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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조선국 → 대한제국
2.1. 주인공 및 가족2.2. 왕실(황실)2.3. 총리2.4. 조정(내각)2.5. 육군부2.6. 해군부2.7. 외교관 및 정보요원2.8. 동학교도2.9. 정치인2.10. 유림/학자2.11. 기타2.12. 정당2.13. 기업2.14. 전함
3. 대청국4. 중화민국5. 대일본제국6. 러시아 제국 →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 → 전러시아 국민국가7. 소비에트 연방8. 몽골9. 티베트10. 미합중국11. 영국12.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 다뉴브 연방 → 오스트리아 제국13. 세르비아 왕국14. 프랑스 공화국15. 이탈리아 왕국16. 독일17. 폴란드18. 오스만 제국 → 튀르키예19. 스웨덴20. 핀란드21. 스페인22. 필리핀23. 시암24. 그리스25. 네덜란드26. 인도27. 우크라이나28. 기타 인물1. 개요
웹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의 등장인물을 정리한 문서.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의 행적이 거의 대부분 원래 역사의 모습에서 많이 모티브를 따오기 때문에 이걸로 역사공부를 해도 된다는 평이 많다. 이 항목에 나오는 인물들은 비중있는 일부며 소설 본편은 더 많은 실존인물들이 등장한다.다른 작품과 크로스오버한 인물 역시 까메오나 조연으로 등장한다. 크로스오버 인물은 ☆표.
2. 대조선국 → 대한제국
2.1. 주인공 및 가족
- 이선 (이선우)기묘년 음력 12월, 서력 1880년 1월. 대조선국이 개국한 지 488년, 금상의 치세는 16년째가 되는 해였다.조선은 국가의 활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으며, 점증하는 대내외의 압력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다.때는 바야흐로 제국주의 시대로, 동방의 고요한 나라 조선을 향한 열강의 탐욕스러운 시선이 모여들고 있었다.전례 없는, 미증유의 위기였다.하지만 위기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는 드물었으며,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국제 정세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는 이는 더욱 드물었다.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과감하게 개혁의 칼날을 들이밀며 흔들림 없이 국가를 이끌어나갈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시대의 부름에 정확히 응답할 지도자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필요한 시기였다.
1868년 5월 31일생. 주인공으로 원래는 대한민국의 1988년생(32세)[1] 근대외교사 전공 역사학도 이선우였으나, 원래 일하던 곳에서 만연한 부조리에 시달리다 뛰쳐나와 먹고살기 위해 역사 관광 가이드 일을 하던 중 고종의 첫째 아들 완화군 이선의 무덤 앞을 지날 때 단명한 완화군이 불쌍하다는 관광객의 말에 자조적인 말투로 '그래도 얘는 자기나라 망하는 꼴 안 보고 죽었으니 그나마 행복한 거다'는 말을 했다가 나도 내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다는 완화군의 혼령에 이끌려 완화군의 몸에 빙의하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선(조선, 혁명의 시대)를 참고. - 황후 → 태후 김아영
1878년생. 광산 김씨 가문의 김재정의 여식으로 흥선대원군이 정해준 이선의 정혼녀. 원래 역사에서는 이준용의 두 번째 부인이다.#[2] 임오군란 후 중전 민씨가 폐위되면서 광산 김씨 가문의 여식을 중전으로 간택했는데, 그녀가 잘 처신하는 것을 본 대원군이 만족해서 손자에게도 같은 가문에 먼 친척인 그녀를 골랐다. 대원군이 손자가 서양물을 먹어서 서양여자를 좋아한다고 짐작하고 서양적인 느낌이 나는 규수를 골랐다는데, 그 덕에 21세기 사람인 이선도 보고 미녀라고 할 정도. 가치관에 있어서도 그 시대 사대부 집안 여성치고는 매우 진취적이게도 사진을 찍었고, 신식 교육을 받았다. 이선이 중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릴 때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녀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고 싶어한 이선이 살짝 떠밀자 몰래 유학생으로 지원할 정도로 당찬 여성이기도 하다.[3] 그러나 니콜라이 2세 즉위 축하 사절단으로 함께 갔다가 돌아왔고,[4] 이후 결혼하여 황후가 된다. 하지만 혼인 후에는 중전처럼 신첩(臣妾)이라고 칭하며 철저하게 유교 사상에 충실한 아내 역할을 하며, 이선이 사랑하진 않지만 아내로서 존중하고 가장으로서 충실한 것에만 만족해하면서, 미래인으로서 고뇌를 삭이며 힘겹게 국정을 운영해가는 이선에게는 위안처가 되어주지 못한다. 러시아를 다녀오면서 마르가리타를 자매처럼 여길 정도로 친해지는데, 처음엔 이선에게 후궁을 들일 것을 제안했다가[5] 다음엔 그녀를 후궁으로 들일 것을 제안하고, 결국 이선과 그녀가 선을 넘자 진심으로 기뻐한다.[6][7]
3부에서는 심리적인 문제를 겪던 이진에게 신경을 많이 써줬다는 것이 드러났으며, 국내 정치에 언급을 삼갔던 것과 달리 이진을 걱정해서 박영효에게 자비를 베풀어줄 것을 청한다. 그리고 이진이 청국과의 국혼을 마뜩지 않아한다는 것을 남편에게 귀띔해서, 소원대로 타티야나 공주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왔다. - 황태자 → 태시제 이진
1897년(광무 원년) 11월 20일생. 이선과 황후 김아영 사이의 장남이자 황태자로, 대원군이 지어준 아명은 황길. 16세의 나이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2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자신을 장손이라고 아끼는 태상황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만 무능한데다가 청에 나라를 팔아먹을 뻔한 태상황을 내심 경멸하고 있으며, 로마노프 왕가 300주년 기념행사에서 완벽하게 매료된 모습을 보여서 전제군주가 되어 대한제국을 위기에 빠트릴 것 같은 모습으로 독자들의 비호감을 샀으나... 사실은 철인에 가까운 아버지에게 애정을 갈구하나 정무에 바빠서 자신에게 무관심하고 황후가 아닌 마르가리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 위대한 아버지의 능력에 영원히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자괴감에 고통스러워하는 가련한 소년이었다. 주변에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명석해서 이선이 자신이 입헌군주가 되길 바란다는 것도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는데, 이를 아버지가 자신을 마뜩지 않게 생각해서가 아니겠냐고 생각하는 내심을 드러내기도 한다. 결국 목표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의지대로 입헌군주가 되겠다며 체념한다.
러시아에서 자신의 고민을 숙부인 영친왕 이영에게 조금은 드러내는데, 이를 이선이 보고 받고 3부 시점부터는 아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결국 입헌군주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하지만 아버지의 취미까지 따라하며 여전히 그만큼 훌륭한 군주가 된다는 목표를 버리진 않았다. 이선이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기로 하면서 대리청정을 맡았는데, 경륜이 부족해서 박영효를 위시한 보수화된 개화당 원훈들의 휘둘리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무난하게 내정을 이끌었으며, 원산 학살사건에 대해서도 공식 보고를 믿지 않고 별도로 조사를 해서 군주로서 무능하진 않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후 후계자 교육을 시키겠다는 이선의 의도로 박영효 일파 숙청 이후에도 계속 대리청정을 하게 된다. 여전히 입헌군주제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지만 내치만 담당하고 내각에 상당수 일임했음에도 엄청난 양의 업무에 시달리면서 좀 더 전향적인 태도로 변했고, 이선과 더 많이 소통하면서 마음에 여유가 생겼는지 경원시하던 이안도 자신의 숙부들처럼 역할을 맡길 수 있다고 생각하며 대화를 시도하는 나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황후의 조력에 힘입어 타티야나 공주에게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이선에게 고백했고, 국혼을 맺는다. 처음에는 타티야나 공주와의 결혼이 막상 성사되자 부담스러워했지만 서로를 맞춰가면서 사랑이 싹트고 딸을 낳는다. 이선의 영향을 받아 남녀 상관없이 자식은 모두 사랑해야 한다는 진보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게 밝혀진다. 진보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본인도 가정적인 면에서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진보적이며 미신을 믿는 아내랑 달리 미신도 안 믿는다. 아내랑 유럽순방을 하다가 을축년 홍수로 건강이 안 좋아진 이선이 선위하자 조선의 28대 군주, 대한제국의 2대 황제인 태시제가 된다. - 이나
1923년(광무 27년)생. 황태자비 타티야나와 사이에서 난 딸로 어머니 타티아나의 한자 이름 탑계양나(塔季揚娜)를 따와서 이나라고 이름 지었다. 타티야나는 아들을 대신 딸을 낳아서 미안하다고 하지만[9] 진보적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이진은 딸이면 어떻고 아들이면 어떻냐고 별 신경 쓰지 않는다. - 이현
1926년(태시 원년)생. 황태자비 타티야나와 사이에서 난 아들로 이진과 타티야나가 세계여행 중에 가진 아이로, 아명은 연수다. 1926년 시점에서 니콜라이 2세와 이선의 유일한 손자이며 로마ㅡ유라시아 천명을 계승할 아이로 왕실의 기대를 한몸에 받는다. - 이혁
1927년(태시 2년)생. 황제 이진과 황후 타티야나의 차남. - 예경공주 이희
1899년(광무 3년)생. 이선의 장녀이자 황후 김아영 사이에서 낳은 둘째. 황태자 이진과는 현실남매 같은 사이로,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혈육. 이안이 대련에서 아나스타샤 공주와 마리야 공주의 자신에 대한 애정을 알게 된 뒤 조언을 구했을 때 최대한 친절을 베풀되, 오해를 사거나 구설수에 오를 일을 저지르지 말라는 조언을 해준다. 이후 김현사와 이진의 결혼이 파토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에 그의 오빠인 김헌원과 결혼하고 김현사를 챙겨준다. - 예친왕 이은
1906년(광무 10년)생. 이선의 삼남이자 황후 김아영 사이에서 낳은 셋째이자 막내아들. 결혼식날에 군복을 입고 등장하는데 사관학교를 다니고 있다고 언급된다. 나중에 밝혀지기를 해군 사관학교를 다니고 있던 것으로 나오며 육군에 집중된 군의 형평성을 위해 해군사관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물론 평생 군에 남을 생각은 아니고 영국 왕실처럼 해군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고 이선 역시 지지한다. 순친왕 재풍의 장녀 온영과 혼인한다. - 예진공주 이금
1911년(광무 15년)생[10]. 이선의 막내딸. 김아영의 막내딸. 그 나이 아이답게 놀다가 회의중에 집무실에 들어와서 국왕과 대신들의 귀여움을 받는다. 자식 중에는 이선에게 자주 안기기 때문에 이선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자식이다. 푸의의 동생 순친왕세자 푸제(부걸)과 혼인한다. -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
1868년 11월 29일생. 폴란드 독립 결사에 소속된 금발의 여성 의사. 이선의 지인인 미하일 얀코프스키의 친척으로 매우 진보적인 인물이라 여자임에도 의사의 길을 선택하고 사회주의와 폴란드 독립 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죽거나 강간당할 고비에 처하나, 이선의 도움으로 한국에 가게 되고 이선과 사랑이 싹트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 문서 참고하십시오. - 정친왕 이안 (얀 리)
1902년(광무 6년) 6월 10일생. 이선과 마르가리타의 장남으로 서자.
폴란드 독립운동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폴란드에 대한 애정과 러시아 제국, 그리고 차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대한황실 내에서 서자이나 이선의 차남이라는 점과 폴란드계 혼혈이라는 이유로 눈치를 받고 있으며, 황실 종친과 고위 공무직 자제들을 대상으로 한 광무학교에 입학했을 때 혼혈이라는 이유로 은따를 당한다. 그래서인지 고독과 독서를 즐기는 사람이 된다.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어 학년 수석을 도맡으며 수석 졸업을 하게 된다. 냉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수석 졸업이라는 소식을 듣고 친왕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봐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황제 직계를 제외한 황실 종친들 중에서는 동병상련의 처지로 이안에게 공감하는 의친왕 이강과 영친왕 이영만이 이안을 좋게 봐주고 있다고 한다.
1918년, 아버지 이선의 명을 받들어 이르쿠츠크에 유배된 니콜라이 2세 일가 구출대의 대장을 맡게 되고,[11] 이후 니콜라이 2세가 조국에서 운명을 같이 하기로 결심하고 황후도 남편의 곁에 남으면서 이안은 니콜라이 2세의 5자녀을 청국령 대련으로 피난시킨다. 이 과정에서 공을 세워 알릭세이에게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을 수여받는다.
공주들을 구출한 후 대련에서 OTMAA 남매들과 생활 중이며 아나스타샤 공주와 마리야 공주의 짝사랑 대상이다. 알렉세이 대공에게 그가 죽으면[12] 그를 대신해 그의 누이들이 평범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보호해달라고 부탁받는다. 이후 대한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보다는 더 넓은 세상을 보고자 유럽 순방을 나서나 그곳에서 벌어지는 파시즘의 발흥과 혼란을 보고 충격을 먹는다.영국에서 머물며 공부하면서 수많은 영국여성들의 구애를 받으나[13] 이를 못마땅하게 본 인종주의자들의 표적이 된다. 데일리 메일의 오리엔탈 스캔들이 터지자 기자들의 질문공세를 받고 이것이 음모라는 걸 알아낸 이안은 스승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접촉한다.
여담으로 첫 짝사랑 대상은 현재 그의 숙모인 영친왕비 아나스타샤 안드레예브나 브론스카야[14]였다고 한다. 상당히 미남인지 러시아 공주들에게도 인기 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는 무도회에서 폴란드 소녀들에게 열정적인 구애를 받았으며[15] 인종차별주의자인 에드워드 8세나 미남으로 이름난 루이 마운트배튼도 잘생겼다고 인정한다. - 예성공주 이라 (이리나 리)
1905년(광무 9년) 생. 이선과 마르가리타의 둘째 자식이자 서녀. 3부 시점에서 한동안 언급만 되고 등장이 없다가 이안을 따라서 유럽에 가고 싶어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한국과 서양의 미모를 다 가지고 있는 혼혈 미인으로 알렉세이 대공과 선통제의 짝사랑을 받고 있다.[16] 이선의 사랑을 많이 받는 자식이지만 혼혈 여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타티야나나 이서아와 가깝게 지낸다고 한다.
유럽인다운 외모 덕에 유럽에서도 여러 유럽 남성들의 구애를 받지만 에드워드의 오리엔탈 스캔들 이후로는 줄었다고 한다. 세계를 여행하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여성이자 황녀인 엘리자베트 마리를 보고 감명받아 자신도 독립적인 삶을 살기로 결정하고 어머니 마르가리타처럼 사람을 살리는 의사가 되기로 결정한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 남자와 연애끝에 결혼한걸로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막후에서 정치에 개입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정책도 존경심으로 묵묵히 따랐다. 은퇴한다고 말만 해놓고 실제로는 변한 게 없을 때도 참았을 정도. 하지만 화북에 공산 세력권을 형성하려 하려는 아버지의 계획에 반대하여 군부 강경파의 대외공작을 승인했다. 여기에 익문사가 타티아냐가 순방 중에 위험해질 수 있는 첩보를 무시한 것이 태상황의 지시에 의했음을 알고 더는 인내하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귀국하고 온 아버지가 진심을 털어놓자 금세 화해한다.[8]
2.2. 왕실(황실)
- 조선 국왕 → 대군주[17] → 태상황 → 고종 태황제 이형
1852년생. 원래 역사대로 민씨 일족에게 휘둘리던 무능한 국왕으로 임오군란을 맞았으나, 장자이자 회귀자인 장남 이선의 개입으로 파국은 피했지만 중전 민씨는 악행이 낱낱히 밝혀지고 폐서인되었으며, 개화당이 정권을 잡자 이형은 국왕으로서 유학자들에게 존중받긴 하지만 실권은 박탈당한 도장 찍는 기계로 전락했다. 이후 세상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하면서 자신의 정치를 펼치고 싶어했지만 좌절되고 헌법 반포와 의회 개설로 폭발했다가, 조선 독립전쟁을 계기로 청에 도움을 청해서 권력을 되찾으려는 발상으로 청에 밀서를 보낸다.
이 밀서는 전후 시모노세키 조약 협상 과정에서 이홍장이 가져오면서 들통났는데, 일전에도 비슷한 음모를 꾸몄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당시만 해도 이홍장이 아무 관심이 없어서 묻혀버린다. 이로 인해 부자유스러운 왕이 아니라 실권자로 남고 싶었던 이선의 꿈은 무산되었고, 흥선대원군과 개화당 내각은 이를 빌미로 이형을 압박해서 이선에게 양위하게 만들고, "이전 밀서는 근거가 없고 이 밀서는 혹시나 패전할 경우 국체를 보전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선전으로 대충 무마한다.
칭제건원 이후엔 태상황으로 모셔졌다. 이선은 그에게 거액의 연금과 즐길거리들을 주어서, 여러 취미들을 즐기면서 유유자적하게 살게 되었다. 아들과 소원했던 사이는 황태자 이진이 태어나면서 좀 더 나아졌고, 원래 역사와 달리 흥선대원군의 임종 직전에도 마지막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때의 영향인지 이후엔 확실히 편한 모습을 보였고, 이선이 의도한 역모 모의 사건 때 주범들을 어떻게 살려줄 수 있냐며 분노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인 발언도 일절 하지 않는다.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아서인지 노환으로 몸이 불편해진 것 빼고는 원래 역사보다 더 오래 살고 있다. 파리강화회의 이후 시점에서는 마르가리타의 자식들은 없는 것처럼 취급하고 이강의 진보적인 식견에 혀를 차는 등 보수적인 면모는 여전하지만, 자신이 군주였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위대한 군주인 아들을 둔 것에 자부심을 느낄 정도가 되었다.
인생을 즐기는 대신 운동을 안 해서 고도비만이 되고 결국 뇌졸중으로 실어증에 걸리고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때 이미 유언장을 써놓았는데, 세 번째 유언장에서는 대원군의 말을 듣고 이선의 비밀을 짐작하게 되었다는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고, 이선에게 확인을 요구한다. 이에 이선은 원래 역사에서 일어난 일들을 알려주고, 마지막으로 응어리를 풀어내고 완전한 화해를 하게 된다. 결국 즉위한 지 정확히 57년이 되는 1921년 1월 21일, 원래 역사보다 2년 더 살고 훙했다. 죽기 전에는 멀리했던 혼혈인 손주들에게도 애정을 표하고, 말은 못 하게 되었지만 역사에 완전히 승복하고 떠났으며, 원래 역사처럼 고종이 되었다. - 왕비 → 폐비 민자영
원래 역사 그대로 본인과 외척들이 정치에 개입하고 사치를 일삼아서 조선의 망국을 가속화하며, 완화군 이선에게 천연두가 묻은 설빔을 선물해서 암살하려고 했으나 빙의한 이선은 종두를 맞았고, 완화궁의 하인이 욕심을 내서 설빔을 몰래 입어보고 대신 천연두에 걸려서 실패했다. 임오군란 이후에는 충주로 피신하고, 대원군이 처음엔 승하했다며 정치 및 사회적 생명을 끊으려고 했으나 이선의 설득으로 국장을 취소하고 사대부들을 통해 규탄 여론을 조성하자 악행들이 낱낱히 폭로당하며 폐서인되고, 원래 역사에서는 그녀를 피신시킨 공로로 승승장구한 민응식이 밀고하면서 도피한 충주에 사실상 유폐당한다. 고종과 연락도 시도했으나, 이를 눈치챈 대원군이 병사를 빙자해서 살해했다고 암시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대원군은 아무리 정적이라지만 자신이 간택했고 일국의 국모였던 그녀를 죽게 만든 죄책감이 있었는지 죽어가면서 이선에게 그녀의 묘를 제대로 이장하고 제사를 지내줄 것을 당부한다. 그래서 대원군 사후에 정식으로 양주에 이장하고, 순친왕 이척을 배려하여 황귀비에 준하는 비빈의 예로 매장되었다. - 왕세자 → 왕태자[18] → 순친왕 이척
고종과 중전 민씨 사이의 장자이자 왕세자. 유년기에는 중병을 앓아서 죽을 뻔했으며, 임오군란을 수습한 후에는 내심 완화군을 세자로 세우려던 대원군에 의해 자리도 위태로웠으나 자유롭게 활동하고 싶었던 이선이 왕세자의 지위를 지켜준다. 그래봤자 완전히 정치적으로 무력화된 아버지, 무서운 할아버지, 실권자인 이복형 사이에서 불안한 나날들을 보내다가 고종 밀서 사건으로 대리청정을 맡게 되고, 결국 고종이 이선에게 선양하면서 왕태자 자리에서도 물러나면서 친왕이 된다. 그 직후 빅토리아 여왕 60주년 기념식에 특사로 파견되고, 이선이 유럽을 다녀올 때 대리청정을 잠시 맡았다는 것 외엔 등장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고종이 훙하기 전 오랜만에 등장했다. 자유주의적인 이강, 러시아 여자와 결혼한 이영이 아버지와 멀어진 탓에 매일 문안인사를 가며 효를 다 했으며, 식물과 정원에 관심을 가져서 이선이 하사해준 창경궁에서 정원을 가꾸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었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일제의 꼭두각시인 조선의 마지막 국왕이 되는 운명을 피했고, 고종 암살시도로 건강을 해치지도 않았으니 원래 역사보다 더 장수할 것으로 보인다. - 의친왕 이강[19]
원래 역사에서는 한량이었다가 국권 피탈 후 독립운동을 제일 적극적으로 한 왕족이었지만, 조선이 위기를 겪지 않은 본작에서는 그냥 한량이 되었다. 이척과 달리 머리도 좋고 나라를 위해 중책을 맡고 싶어하지만 완화군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이선의 권력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견제하는 바람에 중책을 맡지 못한다. 니콜라이 2세 즉위식을 이선과 함께 참관하고, 이선이 자신 대신 그와 로마노프 왕가와 국혼을 맺으려 하자 본인은 이미 사랑하는 미국 여배우가 있다며 왕족의 의무를 주제로 언쟁을 벌이긴 하나 왕실에서 극력 반대해서 무산된다.그리고 마르가리타를 데려온 이선을 놀린다이후 외교 무대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에밀리 브라운과도 스캔들이 나기도 하고 이선의 요청으로 조카인 이진에게 특기인 밤문화를 경험하게 해주기도 한다.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평이 좋아 이선이 내심 이진이 즉위해도 조언자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품고 있다. 가족 중에는 이안을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하는데, 나름 야망과 재주가 있었지만 형에 밀려서 빛을 못 본 자신의 삶을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 의친왕비
이강이 만든 수많은 사생아들을 보고도 참고 보살핀다고 나와있다. 보수적인 여성이라 속으로는 화가 나면서도 삼종지도를 따라 지아비의 말에 충성한다고 한다. 원래 역사처럼 잘 보살피는듯. - 왕비 → 왕후 → 황태후 김씨
광산 김씨의 여식으로 대원군이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명문이지만 권세는 높지 않은 가문에서 고른 중전. 온화하면서 조용한 성격이고, 폐비 민씨를 반면교사 삼아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조용히 내명부의 수장으로서 역할만 하고 있다. 이런 처신을 만족스러워한 대원군은 그녀의 먼 친척인 김아영을 이선의 부인으로 간택했다. 고종이 퇴위한 이후로 친아들인 이영의 결혼 문제가 불거졌을 때 말고는 등장이 없다가 이진과 타티야나의 결혼식날에 다시 등장하는데 그녀 역시 조선시대 사람이라 서양인이 손주며느리로 그것도 장차 황후가 되고 황실의 대통을 이을 황태자비로 들어오는 것을 꺼렸고[20] 본인도 서양식 드레스를 입고, 왕조의 후계자이기도 한 장손자[21]가 서양식 군복을 입고서 서양인 여성과 서양식 결혼을 하는 것을 보고 본인이 너무 오래 살아서 못 볼 꼴을 다본다고 평했다. 그러는 것 치고는 나이는 이선보다 한 살 많은데, 전통적인 유학자 가문 출신이라서 그런 것 같다. 이후 이서아와 에드워드 왕자의 스캔들이 터지자 폭발해서 며느리를 매우 구박한다.[22][23] - 영친왕 이영
왕호는 같지만 원래 역사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로, 고종과 중전 김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자. 이복형들과 달리 학구적이고 조용한 성격을 갖고 있다. 처신을 조심해야 하는 친왕이지만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있어 영국 유학을 앞뒀음에도 러일전쟁 때 접반사를 맡아 일본군과 소통 창구가 된다. 이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유학 가서, 수석 졸업생이 되고 케인스와 인연을 맺기도 한다.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러시아에서 사랑에 빠진 브론즈키 장군의 딸 아나스타샤와 결혼하면서 공민왕 이후로 최초로 외국 여인과 결혼한 한국인 왕족이 된다.[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공사를 맡았을 때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 호의를 보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을 막는 활약을 펼치고 훈장도 수여받지만, 전쟁으로 인해 선전포고문을 전달하게 된다. 냉정하고 철저하게 국익만을 신경쓰는 이선과 달리, 정이 많은 성격이라 외교관에는 적합하지 않아 보이는 성격이다. 혁명으로 성립된 러시아 연방 민주공화국을 방문했을 때 황태자 이진이 겪고 있는 고뇌를 듣고, 신하가 아니라 숙부로서 조언을 하며 이를 이선에게 보고해서 이선이 부자관계에 더 신경쓰게 만들기도 했다. 또한 이진이 타티아나 공주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의 자식인 이연이 황실에게 인정 받을 수 있는 길이라며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 아나스타샤 안드레예브나 브론스카야 → 이서아
러시아 장군 안드레이 브론스키[25]의 딸이다. 엄청난 미녀로 런던 사교계에서도 유명할 정도의 외모를 소유하고 있다. 러일전쟁에서 한국이 러시아를 도왔다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선과 이영에게 접근했다가 정보의 유출을 두려워한 이선이 장무영을 시켜 죽이려고 했으나[26] 이를 이영이 막아서면서 이영에게 호감이 싹튼다. 이후 다른 이들이 자신의 가문과 미모에 빠져 들이대는 데 반해 순수하고 소심하게 사랑을 표하는 이영에게 매력을 느껴 결혼에 성공한다. 이후 이영과 함께 러시아와 유럽의 외교를 담당하는데, 유럽이 전화에 휩싸이고 러시아 제국이 멸망하고 소련이 들어서는 것을 보며 자신이 알던 세상이 파괴되는 것에 충격을 느낀다. 이후 완벽히 한국인이 되기로 결심, 이름도 이서아로 바꾸고 한국의 문화를 열심히 따라하여 외국인 왕비에 대한 대중의 여론을 긍정적으로 바꾼다. 하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인사들과 종친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서 에드워드 왕자 스캔들 당시 진보적인 일부 황족을 제외하면 큰 비난을 받는다. 스스로도 미움받는건 익숙하니까 라면서 러시아 제국의 부활을 위해 견디기로 한다. 타티야나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며 이진에게 아들의 탄생을 알린다. - 이연
이영과 이서아의 아들로 갈색 고수머리에 녹색 눈을 가진 왕자로 언급된다. 혼혈이라 외국에서 살았으나 한국으로 귀환한 후 또래인 이우와도 만남을 가진다.
- 정혜공주[27]
고종이 훙하기 전 처음으로 존재가 언급되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는 것을 보면 고종이 늦은 나이에 본 딸인 듯. 유언에서 무려 재가를 권한 것을 보면 많이 아낀 듯. 원래 과부의 재혼을 금하는 것을 악습으로 보고 있던 이선이 여동생을 재혼시키려 했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시부모를 모셨다고 한다. 이영이 외국인 여자와 결혼한 후 고종의 관계를 그나마 중재해 준 인물이라고 한다. - 황귀비 영보당 이씨
완화군 이선의 생모로, 과거 고종의 첫사랑으로 그 사이에서 장남인 완화군 이선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민비가 왕세자를 낳은 후 버려지다시피 했는데, 이선이 권좌에 오른 후에는 처신을 조심하며 불교에 귀의하고 완화궁에 살면서 공식 행사에나 간간히 참여하는 정도였다. 태상황이 마지막 순간을 맞기 전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게 되는데, 사실 어머니로서 그 때 이후의 이선이 자신이 알던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고, 어쨌든 위대한 황제의 부모로 기억될 테니 상관 없다고 한다.
- 흥선헌의대왕 이하응......대원군은 이 폐단을 통렬히 개혁했으니, 통쾌하게 근절했다고 할 만하였다.그러나 그가 그 폐단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하고 쓸데없는 데다가 쓴 것이 애석하다.비록 그러하나, 만약 대원군의 호랑이 같은 위세[28]가 아니라면 개화를 막고 완고를 보호하지도 못할 것이요, 뒷날에 또한 완고를 변해서 개화로 나가는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박제경, 『근세조선정감』(1886)[29]
원래 역사처럼 실각 후 임오군란 이전까지 백수로 살고 있었으나, 마침 귀국한 이선과 함께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정권을 잡게 되지만 외국군의 개입을 차단했기 때문에, 납치당하지 않고 사실상 개화당-대원군 연립정권의 수장이 되어서 보수파들로부터 방패막이가 된다. 갑신경장 이후 은퇴했지만 조선의 경장 과정도 알고 싶다는 이홍장의 초청으로 원래 역사와 달리 조청일이 함께 한 천진 조약을 맺으러 특명전권대신으로 청나라도 방문한다.[30] 손자를 잘 둔 덕에 이후 권력을 탐하는 노추가 되어 명예를 더럽히지도 않았으며, 조선 독립전쟁에서 승전하고 북방 영토를 얻는 영광을 누리고, 칭제건원하고, 손자 이선이 황실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얻어서 아명도 지어주고, 죽기 전엔 마지막 응어리였던 아들과의 화해도 이루는 등 원래 역사에 비해서는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사후 흥선헌의대왕으로 추증되었다.
원래 역사처럼 완고한 유교적 보수주의자지만 여러모로 못마땅한 아들에 비해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유능한 손자를 아껴서 그의 최대 후원자가 되었다. 가치관의 차이로 부딪히더라도 이선의 설득에 최소한 방해는 안 하고, '천하장안'이라 불리는 개인 첩보망을 통한 막후공작으로[31] 이선의 즉위를 뒷받침했으며, 폐서인 된 며느리 민씨를 손을 써서 죽였다는 암시도 나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가이면서도[32] 할아버지로서의 애정과 인간적인 면모까지 드러내는 등 무척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졌다.
1부에서 '마지막 순간에 태상황과 대화를 나눈 후 한결 더 내려놓은 모습을 보였다'는 떡밥이 3부에 와서야 회수되었는데, 이선우가 이선에게 빙의한 후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고, 유학자의 세계관 안에서 손자가 천명을 타고 나서 하늘의 뜻을 보게 되었던게 아니었겠냐고 설득하고, 이전까지 한 일에 대해 진심으로 용서를 구했던 것.
