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9:03:00

폼페이: 최후의 날

폼페이: 최후의 날 (2014)
Pompeii
파일:external/oneringtrailers.com/1002025QMZQU8ITM.jpg
감독 폴 W. S. 앤더슨
출연 킷 해링턴
에밀리 브라우닝
키퍼 서덜랜드
애디왈레이 애키누에이아그바제이
장르 모험, 드라마, 재난
개봉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년 2월 20일
상영 시간 104분
제작비 1억 달러
월드 박스오피스 $117,831,631
대한민국 총 관객수 1,373,873명
국내등급 파일:영등위_15세이상_2021.svg 15세 이상 관람가

1. 개요2. 시놉시스3. 예고편4. 줄거리5. 흥행 및 평가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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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4년 2월에 개봉된 소니 픽처스의 재난, 드라마 영화. 고대 로마 시대의 폼페이 화산 폭발을 다뤘다.

2. 시놉시스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배급사 공식 시놉시스
사상 최대의 화산 폭발!
화려했던 도시는 사라지고. 사랑은 전설이 되었다!

어릴 적 로마 군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은 뒤 노예 검투사가 된 ‘마일로’(킷 해링턴)는
폼페이 영주의 딸 ‘카시아’(에밀리 브라우닝)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풍요를 기원하는 비날리아 축제의 대규모 검투 경기에 참여한 ‘마일로’는 자신의 부모를 죽인
'코르부스'(키퍼 서덜랜드)를 발견한다.

로마의 상원 의원이 된 ‘코르부스’는 ‘카시아’와 정략 결혼을 계획하고, '마일로'는 부모의 복수와 자신의 연인을 지켜내기 위해 목숨을 건 최후의 검투에 나선다.

그 순간 갑자기 폭발을 시작하는 베수비오 화산!
도망칠 새도 없이 쏟아지는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에 폼페이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는데…

3. 예고편


4. 줄거리

이 문단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때는 로마 제국이 영국을 브리타니아 속주로서 점령하여 다스리던 시기. 켈트 유목 부족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다. 당시 총독 '코르부스'는 이를 잔혹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학살도 서슴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 '마일로'는 부모와 부족 전체가 눈앞에서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한 후 방랑하다 붙잡혀, 성인이 되어서는 론디니움에서 최강의 전적을 자랑하는 검투사 '켈트'[1]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하지만 그의 실력에 주목한 귀족 '벨라토르'는 그를 좀 더 로마 본토와 가까운 곳에서 흥행거리로 써먹을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그를 '폼페이'로 끌고간다.

한편 1년동안의 지겨운 로마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폼페이로 내려오던 폼페이 영주의 딸 '카시아'는 귀향도중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끌려가고 있던 마일로와 마주치게 된다. 말이 고통스러워 하고 있음을 직감한 마일로가 직접 나서 말을 안락사시키는 것을 보고 그에 대해 사뭇 흥미를 가지고 돌아온 폼페이에는 로마 원로원 의원이 된 '코르부스'와 그의 군대가 진주해 있었다.

콜로세움으로 압송된 마일로는 다른 검투사들의 시비에 휘말려 싸웠다는 이유로 철창에 들어갔다가, 단 한번의 싸움만 이기면 자유인 신분이 되는 폼페이의 챔피언 '애티커스'와 마주하게 되고. 다음날 훈련자리에서 대결을 펼치게 된다. 하지만 승부도중 마일로에게 분을 품은 다른 검투사가 마일로를 뒤에서 찔러죽이려고 하자, 애티커스가 그를 구해줌으로서 둘은 운명적인 친구이자 라이벌 사이로 서로를 인정한다.

그리고 원로원 의원이 되어 폼페이 영주 '루크레셔'에게 접근한 코르부스는 그에게 폼페이의 개발 사업 예산을 편성해주는 대신 그의 딸 '카시아'를 아내로서 받겠다는 정략 결혼을 요구한다. 그런데...

5. 흥행 및 평가

2월 26일까지 한국에선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며 77만 관객을 넘어섰다. 하지만 평가는 좀 그런데 줄거리적으로 너무 빈약하다는 점. 국내 광고문구에서 무슨 글래디에이터급 영화라고 본 것은 과장광고라는 평이 많다. 그나마 CG로 볼거리는 있다는 게 호평.

미국에서 1월 24일 개봉했는데 쌈박하게 망해버렸다. 제작비 1억 달러로 2월 21일까지 미국 흥행 집계는 1100만 달러. 해외 흥행까지 합쳐도 3400만 달러 수준. 한국에선 하필이면 경쟁작이 <겨울왕국>과 <수상한 그녀>, <변호인> 같은 쟁쟁한 명작들이었기에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해 전국관객 1,373,873명에 그쳐 망했다.

