 27년~기원후 1453년 | ||||||||||||||||||||||||||||||||||||||||||||||||||||||||||||||||
로마의 잔재 기원후 1453년~기원후 1479년 | ||||||||||||||||||||||||||||||||||||||||||||||||||||||||||||||||
정무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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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임 정무관 | 독재관 | |||||||||||||||||||||||||||||||||||||||||||||||||||||||||||||||
입법부 | 원로원[A] | |||||||||||||||||||||||||||||||||||||||||||||||||||||||||||||||
주요 정치인 및 황제 | 로물루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그라쿠스 형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트라야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1세 테오도시우스 1세 | |||||||||||||||||||||||||||||||||||||||||||||||||||||||||||||||
최대 인구 | 추정치 5,680여만 명[5] | |||||||||||||||||||||||||||||||||||||||||||||||||||||||||||||||
수도 | 로마[6] 콘스탄티노폴리스(330년 이후[7]) | |||||||||||||||||||||||||||||||||||||||||||||||||||||||||||||||
최대 면적 | 550만 km²[8] | |||||||||||||||||||||||||||||||||||||||||||||||||||||||||||||||
서방영토 상실 이후 | 오도아케르 왕국 동로마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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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시대의 로마는 로마 왕국, 로마 공화정, 로마 제국으로 이어져왔다. 이후 전성기[9]를 거쳐 최전성기에 이르렀던 로마는 지중해 세계에서 오늘날의 미국과 비견될 정도인 그야말로 최강대국이었다.[10]
본래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 라틴계 세력의 정착지인 로마로 시작해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했기에 그들의 근원지인 로마가 그대로 국가의 이름이 되었다. 고대 로마의 역사 전체를 Imperium Romanum이라고 칭하기도 하고, 흔히 이를 한국어 '로마 제국', 영어 Roman Empire로 번역한다.[11]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서유럽에 대한 로마 제국의 통제력은 유의미하게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서로마 멸망을 고대의 끝으로 보는 시각이 현재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기에 고대 로마라고 하면 대개 서로마 멸망까지를 기준으로 한다. 이후 로마 문명은 서로마 상실 이후에도 여전히 동로마 제국으로 살아남아 로마는 이후 중세의 끝 1453년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2. 영향력
로마는 그리스 문명과 더불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럽 문명의 틀을 마련한 국가(또는 문명)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유럽 문명의 가장 중요한 뿌리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융합이라고 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융합이 일어난 곳이 로마 제국이기 때문이다.황제의 계보와 라틴어, 로마자, 판테온으로 대표되는 건축물, 로마법, 로마 신화와 그리스도교 등 수없이 많은 면에서 이후의 유럽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유럽 제국들의 롤모델은 항상 로마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나선 세력이 20세기 중반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였으니 그 영향력이 상당히 최근까지 이어졌다. 황제(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뜻하는 유럽 각국의 언어도 거의 대부분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북유럽 국가들과 중앙유럽 일부 국가들을 제외하면, 대서양 연안에서 러시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체와 근동, 북아프리카 상당 지역이 직·간접적으로 로마의 영향권 아래 놓였었다. 서구 사회 전체가 직계든 방계든 결국 로마 제국의 후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심지어 로마 제국의 분열이 있고 나서 서로마 제국은 서유럽을, 동로마 제국은 동유럽을 형성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중세 초기의 서유럽은 서로마 제국의 통치권Imperium을 계승한 프랑크 왕국이 주도하고, 그 이후는 또다시 이 통치권Imperium을 계승을 자처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이 컸다. 신성 로마 제국은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하기 직전인 18세기까지도 유럽 역사에 영향력을 남긴다. 이렇게 로마 제국은 서로마 상실 이후에도 유럽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동유럽 역시 로마의 문화적 영향력을 지대하게 받았다. 북유럽 일부 국가라고 해도 북유럽의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발트해 연안도 제대로 된 국가 형태는 없었다고 보지만 로마와 담비, 모피 교역 등으로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로마의 영향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이슬람 제국에도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함께 문화적,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무엇보다 오늘날 대표적으로 러시아 연방이 공식 상징으로 쌍두독수리를 내세우는 것 또한 로마를 계승하려는 목적도 없지 않다.
로마는 고대에만 있다 사라진 국가가 아니다. 현재는 '비잔티움 제국'이라고도 하는 당시의 동로마 제국은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었고 서로마가 소멸되면서 로마 제국이 멸망해 사라진게 아닌 서방 영토만을 상실해 동방에 버젓이 남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국가의 공식 명칭도 'Imperium Romanum'으로 로마 제국이었다. 그 외에도 신성 로마 제국,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이 로마의 계통을 주장했다.[12]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는 후대의 공화주의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고대 아테네가 가지는 위상을, 비슷하게 공화주의 이데올로기에서는 로마가 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한 고대 로마의 심장부인 로마는 오늘날까지도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로서 크나큰 위상이 있다.
또한 라틴문자가 전유럽에 퍼지고 다시 전세계에 퍼져 오늘날 지구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문자가 되었는데, 우리가 보통 알파벳이라 부르는 문자가 바로 그것이다. 자세한건 로마자 문서 참조.
하지만 혈통상으로는 유럽의 시조가 되지 못하고, 선대의 그리스와 후대의 게르만, 슬라브 왕국들, 그리고 더 넓게 보면 아랍인과 튀르크인, 페르시아인이나 한족이 현대까지 후신국을 이루어온 데 반해 건국 초기 원조에 가까웠던 라틴족은 다민족 제국의 성격이 짙어지면서 그들의 영향을 받은 언어군을 분류하는 말로만 남았고 라틴어는 화자를 거의 완전히 잃었으며 로마는 5세기 및 15세기 이후로 국가로써의 명맥이 끊기고 이탈리아 중부에 위치한 도시만의 이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끽해야 정치적으로 좀 더 돌려쓰이고 루마니아의 국명과 언어에 영향을 준 정도이다.
혈통과 언어 상으로도 현대 유럽까지 영향력이 쭉 이어져오고 있으며, 또한 후신국도 현대에 이어져오고 있다.
간혹가다 '건국 초기 원조 라틴족'의 혈통과 언어가 순수하게 이어지지 않았다는 걸 근거로 로마의 언어와 혈통이 단절되거나 후대에 영향력이 없다는 주장이 나돌기도 하는데, 똑같은 잣대로 따지면 이는 다른 국가, 다른 민족에도 그대로 똑같이 적용된다. 일단 한국부터 고조선을 맨 처음 건국한 부족의 혈통과 언어가 현대 한국인으로 순수하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미 고조선 시대 기록에서부터 수많은 한족이 전란을 피해 만주와 한반도로 이주했고 고조선이 이들을 귀화시켰다고 나와있다. 한족의 경우는 그냥 중국사의 그 수많은 유목민 침공만 생각해 봐도 초창기 황하 강변에서 문명을 일으킨 부족의 순수성 유지는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상나라의 다음 왕조인 주나라부터 서쪽에서 온 유목민계 이민족으로 추정되고 있는 마당이다. 고립된 섬나라인 일본도 죠몬계 민족과 도래계 민족의 혼합으로 일본 역사가 시작되었다. 다른 문명권에 비해 멀리 떨어지고 고립된 위치를 가진 동북아 3국도 이럴진대 다른 문명권들은 말할것도 없다.
아무튼, 로마인의 혈통은 기존의 켈트족과 이후의 게르만족과 섞이며 거의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고, 후신국은 당연히 현대 이탈리아가 떡하니 존재하고 있으며,[13] 라틴어가 사어가 된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로망스어군으로 변화/분화되는 와중에도 교회라는 존재 덕에 고대 제국 시절 언어도 따로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고대 한국어가 현대 한국어로 변해오는 긴 역사 속에서 유독 무당들이 굿할 때 고대 한국어만 쓰는 것을 고집해온 덕분에 고대 한국어가 오늘까지 보존되었다는 격이다. 이 경우, 고대 한국어는 사실상 쓰는 이들이 없는 사어로 분류되지만 그렇다고 그게 고대 한국인들의 언어가 현대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명맥이 끊겼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즉 라틴어는 소멸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변화/분화되었고, 이와 별개로 고대 시절의 원형 라틴어 역시 교회라는 집단에 의해 따로 보존되었다는 뜻이다. 즉, 혈통과 언어 측면에서도 로마의 영향력은 유럽에 광범위하고 진하게 현대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3. 역사
공학 분야에서도 로마는 월등했다. 무엇보다도 로마의 진정한 힘은 현재의 유럽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화적인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일례로 현재의 서양 법률은 그 기본을 로마법에 두고 있고, 그 법의 영향을 받아 법률을 만든 동양의 중국, 한국, 일본에 이르기까지 로마법이 뿌리내리지 않은 곳은 없다.
라틴어도 비록 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이들이 없지만, 여전히 각종 학술 용어로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이렇게 학술, 종교적 사용 이외에도 흔히 알파벳으로 부르는 라틴 문자, 혹은 그 변형을 사용하는 유럽 언어는 라틴어의 영향을 받았다. 일상 용어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곳도 많지만, 조금만 학술적 용어로 깊이 들어가보면 라틴어가 뿌리 깊이 정착했다.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사용하는 나라나 민족이 없으므로 사어지만, 영국의 사립 학교 등에서는 아직도 버젓이 주요 과목으로 남아 있는 데다 13+ 시험 과목이기도 하다. 가톨릭의 트리엔트 미사 때 사용되는 언어고 서양 각국의 언어에 그대로 쓰이는 표현도 많으며 멋 부릴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서민 라틴어에서 파생된 각각의 로망스어군의 언어들 모두 라틴어가 변형되어 형성된 언어들이라 볼 수도 있다.
현재 이탈리아나 남유럽, 동유럽 일부 국가들의 유서 깊은 도로 중 돌바닥이 깔린 것은 로마 시대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군은 주변 소국에 비해 절대 작은 군대가 아니었지만, 영토 크기가 크기인지라 여러 곳에 상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유사시 발빠른 파견과 물류 수송을 위해 도로가 필요했다. 로마의 도로는 현대의 모래-자갈-콘크리트-아스팔트로 두껍게 짓는 도로에 견주어도 그 강도가 뒤지지 않았다.
3.1. 로마 왕국
자세한 내용은 로마 왕국 문서 참고하십시오.3.2. 로마 공화국
자세한 내용은 로마 공화국 문서 참고하십시오.3.3. 로마 제국
자세한 내용은 로마 제국 문서 참고하십시오.4. 통치 체계
처음에는 왕정으로 시작했으나 왕을 축출하고 공화정이 되었고, 이 공화정 체제는 원칙상 동로마가 망할때까지 폐지되지 않는다.그러나 실질적으론 옥타비아누스가 지존Augustus의 직함을 얻고 나서는 제정 로마로 따로 분류된다. 이 시기에는 공화국의 수령Princeps이 통치자Imperator이자 지존Augustus으로서 사실상의 왕 노릇을 했고,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로마의 수령Princeps을 그냥 왕Basileus이라 불렀다. 한자어로도 황제(皇帝)라 번역한다.
황제의 후계자가 실제 피로 이어진 경우도 많았지만, 대개는 황제가 후계자를 양자로 삼고 계승하는 형식을 많이 취했다. 기본적으로 로마의 황제권은 '가문'에 귀속되는 '자산'과 같은 취급을 받았으며 또한 양자도 가문을 계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일부일처제에서 친자로만 부자 상속을 계속 이어가는 것은 확률적으로 보아 상당히 어렵다.
동양에서 장자 상속 등으로 원칙이 세세하게 규정되었던 것과 달리 로마에서는 누가 다음 황제가 될 것인지 마지막까지 분명한 원칙을 세우지 못했다. 대체로 황제가 다음 황제를 지명하는 식이었다.[14] 이러한 방식은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함으로써[15] 오현제 시대의 번영을 가져올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현명한 사람'이 아니라 군벌이나 권신처럼 힘 있는 사람이 제위를 계승하는 폐단을 낳았다. 황제의 정통성을 뒷받침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므로 제위가 제대로 계승되지 않거나 계승한 황제가 함량 미달인 경우, 군 지휘관들이 제각기 황제를 자칭하는 혼란과 내전도 가져올 수 있는 양날의 검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혼란의 시대가 훨씬 길었다. 이러한 제도상의 허점과 그에 따른 혼란을 생각하면 로마 제국이 오랫동안 건실하게 유지되었음이 놀라울 정도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러한 체제의 미흡성이 명분보다 실력을 우선시하는 로마인의 사상과 만나 로마의 존속을 위협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천 년 동안 연명할 수 있게 만들기도 했다. 오현제 이후의 제정 로마는 갈수록 악화되는 기상 환경과 이민족의 침략, 로마 사회 특유의 고질적인 문제나 경제적 위기가 총체적으로 합쳐진,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부패해가는 시체'였다는 것이 (당대 지식인들에게도, 후대 학자들에게도) 중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고대에 천년, 중세에 천년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무능한 황제로 인해 혼란기가 찾아와도 끝내 유능한 황제가 나타나서 혼란을 종식하고 반석 위에 체제를 정비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보면 이런 것들을 보완할 정도의 법 제도나 시스템이 그만큼 발달했다는 의미도 될 수 있다. 실제로 로마는 함량 미달의 황제가 제위에 올라도 제국의 시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민생에 상당한 관계가 있는 조세 제도도, 로마는 지방 조세 행정에 국가가 거의 개입하지 못하고 각 속주 총독들의 역량과 징세청부업자들의 수완에 의지해서 황제의 역량에 따라 민생의 변화가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작용하지 못했다고 보기도 한다.[16]
이후 황제(임페라토르,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뜻하는 서양 각국의 단어가 로마 최고 통치자Imperator를 뜻하는 말의 변형이었는데 '엠퍼러(emperor)', '카이저(Kaiser)', '차르(Царь)' 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엠퍼러는 통치권Imperium을 쥔 통치자를 의미하는 임페라토르(IMPERATOR)에서 유래했고, 카이저나 차르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이름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에 카이사르를 꼭 집어넣었다. 원래는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정당성 부여의 형식으로 쓰였는데 나중에는 거의 황제라는 뜻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황제Imperator를 내세울 수 있는 나라는 오직 로마의 통치권Imperium[17]을 계승했음을 자처한 국가들인 만큼 로마는 임페리움의 상징이었다. 유럽에서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기 주체적으로 관습을 탈피하고 칭제하기 전까지 로마와 관계 없는 그 누구도 황제Imperator를 자처하지 못했고, 19세기에 유럽 최강국이었던 영국의 왕도 유럽 바깥에서 '인도 제국의 황제' 자리를 얻어오기 전까지는 공식적으로 황제로 칭하지 않았다.
5. 군사 체계
자세한 내용은 레기온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로마군 문서 참고하십시오.