- 흥친왕 이재면
아버지 대원군의 말을 잘 듣는 아들로 등장한다. 고종의 형으로서 완화군이 돌아왔을 때 고종을 설득하여 완화군이 처벌받지 않게 도와주며 조정의 의정부 대신, 의신상사의 사주가된다. 광무 11년에는 황실 원로로 등장하여 태자 책봉을 건의한다. 그리고 대원군의 장자라는 점 덕분에 황실일원 중에 이선 직계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친왕에 임명된다. 이재면은 크게 기뻐하여 다른 종친들이 이안이 친왕에 봉해지는 데 생긴 불만을 단속한다. 노환으로 사망한뒤 이준용이 그 자리를 계승 하게된다.
- 흥친왕 이준용
이재면의 아들로 흥선대원군에 밀명을 받고 이선을 따르는 군대를 선동하여 이선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대원군 사후에는 황국협회를 지도하는 보수적인 인사가 된다. 주일본공사로 파견되어 대한의 이익을 관철하는 활약을 해 대원왕 사후 운현궁을 계승했고, 직계가 아닌 황족 중에서는 유일하게 친왕 직위를 받을 정도로 예우받고 있다. 그러나 뇌물 사건으로 수사를 받는 등 행실이 좋지 않았고, 황족의 의무를 저버리고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어서 극우 제국당을 후원하면서 원산 학살의 배후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딱히 처벌할 근거가 없는 데다가, 이선은 그에게도 각별한 대원왕이 부탁한다고 유언을 한데다가, 원래 역사보다는 오래 살고 있지만 건강이 안 좋으니 자신보다 오래 못 살 것이라고 봐서, 질책한 후 요양하라면서 제주 별궁을 하사해서 사실상 귀양을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
원래 역사에서 이준용은 첫 부인인 남양 홍씨와 1894년에 사별하고 김재정의 딸 광산 김씨와 재혼했는데, 이 작품에서 이준용의 가족사는 원래 역사처럼 친아들이 없어 이우를 양자로 데려왔다는 것 말고는 묘사된 것이 없다. 그 김재정의 딸이 이 작품에서 황후 김아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묘한 상황. - 이우
원래 역사처럼 의친왕의 아들로 자식이 없는 이준용에게 입적되어서, 원산 학살의 책임을 물어 사실상 귀양을 보낸 양부 이준용을 대신해서 운현궁을 계승했다. 8살인데 원래 역사처럼 총명하고 잘 생겼다고.
- 청안군 이재순
궁내대신으로 임명되는 것으로 등장하고, 남만주 자치령의 고등 판무관에 임명되지만 왕족 출신이라서 만주의 가혹한 추위를 이겨내기 힘들어한다. 만주가 러시아군, 마적과 대륙낭인들의 싸움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정부에서 왜 손을 놓고 있는지 궁금해하나 이범윤이 비밀리에 의용군을 제 7사단으로 만들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고 놀란다. 혼란이 지속되자 건강문제로 사임을 요청하며 접반사 후보였으나 역시 건강문제로 반려된다..
- 완순군 이재완
작품 초반에 도승지로서 활동하며 흥선대원군에게 세자가 마마를 극복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은 뒤로는 독판궁내부사로 임명되며 한참 등장이 없다가 러일전쟁 당시 남만주 자치령의 고등판무관으로 등장, 황족으로 파견되었지만 자치령에 딱히 큰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러시아가 자치령을 점령하려고 하자 권동진과 함께 본국에 급보를 보내는 걸로 등장 끝.
- 의양군 이재각
러일전쟁 당시 종정원경 자리에 있었으며 접반사 후보로 언급된다. 황실 가문의 일원이나 너무 촌수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정치적으로 견제 받는 다른 황족과 달리 자유롭게 영국 유학을 하면서 친영파가 된다. 딱히 문제 없는 관료로 보였으나 영국에 특사로 파견되었을 때 영국 상류층들의 편견을 그대로 받아버려서 영국 노동당을 깔보게 되었고 본인도 소련을 혐오한지라 한영 우호친선회에서 영국과 한국은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싸우는 동지라는 연설을 한다.[33]
그런데 이재각이 연설할 때는 친소파이자 여당인 노동당의원들도 있었고 한참 영소관계가 밀착되던 중이었기에 오히려 한국이 영국의 대외정책에 간섭하려 든다며 영국이 보복[34]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선은 국익에 필요하다면 일본 제국주의와도 손잡는 인물이었기에 이념에 따른 외교를 한 이재각에게 미친 듯이 화를 낸다.
2.3. 총리
- 김홍집
조선의 마지막 영의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총리대신. 조선책략을 도입한 인물로 러시아를 두려워했으나 이선이 외교로 러시아의 쓸모를 증명하자 반성한다. 개화당내에서는 보수파[35]지만 뛰어난 행정능력으로 개화정책을 확고히 뒷받침했으며, 나이 문제로 퇴임하였다. 원래 역사와 달리 자주적인 근대화를 이뤄냈으므로 제명대로 살았고 장례도 대한제국의 첫 국장으로 치러지는 영예를 누렸고, 고종 사후 종묘에 모셔진 고종의 신위에 공신으로 배향되는 영예까지 누렸다.[36]
- 박정양
대한제국의 제2대 총리대신. 보빙사 일원으로 초대 주미 전권 공사로 임명되었다. 개화당 핵심인사로 메이지 헌법을 참고하여 한국 헌법의 초안을 만들었으며 독립협회를 따돌리려는 황국협회의 공작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될 뻔했다. 외교전선에서 활약하며 대미외교의 차관 협정이후 김홍집처럼 나이 문제로 사임할것을 요청한다.
- 김옥균
대한제국의 제3대 총리대신. 개화당 비밀결사의 수장으로, 미래인 이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통해 그에게 접근하면서 이선을 주군으로 모시며 갑신경장의 주역이 되었으며, 특별히 이선과 더 정서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선이 황제가 된 후에도 언제든 알현할 수 있고, 이선이 그를 고굉(股肱, 팔과 다리)이라고 칭할 정도. 주로 외교 분야에서 활약하는데, 조청일 전쟁 때는 이홍장의 음모로 청국에 끌려가는 고생을 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소망이었던 "조선이 '동양의 프랑스'가 되는 것"을 이루고 원래 역사에서 갑신정변의 주역으로 정변 실패 후 망명했다가 암살당한 비참한 최후 대신 사상가이자 신하로서 누릴 수 있는 영광을 다 누릴 수 있었다. 대한제국 제3대 총리대신으로 열강과 여러 밀약 및 외교 협약들을 맺는데, 이 중에는 원래 역사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대신하는 김옥균-태프트 밀약이 생겼다. 퇴임 이후에도 황제와 가까운 원로라는 점에서 배후에서 외교활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3부 시점에서는 나이도 70 가까이 되었으며, 폐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자연사 할 것으로 보인다.
신한청협약 체결 후에는 아시아주의자들의 공적으로 지목되었는데, 원래 하얼빈에서 스톨리핀과 하얼빈의 청 귀속을 두고 대표로 협상을 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때문에 가지 못해서 목숨을 건졌다. 이완용이 죽은 뒤에는 청나라로 가게되어 자신의 꿈인 동양협화를 위해 일하고 74세 생일에선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고 앞으로 대한의 미래 방향에[37] 대해 구상한다.
이선을 만나 이승만을 만주로 보낼것을 건의하며 자신의 구상을 말하는데 왜 이선이 계속 일본을 견제하는가라는 자신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질문을 하고 해군의 건함정책은 카이저의 건함 경쟁과 같으며 대한을 파멸시킬것이라고 주장, 육군 소장파 역시 무리한 확장을 주장하는 현실에 개탄하며 시국 비판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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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직전에 이선에게 유홍기 유언을 꺼내며 미래를 볼 수 있냐고 질문을 던진다. 이선은 원래 역사에서 임오군란이 어떻게 진행되고 김옥균이 역적으로 몰려 홍종우에게 암살당하고 사지절단되어 효수된 이야기. 이완용과 박영효가 매국노로 변절한 이야기. 대한제국이 맞이해야하는 운명을 전부 알려주고 1910년에 일본에게 잡아먹히는 이야기를 전해준다.[38] 김옥균은 그말을 듣고 감동하여 조선국민을 구해낸것에 한 조선인으로서 감사를 표하고 이선이 만들세상[39]을 귀신이 되어서라도 지켜보겠다고 한다. 박영효를 만나 시체를 산에 붙는 토장은 비효율적이라면서 자신의 시체를 의과대학에 기증할 것이고 화장으로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러고는 박영효에게 이선의 정체를 암시하는 말을 하고, 얼마 안 가 세상을 떠난다.
- 유길준
대한제국의 제4대 총리대신. 법무대신으로 박정양과 달리 미국법과 비슷한 법을 만들어 이선에게 제출한다. 원래 역사에서 중립화론을 주창한 인물로 실제 개화당 원로 중 다방면에 유능하고 개혁적이나 오만하고 비타협적인 태도로 인해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오래 집권하지는 못했다. 이후 한참 등장이 없다가 김윤식의 장례에서 등장. 건강이 나빠진 건지 김옥균의 74세 생일에선 병석에 누워있다고 언급된다.
- 박영효
대한제국의 제5대 총리대신. 철종의 부마 금릉위로 왕실의 일원으로 우대 받는데다가, 개화당의 실질적 지도자로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능숙한 행정능력까지 겸비하여 이선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성향으로 인물의 위상과는 달리 좀 늦게 대한제국의 제5대 총리대신이 되었고, 7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총리대신으로 집권하며 조선 경제가 공업화로 전환하는 과정을 진두 지휘했다. 그러나 공업화 과정에서 벌어진 정경유착의 핵심인물이었으며, 개화당이 우경화되면서 우파의 영수로서 모험주의적인 대외정책과 강경보수적인 대내정책을 밀어 붙였으며, 흥친왕과 결탁하면서 마치 한국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같은 보수 인사가 되었다.
이러한 위치 때문에 태자 이진에게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지라, 숙청을 벼르고 있던 이선에 의해 원산 학살을 계기로 경장 후 최대 정변의 표적이 된다. 이선의 선위를 선언하고 능숙한 언플로 그를 궁지로 몰아넣자 여전히 지사적 성격을 가진 주동자들이 연속으로 자결하면서 자결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연금되는데, 그래도 그를 동지로 생각하는 이선은 어주를 내리며 그의 잘못을 꾸짖고 개인 재산으로 원산 학살 피해자에게 배상하게 한 다음 아들이 유학 중인 미국으로 보내서 사실상 국외 추방했다. 이것이 개화당에게 정말 큰 충격이었는지 과거 개화당의 중심이었지만 현재는 상대방을 비난할 때 제2의 박영효라는 표현이 쓰일 정도로 몰락했다. 김옥균이 죽기직전에 다시 등장하는데 미국으로 추방된 후 미국 생활[40]에 적응하지 못해 상해와 도쿄등을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김옥균에게 묘비명을 써줄것을 부탁받는다.
- 서재필
대한제국의 제6대 총리대신. 친미파로 독립 협회를 조직하여 한국에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황국협회와 갈등을 벌이지만 이선의 진심을 알고 타협하며 미국으로 파견된다. 미국과의 외교가대성공을 거두자 6대 총리에 임명되며 젊은 나이에 기독교 신자, 미국인 부인을 둔 당대로서는 파격적인 인선이었다. 자유주의적 성향으로 야당에게도 두루 기대를 받았던 인물. 친미주의자라서 미국에게도 기대받았다. 그러나 보수화된 개화당 원훈들을 넘어서지 못해서 결국 그들과 타협하고 1차 대전 전시 총리라는 이유로 사회 개혁들을 억눌렀다.
- 민영환
대한제국의 제7대 총리대신. 본작에서도 임오군란 때 맞아 죽은 민겸호의 아들로 원래는 연좌로 처벌당할 뻔했지만 이선의 강력한 비호로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관료로 실무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철저한 근왕파이자 공안총수도 역임한 보수적인 인물임에도 1차 대전 이후 첫 총리이자 첫 비개화당 총리가 되었는데, 개화당이 싫어하지만 자신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인사를 앉혀서 보수화된 개화당 독재를 끝내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권력기반이 협소해서 개화당 우파에 휘둘렸고, 본인도 개화당 우파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라 노동 쟁의로 시작된 원산 학살을 막지 못하고, 이선이 귀국 후 이 책임을 물어 내각총사퇴를 하면서 9개월의 단임 총리가 되었다. 결국 역적의 아들인 자신이 황제 덕분에 목숨을 이어나가고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황제가 선위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청산가리를 먹고 자결한다. 이선은 원래 역사에서 본인 책임도 아닌 을사늑약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었던 그의 성품을 뒤늦게 깨닫고 씁쓸해한다.
원래 역사에서는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책임을 지고 자결하고 훗날 고종의 사후 종묘에 모셔진 고종의 신위에 배향되었는데, 본작에서는 자결하게 된 사유가 사유이다보니 배향되지 못했다. 다만 훗날 추가 배향될 여지는 남았다.
- 이상설
대한제국의 제8대 총리대신이자 제1대 국무총리대신. 대한제국 역사상 최초로 선거로 구성된 민의원의 민의에 따라 총리로 지명되었다. 보통선거제를 도입하고 보수당을 모델로 개화당 개혁을 추진하지만 개화당 장기집권에 대한 염증과 원산 학살에 대한 책임으로 처음으로 과반 의석을 잃고 1당이 되어서, 신민당과 협상을 통해 대한제국 사상 최초의 연립내각을 구성하게 된다. 이후 김옥균의 뒤를 이어서 황제의 뜻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총리가 되지만 건강 문제로 인해 총리직에서 사임하게 된다. 막나가는 이승만을 타이르기도 한다. - 박은식
대한제국의 제9대 총리대신이자 신민당 출신 인사. 개신유림의 거수이자 신민당 내 보수파[41]로 전통적인 농업 이상향을 꿈꾸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온건한 안창호에게 힘을 보태주라고 행동력이 강한 김구에게 부탁한다. 이상설이 사임하자 그뒤를 이어서 대한제국 9대 총리대신이 된다. 원래 역사처럼 검소한 성격이라서 정부의 이인자인데도 불구하고 허름한 차림 때문에 첫 출근중에 가난한 노인으로 생각한 총리관저 경호원에게도 저지 당한일이 있을 정도다.[42] 이러한 검소한 성품덕에 모든 정당의 존경을 받을 뿐만 아니라 군부인 이동휘, 노백린에게 존경 받는 인물. 이후 신민당이 분열할 때 원로로서 안창호를 지지하고 신민당에 남는다.
- 전봉준
대한제국의 제10대 총리대신. 원래 역사에서 동학 농민운동 지도자였던 전봉준으로 변화된 역사에서는 정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대한제국 제10대 총리대신자리에 오르게 된다. 작가가 대한제국 총리 전봉준을 만들기 위해 전봉준 뿐만아니라 가리발디, 장 조레스, 아우구스트 베벨, 램지 맥도널드, 이누카이 쓰요시, 해방 이후의 조봉암과 같은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모티브를 얻어 창작했다. 자세한것은 전봉준(조선, 혁명의 시대)를 참고.
- 안창호
대한제국 제11대 총리대신. 농민조합운동의 웅변가로 첫 등장. 청년과 진보지식인들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은 야권의 대표주자로 보수적인 신민당 원로들과 달리 자유주의적이고 국민주의적인 코포라티즘 정치가로서 신민당의 사무총장이 된다. 원산 학살의 진상이 규명되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된 총선에서 신민당이 2당이 되자 개화당과 협상을 통해 연정을 구성하고, 내무대신이 된다. 원래 역사처럼 공군에 관심이 많아 군축하는 와중에도 공군에 대한 투자는 지지한다. 신민당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에 만족하는 다른 신민당 인사들과 달리 개혁 정치를 통해 한국사회를 바꾸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내무부를 통해 개혁정치에 뛰어들면서 여러 개혁을 함으로서 신민당은 개화당과 다른 자유주의 정당임을 국민들에게 어필하려고 하지만 개화당의 반발과 당내 보수파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렇게 개화당과 차별을 두려는 이유는 영국 자유당의 사례 때문에 개화당의 하위 파트너로 신민당이 남는 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지지하는 신민당 좌파, 사회당과 진보당 좌파와 함께 반개화당 동맹을 만들려고 한다. 반개화파동맹을 통해 선거에서 승리하고 내무대신과 손병희가 거절한 내각 의정대신자리를 겸직한다. 이선이 이진에게 선위하면서 전봉준이 물러나자 전봉준을 이어 대한제국의 총리대신이 된다. 전근대교육을 받고 농업에 빠삭한 전봉준과 달리 공업과 현대행정에 빠삭하며 기술에도 이해가 높아서 큰기대를 받는다.
- 이승만
대한제국 제12대 총리대신. 친미파이며 한영일 동맹을 성사시키거나 소련, 일본을 압박하는 뛰어난 외교실력으로 결국 외무대신의 자리에 오르지만 본인의 인품 탓에 작품내에서도 적을 많이 만든 상황이다. 이선 본인도 이승만의 능력은 뛰어나지만[43] 편벽한 인품과 권력욕이 너무 강해서 총리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평가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조선, 혁명의 시대)를 참고.
- 김구
대한제국 제13대 총리대신. 본작에서는 본명인 김창수로 등장한다. 동학군이 아닌 조선군에 입대하여 부사관으로 안중근의 부친인 안태훈이 지휘하는 황해도 병사들로 구성된 8연대 소속으로 독립전쟁에 참전해 공을 세우고 이후 안중근과도 친우가 되었다. 작중에서는 조선이 식민지가 되지 않았으니 국내에 머물면서 계몽운동에 투신한 걸로 보이며, 신민당 우파 소속으로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원산 노동쟁의가 대한 민본주의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생각해서 사건이 일어난 달인 9월을 상징해서 구(九)로 개명해서 원래 역사와 의미는 다르지만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고, 연정 협상이 이뤄지자 온건한 안창호를 보좌하기 위해서 박은식의 추천을 받아 내무협판 겸 치안국장이 되어서 경찰 개혁에 나선다. 원래 역사에는 극우적 성향을 다소 보였지만 변화한 역사에서는 좌익과 우익을 절충한 코포라티즘 정치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본인도 이후 유럽에서의 공산주의의 행태를 보고는 보수화되어서 안창호보다 이승만하고 더 가까워진다.[44] 결국 신민당을 탈퇴하고 개화당에 합류하지만 이승만이 영국과 외교문제로 황제의 분노를 사자 실망한다.
- 김규식
대한제국 제14대 총리대신. 조선이 망하지 않은 작중에서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정치철학 박사학위를 받게 되고,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파리강화회의에 대한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한다. 외국어 습득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데다가, 권력을 탐하지도 않는 성실한 관료[45]라 이선이 내심 다음 세대의 외교를 이끌 인재로 점찍었다. 김옥균이 만주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하면서 데려가서 청의 외교 고문을 맡게 된다. 실제 인물의 성향을 반영해서 아시아 식민지 해방에 관심을 가진지라 소비에트에 호의적인 편이다. 이선처럼 소비에트와 타협안을 모색하고 원래 역사처럼 호치민과도 친분을 나눈다. 1924년에는 이승만 뒤를 이어 외무대신에 취임한다. 담딘 수흐바타르를 이용하여 운게른을 제거하자는 계획을 이선에게 제출한다.
총리직에서는 우파, 좌파 양쪽으로 까이면서 어느 쪽도 편이 없는 외로운 상황이라 스트레스로 인한 지병이 악화 되어가고 있다.
2.4. 조정(내각)
2.4.1. 개화당
- 어윤중
탁지대신으로 20년간 대한제국 초기의 재정개혁을 책임진 인물. 대부분의 어전회의에서 침묵을 지켰으나 러일전쟁 참전을 반대하는데 재정 파탄을 우려해서다.[46] 이후 이토와의 협상에서 4달러식 협상법으로[47] 300만엔의 은을 일본에게 제공받는데 큰 역할을 한다.
- 김윤식
참정대신이자 동도서기파의 대표.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제안이 마치 임진왜란 같다고 주장하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원래 역사에서 친일파라기에도, 확고한 독립운동가라기에도 애매한 태도를 보였으나 여기서는 오랫동안 국가원로로 살면서 89살의 호상을 치르고 죽는다.
- 신기선
개화당으로 동도서기파,온건개화파라 초창기부터 정치에 참여했으며 순신창상회 부회장, 첫 내각에선 학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보수파로 노비해방에 우려를 표했으나 김옥균이 순조의 예시를 들며 노비제 폐지를 명했다.
- 민영익
여흥민씨의 총아로 이척의 처남, 개화당에 우호적이고 김옥균이나 홍영식과 친해서 민씨일가 숙청이후에도 조정에 남아 보빙사에도 참여하나 민씨 척족의 복수를 하라며 꼬드긴 원세개에게 러시아와 완화군의 밀약을 흘린다. 그러나 원세개가 증인으로 내세우려 할 때 알 수 없는 이유[내용누설]로 미국으로 도주해서 그곳에서 공부하고 이선에게 사면되었다. 영국 공사에 임명되고 학무대신자리에도 오르나 여흥민씨였기에 정치에 깊게 관여하진 못하고 기업가로 변신, 한중일 무역을 중개하다가 상해에서 별세했다.
- 홍영식
원래 역사에서는 갑신정변 도중에 사망하나 본작에서는 15년 더 오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만큼 험한 꼴도 많이 보고 말았다. 갑신경장 이후에는 보수파들의 테러에 휘말려서 중상을 입었고, 조선 독립전쟁 때는 김옥균과 함께 청나라에 억류당하는 등 험난한 인생을 살다가 결국 청나라에서 벌어진 의화단 운동에 휘말려서 끝내 찰스 조지 고든과 함께 살해당하게 된다. 젊고 인망이 좋은 그의 죽음은 이선을 포함한 개화파의 분노를 불러 왔으며, 결국 의화단 전쟁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자금성에 태극기를 꽂는 것으로 복수하게 된다.
- 서광범
외무대신으로 보빙사로 미국 방문,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조선인, 청나라에 대한 강경한 독립파로 조선 중립안 당시에도 독립을 명시할것을 요구했으나 이선의 설득으로 현실적으로 그게 불가능하단걸 깨닫는다. 대미외교관으로 활약하며 외무대신으로 태프트 미국 태통령 취임 기념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지병인 폐병이 악화하여 숨을 거두고 원래 역사에서는 39살에 죽었지만 발전된 대한에서는 미국에서 치료도 받아서 49세로 죽는다.
- 이규완
대한제국의 군인이자 나무꾼출신으로 성격이 매우 강직하여 고종이 외환죄를 저지르자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퇴임시키려 들었으며 부패 연루 황족인 이준용을 체포하기도 한다. 3부 시점에서 박영효의 측근이자 내무대신. 이준용과도 화해하고 원산에서 총파업이 일어나자 체포된 여운형을 직접 대면해서 자신이 겪었던 조선의 위기를 들먹이며 설득하는 모습을 보였다. 원래 역사의 모습을 반영해서, 청렴하고 강직한 관료였지만 전근대적인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해서 결국 원산 학살의 주범이 되었다. 민영환의 자결 후 그 역시 자결하려고 했지만 칼로 한데다가 응급조치를 취해서 실패했으며, 이선이 직접 문병을 와서 죽음은 도피라며 책임을 지라고 설득해서 이에 따르기로 한다.
- 이범진
내무협판으로 군인 이범윤의 사촌, 이위종의 부친. 하급관리 였을 때 청국상인의 횡포를 저지하려다가 청국군사에게 구타당한적이 있어서 반청 자주파가 되었다. 이범윤의 잘못을 본인이 책임지려고 했으나 이선이 반려한다. 홍종우와 함께 황국협회를 조직하며 보수파의 핵심이 되었으며 이일로 러시아 공사로 가게된다. 러일전쟁 중에는 러시아의 적대적인 시각 속에서도 이선의 친서를 전달했으며 피의 일요일사건당시 학살을 보고 상소를 올리는 백성들을 학살한것에 충격을 느낀다.
- 이용익
보부상출신으로 근대적 자본가로 변신하여 대한천일은행을 설립한다. 보부상들이 정치에 뛰어들수 있고 중요요직을 맡을수 있다는 걸 보여줘서 전통적인 보부상들이 자본가가 되기 위해 노력하게된다. 이범진, 홍종우와 함께 황국협회를 창설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그러나 황국협회가 이선의 경고를 받고 나서 개화당으로 이동하여 상공대신이 된다. 몇 안되는 조정내 서북출신 인사로 탁지대신을 지냈다.
- 이준
몇 안되는 조정내 서북출신 인사로 1907년에는 주 네덜란드 공사를, 1차 세계 대전 당시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였다. 근대화된 사법제도를 도입하였으며 역사대로 이상설, 이위종, 서광범과 이동휘와 함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다. 공교롭게도 헤이그 특사들인지라 이선은 감동을 느낀다. 법무대신을 역임했다.
- 김가진
초기부터 활약한 인사로 독립문 현판을 썼다. 2부부터는 개화당 중진이자 민의원 의장, 칭제건원 당시에는 로마의 사례를 통해 조선이 명나라의 적통을 이었으니 황제를 칭해도 된다고 주장했다. 김성규(金星圭)와 함께 토지조사사업에 참여하며 실무형관료로 평가된다. 한참 등장없다가 2부 선거때부터 민의원의장으로 다시등장, 청나라를 당장 멸망시키자는 젊은 의원들을 진정시킨다. 중화민국 설립 후 초대 주중공사가 된다. 3부에서는 황태자에게 서예와 외국어를 가르쳤으며 총리가 아님에도 황태자곁에 앉으며 모든 의원들에게 존경받는 살아있는 의회정치의 화신임을 보여준다.
- 이시영
개화당 출신 정치인. 김홍집의 사위이자 이회영의 동생으로 외무부 교섭국장으로 등장하여 전봉준에게 황제의 밀서를 전달하며 이히영이 단순한 통신원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한다. 53세의 나이에 탁지대신으로 임명된다. 행정력과 인품은 뛰어나지만 정치가의 덕목인 정치감각이 부족하다. 이선에게 행정가면 몰라도 정무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을 받는다. 결국 이승만에게 당권 경쟁에서 패배해서 2인자가 되고 신민당 우파를 설득하여 개화당에 입당시킨다.
- 오세창
유홍기의 제자, 외무부 아주국장으로 첫등장하여 의화단 전쟁당시 한국에서 보호를 위해 가져간 보물들을 청나라에 돌려준다. 아주국장으로 달라이라마가 이선을 전륜성왕이라고 말한것을 들었다. 1920년 선거에서 개화당 소속으로 학무대신에 오른다. 1924년 총선 이후에는 이승만의 독단적인 당 운영방식에 반발하여 진보당으로 탈퇴하고 자신 계파의원들도 끌고나가서 진보당과 사회당 연합이 과반을 달성했다고 한다.
2.4.2. 신민당
- 홍진
신민당 출신의 법무대신. 이동녕과 함께 신민당 우파를 대표한다. 진보당과 연대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신민당을 탈퇴한다.
- 이동녕
탁지부 재무관을 역임했다. 이후 신민당의 중진으로서 농림 대신에 취임하고 안창호가 내무대신에 입각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나 안창호가 신민당만의 차별성을 강조하며 진보당, 대한 사회당과 연대하려고 하자 이에 반발하여 신민당 보수파로서 이상설, 이시영과 밀접해진다. 결국 법무대신 홍진, 김구와 함께 신민당을 탈당한다.
- 이승훈
민족자본가로 안창호의 협동조합운동에 관심을 가진다. 기업가로서는 청나라가 칩입할 때 군수업으로 업종을 바꾸고 전쟁 후 평양기기제작주식회사를 설립하여 각종 무기들을 생산해낸다. 안창호와 신민당을 창설하고 이종훈과 함께 신민당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1920년 선거에서 56세 나이로 상공대신이 된다.
- 조만식
평안도에서 명망높은 인사로 협동조합운동과 민족자본운동을 이끈 인물로 1924년 선거에 상공대신에 취임한다.
- 양기탁
외국어를 공부하여 황성일보에서 외신을 번역하는 일을 맡고 있었으며 대사절단에 동참하는 걸로 첫등장. 궁내부 예식원 과장으로 다시 등장하여 러일전쟁동안 이영을 보조한다. 신민당의 부총재로 안창호의 입각을 지지한다. 자유주의 언론인으로 24년 총선에서는 탁지부 대신으로 오른다.
2.4.3. 진보당
- 공성학
진보당 출신의 얼마안되는 대자본가, 김택영의 제자로 만주가 우리의 고토라고 생각하는 민족주의 사고를 가지고 기업활동에 뛰어들어 만주를 개발하는 한만산업척식회사를 설립한다. 자치령 위기가 발생하자 동학교도로 이루어진 민병대인 만인대에 자본을 지원한다. 1924년 총선에서는 정치에 뛰어들어 농림대신에 취임한다.
- 최린
원래 역사의 유명한 변절 친일파, 1924년 내각의 교통대신으로 취임했으며 진보당의 젊은피로 소개된다. 손병희의 지지를 받고 있다.
- 이종일
개화파 출신이나 손병희와 전봉준에 감화되어 진보당에 입당하여 농민계몽운동을 펼쳤다. 1924년 선거승리로 학무대신에 취임한다.
- 허헌
판사출신 변호사로 독일 대륙법에 능통하다. 사법개혁을 이끄는 역할을 하며 인권 변호사로 활약, 당외에서 노농연합을 지원하는 역할을 하다가 1924년 총선에서 진보당 출신의 최연소 법무대신으로 취임한다.
2.4.4. 기타
- 유기환
법무협판으로 등장. 김가진과 함께 로마는 게르만을 계승. 오스트리아가 로마땅을 차지해 황제가 되었고 독일이 게르만을 계승하여서 황제가 되었으니 명나라의 땅을 차지한 청나라말고도 명나라의 의관과 제도를 이은 조선 역시 독일처럼 황제가 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 김규홍
황국협회 계열로 궁내부 시종원경이었으며 이후 궁내부대신, 이선이 북벌을 완수하자 기쁜 마음으로 예전 조선이 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언급하며 효종의 북벌론과 송시열의 북벌론 고사를 언급한다. 원래 역사대로 이선이 황제가 되었으니 수도를 두 개 둘것을 제안한다. 이선 역시 평양이 황제의 열렬한 지지자임을 알고 평양을 서경으로 임명, 평양시민들은 이선의 확고부동한 충성파가 된다.
