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비아 역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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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 고대 이집트 벽화에 묘사된 리비아인
리비아라는 어휘의 명칭은 시대마다 다양하게 변화해왔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기 영토 서쪽에 사는 사람들은 전부 싸잡아서 리비아라고 불렀으며, 고대 카르타고와 우티카를 중심으로 정착한 페니키아인들 역시 자신들과 조우한 북아프리카 해안지대 주민들을 싸잡아서 리비아라고 부르던 편이었다.
리뷔에에 사는 부족들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이귑토스를 기점으로 첫 번째 리뷔에 부족은 아뒤르마키다이족이다. 그들의 관습은 대체로 아이귑토스인들과 같지만, 그들의 복장은 다른 리뷔에인들과 같다. 여인들은 양쪽 복사뼈에 발찌를 차고 다니고 머리를 길게 기른다. 그들에게는 또 결혼 적령기의 처녀들을 왕에게 보이는 관습이 있는데, 그중 왕의 마음에 든 처녀는 처녀성을 잃게 된다. 이들 아뒤르마키다이족은 아이귑토스에서 플뤼노스라는 항구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 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헤로도토스의 역사
오늘날 리비아에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은 고대 리비아라고 불렸던 지역 중 키레나이카 아니면 트리폴리타니아 일대를 포함한 개념이다. 키레네와 벵가지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기원으로 한다. 한 편 페니키아인들 역시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리비아 해안지대에 식민지를 건설하는데, 대표적으로 렙티스 마그나[1]가 있다.
고대 이집트가 쇠락하고 대신 고대 카르타고가 강성해지면서, 리비아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대신 카르타고의 영향력이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고대 카르타고는 리비아 해안지대 각지에 대농장을 건설하는데 이는 고대 로마의 라티푼디움의 기원이 되었다. 고대 카르타고 인구의 중추는 페니키아인 식민 이주자들과 현지 리비아인들의 혼혈로 이들이 사용한 언어를 푸닉어라고 불렀다. 여기서 지칭하는 리비아인이라는 표현은 오늘날의 리비아 일대의 원주민 뿐만 아니라 알제리와 튀니지, 리비아 해안 지대 원주민들을 싸잡아서 일컫는 표현이다.
제3차 포에니 전쟁(BC 149~146)으로 카르타고가 멸망하면서 리비아 해안지대는 로마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페잔의 경우는 기원전 19년 로마가 페잔을 점령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로마가 제정으로 이행한 이후 이 지역은 전란에 휘말리는 일이 비교적 드물었는데, 리비아 내륙에 위치한 가라만테스 왕국의 세력이 로마 제국을 위협할 수준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의 지배 하에서 리비아 내륙 지방에도 관개시설이 확충되면서, 리비아 내륙 지방에서도 라티푼디움이 운영되었다. 렙티스 마그나에서는 2세기 후반 세베루스 왕조의 시조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재위 193~211)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2. 중세
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과정에서 리비아에는 내륙 지방의 원주민들의 침공, 도나투스파와 보편 교회 사이의 갈등 같은 혼란상을 거치다가, 게르만계 반달족의 침공을 받았다. 반달족들은 번영하던 북아프리카에 터전을 잡고 반달 왕국을 건설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가 서기 6세기 반달 왕국을 멸하고 다시 북아프리카를 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7세기 아랍 이슬람 제국이 이집트를 거쳐서 리비아를 침공하였다.서기 3~7세기 사이의 혼란상을 거치며 리비아 내륙 지방의 대농장들은 황폐화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 운영되던 북아프리카 관개 수로들이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자,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기후 특성상 지하수의 염분이 표토층에 잔류하는 토양 염화가 진행되며, 대농장들은 급속히 사막화되었다. 사막화 문제는 가라만테스 왕국이 위치했던 페잔 지역에서 더 심각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본래 가라만테스 왕국은 남쪽의 흑인 노예들을 납치하여 관개수를 캐서 농장에 물을 대곤 했으나, 인력으로 채수가 가능한 지하수 자원이 고갈되자 급속히 붕괴되었다.
