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1 12:03:46

호라티우스

파일:Quintus_Horatius_Flaccus.jpg
이름 퀸투스 호라티우스 플라쿠스(Quintus Horatius Flaccus)
출생기원전 65년 12월 8일, 이탈리아 남부 베누시아
사망기원전 8년 11월 27일 (향년 56세), 밀라노

1. 개요2. 생애3. 저작과 미학4. 후대 시인과 문학가들에게 준 영향

1. 개요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가장 유명한 시인이다. 생전에도 괜찮은 명성을 누렸고, 인문주의, 고전주의 작가들의 숭상의 대상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서구권에서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그의 작업물들은 필독서들로 여겨진다.

카르페 디엠이라는 경구로 특히 유명하다.

2. 생애

기원전 65년 해방된 노예 (라: libertinus)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업무를 이유로 로마로 상경했고, 호라티우스는 문학과 문법을 공부했다. 교육에 열광적이었던 아버지는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호라티우스를 그리스 철학의 본고장 아테네로 보내서 시학과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등을 공부하게 하였다. 한편 기원전 44년 로마에서는 카이사르브루투스와 원로원들에게 암살당해 전 사회가 뒤흔들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카이사르파와 공화파의 내전이 발발하자 호라티우스는 공화파에 가담했지만,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의 군대에 의해 짓밟혔다. 아버지의 재산을 완전히 몰수당한 뒤 호라티우스는 정치적 야망을 모두 포기했다.

호라티우스는 로마의 분위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본국으로 돌아와 재무서기관을 역임하고 간간히 시를 썼다. 그를 주목한 베르길리우스를 통해 외교관이자 예술 후원자인 마이케나스를 만났고, 그 덕에 유럽의 정치적 사건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악티움 해전 즈음 오늘까지 간직된 글 중에는 가장 오래된 "미해"를 완성하고[1], 기원전 23년에는 과거의 적이었으나 이제는 프린켑스의 자리에 오른 옥타비아누스에 대한 "찬송시"를 작시했지만, 기대에 비해 성공했다기엔 얻은 바가 미미했다. 기원전 20년 즈음부터 인생 철학을 담은 "서간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특히 에피쿠로스의 영향이 돋보이는 시집이었다.

3. 저작과 미학

호라티우스의 초기 저작은 "풍자"와 "미해"(라: Epodon liber)[2]였다. 순수한 미학적 시가 아닌 신랄한 풍자로 교훈을 주는 것에 초점을 두었다. 커리어가 초토화되고 꿈도 희망도 없다고 시절의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찬송시"(라: Odes)로 시작한 중기 저작은 초기의 공격성을 잃고 미학적,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후기의 "서간시"(라: Epistulae)는 정치적 의무에서 벗어나, 보다 내면에 충실한 시다. 자기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집대성해서 인생을 돌아보았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관심을 보이기까지 하는 등 전기와 중기작에 비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4. 후대 시인과 문학가들에게 준 영향

시대를 풍미하던 베르길리우스에 비하면 조촐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지만 호라티우스도 나름 유명했던 시인이었다. 약 800년 뒤 카를 대제의 고대 로마 문학 재발굴 시대인 "카롤링거 르네상스" 때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16세기/17세기부터 명실상부한 로마 시대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1] 호라티우스 작업물 전체가 정확한 날짜를 가늠하기 힘들다[2] 엄격한 규율에서 벗어나 금지된 표현들도 서슴치 않고 쓰는 그리스 시학 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