- 김성규(金星圭)
프랑스 유학파 관료로 프랑스에서 농학과 수학을 공부했다. 귀국후에는 가장 토지 가 많은 전남지역의 토지를 양전했으며 덕분에 전봉준과 함께 토지개혁을 이끈다. 계몽군주가 토지개혁을 이끈 덴마크의 사례를 참고하여 토지개혁을 이끈다. 3부에 근황이 나오는데 농림대신 자리에 취임하고 모은부로 목포에 무역회사를 설립한다. 그자신도 대한제국 초기에는 진보적인 인사였으나 작가가된 진보적인 아들 김우진과는 역사대로 갈등을 겪는다.
- 윤치성
근위기병대 참령으로 역사대로라면 윤영렬의 아들이자 윤치호의 사촌동생이나 여기서는 윤치호의 동생으로 나오며 윤웅렬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러일 전쟁 당시 이영을 보조하는 친왕 부무관으로 임명되었다. 3부에서 윤치왕의 가족사를 설명할 때 장성으로 전역했다고 언급된다.
- 윤영렬
해평 윤씨 가족사를 언급할 때 나오며 경무관료로 내무 협판을 지냈다고 언급되며 아들들 모두 출세 했다고 언급된다. 아들 윤치소는 대한광공업주식회사 부사장이 되었으며 장남 윤치오는 학무협판, 윤치영 같은 나머지 자식들도 엘리트로서 출세하고 있다고 한다.
2.5. 육군부
- 한성근
병인양요 시절 초관이었던 인물로 대원군파 무관이라 군무협판을 맡으며 사실상 군부내 최고위참 원로, 조청일전쟁에는 2사단장을 맡아서 나라를 위해 죽을수 있는 것을 기뻐한다. 청군의 후미를 공략하여 평양에서 격파하는데 성공하고 압록강을 넘어 도하하여 만주로 진격하는데 성공, 요양을 정복하는데 성공한다. 은퇴후에 명예 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훗날 자유공원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아닌 한성근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49]
- 한규설
이선을 보좌하여 실질적인 근위대 지휘를 하는 인물로 조청일 승리에 기여하며 군무대신을 맡는다. 한참 뒤 황제 시해 사건으로 윤웅렬이 사퇴하자 개화당에 속하지 않는 군인이라 군무대신을 맡고 한영일 동맹체결에 조심스럽게 러시아를 자극 할 수 있다는 의견을 낸다. 유학자이기에 차르가 폴란드 시위를 진압했다는 말에 군주라면 그럴수 있다고 평가했다. 러일전쟁이 개전하려고 하자 한국군을 준비시키고 이선의 말대로 우호적 중립을 할것임을 일본군에게 통보한다. 한성근, 윤웅렬처럼 명예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 이범윤
1892년[50] 참령으로 두만강 국경을 지키는 5연대 3대대장으로 복무하던 중, 청의 길림장군이 간도에 이주한 조선 백성들에게 동화정책을 강요하고 반발을 무력으로 진압하자, 구원요청을 받고 무단으로 월경해서 청군을 격파한다. 어차피 일이 터진 김에 함경도 관찰사와 5연대장도 병력을 모아서 후속 전투들에서도 승리하지만,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고 교전을 벌인데다가 당연히 청이 노발대발하면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무력시위로 발전하나, 열강의 개입으로 동화 정책은 중단하되[51] 간도가 청의 영토임을 인정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되었다.
이후 병력을 동원한 3명은 원수부에 소환되지만 서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자, 국민적 영웅이 된 이들을 중하게 처벌할 수 없어서 직위해제 및 대기발령만 시키고, 이선이 책임을 지고 군무독판을 사퇴함으로서 국내여론과 청을 만족시키는 묘수를 둔다. 이후에는 조청일 전쟁에도 참전하고, 남만주 자치령에 주둔한 의용군 사단장이 된다. 정치적으로는 개화 정책의 성과를 과시하고 국민들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계기가 되었지만, 엄연히 문민통제를 거부하고 폭주하는 원래 역사의 일본군 같아서 독자들의 평가가 좋진 않았다.
- 윤웅렬
윤치호의 아버지로 대한제국의 군무대신, 대한제국 초창기의 군사관련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육군 출신인데도 해군 신형 함선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형순양함 구매를 위한 예산확보를 요구한다. 결국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 2번함 페드로데 아라곤을 구매하는데 성공하고 광개토 대왕함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황제 시해 사건 당시 군인이 연루된 것 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며 한규설, 한성근처럼 명예 대장직을 받는다.
- 권동진
만주의 동학농민군들을 자극시켜 경자 농민전쟁이 벌어질때 농민군과 한국군의 연계를 담당했다. 이후 러일 전쟁이 벌어지자 의병을 빙자한 한국군 7사단을 이끌고 러시아에게 경고를 줌과 동시에 기만작전을 펼쳐서 러시아군의 혼란을 유도한다. 만주 진출을 원하는 군내 사조직인 북진회의 요구를 억누르고 노백린과 함께 군을 통제한다.
- 장호익
원래 역사에서는 이승만과 함께 고종을 끌어내리려고 했던 인물. 여기서는 북진회라는 군내 사조직을 만들어 만주로 진출하려고 한다. 우범선의 유신회와 달리 북진회는 꽁꽁 숨어있었고 이선 역시 러일전쟁 이후 북진회를 이용해먹다가 언젠가 숙청할 세력으로 여겨 살아남았다. 마적 장작림과 김개남과 함께 후방에서 기만&교란 전술을 펼친다. 결국 체포되었으며 사조직을 만든죄로 징역 5년을 산다.
- 우범선
실제 인물과 매우 비슷하지만 대한제국이 흥한 작중에서는 충실한 군인으로, 독립전쟁에 참여하고 정령까지 진급한다. 그러나 정치군인스러운 성향 때문에 별을 달지 못했고, 이를 이선이 그의 친일 성향을 꺼려서라는 오해를 하게 되어 좌절하여 일본인 아내와 결혼하고[52] 군 내 사조직에 가입하는 등 폭주하게 된다. 이선이 친일파들을 숙청하기 위해 종용한 역모 사건에 휘말려서 투옥되었는데, 목숨은 건졌지만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4부에서 언급되기로는 복역 중 태시제 즉위 기념 특사로 석방되었으며 아들인 우장춘은 원 역사처럼 촉망받는 과학자가 되었다고 한다.
- 이희두
원래 역사에서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인 인물이었으나 여기서는 이미 제국익문사에 포섭된 인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이며 역모를 가장 적극적으로 추친하며 폭탄도 본인이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그저 조직을 과격하게 하여 첩보기관에 잡히도록 했을뿐이다. 다른이들과 다르게 신념형 범죄자 였던 우범선은 여기서 충격을 먹고 온갖 욕을한다.
- 홍범도
평안도 상민 출신의 구식 군대 나팔수로 시작해 개화정책의 시류를 따라 군문에 들어선 인물로 독립전쟁, 북벌 전쟁에 참전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 러일 전쟁 당시 6사단장으로 근무하다 원수부 총장을 거쳐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원정군 사령관이 되어 홍도[53] 전투에서 국군을 승리로 이끌며 육군 대장[54]까지 진급하며 전쟁영웅이 되었다. 본작 역사개변 최대 수혜자 중 하나로 카자흐스탄에서 쓸쓸하게 죽은 원래 역사와 달리 군 원로이자 전쟁 영웅으로 기억될 것으로 보인다. 이후 데일리 메일이 한국과 한국 황실을 비난하는 기사를 쓰자 분노하여 당장 영국 대사관으로 달려가서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며 크게 분노한다.[55] 군에서 나간 뒤로는 만주국의 군사고문직위를 맡는다.
- 박유굉
일본 육사 출신으로, 독일 전쟁대학 1호 유학생이 되어 조선군을 국민군으로 개혁하는 초창기에 정치적으로 임명된 군원로들과 차별화된 능력을 겸비한 고급장교로 쾌속 승진했다. 조선 독립전쟁에 참전하고, 의화단 전쟁에서는 근위여단을 지휘하였으며, 이후 이선의 총애로 군부의 수장이 되어 프로이센식으로 개혁된 국군의 확장을 주도했다. 원수부 총장 시절 공적으로 군부대신으로 장기간 재임하고 있다. 다른 개화당 우파들 처럼 사회주의에 매우 부정적인데다가 독일 유학 경험 탓에 전형적인 프로이센 군인화가 진행되어 군부내 우익 팽창주의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러시아 내전 개입을 추진하는 박영효 등 우파와 손잡고 내각에서 강경론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 때문에 결국 원산 학살의 주범 중 하나가 되어 버렸고, 이선이 선위 파동을 일으켜 이들의 책임을 물으려고 하자 주범들이 시베리아에서 일을 크게 저질러서 시선을 돌리자는 말이 나오자 군을 정치에 동원할 수 없다며 극렬하게 거부하고 군복을 벗고 죄를 청하겠다고 결의한다. 이선은 그 동안의 공로를 인정해 본인은 군복을 벗기고 파벌은 좌천시키는 것으로 처벌을 마무리하려 했으나 민영환이 황제 폐하의 어심을 거슬렀다는 죄책감에 자살하자 자신도 충성의 대상인 황제 폐하께 죽음으로 사죄하겠다며 집무실에서 권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한다. 원 역사에서 갑신정변의 실패에 휘말려 젊은 나이에 자결한 것에 비하면 훨씬 오래 살고 대한제국군의 기반을 다진 전설적인 군인으로 영광을 누렸으나, 한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씁쓸한 결말을 맞이했다.
- 박승환
조청일 전쟁 당시에 요양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하며 태극기를 꼽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근위사단장 자리에 올라서 테프트 부통령 방문 당시에 근위 사단장을 맡아 군사 행진을 지휘 했다. 1차 세계대전에서는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독일령 산둥반도 공략에 참여하고 연합군의 한국군 대표를 맡는다.
- 노백린
작중에서는 황제 이선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원래 역사에서도 관심사였던 항공 분야 발전에 몰두할 수 있었다. 덕분에 라이트 형제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인 플라이어 1호의 최초의 비행을 본 몇안되는 사람이된다. 그후 육군항공대 대장이 되어서 1차 대전에 참전한다. 이때 총력전의 잔인함에 충격을 먹고[56] 국군을 강하게 만들어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겠다는 꿈을 가진다. 이후 참모총장이 되어서 공군 발전에 몰두한다. 군에서 진보적인 인사로 새로운 기술을 모집하거나 김유진 같은 재능있는 장교를 후원하는 등 명장의 모습을 보인다. 1924년 총선에서 원수부 참모총장이 된다. 1937년 1월에 서거한다.
- 서왈보
여기서는 유왈보라는 이름으로 등장. 노백린의 추천을 받아 라이트 형제가 만든 한국 최초의 비행기를 타고 아시아 최초의 비행기 조종사가 된다. 산둥 전역에서 권총으로 동아시아 첫번째 공중전을 펼친다. 이후 대한 육군항공대 소속으로 동부전선에 참전, 고려인 연락장교 표트르 최와 친분을 쌓는다.
- 박대붕
전라남도 해남 출신의 일개 백성이었으나, 군에 입대해서 대한제국령 요동에서 복무하게 된다. 문맹이었으나 군대에서 글도 배우고, 군인으로서 자질이 있어 공을 세워서 훈장을 받고 헌병 부사관이 되며 크게 출세한다. 1부 말기에 대한제국의 변화를 보여주는 외전에서 근대국가의 국민이 되어가는 상징으로 등장한 인물. 이후 만주 폐페스트 팬데믹 때 방역헌병으로, 러시아 파병 때는 군기헌병으로 활약한다. 자신을 출세할 수 있게 해주고 친히 훈장까지 수여한 황제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을 갖고 있어서 30세에 혼인한 황제를 본받아 30대 중반이 되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을 정도. 독일이 어디있는 나라인지도 모르지만 독일과 싸우는 이유도 황제 폐하의 명이니까 닥치고 따른다. 군율을 어긴 군인은 상관이라도 무자비하게 폭행할 정도로 군인 정신이 투철하고, 문맹이었던게 무색하게 신문도 열심히 읽고 고관들의 연설문들을 공부해서 그럴듯한 연설도 할 정도로 유식해졌다. 동부 전선에 자원해서 소대장 신익희를 보좌하기도 하고, 하얼빈 암살 사건 때는 장삼을 취조하는 자리에서 그가 황제를 모욕하자 분노해서 폭행하는 등 작중에서 가히 포레스트 검프 역할을 하고 있다.
4부에서도 다시 등장했다. 36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전역해서 남만주 일대에 꽤 큰 토지를 불하받고 농민으로 돌아와서 살고 있었으며, 40대에 늦게 결혼해서 늦둥이 아들 둘도 두고 있었으나 가짜뉴스에 속아 상경해서 소련 이익대표부 폭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됐다. 그러나 황제가 칙유를 내렸다는 걸 알고 바로 잘못을 깨닫고 자괴감에 자살을 시도하는 소동을 벌이고, 잘못을 인정한데다가 헌병 대선배라는 배경 덕분인지 빠르게 풀려났다. 이후 극우 성향 군인 사조직인 북방 전우회에 포섭됐는데, 한번 군인은 영원한 군인이라며 이들의 정체와 오가는 말들을 빠짐없이 되새기는 반전을 보였다. 다만 정부에 포섭되어서 이중스파이로 활동하는 것인지, 자발적인 충성인지는 이후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 신익희
햇병아리 참위로 영국에서 국비 유학을 할정도로 똑똑한 엘리트 지식인. 영국 젠틀맨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온건한 성품이었으나 영국에서 본 영국인들의 애국 프로파간다와 참전을 보고 본인도 영향을 받아 참전한다. 그러나 전쟁의 참혹함과 험한 일과 연이 없던 신참 소위다 보니 고생한다. 그럼에도 박대붕 정교의 도움으로 나름 베테랑 참위가 되어간다.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싸우라는 박대붕과 다르게 이 전투에서 패배하면 러시아는 항복하고 그러면 연합군의 승전 가능성은 줄어들고 국군의 희생도 무의미해진다며 병사들을 다독이고 전역을 한뒤는 내무부 치안국 주임관으로 일하며 관동 대학살로 인한 반일 폭동을 진압한다. 박대붕 정교와 추억을 소중히 간직하는듯.
- 김좌진
2차 대전 중 동부전선에서 돌격대 지휘관으로 참전한다. 독일 유학파라서 독일어도 어느 정도 할줄 안다. 큰 체구와 용맹함으로 3부 시점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3세대 영관급 장교들의 선두주자가 되었다. 아들 얼굴도 가물가물할 정도가 될 정도로 최전선에서 2년 넘게 용맹하게 싸운지라 소비에트와의 협상에 부정적인 태도를 드러낸다. 여기서도 잔인한 성품이라 시베리아 빨치산을 학살해서 이선이 누구에게나 더러운 면이 있다는 걸 아들에게 설명할 때 예시로 나온다. 보즈드라는 사빈코프의 사회 구상을 흥미롭게 여기는 모습을 보인다.
- 김경천
김광서라는 이름으로 주로 등장한다. 조선의 나폴레옹을 꿈꾸는 군인으로 산둥 전투에서 활약한다. 동부전선에서도 고구려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백마를 타면서 기병장교로 활약, 이후 적백내전 중 백군 측 관전무관으로 등장, 농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적군에 비해 백군에게는 비전이 없음을 걱정한다. 이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관전무관으로 참전해서 이선의 지시로 샤를 드골과 인연을 맺게 된다. 전차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이학균
조청일 전쟁 당시 근위연대 1연대장. 요양회전에서 수완보를 점령하는 성과를 보이며 미국 유학파로 미국군사 고문단의 보좌관 역할을 했다고 짦게 언급된다.
- 조성환
한국군의 근대적 사관학교 교육을 받은 장교중 한명으로 등장. 적백 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당시에 한국장교단을 이끌고 폴란드군을 돕는 군사고문단으로 활동한다. 적백내전 당시 폴란드 상황을 언론 인터뷰를 통해 한국에 알리기도 하며 비스와 강의 기적 직전 소련에 대한 한국군의 첩보를 전달하여 승리에 기여한다.
- 이갑
이응준의 장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이 참전하길 바랬으나 일본군이 여순에서 무참히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현대전의 무서움을 깨닫는다. 여순 공방전에서 일본군의 피해를 계산하면서 일본군이 한국군 참여를 요청하는게 한국군의 고기방패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참전 반대론자가 된다. 1차 세계 대전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한국군을 후퇴시키다가 포격을 당해 반신불수가 된다. 이선은 그에게 훈일등태극대수장을 수여하고 한계급 특진시킨다.
- 이응준
연해주 주재 정보부 장교로 등장했다. 원래 역사처럼 이갑의 사위가 되었는데, 이갑이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포격으로 중상을 입고 반신불수가 되었기 때문에 소장파 장교들 중에 소비에트에 제일 강경한 모습을 보이며 협상은 안 된다는 장교단의 의견을 피력하자는 주장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노백린에게는 배척받는다. 4부 시점에서는 군사정보국장으로 홍사익과 함께 군부 강경파를 이끈다. 하지만 북부군 특무기관의 폭주로 이진에게 해임당한다.
- 홍사익
실제 인물이 그랬듯 군재가 뛰어난지 본작에서도 '대한제국 역사상 최고의 참모장교'라는 평가를 들으며 대부분의 소장파 장교들이 일선에서 근무하는 반면 원수부에서 요직인 작전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황제의 아들인 이진과도 친해서 일부 군인들은 홍사익에게 황제께 강경책을 권유해볼 것을 부탁하기도 한다. 참모차장까지 올랐으며 본심은 친소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는데다가 인정받는 장교이다 보니 파벌을 형성하게 되지만, 어차피 참모총장까지 출세가 보장된 장교인데다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하다고 평가되고 있다.
- 지청천
산둥 반도 공략에서 김광서와 함께 활약한 장교로 첫 등장, 키아우초우를 점렴하는데 공을 세운다. 김좌진 같은 소장파 장교들의 선배 격이라, 소비에트에 불만을 품은 것은 마찬가지지만 황명을 따라야 한다는 원론을 내세우며 상명하복하는 자신들도 불만이 있으니 소비에트는 오죽 하겠냐며 협상은 결국 파기될 수 밖에 없을테니 기다리자는 의견으로 장교들을 다독인다.
- 유동열
일본과 러시아에서 유학한 제 7 독립 기병 중대장. 한국군 장교지만 다른 장교와는 다르게 만주에 대한 일본의 공작을 조사하는 스파이나 관전무관으로 만주와 러시아에 자주 파견된지라 해당 국가들에 대해 빠삭한 인물. 만주에서 흑룡회의 친일 공작을 조사하거나 일본의 정보를 러시아로 유출하기도한다. 대전쟁에서는 근위기병대장으로 참전하였으며 소련을 답도 없는 빨갱이로 여기는 이들과 다르게 소련의 생리를 잘알아서인지 러시아통으로 불린다. 이후 소련과 한국이 부딪힌 내막을 조사하여 책임자인 곽근풍를 처벌하고 현지 민심을 안정시킨다.
- 어담
근위포병연대장. 1차 세계대전 후 한국군의 철수를 담당하던 장군으로 홍범도 사령관의 대리. 소련에게 공격당했다는 보고를 듣자 포위될까봐 두려워서 소련군을 공격하고 치타를 점령한다. 이후 본인도 소련 지휘관을 심문하면서 뭔가 잘못되간다는 걸 느끼지만 확신이 없어서 본국의 훈령만 기다린다. 이후 유동열이 진상을 파악하자 책임을 지고 사퇴하려고 했지만 소련이 먼저 공격했다는 명분 확보를 위해 유동열이 해당 사건을 불문에 부친다. 이후 해병대 전체를 불신하게 되며 군무대신이 된 안중근에게도 반감을 가진다.
- 이동휘
초창기부터 등장한 무관중 하나로 군 고위직 인물로 자주 출연한다. 의화단 전쟁에서는 안중근과 함께 공사관 구역을 지킨다. 이 경험 때문에 안중근과 친우가 되어 그와 아시아주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유동열과 함께 만주내 첩보활동을 같이하기도 한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일본을 지원하는 지원부대 대장을 맡았다. 대전쟁에서는 파병 참모장을 맡았고 러시아 혁명 당시 한국군은 개입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린다. 대한제국 최초의 보통선거 이후 성립된 내각에서 군무대신이 되었다. 문민통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선의 특명을 받고 소비에트와의 협상에 불만을 가진 군부를 달래는 중임을 맡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마찰을 빚고 있다.[57] 1924년 총선에서도 군무대신을 맡으면서 어러가지 군사적 조언과 결정을 맡는다. - 송호성
1906년 입학인 무관학교 23기, 그 이후 24기, 25기 기수인 3세대 장교[58]중 하나로 언급된다. 3세대 장교들은 국왕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이전 장교들과 달리 대한제국의 역사적 사명을 중시한다고 언급된다.
- 신태영
1906년 이후 입학한 무관학교 입대자들인 3세대 장교중 하나로 언급된다.
- 이범석
육군무관학교 역사상 최고의 성적을 거둔 인재로, 참위 계급에 최고의 광무 24년에 대한제국 연길도에서 펼쳐진, 소비에트에 대한 무력시위를 겸한 동계군사훈련에서 두각을 드러내서 이선에게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로서 원래 역사에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을 때 독립군 주역들이 비슷한 장소에서 훈련의 성과로 빛나게 되었다.
- 김유진 ☆
유명 대체역사 소설인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의 주인공을 모티브로 한 인물이다. 만우절 이벤트로 표지를 바꾸고 작가의 말로 개드립을 친 것에 이어, 연재 재개 이벤트로 출연시켰고 명원 작가는 자신의 최근 연재분에 '혁명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았다. 작가가 허락 받고 크로스오버 했다고.[스포일러]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의 독자들은 반가워 할 캐릭터로, 행동이 거의 판박인데다 특유의 성격도 그대로다.크헤헤헤 웃음소리도 똑같다
어렸을 때 황제를 처음 보고 자신도 대원수가 되고 싶다고 했으나 대경실색한 아버지가 대원수는 황제만 될 수 있다고 일러주자 그 이후로는 그 말을 절대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유길준 라인이었던 아버지 김상준이 박영효가 집권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자, 정치에 한이 맺힌 아버지는 사업가가 되고 싶어한 유진에게 군인의 길을 강권해서 결국 군문에 들어선다. 육군무관학교 28기로, 모티브가 된 인물처럼 뛰어난 군재를 지녔고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93기동대를 이끌고 벌인 활약에, 육군대학 졸업논문으로 쓴 전격전 보고서를 읽은 이선과 노백린이 적극적으로 기용하면서 최연소 부령이 된다. 다만 어릴 때 미국 생활을 해서 성격이 자유분방한 편이라 동료 군인들은 이질감을 느끼는 듯. 평행세계의 자신처럼 본인은 군대에서 빨리 나오고 싶어했지만 정령까지 하고 나오라는 아버지의 말을 받들어서 30대 중반엔 전역해서 제2의 삶을 살 꿈에 부풀어 있었지민... 그의 능력[60]을 알아본 이선[61]이 놓아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미국 주재무관으로 가게 되는데 여기서도 맥아더와 엮일 운명으로 보이며,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에서 한국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카드 게임을 하면서 미래전략을 논의한다.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도중 황제의 명령을 받아 미국 정계에 이선이 만든 다나카 상주문과 일본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굴복할 것이라는 첩보(?)를 전달하여 미국이 한국을 신뢰하게 만든다. 3부 외전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미국 유명정치가 여식과 결혼, 이 기회에 미국 여인과 결혼한 걸 핑계삼아 전역하려고 했으나 이선이 허락한 덕에 미국 주재무관으로 다시 파견된다.
- 이종찬
무관학교 50기이자 연대장생도. 원래 역사처럼 명문가 출신이고 생도들에게도 군인의 본분에 충실하도록 지도한다.
- 정일권
무관학교 52기
- 박정희
무관학교 53기 차석 입학자로, 실제 인물과 똑같이 경북 지역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사범대학을 나와서 잠깐 교사를 했다가 출세를 위해 군에 들어오는, 당대 가난하지만 재능있는 청년들이 택할 수 있는 모든 출세 코스를 밟았다. 이종찬이 정치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한 훈계도 명문가 자제분이라 그렇다며 코웃음치며 농민들을 위해서는 만주를 개척해야 하고 그래야 자신도 출세할 수 있을 거라는 야심을 품고 있다. 즉, 역사의 변동으로 충성의 대상이 대한제국 황제로 바뀐 것 외에는 실제 다를게 없다. 이선은 그의 존재를 파악하지만 이미 많은 것이 바뀐 만큼 일단 지켜보기로 한다.
- 신팔균
4부 시점 육군참모총장.
- 남상덕
적백내전기에 시베리아 전역에서 활약했으며, 여러 요직을 연임했다. 신팔균과 육군참모총장 직을 두고 경쟁했지만, 경쟁에서 밀려 낙마하고 담담히 예편하였다.
- 김성주
원래 역사의 김일성.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 어머니와 살던 도시 평양이 기독교세가 제일 강한 도시라 목사가 될수도 있다는 예측이 독자들 사이에서 많이 나왔는데... 원 역사와 180도 달라져서 반공주의 목사가 되어서 소련을 비난하고 반공 성전을 부추기고 있다. 목사라 그런지 웅변능력도 좋아서 정훈장교도 겸하고 있으며, 이선은 그의 존재를 파악하지만 이미 많은 것이 바뀐 만큼 일단 지켜보긴하지만 황실에 대한 과잉충성과 극단적 반공성향으로 제국익문사나 이선한테 살짝 찍힌상태.
- 강재호
하얼빈 특무기관 참령.
- 남상무
남상덕의 일가로 남상덕이 참모총장 경쟁에서 밀려낮고, 본인도 지대형에게 북부군 사령관에서 밀리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배후에서 군부 강경파를 대표하며 우익 단체와 결탁한다.
- 고도태
2.6. 해군부
- 이규풍
충무공 이순신의 10대손으로 조상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문과 급제를 포기하고 해군에 투신했다. 이순신을 찬양하는 일본 해군 사토를 긍정적으로 여기며 의형제가 된다. 미래를 아는 이선으로부터 쓰시마로 발트함대가 진입한다는 정보를 받고 본인도 석탄운반선의 행보로 볼때 쓰시마가 분명하다라는 정보를 사토에게 전해주면서 일본이 발트함대를 처부수고 승리하게 된다. 해군참모국장이 되고 대한제국 최초의 전함인 이순신 함의 탄생을 본다.
- 신순성
미국의 대백색함대를 보고 대단하다고 감탄하는 것으로 첫 등장. 이후 러일전쟁때 해군 관전무관으로서 사토에게 이순신의 탄생일을 알려준다. 1차 세계 대전에서 구주원정함대 제독으로 이순신함을 타고 영국해군과 함께 엠덴을 잡으러 가는 합동작전을 펼치게 된다. 1920년대에는 구축함, 잠수함, 1만톤 이하 경순양함을 건조하며 1930년대에는 1만톤 이상의 중순양함, 1930년대 후반에는 순양전함을 건조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운다.
- 이재수
원래 역사에서는 신축민란을 주도한 관노로 러시아 해군이 제주도에 처들어왔을 때 언젠가는 나도 저런 큰배를 타겠다고 결심, 이후 노비 해방으로 자유의 몸이 되자 해군생도가 된다. 제주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차별을 받지만 그럴수록 나폴레옹도 코르시카 섬출신 아니었나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 동기인 안중근과 함께 기독교[62]를 믿는등 원래 역사와 다른 길을 걷는다. 이순신 함에 함장으로 내정될 예정이었으나 구주함대 편성으로 부사령관이 된다.
- 안중근
작중에서 아버지 안태훈은 조선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청과 전쟁을 한 독립전쟁에서 평양을 지킨 전쟁영웅이었는데, 안중근은 아버지와 다른 길을 걷기 위해서 해군사관학교에 입대했고 뛰어난 사격솜씨로 해군육전대에 보직을 받게 되었다. 의화단 전쟁 때 선발대로 파견되어 방어전을 지휘했는데, 이때 서양 연합군들이 중국인들에게 보이는 멸시로 아시아주의적인 사상을 품게 되었다. 이선은 그를 원래 역사의 그날에 충동적으로 시종무관으로 임명했다. 오늘날로 치자면 대통령비서실장인 비서원경 이상설에게 학문을 배웠고, 이선과 조찬을 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기도 하는데, 일본의 침략이 없는 역사인 만큼 아시아주의를 더욱 더 확고히 믿는다.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사격 국가대표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는데, 이 뉴스를 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묘한 감상을 느끼는 개그씬도 있다. 1차 세계대전에선 해군육전대를 이끌고 맹활약을 펼쳤으며, 이후 보스포루스 해협 통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터키가 그리스에게 이길것이라 보고 영국군의 바램과 달리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철수하고 스웨덴으로 건너가서 이선을 대리하여[63] 발렌베리 가문과 접촉, 한국해군의 발전을 위해 독일 기술자들을 빼돌리는 공작을 한다.
아편전쟁과 의화단 전쟁 당시에 서양이 저지른 일에 대한 반감은 여전해서 동양평화론을 구상. 군인이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생각에 북방주의를 통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신채호의 건의를 받아 전역후 정치인이 되려고 했으나 이선 역시 일본의 아시아주의 대신에 사용할 사상을 찾고 있어서 그의 전역을 반려하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하게하며 이글은 쑨원과 같은 아시아주의자에게 큰영향을 미친다.
이후 신민-노농 연립정부가 수립되자 군무대신을 맡는다.
- 황말출
뼛속까지 해병혼으로 가득찬 해병대 참교. 육군에 박대붕이 있다면 해병대에는 황말출이 있다고 할정도로 전설적인 해병대원이다. 야전삽으로 혼자서 독일군 1개 소대를 전멸시켰다는 소문이 돌고 러시아 여자를 희롱하는 해병대원들에게 벼락같이 날려가 기합을 주는 오도짜세 해병이다. 안중근을 모범으로 삼고 있는지라 모범적인 해병대원이지만 한가지 실수를 저지르는데 소련 적위대와 해병대가 충돌했을 때[64] 소련군이 해병을 해쳤다는 생각에 분노해서 소련군을 도륙내는 바람에 한국과 소련의 사이가 돌이킬수 없이 악화되는 원인이 된다.
- 곽근풍
해병대를 이끄는 1여단 2연대장으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휘하 부대를 통제 못해 소련군과 분쟁이 생긴 것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올 것을 두려워해서 소련군을 감옥에 가두고 소련군의 전보를 바탕으로 명분을 만들어서 상부에 기습공격을 당했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조사에 들어간 유동열 장군에게 들통나고 군사재판을 받게 된다.