초기 로마 군대는 규모가 작은 민병대였다. 이 당시에는 5개 부대로 이루어졌었는데, 3개 부대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호플리테스 부대, 2개 부대는 경보병 부대였다. 왕정 초기 로마 사회는 30개 씨족 사회(Curia)로 구성되었는데, 쿠리아를 3개로 분할한 트리부스(Tribus)를 징집 단위로 삼았다. 왕정 말기에는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기존 씨족 사회에 기반한 트리부스를 없애고 지리적 행정 구역을 구획으로 트리부스를 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트리부스에서 징집된 병사들을 백 명 단위로 나누어 부대를 편성했다. 이를 백인대(Centuria), 이 부대의 지휘관을 백인대장(Centurio)이라 불렀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 삼니움족과의 전쟁에서 120명의 병사들을 40명씩 3열로 정렬시키는 마니풀루스 전술이 고안되어 로마 군단은 기원전 3세기부터 이 전술을 채택한다. 이 전술을 채택한 로마 군단은 한 부대에 120명씩 10개 부대로 이루어졌으며, 분대를 나누어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었다.
공화정 시대의 군단은 초기 시절보다 규모가 성장했으며, 왕이 군 통수권을 가지던 왕정 시대와 달리 집정관이 군 통수권을 가졌다. 그리고 3개 중보병 부대(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와 1개 경보병 부대(벨리테스), 기병 부대(에퀴테스)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의 군대는 재산을 소유한 시민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징집된 이들은 전쟁에 필요한 장비를 자비로 충당하곤 했다. 부유한 시민들은 스스로 말을 구해 기병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도시에 거주하는 시민, 자유민, 노예는 웬만해서는 징집되지 않았다.
기원전 2세기 이후 로마의 시민 계층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로마 군단은 인력 소요가 증가하여 예전보다 더욱 약화되었는데, 기원전 10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의해 군제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개혁에 따라 로마 군단은 병사들에게 최초로 급료를 주게 되었고, 재산 하한선을 낮춰 '프롤레타리'라 불리는 재산이 별로 없는 시민들과 도시 거주민들까지 징집 대상을 넓혔으며 이들의 장비를 국가에서 충당해주고 이들이 제대한 후에는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기존 마니플레스 전술에서 대대(코호르스) 전술로 개편하여 한 부대에 120명이 아닌 480명으로 10개 대대를 편성했으며 한 대대는 80명으로 이루어진 센추리아 6개 중대로 조직되었다. 이 개혁은 군대를 보충하는 데 큰 효과를 거두었지만 지휘관이 돈을 주고 병사를 고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지휘관이 돈을 통해 군 통제권을 과도하게 가지게 되었다. 이런 방식의 개혁은 군사적 역량을 갖춘 정치인들 사이의 내전이 일어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의 통치자로 집권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옥타비아누스가 황제에 오르고 제정이 성립된 후 로마 군단은 기존 민병대 체계에서 상비군 체계로 개편되었으며 황제 직속 친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가 편성되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의 영토가 계속 확대됨에 따라 속주를 관리할 병사가 필요해지자 속주 시민들로 이루어진 보조군(아욱실리아)이 편성되었다. 갈리에누스의 개혁으로 인해 로마군은 국경에서 떨어진 지점에서 전략적 임무를 수행하는 전략 예비라는 개념이 생겼다. 제정 시대의 군단은 전반적으로 황제가 통수권을 가졌으며, 군단장(레가투스)을 통해 권한을 행사했다.
5.1. 전쟁
6. 사회
6.1. 언어
자세한 내용은 라틴어 문서 참고하십시오.6.2. 종교
자세한 내용은 로마 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6.3. 로마인
자세한 내용은 로마인 문서 참고하십시오.6.4. 계급
- 파트리키: 법적으로 평민(플레브스)과 신분이 구별되는 전통 귀족 신분이다. 공화정 초기에는 이 신분만이 집정관이 될 수 있었다가 평민 계급의 반발로 기원전 367년부터 집정관 한 명이 평민에게 개방되었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학계에서 반론이 제기되기도 한다. 2차 포에니 전쟁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집정관 두 명이 모두 평민이라면 파트리키 귀족들의 항의가 들어올 정도였지만, 공화정 후기로 갈수록 집정관 중 한 명이 파트리키라는 관습도 유명무실해졌다. 호민관은 원래 파트리키로부터 평민의 권익을 수호하는 직위였기에 파트리키는 호민관이 될 수 없었다.
- 노빌레스: 파트리키는 아니지만 집정관급 공직을 대대로 맡아온 평민 귀족 가문을 의미하기도 하며, 파트리키 구분이 큰 의미가 없어진 이후 파트리키와 평민 귀족을 아울러 이르는 신(新)귀족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보통 집정관을 배출한 적이 있는 가문 소속이면 노빌레스로 쳤다.
- 노부스 호모: 직역하면 새로운 사람, 신참자를 뜻한다. 보통 부모 이상 세대가 아닌 자기 대에 스스로의 힘으로 원로원에 입성했거나 가문 최초로 집정관직에 오른 사람을 의미하며, 마리우스나 키케로가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공화정 시기에 노부스 호모는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그 수가 적었다.
- 에퀴테스: 경제인 및 관료계층으로 원로원 계급 아래의 차상위 계급이었다. 기사계급이라고도 한다.
- 플레브스: 평민 신분. 파트리키가 아닌 모든 신분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귀족도 기사계급도 아닌 피지배계급을 뜻하기도 한다.
- 해방노예
6.5. 씨족과 가문
6.6. 클리엔텔라
자세한 내용은 클리엔텔라 문서 참고하십시오.7. 제도
7.1. 정치
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의 정치제도 문서 참고하십시오.7.2. 법률
자세한 내용은 로마법 문서 참고하십시오.7.3. 지방 행정
자세한 내용은 속주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지방행정 문서 참고하십시오.
7.4. 시민권
자세한 내용은 로마 시민권 문서 참고하십시오.7.5. 동화 정책
공화정 시대 로마의 식민 정책은 시대를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관용적이었다.[18] 이들이 점령한 도시국가와 속주에는 동맹국의 지위와 라틴 시민권[19]을 부여하고, 점령지의 귀족 가문의 통치를 그대로 인정했다. 그 이후 그들에게 요구하는 조건은 단 하나, 동맹국으로서 로마의 전쟁에 같이 참여하라는 것이었다. 나중에는 이런 동맹시들 및 속주들이 로마 시민권을 요구했는데, 이걸 들어줘서 켈트족에게도 시민권을 주고 원로원 의석까지 준 게 카이사르다.기존 피점령 집단의 존재와 통치권을 그대로 인정함으로서 그들의 반발은 최소화되었으며, 이후로도 로마는 스스로 그들의 자치 문제에 간섭을 자제함으로써 피정복민들의 지배층이 그들이 누리던 특권이 침해받는 일이 그다지 없게 했다. 로마와 동맹하여 같이 싸우는 것이 그들의 안보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피정복민들은 로마의 패권을 자발적으로 인정하고 그에 안주했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제국화되어 갔다.
이러한 관계는 로마에게도 유리했는데, 각지의 다양한 특색을 가진 보조병은 주로 중보병을 편성하는 로마군에 다채로운 병과를 제공하여 군사력이 강화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맹국들에게 일괄적으로 제공받는 보조병은 독자적으로 최대 8만 남짓한 20개 군단의 동원력을 가진 로마가 이것의 1.5배에 달하는 병력을 추가로 동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 결과 로마는 자비로 용병을 고용하는 카르타고나, 자비로 왕국의 시민병을 징집해야 하는 동방 국가를 능가하는 물량 동원력을 갖출 수 있게 된다. 군사적 이점뿐만 아니라 정책상의 편리함 또한 제공해 주었는데 점령지를 직접 통치하기 위한 관료제를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이를 갖추기 위한 비용을 크게 절감시켜 주었으며 각 도시의 지배 집단이 스스로 하는 통치는 지배의 효율을 높여 주었다.
결과적으로 로마는 그들의 영역을 빠르게 확장할 수 있었으며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보존한 지중해의 문명권 모두를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 넣는 데 성공하게 되면서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기에 성공했다. 정복하는 일보다 점령해 굳히는 게 더 어렵고 많은 물량이 소모되는 일임을 감안하면, 로마는 다양한 문화를 가진 피정복민들을 그들의 세력하에 빠르게 편입할 수 있었다. 이런 정책의 유리함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수행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단기간에 넓은 갈리아 지역을 제패함으로써 다시 한번 보여 주었다. 이러한 공화정 로마의 정책은 당시에 팍스 로마나라 불리는 '로마 주도의 평화'라 칭송받았다. 이런 정책은 로마가 지중해 문명권을 통합한 뒤 천천히 도시국가에서 영토 전체에 크게 기반을 두는 단일국가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버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제정 말기에는 여타 제국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였지만 공화정 당시 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다른 도시국가들로 구성된 지역을 정복하고 지배할 때 선택 가능한 대외 정책으로서는 유리한 면이 있었다.
8. 문화
8.1. 이름
자세한 내용은 로마식 작명법 문서 참고하십시오.8.2. 건축
로마의 정치적, 문화적 심장부였던 포로 로마노의 모습 |
로마 건축물은 고대 그리스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계승했지만, 동시에 여러 변형도 가해졌다. 특징은 시원시원한 기둥과 크게 3가지로 분류되는 현상적인 order 등이 있으며, 신전 건축의 경우엔 전문가가 아니라면 차이점을 찾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작 남-서유럽의 구 로마 제국 영토에는 양식 변화와 재건축, 파괴 등으로 인하여 온전히 보존된 로마 건축이 생각보다 많지 않으며, 오히려 아나톨리아 반도, 현재의 튀르키예에 훨씬 남아 있는 편이다.
당시 건축물은 현대 기준으로 봐도 굉장한 크기와 화려함을 자랑했으며, 동서 대분열 이후 중세시대 건축 양식이 크게 변화는 와중에도 부분적으로나마 양식은 계승되었고, 18-19세기 즈음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써 다시 부활했다.
수많은 유럽 도시들이 로마 시대에 만들어졌다. 대개 군사 기지나 로마 이주민들이 세운 마을이었는데 군단병이 곧 시민이었던 로마 군제의 특성상, 식민지에 정착하는 로마인들은 현지인과 결혼한 로마 군인인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영국과 프랑스의 수도가 된 런던(최초에는 론디니움이라는 이름이었다)과 파리(최초에는 루테티움이라는 이름이었다)도 로마가 건설하거나 도시화한 곳이다.
이처럼 로마가 유럽 각지에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인 규모의 건물들을 짓고 다녔기에, 당시 북방 민족들이 로마의 건물들을 보고 거인과 난쟁이에 대한 신화를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로마의 콘크리트는 '포졸리나'라고 해서, 금이 가거나 훼손되면 그 부분에 규산칼슘이 생성돼서 틈이 메워지는 장점이 있었다.[20] 그 기술은 동로마(비잔티움) 시대까지는 유지되었으나 동로마 멸망 이후로 실전되었다가[21] 1800년대에 인공 포촐란 시멘트로 복원되었다. 콘크리트의 원형은 고대 이집트인들이 가장 먼저 개발하여 사용했으나, 콘크리트 건축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한 문명은 로마였다.
로마의 가도들에는 진짜로 틈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중세를 거치면서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돌을 빼갔음에도 아직도 상당히 외관이 그럴싸하다. 기나긴 세월을 거처 남은 돌덩이도 풍화되었을 터임에도 비교적 돌 도둑이 적었던 가도들은 옛날 모습이 지금 모습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꽤 멀쩡하게 생겼다. 대부분의 이탈리아의 간선 국도는 물론 예전 로마 제국 땅이던 곳 역시 로마의 가도에 아스팔트나 철도만 깔고 쓸 정도이다.
오늘날 에스파냐에는 로마 제국이 건설한 다리가 아직도 있다. 에스파냐 카스티야이레온 자치 지역 세고비아주의 주도 세고비아에 있다. 조금 풍화되긴 했어도 멀쩡하게 생겼다. 심지어 지금까지 고쳐서 쓴다. 당장 버스나 기차 내려 시내 중심가 시야를 압도하는 크기로 보존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세고비아뿐만 아니라 스페인 전체의 랜드마크로 쓰인다. 로마 제국에는 40만 km에 달하는 도로(로마 가도)가 있었는데 그중 8만 km가 포장 도로였다. 비슷한 시기 중국 한나라에는 비포장도로만 3만 5천 km가 있었고, 포장도로는 전무했다.
고대에도 그렇고 중세에도 숲만 가득했던 옛 갈리아, 게르마니아 지역에 로마는 도시를 건설했다. 로마에서 시민들에게 인정받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정복 성과를 내고 개선식의 영광을 받는 것인데, 이걸 위해 정복한 땅들은 죄다 숲만 가득한 미개척지였다. 하지만 로마는 거기다가 그냥 도시를 건설해 해결했다. 나무만 있던 많은 곳들을 지금의 도시로 바꿔놓는 기반을 로마가 마련한 것이다. 로마가 해당되는 땅들에 도시를 건설한 덕분에 중세로 이어지는 문명이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물론 엄밀히 말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도시화하고 개간지로 만든 것은 중세인들의 힘이다. 지중해권과 달리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지방의 도시 역할은 지역 거점에 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로마인들이 건설한 도시의 영향력도 한정적이었다. 결국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에서 로마의 유산인 대농장들은 로마가 쇠락하면서 이에 따라 쇠퇴하고, 그에 의존하던 로마의 도시도 쇠퇴를 면치 못했다. 중세 농업 체제의 발전은 북부 유럽에 걸맞은 농경 방식 도입과 발전, 지속적인 기술 개량,[22] 소규모 촌락 공동체에 의한 적극적인 숲 개간이 본질적인 이유였다.
로마의 과학적 수학적 성과도 괄목할 만한 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즉 공학이나 실용성에서는 많은 발달이 있었지만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그리스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주장. 오히려 고대 그리스보다 순수 과학은 쇠퇴했다는 주장도 있다. 예를 들면 계통분류학에서 동물학의 아리스토텔레스, 식물학의 테오프라스토스라는 두 거장이 있었으나, 로마 제국의 대 플리니우스는 그저 이 둘을 베끼기에만 급급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의 근시안성으로 그들은 단면적이며 모방적인 이류의 문화를 낳았다. 수세기 동안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의존함으로써 영감과 독창적 사고의 결함을 보충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토지 측량을 착수할 때에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전문가들을 불러들였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달력을 개혁하고자 할 때, 알렉산드리아인을 초빙했다. 수학, 과학, 다른 예술 분야에서 로마인들이 이룩한 업적이 정말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은, 추상적 사고가 실용주의에 의하여 추동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가치 없다고 비난하는 '실용적'인 사람들에게는 경종이 될 만한 본보기이다.
모리스 클라인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中
위 글은 추상적인 분야에서의 그리스의 업적이 뒷받침되어 가시적인 분야에서 로마의 업적이 나왔음을 얘기하고 있다.모리스 클라인 <수학, 문명을 지배하다> 中
8.3. 복식
기본 복장으로는 튜니카와 샌들이 있다. 이 중에서 튜니카는 허벅지까지 내려간 오버핏 티셔츠라고 보면 되며, 입은 뒤엔 허리띠를 그 위에 두른다. 샌들엔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이 중 칼리가이Caligae는 군화로, 끈이 발목까지 덮는다.이외에 귀족들은 공적인 복장으로 토가를 입었다.