6. 여담

  • 1959년과 1984년에 개봉한 동명의 영화가 있다. 또한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2004년에 동명의 다큐를 방영했다.
  • 작중 폼페이 사람들이 로마에게 은근히 야유를 하거나, 아니꼽게 생각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이는 사실 어느 정도의 역사적 근거가 있는 장면이다. 폼페이가 로마와 가깝기 때문에 자주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인데, 본디 폼페이는 로마보다 앞선 역사를 가졌다고 알려진 도시국가였다. 최소한 BC 8~7세기 경 폼페이는 그리스인들의 세력하에 있었고, 에트루리아를 BC 6세기에 몰아냈다는 역사적 증거가 있다. 이 시기 그리스 식민지 출신들이 다 그랬지만 로마보다 문명도가 높았던 상업도시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삼니움 전쟁이 끝날 무렵에 로마 동맹의 일부가 되었고, 폼페이도 로마의 동맹시가 되었다가, 동맹시 전쟁을 치른 후에 완전히 로마화했다. 애초에 로마보다는 그리스에 가까웠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만큼, 군대를 몰고와 주인 행세를 하며 폼페이를 촌동네 정도로 격하시키는 로마인들이 아니꼬와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각본상 원로원, 아니 오역으로 '상원 의원'이 된 코르부스가 휘하에 병력을 이끌고 폼페이에 오는데 속주도 아닌 폼페이에 현역 의원이 무장병력을 이끌고 올 이유가 있는지 의문이다. 로마와 폼페이가 지역감정이 있다고 해도 엄연히 로마 본국의 행정권에 속하는 도시다. 그리고 현역 원로원 의원이 비상시도 아닌데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지도.. 법무관이라면 모를까. 공화정 말기도 아니며 거기에다 티투스의 치세부터는 확실한 팍스 로마나의 시대이다. 로마귀족의 거만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라고 추측된다. 폼페이에 무슨 노예들의 봉기가 일어난 것도 아닌데 1개군단으로 추정되는 병력을 이끌고 교외에 숙영지까지 짓는다. 공화정 시대의 법무관이나 군 지휘관이들이 보면 어이상실 할 기세.
  • 코르부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의 갑주를 보면 2000년작 글래디에이터에 등장하는 프라이토리아니(로마 근위병)의 갑주다. 방패모양만 다를뿐이고 나머지는 그대로다. 원로원 의원이라는 코르부스가 근위대 병력을 지휘할 자격이 있을까? 코르부스가 근위대의 책임자라면 영화에서도 분명하게 근위대 지휘관이라고 소개하면 된다. 거만한 로마귀족을 연출하고 싶었다면 원로원 의원이라는 직책보다 황제 다음가는 2인자나 다름없는 근위대 지휘관이라는 직책을 강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티투스 황제의 근위대 지휘관이 반로마적 지역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폼페이에 병력을 이끌고 방문한다는 설정이 더 자연스럽다. 실제로 코르부스와 같은 친황제파 원로원 의원이 근위대 병력 좀 내달라고 하면 근위대 지휘관과 장교에게 단호히 거절당하고 질리도록 비난을 당했을 것이다. 설령 로마 황제이라도 자신을 지지하는 의원에게 근위대 병력을 내줄리가 없다.
    실제로 폼페이에서 발굴된 비문을 보면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폼페이의 유력자들이 불법으로 국유지를 점유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인 클레멘스에게 소수의 병력을 딸려 폼페이에 내려보냈으며, 클레멘스가 특정 후보가 폼페이 시 집정관에 당선되도록 압력을 행사한 기록이 있다. 이왕 영화를 만들려면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면 더 나았을 것.
  • 폼페이 '영주'가 등장하는데, 폼페이도 다른 로마 자치도시와 마찬가지로 수도 로마의 행정조직을 본떠 1년 임기로 선출되는 2명의 도시 집정관, 2명의 조영관(안찰관), 도시 원로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집정관/조영관에 뽑히기 위한 후보자들의 선거운동도 치열해서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폼페이 유적지의 건물 낙서 대부분이 선거운동 벽보일 정도이다.
  • 폼페이는 도시 규모에 걸맞지 않을 정도로 검투사 시합에 열광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번은 이웃 도시 검투사팀이 폼페이에 원정경기를 와서 경기 도중 분위기가 열광하면서 폼페이 측 응원단과 이웃 도시 응원단이 패싸움을 벌여 수십명의 사망자가 나고 로마에서 문책을 할 정도였다.
  • 영화 상에서 여러 언급과 주변 인물들의 행실을 통해 티투스가 엄청난 폭군이자, 간신들에 둘러싸인 무능한 황제로 그려지지만 오히려 각종 재난 등을 수습하고, 여러가지로 로마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만한 행동을 자주 보여줌으로써 로마 제국 자체에게는 나름대로 성군이자 유능한 황제로 받아들여졌고 그렇게 평가되고 있다. 다만 그가 진압한 유대 전쟁이 종교적으로 큰 상처를 남김으로서 현재까지 줄기차게 까이고, 이를 넘어 폭군으로 퍼지고 있는 것.[2] 좀 더 자세한 건 티투스 항목을 참고하자.
  • 영화 상에서는 수시간 안에 폼페이가 완전히 화산쇄설물과 쓰나미에 쓸려나가 사실상 생존자를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극단적인 재난의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 폼페이는 18시간 정도에 걸쳐 영화 상 연출보다 그나마 천천히 도시가 괴멸되었다.[3] 또한 실제 폼페이 화산 폭발 때 영화의 연출만큼 거대한 쓰나미가 있었다는 근거는 없다. 영화상 극적인 연출에 가깝다. 오히려 주변 연안은 화산 분화란 상황을 감안하면 비교적 안전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대피한 사람도 많았다. 당시 미세눔에 주둔한 해군 함대의 지휘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대 플리니우스') 제독이 이 때 함대를 이끌고, 본인은 가스 중독으로 현장에서 순직했지만 많은 주민들을 구조하였다.
  • 주인공 마일로의 고향과 배경이 오늘날의 영국 '브리타니아'의 켈트족인 이유는 아마 감독과 출연진 대부분이 영국인인 것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은근히 켈트족의 저항사를 노출시키고 싶었을 지도.[4]
  • 이 영화가 나오기 전 2007년에는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폼페이'를 영화화하려는 기획이 있었으나, 감독으로 내정되었던 로만 폴란스키가 미성년자 성폭행 문제로 사법처리되면서 무산되었다. 이쪽은 역사적 고증에도 신경썼으며, 남자 주인공이 상수도 전문가이고, 화산폭발의 조짐을 수돗물의 변화로 미리 알아내는 등 상당히 특색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이쪽이 영화화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감상도 있다.
  •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주인공 마일로의 동료라 할 수 있는 흑인 검투사 애티커스(애디왈레이 애키누에이아그바제이)가 죽는 장면을 꼽을 수 있다. 애티커스는 자유 하나만 보고 악착같이 살아온 검투사인데, 폼페이가 멸망하는 날에야 다른 검투사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켜서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마일로를 탈출시키기 위해 코르부스의 부관과 싸우다가, 이기지만 치명상을 입고 이미 베수비오 화산에서 화산쇄설류가 쏟아져 내리는 상황이다. 결국 애티커스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어했던 검투장에서 죽게 되지만, 오히려 꼿꼿이 서고 한 팔을 치켜들고는 몰려오는 화산쇄설류를 향해서 “나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다.” (“I DIE A FREE MAN!”)라고 소리치고는 당당하게 죽는다. 영화 내에서 온갖 인간군상들이 죽음 앞에서 보인 모습과 비교해보면, 오히려 노예였던 애티커스가 가장 인간다운 품위를 가진 죽음을 맞이했다.
  • 한국판 포스터는 상단 사진과 달리 포옹하는 게 아니라 서로 마주보기만 하는 형태인데, 그 이유는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선정성을 이유로 심의에서 반려했기에 그런 것이다. 이에 수입사 D&C엔터테인먼트가 제작사로부터 받은 스틸 중에서 분위기가 비슷한 사진으로 골랐다.