한 편 리비아 일대가 이슬람화되면서 지중해 넘어 기독교권과의 무역이 중단되자 해당 지역의 대도시들은 차례차례 해체되었다. 북아프리카의 주요 산업은 해적질이 되었고,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 북부 약탈에 좀 더 유리한 지점이었던 튀니지와 알제리 일대에 터를 잡았다. 그 결과 리비아 해안지대 역시 일종의 변방 지대로 방치되기 이른다. 서기 10세기부터 12세기까지는 시아파 이스마일파 계열의 파티마 왕조가 이 지역을 장악했으나, 파티마 왕조는 이 곳을 중요하게는 여기지 않았다. 파티마 왕조가 몰락한 이후 리비아는 이집트보다는 이웃한 튀니지나 알제리 지역의 영향력을 더 많이 받게 되는데, 대표적으로 리비아의 주요 마드하브가 샤피이파가 아닌 말리키파인 점을 들 수 있겠다.
3. 근대
자세한 내용은 트리폴리 문서 참고하십시오.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별 문제 없이 속주에 머물러 있었다. 1711년 트리폴리타니아에 잠시 카라만르 왕조[2]가 들어서기도 했다. 이 왕조를 중심으로 리비아를 구성하는 세 지역들이 서서히 통합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835년에 오스만이 리비아 지역을 되찾았다.
1911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면서 이탈리아의 식민지가 되었다.(이탈리아령 리비아) 이탈리아의 식민 통치 시절 오마르 무크타르 등이 이탈리아를 상대로 독립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결국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이끄는 이탈리아군에게 진압되었고 이후 이탈리아는 리비아에 대한 강압적 통치를 실시했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등 추축국과 미군, 프랑스군, 영국군 등 연합군들의 격전지가 되었고, 유명한 토브룩 전투가 키레나이카에서 벌어졌다. 2차 대전 후에는 패전국 이탈리아의 영토였기에 프랑스와 영국이 분할 통치하다가, 1951년에 영국령의 트리폴리타니아(Tripolitania, 아랍어로 طرابلس), 키레나이카(Cyrenaica, برقة) 토후국, 프랑스령의 페잔(Fezzan, فزان) 세 지역을 합쳐 세누시 왕조의 리비아 왕국으로 독립했다. 독립 당시의 리비아 왕국은 매우 가난한 최빈국이었으나 1961년에 대량의 석유가 발견되면서 완전히 역전되어 아프리카에서 가장 잘사는 국가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석유 산업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왕정에 대한 지지도는 급속하게 떨어지게 되었다.[3]
4. 카다피 독재정권기
자세한 내용은 리비아 아랍 사회주의 인민 자마히리야 문서 참고하십시오.1969년에 육군 장교 무아마르 카다피는 국왕 이드리스 1세가 해외 순방 겸 해외 치료(당시 나이 80세였다.)를 나간 틈을 노려 쿠데타를 일으켜(이 당시 카다피의 계급은 일개 대위였다.[4]) 왕정을 폐지하고 나세르주의에 입각한 아랍 사회주의 국가(리비아 아랍 공화국)를 세웠다, 카다피는 집권 후에 석유국유화를 전면적으로 단행하여 거대 석유 회사와 소수 계층에서 쏠렸던 부를 재분배시켰고 1973년에 전격적인 유가 인상을 주도하여 리비아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그 결과 당대 리비아는 아프리카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인 수준으로 잘사는 그야말로 부자 국가가 되었다.[5] 그리고 카다피는 반미-반서방-반이스라엘 노선을 대대적으로 내세우며 여러 테러 활동에도 지원을 내보내서 카다피는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주목받는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카다피의 쿠데타로 왕위를 잃고 페위당한 이드리스 1세는 여러 국가들을 전전하다 이후 이웃나라인 이집트로 가서 살다가 1983년 노환으로 병사했다.