8.4. 문학
키케로, 아우구스투스 시대를 황금기, 그 이후부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시기(14~138)를 은세기라고 부른다.황금기 시절에 유명한 문학가로는 베르길리우스가 있다. 여러 내전을 종식시키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를 찬양한 아이네아스가 유명하다. 로마 제국의 검소한 농경 문화와 현재를 즐기자는 에피쿠로스학파의 영향을 받은 호라티우스의 서정시, '연애의 기술'을 창작한 오비디우스의 문학도 유명하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질에 관하여는 에피쿠로스 사상을 시 형식으로 나타낸 작품이다. 카이사르 역시 문학쪽으로 유명했다. 대표저서로는 갈리아 전쟁기, 내전기 등이 있으며 이 두 기록은 카이사르가 본인의 행적을 수려한 문장을 통해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여 1차 사료로써 훌륭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이 외에 카이사르의 작품들은 아우구스투스가 불태워버려 남지 않았다.
은세기의 대표적인 문학가로는 세네카가 있다. 세네카는 그리스 비극을 모방하여 몇 편의 비극을 제작했으며 로마 제국의 타락을 풍자한 유베날리스, 마르티알리스도 유명하다.
산문 문학으로는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고 일컬어진 사티리콘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내용이 많이 실전되었다. 사티리콘의 풍자성은 이후 스페인의 피카레스크 문학으로도 이어진다.
8.5. 미술
자세한 내용은 로마 미술 문서 참고하십시오.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은 로마 제국답게 대체로 그리스 예술을 계승한 작품이 많으며 독자적인 미술 양식인 모자이크를 남겼다.
8.6. 조각
이상미를 구현하려는 그리스와 격정미를 구현하려는 헬레니즘 시절의 조각상과는 다르게 사실미를 구현하려는 성향이 짙다. 황제의 조각상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후기에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흉상에서 보이듯 인간미, 사실미보단 절대자, 신의 초월적 형상을 나타내려는 경향이 생겨나기도 했으며 이는 그리스도교의 절정기인 중세시대의 조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8.7. 오락
자세한 내용은 검투사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전차경주 문서 참고하십시오.
8.8. 성문화
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성문화 문서 참고하십시오.9. 유산
9.1. 로마의 황제위를 자처한 국가
자세한 내용은 제3의 로마 문서 참고하십시오.9.2. 언어
자세한 내용은 로망스어군 문서 참고하십시오.로마는 유럽 문화권의 언어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라티움(라치오)에서 시작된 라틴어는 고대 로마의 공용어로서, 지중해가 로마의 호수가 된 1세기~4세기까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서로마 제국이 476년 먼저 소멸한 후에도 이베리아, 갈리아, 이탈리아, 다키아에서 민중 라틴어가 살아남아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루마니아어가 되었다. 이와 같이 라틴어에서 갈라져나온 언어들을 로망스어군이라고 칭한다.
고대 로마의 '언어적 후예'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15세기에 가장 먼저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중남미를 정복했고, 라틴계 언어를 쓴다고 하여 라틴 아메리카라고 불릴 정도로 로마의 라틴어가 남긴 유산은 매우 크다. 프랑스어 또한 오랜 기간 동안 국제정치의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이탈리아어는 예술 분야에서 굉장히 많이 사용된다.
9.3. 문자
자세한 내용은 로마자 문서 참고하십시오.이집트 상형문자를 개량한 시나이 문자를 개량한 페니키아 문자를 개량한 그리스 문자를 로마인들이 개량해서 만든 로마자를 개발해 사용했다. 초기에는 K, J, U, W 등이 없었고, Augustus는 AVGVSTVS와 같이 표기했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를 장악하며 로마자 또한 퍼져나갔고, 게르만족, 서슬라브족 등에게 퍼지면서 유럽의 국가들 절반 이상이 로마자를 쓰게 되었다.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로마자는 전 세계의 절반을 장악하게 되었다. 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의 모든 국가가 유럽인들의 로마자를 받아들였음은 물론이고,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많은 국가들이 사용하며, 베트남은 기존의 불편한 쯔놈을 포기하고 로마자를 개량한 쯔꾸옥응으를 채택했다. 튀르키예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아랍 문자 대신 로마자를 채택했다.
동구권, 캅카스, 중동, 남아시아 및 일부 인도차이나 국가, 동아시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쓰인다고 봐도 무방하다. 로마자를 국문(國文)으로 쓰지 않는 국가들도 로마자를 반드시 가르칠 수밖에 없는데, 세계 최강국인 미국이 로마에서 사용하던 바로 이 로마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좋든 싫든 배울 수밖에 없다. 정보화 시대 이후에는 한자를 사용하는 중국어와 일본어도 로마자를 입력해서 한자나 가나를 출력하는 것이 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9.4. 유적
9.5. 그 외
10.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들
자세한 내용은 로마의 역대 황제 문서 참고하십시오. Daniel Voshart가 800장이 넘는 이미지들을 사용하여 머신 러닝 기법을 통해 사진으로 복원한 로마의 황제들. (출처) (아우구스투스~누메리아누스·카리누스) |
11. 로마의 이모저모
- 로마 시절에 너무 잘나갔는지, 후손인 이탈리아인들은 세기말 막장 군대로서 새로운 전설들을 쌓고 있다. 오죽하면 로마인들 중 반은 국가 세우러 가다 죽고, 반은 국가 지키다 죽어서 이탈리아인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농담으로 하는 말이고 로마를 이탈리아인만의 국가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대한 오류이긴 하다. 그리고 로마의 모든 신민이 라틴어로 대화한 것은 아니다. 대개의 지역은 토착어를 그대로 활용했고, 특히 그리스를 포함한 동부 지역은 라틴어를 거의 쓰지 않았다. 여기에 로마인들이 공부한 문학의 대부분이 그리스어 작품이라 적지 않은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 당장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만 하더라도, <명상록>을 라틴어가 아니라 그리스어로 썼을 정도. 그리고 카라칼라 황제가 로마의 심장부에 건설한 대형 욕장에 부설된 공공 도서관에는 크기가 같은 방 두 곳에 라틴어 서적과 그리스어 서적이 각각 배치되었다는 점만 봐도 제국에서의 그리스어 위상이 대단히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예수만 하더라도 그의 모국어는 당시 중동 지역 토착언어인 아람어였으며, <신약성경>과 초대 교부들의 다수 문헌이 학술 언어인 그리스어로 서술되었다. 다만 그렇다고 라틴어가 완전히 학술적으로 찬밥이었던 건 아니고, 서로마 제국 말기 사람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어로 저술 활동을 했으며 그리스어와는 친숙하지 못했다(『고백록』 1, 13, 20).
- 제국이 된 이후에는 로마의 인구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지만 농지는 전쟁 등으로 버려지거나 했기 때문에, 상당한 양의 곡물을 지중해의 뱃길을 통해 수입해야 했다. 이 시기에 로마로 오는 식량의 주요 생산지는 지중해를 통해 식량 공급을 하기에 용이했던 북아프리카와 이집트였다.[23] 그렇다고 이탈리아의 농사가 완전히 폐농한 건 아니고, 밀 농사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값싼 곡식과 경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밀 대신 포도나 올리브 등의 재배에 주력하게 되었다. 물론 개중에는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밀 농사를 짓는 농장도 없지 않았고 기본적인 식량이었기 때문에 양으로 따지면 언제나 주류였다.
- 유럽 문화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로마지만 의외로 독서 문화 자체는 그렇게 발달하지 못했다. 로마 시대에는 프린터나 복사기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하다 못해 인쇄술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일일이 필사해야 했으며 당시에 책이라는 물건 자체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24] 로마 시대에 책은 어디까지나 장식품으로 여겨졌으며, 독서보다는 연설 능력이 더 높게 평가되었고, 철학자들의 능력도 독서와 강연을 통해서가 아닌 연설과 대화를 통해 길러졌다. 심지어 일자무식인 장군들이 외부로 원정 나가서 전리품으로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장식품으로 집안에 진열해 놓으면, 종이가 부족한 로마 본토에서는 이 위에 덧칠해서 새로운 책을 만들었을 정도. 그래서 로마 시대에 기록된 것으로 추측되는 책들 다수에는 뒷면에 고대 그리스, 중동권의 글이 쓰여져 있다. 현대에는 기술적으로 이 둘을 분리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 로마가 위치한 라티움 지방에서는 가장의 권위가 막강했는데, 가장의 권한은 세습되기도 했다. 가족 내의 가부장권은 사회로 확장되어 파트로네스(보호자)-클리엔테스(피호민) 관계로 확장되었다. 다만 파트로네스는 가부장권에서 확장된 피호민에 대한 권리보다 피호민에 대한 의무가 훨씬 더 무거웠고, 이는 로마 사회 특유의 인적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다.
11.1. 로마의 국경
로마는 정복 사업의 정체, 노예 감소로 인한 노동력 감소, 경작지 황폐화, 은광 생산 감소가 겹쳐서 사회적으로 침체된 상태였는데, 3세기에 들어서 북방 게르만족의 남하가 거세졌고 국경선에 가해지는 압력이 1, 2세기와는 비교도 안 되게 강해져서, 기존의 군단병을 이용한 선 방어(Limes, 리메스)로 막아 보려다가 물량으로 한 군데 집중해서 우르르 밀고 들어오는 게르만족에게 털리게 되었다(3세기의 위기).여기서 로마가 관리해야 하는 국경은 엄청나게 길었고 따라서 한 군단이 커버하는 길이는 어마어마했다. 군단 하나가 6천 명 정도였는데 이것으로 상당히 넓은 국경을 관리해야 하는 셈이었다. 아무리 무적의 로마 군단이라도 한 군단으로 최소한 10만에서 20만 단위로 남하하는 게르만족에 맞설 수 없었고, 황제가 직접 국경으로 와서 군단을 한데 모아 쳐부수는 방식을 쓰게 되었다. 문제는 로마는 전략 예비대를[25] 두지 않았기 때문에 군단을 소집하려면 각 군단 기지에서 빼내야 했다. 그쪽 국경을 텅텅 비워 놓아야 해서 이렇게 빈 곳으로 빈집털이를 들어올 경우 로마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병 전력을 늘려 기동력을 향상시켜서 게르만족이 중심부로 들어오기 전에 요격하는 방식을 택하다 보니, 기존의 중보병 중심의 로마군 체계가 뒤바뀌었다. 잘 나갈 때는 기존의 로마식 체제로도 충분했지만, 사방에 적이 늘어나고 업무가 가중화되다 보니까 동방식 관료 체제와 4황제 체제로 바꿔서 정부 통제와 업무 능력을 향상시켰다.
문제는 이렇게 내세운 4황제들이 엉뚱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황제가 넷이라는 건 동일한 계급에 군사 지휘권까지 가진 최고 권력자가 넷이라는 것이고[26] 다른 3명을 제거하면 자기 혼자 권력을 독차지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한 건 다른 황제들도 마찬가지였고 결국 박 터지게 싸운 것이다. 이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어느 정도 진정시키지만, 공동 황제끼리의 대립은 완전히 해소할 수 없었다.[27]
로마의 동서 분할 시기쯤 되면, 서로마 제국 황제들은 로마가 아닌 라벤나에서 거주했으며 통치도 라벤나에서 했다. 이후 라벤나는 사실상 행정적으로는 서로마의 중심이 되었으며 서로마 멸망 이후 고트족도 라벤나를 수도로 썼다. 물론 원로원은 아직 로마에 있었다.
11.2. 로마와 종교
로마는 전기에는 잘 나갔으나 이후 국가가 혼란해지면서 종교관이 바뀌었다. 심지어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는 신은 이전 세대의 영웅이나 자연현상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 세대가 과장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나 있었을 정도였다. 물론 3세기의 위기와 같이 혼란의 시대에 사람들이 종교에 매달리는 현상은 언제나 있었지만 나중에는 다른 종교를 제치고 그리스도교가 커졌다. 전기 그리스도교의 부흥기에는 미트라교, 이시스교 등의 신흥 외래종교 역시 유행했고, 그리스도교와 다른 신흥종교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리스도교는 당대 로마 제국에 있던 수많은 종교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고, 로마 제국의 쇠퇴 원인은 근본적으로 정치ㆍ사회적인 변화 등이었다. 그리스도교의 융성은 백 번 양보해도 원인이 아닌 결과고, 그리스도교가 로마 멸망의 원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물론 국가가 쇠퇴한다고 종교가 발전한다는 보장도 없다. 그리고 애초에 로마의 쇠퇴도 '서로마 멸망=로마 멸망'으로 바라봤을 때 성립된다.[28] 로마는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긴 이후 1천 년을 그리스도교 제국으로서 버텼다. 천도 이후의 로마, 다시 말해서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삼위일체론, 성화상 논쟁, 동서 교회 대분열 같은 기초 그리스도교 지식을 강제 학습하게 될 정도로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제국이었다.시대적으로도 그리스도교를 지지하는 것이 유리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로마 황제는 사실상 정치적으로 할 수 있는 게 많이 줄어든 상태라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이민족들과 직접 협상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침략자인 게르만족도 종파는 달랐지만 그리스도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29]
11.3. 로마에 속했던 국가 및 지역
로마 제국이 워낙 거대한 나라였던데다, 로마의 지배를 받던 지역에 들어선 나라들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현존하는 국가 및 속령들 중에 로마 제국 안에 일부라도 속했던 국가 및 속령만 따져도 50여 개 이상이다.
- 유엔 회원국
- 그리스[30]
- 네덜란드
- 독일
- 러시아
- 레바논
- 루마니아
- 룩셈부르크
- 리비아
- 리히텐슈타인
- 모나코
- 모로코
- 몬테네그로
- 몰도바
- 몰타
- 벨기에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북마케도니아
- 불가리아
- 사우디아라비아
- 산마리노
- 세르비아
- 스위스
- 스페인
- 슬로바키아
- 슬로베니아
- 시리아
- 아르메니아
- 아제르바이잔
- 안도라
- 알바니아
- 알제리
- 영국
- 오스트리아
- 요르단
- 우크라이나
- 이라크
- 이란
- 이스라엘
- 이집트
- 이탈리아[31]
- 조지아
- 체코[32]
- 쿠웨이트
- 크로아티아
- 키프로스
- 튀니지
- 튀르키예[33]
- 포르투갈
- 프랑스
- 헝가리
- 유엔 참관국
- 미승인국
- 속령
11.4. 속담
si fueris Romae, Romano vivito more.
로마에 가면, 로마 법에 따르라.[34]
로마에 가면, 로마 법에 따르라.[34]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Alea iacta est.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덕이 있는 사람은 중용을 택한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Qui desiderat pacem, praeparet bellum.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각자의 몫은 각자에게로.