2.7. 외교관 및 정보요원
- 이완용
원래 역사에서는 친미 친러 친일을 오가다 결국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였지만 작중의 대한제국은 이선의 지도 하에 승승장구하여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대한제국주의자'가 되었다.애국노미래인인 이선은 이완용의 이름만 들어도 찝찝해 할 정도지만, 기회주의자인 이완용의 본성을 알고 강해진 조선에서 매국노가 될 일은 없을거라 생각하며 원래 역사의 일로 그를 판단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외교관으로 크게 활약하며 외무대신의 직까지 오르고 총리대신을 꿈꾸지만, 이선은 개화당 독재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김칫국을 마시는 중이다. 주청 공사로 활동할 때는 바탕은 유학자인지라 광서제를 지극히 모셔서 돈독한 관계를 형성, 그가 이선에게 더 오래 대사로 재임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서거하면서 그에게 편지와 은사금을 남길 정도였지만, 바로 다른 꿍꿍이를 품어서 외국 대사가 너무한거 아니냐고 할 정도의 혐성을 보인다.
청 황실이 만주로 옮겨간 후에는 특명전권대사로서 제2차 한청협약[65]을 성사시켜서 청을 속국화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대청국 외무고문으로서 임명됨으로 청국의 외무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으며, 1차 대전 후에는 만주와 몽골의 사이가 악화되어서 무력 충돌로 발전하고 장작림이 지휘하는 신군도 통제하지 못하자, 청의 내정과 군권까지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정부의 지시에 의해 원래 역사의 정미 7조약과 매우 흡사한 제3 차 한청협약을 체결하게 해서 청을 더욱 강하게 예속했다.
그런데 신협약은 이선이 훈령을 내린 것보다 더 가혹해졌는데, 박영효 일파가 숙청되는 걸 본 이완용이 특유의 기민한 감각으로 총리가 될 가능성이 사라진 것을 감지하고 차라리 신협약에 따른 고등판무관이 되어서 사실상 청의 총독으로 군림할 속셈이었던 것. 그러나 이선은 이완용이 어그로를 끌만큼 끈데다가 청에서 너무 오래 있었으니 그를 본국으로 소환할 계획이었으며, 협약으로 인해 청 국민들의 반발도 거세졌고 아시아주의자들의 공적이자 척살대상이 되었는데... 결국 하얼빈의 청 귀속 여부를 두고 스톨리핀과 회담하러 하얼빈을 방문했다가, 원래 역사의 하얼빈 의거로부터 딱 10년 후 같은 날에 62세의 나이로 암살당했다. 유언도 이토 히로부미가 했다고 야사로 알려진 그것과 똑같다. 작중에선 대한제국의 국익을 극대화한 노련한 외교관이자 순국한 애국자로 기억될테니 실제 인물의 위상에 비하면 과분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원래 역사에서나 작중에서나 자기 이익이 제일 중요했던 그에게는 참담한 최후였다. 이선은 그를 총리대신 다음의 예우로 장례를 치러주고, 문관에게는 최고의 영예라고 할 수 있는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리고[66] 그의 죽음을 이용해서 만주를 장악하는데 잘 써먹었다. 1930년대 태시제 시대에는 암살당한 하얼빈역에 흉상이 세워지고 하얼빈 부임장교, 공직자들이 반드시 흉상에 경례를 하는 필수코스가 되면서 순국선열로 추앙받고있다.
- 김학우
한국 최초로 한글 무선전신부호를 만든 인물로 어렸을 때부터 삼촌 김인승을 따라서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생활했다. 이선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전권대사로 처음왔을 때 삼촌 김인승과 함게 등장. 향반 출신이라서 그런지 언젠가 자신의 손으로 조선을 개혁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고 실제 역사의 행보를 아는 이선도 적극 기용한다. 익문사에서 대한제국을 위한 첩보전을 지휘한다. 자신도 비밀 첩보조직 익문사 출신이지만 황제의 천리안(?)을 보고 자신들 보다 더 높은 수준의 비밀 첩보조직이 있다고 추측한다.
- 변수
조선 말기 인물이자 미국 최초 유학생으로 이선과 함께 보빙사로 파견된다. 김학우와 함께 독일 외교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서광범과 함께 외교 인사로 활동한다. 미국에 유학하여 조선인 최초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중인 출신으로서 황성대학 총장과 학무대신까지 올랐는데, 미국 출장 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 홍종우
유학생으로 첫 등장하며 조선에 돌아와서는 중추원 의관이 되나 독립협회의 부상에 위협을 느끼고 황국협회 대표로 등장, 황권 수호를 외치며 독립협회와 갈등을 빚지만 정작 이선에게 주의를 받는다. 처벌 대신에 프랑스에 외교관으로 파견되고 그곳에서도 조선인으로서 자존심을 위해 평상시에는 한복을 입고 다니면서 프랑스어를 해서 프랑스인들에게 명물 대접을 받는다. 의화단 전쟁때는 동양인이라면 때리고 보던 시대라 차마 한복을 못 입고 다녔다고 한다. 홍종우는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더 잘못하고는 왜 청국과 아시아를 도매금으로 비난하냐며 화를 낸다. 한참 뒤에 대한민국의 협상국 가입 협상을 위해 프랑스와 외교적 논의를 한다.
- 안경수
독립협회의 창설맴버로 독립협회와 황국협회 지도부가 외국공사로 임명 될때 주독공사로 임명되는 걸로 짧게 등장한다.
- 윤치호
영국에서 이승만의 상관으로 함께 첫 등장. 원래 역사에서는 극도의 염세주의자이자 계몽운동 주도자인 동시에 엘리트주의자였던 등 양면성을 갖춘 인물이었으나, 조선이 국민개병과 교육, 토지 등 다방면에 걸쳐 개혁에 성공하고 세계열강에 진입한 본작에선 180도 변화하여 열정적인 외교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다만 버지니아주 남부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인종차별을 심하게 겪어 백인 혐오를 갖고 있는 점은 똑같다.[67] 원래 역사대로 안창호와 이승만, 서재필, 유길준과 친하지만 같은 연배인 이승만과 박영효와는 달리 야심도 권력욕도 그다지 없어 비중은 높지 않다. 영국에서의 외교 업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한국에 돌아와서 다산 정약용을 기리는 현양사업을 이끈다. 이후 김옥균의 뒤를 이어 3대 주청고등판무관으로 명을 받아 근무를 하다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가는 만주-몽골-티베트의 관계 조율에 벅차 이선에게 사임과 은퇴를 청한다. 유학 중인 윤치왕에게 어서 한국으로 돌아와서 민족을 도우라는 서신을 보내는 등 애국자이자 실무자로서의 면모가 강조된다.
- 이채연
영어를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대한제국 인사로 보빙사로 갈때 미국의 도시들에 큰 감명을 받는다. 미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원래 역사대로 한성 판윤을 맡는다. 한양을 근대 도시로 탈바꿈 시키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빈과 유럽의 여러도시들을 참고하여 도시계획을 세운다. 이선의 시종원경이 되어 황제를 보필하며 이선이 쓰러졌을 때는 서양 의사를 수소문한다. 아영의 도움으로 마르가리타가 이선을 치료하고 이 일로 이선과 마르가리타가 이어진다. 대한 최고의 도시 계획자가 되어서 서경 유수자리를 맞아 유럽의 여러나라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는 근대 도시인 평양을 만들어 낸다.
- 이위종
군인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면서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러시아가 혁명이 일어나 망할것을 예측하자 이강의 권유로 외교관으로 전업해서 러시아에서 근무하게 된다. 러시아의 귀족의 딸[68]과 결혼하게 되었고, 러일전쟁 때는 이선의 지시를 받아 마치 러시아를 사랑하게 되어서 조국을 배신하는 것처럼 꾸며서 일본군의 일상을 전달해서 러시아의 육전 승리에 기여한다. 1차 대전 후 소련과 대한제국의 사이가 악화되면서 단교하자 인생의 절반을 산 러시아를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면서 귀국하게 된다. 실제 인물의 행적을 상당히 반영했다. 신생국 주 폴란드 대사를 역임하다가 주 이탈리아 대사로 임명. 영국대사 조지 뷰캐넌과 함께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파시즘을 막을 것을 권고하는 이선의 친서를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전달한다. 이탈리아 대사직을 그만두고 나서는 몽골로 파견되어 운게른의 처분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게 되고 운게른이 10만명 정도의 기마사단으로 소련을 붕괴시키고 로마노프 왕조를 복원하여 이위종 역시 러시아 귀족 작위를 되찾을수 있다고 설득하자 확실하게 미쳤다고 판단하여 운게른을 처분해야한다는 의견을 보낸다.
- 신규식
대한제국 군인 출신 제국익문사의 첩보원으로 황제의 명으로 신해혁명을 도왔다. 원래 역사처럼 상해 경찰 간부인 진기미와 친분을 만들고 혁명을 지원한다. 이 과정에서 장개석과 친분을 가지게 되는데 장개석이 역사를 바꿀 수 있는 인물임을 눈치채고 황제에게 보고한다. 이후 장개석과 함께 원세개를 혁명에 끌어들인다. 이후 42세의 나이에 교통대신으로 취임한다.
- 이회영
제국익문사를 담당하는 독리로 원래 역사의 정직함과 조국에 대한 충성을 아는 이선이 임명했다. 황제의 눈과 귀로 친일파들을 숙청하거나 실제 사건에 대한 가감없는 진실만을 이선에게 보고한다. 특히 다른 정보국들과 다르게 공산주의에 관해서는 가장 정확히 보고한다. 이선이 미래지식을 이용해서 사건이나 문제를 해결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걸 보고 자신이 다루는 제국익문사보다 더높은 비밀 첩보기관이 있나? 하고 의심한다. 그래서 황제에게 이러한 선견지명을 어디서 얻었는지 물어보자 이선은 미래에서 알고 왔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자신의 통찰력으로 했다고 답변해준다. 엄격한 사람이라 자신의 아우인 이시영의 총재선거에도 절대 개입하지 않겠다는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을 가져 이선이 김옥균 다음으로 아끼는 신하이다. 김옥균 은퇴 이후는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동한다.
- 조한민 ☆[69]
영국에서 유학하고 황성대학 강사로 역사를 가르치던 청년으로, 유학시절 자신을 동양인이라고 멸시하지 않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호감을 갖고 이에 대한 교육도 하다가 이선이 직접 제국익문사 요원으로 스카웃한다. 제국익문사에서 교육을 받고 나서야 국영통신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정도로 이쪽에 무지했으나, 자질이 있었는지 유럽 정보 총책까지 승진하고 결국 주러대사까지 된다. 레닌을 포함한 사회주의자들과 정보망을 만드는데 주력해서, 러시아 연방 민주공화국이 소련이 되고도 지도부와 관계를 맺고 있어서 비선으로 활동한다. 1차 대전 이후에는 혼란에 빠진 독일 공사로 부임한다. 코민테른에 참석한 한국내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황제에게 제출하는등 확실한 황제의 정보원으로 활약한다.[70] 3부 외전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김규식보다 외무대신으로 더 점쳐질정도로 뛰어난 외교관으로 등장한다. 여명의 세기와 달리 최신혜와 결혼했으며[71] 원작에서 자신의 행보를 꿈으로 꾸고 식겁한다.[72] 이선의 명을 따라서 대공황의 가능성을 조사하러 미국에 파견된다. - 김익용
원래 역사의 독립운동가 김립으로, 본명인 김익용으로 등장한다. 작중에선 국제법을 전공하고 러시아 공사로 재직했다. 적백내전이 끝나고 백군이 패망을 앞두고 러시아 제국의 금괴를 빼돌리는 과정에서 50톤에 달하는 물량을 대한제국이 입수하는데, 러시아의 적법한 계승자가 나올 때까지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소련이 국유화 된 러시아-아시아 은행에서 떨어져 나온 한국 지사를 한아은행으로 개칭하고 이체하기로 했는데, 이 은행장으로 임명된다. 따라서 소련의 자금을 횡령했다는 혐의로 피살된 원래 역사와 비슷하게 러시아의 금을 관리하게 되었다.
- 신흥우
일본에 파견된 외교 공사로 관동 대지진 당시 대사관을 지키는 대사를 대신에 대일 외교를 담당한다. 이승만 처럼 친미파라서 이전 외교관들과 달리 일본에 대한 환상이 없어 일본에 대해 주눅들지 않고 이승만에게 일본 정부의 피해상황을 보고하고 한국인 희생자를 단숨에 네 배로 조작하는 이승만의 모습에 혀를 내두른다.
- 이한응
주영 대사관 1등 참서관으로 영국과 동맹을 추진하는 이승만과 달리 영국이 한국을 무시하는 정도를 알기에 동맹이 불가능 하다고 생각하며 친영파 이승만을 고깝게 본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주영 한국대사로 세계대전 참전을 조선으로 관세 자주권 회복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의 의사를 전달한다. 1920년대에도 대사이며 역사의 변화 덕분인지 1924년까지 살아있다. 이재각의 반공연설로 인한 외교 문제 때문에 영국 정부에 초치당한다.
- 김원봉
이회영이 직접 관리하는 최고위 정보요원이자 육군 정위. 러시아어, 중국어, 몽골어를 익혀서 북방에서 활약하는 정보원이 되었다. 담딘 수흐바타르를 만나서 자신의 정체를 알려주고 운게른을 제거하는 대신에 소련에 독립된 몽골인 국가와 내몽골 분리를 받아들이는 거래에 합의. 직접 사격실력으로 강함을 보여주어서 담딘과 신뢰를 담은 맹세를 한다. 4부 시점엔 익문사 독리가 된다.
- 윤세주
4부시점 대외공작부 총책임자
- 김상옥
4부시점 익문사 대외방첩부장.
2.8. 동학교도
- 손병희
동학의 교주로서 의회 창설이 동학에 둘도 없을 기회라는 걸 깨닫고 전봉준과 함께 농민협회를 창설, 농민협회의 후신인 진보당을 이끈다. 천도교 교령으로서 정치적 능력이 뛰어나 앞으로는 영미권의 시대이고 영미가 일본편을 든 이상 러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라는 걸 알고 일본의 뒷배를 봐주기로 한다. 이후 진보당을 창설하여 의회에 입성, 전봉준의 정치적 동료지만 내심 진보당만으로는 개혁도 당세를 확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걸 인정하고 도시노동자들과 젊은 정치인들인 신한청년당과 연계할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신한청년당이 대한 사회당으로 바뀌면서 일부 좌익들이 무신론,반종교를 주장하자 천도교 교령으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차라리 개화당과 손잡겠다고 한다. 그럼에도 결국 전봉준을 지지하며 진보당 분열[73]을 막고 사회당, 신민당 좌파와 연합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선거에서 승리하고 의정대신에 추대되었지만 본인이 종교인이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 방정환
손병희의 사위. 아동 문학가, 동학교도로서 어린이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어린이날을 제정하는 등 원래 역사와 같은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1925년 선거에서 진보당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 청년 정치인으로 등장, 만 25세 생일이 지나지 못해서 선거에 출마하지는 못해도 쉽고 유머있는 연설로 전봉준을 지지하는 연설을 한다.
- 김개남
동학교도. 김기범이라는 본명으로 등장하고 만인대의 첫 전투에서 최경덕의 지시를 듣지 않고 독자행동으로 만주군을 공격했다. 이때문에 명령 불복종으로 전봉준에게 비판받는다. 원래 역사에서도 반봉건주의자였던 성향답게 급진적이고 왕족에게 적대적이며 만주를 공격하여 자치령을 획득했을 때는 외세와 정부 눈치를 보는 전봉준을 비판하고 아예 청나라 조정을 무찌르고 만주를 통으로 차지하고자 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결국 전봉준 말대로 한다. 이후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의 인민주의 영향으로 사상이 더 과격해져 러시아를 몰아내고 만주의 농촌 이상향을 만들려고 하고 장작림, 장호익 등과 접촉하여 러시아 군 후방을 교란한다.
-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좌우영장으로 취임한 동학측 인물로 만인대에서 김개남처럼 급진파라고 언급되나 비중은 거의 없다.
- 최경선
동학에 참여한 김덕명,오시영[74],성두환등과 함께 등장. 선봉장을 취임하면서 만인대의 지휘를 맡으나 적과 마주친 김개남의 돌발행동에 진형이 흐트러지자 당황하여 욕지거리를 퍼붓고 전군에 돌격명령을 내린다. 다행히 만주군이 닥돌전술이 먹히는 3류 잡병이여서 간단히 승리한다.
2.9. 정치인
- 이상재
대한제국 최초의 주미 외교관이자 신민당의 원로. 34살에 보빙사로 첫등장하며 미국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관심을 보이는 모습으로 등장. 동문학을 졸업하고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박정양을 보좌하는 보좌관으로 미국에 가게 된다. 오자키 유키오와도 교류했으며 독립협회 창설에도 큰 역할을 한다. 독립당에서도 대표 정치인으로 언급되었으며 독립당 해체 이후에는 신민당에 입당한다. 신민당이 정치에 참여할 때 이미 70의 나이라 자신을 대체할 안창호 같은 후속세대들이 나타났다나는 사실에 기뻐한다.
- 남궁억
독립협회의 인사이자 자유주의적인 논조의 신문인 황성신문의 사장. 이상재처럼 동문학을 졸업하고 존 로크, 장 자크 루소, 나카에 조민 등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헌법이 반포되는 날 헌법의 중요성과 역사성, 그리고 황제가 주도하는 자유주의 개혁을 예찬하는 사설로 기쁨을 표현한다.독립당에 입당하지만 독립당이 해체될때 이상재와 함께 신민당에 입당한다.
- 여운형
김구와 부딪히면서 책을 쏟는 모습으로 첫 등장.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참여할 정도로 운동실력이 뛰어나다. 황성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로 관료로 근무하며 정부에 몸담았으나 서재필 내각이 노동 운동을 강압적으로 진압하고 사회개혁을 억누르는 정책을 펼치자 반감을 가지고 진보정치인으로 각성한다. 이후 사회주의 연구 모임의 지식인들을 모아 신한청년당을 창설하고 사회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실천을 통해 사회개혁을 도모하면서 개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원산 학살의 진상이 밝혀지고 이상설 내각이 보통선거권을 추진하자, 신한청년당을 정당으로 개편해서 제도권 정치에 나서기로 한다. 그리고 보통선거제가 도입된 첫 총선에서 2자리수 의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기술진보를 긍정하는 인물이기에 안창호처럼 공군에 관심이 많다.
황제의 허락을 받아 코민테른에도 참가하는 등 좌익계열의 거물이 되지만 본인의 온건한 성향 때문에 좌익 급진파에게 비난받고 우익들에게는 빨갱이 대장으로 찍힌 상태. 관동 대학살에 일본 노동자 계급이 중국인 노동자 학살을 주도 한것을 보고 충격을 받아 노동자 국제 연대보다는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하여 개혁을 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는다. 1924년 선거에서는 15석을 획득했으나 내각실패시 책임도 같이 질 수 없다는 이유로 입각하지는 않았다.
- 조소앙
신한청년당의 부대표로 원래 역사와 같이 삼균주의를 당의 강령으로 내세우게 된다. 이때 연재분 댓글은 각하!!!로 도배되었다. 사회당 소속으로 국제 사회당 대회에 참석하여 역사대로 만주리선언(滿洲里宣言)을 발표하여 소련을 크게 비판한다. 이것이 사회당 당론으로 채택되어 소련과 거리를 두게 된다. 덕분에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고 우익의 마타도어를 어느 정도 상쇄한다.
- 박헌영
황성대학교 경제학과 수재로 한위건과 달리 대한의 민주주의가 황제가 떠먹여주는 형태로 진전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으며 국민들이 주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여운형의 저작을 일고 공산주의에 심취하면서 이 때문에 정학당하고, 독일 유학 이후 룩셈부르크주의 노선을 따르며 세계혁명에 찬성한다. 원래 역사처럼 여운형을 비판하고 내전도 불사하려는 극좌파. 그 때문에 이선 역시 그를 주시하고 있다.
- 조봉암
원칙적이고 유능한 관리였으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동정적이여서 술자리에서 러시아 혁명을 옹호하는 말을 했다고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누명을 얻자 스스로 관직을 사직하고 진짜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어서 대한사회당에서 활동한다. 진보당 출신이었으나 진보당이 너무 체제 순응적이라서 진보당을 탈퇴했다.
- 신채호
민족주의 역사학자이자 신민당에 참여해서 정치활동을 하고 있는 유명인사.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저작을 남기고 우회적으로 황제의 조상인 인조를 비판하는 저술로 황제를 숭배하는 대한제국 내에 큰 충격을 준다. 미래인인 이선 본인은 광해군이나 인조나 둘 다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처럼 역사학의 자유로운 발전을 원했기 때문에 신채호를 옹호하고 자유로운 역사해석의 길을 연다.
이후 박용만과 접촉하면서 사상이 드러나는데 아나키스트였던 원래 역사와 달리 또다른 대체역사물인 레드플러드처럼 고구려 중심 세계관을 세우려는 민족주의자이면서 인간 해방의 대의를 포용하는 사회민주주의자인 것으로 묘사된다. 소설이 진행되면서 고구려 보다는 다민족 국가였던 발해와 같은 보편 제국을[76] 더 원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신채호는 북방의 여러 민족들과의 동등한 연합을 통해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어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의 변화로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20세기 근대적 국민들과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북방민족을 오랑캐로 생각하는 보수층 때문에 험난한 길을 걸을 듯하다. 관동 대학살 당시에는 일본과 한국의 역사적 원한, 임나일본부설을 비판하며 반일운동을 벌인다. 1925년 선거에서는 신민당을 탈퇴하고 신대한당에 입당하여 급진좌익보다 더 급진적인 사회변화를 주장하여 변화를 원하지만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민족주의 청년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다. 1924년 총선에는 이승만이 박용만에게 협력을 요구하자 우리는 만주벌판에 나온 심정으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며 이승만과 야합하면 탈당을 하겠다고 말하자 박용만 역시 동의하며 반개화당 동맹에 참여한다.
- 박용만구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고의 땅을 근거로 하여 조선인을 여기에 이주시켜 발전을 추구하여 사실상 동포의 영유로 귀속하게 할 것이다-최용호(하와이 주립 대학교 역사학과 명예 교수), 박용만 - 문무를 겸비한 비운의 민족주의자 (한국사 시민 강좌 47집 132)
이승만의 친구이자 이승만, 김규식과 함께 외교활동에 뛰어들은 동기로 친구들과 달리 군사에 관심이 많았다. 1차 대전에서도 프로이센 군국주의에 저항한다는 이념 때문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정계의 유명인물. 군부와 정계 모두에게 인기있는 인물로 워싱턴 회의에서도 대활약한다. 레너드 우드나 맥아더와도 친분이 있지만 윌슨의 유럽인만을 위한 민족자결주의에 실망한다.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 높아 아시아 민족주의자들이 실제로는 공산주의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 진보당, 신민당, 대한사회당 모두 소련과 같은 극좌 공산주의 정당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들을 공산주의로 모는 것은 이승만의 정치 공작이라는 것을 본인 스스로 알아낸다.
이후 기타 잇키의 저작, 유럽 제국주의의 위선, 아시아주의등등이 겹쳐서 대한제국의 첫번째 파시스트가 된다. 제국주의 프로파간다가 된 신천지 계획[77]을 그대로 말하면서 고조선의 영토였던 시베리아 및, 만주, 몽골 땅을 되찾고 극동의 러시아인들과 화합하여 오족협화[78]를 이룩하자는 주장을 한다. 그의 친우였던 이승만은 그의 주장에 기겁하고 그와 대립하기 시작한다. 박용만 또한 이승만이 미국 주도 질서에 순응하기만 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는듯. 이승만이 자신을 몰아세우자 개화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신채호랑 제3의 길을 모색한다.[79] 이후 사빈코프와 김좌진과 접촉하여 착실하게 위험한 사상에 가까워지고 있다. 아시아주의자이다보니 친일파라는 이승만의 비난을 받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관동 대학살 당시 일본을 신채호와 함께 크게 비난하며 대학살 배상을 위한 일본과의 협상에서 일본의 요구를 수용한 이승만이야말로 친일파라고 비판한다. 결국 1925년 선거에서는 신대한당을 창설, 이선과 이승만의 갈등을 이용하여 개화당 우익블록을 모은다. 1924년에는 이승만의 구애를 받으나 당의 정체성이 흔들릴 수 없다는 이유로 반개화당 동맹에 참여하여 입각 대신에 선거법 개정, 북방이주 확대와 공공부조 확립을 약속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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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선의 장기말 중 하나였다! 박용만이 이승만과 대립하여 우익의 새로운 총아로 나선 것은 이승만을 견제하려는 이선의 정치공작이었다. 이승만과 개화당이 권력을 잡으면 제2의 개화당과 박영효를 만들 것을 우려하여 일부로 우익들끼리 싸움을 붙이려는 이선의 공작이었다. 관동 대학살 당시 반일운동을 전개한 것 역시 이선의 지령이고 원래 역사에서 무솔리니 같은 파시스트들이 국왕까지 무시하는 것을 아는 이선으로서는 통제 가능한 파시스트를 만들어서 관제야당으로 쓰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박용만 본인은 황제의 충실한 신하라 황제가 비밀리에 접촉하고 지원한다고 말해주자 황제가 본인을 신임한다고 미친 듯이 좋아하지만 이선은 말만 지원이지 권력을 잡게 해줄 생각은 없다. 이후 이선이 태상황으로 물러나고 이승만이 총리가 되어 익문사와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자 김원봉을 영입하여 정보 라인을 되살리려 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박용만이 익문사의 관리를 받고 있던 관제 야당 지도자임을 아는 극소수 인사였던 터라 약점을 잡혀 실질적인 당권을 남겨주게 되었고, 김구가 제안한 주청 고등판무관을 받아들여 신채호에게 민족혁신당 총재의 지위를 넘겨주고 청나라의 새로운 수도인 장춘으로 떠난다. 이는 이승만처럼 권토중래하면서 만주를 대한제국의 요새이자 진정한 오족협화의 왕도낙토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함이다.
2.10. 유림/학자
- 박규수
개화당의 시조로 뛰어난 식견으로 가진 인물로 중국의 북경함락을 보고 개화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작중에서는 이미 3년전에 죽은 고인. 그러나 제자인 유대치, 유길준, 김옥균과 같은 개화당이 권력세력이 되면서 꾸준히 언급된다.
- 최익현
실제 인물이 그랬듯이 강직한 선비로, 개화당 집권 후 초기 개화 정책을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이때 이선은 그를 초청해서 개화의 산물들을 보여주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설득이 되었는지 이후 침묵하게 된다. 원래 역사에서도 최익현이 몇 년간 무슨 이유에서인지 침묵한 사실에 작가가 상상력을 덧붙인 듯. 조청일 전쟁 때는 유인석과 함께 의병으로 참전하며 유림의 지지까지 정부에 모아주고, 중추원에도 진출했다. 이후 등장이 없는데, 3부 시점에는 여든도 넘었고 이후 전우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자연사했다고 언급된다.
- 전우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다. 유인석과 최익현이 사망하자 마지막 유림을 이끄는 대학자로 등장. 원래 역사처럼 3천명이나 되는 제자를 길러냈다. 개화파 강경파인 박영효는 전우를 개화의 걸림돌로 삼고 처리하려고 했으나 이선의 거절로 후학을 양성할 수 있었다. 고종이 죽자 마지막 전통 조선왕이 떠난다는 사실과 고종이 죽음으로서 자신이 알던 시대가 끝나고 개화의 시대가 온다는 걸 직감하고 죽음을 무릅쓰고 80세의 나이에 삼년상을 치른다. 덕분에 이선을 곤란하게 만들지만[80] 의외로 국정에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 국상기간에 니콜라옙스크 사건이 터지자 대소련 개전을 외치는 민중들에게 왕이 붕어하셨는데 국상기간에 전쟁을 할 수 없고, 연해주는 애초에 대한의 영토도 아니고, 소련이 한국을 침공한 것도 아니며, 대한이 소련을 공격하면 더 많은 백성들이 죽는다는 이유로 반전여론을 설파해서 소련과의 전쟁을 막았다.
- 김류
거문도에 거주하고 있던 원로 인사로, 창작 인물로 보이나 사실은 실존인물. 거문도의 문장가로 요충지였던 거문도에서 외국 해군을 접촉하고 이 경험을 '해문도지'란 책으로 엮어내기도 했는데, 국가 허락 없이 외국과 접촉했다며 처벌 받을까봐 이를 숨기고 있었다. 그러나 개화당이 정권을 잡자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의 저서에 관심도 가지면서 명예직을 하사했다. 영국군이 상륙하자 그들과 접촉하고 동태를 파악해서 중앙에 보고했다.
- 최준
경주 최부잣집의 12대로 개신유림. 토지개혁에 자발적으로 참여,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토지를 매각하여 벌어들인 수익으로 동료 안희제와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 영남 선비들의 자본을 모아 부산 제1의 무역회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벌어들인 돈으로 지역 교육사업에 다시 투자했다고 나온다. 덕분에 토지개혁에 참여한 의친왕 이강과도 친해지고 직접 문파라는 호를 수여받는다.
- 김성수
고창 김씨의 김기중, 김경중의 후계자로 개신유림 황성대학 상업과를 다니던 중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의 오사카의 대규모 공단을 보고 감명받아 귀국후 방직회사 설립을 건의하고 이용익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 농토를 처분하고 교육과 후학양성에 힘을 쓰면서 황성방직주식회사을 설립한다. 경공업으로 큰돈을 벌며 철강으로 상징되는 중공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 이인제
성리학자로 성리학자 답게 그 근원을 탐색하려는 선비, 서양 문물이 들어오자 서양에 대한 관점을 바꾸어 서양에도 그리스 철학이 있다면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과 서양 철학자들의 저술을 번역했고 칸트를 연구한 호남 선비이정직과도 교류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유림도 주리론과 주기론으로 토론하는대신 데카르트와 칸트를 토론하게되었다고 한다.
- 김택영
성균관의 교수이자 한문 및 역사 학자로 국사를 편찬하는 일을 맡게 되며 공성학을 가르친다. 기존 소중화사상이 아닌 고려라는 국가에 자부심을 가지고 고조선-고구려-고려-조선-대한국으로 이어지는 역사관을 설파하며 고려초기와도 같은 대한국의 특성상 북진정책을 추진해야한다고 설파, 공성학이 만주에서 산업을 하게되는 원인이 된다.
- 유대치
몰년도 알려지지 않은 원래 역사와 달리 그의 제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개화당이 권력을 잡아서 조선을 개혁하고 부강한 나라 대한제국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고, 노환으로 편안하게 세상을 뜨는 작중 최대의 수혜자 중 하나가 됐다. 총리로 지명된 후 김옥균의 속내[81]를 짐작하고, 윤회를 믿는 불교 신자로서 성상은 미래에서 온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는 고백을 한다. 작중에서는 조선의 요시다 쇼인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2.11. 기타
- 지석영
조선에 종두법을 설파한 사람으로 처음에 흥선대원군이 본인을 찾자 설마 외국과 접촉한걸로 처벌하려하는가 하여 두려워하나 미래를 알고 있던 이선은 오히려 본인이 종두법을 받아들이고 치하하자 감격한다. 덕분에 원래 역사와 다르게 이선은 민자영의 암살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제중원의 부원장으로 취임하고 얼마안가 설립된 제중원 의학교의 원장으로 취임, 예방의학을 설파하며 콜레라 같은 전염병을 퇴치하다가 퇴임하였는데 스페인 독감 당시 복직하여 방역 위원장을 맡는다.