1988년 크리스마스 날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일어난 팬암 103편 폭파 사건, 9개월 뒤 UTA 772편 폭파 사건의 연쇄 비행기 폭파를 포함하여 베를린 나이트클럽 폭탄 테러 등 여러 테러 사건에 연루되어 미국의 공습을 받았다. IRA 등 타국의 테러조직을 지원하기도 했다.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프리카에서 오랫동안 군림 중이었던 독재자 중 하나로, 그의 패션 센스를 포함한 각종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해외에 방문할 때는 항상 유목민처럼 커다란 텐트를 치고 숙소로 삼는데, 뉴욕에 방문해서도 똑같이 하려다가 미국 시민들의 주거지 침해로 무산되었고, 2009년 UN 총회에서 96분간 장시간 연설로 지루함과 짜증남 때문에 참석자들은 하나 둘 회의장을 떠났고, 결국 다음 연설자인 이명박 전 대통령이 텅빈 회의장에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카다피의 통역은 중간에 실신해서 새로운 통역으로 교체되었다. CNN의 보도에 따르면 UN 직원들도 60년 역사상 가장 정신나간 사건으로 뽑는다고 한다.
카다피는 자신의 이념을 담은 "녹색서"라는 이름의 소책자를 배포하고 그에 따라 사회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일례로 모든 주택은 공공주택이었는데 '사람이 없는 집은 들어가 살 수 있다'라는 원칙이 있어 집주인이 안에서 걸쇠를 걸지 않는 한 모든 집에 맘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외교 정책에서는 처음에는 아랍국가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으나 사이가 틀어지자 아프리카 국가들로 급선회했다. 스스로를 아프리카의 영웅으로 띄우면서 아프리카를 제2의 USA 즉 United States Of Africa로 만들려고 했다. 이를 위해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다른 독재 국가에 돈을 뿌렸다.
팬암기 사건 이후 서방 세계의 경제 제재 조치로 경제는 피폐해졌으나 그럼에도 인구가 적어서 쌓아 놓았던 건 많았던지라 알제리나 베네수엘라, 멕시코 등의 산유국들이 빈곤층의 급증이나 실업난, 정치 불안으로 격변기를 맞고 있을 순간에도 경제 파탄은 피했다. 2000년대 들어 대량 살상 무기를 포기하고 과거 테러 보상을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상당 부분 경제 제재가 풀리고 다시 고유가 시대를 맞이하면서 다시 호황을 누렸다.
2011년 아랍의 봄을 타고 일어난 민주화 시위가 1차 리비아 내전으로 확대되면서 카다피의 권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6] 2011년 2월 말에서 10월 23일까지 내전이 이어졌고, 반군과 서방의 공격으로 카다피는 결국 사망하면서 혁명은 성공했다.
5. 제2차 리비아 내전
하지만 내전으로 모든 것이 마비되었고 역시나 아랍의 겨울이 도래해 2011년 이전처럼 치안이 회복되지는 못했다. 결국 카다피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 들어선 임시정부가 이슬람주의파와 세속주의파간 갈등으로 정부가 2014년 트리폴리 정부와 토브룩 정부로 갈라지고 이 두 세력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면서 제2차 리비아 내전이 발발하였다. 한편 내전 와중에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ISIL)가 리비아에서 지부를 만들어 시르테와 벵가지 등을 점령하며 리비아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트리폴리 정부와 토브룩 정부, IS의 3파전으로 번지며 리비아는 혼란에 빠졌다. 자세한 내용은 제2차 리비아 내전 문서 참조.2015년과 2016년 사이에 내전을 벌이던 각 두 정부가 유엔의 중재로 통합 정부 수립에 합의했다. 그러나 통합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토브룩 정부가 유엔 중재하에 성립된 통합 정부와의 합류를 거부하고 인정하지 않으면서 완전한 정부통합을 이루지는 못했고, 결국 토브룩 정부를 끌어들이지 못한 불완전한 상태에서 트리폴리 정부만이 권력을 통합 정부에게 이양하여 2016년 리비아 통합 정부가 수립되었다.
2016년과 2017년 사이 서부의 리비아 통합 정부군과 동부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의 토브룩 정부 휘하의 리비아 국민군(LNA)이 IS가 장악하고 있던 시르테와 벵가지를 공격해 각각 도시 여러 곳을 함락시켜 IS를 섬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IS와 전쟁 중인 아랍 국가들 중에서 IS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첫 번째 나라가 되었다.[7] 하지만 IS가 토벌되었지만 불완전한 상태에서 성립된 통합정부와 통합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던 토브룩 정부와 일부 트리폴리 정부 세력들의 저항과 반발로 정국 혼란은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유엔 중재로 성립된 리비아 통합정부를 인정하지 않던 토브룩 정부도 국제사회의 중재 아래 리비아 통합정부와의 협상에 나섰다.