술 부대는 처음 담은 술의 향기를 기억한다.
모든 생명은 알에서 나온다.
아무리 나쁜 책이라도 도움이 안 되는 책은 없다.
위대한 제국은 소심함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타키투스
타키투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불안해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율리우스 카이사르
먼저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공격받게 될 것이다.
시라쿠사의 아테나고라스
시라쿠사의 아테나고라스
11.5. 납 중독
로마 제국은 연간 8만 톤에 달하는 납을 생산했고, 이것은 산업혁명 시기의 유럽 전체와 거의 맞먹는 규모다. 이로 인해 서반구에서 가장 오래된 대기오염을 초래하기도 했다. 실제로 오늘날 그린란드의 빙하 코어 샘플에는 2천 년 전 로마에서 생산되었던 납 물질이 검출되었다고 한다.이런 많은 납 생산 덕에 로마는 실생활에도 납을 많이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납을 사용한 송수관이다. 그래서 로마가 멸망한 원인 중 하나가 납 중독이라고 보기도 한다.
물론 로마인들도 납의 독성을 알고 있었고, 납 송수관의 경우는 송수관 내에 흐르는 물의 석회질이 코팅 효과를 내 납 중독을 막아주었다. 그런데도 납에 심하게 중독되어 사망한 유골들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로마인들이 납을 식재료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납 용기에 포도주를 담아 가열하면 둘 사이에 반응이 일어난다. 그러면 용기 아래쪽에 연당, 또는 아세트산 납(II)(Pb(CH3COO)2)이 생성되는데, 이 물질에서는 단맛이 나서 로마인들은 그걸 조미료로 사용했던 것이다. 여러 로마 시대 요리책에도 연당이 요리 재료로 자주 언급된다.
납 중독으로 로마가 멸망했다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유골에 자주 나타나는 납 중독 흔적으로 보아 상당히 많은 로마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고 먹은 납으로 인해 건강에 해를 입었다는 것은 맞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 계급이 높을수록 납 노출량도 높아졌다. 그래서 로마 역사상 건강하게 오래 산 사람들은 대부분 스토익 철학에 따라서 검소하게, 즉 소식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로마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토할 때까지' 먹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납 중독설은 제국의 동쪽 절반이 서방으로부터 단절된 뒤에도 오래 살아남은 사실로써 부정된다.
프린츠 M.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프린츠 M.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11.6. 로마의 성문화에 대한 오해
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성문화 문서 참고하십시오.칼리굴라, 스파르타쿠스 같은 고대 로마를 소재로 한 대중매체에서 나오는 묘사는 서구인들이 로마에 대해 갖는 환상(?)을 반영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문헌상으로 남아 있는 기록 외에도 고고학적 발굴 결과 폼페이 등에 남겨진 에로틱한 유적, 유물을 보고 고대 로마 제국 자체가 성문화가 개방적이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로마 제국이 퇴폐적이어서 멸망했다는 고정관념이 있다. 오늘날에도 그리스도교 근본주의자들은 폼페이 최후의 날이 성이 난잡해서 하느님이 형벌 내린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물론 로마의 멸망이 도덕성 타락 때문이라는 식으로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이미 근대와 르네상스 시대부터 반박이 이루어지던 비약적 주장이기도 하다. 중세, 근세 유럽 역시 프리섹스와 사생아, 불륜, 강간 등이 로마 못지 않던 시기였는데 고루한 성직자들이 주장하던 "퇴폐적인 로마" 드립이 상식이 있는 일반인들에게 얼마나 와닿았을지는 의문스러운 일이다. 여담으로 현대 고고학적 발굴 결과 로마 귀족들의 퇴폐 문화가 절정에 달하던 시기는 루쿨루스로 대표되던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 사이 즉 로마 제국의 최고 전성기인 서기 2세기 이전 일이기도 하다. 서기 2세기에는 로마 제국 상류층들 사이에 퍼진 스토아 학파 철학을 바탕으로 절제된 삶을 사는 지식인들이 늘어나는 추세이기도 했다. 만약에 로마 제국이 도덕적으로 고리타분해져서 멸망했다고 말대꾸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즉 로마 제국이 음란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멸망했다는 주장은 먼저 원하는 결론을 내려놓고 제대로 된 근거도 없이 끼워 맞춘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현대 기준으로 로마가 성이 난잡해서 멸망했다는 이야기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성적 억압의 근거로 내세울 때 쓰는 낭설이다.
주류 그리스도교의 보수적인 성관념은 당시 로마의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일대 아람어권 지역의 시민들의 성관념이 반영된 것이기도 한데 이 지역은 로마 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지역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기록을 봐도 이런 문화적 차이가 언급되는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아나톨리아의 리디아 왕국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시아인들은 당시 그리스인이나 이집트인 및 그리스 서쪽이나 북쪽의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나체 노출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유대교가 생겨나기 전인 신아시리아 제국에서도 전 여성들에게 베일을 씌우던 문화와도 어느 정도 연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이전 시절 이집트는 벽화를 보면 알테고 그리스와 로마, 켈트 문화권 모두 남성의 경우 나체 노출의 기준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관대한 수준이었고, 중세 초만 해도 습한 유럽 기후와 당시 목조 건축 가옥의 한계 때문에 집 안에서는 남녀노소 다 옷을 벗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35]
그리고 결국 로마는 이후로도 천 년 가까이 존속하다가 그리스도교 문명이 주류일 당시에 멸망했다. 이것만으로도 해당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알 수 있다.
11.7. 로마는 어느 나라의 역사인가?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로마는 기원전 700년 경부터 기원후 1453년까지 존속한 나라고 20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대국이다. 흔히 서로마의 멸망을 로마의 끝으로 바라보지만 이는 과거의 관점이며 현재는 비잔티움 제국을 관습적으로 사용하나 엄연히 로마의 다른 이름이라 말한다. 즉 로마는 내부적으로는 테오도시우스 1세 사후 동서로 분할 됐으나 이는 사두정치 때와 마찬가지로 행정 구역을 분할한 것이고 그마저도 동방 황제가 서방 황제보다 명목상 권위가 높았다.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로마는 하나였으며 서로마가 멸망한 것은 엄연히 말해 서방 영토를 상실한 것이다. 즉 로마의 정체성은 1453년 로마가 망하고 그 정체성이 어디로 갔는지를 따지는 게 맞으며 그렇기에 본토였던 이탈리아와 동로마 문화의 중심인 그리스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다.비록 이탈리아 내부의 도시국가로 출발했지만, 지중해 세계를 제패한 제국이라 서양사 전반에 발이 걸쳐 있으며 과거 '제3의 로마'라 하여 많은 국가들이 계승을 자처했기에 로마가 어느 국가의 역사인지에 대해서는 현대도 논쟁거리이다. 사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지리, 언어 측면에서 가장 관련이 깊은 지역은 이탈리아와 그리스이고 그 외에는 독일(신성 로마), 러시아, 튀르키예(오스만) 등이 계승을 주장하고 루마니아가 국호의 어원이 된 데에 그친다.
과거에는 국가 및 왕조의 정통성, 민족주의와 얽혀 국제적인 정치 외교적 분쟁은 물론 역사학계에서도 꾸준한 논란거리였으나[36], 현대 학계에서는 다르다. 현대 역사학계에서 로마는 서양사 그 자체라는 것으로 결론이 나와 있으며 이는 서양의 일반 대중들에게도 익히 알려져 있는 바이다. 이는 국민 국가 성립과 근대화 이후 더 이상 로마를 계승한 '유럽의 정통성'이라는 게 크게 중요치 않게 됨에 따라 역사적 이데올로기에 민족주의적 색채가 빠지게 되었으며 역사학계에서도 이에 얽매일 필요 없이 자유롭게 학설을 확립할 수 있었던 점이 컸다.
따라서 이러한 논쟁은 현재는 학술적인 접근이 아니라, 소위 역덕후라고 불리는 매니아들, 그것도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37]나 임페라토르 롬 마이너 갤러리와 같은 국소 커뮤니티에서나 나도는 우스갯소리 내지는 관련 국가에서 '역사' 전문가가 아닌 일부 과격 민족주의세력이 주장하는 내용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로마의 후계 국가가 어느 나라인지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는 자들을 '롬스퍼거[38]'라고 멸칭하기도 한다. 아무튼 과거와 현대를 걸쳐 주로 언급되어온 로마의 후예 후보들은 다음과 같다.
- 서로마 제국 관련
- 이탈리아: 고대 로마의 발상지이자 첫번째 수도였던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하고 있고, 이탈리아인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며, 이탈리아어는 로마의 공용어였던 라틴어의 직계 후손에 해당하는 언어인데다,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가톨릭 교회의 본산 역시 이탈리아 내부에 있기 때문에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 독일: 서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핵심 영토가 지금의 독일 영토였고,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가장 비중이 큰 민족이 독일인이었으므로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
- 오스트리아: 서로마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신성 로마 제국의 황가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진이었다는 이유로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
- 프랑스: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가 서로마 황제의 관을 받았는데 프랑스라는 국호는 프랑크 왕국에서 유래했고, 나폴레옹도 카롤루스의 후계자를 자처하며 황제로 즉위했으므로 로마 제국 계승을 주장.
- 동로마 제국 관련
- 그리스: 고대 그리스 문화는 로마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고대 로마 동부 및 동로마 제국의 공용어가 그리스어였으며, 동로마의 국교였던 정교회를 현재 그리스도 국교로 삼고 있으므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 튀르키예: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현재 이스탄불을 지금도 통치하고 있고 오스만 제국이 로마의 후예를 자처한 것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 러시아: 동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정교회의 주도권을 가지고 왔으며,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를 계승했음을 주장하여 국가 문양도 쌍두독수리를 쓰고 있다.[39]
- 루마니아: 루마니아인은 고대 로마의 주류 민족이었던 라틴족에 속하고, '로마인의 땅'을 뜻하는 명칭을 국호로 삼았으므로 로마의 후예라는 주장.
- 불가리아: 불가리아 제1제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하고, 바실레우스 칭호의 사용을 동로마로부터 인정받았고[40], 불가리아 제2제국의 수도인 벨리코 터르노보를 제3의 로마라고 부른 것에서 후예임을 주장.
- 세르비아: 스테판 두샨 재위 기간 동안 '세르비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칭한 것을 근거로 로마의 후예임을 주장.
- 그 외
물론 여기서 대다수 롬스퍼거들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선중화주의 드립을 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현대 서양 사학계에서 진지하게 연구할 때는 대체적으로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비중을 높게 둔다. 물론 알려진 바와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은 나름대로 로마 제국 계승에 필요한 여러 조건은 갖추고 있었고 스스로도 그 본질을 자신 있게 주장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중국사의 북위-북주-수당 제국과는 달리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슬람 제국이 차지한 옛 로마의 고토를 회복하는 제국으로 성장하는 데는 실패했기에, 신성 로마 제국의 오토 1세조차 로마인은 자신들과 다르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해야만 했다.
혹시 트로이야란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우리는 오래된 트로이야를 출항해 수많은 바다를 항해하다가 변덕스런
폭풍에 떠밀려 리뷔아의 해안으로 왔습니다. 나는 경건한 아이네아스로
가정의 수호신들인 페나테스 신들을 적군에게서 뺴앗아 함선들에
싣고 가는 중이며 내 명성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나는 내 조국 이탈리아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서 태어난 나의 친족을 찾고 있습니다.
《아이네이스》 제1권 375-380행, 천병희 역
우리는 오래된 트로이야를 출항해 수많은 바다를 항해하다가 변덕스런
폭풍에 떠밀려 리뷔아의 해안으로 왔습니다. 나는 경건한 아이네아스로
가정의 수호신들인 페나테스 신들을 적군에게서 뺴앗아 함선들에
싣고 가는 중이며 내 명성은 하늘에 닿았습니다. 나는 내 조국 이탈리아와
최고신 유피테르에게서 태어난 나의 친족을 찾고 있습니다.
《아이네이스》 제1권 375-380행, 천병희 역
하지만 지금 그뤼니움의
아폴로께서는 나더러 위대한 이탈리아를 차지하라고 명령하셨고,
그분의 리퀴아 신탁소에서 던져진 제비에도 이탈리아가 적혀 있었소.
그곳이 나의 사랑이고, 나의 조국이오.
《아이네이스》 제4권 344-346행, 천병희 역
아폴로께서는 나더러 위대한 이탈리아를 차지하라고 명령하셨고,
그분의 리퀴아 신탁소에서 던져진 제비에도 이탈리아가 적혀 있었소.
그곳이 나의 사랑이고, 나의 조국이오.
《아이네이스》 제4권 344-346행, 천병희 역
로마는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내부의 도시국가로 출발했으며, 로마의 건국 서사시인 《아이네이스》에서 이탈리아를 '조국'이라 표현하는 등 이탈리아가 로마의 장녀라는 데에는 큰 이견은 없는 편이다.[41] 로마는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보편제국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면 더더욱 그렇다. 대 카토는 '그리스산 외래 문화'를 꺼렸으며, 심지어 동로마 제국에서도 라틴적 뿌리의 흔적은 있었고[42], 로마법 대전은 거의 전부가 라틴어로 쓰였다. 물론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동로마를 이탈리아적 성격만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로마의 시작은 이탈리아였고 그 흔적은 동로마 때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특히 헤라클리우스나 적어도 유스티니아누스 때까지의, (동로마에 한정하면) 초기 동로마 시대에는 더욱 그랬다. 최소한 유스티니아누스 때까지만 해도 라틴어에 대한 기초 지식은 있어야 정치적인 차원에서 로마인스러웠다고 할 수 있었다고 한다.[43]
다만 지중해의 거대 제국으로 확장된 로마는 이탈리아만의 역사가 아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그럼 한나라는 한국사냐"라고 동아시아나 다른 권역에 비유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한나라는 로마 제국처럼 한반도 제민족을 융화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나 로마 제국은 성공했기에 잘못된 비유이다. 로마가 민족적인 모습을 탈피하기 시작한 건 이미 공화정 말기에서부터 단초가 있었고, 3세기에 가면 로마는 이미 행정적인 기능을 거진 상실한 지경에까지 가는데 이후로도 로마 제국은 천 년 넘게 존속했다.