- 송금덕
이선의 측근으로 개성 송상. 몰래 청나라랑 홍삼 밀무역을 하고 있었으며 이를 알고 있던 이선을 청나라로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면서 이홍장과 연줄을 대어주고 이선이 밤중에 도망간줄 안 흥선대원군에게 민자영의 음모를 알려주면서 오해를 풀어준다. 이선이 권력을 잡고 개화를 시작하면서 근대적 자본가가 된듯.
- 정유진
녹둔도에 거주하는 고려인으로 부패한 조선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선이 조선왕자라는 것을 알고서도 대놓고 무시한다. 그러자 이선이 자신이 러시아 전권위원이라는 것을 알려주며 러시아 제국에 명령이라고 하자 러시아도 싫어한다면서 무시한다. 사실 그는 조선의 삶이 힘들어서 러시아로 건너왔지만 러시아인들이 "백조사냥"[82]이라는 이름으로 조선백성을 쏴죽이는 인간 사냥을 하자 극도의 염세주의자가 된것이다. 이후 이선이 이를 바로 잡자 이선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인물이 된다.
- 윤협
전직 인천부사로 서양에 대해 제법 지식이 있는 관리. 대원군파 일원으로서 대원군의 명을 밭아 서양과 어느 정도 접촉하나 조정에게 대원군파 견제 목적으로 인해 파직당한다. 이후 운현궁에 머물면서 흥선대원군의 연락책이 되며 이선에게 조선의 정보를 알려주고 이선은 덕분에 역사가 바뀌었다[83]는 것을 알게 된다.
- 장무영
이선의 경호원으로 흥선대원군에게 이선이 부탁하여 데려온 인물이다. 과거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이름도 가명인 수수께끼의 인물. 이선에게 무력을 제공해주는 인물로 이선을 따라 러시아로도 가서 알렉산드르 2세암살을 막고 청나라에게 납치되던 이선을 구하는등 활약한다. 이선이 권력잡은 뒤에도 이선을 경호하는 일을 하며 나이가 들어 은퇴한 후에는 경호원들을 가르친다.
- 안영흠
이선의 재산을 관리하는 하인으로 이선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개인 비서역할을 한다. 미래인 이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의아해하지만 주군에 대한 충성의 대단한편. 이선과 상인들을 연결하여 청나라로의 대피를 돕는다. 이후 무영과 함께 러시아에서 생활하는데 역술을 볼줄 알아 이선의 명령을 받고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예언하고 잠시동안 원래 역사의 라스푸틴과 같은 생활을 보내기도 했다.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 운현궁 재산을 관리한다고 업급된다.
- 계손향
원래 역사의 최초로 카메라 앞에 선 조선의 여인으로 미국인 퍼시벌 로웰과 사랑에 빠진다. 천주교도로 병인 박해 당시 부모가 사망했기에 이선은 그녀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그녀가 영어를 배웠다는 사실을 알자 앞으로는 그녀같은 인물이 중요히 쓰일거라며 양성평등을 이뤄낼것을 약속한다. 이예 계손향은 눈물을 흘리며 정중히 인사하고 떠난다.
- 박에스더
조선 최초의 여성 유학생중 하나로 조선 최초의 여의사이기도 하다. 황후가 될 김아영과 같은 이화학당 출신이라 매우 친하게 지내며 연장자지만 신분이 낮아 아영에게 깍듯이 대하면서 다른 동기를과 아영의 시녀노릇을 한다. 아영은 말리지만 원래 시녀 없이 안살던 몸이라 일에 서툴러서 결국 받아들인다.
- 이동인
승려로 개화당의 명을 받아 비밀리에 일본에서 서양과 접촉하고 어니스트 사토는 이 사람덕분에 한국의 정치상황을 조선이 영국과 접촉하기도전에 한국의 정치상황을 빠삭하게 작성하여 본국에 보고한다. 역사대로 갑자기 실종되며 김옥균은 아마 개화를 싫어하는 누군가가 암매장 했을거라고 추측한다.
- 심의석
한국인 최초의 건축가로 외국의 건축가인 영국인 하딩, 데이비슨과 로벨[84], 러시아의 세레딘-사바틴, 일본인 오가와 요키치랑 함께 석조전을 건축한다. 이후에도 독립문, 협률사, 환구단, 조선 최고급 호텔인 손탁 호텔, 황성 박물관, 황성대학 등 중요건축물을 건축했다..
- 장지연
원래 역사처럼 황성신보 주필로 러시아가 만주에 야욕을 들어내자 아시아인인 일본과 한국이 힘을 합쳐몰아내야 한다는 사설을 쓴다. 이는 러시아와 외교관계를 악화시켰기에 체포되나 지식인들의 탄원으로 이후 풀려난다. 이 사건이 스트라이샌드 효과를 일으켜 한때 한국내 친일여론이 극에 달했으나 영국의 티베트 침공, 우범선과 송병준의 역모사건을 겪고 자신의 행적을 반성하고 일본을 비난하고 대한의 국익이 우선되어야한다는 사설을 쓴다. 그후 신민당에 입당하였다고 한다.
- 안환
정치경찰로 고문으로 악명이 높으며, 친일파 역모 모의사건의 수사를 맡았다. 그러나 자유주의적인 서재필 내각에서 그를 함경남도로 좌천시켰고, 원산 노동자 총파업이 거세지자 발포를 종용해서 학살로 악화되게 만든 주범이 되었다. 결국 진상이 밝혀진 후 체포되어서 죄값을 치르게 됐다. 원래 역사에서는 경무관 안환으로 유명하며 고종의 명을 받아 김홍집내각을 포살하는 활동을 했다.#
- 김병로
독일로 유학가서 법학을 공부했고 법무부에서 파견된 검사로 원산에서의 발포 총책임자 안환을 체포하고, 전혀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러시아처럼 공산화되면 당신도 끝장날 거라고 저주를 퍼붓는 안환에게 냉정하게 현실을 일깨워준다. 이상설 내각 출범 후 경찰개혁과 사법개혁의 필요성을 느껴서 검사를 그만두고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한다.
- 최재형
고려인들의 대표이자 연해주의 실력자. 이선이 러시아에 처음 정착했을 때 이선을 지원해줬다. 노비 출신이라서 조선에 받은게 없어 착취하러온게 아닌가 싶었으나 노비인 자신에게도 평등하게 대우해주는 이선에게 감복되어 그의 조력자가 되고, 극동공화국이 설립되자 주요 정부수반이 된다. 고려인들이 이념으로 분열하면 토사구팽 당한다는 것을 알고 이념으로 사람을 죽이거나 고려인들끼리 반목하는 것을 극도록 꺼려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반동이란 욕을 먹어가면서도 공산주의자 포로들을 사면시켜주는 대인배. 그래도 원래 역사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삶에 비하면 인생의 승리자. 아들들도 백군에서 크게 출세한다.
- 한위건
황성의학대학교 3학년 학생으로 여운형에게 강의를 듣고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손문의 영향을 받아 나라를 고치는 의사가 되자는 마음에 개화당 독재 반대 시위에 참여했고 황제와 면담에 손문을 언급하며 자신의 사상을 말한다. 공화주의자인 손문을 언급한다는 것은 불경으로 비춰질수 있었으나 미래인인 이선은 오히려 이를 칭찬하면서 황태자 이진을 소개시켜 주는데, 이는 이진이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읽어내는데 도움을 준다.
- 김필순
김규식의 처남이자 의사, 러일 전쟁 당시 군의관으로 처음 등장하여 현대 전쟁의 무서움을 느낀다. 일본군의 각기병과 러시아군의 괴혈병에 대한 질병보고서를 제출하고 오영덕, 이태준과 함께 만주 페스트가 폐페스트임을 주장한다. 방역 활동을 돕다가 1차 세계 대전에서는 대한적십자사의 파견 의료진 대표로 러시아에 파견된다. 김규식은 상관 김옥균의 폐병에 자신의 처남 김필순에게 치료받으라고 권유한다.
- 나운규
이선이 이진을 타티야나와 결혼 시키는 걸 정당화 하기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 영화 "공민왕과 노국공주"에서 공민왕을 연기하여 아직 영화와 현실을 잘 구분 못하는 국민들로 부터 공민왕의 현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김보현
김일성[85]의 할아버지, 노신사로 언론인으로서 함북일보 편집장이기도 하다. 서양인인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과 올가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을 얀코프스키 가문의 별장으로 안내한다. 작중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황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보여주는 인물.[86] 자기 아들과 며느리가 기독교 신자인 게 영 마음에 안드는 듯. 손자 김성주가 목사가 되려고 한다는 말을 남긴다.
- 윤치왕
윤웅렬의 서자이자 올해 서른 인 윤치호의 이복동생, 역사대로 글래스고 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유학중이다. 영국인들이 세계대전중에 아군인 자신의 치료를 거부하고 오히려 같은 백인이자 적국인 독일인 의사를 요구하는 인종차별을 경험한뒤로 윤치호와 비슷하게 서양을 적대하게 된다. 그래서 영국에 시달리고 인종차별이 없는 아일랜드에서 실습을 마치고 자신들을 차별없이 환영하는 런던 빈민들을 치료하면서 사회주의자들을 이해하게 된다.[87] 한국에 여의사나 산부인과 의사가 많이 필요하다고 믿고 있으며 예성공주 이라가 의사로서 유학온다는 사실에 의사들에 대한 인식이 변할것을 느끼고 공주를 위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 김란사
여성 최초의 관비(官費) 유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하였으며 귀국후 이화여대 교수가 되었다.
- 김우진
농림대신이자 토지개혁가 김성규의 아들로 신파극 중심의 한국 문학계에 조지 버나드 쇼스타일의 근대적인 연극을 선보인 작가. 우상 버나드 쇼처럼 사회민주주의자이기도 하다. 문학에 투신하다보니 농업전문가, 기업가가 되길 원하는 아버지와 충돌했으며 아내역시 집안이 정해주다보니 사랑하지 않는다. 결국 본인이 좋아하는 마르크스의 고향. 세계문학을 선도하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가서 박사과정을 받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변화된 세상에서는 자살생각은 커녕 생을 찬미하며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는 변화된 역사의 수혜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 윤심덕
성악가, 사의 찬미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인기가수이기도 하다.[88] 이선이 수집한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렸다는 그림과 어진을 김우진과 함께 보는 걸로 등장한다. 최신 고증에 충실한 작품답게 둘다 사랑하는 사이[89]가 아닌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존경과 진보적인 사고 때문에 가족과 사회에 갈등을 겪는 인물들의 동질감으로 표현된다. 원래 역사에서 둘의 자살이유 역시 정사가 아닌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에 비관한 식민지 청년의 아픔으로 소개된다. 변화된 역사에서는 둘다 생기있고 살기좋은 대한제국에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 김상준 ☆
작가가 연재 재개를 기념하여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와 크로스오버해서 외전에 등장시킨 김유진의 부친. 원작에선 언급된 설정을 토대로 창작되었는데, 몰락 양반이었다가 갑신경장을 계기로 개화당에 몸담았고,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관료가 된 후 유길준의 눈에 들어서 빠르게 출세해서 상공부 대신으로 입각까지 했으나 박영효가 총리가 된 후 권력투쟁에 휘말려 수뢰 혐의로 공격당하고 분루를 삼키며 정계은퇴하게 된다.[90] 이후 인맥을 활용해서 금산 기업을 만들어서 크게 키워내고, 신민당의 정치자금을 맡아서 개화당-신민당 연립내각의 구성에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렇지만 공직에 대한 한은 여전해서, 장남인 김유진에게 군문에 들어설 것을 종용했다. 원작처럼 3형제를 두고 있는지는 언급이 없지만 김유신은 존재하며, 사업가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원작과 같다.[91]
- 최신혜 ☆
여명의 세기와 크로스오버해서 등장한 인물. 가난한 상민의 딸로 병에 걸려 죽기직전 까지 같으나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가 치료해주었다. 이일로 여의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주변의 비웃음과 미국의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여의사가 되었으며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이었던 조한민과 결혼했다.
- 손기정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원래 역사대로 마라톤 종목에서 금메달을 딴다.[92] 시상식에서는 자랑스럽게 고개를 들고, 월계수 화분이 가슴의 태극기를 가리자 위치를 조절해 태극기가 잘 보이게 한다.
- 백석
러시아의 문학이 프로파간다로 물들여 버리자 이를 안타까워 하고, 한국 내무부 출판부가 이를 검열하지 않자 의아해한다.
2.12. 정당
- 개화당 → 헌정협회 → 입헌 개화당
유홍기, 김옥균이 만든 비밀결사, 비밀리에 조선의 개화와 진보를 위해 만든 조직으로 이선이 미리 접촉하면서 이선의 대표적인 지지세력이 된다.[93] 대한의 초창기 정치인들 대부분이 이 개화당 출신이었으며 사실상 다수당으로 이선에게 오당(吾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이선의 진보적인 충성파들, 관리를 대표했으며 이들의 충성으로 이선은 40년간 대한제국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온다.
그러나 집권하면서 점점 관리-지주-자본가만 대변하는 정당이 되고 의석수를 상실하게 된다. 결국 1920년선거에서는 신민당하고 연정을 하게되며 1924년 선거에서는 신민당 우파를 입당시키며 다시 과반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이승만의 독선적인 행보에 결국 야당들이 반개화당 동맹을 결성, 40년만에 야당신세가 된다. 오랫동안 집권했다는 점에서 자민당(일본)을 모티브로 한것으로 보이나 실제 작가가 말한 모티브는 제도혁명당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진보적이었으나 이후 권력층이되며 보수정당이되어 오랫동안 집권한것에 모티브를 얻었다고. - 독립협회 → 독립당
서재필이 만든 협회로 창당맴버는 이상재, 윤치호, 서광범, 유길준, 안경수등이 창설했다. 이들은 개화당 소장파로 상공인을 대표하며 미국 공화정치를 상당히 인상 깊게여겨 헌법과 의회, 선거를 요구했으며 21세기 사람인 이선은 흔쾌히 허락한다. 역사대로 만민공동회를 열어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를 거부했으며 한국 민주주의의 기초를 만든다. 첫선거에서는 휘그당을 모델로한 자유주의 정당으로 출범했다. 유길준의 총리 당선 이후 입헌 개화당과 통합된다. - 황국협회 → 제국당
홍종우, 이준용, 이범진이 만든 협회로 독립협회의 민권 요구에 위험을 느낀 보수파와 개화당 보수파들이 만든 정치세력. 북벌성공과 의화단 전쟁을 보면서 지주와 보수세력들이 문명개화의 필요성에 대해 느끼고 보수주의가 아닌 애국주의정당으로 전환한다.전환후에는 개화당의 2중대로 한국우익의 팽창주의 욕구를 가늠하는 일종의 리트머스 종이 역할을 하다가 대전쟁 이후 이준용이 정치개입을 본격화하면서 대한제국의 우경화를 이끌었으나 원산 총파업의 학살로 이선이 분노하면서 선거에서 5석으로 줄어들고 유력정당으로서 위치를 소멸하고 6회 선거에는 한석도 차지하지 못했다. - 농민협회 → 농민당 →진보당
전봉준과 손병희가 창당한 정당으로 창당자들의 특성답게 농민을 대변하며 동학의 입김이 강해 유력정당중에 유일하게 종교 정당의 모습을 보인다. 첫선거에는 전봉준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농민에게 불리한 선거구조때문에 선거에 참여하지 않았다. 제3회 총선에는 농민들에게 선거권이 없어서 15석에 만족해야했다. 인민주의를 택하고 유럽의 농민정당을 지향하며 표심을 모은다. 전봉준은 직공이 소외되었다고 느끼고 사민주의로 마음이 기울고 다른 야당과 협력해야한다는 걸 깨닫는다. 5회 선거에서는 개화-신민당 연정 때문에 소외되지만 안창호와 접촉하면서 신민당과 진보당이 협력을 논의, 사회당과는 함께 하면서 노농연합을 달성한다. 덕분에 40년만에 개화당 독재를 끝내고 여당이 되었다. 오세창이 개화당을 탈퇴하면서 과반을 넘기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 유림당
개화당과 독립당 통합 이후 이에 반발하여 만들어진 정당으로 무소속 유림들이 모여 만든 정당이나 정치적으로 유의미한 세력은 아니었다. 결국 제 3회 총선에는 등장하지 못했다. - 신민회 → 신민당
안창호, 이승훈, 양기탁이 창당한 정당으로 평양과 평안도-함경도가 중심이 된 정당. 자유주의자, 자유주의 언론인, 진보적인 상공인이 모여서 만들었다. 서울의 경화사족에 보수화된 개화당을 대체하기 위해 자유주의와 보통선거권 확립이라는 가치를 들고 제 3회 선거에 참여, 첫 선거에서 40석, 1916년 선거에선 49석을 차지하여 진보당과 협력하여 개헌저지선을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안창호는 개화당 독재를 끝내기 위해 브나로드를 오치며 진보당과 협력하지만 이는 신민당 보수파의 불만을 가져온다. 신민당은 1920년 선거에서 개화당과 연정을 하면서 처음으로 권력에 맛을 보지만 신민당 우파가 개화당에 마음을 두면서 결국 분열한다. - 대동회 → 대동단
개신유림인 박은식과 신채호가 만들었다. 신학문을 배우고 변화를 요구하는 개신 유림이 중심이되어 설립했다. 보수적인 영남과 호남의 선비들 역시 개화 이후 개신유림으로 많이 전향하여 전국구적 지지를 받으며 황성방직과 백산무역의 후원을 받는다. 제 3회 선거에서는 서울과 달리 영호남 홀대와 변화를 원하는 선비들의 의견덕에 신민당에 합류한다. - 신한청년회 → 신한청년당 → 대한 사회당
여운형이 부하린과 토론하며 사회주의를 접하고 원산 총파업 이후 노동자를 대변하기 위해 창당한 정당으로 조동호, 조봉암, 박헌영, 조소앙등이 참여했다. 사회주의 이론서를 번역하며 직공 대신에 처음으로 노동자라는 말을 썼으며 여운형이 농민중심의 유토피아적 사고관을 지닌 진보당으로는 개혁이 힘들다고여겨 창당했다. 1920년 보통 선거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아 단숨에 10석을 차지하며[94] 노동자 정당임을 증명했고 이후 총선에서는 15석을 달성한다. 그러나 15석으로는 유의미한 목소리를 내기 어렵고 내각에 입각시 실패의 책임도 뒤집어 쓸 수 있어서 내각에 참여하진 않고 반개화당 동맹에만 참여한다. - 신대한당
박용만이 신민당 소속 신채호가 함께하면서 만든 정당, 개화당 우파와 신민당내 민족주의/급진파가 만든 정당으로 북방민족과 함께 오족협화를 이뤄야한다는 신채호 추종자, 제국당의 몰락 이후 갈길을 잃은 민족주의 우익, 변화를 원하지만 반공주의 성향이 강한 청년들의 지지를 받는다. 민족주의 정당이지만 박용만이 아시아주의 영향을 받은것 때문에 이승만에게 친일파로 몰리기도 했다. 물론 신채호가 합류하면서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을 비판한 덕에 그런 의혹은 말끔히 사라졌다.
1924년 선거에서는 17석으로 사회당보다 높은 준수한 성적을 거둔다. 이승만이 같은 우익이라고 협력을 요구하자 신채호가 이승만과 야합하면 탈당을 하겠다고 말하자 박용만 역시 동의하며 선거법개정과 공공부조 확립, 북방이민 증진을 조건으로 반개화당 동맹에 참여한다.
2.13. 기업
- 이화양행/세창양행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가 들여온 무역 회사로 일본의 미쓰이를 견제하는 역할을 위해 들여왔다. 세창양행경우 조-독 합작회사라 면제품을 수입하고 조선에 곡물을 수출하는 거 이외에도 서양문물을 들여오거나 무기산업을 주선한다. 세창양행은 이후 3부에서도 재등장, 마이어 무역회사로 조선을 위해 잠수함 기술을 유출하고 독일 조선소를 인수한다.
- 조선기계 주식회사
조선-미국 합작 회사로 철도 부설을 원하는 조선과 미국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면서 만들어진 기업. 철도, 전기, 상수도 등을 담당하며 이선은 이 회사와 철도를 통해 신속한 근대화와 개화의 필요성을 알리려고 한다.
- 순신창상회/의신상사/대동상회
조선에서 직접설립한 회사들로 각각 조선의 유명한 보부상상단들이 설립했다. 서울상인인 경강상인이 중심이되어 만든회사로 사장이 박영효,의신상사는 개성상인들이흥친왕을 사주로 만든 회사고 대동상회는 평안도 상인인 유상과 만상이 같이 만든 회사로서 순수민간회사다. 이들은 조선내 유통회사로서 첫 자본가 세력이된다.
- 조선은행/한성은행/제일은행/상업은행
대한의 은행들로 대한이 경제가 발전하면서 생겨났으나 거시경제와 통화정책을 총괄하는 은행이 없어 이선의 명으로 한국은행이 탄생한다. 1900년대쯤이면 자본축적이 상당부분 이뤄졌다고 한다.
- 한아은행
러시아 국책 은행인 러시아-아시아 은행의 후신으로 적백내전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러아은행을 국유화하자 한국과 만주지사를 한국정부가 장악하면서 만들었다. 이름도 한아 은행으로 바꾸며 동청철도, 만주와 한국내 러시아 자본을 한국정부의 소유로 만든다. 러시아 제국의 금 500톤중 50톤 역시 한국의 소유가 되며 적법한 러시아 정부가 설립할 때 까지[95] 로마노프 가문의 자녀들이 보증인이 되어 한국과 김익용이 관리하기로 한다.
- 평양기기제작주식회사 →서경기기제작주식회사
대한제국 4대 재벌중 하나로 민족자본가 이승훈이 설립한 군수회사,방위산업체다. 청나라의 칩입으로 위기해 처했으나 오히려 빠르게 군수업으로 업종을 바꿔 조선에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신도시건설, 경의선 부설에 참여하고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수산업을 크게 확장한다. 1차 세계 대전에서는 가장 큰 소득을 벌어들인 회사로 라이센스를 통해 표도로프 자동소총[96]이나 모신나강[97] 같은 무기들을 생산했다. 재벌중 유일하게 신민당에 자금을 대었다고 한다.
- 백산무역주식회사
최준과 안희제가 설립한 기업이자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으로 등장하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토지를 매각하여 벌어들인 수익과 영남 선비들의 자본을 모아 부산 제1의 무역회사가 되었다고 하며 벌어들인 돈으로 교육산업에도 투자했다고 한다.
- 황성방직주식회사
김성수가 설립한 회사로 호남을 상징하는 기업, 고창김씨의 부와 이용익의 후원을 받아 만든 회사로 방직으로 상징되는 경공업으로 큰돈을 벌며 철강으로 상징되는 중공업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 대한광공업주식회사
대한제국 4대 재벌중 하나로 이선의 정책덕에 국내 광산들을 상당부분 지켜냈고 무순과 연길의 탄광, 안산과 본계의 철광까지 얻은 상태다. 덕분에 자원채굴로 큰수익을 냈고 운산 금광을 개발할 때 51%의 지분을 가지고 운영했다.단일 텅스텐광산으로는 가장 거대한 영월 상동광산을 가지고 있다. 대전 이후에는 텅스텐 광산이 불황에 시달리면서 노동자들이 가난에 시달리자 여운형이 비판한다.
- 대한무역주식회사
대한제국 4대 재벌중 하나로 박영효가 사외이사로 있다고 언급되고 이외에도 박영효는 대한식산은행의 사외이사로 있었으며 정경유착, 부정부패를 일삼고 아예 군수품 수요를 위해 전쟁이 더 길어졌으면 하는 마음과 시베리아 광산들을 가져갈 목적으로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결국 이선이 박영효를 숙청하는 빌미가 된다.
-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대한제국 4대 재벌중 하나, 20세기판 동인도 회사로 역사와 달리 러일전쟁에 모든 돈을 소비해버린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설립하게 되었다.[98] 광무호라는 열차를 운용하는 철도 회사며 단순한 철도회사가 아닌 운송업, 항만 운영, 호텔 운영, 제철 산업, 석탄산업, 조차지 운영, 이주민 모집등의 활동을 하게된다. 만주 페스트 당시 방역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순과 다롄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회사이며 차르의 4남매가 망명후 머눈 집 역시 만철에서 소유했다가 한국왕실에 매각한 저택.
- 고려삼업회사
공성학의 아버지 공응천이 만든회사로 인삼개량,경작방법 개선으로 큰돈을 벌었으며 한국 토착자본을 대표하는 회사. 이후 만주의 광산, 탄광에 투자하고 황무지 개간,이주민 알선등의 사업을 벌인다.
- 한만산업척식회사
개성상인 공성학이 만든 회사로 20대 초반에 부친을 이끌고 만든회사다. 동학과 깊게 연관되어있으며 민병대인 만인대를 경제적으로 후원하고 만주개척에 나선다. 이후 전기사업에 뛰어들었다고 나온다.
- 농상회사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가 건의해서 만든 관립 회사로 묄렌도르프가 건의한 양잠, 사탕무, 연초, 인삼과 같은 상업작물 재배, 제방을 이용한 간척사업, 임야개발을 담당하고 지주와 부농의 상업지주화를 촉진했다. - 한만척식회사
농상회사에서 분리된 회사로 북방개척및 북방으로 농업 이주민 알선에 나선 회사.
- 동양 광공업 주식회사
존 피어폰트 모건의 미국자본으로 만들어진 합작회사로 운산 금광을 개발할 때 49% 지분을 가진 회사로 투자한 호러스 뉴턴 알렌등의 미국인이 큰수익을 챙긴다. 물론 한국정부도 큰이익을 봤으며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에게 비자금을 챙겨준다.
- 라이트 형제의 회사
원래 역사처럼 라이트형제가 프랑스에 기업을 만들었다가 프랑스에게 배신당하자 한국황제의 요청으로 한국에 만든 항공기 회사다.
- 남만주 제철소
안산의 철광을 이용해 만든 제철소로 한야평제철소가 신해혁명도중 파괴된 바람에 고스란히 수혜를 누리고 있으며 동양최대 제철소가 되어 일본의 야하타제철소와 경쟁중이라고 한다.
- 금산 기업
대체 역사소설 검은머리 미군 대원수에서 나온 주식회사 샌-프랑코(San-FranKo)를 모티브로 한 기업으로 창립자는 김상준, 대한-일본-미국을 잇는 대형 무역회사, 샌프란시스코지부 역시 존재하며 김유진은 여기에서 근무하고 싶어한다.
- 대한중공업주식회사
중공업, 조선업 회사로 한국정부의 중공업 육성 정책을 통해 국영기업으로 설립,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원산 중공업단지와 울산 신중공업단지에 대형조선소를 건설하여 초기에는 상선위주의 건함이었으나 광무 28년인 1924년 기준 6척의 구축함을 건조해냇으며 1926년에 3척의 경순양함을 건조 해낼생각이다. 해군과 건함계획을 실현하려하나 정부에게 해군에게 뇌물줬냐는 의심을 산다.
비행기에도 일가견이 있는데 러시아 군용품들 생산 라이센스를 따내면서 일리야 무로메츠의 생산도 따냈으며 1915년에 폭격기 편대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후 이고르 시코르스키가 적백내전으로 대한제국에 망명하면서 원래 역사에서는 만들어지지 못한 후계기인 S-28을 만든다. 일리야 무로메츠라는 이름이 한국인들에게는 복잡하여 일무(一武), 후계기는 이무(二武)라고 부른다.
- 대한제약 주식회사
국영제약회사로 일본의 실업가 스즈키 사부로스케가 과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발견한 MSG를 이용한 아지노모토라는 식료품 공장을 설립했으나 초기에 실패를 거듭하며 일본인들에게 외면 받아 파산 위기에 몰렸는데 그걸 알아채린 이선이 일본외에 다른 지역에서 제조, 판매가 가능한 특허권을 취득하고 1913년에는 아예 자체 브랜드 미각을 이용하여 이선의 취향을 위해 나가사키 잔폰을 개량한 짬뽕이나 라면, 짜장면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다만 인스턴트 라면은 1958년에나 나오는 물건이라 1910년대 한국기술로는 실패했다고 한다.
- 대한중석광업주식회사
국영기업으로 약칭 대한중석, 텅스텐을 중심으로 채굴하는 회사다. 상동광산은 단일 규모로는 세계 최대규모고 이것을 통해 연합군의 텅스텐 생산량에 20%를 차지하며 아예 성동광산 텅스텐이 세계시장의 표준이라고 한다.
- 포드 코리아
헨리 포드가 세운 자동차 회사. 이선이 초기부터 포드에게 투자한덕에 한국에 일치감치 진출했고 아시아 시장에서 크게 성공한다. 포드의 성공을본 다른 서양 자동차 회사들도 한국시장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포드가 이선의 도움으로 정치에 진출하자 답례로 한국에 기술을 이전한다. 이들의 TT형 트럭은 대한제국의 첫번째 버스가 된다.
- 대한자동차회사
1926년에 포드에게 기술을 이전받아 대한제국 최초의 자동차를 만들었다. 이름을 처음에는 시발자동차로 붙이려다가 어감이 아무래도 좋지않아서 고민하다가 이진이 태시제로 즉위하자 같은 의미지만 발음이 좋은 태시를 붙여 태시자동차를 생산한다.
- 용산/부평 조병창
국군 기술본부 산하 조병창들로 대전쟁의 전훈을 더많은 기갑 장비, 더많은 장갑차임을 깨닫고 만주와 연해주에서 사용가능한 전차와 장갑차들을 만들고 있으며 FT-17과 휘펫 전차를 참고한 신형전차를 만들고 있다.
2.14. 전함
전반적으로 대한제국의 기술이 딸리다보니 대부분 구입하거나 공여받은 함선이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한국은 제외되었기에 차후 강력한 전함을 건조할것으로 추측된다. 해군의 신순성부장에 따르자면 1920년대에는 구축함, 잠수함, 1만톤 이하 경순양함을 건조하며 1930년대에는 1만톤 이상의 중순양함, 1930년대 후반에는 순양전함을 건조하겠다는 계획이 있으나 육군과 국회의 반대로 경순양함까지만 예산이 내려온 상태. 1924년까지 국산 구축함 6척이 취역한 상태다.- 양무호
역사와 달리 영국제 군함이며 3000톤 포함으로 사용 이후 방호순양함으로 개장한다. 초창기 운용 인원 역시 영국 고문단이었다. 원래 역사와 달리 활약이 있는데 이선이 청나라로 납치당할 때 이선을 구출하는[99] 활약을 하고 홍영식의 유해를 모셔오는데 사용되고 이후 한국의 순양함이 5척[100]이라는 걸 보면 퇴역한 듯.