####그리고 2017년 7월 리비아 통합정부의 사라지 총리와 토브룩 정부 소속 리비아 국민군(LNA) 칼리파 하프타르 사령관이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회동을 하여 가능한 빠른 시일 내에 휴전과 선거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선거의 시기를 놓고 양대 정파 간의 갈등이 벌어져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결국 12월 10일 프랑스의 중재 하에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로 합의안이 나오면서 이러한 리비아 양대 정파들의 평화 행보에 희망적인 견해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 실시를 두고 양측이 벌인 협상에서 두 정부 사이에 의견이 엇갈리고[8] 정국 혼란이 가중되면서 12월에 치러질 예정이던 선거는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며 파행을 거듭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19년 4월 봄 동부 토브룩 정부의 칼리파 하프타르 사령관은 리비아 통합 정부가 지배하는 트리폴리 등 서부 지역으로의 진격을 지시, 수도 트리폴리를 위시한 서부 지역만 통치하던 리비아 통합 정부에 대한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서부의 리비아 통합 정부와 동부의 토브룩 정부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한편 하프타르가 트리폴리를 공격하자 파예즈 알 사라지 리비아 통합정부 총리는 하프타르가 배신을 했다며 하프타르와 동부 토브룩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했고, 유엔과 국제사회 역시 트리폴리를 공격한 동부 토브룩 정부 휘하의 칼리파 하프타르 LNA 사령관을 규탄하며 무력 공격을 멈추고 협상에 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프타르는 이러한 유엔과 국제사회의 비판여론을 무시하며 서부 리비아 통합정부에 대한 군사적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비록 군사력과 규모에 있어서는 하프타르의 LNA군이 우세하지만 서부 통합정부의 정부군도 LNA군에게 격렬하게 저항하여 수도 트리폴리를 방어하면서 전쟁은 막상막하의 양상을 보이고 있는 중이다. 자세한 것은 2차 리비아 내전 문서를 참고. 한편 카다피 정권 붕괴 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자 리비아 내 일각에서는 카다피의 쿠데타로 축출됐던 알 세누시 왕조의 왕정복고를 거론하는 이들도 소수나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2020년 터키가 리비아 내전의 군사개입을 단행하여 서부의 통합정부군을 지원하면서 전세는 서부의 통합정부군에게 유리해졌고, 터키의 지원을 받은 통합정부군은 동부 토브룩 정부의 리비아 국민군(LNA)에게 빼앗기거나 LNA의 세력권에게 갇혀 고립되어있던 서부 리비아의 주요 기지와 도시들을 탈환, 영토를 연결하면서 통합정부군은 LNA로부터 빼앗긴 서부 영토의 절반을 수복했다. 그리고 터키의 지지에 전세 역전에 성공한 통합정부군은 시르테 등 리비아 중부 지역의 요충지에 대한 공격령을 단행하면서 전세는 LNA에게 불리해졌다. 한편 내전 초반에 서부 통합정부군을 압살하다 터키의 개입에 밀리던 LNA의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은 이웃나라 이집트의 지원을 요청했고, 무슬림 형제단이라는 같은 적을 둔 이집트의 압델 파타 엘 시시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개입하여 LNA를 직접 지원하겠다며 리비아 내전에 대한 군사 개입 가능성을 시사하면서 리비아의 내전 상황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트리폴리에서 젊은이들이 민생고를 호소하며 리비아통합정부(GNA)에 분노를 터뜨리고 있다.#
그러나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유엔 등 국제사회의 평화협상 중재 노력은 계속되었고, 2020년 11월 리비아 통합정부와 리비아 국민군이 영구 휴전협정에 서명했고, 동년 11월에는 새 정부 구성을 위한 총선 실시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2021년에는 선거때까지 임시로 국가를 관리할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는데 과연 카다피 정권 몰락 이후 정국 혼란이 이어지면서 아랍의 봄의 실패 사례로 남았던 리비아가 내전을 종식시키고 민주주의와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을지가 관건으로 보여진다.