옥타비아누스 시대 때는 온 이탈리아의 충성 선서가 정치적 정당화이기까지 했고, 이탈리아는 단지 '제국의 옛날 수도가 있던 곳' 정도의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그야말로 고대 로마의 몸통이었으나, 불과 3세기만 되어도 상황이 바뀐다. 3세기경 로마시(市)와 이탈리아 전역을 차지한 막센티우스는 죽을 때까지 로마 전체에선 결국 불법 아우구스투스에 불과했다. 물론 다름아닌 로마시에서 아우구스투스로 추대받은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는 달리 재론의 여지가 없는 로마 세계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으나, 이는 콘스탄티누스가 그전에 합법 카이사르로 제국 전역에서 인정받은 실질에 로마의 권위가 더해져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즉 이미 그 시기에 로마시는 몸통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곧 '로마'라는 국가는, 이탈리아 도시 국가로 시작했으나 제정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성격이 서서히 희석되었다. 이 연장선상에서,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된 'Two Romes'라는 책의 398p에 의하면, '4세기 들어 로마니아[44]라는 이름이 탄생한 것은 로마 시와 로마 제국을 구분할 필요가 생겼다는 점을 방증한다'며 한 역사학자의 저술을 인용하고 있다.[45] 그러므로 지중해의 거대 제국을 이탈리아적 성격만으로 단편적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이에 대한 반발로 극단적으로 이탈리아 지분을 낮추는 것 모두 비역사적 인식이다. 초기 제정까지의 이탈리아 중심 로마사도, 이탈리아 지분이 희석된 로마사도, 서로마 붕괴 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중심 로마사도 모두 로마사이기 때문이다.[46]
제정기에 극적으로 변한 것은 누가 로마인이라는 칭호를 얻을 자격이 있는가를 가르는 기준이었다. 공화정기에 로마 시민권은 동맹시 전쟁이 끝난 이후에야 비로소 이탈리아 반도의 여타 로마인들에게 부여되었고, 비(非)이탈리아인에게 허용된 경우는 예외적 특혜일 뿐이었다. 그러나 서기 1세기와 2세기에 로마 시민권은 전 지중해 세계로, 3세기에는 제국의 전체 주민에게 확산되었다. 이렇게 점점 더 로마화되는 세계에서, 공화정의 전통은 로마 본토 너머의 지역에서는 의미를 잃게 되었다. 갈리아와 스페인, 혹은 동부 그리스의 속주들에서 새로이 로마 시민이 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격파한 로마 공화정 군대와 전쟁을 기념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공화정에 대한 지식은 점차 줄어들었다. 다만 귀족 가문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중요했다. 이들은 4세기에도 자신들이 위대한 공화정기 영웅들의 후손(허구적인 것일지라도)임을 주장하며 자부심을 품었다.
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中
데이비드 M. 귄, 『로마 공화정』 中
이탈리아 다음으로 로마의 귀속성을 주장할 수 있는 나라는 그리스인데 실제 로마 후기사 전체를 차지하는 동로마 제국은 언어, 문화, 종교 등에 있어서 그리스적 속성이 매우 강한 나라였고 현대 그리스 역시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이나 마케도니아 제국보다도 동로마 제국 계승을 더 중시한다.[47] 그리스는 일단 이탈리아 다음으로 로마사에 지분이 있다고도 볼 수 있고 동로마의 역사가 서로마 붕괴 이전의 로마사의 길이와 맞먹는 정도이기에 그리스의 주장을 마냥 터부시할 순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천도 혹은 동서로마의 분할 이후의 비잔티움사가 온전히 그리스사에 귀속된다는 그리스인들의 주장은 이탈리아, 불가리아, 튀르키예 등지에서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탈리아 또한 로마사에 대한 자부심이 크지만 그리스처럼 로마사의 배타적인 연고권을 주장하진 않는다. 그리스가 이런 주장을 펼치는 이유 중 하나는 로마에게 통합된 이후론 19세기까지 스스로의 국가를 이루지 못한 민족이란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로마 제국은 태생적으로는 이탈리아 라티움(라치오) 지방의 도시국가였으나 그 강역이 유럽 대부분과 메소포타미아 이서/아라비아 이북의 중근동 전역, 북아프리카 일대까지 확장된 다민족 국가였고, 문화적 포용성이 라티움 바깥으로 확대되었으며, 제정 시기엔 황제들 역시 이탈리아와 그리스(+소아시아) 본토뿐 아니라 제국 전역의 속주들에서 배출되었기에, 특정 국가의 민족사가 아닌 지중해를 둘러싼 일대 국가들의 공동사로 보되 '다민족제국이니 이탈리아나 잉글랜드나 비중이 똑같다' 같은 억지 밈을 배격하는 게 가장 무난한 관점이다. 다만, 로마 제국이 서양사에서 가지는 상징성이 너무나 큰 지라 중세부터 로마의 후계성은 유럽 국가들에게 정치적 정통성 및 민족적 자부심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고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도 고대 로마에 대한 연고권 논쟁이 일부 정치권 및 민간에서 일고 있는 것이다. 특정 국가가 배타적인 후계성을 주장할 수는 없겠지만 로마 초중기사의 적자는 이탈리아, 중후기사의 적자는 그리스로 보는 시각이 가장 일반적이며 이러한 이유로 로마의 후예들 가운데 적장자는 이탈리아, 적차자는 그리스라 정리할 수 있다.
한편 일부 얼치기 역덕들이 운영하는 네이버 블로그나 대체역사 마이너 갤러리, 패러독스 인터랙티브 마이너 갤러리, 임페라토르 롬 마이너 갤러리같은 몇몇 국소 커뮤니티에서는 로마는 이탈리아인들만의 나라가 아니었으며 현대 이탈리아 또한 라틴족 외 이민족 혈통이 유입되었으므로 로마의 후예로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여기에 본인들이 선호하는 나라야말로 진정한 로마의 적통이라고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개중에서도 러시아 적통설의 선호도가 매우 높으며 튀르키예 적통설이 농담거리로든 진담으로든 그 뒤를 따른다. 그러나 종족, 혈통만으로 고대 국가와의 관련성을 부정하는 건 말도 안 되는 반론이거니와, 굳이 혈통적으로 따져도 타민족과의 혼혈이 있었을지라도 현대 이탈리아인들에게 고대 로마인의 피가 가장 짙게 흐른다는 사실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이민족의 침공이나 통혼은 비단 이탈리아에서만 일어난게 아니라 전 세계 어디든지 발생했으며 지금도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데 이러한 논지로 보면 비단 로마뿐 아니라 과거사 전체가 저런 주장을 하는 이들이 그렇게 사랑하는 러시아와 튀르키예도 마찬가지이다 못해 더욱 불리한 형국이다.
따라서 이탈리아가 로마인만의 피를 물려받은 건 아니지만 그 사실이 다른 나라에서 정통성을 찾아야할 이유는 전혀 되지 못한다.[48] 아무리 로마를 이탈리아 민족주의의 잣대로만 볼 수 없다고 하더라도, 로마와의 관련성이라는 면에 있어서 동로마의 적자인 그리스 정도를 제외한 이탈리아와 그 바깥을 동등하다고는 볼 수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로마가 현대 국가인 이탈리아와 관련이 없다거나 로마 제국의 영토에 속한 모든 현대 국가가 이탈리아와 동등한 지분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 또한 로마가 이탈리아만의 역사라는 주장 못지않은 역사 왜곡이며 사실상 특정 국가를 선호하는 '빠'들의 억지 밈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이 전술한 국소 커뮤니티를 넘어 대형 커뮤니티에서 로마 관련 화두가 나올 때마다 야금야금 출몰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인데, 해당 커뮤니티의 기조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접근인지라 타 커뮤니티 출신들은 왜 뜬금없이 러시아, 튀르키예를 논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밈이다. 로마사에 대한 인식을 환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자중해야 할 일이다.
11.8. 로마의 시대 구분에 대하여
기원전 753년부터 1453년까지 무려 2200년에 달하는 역사를 가진 로마는 시대를 구분할 때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로마 왕국(왕정), 로마 공화국(공화정), 로마 제국(제정)으로 구분한다. 로마 제국의 경우 서로마 붕괴 이전의 고대와 동로마 제국이 존속한 중세(비잔틴)로도 나누게 된다.하지만 절대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2200년 간 일어난 이런 정치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멸망'한 적은 1453년 이전까지 없었다는 것이다. 기원전 509년에 로마 왕국이 멸망하고 공화국이 건국된 것이 아니다. 기원전 27년에 공화국이 멸망하고 제국이 건국된 것 또한 아니다. 로마는 그대로였고, 단지 정치 체제가 변화했을 뿐이다. 476년의 서로마 멸망으로 불리는 사건 또한 서로마의 문화적 수도였던 로마가 공격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라 서로마의 황위가 오도아케르에 의해 소멸한 것에 불과하다. 로마는 예전에 비해 쇠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이탈리아의 정신적 수도이자 베드로로부터 이어지는 정통성을 주장하던 기독교 교구 중 하나였다.
이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왕정, 공화정, 제정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기원전 509년의 '공화정으로의 이행'은 로마를 단일권력자의 통치에서 공공의 통치[49]로 전환한 것이다.
'제정으로의 이행' 또한 "원래는 공화국이었지만 기원전 27년의 오늘부터 아우구스투스 님을 황제로 떠받들어야겠다" 개념이 아니다. 기원전 27년은 제2차 삼두정치의 승리자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은 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이와 별개로 공화국의 정치 제도가 갑자기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집정관, 호민관, 원로원 등 공화정 시기의 정치제도는 남아있었다.[50] 하지만 '아우구스투스' 칭호가 하나의 초월적인 권력자의 존재를 전제하고 부여되는 칭호이기 때문에 원로원의 아우구스투스 칭호 부여를 공화정의 실질적 폐지의 상징적인 기점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를 제정으로 칭하는 것이다. 공화국의 제도는 이 시점 전에 이미 유명무실해지고 한 사람이 통치하는 제국과 같아졌다는 것이다.
로마는 전통을 지나칠 정도로 중시하며 집착하는 국가였다. 아무리 공화정이 유명무실해졌다 한들 공화정의 제도를 직접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고 체제의 근간을 뒤흔들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로 여겨질 수 있었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원로원으로부터 받은 종신독재관 자리를 공화정의 근간을 파괴하는 자리로 여겨 2년 만에 물러났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기원전 44년 종신독재관의 자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당해에 암살당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 칭호 대신 '세나투스 프린켑스'[51]를 자처한 이유도 아우구스투스가 겸손해서 따위의 이유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라는 어찌 보면 개인을 신격화하는 칭호가 카이사르의 전례처럼 죽음을 불러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공화국의 대부분의 주요 직책을 장악해 최강의 단일권력자가 된 상태에서 노골적으로 공화정을 부정하는 행위만 하지 않았을 뿐이다.
대놓고 전제정임을 티내기 시작하는 시점은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부터이다. 그렇다고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로마 제국의 첫 황제라고 칭할 수는 없고, 이미 아우구스투스 시절부터 로마는 제국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아우구스투스를 로마 제정의 첫 황제로 후대에 평가하는 것이다. 즉, 공화정과 제정의 구분은 후대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로 나뉘는 것이고 기원전 27년 당시에 '우리나라가 오늘부터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뀌었구나' 라는 인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395년 로마의 동서 분열은 "원래 우리는 하나의 로마였는데 이제부터 두 개의 나라를 운영하자"가 아니라 하나의 제국을 두 황제가 통치하는 분할통치 개념이었다. 그리고 이는 395년에 처음 선보인 것도 아니었고 이미 3세기 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치로 선보인 바 있다. 단지 395년에 분할통치를 한 다음 그 분할된 통치권이 두 번 다시는 하나로 합쳐지지 않은 채 서방 황제 직위가 먼저 사라졌을 뿐이다.[52] 서로마와 동로마라는 새로운 나라가 건국된 것이 아니었고, 결국 '원래는 분할 통치를 하려고 했는데 서쪽 제위가 사라져버렸네?' 꼴이 된 동쪽 황제의 통치영역이 무려 1000년이나 가면서 고대의 로마에 새로운 문화들이 융합되어 색다른 문화를 꽃피운 동로마 제국, 또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칭해진 것이다.
또한 중세 로마(=동로마=비잔티움)는 고대 로마의 정체성과 제도의 연속체 자체였으며, 대체로 '그리스적'이면 곧 '비로마'적인 걸로 인식하는 일각의 오해와는 달리 로마는 아예 이탈리아 반도를 제패하기 전부터 선진 그리스 문화를 수입하기 위해 열심이었고 그리스인들이 많이 사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갈리아 남부를 제패하면서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된다. 동로마 제국 중심지인 그리스 지역도 실은 디아도코이 시절과 비교하면 문화나 정치는 물론이고 아예 정체성까지 로마화된데다 역설적으로 디아도코이 시절에는 각잡고 말살하려 했거나 아예 무시했던 헤브라이즘에 역으로 정신 세계가 정복당하고 만 나머지(....) 굳이 디아도코이 헬라 제국 시절 그리스와 비교하면 역시 뭔가 크게 달라져버린 실체였다.
그러나 역사가 무려 이천 년인 로마 제국을 후세인이 이해하려면 긴 역사를 큰 계기나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분절하여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 중 무엇보다 중요한 게 서로마 제국 황제위 상실이었음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다보니 본래는 단절 없이 이어진 로마사를 편의적으로 기원후 476년 기점으로 잘라서 이해하다보니 당연한 얘기로 기원전 753년~기원후 476년 고대 로마와 기원후 476년~1453년 중세 로마를 100% 동일시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된다. 그래서 고대 로마와의 구분이 필요하여 비잔티움이라는 시대구분 표현이 사용되는 것이다.[53]
약 2200년 간 이어진 로마는 1453년 오스만에 의해 정치적 멸망을 맞이하기 전까지 멸망한 적 없이 유지되었지만, 그 긴 기간 사이에 점진적으로 일어난 정치적 변화는 많았다. 그래서 점진적 로마 정치 변화를 상징적 사건들을 기준으로 후대에 왕국, 공화국, 제국 같은 구분을 사용하게 된 것이며, 이런 구분으로 로마성 여부를 가릴 수는 없으나 분명 필요한 건 인정해야 한다.
11.9. 대한민국의 인식
로마에 대한 한국에서의 인식은 왜곡되어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현대적인 로마사를 따른 시각은 드물고, 이미 폐기된 학설이나 아예 역사학으로 볼 수 없는 시각에서 비롯된 왜곡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로마에 대한 한국에서의 대중적 인식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처럼 로마를 그저 폭압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고대 제국으로 보는 시각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는 하지만 초중기 공화정 및 원수정 초기의 로마에 한정하고, 그리스도교화가 진행되고 야만족 및 동방과의 교류를 통해 기존 로마의 모습에서 많이 변형된 후기의 로마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시각이다. 역사학이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지 못한 한국에선 아직까지 전자의 시각을 많이 찾아볼 수 있어서 로마에 대한 인식이 좋은 경우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어느 정도 역사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이 주류인 후자의 인식도 바람직하진 않다.
전자의 인식은 주로 역사학이 아닌 여타 문서나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반감이 근대 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먼 고대 국가인 로마에게까지 미치는 경우다. 역사적으로 로마의 위상은 언제나 높았고[54], 오히려 로마의 가장 큰 미덕은 그 특유의 다문화적[55] 모습에 있다고 여겨졌다.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인 의미에서 로마의 속주 정책을 논한다면, 분명히 가혹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로마에 대해서 제국주의라는 워딩을 쓰는 게 학계에서 없는 것도 아니다. [56] 그러나 로마의 피정복지 정책을 호평하든 혹평하든 간에, 시대적으로 동떨어진 근대 제국주의 열강의 이미지를 로마와 섞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요컨대, 로마의 피정복지 정책이 가혹할 순 있어도, 이것은 고대 제국으로서 가혹한 것이지, 근대 열강으로서 가혹한 것이 아니다.