- 광개토대왕
원 역사의 주세페 가리발디급 장갑순양함 2번함 페드로 데 아라곤으로 발주자였던 스페인이 예산 부족을 이유로 인도를 거부하자 새로운 구매자를 찾기 위해 이탈리아가 한국에게 제안하여 구매한다.
- 충무공 이순신
12인치 22노트로 원 역사의 애진코트. 원 역사처럼 발주자였던 브라질이 돈 없다고 인도를 거부하면서 난감해진 영국에게 전함 보유가 급하던 오스만 제국이 구매를 희망했으나 친독국가인 오스만에 대한 영국의 의심과 협상국인 러시아의 반발로 인해 대신 대한제국에 구매를 제안한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의 거의 1/4에 달하는 275만 파운드(2750만원)라는 비싼 가격에 정부와 육군 중심의 군부는 난색을 표했으나 육군에 비하면 찬밥 신세였던 해군이 장병 봉급에서 일부를 떼어 모금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1차 대전이 터지면 전함이 필요한 영국한테 빌려주고 한탕 제대로 뜯어내려던 이선이 구매를 위해 직접 내탕금에서 갹출한 것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모금 운동이 일면서 어찌저찌 예산을 확보, 구매에 성공한다. 대한제국 최초의 전함으로 그 상징성 덕에 이선이 직접 충무공 이순신[101]이라고 붙인다. 이후 1차 대전이 터지자 매각을 주도한 처칠이 대여를 요청하고 이선 역시 동맹으로 참여했기에 영국해군에 돈받고 임대, 갈리폴리 상륙작전에서 고생하지만 살아남았다. 적백내전에서도 남부전선에 고립된 러시아 백군을 구출해 극동으로 탈출시키는 활약을 한다.
- 강감찬
11인치 28노트로 원 역사의 몰트케급 순양전함 1번함 몰트케.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대한제국 몫으로 분배되었다.
- 태조 고황제
12인치 21~23노트로 원 역사의 카이저급 전함 2번함 프리드리히 데어 그로세.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대한제국 몫으로 분배되었다. 원래 대한제국은 피휘의 풍습이 있어서 군주의 이름을 붙이기 꺼렸으나 워낙 강력한 전함이라 처음으로 군주인 이성계의 이름이 붙을수 있었다.
- 을지문덕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의 동형함이나 이 함선의 진짜 정체는 그 유명한 드미트리 돈스코이함. 이선이 니콜라이와 협상해서 값싸게 구입했다. 순양함으로 개장된후 의화단 전쟁에서 청나라 포대에 포격을 가하거나 해병대의 기함으로 쓰는등 활약한다.
- 양만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로 이선이 차르와 협상하여 값싸게 구입했다. 구입이후 순양함으로 개장한다.
- 문무대왕
이선이 파리 강화 회의에 갈 때 타고 간 함선으로 사실상 이선의 황실 요트. 쾌속 순양함이라고 언급되며 장기간 원양항해가 가능하다. 한국이 1924년 이전에는 자체적으로 건조한 순양함이 없으므로 외국산 함선으로 추정된다. 이진이 유럽을 순방할 때 다시 등장하며 황실전용 쾌속 순양함으로 확정된다.
- 계백
문무대왕함과 같이 언급되면서 첫 등장, 이후 관동 대지진 당시에 일본에 구호품을 전달하고 한국 시민들을 구출하는데 사용되었다. 한국이 1924년 이전에는 자체적으로 건저한 순양함이 없으므로 외국산 함선으로 추정된다.
3. 대청국[102]
3.1. 황실
- 광서제
원래 역사처럼 서태후의 꼭두각시로 즉위한 것은 동일하나, 역사의 개변으로 조청일 전쟁에서 조선과 일본이 승리하면서 격변에 휩쓸리게 된다. 변법자강운동은 원래 역사보다 더 길게 진행할 수 있었지만, 거대한 덩치에 무너진 행정력 때문에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하고, 변법파들이 천도하고 중화제국의 황제로 자리매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하자 이것까지는 받아들일 수 없어서 망설이다가 팔기군이 중심이 된 수구파들의 쿠데타로 유폐되고, 아예 서태후에 의해 선위까지 할 위기에 몰렸지만 이는 열강 외교관들의 개입으로 무산되었다. 속방처럼 여긴 조선에 의해 조청일 전쟁 패전, 만인대의 봉기 같은 굴욕을 겪어서인지 의화단 전쟁이 원래 역사보다 큰 스케일로 커졌고, 서태후에 의해 사실상 납치되어서 서경으로 끌려가는 길에 대한제국군에 구출되어서 사실상 포로가 된다.
이후 다시 친정과 변법자강운동을 재개하고, 친한 성향이 되어서 북경을 찾은 이선과 최초로 근대적인 정상회담을 하고, 당시 주청공사가 된 이완용을 총애하게 된다.최대의 실수1908년 흠정헌법대강이라는 헌법을 반포해 입헌군주제를 도입하고 의회를 설립하나, 만주족의 기득권을 포기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한족의 불만을 달래지 못하고 오히려 혁명의 위기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10년 동안 병약한 몸으로 과로해서 결국 1910년 8월 22일, 북경 자금성에서 붕어하면서 최후의 구심점을 잃은 작중 대청이 붕괴하는 도화선이 된다.
- 서태후
잘 알려진대로 청나라를 말아먹은 여인으로 묘사된다. 대체로 행보는 원역과 같으나 조선이 제국화 되어 있다는 부분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조선이 청나라의 지배에 벗어나려하자 이선 납치 계획을 세우나 실패하고 조선독립전쟁의 명분을 제공하며 패배하여 결국 조선은 독립한다. 그 뒤 실각하여 광서제가 변법운동을 밀어붙이나 보수파를 이끌어 변법을 무위로 돌리고 의화단 전쟁을 일으킨다. 원역대로 연합군에 참패하여 베이징이 함락되는데, 이때 광서제를 데리고 피난하는 중 이선의 지시를 받은 한국군들에게 발각되어 광서제를 두고 빤스런 한다는게 차이. 원역과 달리 광서제를 확보한 조선측이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조종하게 되어 완전히 실각하게 된다. 휴버트 보스가 이선을 그릴 때 다시 언급되는데 30살로 보이도록 그리게 시켰다고 한다. 물론 보스는 서태후를 그린 후 미국으로 돌아가 그녀의 진짜 모습을 그려서 팔아먹었다고.
- 공친왕 혁은
양무운동을 주도했던 황족. 원래 역사와 거의 비슷한 행보를 보이며, 이홍장과는 동지적 관계로 보이지만 단지 그가 일을 저지르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서 견제하지 않은 것이라는 내심을 보였다.
- 공친왕 부위
공친왕 혁은의 손자로, 수도를 지키는 금위군이 어디갔냐고 순친왕 재풍의 동생인 재도에게 물어보나 재도는 원래 역사처럼 제가 지휘를 직접하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라는 말을 한다.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킨 단기서가 유일한 청나라의 인재였다는 걸 알고 한탄하고 그 말을 들은 재풍은 청나라가 망했음을 직감한다.
- 선통제
원래 역사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신해혁명 당시에 황족들이 입씨름 하는 동안 옥좌에서 7살 어린아이답게 놀고 있었다고 나온다. 아직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사실상 상징으로 있을 뿐이고 실제 정치는 섭정인 순친왕 재풍과 청국 총리 숙친왕 아이신기오로 산치가 대신한다. 노회한 정치인이 다 된 이선은 선통제를 사위로 들이는 것도 괜찮겠다고 고려 중이다. 선통제 본인도 서양식 교육을 받다 보니 서양과 한국인 혼혈 미녀인 예성 공주 이라를 짝사랑하지만 황실의 반대[103]로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 대해서는 이라 공주를 사랑하고 근대화에 성공해 청나라를 보호해주지만 본인과 청나라를 허수아비로 만든지라 부러움과 질시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라를 사랑했지만 결국 황실의 압력에 역사대로 완용과 약혼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히 사랑한 이라가 동생하고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아서 부걸이 이선의 막내딸인 이금과 결혼하기를 바란다.
- 애신각라 부걸
원래 역사에서는 사가 히로와 결혼 했을 애신각라 부의의 남동생. 한국 황제의 결혼 제의를 거절한 일로 한국 황실에게 보복당할 것을 두려워한 청나라 황실이 대신 결혼 상대로 제시했다고 한다. 한국 유학을 희망하고 있으며 이선 역시 흔쾌히 허락한다.
- 순친왕 재풍
섭정왕으로 30세의 청년이지만 너무 어린 선통제를 대신해 잠시 통치한다. 신해혁명 당시 청나라 조정측 지휘관으로 청군에게 중화민국을 토벌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완용에게 한국군은 중국 내전을 틈타 만주로 진군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단기서가 반란을 일으키자 어쩔 수 없이 중화민국과 화의를 받아들인다. 청나라의 중국 지배가 끝난 것에 눈물을 흘리며 아들과 함께 만주로 돌아간다. 만주로 돌아간 후에도 청나라의 실력자로 활동한다.
- 숙친왕 산기
숙친왕 아이신기오로 산치. 청나라의 1대 총리대신, 신해혁명 당시 결사항전을 부르짖었다. 청나라의 대표적인 친한 인사이지만 이완용의 청나라 이권 침탈에는 불쾌함을 표하는 인물. 그래도 자신의 10번째 딸인 현사가 이진의 아내가 된다는 말을 듣고 차기 한국 황제의 장인이 될 사실에 기뻐했으나 이진과 타티야나가 결혼하자 크게 상심하여 병환을 얻고 몸져눕는다. 그래도 자신의 11번째 아들 김헌원이랑 예경공주가 결혼했으니 어느 정도 한을 풀듯.
- 아이신기오로 셴위안
한국명 김헌원으로, 숙친왕의 11번째 아들. 한국에서 유학하는 친한파지만 한국인들이 만주족을 깔보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다. 청나라와의 국혼이 없던 일이 되자 어차피 결혼한다면 한국 황실에 깔봄당할 자신의 누이에게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이진과 결혼할 러시아 공주가 한국 황실에 적응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본인도 호감 있던 한국의 예경공주와 결혼하여 이선의 사위가 된다.
- 아이신기오로 셴시
한국명 김현사로, 숙친왕의 10번째 딸. 이진과의 혼담이 있었으나 이진 본인은 청국 친왕의 서녀라는 사실에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이후 결혼은 없던 일이 되지만 현사에게 미안했던 이선과 예경공주의 도움으로 궁내부 여관으로 특채된다.
- 진비후이
가와시마 요시코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만주족 황족, 원래 역사의 일본 스파이이자 요녀. 숙친왕 아이신기오로 산치의 14번째 딸이다. 역사의 변혁으로 일본에 양녀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원판의 미모와 요사함은 여전하다고 하며 일본 유학을 다녀왔다고 한다.
3.2. 조정
- 이홍장
이선이 민비의 암살 시도에서 살아나고 청으로 도주해서 처음 만나게 된 인물로, 외국에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후원자가 필요했던 이선이 물욕이 강한 그에게 홍삼 무역 이권을 보장해 주면서 인연을 맺게 된다. 이선의 입장에서는 은인이었지만 조선 입장에서는 근대화를 위해서는 상국 노릇을 하던 청을 물리쳐야 했기 때문에 여러차례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조청일 전쟁 전에는 이선을 납치하려고 시도하기까지 했다. 대내적으로는 한족인데다가 근대화되고 가장 강력한 북양군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청 조정의 견제를 받았고,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거물이라 일이 잘못되면 협상 대표로 나서며 노년까지 고통받는다. 결국 무너져가는 조국을 보면서 회한 속에 죽는다.
- 마건충
정여창과 함께 조선에 입국한 청국 외교관으로 마건상의 동생, 조선에 대한 와교를 담당한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려고 하나 이선의 제지로 그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홍장과 함께 강화협상 당시 고종의 청나라 참전 요청 문건을 이선에게 건내준다. - 마건상
원세개의 후임으로 조선이 발전하면서 근대화를 하자 이를 청나라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하여 무산시키려고 한다. 한국의 태양력 사용에 문제를 삼고 간도의 충돌에서 황제에게 대들었다며 이선에게 처벌할 것을 요구한다. 간도분쟁의 경우 삼국간섭으로 넘어가나 마건상은 조선이 오토리 공사가 고종을 대군주 폐하라고 부르는 것[104]에 분노하며 이는 청일전쟁의 단초가 된다. 결국 이선 납치사건으로 단교가 일어나고 기밀문서를 소각할 틈도 없이 추방된다.
- 증기택
증국번의 장남으로 런던주재 대사였으나 리바디아 조약때문에 러시아에 파견된 인물, 러시아에서 이선을 만나며 이선이 대청의 관리가 아니니 아라사황제를 만날수 없다고 말한다. 이선이 러시아를 떠날때 일리 조약을 체결하나 본인은 이 조약으로 청나라 조정내 강경파들이 청이 강경하게 나가면 이길수 있다고 착각한다라며 한탄한다. 그뒤 청불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이선에게 말해준다.
- 장지동
청불전쟁에 참여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이홍장과 유곤일과 함께 양무운동의 핵심인사이며 청일전쟁에서는 영국에게 대만의 이권을 넘게 줄테니 일본을 막아달라고 하지만 대놓고 무시당한다. 의화단 전쟁에서는 중국의 분열을 막으려는 이홍장과 달리 만주를 러시아와 한국에 빼앗기는 것을 더 두려워한다. 유곤일이나 이홍장과 달리 오래 살아남았으며 원세개를 다시 중용하고 러일전쟁 당시 일본과 협력하여 러시아를 몰아내야한다고 주장했으나 기각당한다. 1909년에 죽는다.
- 양돈언
청국 외무대신으로 미국 유학파 출신 와교관이라 이완용과 안면이 있다. 역사의 변화로 강해진 한국군을 위대하다고 칭찬한다. 이완용이 서양과의 조약을 통해 중국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보장했다고 하자 기뻐한다. 그러나 이후 이완용이 점점 한청보호조약, 제 3차 한청조약을 맺자 분노하여 민족자결주의를 외치지만 이미 공산주의 소련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조약을 인정한다는 사실에 절망을 느낀다.
- 오례당
오례당(吳禮堂). 1843년생. 강소 출신. 프랑스 유학 이후 스페인 주재 서기관으로 임명. 1883년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 주재 해관원이 되어 입국, 같은 해 보빙사절단의 통역으로 발탁되어 외국어 수행원의 임무를 수행했다. 귀국 후 인천 해관에서 근무했다. 이선과의 인연덕에 조청일전쟁에서도 인천에 남아서 무역 사업을 했으며 스페인 출신의 백인 아내 취향대로 유럽식 저택을 지었다고 한다. 역시 인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고.
- 유곤일
양광총독으로 이홍장의 라이벌이자 양무운동을 이끌었고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적 있는 중국의 관료지만 근대전에 대한 이해는 바닥이다. 서태후가 광서제를 폐위하자 이에 반발하며 서태후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홍장,장지홍과 함께 협력하고 의화단 전쟁당시에도 중립을 선포한다. 의화단 전쟁에서 장지동,이홍장과 함께 협상을 맡았고 1902년에 사망한다.
- 이경희
청나라의 2대총리로 원래 역사와 달리 청나라의 총리가 된다. 이홍장의 조카로 이홍장이 후계자로 점 찍었지만 광서제의 견제로 외직을 떠돌다가 신해 혁명이 일어나자 양무운동의 상징으로 총리로 임명된다. 얼마안가 단기서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단기서와 접촉하게 되고 황제 퇴위를 권하는 상소를 읽게된다.
- 강유위
청나라의 한족 충신. 원래 역사처럼 중국의 개혁을 주도하다가 보수파의 반발로 실각, 이후 보수파가 서양과의 전쟁으로 무너지자 중앙정계에 복귀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유교적인 인물이고 한족인데도 청나라의 충신이기에 만한동수로 의회를 구성하려고 하자 한족의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신해혁명의 원인 중 하나를 만들고 만다. 본인이 수구파의 쿠데타로 해임된 적이 있어서 신해혁명 또한 쿠데타로 생각, 중화민국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청나라가 만주로 쫒겨나는 와중에도 만주족 조정을 따라왔다. 이후 한족의 범중화주의 때문에 만주족의 반중감정이 최고로 치닫자 청나라 거주 한족을 대표해서 선통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한다.
- 당소의
신해혁명 당시 청조대표로서 남북조시대 마냥 장강을 경계로 중국을 나눌것을 제의하지만 만주족 강경파에 무시당한다. 단기서의 반란으로 평화협상이 시작되자 만주와 변강을 넘겨서는 안된다는 이완용의 말을 듣고 18성을 제외한 청나라 영토를 지켜낸다.
3.3. 군부
- 장훈
조청일 전쟁에 기병대장으로 참전해서 조선군과 싸웠으나, 근대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부의 무능으로 인해 패배하자 분루를 삼키며 남은 일생은 개혁에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남북 전쟁의 전훈대로 중국판 '바다로의 진군'을 펼치며 장강 이남의 혁명군을 무자비하게 몰아 붙이지만, 그 과정에서 동양 최대 제철소이자 일본이 대거 투자한 한야평제철소를 파괴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회군하게 된다. 이후 협약에 따라 청 조정이 만주로 돌아가자 함께 따라가고, 원세개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중화민국이 혼란에 빠지자 그 틈을 타서 하북성을 확보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침공하지만 단기서가 막아서면서 실패하고, 실의에 빠져서 은퇴한다. 청조의 충신으로 조국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그가 한 일들의 결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한제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 정여창
이홍장의 측근으로 북양함대의 지휘자, 영국에게 순양함을 인계받으러 가는게 첫등장이며 임오군란 당시 파견된 청국군인.이홍장과 함께 이선 납치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황해 해전에서 대패하고 끝까지 분투하여 위해위에서 일본군에게 피해 입히지만 이미 전세는 일본군에게 유리하게 전개, 북양함대의 정원마저 격침당하자 서양 고문관들과 충성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 양필
만주족 장교로 원래 역사의 청나라 최후의 충신, 단기서가 반란일으킨후에도 명목상 신하랍시고 청나라 황제에게 만세를 외치자 반란군 주제에 만세를 외친다고 분노하여 덤비려다가 재풍에게 저지 당한다. 협상후 청나라가 만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자살하려고 했으나 다른이들에게 제지당하고 언젠가 반드시 중화민국에 복수할것을 맹세 한다.
- 맹은원
길림 주둔군이었다가 혁명이후 청나라에게 고위직을 약속 받고 청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만주군 부원수로 원세개 반란이후 벌어진 호국전쟁에서 등장하고 승덕부를 점령해서 한껏 고조된 다른 청나라군과 달리 만주군 병사 대부분 한족이며 청나라를 도아야하는 몽골, 신강, 티베트 모두 토벌령에 응하지 않은 걸 보고 북경공략의 실패를 예측했고 그리 되었다.
- 장작림
만주의 마적으로 시작해서, 러일전쟁 때는 일본군편을 들었다가 작중에서 대한제국이 만주까지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강성해져서 친한파 군벌이 된다. 청조가 만주로 복귀하면서 만주의 신군을 맡은 실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군벌의 본성은 그대로라 1차 대전 후 만주와 몽골의 사이가 악화되어서 분쟁이 일어나자 신군을 움직이지 않아서, 청 정부는 금위군을 투입했다가 패퇴하게 된다. 이 일은 대한제국 정부가 청에 단기서 같은 군 실권자를 만들 수 없다고 판단해서 그에게 군권을 쥐어주는 대신 청의 외교에 이어서 내정과 군사까지 관할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만든다.
- 양증신
운남 출신의 신강 순무, 신강 지역을 통치하는 군벌로 원래 역사와 달리 청나라의 존재로 인해 명목상 청나라의 신하로 활동하지만 중화민국을 토벌하라는 청나라의 토벌령도 대놓고 무시할 만큼 사실상 독립을 누린다. 물론 청나라는 몽골조차 어찌 못하는지라 발만 동동구른다. 이후 신강지역에서 청나라와 달리 자기만의 개혁과 근대화에 집중하며 미쳐 날뛰는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싸우기도 한다.
4. 중화민국[105]
- 원세개
흥선 대원군을 압송하고 조선에 간섭했던 과거와 달리 이선의 등장으로 제대로 손도 못 써보고 청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남양군에서 다시 처음부터 올라가 중화민국의 실력자가 돼서 청나라 몰락에 기여한다. 원래 역사에 비해 권력이 약해서 그런지 황제가 되려는 욕심은 없었지만 그래도 인성과 처참한 안목은 그대로라 일본의 14개조 요구를 받아들인 것 때문에 권력을 잃고 원술마냥 꿀물을 찾다가사망한다.여기서도 유언은 원래 역사 처럼 "그놈!그놈이 날 해쳤어!"인데 원래 역사에서 그놈은 자기 큰아들 위안커딩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많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선으로 추측하는 사람이 많은 편.[106]
- 여원홍
신해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으나 진압도 하지않은 21여단 사령관으로 장병들의 강권을 받아 얼떨결에 혁명군 사령관이 되고 호북 군정부 도독으로서 청나라에 독립을 선포한다. 혁명 이후 호광파 군벌이되지만 무색무취한 사람이라 원세개의 반란에서는 임시 부총통 자리를 받는다.또한 원세개 사후에는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여원홍은 호국군과 싸울이유를 찾지 못하고 대총통 자리를 손문에게 양도, 본인은 부총통자리에 만족한다. 세계대전에 참전하자는 단기서와 달리 참전을 반대했다.
- 양계초
강유위의 제자이자 변법자강운동에도 참가한 인물로 국민당 정권이 민주주의에만 몰두한다고 생각하여 강한 리더십인 군벌들을 지지했으나 원세개가 대놓고 친일 매국의 길로 들어서자 크게 실망하여 대놓고 비판한다. 워낙 유명인사라서 원세개도 쉽개 건드리자 못했으며 나중에 호국군에 참여한다.
- 황흥
중국의 혁명가로 송교인과 함께 중국 동맹회의 실무를 맡고 있다.무창에서 봉기를 일으키기로 하였으나 무창에서 봉기가 일찍터지자 여원홍을 지원한다. 중화민국 설립후에는 참모총장을 맡지만 원세개의 반란으로 쫒겨나고 이후 손문과 함께 호국군을 창설한다. 이후 등장이 없는 걸로 봐서 역사대로 수명이 다해 죽은듯하다.
- 장삼
장삼이사의 '장삼'으로, 작가가 당시 중국 민중의 상징으로 만든 창작 인물. 산동이 고향이며, 열강의 침탈로 들어온 선교사에게 가족의 땅을 뺏기고, 아버지는 교회에서 난동을 부렸다가 관아에 끌려가서 매를 맞고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면서 열강에 대한 복수심을 품고 형들과 함께 의화단에 가입한다. 교회에 불질러서 복수하고, 점점 광기에 물들어서 살육을 마다하지 않는 괴물이 되어간다. 결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의화단이 전멸하면서 허무하게 죽어버리는 일회용 캐릭터가 되는 줄 알았지만...
3부에서 시체 사이에서 몸을 숨기고 살아 있던 것으로 드러났다. 마지막 순간 의화단이 내세운 구호가 허망한 것을 깨닫고 자금성에 태극기가 올라오는 것을 봤기 때문에, 동양도 서양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트라우마가 남은 고향 산동으로 돌아가지 않고 만주로 도주해서 서양인 선교사가 세운 학교에서 근대 학문을 익혔다. 머리는 좋았는지 남만주 자치령에서 친한파들을 육성하기 위해서 주선한 한국 유학을 가서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열렬한 아시아주의자가 되어서 아시아주의자 조직에 가입했고, 만주로 돌아와서 교편을 잡은 한편으로 과거의 경험 때문에 총에 광적으로 빠져서 조직 내 최고의 명사수가 된다. 그러나 1차 대전 이후 한국과 일본이 자신의 두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만주와 산동을 점령하면서, 아시아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총으로 침략자를 단죄하겠다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리하여 191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러시아 백군 통합정부를 이끌게 된 전 총리 스톨리핀과 청 외무고문 이완용이 도착하는 곳에 나가서, 원래 역사의 10년 전 사건과 판박이로 두 사람을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 이사
장삼이사의 '이사'로, 작가가 당시 중국 민중의 상징으로 만든 창작 인물. 이씨 집안의 넷째 딸인데, 아들을 바란 집에서 넷째 딸이라 이름도 주지 않고 키웠다. 장삼과 달리 먹을 것을 주고 자신을 존중하는 교회에 호의를 가졌고, 교리에도 관심을 가졌다가 결국 세례를 받게 된다. 그러나 집에서는 그녀가 양귀에 홀렸다고 생각해서 무자비하게 구타했고, 결국 집에서 도망쳐서 교회에 몸을 의탁했다. 의화단 전쟁이 발생하자 북경으로 피신했으나,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마침 등장한 안중근이 지휘하는 대한제국군 병사들에게 구원받는다. 일회용 캐릭터로 여겨졌지만 장삼이 예상치 못하게 다시 등장한 것을 보면 그녀도 등장할 여지를 남겼다.
4.1. 북양정부[107]
- 단기서
의화단 전쟁 당시 신건육군의 참모총판으로, 이홍장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망이 없는 북경 방위를 거부하고 퇴각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이후 세차례 쿠데타를 일으켜서 청조를 만주로 쫓아내고, 원세개를 몰아내고, 손문의 국민정부를 강남으로 쫓아내어서 북양정부의 수장이 되었다. 한국은 중국보다 작음에도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서 열강이 되었는데 중국은 분열되어 있어서 그러지 못한다고 한탄하면서 전통적인 중원은 물론이고 만주, 신강, 토번, 몽골까지 포괄하는 강력한 통일 중국을 꿈꾸지만 그의 행보는 중국의 분열에만 기여했다.
북경에서 퇴각할 때 독일 전쟁대학 동기였던 박유굉은 승리자로서 북경에 입성하는데 그보다 못한 것 없는 자신은 주군을 잘못 만나서 패배자로 물러나게 됐다고 한탄했지만, 박유굉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한시도 잊지 않고 이후 자신의 판단 착오에 대한 책임으로 자결을 택하며 무엇이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내심 일본을 혐오하지만[108] 그를 지원하는 세력이 일본밖에 없어서 일본의 지원을 받는다. 일본에게 지원받는 바람에 관동 대학살 당시 북양정부가 일본에 소극적으로 나설수 밖에 없는 원인이 되었고 이는 북양정부의 정통성을 까먹는 결과를 가져온다. 단기서 본인도 대학살에는 크게 분노하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일본에 분노하는 시늉만 한다.
이후 손문의 의지를 이어받아 북벌을 선언한 광동의 호법정부와 내전을 벌이나 호법정부에게 패배하고 수도 남경을 내준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승자인 장개석에게 중국의 통일을 이뤄달라는 당부를 남기고 북양정부를 해산한 뒤 물러난다.
- 풍국장
북양의 용이라고 불리는 단기서, 북양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왕사진과 달리 유능하지만 탐욕스러워 북양의 개라고 불리는 인물, 단기서가 반란군에게 평화적으로 항복을 권유하자 이를 반란군과 협상하는 것으로 조작하여 청 황실에 알리고 단기서가 청나라를 배신하게 만든다. 이후 본인도 청조를 배신하고 원세개 휘하로 들어가고 원세개에게 다음 총통 자리를 약속받지만 원세개가 황제가 되려고 한다는 소문이 돌자 배신당했다고 느끼고는 원세개를 배신한다.
- 오패부
직례군벌의 수장으로서 호법정부가 아닌 북양정부에 속해있지만 안휘파와 직례파의 갈등 때문에 단기서의 안휘군벌과 안직전쟁을 벌인다. 안직전쟁에서 패배하여 안휘파의 우위를 인정하지만 여전히 복수를 꿈꾸고 있다. 철저한 유학자 장군이자 애국자라서 다른 군벌과 달리 사치, 여자, 아편, 부정축재를 하지않아 포섭하기 어려운 청렴한 군벌이라 단기서도 그를 존중해서 그를 완벽히 몰락시키지는 않았다. 매국노 군벌들과 친일적인 단기서를 혐오하는 인물이지만 반공주의자인데다가 단기서보다 청나라를 싫어하는 반청주의자라서 자금성 약탈[109]을 주도한적이 있어서 청나라 황실에게 혐오스러운 인물, 그래도 강직한 성품덕에 한국의 주선으로 국공합작 대신에 손문-오패부 동맹을 맺는다.
- 육징상
산둥반도를 반환하지 않는 베르사유 조약에 반대하며 조약에 서명할것을 거부하나 세계각국은 중국의 거부를 당연하다듯이 예측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 고유균
중화민국 외교관. 단기서의 특명을 받아 위싱턴 회의에서 산둥반도를 일본으로부터 환수받고 외교 승리를 거둔다.
4.2. 호법정부[110] → 국민정부
- 손문
중화민국의 국부다. 한국의 지원을 받아 중화민국을 일으킬 봉기를 준비하나 그 전에 봉기가 터지자 급히 귀국해서 중화민국을 건국한다. 그러나 역사의 변화로 청나라를 무너뜨리진 못한다. 그 후 원세개가 총통 자리를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총통 자리에 사임하지만 원세개가 한간 짓을 하고 실각, 이후 단기서가 독재로 흐르자 호법정부를 선포한다. 호법정부를 선포하나 일본이 단기서를 지원하자 중화민국 호법정부를 인정한 한국에 손을 벌린다.여기서 이선에게 중국과 청나라는 다르며 중국의 영토는 18성뿐이다. 라는 확약을 한다. 그리고 짜장면과 짬뽕을 맛있게 먹는다.[111] 이후 한국 역시 유일하게 도와주긴 하지만 손문의 바람과 달리 북벌보다는 단기서의 견제만 허락하자 독자적인 무력을 갖추기 위해 소련과 접촉한다. 관동 대학살 당시 아시아주의자였던 과거 때문에 일본 비판을 꺼렸지만 호법정부의 전통성을 세우기 위해 일본을 크게 비판한다.
역사의 변화로 대한제국의 김옥균에 도움을 받아 민국을 건국했기에 중화사상을 버리고 아시아가 진정으로 협력해야한다는 순수한 아시아주의자가 되어 모든 아시아가 진정으로 협력해야한다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도 중국본토를 한국이 노리지 못하게 하기위해 이선과 서로 만주는 한국관할, 중국본토18성은 중국관할이라는 약속을 받고 국공합작으로 냉랭해진 한국과 관계를 다시 회복시킨다. 와카쓰키 레이지로가 단기서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자 단기서와 평화협상을 통해 중국통일을 준비하려다가 지병인 간암이 악화되어 삼민주의를 이룩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역사랑 비슷하게 죽는다.