6. 휴전 이후
6.1. 2020년
10월 26일. 리비아통합정부(GNA)가 카타르와 안보 협정을 체결했다.#11월 13일. 리비아 내 정파들이 2021년 12월에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치른다는 데 합의했다.#
6.2. 2021년
1월 28일 미국은 리비아에 주둔해있는 러시아와 터키군을 포함한 모든 외부 당사자들의 리비아에서 철수를 촉구했다.#2월 5일 오랜 내전을 겪은 리비아에서 올해 하반기 정식 선거가 진행되기 전까지 과도 정부를 이끌 지도부가 선출되었다.#
2월 13일 리비아의 압둘-하미드 모함메드 드베이바 신임 총리가 새로운 통합 정부의 구성에 정식으로 착수한다고 발표하였다.#
2월 21일 리비아통합정부의 내무장관인 파티 바샤가가 타고 있는 호송차가 수도 트리폴리에서 무장 괴한들에게 총격을 당했다. 장관은 부상을 입지 않고 무사히 현장에서 탈출했다.#
3월 10일, 2021년 12월 치러질 총선을 관리할 통합정부의 내각 인선안이 의회를 통과했다.#
3월 1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가 북아프리카 리비아에 주둔 중인 외국 군대와 용병들에게 즉시 철수할 것을 현지시간으로 12일 의장성명을 통해 촉구했다.#
3월 15일 총선을 관리할 임시 과도정부가 취임했다.#
3월 27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리비아 임시정부의 수반 격인 국가자문위원회(presidency council) 의장을 만났다.#
6월 20일 리비아 과도정부가 오랫동안 분단됐던 동서 도시들 사이를 잇는 지중해 해안 고속도로의 봉쇄를 풀고 내전으로 쪼개졌던 국토를 하나로 통합하는 고속도로 운행을 시작했다고 AP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10월 24일, 12월에 실시될 리비아 대통령 선거에서 대선 후보 등록이 내달 시작된다고 리비아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동쪽 정부에서 자칭 리비아 국민군(LNA)을 이끄는 군벌 칼리파 하프타 장군이 유력 후보로 거론되고 있으며, 카다피 전 원수의 차남인 사이프 알이슬람 카다피도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카다피의 차남과 칼리파 하프타르 리비아 국민군(LNA) 사령관에 이어서 과도내각의 압둘 하미드 드베이다 총리 역시 대선 출마를 발표했다. 그러나 리비아 선거관리위원회는 사이프의 출마를 불허하면서 사이프의 대선 출마는 불발로 그치다가 다시 허용한 것이다.#
12월 6일 리비아 중앙은행이 내전으로 인해 그 동안 동서로 양분되어있던 은행을 하나로 통합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2021년 대선이 2일 앞두고 치르지 못하게 됐다.# 올해 대선이 연기되었다. #[9]
6.3. 2022년
압둘-하메드 드베이바 리비아 총리는 1월 2일 그의 정부가 2023년에 총선을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드베이바 총리는 "리비아 통합 정부와 국가 선거위원회는 리비아의 전국적인 총선거를 실시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고 이 날 국무회의에서 밝혔다고 신화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2월 10일 리비아에서 총리 암살 시도(!)가 일어났다.#
5월 18일 트리폴리에서 전투가 있자 총리가 탈출했다.#
5월 29일 리비아에서 외국군들이 활개치면서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유엔 보고서에 언급되었다. #
7월 23일 2년간 리비아를 통치한 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유족이 몰타 은행에 보관된 카다피 일가의 돈을 리비아로 돌려보내라는 몰타 법원의 결정에 항소했다.#
8월 28일 폭탄 테러가 일어나 23명이 숨졌다 #
유엔의 리비아 파견특사 암둘라예 바실리는 12월 31일 리바아의 총선이 2023년에는 실시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그는 "2023년은 리비아에 지속가능한 평화와 번영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총선이 실시되어 그 동안 잃었던 기회를 만회하게 될 것" 이라고 밝혔다.#
6.4. 2023년