로마를 마치 고대 스파르타와 같은 군국주의 국가로 인식하고, 당대 로마의 이례적인 선진성이나 그에 기반한 통치 전략, 제도, 법률, 문화 등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관점에서는 팍스 로마나와 같은 로마 시대의 태평성대를 이야기하거나 로마를 고평가하는 시각들을 거부하며 로마의 평화를 '거짓된 평화'와 같은 식으로 많이 인식한다. 로마는 군사력을 토대로 주변 속국들을 강압적이고 잔인하게 찍어누르고 착취했으며, 로마의 평화는 말 그대로 극소수의 부유하고 나태한 귀족들에게 집중되었다는 인식도 강하다.
2000년대 초반을 중심으로 한국의 역사 관련 커뮤니티에서 매우 큰 떡밥이었던 '로마 VS 한나라'와 같은 떡밥이 많았는데, 당시에는 구글이 활성화되기 이전으로 위키피디아도 없었기 때문에 전공자 이외에는 참고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아직 역덕 문화가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이전이기도 해서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황당한 논박이 많이 이어졌다. 한쪽에서 로마인 이야기의 서술을 근거로 로마 제국이 우월하다고 주장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문열 삼국지를 근거로 반박하곤 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해당 VS 놀이가 언급되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보다는 진부한 떡밥이라고 생각하며 반감을 표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은 편이다. 나무위키 내에서도 "로마 VS 중국" 문서를 삭제하는 방향으로 토론 합의가 이루어진 적이 있다.토론 2002년 월드컵 이전 국내 반중감정이 약했던 시절에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아시아권 국가인 한나라에 동질감을 느끼고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로마를 무분별하게 폄하하며 한나라의 상대도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정도야 양반인 편이고, 심지어 환빠들이 로마 제국과 고구려에 비견하며 로마가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보는 시각도 많았는데, 서양사, 로마사에는 무지하며 그저 대중적 인식에 반제국주의적 신념까지 곁들여져 왜곡된 시각이 불과하다.[57]
사실 이는 중국의 광활한 영토와 삼국지 등에서 종종 등장하는 "백만대군" 얘기 때문에[58] 막연히 한나라가 더 크고 강하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한데, 실제 로마와 한나라의 면적을 비교해보면 통일 왕조인 전한 기준으론 600만 km², 로마 제국은 500만 km² 정도이며, 인구수로 따지면 전한은 5,700만 명 혹은 5,900만 명정도로 추정이 되고(후한은 5,600만), 로마 제국은 5,600만 명대라서 인구는 로마와 한나라 모두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게다가 영토의 면적은 한나라가 더 넓지만 이는 광활한 사막 지대랑 당시로선 미개척지가 많은 강남 지역을 포함한 영토이며, 반대로 로마 제국은 대부분 기존 문명이 있는 지역까지를 영토로 치는지라 실제 통치 구역은 로마나 전한이나 전한 별 차이가 없다. 즉, 고대 국가에서 국력의 가장 큰 기반이 되는 영토와 인구에서 유의미한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 그 외 기술이나 문명 같은 것은 워낙 환경이 다르기에 우열을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후자의 인식은 90년대 중반 들어온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크게 전파된 시각으로, 현대에는 이미 수십 년 전에 사장된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고전적 역사학의 시각인, '고대의 로마에 대해서만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후기 로마 및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는 무조건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해당 서적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초중기 로마에 대해서는 찬양 일색이며 심지어 타 민족과의 관계에서 무조건적으로 로마를 옹호하고 타 민족을 비하하는 등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반면, 후기 로마에 대해서는 진정한 로마로 인식하지 않으며 이전의 로마에 비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열등했던 시기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런 시각이 유입되면서, 비슷한 인식이 로마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런 관점은 앞서 언급된 전자의 시각과 결합하며, 초중기 로마는 이상적인 국가가 맞으나 후기 로마는 말 그대로 사치와 향락에 찌들어 국방에는 무관심하여 용병에 의존하다가 멸망했다는 식의 인식도 잦은 편이다. 현재까지도 서양사가 전공으로서 개설된 대학이 거의 없다시피 한 국내 환경에서, 로마사를 정식으로 배운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따라서 인지도 높은 로마인 이야기를 통해 로마사를 접하게 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로마에 대해 이런 인식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수도 있다.
다행히 근본적으로 역사학 서적이라고 볼 수 없고 그 시각부터가 이미 한참 전에 폐기된 학설을 그대로 따왔을 뿐만 아니라 그마저도 자신만의 관점에 의해 왜곡된 시각들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이러한 인식에 대한 반성과 배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로마사에 관심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이런 관점은 대부분 배척되는 추세다. 심지어 이미 1962년에 초판이 나온 서적인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도 이런 시선을 비판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견해는 종교의 비합리주의에 반대하거나 고전 문화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서기 5세기까지 로마 문화를 주도하고 그리스도교를 배척한 이교 지식인들의 편견을 그대로 취한 여러 사상가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제국의 군사적 열의를 침체시킨 위험한 평화주의를 조장했고, 소중한 병력 자원을 수도원으로 빼냈고, 갈수록 위태로워지던 국가를 구하는 데 필요한 우수한 인재들을 교회의 성직자로 끌어들였으며, 타 종교들에 불관용하고 내부적인 교리 분쟁을 일삼으로써 위기 때에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내부의 통일을 파괴했다고 주장한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비판이 정당해 보일 수가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황제들의 군사 정책은 다른 많은 황제들의 정책을 따랐으며, 심지어 그리스도교 주교들이 자기들의 도시들을 방어하는 데 앞장선 사례들도 있다. 많은 유능한 성직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속사에 참여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세속을 등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과오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상관 없이 존재하던 삶의 압박에서 도피하고 있었고, 비록 수도원이 없었을지라도 다른 피난처를 찾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열을 초래한 그리스도교 교리 투쟁들이 제국에 해를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투쟁들은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투쟁들을 낳았을 좀 더 깊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징후들인 경우가 많았다.
프린츠 M.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비판이 정당해 보일 수가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황제들의 군사 정책은 다른 많은 황제들의 정책을 따랐으며, 심지어 그리스도교 주교들이 자기들의 도시들을 방어하는 데 앞장선 사례들도 있다. 많은 유능한 성직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속사에 참여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많은 그리스도교인들이 세속을 등지고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과오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상관 없이 존재하던 삶의 압박에서 도피하고 있었고, 비록 수도원이 없었을지라도 다른 피난처를 찾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열을 초래한 그리스도교 교리 투쟁들이 제국에 해를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투쟁들은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투쟁들을 낳았을 좀 더 깊은 사회·경제적 문제들의 징후들인 경우가 많았다.
프린츠 M. 하이켈하임, 『하이켈하임 로마사』
결과적으로 로마에 대한 크게 왜곡되어 있는 대중적 인식 중 후자는 차츰 폐기되고 있으며, 이미지와 인식에 기반한 것이 아닌 사실로서의 역사를 따라야 한다는 시각에서 볼 때 이런 움직임은 바람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전자의 경우도 말 그대로 역사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지라 고치는 게 후자보다 쉽지는 않지만 후자가 차츰 폐기되는 과정과 연계되어 고쳐져나갈 여지가 생기고 있다.
12. 창작물
서유럽인이거나 그들의 후손인 북미 백인 창작자들의 작품에서는 고대 로마인들이 주로 현대인 입장에서 이입하기 쉬운 '문명인'으로, 그 당시 서유럽의 주민들은 가이사타이(나체 광전사), 인신공양 등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문화를 가진 야만인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창작자들은 보통 그 야만인들의 후손이라는 점이 아이러니.- 드래곤 에이지 시리즈 - 티빈터 제국: 이쪽은 제정 시대 로마가 아닌 공화정 시대 로마를 모티브로 한다.
- 로맨싱 사가 2 - 아바론 제국
- 리그 오브 레전드 - 녹서스: 공화정 로마의 삼두정과 같은 정치 체계인 트리파릭스 정치 말고도 검투사 문화, 수도로 연결되는 관문, 다문화 정책, 능력주의 등 고대 로마의 특징이 많이 드러나 있다.
- 스타워즈 - 은하 공화국: 특히 로마 공화정 시대를 모티브로 한다. 특히나 은하 공화국의 몰락 과정에서 전쟁에서 승리→지도부의 부패→내전의 발생→모순 극복 실패와 대규모 외환→소수파 출신 전쟁영웅의 등장→제국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순서는 놀라울 정도로 로마 공화국과 일치한다.
- 스타크래프트 시리즈 - 프로토스: 로마는 물론 그리스와 이집트도 섞여있다.
- 파이널 판타지 시리즈
- 파이널 판타지 XII - 아르케이디아 제국
- 파이널 판타지 XIV - 갈레말 제국
- 파이널 판타지 XV - 루시스 왕국: 인명이 라틴어인 것과 초대왕 시대에 토가를 입었던 점을 통해 고대 로마에서 모티브를 딴 것을 알 수 있다.
12.1. 소설
-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
- 눈 속의 독수리
- 로마 디펜스
- 로마 재벌가의 망나니
- 로마를 정복해야 내가 산다: 여기서는 주인공이 카르타고 소속이라 일종의 최종 보스 포지션이다.
- 마스터스 오브 로마
- 벤허
- 선생님, 조선은 로마 그 자체란 말입니다
- 쿠오 바디스
-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12.2. 드라마
12.3. 영화
- 글래디에이터
- 드래곤 블레이드: 천장웅사
- 로마 제국의 멸망: 1964년 작. 당대 최고의 연기파 배우들이 총출동한 영화이다. 글래디에이터와 같은 시대, 같은 배경을 다루고 있다. 할리우드 호황기에 만들어진 작품답게 매우 큰 스케일을 자랑하지만, 독백이 많이 등장하는 등 연극과 흡사한 연출을 보인다. 현재 나무위키에 독자 문서가 생성되어 있지 않다.
- 세계사
- 센츄리온
- 스팔타커스: 1960년 작. 스탠리 큐브릭이 연출하고 커크 더글라스가 주연한 대작. 여담으로 수작이라 평가받는 작품이지만 앞의 두 사람 모두 좋은 기억은 가지고 있지 않다. 특히 스탠리 큐브릭은 자기 필모에서 파버리고 싶다는 인터뷰도 했다.
- 클레오파트라
-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 폼페이: 최후의 날
- 부활
12.4. 만화
- 권투암흑전 세스타스
- 로마의 딸
- 무사만리행
- 유레카(일본 만화)
- 테르마에 로마에
- 투수사 베스티아리우스
12.5. 게임
- 그랜드 에이지 로마
- 라이즈: 선 오브 로마
- 로마: 토탈 워
- 마이티 워리어즈: 로마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전액션 게임. 이탈리아의 제작사가 만들었다.
-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 - 팍스 로마나의 연인 편
- 시드 마이어의 문명: 고대 지중해를 대표하는 문명답게 문명 1에서부터 문명 6에 이르기까지 개근했다. 문명별로 개성이 생겨나기 시작한 문명 3부터는 군사적이고 확장적인 문명으로 등장했으며, 더욱 뚜렷해진 문명 5부터는 넓은 영토를 확장하고 유지하기 쉽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지도자로 가장 많이 등장한 인물은 문명 5 한 번을 제외한 전 작품에 개근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이며, 아우구스투스가 두 번, 트라야누스와 리비아 드루실라가 한 번 나왔다.
- 시저 3
- 시저 4
- 십 시티(Civ City)
- 어쌔신 크리드: 오리진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확장팩 로마의 부흥에서 로마와 팔미라,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등 로마의 주요 라이벌이었던 문명들이 나온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확장팩 로마의 귀환에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에 나온 고대 문명들이 모두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엔진으로 이식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 플레이할 수 있는 로마 문명이 새로 나왔다.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게임이다 보니, 본작에 새로 등장한 로마는 전성기 시절이 아니라 몰락기인 서로마 제국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 임페라토르 롬: 기원전 304년 로마 공화정 시대가 배경이다.
- 토탈 워: 로마2
- 토탈 워: 아틸라: 흔히 생각하는 고대 로마가 아닌 훈족의 이동과 야만족의 침입에 몰락해가는 분열된 동서 로마가 등장한다.
- Alea Jacta Est: 고대 로마에서 있었던 내전들을 다룬 전략 게임이다.
- Fate/Grand Order: 영속광기제국 세프템
- Hail Caesar: Warlord Games사에서 발매한 히스토리컬 미니어처 게임. 동로마 제국도 함께 등장하며, 다른 방대한 시기의 전근대 세력들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게임의 이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들어가는 만큼, 고대 로마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 Jack-o-nine-tails: 정확하게는 고대 로마의 노예제 모티브와 하드 코어 야겜 요소가 합쳐진 것이다. 위의 게임들과 달리 진짜 로마가 아니다.