- 송경령
상해 대부호의 딸인 송씨자매의 셋째. 26살 연상인 손문과 결혼 하였으며 손문이 죽을 때 손문이 돌봐주지 못해서 미안하니 자신의 재산과 서적의 전부를 송경령에게 준다는 언급으로 등장.
- 송교인
손문의 동지로 손문에 비하면 현실적이고 냉담한 인물 .혁명을 돕겠다는 말을 순진하게 믿는 손문과 달리 이웃나라들의 호의를 의심한다. 원세개를 끌어들여 혁명을 성공시키고 신해혁명이후 손문, 원세개와 함께 혁명의 삼두라고 불리며 국무총리가 되지만 중국에 강력한 민주주의 정착을 밀어붙여 중화민국내 보수파의 적이 되고 진기미의 첩보로 군부가 반란을 어느 정도 모의한 것을 알았지만 군부의 쿠데타를 막을수는 없었고 이후 군부에게 감금당하여 징역형을 살게 된다. 역사의 변화로 암살은 피했으나 수감생활 동안 건강이 나빠져서 요양을 가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반대하였다. 국민당의 2인자이지만 40대 나이에도 건강이 크게 나빠진 상태에서도 과로로 몸을 상하게 하여 김옥균의 장례식때 오히려 곧 장례 치를 것 같은 상태로 왔다고 한다. 손문이 죽으면서 호법정부의 2대 대원수가 되지만 곧 수명이 다해가고 있어서 국민당의 분열이 시작된다. 3부 외전에선 결국 얼마 못 가 병사하였다고 언급된다.
- 채악
사천군벌, 신해혁명 당시 남부에서 봉기한 인물중 하나. 원세개가 권력을 독점하려고 하자. 원래 역사처럼 원세개를 몰아내고 호법정부를 만드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후 군벌 반란시대에도 국민당을 끝까지 지지하나 지병 때문에 치료차 일본으로 가게 되고 이는 진형명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 호한민
손문의 최측근으로 전 민의원회장, 국민당 선전부장이자 전 호법정부 외교부장. 본인은 삼민주의가 공산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장개석의 말을 듣고 코민테른에 협조하기로 한다. 손문 사후 국민당 우파를 대표한다.
- 육영정
광서제독이었지만 혁명에 참여하고 광서 군벌이된다. 원세개 반란에도 손문을 지지했으며, 프로이센식 통일과 중앙집권을 밀어붙이는 단기서에 대항하여 손문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운다.
- 진형명
광동도독으로 사실상 광동군벌, 연성 자치론주의자로 손문을 도와 호국군을 이끈다. 그러나 연성자치론이라는 손문과는 다른 사상때문에 채악의 부재를 틈타 쿠데타를 일으킨다. 덕분에 손문은 군벌들의 반란에 질려서 오히려 공산당과 가까워지면서 독자적인 군사력을 갖추려고 한다.
- 진기미
상해 경찰 간부로 경찰 간부는 위장신분이고 사실은 혁명을 준비한 동맹회 지도부, 원래 역사 대로 신규식과 엮인다. 혁명당시 상해 군정부도독이 된다. 대한제국이 원세개와 독자 협상을 맺을 까봐 신규식을 감시 하기 위해 장개석을 붙인다.혁명 이후 송교인에게 원세개의 움직임을 보고한다. 원세개가 반란을 일으키자 장개석의 호위를 받으며 상해 조계지로 피신한다.
- 장개석
신해혁명 당시 상해 경찰 간부 진기미의 휘하 부하로 첫등장. 장치청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결사대를 이끌고 상해를 함락시킨 유능한 장교로 나오며 진기미의 특명으로 신해혁명을 돕는 신규식을 감시하는 동시에 친분을 맺는다. 원래 역사처럼 중국을 강력한 군대로 통일하고 일본과 한국을 뛰어넘는 근대국가를 건설하려한다. 원세개에게 신군연대장을 스카웃을 제의 받지만 거부한다. 한번 배신한자는 다시 배신하기에 원세개를 신뢰하지않는다. 이후 장교로서 승승장구 하지만 원세개가 일본의 13개조 요구를 받아들이자 분노하여 일본[112]에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한다. 이후 호국군에 참가하고 원세개토벌에 공을 세운다. 진형명의 반란 당시 손문을 구출하여 떠오르는 정치인이 된다. 본인도 공산주의를 탐탁하지 않아하지만 중국의 통일을 위해 공산당의 군사기술과 방법론을 배우기로 결심한다. 관동 대학살이 벌어지자 죽은 중국인들이 장개석의 고향출신이었기에 장개석은 미칠듯이 분노하며 공산당과 손잡는 한이 있어도 일본에 복수할 것을 맹세한다. 국공합작 이후에도 역사대로 소련을 언젠가는 갈라서야할 존재로 보고 있기에[113] 이선 역시 군사력을 가진 장개석이 언젠가 권력을 잡을 거라고 김규식에게 말한다.
이후 북벌을 진행하여 북양정부를 무너트리고 난징 국민정부를 세워 중국의 1인자로 등극, 직후 바로 소련과 결별하고 공산당을 토사구팽한다. 중국의 지배자 자리에 오른 후에는 관세자주권 회복과 주권 회복에 나서고 제1주적으로 상정하여 공업화 정책과 군사력 강화를 추진한다. 또한 일본과 일전을 벌이기 전 내부 정리에 들어가 자신에게 반대하는 군벌들을 상대로 중원대전을 벌이고, 공산당을 상대로 초공작전을 개시, 공산당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붙인다. 그러나 장개석의 반일 기조에 분노한 일본이 복건에 괴뢰국을 세우려고 획책한 복건사변을 일으킨 덕분에 공산당을 멸망시키는데 실패하고 공산당은 원 역사와 똑같이 대장정을 통해 섬서성으로 도피한다.
- 왕조명
왕정위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손문의 보좌관, 순친왕 재풍을 암살하려다가 체포, 신해혁명당시에 풀려나서 일약 스타가 된다.국공합작에 긍정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어사 이선이 국공합작을 비판하자[114]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반박하려다가 손문에게 제지당한다. 손문이 죽기직전 그의 유언을 듣는다.
4.3. 공산당
- 왕희천
실존 인물로 주은래의 친구이자 중국노동공제회를 이끄는 인물. 역사대로 관동 대지진 당시 일본군에게 살해당한다.
5. 대일본제국
5.1. 황실
- 메이지 천황
일본 제국 제122대 천황. 실제 인물처럼 폐쇄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미래인의 감성을 갖고 서양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이미지 메이킹을 적극적으로 하는 주인공 이선과 비교되어서 열강에서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원래 역사와 달리 평화주의자의 면모가 부각되는 편인데, 작중에서는 이선이 니콜라이를 충동질해서 더 커진 오쓰 사건 때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러시아 군함에 승선해서 니콜라이에게 담뱃불을 손수 붙여준다. 러일전쟁 개전 결정을 듣고는 결국 승인하긴 하지만, 자신의 국민이 자신의 이름을 외치며 죽는다는 사실에 슬피 운다. 전후엔 군부의 쿠데타 시도를 듣고 격노하며 육군 내각을 총사퇴하게 만든다. 이후 원래 역사대로 1912년에 붕어한다.
- 다이쇼 천황
일본 제국의 제123대 천황. 작중에서 대한제국 선포 10주년을 기념하여 일본 대표로 대한제국을 방문한다.[115] 원래 역사에서는 이은을 마음에 들어 한국어를 배웠다면, 작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이선의 군주로서의 품격에 존경을 느끼는 데다가, 답례로 1908년 메이지 유신 40주년 기념행사에 방문할 황태자 이진을 영접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웠다. 이진에게는 사람 좋은데 모자란 인물로 평가받는다. 관동 대지진 당시에는 뇌질환 악화로 누워 있는 것으로 나온다.
- 히로히토 천황
일본의 124대 천황, 원래 역사처럼 결혼 문제가 중요 정치적 스캔들이 된다. 이후 영국을 순방하고 에드워드 왕태자와 만나지만 에드워드에게 고급 원숭이라는 뒷담을 듣는다. [116]이후 황도파가 일으킨 쿠데타를 반란으로 규정해 해군을 동원하여 도쿄를 폭격해 진압한다.
-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히로히토 천황의 황제(皇弟)로, 이진의 즉위식에 일본 황실 대표로 참석한다.
-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
일본의 친왕으로 영국에 유학했으며 해군장교. 이선과는 차르의 즉위식때 만났으며 이후 일본 방문에서 다시 만난다. 니콜라이의 일본방문을 수행하던 중 일어난 오쓰 사건에 경악하여 천왕과 정부에 알리고 황태자에게 사죄한다. 황해 해전에 일본 해군 기함의 선장으로 참여, 청일전쟁 이후 대한제국 성립 당시 이선과 다시 만나는데 온건하고 합리적인 인사로 일본군이 바다로 나아가야한다는 이선의 말에 동의한다.
-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
사이온지 내각이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끌던 도쿄 근위사단을 장악하고자 근위사단장으로 임명하는 걸로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이미 하세가와는 장악을 끝내놓은 상태였으나 얼마안가 쿠데타 혐의가 들통나 체포된다.
-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원래 역사의 이방자 여사가 되는 인물이다. 히로히토의 결혼 추문에 하라가 정국을 전환할 요량으로 추천하고 다이쇼 역시 이진을 훌륭한 젊은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국혼을 추진한다. 하지만 이진은 사진 몇 번으로 본 게 전부인데다가 방계친왕이라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결혼을 거부하고 타티야나 여대공을 선택한다.
5.2. 총리대신
- 이토 히로부미
원래 역사처럼 제국주의자이긴 하나 작중에서는 군부의 모험적이고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최대한 완화하려고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부각된다. 현실적인 전개를 중시하는 작품 특성상 조선은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미래인 이선도 그를 껄끄러워하긴 하지만 군부보단 낫고 작중에서도 거물이기 때문에 조선과의 외교 회담에서 대표로 1, 2부에 걸쳐서 여러번 등장한다. 군부에서 사주한 것으로 추정되는 테러로 다리 하나를 잃으나 생명엔 지장이 없었고,[117] 이선이 벌인 여러 공작들 덕에 군부가 힘을 잃고 입헌정치가 더 정착되는 덕을 보기도 했다. 1912 스톡홀름 올림픽 때도 살아있어서, 안중근이 사격 선수로 출전해서 금메달을 딴 것이 '아시아의 승리'로 포장되어서 일본도 떠들썩한 것을 보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한편으로 조선이 일본을 어느새 앞질렀다는 사실에 묘한 감상을 느끼는 개그를 연출한다. 이후에도 원훈이라고 계속 정치에 간섭하는데 일본 정치인들은 노인네가 아직도 살아있었나며 신경끄라는 반응을 보인다.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때까지 살아있다가 하라의 권유로 오랜만에 정치활동을 하여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지지하고 후임으로 다카하시 고레키요를 지지했다가 일본내 좌우 급진파의 공공의 적[118]이 되고 결국 아사히 헤이고[119]에게 암살당한다. 여기서 본인의 감정과 생각이 드러나는데 고귀한 태생을 타고 강대국 사이를 조율하여 자국의 이익을 챙기는 이선을 부러워하고 있던게 드러난다. 자신이 일본 제국을 설계했지만 본인의 출신이 평민 출신이라 대한제국 황제인 이선과 달리 국민에게 사랑도 못받고[120] 군부에게 무시당해서 자기 능력을 제대로 못 펼쳤다고 분해한다. 사망 이후 원훈이라고 국장으로 치러지나 하필 죽은 장소가 게이샤와 함께 하는 요릿집이었고 유서공개로 살인범이 살인 할만했다는 여론이 생겨서 국장에 논란이 생긴다.
-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의 외무경. 젊었을 적에 영국 공사관에 방화를 저지른 적이 있다. 온건책을 선호하며 역사의 변화로 1901년 총리를 지내며 같은 조슈번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의 친우이다. 나이가 많아 원훈으로 활동하며 2차 삼국간섭 당시 러시아와 일본의 관계를 이선이 조율해줄 것을 요청했고 한영일 동맹이 성사되자 일본 특파대사로 파견되어 메이지의 문서를 건넨다. 다른 정치인들처럼 이토와 야마가타가 테러당하자 자신이 표적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대전쟁에는 참전을 지지했고 관동대지진 당시에 진상조사단이 머문 호텔에 이노우에 것이라고 언급된다.
- 마츠카타 마사요시
일본의 대장대신으로, 사츠마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금본위제 확립을 위해 무리한 확장을 반대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오쓰 사건으로 실각하자 뒤를 이어 일본 총리가 되었다. 오쓰 사건의 주범 쓰다가 법관 고지마 고레카타에 의해 사형이 아니라 무기징역이 내려지자 기겁하여 쓰다에게 사형을 시키라고 요구한다. 해군과 가까운 사쓰마 출신이라 대만과 필리핀등의 섬으로 뻗어나가는 것에 관심이 많으며 미서일 전쟁 참여를 지지한다. 이토와 야마가타 테러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껴 하라 내각을 지지한다. 3부에서는 생존 원로로 등장하여 이토와 같이 타카하시 내각을 지지한다.
- 하라 타카시
원래 역사에서는 조선을 향한 문화통치를 주장한 인물이자 평민 재상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 사이온지 후작의 심복으로, 함께 일본 군부를 통제하기 위해 노력한다. 작중에서는 대조선 일본 공사로 부임한 상태로 처음 등장한다. 지한파 정치인으로 이선을 좋게 보고 있어서 조선과 친하게 지내려는 편. 그래서 원래는 보통선거제도를 반대했지만 조선이 먼저 보통선거권을 인정하자 일본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보통선거제도를 인정한다. 원래 역사처럼 히로히토 결혼 문제에 간섭한 것 때문에 살해 협박을 받는다.[121][122] 바뀐 역사에서도 암살 위협에 너무 시달린 나머지, 본인도 조심하게 된 편이라 암살당하지는 않지만 총선 패배가 눈앞에 다가오자 대한제국과의 국혼으로 이방자를 추천한다.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정치적 생명과 진짜 생명을 위협받자 이토를 다시 정계에 불러내어 정치적 방패막이로 써먹는다. 타카하시 내각이 조각된 이후로는 극우의 암살을 피해 시골에서 은신하고 있었으나, 관동 대학살이 일어나자 한국과의 협상을 위해 다시 불려나온다.
- 사이온지 킨모치
주로 사이온지 후작이라고도 불리며, 하라와 같이 문민통제를 이륙하려고 노력한다. 야마가타는 손에 흙뭍히는 걸 두려워하는 귀족 도련님이라고 평가했는데 이 때문인지 결정적인 순간에 망설히는 모습을 보여준다.[123] 문민정권 인사들이 군부를 통제하려고 등판시켰으나 군부의 협박과 테러로 해임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피로스의 승리로 끝나자 일본을 수습할 인물로 다시 등판한다. 툭하면 일본군부에게 하라와 같이 살해위협을 받는다. 만주 철도 문제나 파리강화회의에도 직접 이선과 독대하여 협상하는 경우가 많다. 단 원래 역사에서도 조선합병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인 만큼 제국주의자로서 남진론을 펼치며 해군 건설에 힘을 쏟는다. 보수적인 인물이라 보통 선거권은 이르다고 생각했으나 선거에 승리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이후 다카하시 고레키요의 총리 취임을 지지한다.
- 코토 신페이
의학박사이자 철도전문가로, 첫등장은 이타가키 다이스케와 함께 프랑스 공사에게 조선을 지원하여 변화 된 조선을 통해 일본에서도 연속혁명을 일으킨다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첫등장한다.[124] 만철이 처음 생겼을 때 재등장, 일본이 만철지분을 살 돈이 없다고 말하고 한국에게 관세자주권을 돌려줌과 동시에 주식 일부분을 양도하여 한국이 대주주가 된다.[125] 원래 역사에서는 외무대신에 불과했지만 역사의 변화로 대만 총독이 되고 총리에 취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강경한 참전론자로 육군 파병을 지지했지만 하라 다카시와 이누카이 츠요시의 반대로 실패하고[126] 한국군이 활약하면서 연합국의 찬사를 받고 전후 협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자 배아파한다.
- 오쿠마 시게노부
헌정당 출신의 문민통치를 지향하는 인물이지만 그도 제국주의자라서 일본의 이득을 최후선으로 생각해 원세개를 지원하여 국민당 정권을 갈아치운다. 그러나 워낙 무리하게 일본의 이득만 챙기려다 보니 외교적으로 고립되게 되고 반일감정만 실컷 만들고 만다. 결국 원로들의 압박속에 가토 다카아키를 해임한다.
- 타카하시 코레키요
러일전쟁 당시 영국으로 채권 판매를 위해 떠나는 것으로 등장한다. 자국예산 50%를 해군에 쓰는 일본이 비정상적이라는 상식적인 생각을 하는 경제 관료로,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이후 일본 군부를 통제할 겸 후임 총리대신으로서 군축을 주도하려고 한다. 하지만, 하라와 달리 당내 장악력이 약해서 내각내 반대파를 몰아내려고 하다가 오히려 관동 대지진 직전에 내각이 무너지고 만다. 일본 군인들에게는 군축 귀신이라고도 불린다.
- 사이토 마코토
미서일 전쟁에서 친미파 일본 해군대장으로 잠깐 등장. 한참 동안 등장없다가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거국내각으로 취임한 일본의 총리대신으로 재등장한다. 관동 대학살이 점점 도를 넘는 수준이 되자, 외교적 참사를 면하기 위해 사건을 적당히 무마시키고 폭동 주모자 몇명만 처리, 이후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뒤집어 씌울 음모를 꾸민다. 그러나 강대국이 된 한국이 일본정부에 압박을 가하자, 어쩔수 없이 한국에 사과하기 위해 문민정부 인사들의 말대로 한국에 사과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다.
- 와카츠키 레이지로
대외온건파 총리대신으로 관동 대지진 극복을 위해 평화와 안정을 추구한다. 국내 안정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이념을 갖고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협상[127]을 진행한다. 또한 단기서에 대한 지원 역시 중단하는 평화정책을 펼친다. 이에 따라 우익에게는 배신자 소리를 듣지만 이선은 이것을 기회 삼아 소련과 관계 개선에 나선다.
5.3. 문민관료
-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본의 외교관으로 임오군란에서 죽은 일본군의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다가 이선에게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일본에는 이런 표현 없다고 화를 낸다. 원래 역사처럼 무리한 요구를 하다가 위로금만 배상하는 조일강화조약을 맺는다.
- 이타가키 다이스케
자유 민권론자로 괴한에 피습당했을 때 고토신페이가 치료했으며 이당시 김옥균도 만난적 있다. 원래 역사에서 갑신정변을 지원한 인물, 변화된 역사에서도 자유당 총재로서 헌정을 지지하고 프랑스와 협의하여 한국에 개입하려했으나 이토랑 정치적 다툼이 있어서 오히려 일본이 한국을 잠시 방치하게 된다. 이 사건 결과로 잠깐 외국을 다녀오며 오쿠마의 진보당과 힘을 합쳐 헌정당을 만드나 분열, 자유당 계열을 이끌고 입헌정우회에 입당한다.
- 무츠 무네미츠
무쓰 무네츠라고도 나오며 이선이 계손향에게 정치범이었다가 사면받았으며 그의 아내 역시 게이샤 출신이라면서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예시로 나온다. 일본의 외무장관으로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을 지지하는 외교관. 청일 전쟁을 통해 동양 패권국이 되려고 하고 있고 해군으로 대만을 공격하는 걸 지지한다. 그러나 여순 학살로 진땀을 뺀다. 일본군의 전권대사로 청일전쟁 협상에 나섰는데 이번엔 고요마 도요타로의 이홍장 테러 때문에 서양에 비난을 받는 걸 무마하느라 진땀을 빤다. 역사대로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나 얼마안가 지병이 악화되어 누어있다가 삼국 간섭때 다시 일어나서 우리가 욕심을 부렸다고 요동반도에서 철수할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이선에게 러시아와 조율하여 다롄,여순 만큼은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이선은 무시했다.
- 오토리 케이스케
구막부군 출신의 인사로 유신정부에 끝까지 저항한 인물이다. 막부군 출신답게 무관다운 행동을 보이며, 카와카미랑 비밀리에 회동하고 청나라를 도발하는 말을 하여 청일전쟁을 유도한다. 이후 고종을 대놓고 대군주로 부르며 청 조정을 자극하고 청일전쟁을 위해 조선과 일본의 동맹을 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
- 코무라 주타로
일본의 외교관으로 주청공사로 등장한다. 의화단 전쟁 당시 전권대사로 파견된다. 원래 역사에서는 영일동맹을 체결하는 큰 역할을 맡으며 대러 강경파 외교관으로 러일전쟁 개전을 주도했다. 그러나 역사의 변화로 일본이 육상에서 크게 패하며 요동에서 10만을 잃고도 사할린만 할양받는 굴욕스러운 포츠머스 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국민들에게 친미파 매국노로 몰린다.
- 이누카이 츠요시
일본의 자유민권운동의 거물이자 입헌국민당 총재로 일본 문민정부인사로 자주 언급된다. 원래 역사에서 조선인은 노예로 쓰기 좋다고 평한 것과 달리, 조혁시에선 역사의 변화로 지한파 정치인이자 김옥균과도 친분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정당 책임 내각제와 보통선거권을 주장했으며 이를 위해 하라 다카시와 손을 잡는다. 관동 대학살로 인해 주한 외교관인 사위가 곤란한 상황에 본인이 직접 한국인들에게 특사로 파견되며, 이선에게 국서를 건낸다.
- 카네코 켄타로
이토의 최측근이자 시어도어 루스벨트 동기로 원래 역사에서 루스벨트를 친일로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대미와교를 담당하며 한국이 러시아랑 밀약을 맺었을지 모르니 영미와 일본이 힘을 합쳐 한국을 응징해야한다고 주장하나 역사의 변화로 루스벨트는 그의 의견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이강이 미국으로 왔을 때 이강과 에밀리 브라운의 연애 문제로 한국 외교관들이 정신없다는 오판을 내린다.[128]러일전쟁에서는 미국으로가 자금지원을 요청하며 전쟁이 지지부진해지자 미국에게 중재를 부탁한다. 일본에 굴욕적인 포츠머스 조약이 맺어지자 일본 국민들에게 미국 스파이로 몰리게 된다.
- 오자키 유키오
사법대신, 도쿄시장, 헌정의 신이라고 불리는 일본내 의회정치 지도자로서 원래 역사[129]의 행보를 반영해 양심있고 주변국과의 평화를 지지하는 정치인. 14개조 요구 당시에도 국민당을 지지했다. 이누카이 츠요시와 함께 언급만 되다가 관동 대지진 당시 이누카이 츠요시와 동행하여 방한, 이선과 군의 문민통제와 문민정치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 카토 타카아키
외무대신으로 타나카 키이치와 함게 중국에게 14조 요구를 주장했다가 열강들과 마찰을 빚고 국내의 여러 정치인들에게도 비판받는다. 이중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도 있을 정도.[130] 본인은 한국이 반대하는 이유를 단지 이선과 원새개의 악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한국을 무시하고 넘어가고 원세개가 몰락하자 결국 쫒겨난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야당임에도 불구하고 파병을 지지한다.
- 우치다 코사이
관동 대지진 당시 외무대신으로 관동 대학살이 일어나자 주변국들의 항의에 땀을 흘리며 변명한다. 그리고 군경이 지금 폭동을 진압하고 있으니 걱정말라며 외교관을 다독이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실 군부는 학살을 조장하고 있었다. 일본군부와 문민정치인의 간극을 보여주는 인물.
- 요시자와 켄이치
이누카이 츠요시의 사위이자 외교관으로 관동 대지진 당시 주한일본대사로 근무 중이었다. 일본이 초토화되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이를 딱하게 여긴 이선이 20만 달러의 내탕금, 40만 엔을 주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하지만 이내 관동 대학살이 벌어지자 이선의 분노를 오롯이 뒤집어쓰게 된다. 이후 그는 이승만에게 찾아가서 애걸복걸하지만, 일본을 싫어하는 이승만 역시 그를 무시한다. 관동 사태의 결과로 부산에서 반일 폭동이 일어나자 이걸 트집 잡아 사건을 무마하려 하지만, 다시 한번 이승만에게 사전에 차단당한다. 결국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일본제국에서 외교관으로 지내는 것은 어렵다고 한탄한다.
5.4. 사상가
- 요시다 쇼인
일본의 사상가로 일본 유신지사들의 정신적 스승. 조슈 번의 정신적 수장이기도 해서 일본 제국주의의 기틀을 닦았다. 그러나 이토 히로부미는 이 당시에 심부름꾼이었는지라 쇼인의 말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러일전쟁이 대실패로 돌아가면서 일본이 러일전쟁과도 같은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건 요시다 쇼인이 헛소리해서라고 생각하며 쇼인이 지금 살아있었으면 아마 만국전도 보고 그냥 한소리일거라고 말한다. 작가 서술 역시 쇼인을 보고 방구석 제갈량이라고 깐다.
-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의 제국주의 사상가, 역사의 변화로 이선과 개화당이 조선을 크게 개혁하자 극찬을 하며 일본의 위인들인 유신삼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와 표트르 대제와 같다고 극찬, 일본이 개화의 선배로서 조선을 이끌어야 하며 수구적인 청나라를 멸망시키고 아시아를 계몽시켜야한다고 주장했다. 개화당 인사들은 좋아하지만 원래 역사의 행적을 아는 이선은 깔끔히 무시한다.
- 미야자키 도라조
아시아주의자로 국수주의자인 다른 일본아시아주의자랑 달리 진짜 진심으로 아시아해방의 가치를 믿는 사상가. 필리핀 독립전쟁이나 손문의 봉기참전, 송교인의 중국동맹회에 결성에 도움을 준다. 이회영을 아시아주의자로 알고 있으며 이회영을 통해 김옥균과 접촉, 송교인/김옥균과 아시아 해방을 위한 회담을 나눈다.
- 우치다 료헤이
일본 우익인사이자 민간 우익조직 흑룡회를 결성한인물, 일본중심의 아시아주의를 주장하며 아기날도와 쑨원을 지원하는 한편 만주에서 폭력사태를 일으킨다. 역사의 변화로 동학 농민군이 만주에서 승승장구하자 반청 아시아주의를 내세우며 참여한다. 의화단 전쟁이후 러시아에 죽은 만주족의 복수를 하자며 흑룡회를 만들고 군부의 지원을 받아 장작림을 지원한다.
- 기타 잇키
일본의 급진 혁명가. 원래 역사처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둘다 혐오하고 심지어 천황도 혐오하는 파천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러일전쟁 이후 혁명을 요구하는 서적을 썼다가 중국으로 망명.[131] 이후 송교인과 함께 신해혁명을 달성하고 중국이 군벌들의 지배를 받는 것을 보고 군부를 포섭하여 혁명을 일으키기로 한다. 이를 위해 히로히토 국혼문제를 하라내각의 간섭으로 문제 삼아 일본 정부를 흔드려고 시도했다.
급진적 사상과 저술로 아사히 헤이고가 이토 암살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훈풍을 타고 자신의 저작을 발표하여 좌우익에게 극심한 비판을 받지만 추종자 또한 많이 끌어모은다. 또한 기타가 저술한 저작은 한국의 박용만에게도 영향을 미쳐 박용만이 파시스트가 되는데 한몫한다. 관동 대지진이 터지자 비록 사상적으로는 대척점이지만 아나키즘이든 아시아주의든 중국인들과 연대해야하는데 중국인들을 학살한 일본군부에 크게 분노하여 오스키를 피난시키는데 도움을 준다.[132]
- 고토쿠 슈스이
일본 공산당의 당수로 평민신문의 편집장으로 처음 등장하여 육군 내각을 비판하는 것으로 등장하고 일찍히 러일전쟁을 반대하고 해외로 망명한 가타야마센과 함께 일본사회민주당 담당하는 인물이지만 일본정부의 제약으로 원외재야정당에 머문다. 가타야마는 코민테른의 노선을 추종하고, 고토쿠 슈스이는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아닌 아나코 생디칼리즘을 주장한다.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피해자를 돕고 있었지만 일본 군부가 혼란을 틈타 암살하려고 하자 몸을 피한다.
- 오스키 사카에
일본 아나키스트의 거물로 원래 역사에서 호치민,이동휘,여운형과 교류한 인물. 원래 역사에서는 관동 대지진 당시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죽고 말지만 이번에는 미리 기타 잇키의 집으로 몸을 피신하고 사토 히로시 중위의 호위가 있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 나쓰메 소세키
일본의 소설가로 영일 동맹 체결 당시에 일본의 열광 소식과 달리 영국유학중이라 영국의 반응은 별로인것을 예로 들어 "마치 가난한 사람이 부잣집과 인연을 맺어 기쁜 나머지, 종과 큰 북을 두드리면서 마을을 뛰어다니는 것"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5.5. 육군 인사
- 야마가타 아리토모
조슈 번벌과 군부의 핵심 인사로, 원래 역사처럼 대륙진출을 주장하여 이선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적이었다. 일단 오쓰 사건 때 니콜라이를 충동질해서 그를 잠시 실각하게 만들었고, 테러로 인해 이토가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고 잠시 정치에 영향을 못 미치는 동안 공작으로 그를 겨냥한 테러를 일으켜서 팔을 잃게 만든다. 그러나 러시아에 의해 10년 간 정계 은퇴를 강요당하고 러시아가 배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테러로 장애인이 되면서 러시아에 대한 증오로 이성을 잃고, 원래 역사보다 더 폭주해서 군부를 부추겨서 사이온지 내각을 붕괴하게 만들고 카츠라 내각을 조각한 뒤 러일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 역시 이선이 군사 기밀을 러시아에 유출해서 육전에서 참패하면서 완벽하게 몰락해 버렸다.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직후에 언급되는데 너무 몰락해버려서 이토와 달리 아직도 집에 박혀있다고 한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에 병사하여 유신 원훈이라고 국장으로 치러졌지만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 카츠라 타로
야마가타의 오른팔로, 군부가 사이온지 내각을 무너뜨린 후 총리가 되어서 러일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그러나 원래 역사와는 달리, 개전시기가 늦어졌고 대한제국의 존재로 인해 서구 열강이 전폭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전쟁이 되었다. 결정적으로 이선의 공작으로 육전에서 참패하면서 제국의회의 불신임결의를 맞고 사퇴하게 되며, 이후 후술된 1.26사건으로 암살당하고 태프트와 회견했지만 역사의 개변으로 밀약이 맺어지지 않았고 '우호적 중립'이란 애매한 포지션으로 꿀을 빠는 대한제국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하면서 불신을 드러내는데, 이때 대한제국이 러시아에 군사기밀을 유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도치 않게 진실을 꿰뚫어보았다.[133]
- 카와카미 소로쿠
일본의 참모차장으로 원래 역사에서 조선 궁권을 점령하고 동학농민군에 학살을 명령한 인물이라 이선 역시 역겹다고 평가한다. 청나라 군대를 보고온후 일본이 청나라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고 무쓰 무네미쓰와 함께 청일전쟁을 준비한다. 청국침공계획을 세우며 이를 위해 조선과 공수동맹을 맺는다. 원훈이자 정치인인 야마가타와는 달리 실무자라서 갈등을 겪고 있다고 나온다.