압둘-하메드 드베이바 리비아 총리는 1월 2일(현지시간) 그의 정부가 2023년에 총선을 실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발표했다. 드베이바 총리는 "리비아 통합 정부와 국가 선거위원회는 리비아의 전국적인 총선거를 실시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다"고 이 날 국무회의에서 밝혔다고 신화통신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2023년은 선거의 해, 민간기관의 통합의 해, 이를 위한 전국적인 조직과 기관들이 성공적인 선거를 지원하기 위해 힘을 합치는 해가 될 것"이라고 드베이바 총리는 말했다. 드베이바 총리는 이번 총선 실시 외에도 정부가 리비아의 개발을 위해 무장 투쟁과 테러, 내전의 종식 등을 최우선으로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리비아 정부는 현재 국회의 하원이 지명한 정부와 최근 선출된 정부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데 합의한 트리폴리의 국민통합당 정부로 양분되어 있는 상황이다.#유엔 리비아지원단( UNSMIL)의 압둘라예 바실리 대표는 5월 13일(현지시간) 유엔은 리비아의 민주정부 선출을 위한 종합적인 선거법을 마련하기 위해 리비아의 합동 법률위원회를 전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바실리 대표는 수도 트리폴리에 있는 UNSMIL 본부에서 리비아의 6+6 위원회 멤버들과 만나 회의를 하는 중에 이 같은 말을 했다고 리비아의 UNSMIL 트위터 계정을 통해 밝혔다. 6+6 위원회는 리비아의 국가최고위원회 위원 6명과 국회의 하원의원 6명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앞으로 다가오는 선거들을 위한 선거법을 제정하는 임무를 맡고 있다. UNSMIL 은 "바실리 대표는 리비아에서 총선과 여러 선거를 실시하는데 필요한 선거법들을 이 위원회가 책임지고 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면서 이를 위해 유엔 파견단도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 할 것을 약속했다고 밝혔다.#
8월 16일, 수도 트리폴리에서 군벌 간 무력충돌이 발생해 최소 55명이 사망했다.#
6.5. 2024년
# 압둘라예 바실리 유엔사무총장 리비아 파견 특사는 리비아의 선거법 제정과 통합 정부 구성으로 조속히 이 나라의 선거를 실시할 것을 리비아 정부에 권고했다고 유엔 고등국무회의(HCS) 국가들을 향해서 9일(현지시간) 발표했다.[1] 원래는 카르타고의 도시였으나 로마제국에 편입되었다 이 도시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있다. 북아프리카 최대의 로마 유적지로 198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2] 알바니아계 태수가 오스만 제국에 종속된 형태의 자치국 형태로 세운 국가로 악명높은 바르바리 해적을 서포트하다 미국에게 된통 털리는 그 왕조이다.[3] 이는 석유 산업 및 경제 개발을 통한 부의 재분배가 이뤄지지 못해 왕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약화되어 이란 혁명이 일어나 왕정이 폐지당했던 이란에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다만 인구 수 8천만명을 넘을 정도로 중동에서 인구대국인 이란과 달리, 리비아는 600만을 웃도는 수준으로 인구 수가 이란보다 적다.[4] 물론 리비아같이 인구가 적은 나라에서는 실제론 위관이라 해도 장관급의 지위를 갖고 있는 경우도 많으므로 아주 뜬금없는 일은 아니다.[5] 1970년대 당시에 지금의 카타르보다 조금 못하는 수준은 될 정도로 경제가 성장한 나라였다고 보면 된다.[6] 이들은 리비아 공화국이 정권을 잡기 전의 지배자이자 카다피의 쿠데타로 전복됐던 리비아 왕국의 국기를 다시 내걸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왕국'의 국기라서 내건 것(왕정복고)은 아니고 카다피가 통치한 42년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의미이다.[7] 그 다음은 이라크와 시리아.[8] 선거 방식과 여러 정파 참여자들의 출마권 부여와 권력 분배 문제를 두고 서부 통합정부와 동부 토브룩 정부 측 사이에 이견이 엇갈렸다.[9] 1년 연기다 정상적으로 하게 된다면 2022년 12월 쯤으로 하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