[1] 브리튼 섬과 이베리아반도, 발칸반도, 갈리아, 아나톨리아반도, 레반트와 북아프리카 일부를 다스렸다. 국토 전체가 지중해 연안에 접했기 때문에 지중해를 호수로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2] 로마 왕국 시기부터 중세 초기까지의 강역만을 포함한다. 이후의 로마사는 동로마 제국 참조.[3] 마지막 로마 문명인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멸망 연도.[A] Senatus Populusque Romanus(로마의 원로원과 인민들 S.P.Q.R.)[5] 제국을 세운 아우구스투스 시기 이전에 이미 수천 만 명에 달했다고 본다.[6] 콘스탄티노폴리스 천도 이후에도 제국 서부에서는 수도로 간주되었다.[7] * 공식 명칭이 '새로운 로마'(Nova Roma)라는 낭설이 있으나, 이건 도시에 대한 수식어이지 정치적 공식 명칭은 아니다. 공식 명칭상 이 도시가 '새로운 로마'라 불린 증거는 없다. 2005년 안톤 히어제만 출판사(Anton Hiersemann Verlag)가 출판한 Reallexikon für Antike und Christentum( 고대와 그리스도교에 관한 백과사전)에 따르면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식적으로 Nova Roma라 불리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Reallexikon für Antike und Christentum, vol. 164
1968년 Michael Grant가 쓴 The Climax of Rome에서는 330년대부터 이미 주화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겨졌음을 말하고 있다.(Michael Grant, The climax of Rome
이후에 주로 교계에서 '새로운 로마'란 말을 쓰긴 했으나, 이는 '영원의 도시'(로마), '위대한 도시'(알렉산드리아), '거룩한 도시'(예루살렘) 같은 수식어이다.[8] 지중해와 흑해 면적을 포함하면 800만 km²에 가까워진다.[9] 포에니 전쟁 시기부터.[10] 로마 공화국 말, 로마의 인구는 지금의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은 5,700만 명이었고 제정 시기에는 6,000만 명까지 갔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구강국이었다(그러나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제시한 1억 2,000만 명설은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로 당시 전 세계의 인구 추정치가 약 2억 명이다. 그리고 드넓고도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식량을 비축했고, 상비군 수십 만과 예비병력 수백 만을 갖춘, 군대도 무기도 장교단의 질도 최강인 군사강국이기도 했다. 과학 기술은 동시대 문명들보다 수백 년 더 앞서갔으며, 건축 기술과 토목 기술은 현대에 봐도 놀라울 정도로 매우 수준 높았다. 또한 근대법의 뿌리가 로마법에 있다고 할 정도로 법학 또한 매우 수준이 높았다. 당장 민법이나 상법만 보아도 고대 로마에서 시작한 개념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리행위나 법인이라던지.[11] 공화정 시절도 있는데 왜 제국(Empire)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이건 번역의 문제이다. 라틴어 Imperium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일컫는 게 아니라, '다스림'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기에 공화정 시대에도 정치적 의미의 통솔권, 지배권 등을 군주적 뉘앙스 없이도 Imperium이라 불렀다. '황제'로 번역되는 제정 시절의 Imperator는 중근동의 왕중왕처럼 거창한 뜻이 있는 게 아니고, 그 자체로는 그냥 담백하게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일 뿐이다. 곧 Imperium Romanum은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라는 이름의 나라'가 아니라 '로마(인)의 다스림'이다. 또한 어원을 제치더라도, 공화정 시대에도 이미 로마는 일종의 식민제국이었다.[12] 이 때문에 "로마의 계승국은 어디인가" 하는 역덕후계의 우스갯소리가 있다. 자세한 건 아래 참조.[13]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의 후신국은 없다"라는 말을 한다면 한국인에게 "고구려의 후신국은 없다"라고 말했을때와 아주 똑같은 분노어린 반응이 나올 것이다.[14] 보통 어떤 식으로든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을 고르기는 했다. 아들이 아니면 조카라거나 사위라거나 하는 식이었다.[15] 그러나 사실상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은 아들이 없는 경우였다.[16] 세금 징수를 직업으로 하던 세리들이 알아서 세금을 걷던 로마식 세금 제도를 개혁해 보려던 도미티아누스는 문제 있는 황제로 낙인 찍히고 기록 말살형에 처해졌다. 이 문제는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가서야 개선되지만 적어도 3세기 초까지는 로마의 국가 유지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조세제도를 카이사르가 공화정 말기에 개선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본인도 총독을 해봤고, 집정관 시절에 크라수스를 도와서 세리들이 걷어야 하는 세금을 낮춰주는 법안을 통과시켰기에 세리 제도의 폐해에 대해서 매우 잘 알았다. 그래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경매에 붙여서 가장 많은 세금을 걷겠다고 약속한 세리에게 세금을 속주들에서 걷을 권리를 주는 형식이 아니라, 해당 속주에서 알아서 정해진 액수만큼 걷는 형식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암살당했다.[17] Imperium에 대응되는 영어 Empire가 오늘날 '제국'을 의미하다보니 번역에 매우 혼란이 있는데, Imperium은 그 자체로는 '통치권'을 의미하며, 심지어 군주정 유무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로마의 통치권Imperium을 계승했다고 자처한 신성로마제국은 흔한 단순화와 달리 고려나 발해가 고구려 보듯이 로마 제국을 본 것이 아니다. 그저 '로마가 쥐고 있던 통치권', 곧 Imperium Romanum을 지금 자신들이 쥐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18]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마치 21세기 미국 같은 의미의 관용으로 봐서는 안된다.[19] 로마 시민권보다 한 단계 낮은 단계의 시민권으로, 공직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없다. 다른 권리는 로마 시민권과 동일하다. Civitas sine suffragio(영어로는 Citizenship without suffrage. 영어 위키백과)[20]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천연 시멘트의 특성으로 기술 개발이라고 할 수는 없다.[21] 시멘트 자체는 계속해서 사용되었다.[22] 전술했듯 로마 멸망 전에는 이런 농경 방식은 많이 한정적이었다.[23] 흔히 북아프리카 하면 사막을 떠올리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아프리카 해안가는 올리브와 밀 생산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대 카르타고의 영역이었던 튀니스, 알제리 지역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도 풍부한 밀 생산량을 자랑했다. 고대부터 '제국의 빵 바구니' 소리를 들었던 이집트도 마찬가지다.[24] 다만 제본 방식이 두루마리 형태에서 현재의 방식으로 바뀌었던 것은 로마 시대에도 일어났다.[25] 특정 지역의 방어선이 뚫리거나 한 곳에 적이 집중해 올 경우 추가적으로 증원하는 부대로 예비군과는 다르다.[26]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처음 제도를 만들었을 때는 동일한 지위의 황제인 정제(正帝)는 2명뿐이고, 나머지 2명은 부제(副帝)로서 정제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마자 이 시스템이 무너진다.[27]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란 직책을 공화국 시기의 집정관처럼 만들려고 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임페라토르가 공화정 시절에는 병사들에게서 인정받은 개선 장군을 뜻하는 말이었고, 그것이 제정 시절 들어가서 군사적인 색채를 짙게 가진 '황제'를 가리키는 명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키케로 시대를 기준으로 가르치는 고전 라틴어에서는, Imperator(임페라토르)가 '황제'라는 뜻이라고 하지 않는다.[28] 물론, 로마 제국 전체의 역사로 보면 쇠퇴가 맞긴 하다. 나라의 서쪽 지역이 뭉텅이로 날아가고 동쪽 부분만 남은 채로 근 1천 년을 버텨야 했으니, 이걸 쇠퇴라고 안 부르는 게 되레 이상한 것이다.[29] 로마인들은 정통 교리인 아타나시우스파(삼위일체파)를, 게르만족들은 대부분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일례로 알라리크가 로마를 함락시킬 때 성당 안에 피신한 로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약탈이나 살해 등을 금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 성당으로 피한 이들이 안전을 보장받는 선례가 되어 기사도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4차 십자군이 까인 이유 중 하나로, 성당을 약탈했다는 게 들어간다. 그렇지만 훈족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당으로 피하든 말든 모조리 죽여버리고 약탈했다. 이런 것 때문에도 훈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30] 트라키아, 아나톨리아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본토 역할을 했고, 서트라키아는 현재 그리스 영토다.[31] 고대 로마의 발상지이자 본토였다.[32] 남부의 극히 일부 지역만이 일시적으로 로마군에게 점령당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게르만족의 땅이었다.[33] 동로마 제국의 수도 노바 로마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다.[34] 메디올라눔(밀라노) 대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오(340~397)가, 지방마다 단식일이 다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밀라노에선 밀라노의 단식일을, 로마에선 로마의 단식일을 따른다는 의미. 원래는 이 구절 뒤에 '다른 데에 가면 다른 곳의 법을 따르라(si fueris alibī, vīvitō sicut ibi)'라는 구절이 따라온다. 그런데 잘 곱씹어 보면 암브로시우스 당시의 시대상이 보인다. 여기서의 '로마'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밀라노와 대응되는 도시 로마(로마市)를 지칭하는 것이다. 오히려 본인이 밀라노 대주교라서 저 시점에서는 점점 쇠퇴해가는 로마市 대신 서로마의 사실상 수도였던 밀라노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35] 19세기 캅카스에서 튀르키예와 중동으로 대거 이주한 '무슬림' 민족인 체르케스인들은 레즈긴카라는 남녀가 함께 추는 춤 문화가 있었는데, 중동의 아랍 무슬림들은 체르케스인 난민들의 레즈긴카 춤을 보고 이들이 무슬림인데도 어떻게 여자들이 남자랑 같이 공개적으로 손을 잡고 춤을 추냐며 상당히 괴이하게 여겼다 한다. 즉 종교적 차이 외에도 지역 문화와 정서상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36] 특히 학계를 넘어 국가적 프로파간다로 '로마의 후계자'를 자칭하거나 '제3의 로마' 같은 호칭을 만든 나라들이 많다. 그만큼 예전에는 누가 로마의 정통한 계승자였는지가 큰 쟁점이었다.[37] 위 콘이 바로 해당 갤러리에서 사용되는 것이다.[38] 로마+아스퍼거 증후군. 일부 철덕이나 버덕들이 비상식적인 언행을 보여 철스퍼거, 버스퍼거 등의 멸칭을 얻었듯 같은 원리로 로마 얘기만 나왔다 치면 특정 국가 추종자들이 제3의 로마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탄생한 별명이다.[39] 러시아 역사 중 소비에트 연방 시기에는 이 로마 제국의 계승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로마 특유의 패권주의, 국제주의, 보편 제국의 속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시기, 즉 가장 로마다운 때가 이 소비에트 연방 시기였다.[40] 단, 동로마는 '불가리아의 황제' 칭호만 인정하고 로마 황제까지 칭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41] 위키백과에도 로마 제국의 본토라는 의미에서 Roman Italy라는 문서가 존재한다.[42] List of Byzantine Greek words of Latin origin(영어 위키백과: 라틴어 어원을 둔 비잔티움 시대 그리스어 어휘 목록) 참조.[43]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3p, 원문 'a conscious and active political identification with romanitas required until the era of Justinian's reign at least a basic knowledge of Latin.'[44] 한국인들이 자국을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 대신 일상 대화에서는 편하게 한국이라고 부르듯이, 후대 동로마에서 동로마인들이 자국을 편하게 불렀던 이름이 로마니아이다.[45] Grant Parker has written that “the birth of the name Romania in the fourth century testifies to the need to distinguish between the City and what had by now become a world empire.[46] 다만 학술서에서도 로마사를 서로마 붕괴까지만 잡거나 동로마를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단지 관습적 구분이다. 오늘날엔 동로마가 로마 제국이라는 데 이무런 이견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일한 Francia가 프랑크-서프랑크-프랑스로 아무런 비하 없이 관습적으로 구분되듯이) 로마사의 관습적 구분을 굳이 '동로마 부정'으로 읽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뉘앙스에 따라선 '동로마 부정'을 함의할 순 있으니 결국 맥락을 봐야 한다.[47] 물론 현대 그리스에서도 고대 그리스 및 고대 로마사에 대한 학술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48] 비슷한 예시로 현대 이집트 역시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해 이전에 비해 큰 문화 변혁을 겪어 엉뚱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주민들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49] 현대적인 민주주의의 개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로마 공화국은 모든 시민들에게 주권이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단지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정관, 사법관, 조영관, 재무관, 감찰관, 호민관, 원로원, 민회 등의 여러 개의 통치 기관을 둔 것을 공공의 것(Res Publica)으로 부른 것뿐이다. 현대적인 대통령제와도 다르며, 정무관 중 최고위직이었던 집정관이 로마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서로 다른 직무의 정무관들은 자신의 업무에 대한 개별적인 책임을 졌다.[50] 집정관은 동로마 시절까지 유지되다가 887년에 폐지되었다. 호민관은 세베루스 왕조 시기에 없어졌고, 원로원은 명시적으로 폐지된 적이 없다.[51] 사실 이 칭호 또한 결코 겸손한 칭호는 아니고,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진 원로원 집단 내에서 1인자를 하고 있다는 엄청난 권력의 상징이다. 하지만 세나투스 프린켑스(원로원 1인자)는 아우구스투스가 최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존재했던 칭호였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만큼 개인을 신격화하는 의미는 아니었으며 기존 공화정에 존재하던 칭호인만큼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티내기 위한 칭호였다.[52] 이후 800년에 교황이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주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이때 주어진 서로마 황제의 지위가 실제로 정통성이 있든 아니든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시에 이 퍼포먼스를 한 사람들은 셀프로 정당성을 부여했고, 이렇게 부여된 정통성은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로 유지되었고 이후 신롬의 마지막 황제가 이 정통성을 명분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칭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들어서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제정 붕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53] 동로마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을 비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제국이 아예 망한 뒤에는 꽤 많았으나, 비잔티움은 비하 표현이 절대 아니다. 이는 고대 로마와의 구분을 위해 많은 학자들이 사용해왔던 표현이며, 동로마 내에서도 스스로를 비잔티온이라고 불렀던 경우도 많았다.[54] 당장 서로마를 무너뜨리고 일어난 게르만족 국가들조차 로마의 후예를 자칭하며 로마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르네상스기에는 로마를 중세와 대비시켜 이상 사회로 보는 시각이 대두했고, 이런 시각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중세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오늘날에조차 중세가 나쁘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전환된 것일 뿐이지, 고대 로마를 나쁘게 평가하는 시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애초에 특정 시기가 그냥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55] 비록 21세기 미국이나 서구 같은 의미의 다문화는 아니지만, 동시대 기준에서는 관용적이고 다문화적이란 의미이다.[56]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켈리의 『로마 제국』과, 로마사 입문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프리츠 M. 하이켈하임의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도 로마를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한다. 아마존닷컴에 Roman Imperialism으로 검색해 보아도 책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57] 다만 2010년대부터는 인터넷의 혐중 점서와 로마사 마니아들의 양산으로, 오히려 중국을 무조건 까고 로마를 추켜세우는 왜곡된 팬심도 자주 보이고 있다. 즉 애당초 '로마 vs 한나라'라는 떡밥 자체가 그냥 인터넷 여론에 따라 시소놀이만 하는 무익하고 유해한 떡밥인 것이다.[58] 당연하지만 삼국지의 경우 호왈백만이고, 가장 강대한 세력들이 많은 병력을 동원한 관도대전이나 적벽대전에서조차 일반적인 추정병력은 10만명대, 많아야 20만명에 미치지 못한다. 당시 삼국을 전부 합친 인구가 800만 명이 안되는 마당에 삼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같은 통일 왕조라고 해도 고대 국가가 그 정도 군대를 동원하면 망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수 전쟁에서 백만 이상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는 수나라의 경우 원정 준비로 나라의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며, 전쟁 대패 이후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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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ttgart 2005]