[1] 일명 최후의 켈트.[2] 당연하지만 이 일로 지금도 이스라엘의 인민들 사이에선 로마와 티투스를 히틀러급으로 증오받고 있다. 이런 이유로 로마에 티투스의 문이라는 건물과 이름이 들어간 다리를 지날 때, 자칭 정통파 이스라엘인들은 여길 지나는 것조차도 금기시한다고 한다. 하지만, 해외 이스라엘인들도 각자 생각이 다르다고 한다. 개인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티투스는 이스라엘인을 마구 학살하지도 않았으며 이스라엘인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던 점도 있으니 히틀러급으로 보는 것은 너무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열심당마사다 요새에서 최후 항전 당시, 열심당들은 항쟁을 하면서 가축을 죽여 피를 마시고 저항했고, 함락되자 남녀노소가 모두 자결을 했다고 하는데 피를 마시는 것이나 자살은 유태교의 율법에서 가장 죄악시하는 금기이므로 열심당의 죄악도 티투스만큼 컸다는 유태교 온건파의 주장도 있다.[3] 아마 폼페이에는 당시 20,000명 정도의 시민이 살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사망자는 2,000명 정도로 10분의 1에 불과하다. 물론 당시의 의료 수준과 부상자까지 생각하면 의미없는 비교일지도 모른다.[4] 정작 현대의 영국인들은 대부분 원래 살던 켈트족을 웨일스나 스코틀랜드로 밀어내버린 앵글로색슨족의 후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