, column 442)1968년 Michael Grant가 쓴 The Climax of Rome에서는 330년대부터 이미 주화에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새겨졌음을 말하고 있다.(Michael Grant, The climax of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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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don 1968]
, p. 133)이후에 주로 교계에서 '새로운 로마'란 말을 쓰긴 했으나, 이는 '영원의 도시'(로마), '위대한 도시'(알렉산드리아), '거룩한 도시'(예루살렘) 같은 수식어이다.[8] 지중해와 흑해 면적을 포함하면 800만 km²에 가까워진다.[9] 포에니 전쟁 시기부터.[10] 로마 공화국 말, 로마의 인구는 지금의 대한민국 인구보다 더 많은 5,700만 명이었고 제정 시기에는 6,000만 명까지 갔다는 연구 결과가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구강국이었다(그러나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제시한 1억 2,000만 명설은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로 당시 전 세계의 인구 추정치가 약 2억 명이다. 그리고 드넓고도 비옥한 토지에서 나오는 식량을 비축했고, 상비군 수십 만과 예비병력 수백 만을 갖춘, 군대도 무기도 장교단의 질도 최강인 군사강국이기도 했다. 과학 기술은 동시대 문명들보다 수백 년 더 앞서갔으며, 건축 기술과 토목 기술은 현대에 봐도 놀라울 정도로 매우 수준 높았다. 또한 근대법의 뿌리가 로마법에 있다고 할 정도로 법학 또한 매우 수준이 높았다. 당장 민법이나 상법만 보아도 고대 로마에서 시작한 개념이 매우 많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대리행위나 법인이라던지.[11] 공화정 시절도 있는데 왜 제국(Empire)이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이건 번역의 문제이다. 라틴어 Imperium은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를 일컫는 게 아니라, '다스림'을 일컫는 말이다. 그렇기에 공화정 시대에도 정치적 의미의 통솔권, 지배권 등을 군주적 뉘앙스 없이도 Imperium이라 불렀다. '황제'로 번역되는 제정 시절의 Imperator는 중근동의 왕중왕처럼 거창한 뜻이 있는 게 아니고, 그 자체로는 그냥 담백하게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뜻일 뿐이다. 곧 Imperium Romanum은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라는 이름의 나라'가 아니라 '로마(인)의 다스림'이다. 또한 어원을 제치더라도, 공화정 시대에도 이미 로마는 일종의 식민제국이었다.[12] 이 때문에 "로마의 계승국은 어디인가" 하는 역덕후계의 우스갯소리가 있다. 자세한 건 아래 참조.[13] 이탈리아인에게 "로마의 후신국은 없다"라는 말을 한다면 한국인에게 "고구려의 후신국은 없다"라고 말했을때와 아주 똑같은 분노어린 반응이 나올 것이다.[14] 보통 어떤 식으로든 혈연 관계가 있는 사람을 고르기는 했다. 아들이 아니면 조카라거나 사위라거나 하는 식이었다.[15] 그러나 사실상 아들보다 현명한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는 없었다. 대부분은 아들이 없는 경우였다.[16] 세금 징수를 직업으로 하던 세리들이 알아서 세금을 걷던 로마식 세금 제도를 개혁해 보려던 도미티아누스는 문제 있는 황제로 낙인 찍히고 기록 말살형에 처해졌다. 이 문제는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에 가서야 개선되지만 적어도 3세기 초까지는 로마의 국가 유지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이런 조세제도를 카이사르가 공화정 말기에 개선하려 했다. 카이사르는 본인도 총독을 해봤고, 집정관 시절에 크라수스를 도와서 세리들이 걷어야 하는 세금을 낮춰주는 법안을 통과시켰기에 세리 제도의 폐해에 대해서 매우 잘 알았다. 그래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경매에 붙여서 가장 많은 세금을 걷겠다고 약속한 세리에게 세금을 속주들에서 걷을 권리를 주는 형식이 아니라, 해당 속주에서 알아서 정해진 액수만큼 걷는 형식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이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암살당했다.[17] Imperium에 대응되는 영어 Empire가 오늘날 '제국'을 의미하다보니 번역에 매우 혼란이 있는데, Imperium은 그 자체로는 '통치권'을 의미하며, 심지어 군주정 유무와도 아무 상관이 없다. 그래서 로마의 통치권Imperium을 계승했다고 자처한 신성로마제국은 흔한 단순화와 달리 고려나 발해가 고구려 보듯이 로마 제국을 본 것이 아니다. 그저 '로마가 쥐고 있던 통치권', 곧 Imperium Romanum을 지금 자신들이 쥐었다고 생각했을 뿐이다.[18]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마치 21세기 미국 같은 의미의 관용으로 봐서는 안된다.[19] 로마 시민권보다 한 단계 낮은 단계의 시민권으로, 공직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없다. 다른 권리는 로마 시민권과 동일하다. Civitas sine suffragio(영어로는 Citizenship without suffrage. 영어 위키백과)[20]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천연 시멘트의 특성으로 기술 개발이라고 할 수는 없다.[21] 시멘트 자체는 계속해서 사용되었다.[22] 전술했듯 로마 멸망 전에는 이런 농경 방식은 많이 한정적이었다.[23] 흔히 북아프리카 하면 사막을 떠올리지만,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북아프리카 해안가는 올리브와 밀 생산으로 유명하다. 특히 고대 카르타고의 영역이었던 튀니스, 알제리 지역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도 풍부한 밀 생산량을 자랑했다. 고대부터 '제국의 빵 바구니' 소리를 들었던 이집트도 마찬가지다.[24] 다만 제본 방식이 두루마리 형태에서 현재의 방식으로 바뀌었던 것은 로마 시대에도 일어났다.[25] 특정 지역의 방어선이 뚫리거나 한 곳에 적이 집중해 올 경우 추가적으로 증원하는 부대로 예비군과는 다르다.[26]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처음 제도를 만들었을 때는 동일한 지위의 황제인 정제(正帝)는 2명뿐이고, 나머지 2명은 부제(副帝)로서 정제를 보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하자마자 이 시스템이 무너진다.[27]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란 직책을 공화국 시기의 집정관처럼 만들려고 할 수도 있었다. 애초에 임페라토르가 공화정 시절에는 병사들에게서 인정받은 개선 장군을 뜻하는 말이었고, 그것이 제정 시절 들어가서 군사적인 색채를 짙게 가진 '황제'를 가리키는 명사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키케로 시대를 기준으로 가르치는 고전 라틴어에서는, Imperator(임페라토르)가 '황제'라는 뜻이라고 하지 않는다.[28] 물론, 로마 제국 전체의 역사로 보면 쇠퇴가 맞긴 하다. 나라의 서쪽 지역이 뭉텅이로 날아가고 동쪽 부분만 남은 채로 근 1천 년을 버텨야 했으니, 이걸 쇠퇴라고 안 부르는 게 되레 이상한 것이다.[29] 로마인들은 정통 교리인 아타나시우스파(삼위일체파)를, 게르만족들은 대부분 이단인 아리우스파를 믿었다. 일례로 알라리크가 로마를 함락시킬 때 성당 안에 피신한 로마 시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약탈이나 살해 등을 금한 것을 들 수 있다. 이후 성당으로 피한 이들이 안전을 보장받는 선례가 되어 기사도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도 한다. 4차 십자군이 까인 이유 중 하나로, 성당을 약탈했다는 게 들어간다. 그렇지만 훈족은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성당으로 피하든 말든 모조리 죽여버리고 약탈했다. 이런 것 때문에도 훈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30] 트라키아, 아나톨리아와 함께 동로마 제국의 본토 역할을 했고, 서트라키아는 현재 그리스 영토다.[31] 고대 로마의 발상지이자 본토였다.[32] 남부의 극히 일부 지역만이 일시적으로 로마군에게 점령당했고, 나머지는 대부분 게르만족의 땅이었다.[33] 동로마 제국의 수도 노바 로마를 지금까지 지배하고 있다.[34] 메디올라눔(밀라노) 대주교였던 성 암브로시오(340~397)가, 지방마다 단식일이 다른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밀라노에선 밀라노의 단식일을, 로마에선 로마의 단식일을 따른다는 의미. 원래는 이 구절 뒤에 '다른 데에 가면 다른 곳의 법을 따르라(si fueris alibī, vīvitō sicut ibi)'라는 구절이 따라온다. 그런데 잘 곱씹어 보면 암브로시우스 당시의 시대상이 보인다. 여기서의 '로마'는 로마 제국이 아니라 밀라노와 대응되는 도시 로마(로마市)를 지칭하는 것이다. 오히려 본인이 밀라노 대주교라서 저 시점에서는 점점 쇠퇴해가는 로마市 대신 서로마의 사실상 수도였던 밀라노의 독자성을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35] 19세기 캅카스에서 튀르키예와 중동으로 대거 이주한 '무슬림' 민족인 체르케스인들은 레즈긴카라는 남녀가 함께 추는 춤 문화가 있었는데, 중동의 아랍 무슬림들은 체르케스인 난민들의 레즈긴카 춤을 보고 이들이 무슬림인데도 어떻게 여자들이 남자랑 같이 공개적으로 손을 잡고 춤을 추냐며 상당히 괴이하게 여겼다 한다. 즉 종교적 차이 외에도 지역 문화와 정서상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다.[36] 특히 학계를 넘어 국가적 프로파간다로 '로마의 후계자'를 자칭하거나 '제3의 로마' 같은 호칭을 만든 나라들이 많다. 그만큼 예전에는 누가 로마의 정통한 계승자였는지가 큰 쟁점이었다.[37] 위 콘이 바로 해당 갤러리에서 사용되는 것이다.[38] 로마+아스퍼거 증후군. 일부 철덕이나 버덕들이 비상식적인 언행을 보여 철스퍼거, 버스퍼거 등의 멸칭을 얻었듯 같은 원리로 로마 얘기만 나왔다 치면 특정 국가 추종자들이 제3의 로마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탄생한 별명이다.[39] 러시아 역사 중 소비에트 연방 시기에는 이 로마 제국의 계승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로마 특유의 패권주의, 국제주의, 보편 제국의 속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난 시기, 즉 가장 로마다운 때가 이 소비에트 연방 시기였다.[40] 단, 동로마는 '불가리아의 황제' 칭호만 인정하고 로마 황제까지 칭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았다.[41] 위키백과에도 로마 제국의 본토라는 의미에서 Roman Italy라는 문서가 존재한다.[42] List of Byzantine Greek words of Latin origin(영어 위키백과: 라틴어 어원을 둔 비잔티움 시대 그리스어 어휘 목록) 참조.[43]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113p, 원문 'a conscious and active political identification with romanitas required until the era of Justinian's reign at least a basic knowledge of Latin.'[44] 한국인들이 자국을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호 대신 일상 대화에서는 편하게 한국이라고 부르듯이, 후대 동로마에서 동로마인들이 자국을 편하게 불렀던 이름이 로마니아이다.[45] Grant Parker has written that “the birth of the name Romania in the fourth century testifies to the need to distinguish between the City and what had by now become a world empire.[46] 다만 학술서에서도 로마사를 서로마 붕괴까지만 잡거나 동로마를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하는 경우가 잦은데, 이는 단지 관습적 구분이다. 오늘날엔 동로마가 로마 제국이라는 데 이무런 이견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동일한 Francia가 프랑크-서프랑크-프랑스로 아무런 비하 없이 관습적으로 구분되듯이) 로마사의 관습적 구분을 굳이 '동로마 부정'으로 읽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뉘앙스에 따라선 '동로마 부정'을 함의할 순 있으니 결국 맥락을 봐야 한다.[47] 물론 현대 그리스에서도 고대 그리스 및 고대 로마사에 대한 학술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48] 비슷한 예시로 현대 이집트 역시 이슬람의 침공으로 인해 이전에 비해 큰 문화 변혁을 겪어 엉뚱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주민들이 정통성을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49] 현대적인 민주주의의 개념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로마 공화국은 모든 시민들에게 주권이 있는 국가가 아니었다. 단지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집정관, 사법관, 조영관, 재무관, 감찰관, 호민관, 원로원, 민회 등의 여러 개의 통치 기관을 둔 것을 공공의 것(Res Publica)으로 부른 것뿐이다. 현대적인 대통령제와도 다르며, 정무관 중 최고위직이었던 집정관이 로마라는 국가를 대표하는 것 또한 아니었다. 서로 다른 직무의 정무관들은 자신의 업무에 대한 개별적인 책임을 졌다.[50] 집정관은 동로마 시절까지 유지되다가 887년에 폐지되었다. 호민관은 세베루스 왕조 시기에 없어졌고, 원로원은 명시적으로 폐지된 적이 없다.[51] 사실 이 칭호 또한 결코 겸손한 칭호는 아니고, 로마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진 원로원 집단 내에서 1인자를 하고 있다는 엄청난 권력의 상징이다. 하지만 세나투스 프린켑스(원로원 1인자)는 아우구스투스가 최초로 만든 것도 아니고 예전부터 존재했던 칭호였다. 다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만큼 개인을 신격화하는 의미는 아니었으며 기존 공화정에 존재하던 칭호인만큼 아우구스투스가 공화정의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티내기 위한 칭호였다.[52] 이후 800년에 교황이 카롤루스 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지위를 주는 퍼포먼스를 하는데, 이때 주어진 서로마 황제의 지위가 실제로 정통성이 있든 아니든 이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당시에 이 퍼포먼스를 한 사람들은 셀프로 정당성을 부여했고, 이렇게 부여된 정통성은 1806년까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로 유지되었고 이후 신롬의 마지막 황제가 이 정통성을 명분으로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칭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이 들어서 1918년까지 유지되었다.(제정 붕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53] 동로마의 정통성을 부정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비잔티움이라는 표현을 비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제국이 아예 망한 뒤에는 꽤 많았으나, 비잔티움은 비하 표현이 절대 아니다. 이는 고대 로마와의 구분을 위해 많은 학자들이 사용해왔던 표현이며, 동로마 내에서도 스스로를 비잔티온이라고 불렀던 경우도 많았다.[54] 당장 서로마를 무너뜨리고 일어난 게르만족 국가들조차 로마의 후예를 자칭하며 로마 황제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르네상스기에는 로마를 중세와 대비시켜 이상 사회로 보는 시각이 대두했고, 이런 시각은 근대까지 이어졌다. 중세를 재평가하기 시작한 오늘날에조차 중세가 나쁘지 않았다는 관점으로 전환된 것일 뿐이지, 고대 로마를 나쁘게 평가하는 시각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애초에 특정 시기가 그냥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55] 비록 21세기 미국이나 서구 같은 의미의 다문화는 아니지만, 동시대 기준에서는 관용적이고 다문화적이란 의미이다.[56]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켈리의 『로마 제국』과, 로마사 입문의 교과서로 여겨지는 프리츠 M. 하이켈하임의 『하이켈하임 로마사』에서도 로마를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한다. 아마존닷컴에 Roman Imperialism으로 검색해 보아도 책이 상당히 많이 나온다.[57] 다만 2010년대부터는 인터넷의 혐중 점서와 로마사 마니아들의 양산으로, 오히려 중국을 무조건 까고 로마를 추켜세우는 왜곡된 팬심도 자주 보이고 있다. 즉 애당초 '로마 vs 한나라'라는 떡밥 자체가 그냥 인터넷 여론에 따라 시소놀이만 하는 무익하고 유해한 떡밥인 것이다.[58] 당연하지만 삼국지의 경우 호왈백만이고, 가장 강대한 세력들이 많은 병력을 동원한 관도대전이나 적벽대전에서조차 일반적인 추정병력은 10만명대, 많아야 20만명에 미치지 못한다. 당시 삼국을 전부 합친 인구가 800만 명이 안되는 마당에 삼국은 말할 것도 없고 한나라같은 통일 왕조라고 해도 고대 국가가 그 정도 군대를 동원하면 망할 수 있다. 실제로 고구려-수 전쟁에서 백만 이상을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는 수나라의 경우 원정 준비로 나라의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며, 전쟁 대패 이후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