- 노기 마레스케
이선은 이사람 이름을 듣자마자 러일전쟁에서 대패한 인물임을 떠올린다. 여순 공방전 당시에 전세계 무관들 앞에서 일본군의 야마토 정신을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한다. 원래 역사처럼 여순에서 처참한 지휘로 수많은 전사자들을 내고 두 아들도 잃는데, 작중에서는 육전도 패해서 더 면목이 없어서인지 메이지 천황이 만류하기 전에 부인과 함께 자결해버린다.
- 테라우치 마사타케
원래 역사의 초대 조선총독으로, 여기서는 아직 야마가타의 부하이자 육군차관이다. 야마가타의 심복으로 전쟁과 강경책을 선동하고 내각을 압박한다. 야마가타가 부상을 입자 잠시 웅크리지만 야마가타가 복귀하 문민정부에 반기를 든다. 그후 러일전쟁을 시작하지만 육군의 대참패로 여론에 밀려 퇴역하게된다. 러일전쟁 패배로 정신이 나가버린 야마가타 아리토모를 따돌리고 육군의 우두머리가 되어 육군을 감축한다는 소식에 쿠테타를 준비했으나 사토 히로시에 의해 목에 치명상을 입고 수술도중 사망한다.
- 오야마 이와오
육군대신으로 오쓰 사건 당시에 야마가타와 같이 러시아에게 주범으로 몰려서 실각하나 사쓰마 파벌이었던지라 육군에 미련없이 은퇴한다. 이후 2부에서 복귀, 사쓰마 출신임에도 야마가타의 이야기를 듣고 문민정부에 반기를 든다. 러일전쟁 당시에는 총사령관으로 고타마와 함께 한국을 방문했으며 여순을 함락시키면 한국군도 참전준비가 끝나겠다는 말에 금방 여순을 함락시킬것이라고 호언장담한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며 일본이 파산직전에 몰리자 봉천에서 세키가하라 전투와 스당 전투를 재현하려고 했으나 참패하고 후퇴한다. 노기가 할복하자 같이 할복하려고 했으나 메이지가 말려 할복은 없었고 은퇴한다.
- 코다마 켄타로
일본군에 존경받는 원로, 대만총독이라 해군의 정책에 동의하며 야마가카와는 거리가 있다. 방화사건을 조작하여 복건과 아모이를 점령한다. 러일전쟁 직전에 육군 참모차장을 역임했다. 야마가타의 설득을 들어 문민정부에 반기를 드는 행동에 동참한다. 러일전쟁 당시에 병력부족을 실감하고 한국에 방문하여 변화한 한국군을 높게 평가하고 같이 러시아에 싸울것을 이선에게 부탁한다. 러일전쟁이 계속되면서 포탄이 부족해지자 일본군을 닦달하고 여순 공방전이 길어지자 대본영과 야마가타에게 닦달당해서 본인이 직접 여순으로 건너가서 노기의 지휘권을 양도받고 지휘한다. 러일전쟁 패배후 스트레스로 뇌출혈과 화병으로 사망했는데 이게 자살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육군장성들한테 자살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들어오고 노기는 자살한다.
- 하세가와 요시미치
일본의 근위사단장, 군부인사들의 문민정부 공격에 동참한다. 러일전쟁 이후 가쓰라와 데라우치와 함께 육군의 3두가 되어 자신이 이끌었던 도쿄 근위사단을 이용하여 군사쿠테다를 준비하나 사토의 의거로 가쓰라와 데라우치가 사망. 얼마 안가 한 장교가 쿠데타 계획이 글렀다고 생각하여 고발해버리는 바람에 쿠데타 핵심 주모자로 체포되어 반란죄로 종신형을 당하고 부하들도 중형을 받는다.
- 아키야마 요시후루
제1기병여단과 보병,포병,공병연대로 이루어진 "아키야마 지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의 우익으로 우회 기동하여 알렉세이 쿠로팟킨을 속이는데 성공한다. 그후에도 봉천회전 당시 러시아군 후방을 집요하게 공격하여 기만을 펼치고 봉천 회전에서 일본군이 패주하자 일본군을 살리기 위한 촤후의 도박으로 본인과 병사들에게 고량주와 보드카를 실컷 마신뒤 북쪽으로 광기의 돌격을 개시하여 러시아군의 후방을 휘젓고 알렉세이 쿠로팟킨을 마지막으로 속인후 후퇴한다.
- 아카시 모토지로
원래 역사에서 의병장 허위를 고문하여 죽게만든 인물, 유동열이 러시아에서 만난 인물로 주러 일본 공사관 무관으로 핀란드 독립운동조직, 공산주의 운동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접촉하는등 러시아에 혁명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다닌다. 이선은 원래 역사에서 이토가 말한 혼자 일본군 10개 사단의 일을 했다는 설을 반박하며 대부분 실패했고 실제로는 러시아에 작은 소란만 일으켰는데 일본이 아카시의 공을 과장했다고 깐다. 오히려 반러시아 혁명세력에게 이용당한것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 타나카 키이치
원래 역사처럼 흑룡회를 비밀리에 후원하며 재향군인회를 기반으로 군부의 정치적 입장이나 호전적인 여론을 주도하는 우익 인사. 유명한 다나카 상주문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다나카와 일본의 미래를 아는 이선이 직접 위서로 조작한 걸로 나온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으나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을 반대하는 다나카의 행동을 관찰한뒤 진실이라고 믿어버린다. 미국 언론이 다나카 상주문을 공개하자 본인은 부정하지만 이 일로 신망이 크게 떨어지고 문민정부가 군축을 위해 조작한게 아니냐며 의심한다.[134]
- 하나다 나카노스케
우치다 료헤이와 흑룡회를 일본 군부를 연결하는 인물로 만주내 군사정보조직의 총책임자, 러일전쟁 당시에는 다나카 기이치의 명을 받아 우치다 료헤이를 후원하며 만주에서 마적들을 선동하며 러시아와 싸울것을 선동한다.
- 사토 히로시
가상인물로 육군 중위. 어렸을 때 삼국간섭으로 열강들이 요동을 빼앗았다는 사실에 분개해 군인의 길을 걸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만주 전선에 참전했는데, 육군성의 탁상행정으로 근대전의 참혹함, 카자크 기병대의 학살로 인해 심각한 PTSD를 겪게 되고, 자신들을 이 지옥으로 밀어넣은 윗대가리들에게 반드시 죄를 묻겠다며 이를 갈던 참에 기타 잇키의 '국체론 및 순정사회주의'를 읽고 전적으로 공감하며 "일본을 정화하기 위해 유신이 필요하다"며 자신이 나서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러일전쟁의 승리 없는 승리로 전쟁을 일으킨 육군이 궁지에 몰리자 육군성의 데라우치와 가쓰라는 군사정변을 계획하고 여론몰이를 위해 현역 참전 용사들을 격려하는 행사를 마련할 때 초빙되었는데, 가쓰라가 격려한답시고 자기가 만주 전선에서 지휘했더라면 러시아 군을 격파했을거다라 말하자 극도로 분노해서 군도를 뽑아서 가쓰라의 목을 베고, 데라우치에게도 치명상을 입히고 자리에서 도망친 후 장교들과 추격전을 벌이다가 경찰에 자수한다.
이 사건은 1.26 사건이라 불리며 큰 파장을 일으키는데, 정변의 핵심 인물인 가쓰라는 즉사하고 수술 중 사망한 데라우치는 요시미치와 함께 정변의 핵심 인물이었던지라 겁이 난 장교가 쿠데타를 밀고하여 육군성은 완전히 박살나고 조슈 번벌도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이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다시 성립된 사이온지 내각에게도 쿠데타를 막아낸 은인인데다가, 전쟁영웅이고 여론의 호의로 사형이 아닌 징역 15년에 쳐해지게 된다. 이선이 조슈 번벌을 몰락시키기 위해 여러 공작을 펼쳤지만 화룡점정은 그가 예상치 못했던 이 사건이 되었다. 독자들은 옳게 된 사무라이라고 평가한다.[135]이후 한동안 감옥에 있다가 형기를 마치고 석방,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일본의 급진파들에게 우상이 된다. 본인은 일련종으로 종교인의 삶을 살려고 했으나 기타 잇키의 설득으로 그와 협력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에는 비록 승려가 된 몸이지만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애송이들이 애국한다고 중국인을 죽이고 다니자 다시 칼을 들고 오스기 사카에의 경호를 담당하며 오스기를 죽이려든 헌병을 단칼에 처리한다.
- 가나야 분지
가상의 인물로 1923년 당시 37살의 나이로 전쟁에서 전훈을 쌓은 군인집안출신에 청도전투에서 공을 세운 능력있는 군인. 부하들의 존경도 받는 여러모로 모범적인 군인이다. 막 신혼 생활의 달달한 생활과 아내의 임신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면서 아내가 아이를 유산하고 이후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중국인 폭동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부에 보고하지만 묵살당하고 상부에 명에 따라 중국인 학살에 오히려 동참해버린다. 이름과 나이, 결혼 생활중, 나고야의 친정이라는 묘사로 보아 만화 연기와 꿀의 츠치야 분지를 모티브로 한것 같다는 추측이 있다.
5.6. 해군 인사
- 카츠 카이슈
구막부해군의 건설자이자 해군대신.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으며 청일전쟁을 유일하게 반대한 인물이라 이선 역시 그를 좋게 평가한다. 청일전쟁 이후 가혹한 조약을 두고 중국이 복수하려들것이며 일본은 절대 4억 인구의 중국을 이길수 없다는 예언을 하고 향후 동양의 평화는 조선에게 달려있다는 말을 한다. 이선 역시 그가 원로로서 정치를 계속하여 동양평화를 지켜주길 바라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원로직을 맡기엔 너무 늙었다며 사양한다. 삼국 간섭에서도 이 기회에 일본인들이 대륙 진출의 꿈을 접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 사토 테츠타로
일본 해군측 인물로 이순신/평가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엄청난 이순신 추종자다. 바뀐 역사에서 그 기질은 더 심해졌는데 일본 육군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육군을 해군력으로 철저히 박살낸 이순신을 부각함으로서 육군을 견제하려고 한다. 러일전쟁에서 일본 육군이 대패하고 전멸의 위기에 처하자 마치 임진왜란 때 조선의 상황과 같다면서 이순신에 더욱 집착한다. 특히 서구의 명장 넬슨 제독보다 뛰어난 제독이라면서 서구인 러시아가 발트함대를 끌고 아시아를 침공하니 동양 해전의 신인 이순신보고 굽어살펴달라고 충렬사에 와서 휘하 장교들과 참배를 하고 이순신의 후손인 이규풍과 의형제를 맺는 등 기행을 선보인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사관 생도로 사토 데츠타로의 연설을 듣는 걸로 첫 등장.
- 카미무라 히코노조
연합함대 제2함대 사령관으로, 러시아 태평양 함대 분함대들이 통상 파괴전으로 동해를 휘젓고 다니면서 일본육군 수송선을 공격해 2천명을 수장시키자 러시아 스파이인 로탐으로 몰린다. 결국 10개의 순양함을 동원하여 분함대를 격침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일본 해군 수뇌부들과 함께 러시아 해군이 어디로 진입할것인지를 모색하는 것으로 재등장.
- 아키야마 사네유키
연합함대의 책사로 불리는 선임참모로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동생, 도고의 지지자지만 일본의 상황이 나빠지자 쓰시마가 아닌 홋카이도로 러시아 해군이 우회해올것으로 예상했다. 사토와 일본 해군의 전략을 담당했으며 러일전쟁 전후 영웅으로 대접받았다고 나온다.
- 카토 토모사부로
해군 제독으로 미국 10:일본 7 비율로 유지하려고 하지만 본인도 미국과의 건함 경쟁이 미친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미국의 압박과 이선의 개입으로 인해 원래 역사처럼 10:6의 해군력을 받아들인다. 이후 총리로 지명받을 뻔 했으나 원래 역사처럼 건강이 나빠서 총리직을 사양한다. 해군부와 정부 사이를 조율하지만 얼마 못가 사망하면서 입헌정우회 내각이 크게 흔들리게 된다.
- 야마모토 곤노효에
일본 해군 장성으로 러일 전쟁 승리후 전국적으로 영웅이 된 일본 해군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떠올랐으나 원래 역사처럼 지멘스 사건으로 실각한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후 해군 급진파에 의해서 총리로 추진되었으나 본인이 거부함으로서 무산되었다.
- 도고 헤이하치로
원래 역사보다 불리한 러일전쟁에서 희대의 대승을 거둬서 전일본의 최고 영웅이 되고 이후 일본이 해군력을 강화하여 일본 해군이 일본 육군보다 압도적인 예산과 입지를 가지는데 한몫한다.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노골적으로 반대했으나 다른 일본 군인과는 달리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꺼려서 일본 해군 쿠데타를 막는다.
6. 러시아 제국 → 프리아무리예 임시정부 → 전러시아 국민국가
6.1. 황실
- 알렉산드르 2세
러시아 제국의 12대 황제, 핀란드 대공국의 제4대 대공. 미래인인 이선은 그의 암살을 예측해서 막자, 그 공으로 그에게 러시아 국적을 주고 공작으로 봉한 후 연해주 전권위원으로 파견해서 이선이 개혁을 위한 무력과 자금, 명성을 쌓을 수 있게 해준다. 덕분에 그의 개혁정치는 계속될 수 있었으나, 근본적인 원인인 전제정에 대한 불만과 혁명세력을 발본색원하진 못했기 때문에 6년 뒤 다시 시도된 암살로 인해 사망한다.
-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생으로 러시아 해군 총사령관, 형을 구해준 이선에게 감사를 표하고 이선이 연해주 전권의원이 되었을 때 노벨가문에게 산 무기들을 가져갈수 있도록 배편을 마련해준다.
- 알렉산드르 3세
러시아 제국의 13대 황제, 핀란드 대공국의 제5대 대공. 원래 역사와 마찬가지로 반동정치를 폈다가 같은 시기에 죽었다. 부황이 6년 더 오래 살아서 제위가 짧아진 피해만 봤다.
- 마리아 표도로브나
알렉산드르 3세의 아내. 이선이 러시아에 처음갔을 때 등장. 이후 등장없다가 혁명 이후 손녀,손자들이 한국에 있다는 걸 알고 덴마크로 데려가려고 온다. 아시아 국가인 한국의 생활이 손녀와 손자에게 안맞을거라는 것과 이교도의 풍습에 물드는 걸 맘에 안들어하며 타티야나의 결혼에도 반대했지만 전통 러시아의 부활이라는 목적에 어쩔수 없이 타협한다. 그래도 이선이 손자와 손녀들을 위해 사재를 털어주자 감사를 표한다. 이진의 즉위식에도 참석하여 자신의 손자를 만난다.
- 니콜라이 2세개인적으로는 선량한 신사이자 훌륭한 부모였으나, 군주로서는 자격이 없을 정도로 무능하고 독선적이었다.그가 꿈꿨던 17세기 러시아였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전제군주가 되었을지 모르나, 20세기 격동의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러시아 제국의 14대 황제, 핀란드 대공국의 제6대 대공. 이선과 같은 나이에, 비슷한 시기에 즉위한데다가 할아버지를 구해주고 오쓰 사건에서 자신도 구해줬기 때문에 절친한 벗으로 여긴다. 원래 역사처럼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데다가 예의바른 신사이긴 하지만 암군.
미래인인 이선이 즉위하기 전 그의 즉위식에 사절로 파견되어서 그의 치세를 피로 시작하게 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게 조언했고, 그 이후에도 대한제국의 국익을 위해서 친서로 여러번 조언을 하는데다가,[136] 라스푸틴도 치워주고, 이선의 개입 덕분에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들이 좀 더 이어졌고 스톨리핀이 암살당하지 않고 어느 정도 개혁을 해서 자영농들을 육성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봤기 때문에 피의 일요일 이후에도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순창작이었으면 편의적인 전개 아니냐 싶을 정도이고 원래 역사의 무능함을 그대로 재현하다가 퇴위하게 된다.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과 어쩔수 없이 우호적 중립을 하게 됐다는 이선의 친서에 배신감과 실망감을 느꼈다가, 대외적으로 이선의 정부로 알려진 폴란드 여자 마르가리타[137] 때문 아니겠냐며 스스로 납득하는 부분이 백미.
원래 역사처럼 1차 세계대전에서 연패하자 혁명이 일어나서 퇴위하고 유폐되면서 이선의 조언들을 듣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이선은 그와 특별한 관계였던 니콜라이가 비참한 운명을 맞지 않게 하려고 도주를 가장한 망명을 혁명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묵인받고 망명을 권유하지만 자식들만 피신시키고 자신과 아내는 남아서 마지막 책임을 다 하겠다는 군주다운 모습을 보였고 서방의 러시아와 사회주의에 대한 공포에 의해 적백내전이 발생하면서 소비에트의 급진화 파벌에 의한 재판과 처형에 대한 주장이 드세지고 있지만, 레닌을 비롯한 지도부가 그를 처형하면 순교자로서 백군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고, 유사시엔 서방과 협상 카드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막았다.
대한군과 혁명 러시아군 사이의 충돌 이후 이르쿠츠크 에서 예카테린부르크로 이송되었고, 예카테린부르크도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사회혁명당 좌파가 독단적으로 차르 처형을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공화국 정부의 부부를 모스크바로 옮기라는 지시에 일리치 이바노프라는 경비 지휘관이 자신을 백군 스파이라고 속이고 니콜라이 부부를 인근 숲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그는 2부 초반 피의 일요일에 아버지를 잃고 차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공장 노동자의 아들이었고, 숲으로 탈출한 차르가 자식들과 재회 이야기를 하자 본색을 드러내서 그의 처형을 선고한다. 이에 니콜라이는 자신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며 마지막으로 아내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한 후 처형당했다.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니콜라이 2세의 황후. 원래 역사대로 금슬이 좋은 부부지만, 전제정을 신봉하는 데다가 남편을 쥐고 흔들어서, 이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제국의 멸망에 일조하고 폐위된다. 하필이면 독일인이어서 적국 출신 황후라는 점[138] 그레고리 라스푸틴이 없어도 아들에게 강력한 차르의 권력을 물려줘야한다는 강박감에 온갖 실정을 저질러서 러시아 황실이 대한제국을 제외하고는 자국민과 연합국에게도 미움받는 원인이 된다. 작중 러시아 장군들의 말을 빌리자면 황후는 너무나 충실한 러시아인이지만 17세기 러시아인이라고. 망명을 거부한 남편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다. 원래 니콜라이의 처형인은 그녀도 같이 죽일 생각은 없었지만, 눈 앞에서 남편의 죽음을 목격한 그녀가 눈이 돌아가서 처형인에게 달려들었다가 우발적인 발포로 살해당했다. - 올가
니콜라이 2세의 장녀이자 현 대공녀. 대한제국으로 망명 온 후에는 살아남은 황족의 사실상의 가장 역할을 하고 있다. 적백내전 때는 황실 복위를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시민'으로서 백군의 전러시아 임시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간호사로 종군했다. 이진과 타티아나의 국혼 제안을 고심 끝에 수락하고, 본인도 알렉세이의 사후를 대비해서 5촌인 드미트리 대공과 혼사를 고려 중이다. 대공과 약혼한뒤에는 마음을 바꿔 연해주에서 제정복고 운동을 하고 있다. 드미트리와 결혼했으며 이진 즉위식에는 임신한 상태로 등장한다. 황제 자녀중에 제정복고에 가장 진심인데 단순히 차르 자리가 탐나서가 아니라 부모의 복수를 갚기위한 성격이 크다. - 타티야나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의 미녀로, 자신보다는 가족을 더 생각하는 책임감 있는 태도가 이진과 비슷해서 이진이 호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올가가 적백내전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을 때는 언니 대신 가족을 대표해서 소비에트 정부와 협상 반대를 청원하기도 한다. 이진과 국혼 제안을 수락하고, 무도회에서 이진의 춤 신청을 받으면서 서로 부족한 것을 채워 나가자고 다짐하게 된다. 대한제국의 첫 외국인 황태자비이다 보니 서툴지만 이서아와 이선의 도움으로 빠르게 조선 예법을 익혀나가며 결혼 후 얼마 안 돼서 이진의 아이를 가진다. 동양왕실에 적응하기 힘들 줄 알았으나 이선 때문에 서구화가 잘 된 대한황실에 금방 적응한다. 그 당시 러시아인답게 미신을 믿어서 혈우병 있는 아이를 출산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선이 멀쩡하다고 예언(?)[139]하자 "차르의 예언자"인 이선의 말을 듣고 안심한다. 같은 서양인인 이서아, 마르가리타와 그녀의 가족과 친하게 지내고 아버지 니콜라이 대신에 이선을 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르고 이후 첫 딸인 이나를 낳는다. 딸을 낳아서 자신의 어머니처럼 압박을 받을줄 알았으나 이런 면에서는 러시아보다 진보적인 이선과 이진 덕에 문제없이 넘어간다. 1925년에는 이진과 함께 못 간 신혼여행 대신에 세계여행을 가며 거기서 임신, 건강한 아들을 낳는다. 황태자비가 되면서 한국식 이름도 가지게 되었는데 러시아이름을 따서 노아나라고 불린다. - 마리야
활발한 성격으로, 대한으로 망명 후 가족들을 돌봐준 이안을 짝사랑하게 된다. 루이 마운트배튼의 짝사랑을 받고있지만 본인은 좀 둔해서 눈치를 못채고 있다. 원래 역사처럼 루이 마운트배튼의 짝사랑을 받고 본인도 그 진심을 알게되자 그와 결혼한다. 이선이 자기 사재를 털어서 결혼 자금을 대주자 크게 고마워한다.[140] 이 사실은 영국에도 알려져서 한국의 황제가 부자라는 소문이 영국에 돌게 된다. 영국에 거주하면서 영국에 망명한 러시아 귀족과 피난민들을 이선에게 받은 결혼자금으로 도우며 정통 러시아를 살리기 위해 아무르로 이주할것을 망명자들에게 홍보한다.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가족을 러시아인의 자격으로 도우며 필립 마운트배튼을 보고 알렉세이를 떠올려 후견인이 되고 비키라는 딸을 낳았다. - 아나스타시야
이안을 짝사랑하며, 언니인 마리야에게 밀린 것 같아서 처음엔 눈물을 흘리지만 이기겠다면서 경쟁심을 불태운다.장난기 많은 성격탓인지 한국 문화를 신기해하는 반응이 많다. 누나인 마리야보다 눈치가 좋아서 루이 마운트배튼이 마리야를 짝사랑한다는 걸 알고는 본인이 이안하고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다. 마리아의 결혼식을 핑계삼아 영국까지 이안을 따라온다. 영국에서는 이안을 따라 다니면서 경쟁자가 될수 있는 영국 귀족 여식들과 부르주아 영애들을 견제하고 다닌다. - 알렉세이
러시아 제국의 전 황태자이자 현 대공. 실제 인물이 그렇듯이 혈우병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서 오래 살지 못 할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황태자로서 자신을 구출한 이안에게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을 수여했다. 작중 조선인들에게는 나라 망한 황태자에 어린나이, 건강도 나쁨에도 러시아를 다시 일으키려고 하는 점이 감명 깊어 인기가 많다고 한다. 본인은 이안의 동생인 이라 공주를 사랑하지만 혈우병과 몰락해버린 제국의 황태자라는 본인 처지에 슬픔을 느끼며 짝사랑만 하고 있다. 운게른이 자신을 몽골에서 차르로 옹립하자 어이없어한다. 건강은 계속 나빠져 24번째 생일 때쯤 되자 아예 스스로 걸을 수도 없어서 냉소적으로 성격이 변했다. 신에게 볼세비키를 지지하냐고 대놓고 화내거나 황제 지지자들에게 자기는 차르 자리에 관심없으니 키릴 대공이나 옹립하라고 화를 낸다. 하지만 계속해 전통 러시아의 후계를 자처하는 전러시아 국민국가의 상징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이후 1936년 7월 15일, 전러시아 국민국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성 블라디미르 축일 기념 행사 도중 신원미상의 세력이 일으킨 폭탄 테러에 의해 중상을 입고 혈우병으로 인해 과다 출혈로 사망한다. 향년 31세.
- 미하일 2세
러시아 제국의 15대 황제, 핀란드 대공국의 제7대 대공. 왕의 동생이자 황실에 환영받지 못한 결혼을 한것 때문에 권력에서 밀려난 인물. 이 때문에 이영과는 동병상련의 처리를 느낀다.[141] 이선에게 차르를 위해 조언을 해줄것을 부탁한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가 쫒겨나자 본인이 원하지 않았음에도 차르로 추대된다. 혁명 후 입헌군주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거친 식사를 하며 황실을 존속시키려고 노력하나,[142] 총선거에서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노동당이 압승을 거두면서 제정이 존속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퇴위,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핀란드가 독립하면서 핀란드 대공국의 마지막 대공이 되었다. 원래 소비에트에서 책임을 물으려던 니콜라이가 병사의 독단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대신 책임을 물게 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가석방, 가석방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143]
- 예카테리나 유리예프스카야
알렉산드르 2세의 막내딸이자 사생아. 차르 니콜라이 2세는는 친구 이선과 결혼시키고 싶어했고 그녀 역시 아버지를 구해준 이선을 사랑했다. 이선 역시 그녀의 아름다운 마음에 가슴이 혹했지만 결혼하면 왕위를 이어받을수가 없었기에 결국 받아들이지 못했다. 대신 이선은 이강을 결혼시키려했지만 유리예프스카야도 이상에 관심없고 이강은 미국 여배우를 사랑했기 때문에 역시 무산된다. 니콜라이 2세 역시 러시아 황실이 정교회가 아닌 이교도 황실에 결혼 보낼 수 없다고 반대한 덕에 그냥 헤프닝으로 끝난다.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러시아의 해군제독, 니콜라이 2세 차르의 매제, 국빈방문 할 때 등장했으며 대한제국의 성립당시에도 파견된다. 베조브라조프, 마튜닌과 함께 공격적인 정책을 펼치는 인물로 절영도 조차를 요구했으며 극동 항로 정책을 펼쳐서 남하를 시작한다. 마튜닌의 남만주 자치령을 늘려서 한국과 중국을 싸움 붙이고 러시아에 종속되게 하자는 주장에 찬성한다.
- 키릴 블라디미로비치 대공
러시아 황실의 일원으로 원래 역사처럼 러일전쟁에서 해군으로 참전 했다가 눈앞에서 포탄이 터져 함장과 수많은이들이 죽는 것을 보고 PTSD를 겪는다. 그후 일본군에 포로로 잡힐뻔 하나 대한제국의 중재로 탈출, 대한제국에 호감을 갖게 된다. 니콜라이 2세와 아버지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이선의 조언을 전달하나 묵살당한다. 역사대로 영국 공주 빅토리아 멜리타와 결혼하는 바람에 차르와 갈등이 생긴다. 러시아의 미래에 관심이 많아서 쿠데타에 참여하거나 쿠데타 실패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서 소비에트 차르로 불린 원래 역사처럼 붉은 리본을 달고 혁명에 찬성하나 적백내전이 터지자 결국 피신하게 된다. 현재 제정복고가 이뤄진다면 계승 서열상 알릭세이 다음으로 가깝지만 소비에트와 친하게 지낸 전적이 있어 다른 백계 귀족들에게 지지를 못받고 있다. 아무르정부에서도 여전히 황제가 되려고 하지만 공산주의 협력전과때문에 거의 지지를 못받고있다. 그나마 냉소적으로 변한 알렉세이가 지지해주는편.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차르의 숙부. 키릴대공의 아버지. 이선과 최소한의 친분이 있는 니콜리아 2세와 달리 러일전쟁에서 일본편을 든 이선을 배신자라고 여긴다. 아들 키릴을 구해줘도 배신자라고 주장.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를 죽인 러시아 국민들을 혐오하여 역사대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일으킨다. 키릴이 빅토리아 멜리타랑 결혼해서 황실에 외면을 받자 아들을 복권시키려고 노력한다.
- 니콜라이 대공
니콜라이 2세의 사촌으로 구분을 위해 니콜라이 대공으로 불린다. 러시아군의 총사령관자리를 맡고 있지만 자신의 자리를 노릴것을 두려워한 차르에게 쫒겨나 캅카스 방면 사령관에 취임한다. 원래 역사에서 백군에게 잠시나마 차르자리를 인정 받았던 인물로 1차 세계대전에서 러시아 제국 수구파 군인들이 니콜라이의 무능함에 질려서 툭하면 차르로 옹립하려고 하나[144] 잦은 쿠데타에 실증난 국민들이 오히려 소련을 만들게 되면서 적백내전이 일어난다. 본인의 군사적 재능이나 정치적 안목은 사촌인 니콜라이 2세보다 훌륭하고 러시아를 개혁할 필요성과 인민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지각은 있지만 수구파, 극우파와 연결되어 있어서 진보적 인사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드미트리 대공의 아버지로 유수포프가랑 결혼 이야기가 있었으나 직계황족은 귀천상혼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취소되었다. 그후 한참 뒤 니콜라이가 퇴임할 때 다시 등장하고 황후에게 입헌군주제를 요청하는 칙령을 내민다.
-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
러시아의 대공으로 통칭 드미트리 대공. 펠릭스와는 절친한 친구사이이며[145] 올가와는 5촌관계. 원래 역사에서는 라스푸틴을 암살하는데 한몫한 인물. 키릴대공과 펠릭스와 함께 차르를 끌어내리려고 했으나 혁명이 일어나서 무산된다. 올가를 도와 같이 러시아 내전에 참여하며 그녀를 돕는다. 러시아 제정복고를 위해 노력하는 인사로서 올가를 아끼고 있으며 올가 또한 그와 결혼하여 러시아 제정의 복고를 노리고 있다.
6.2. 귀족
-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유수포프 공작
러시아 제일의 갑부로 펠릭스 유수포프의 할아버지, 유수포프가가 타타르인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아시아인들에게도 인종차별 없이 호의적인 인물이다. 이선이 러시아 사교계의 총아로 떠오르자 집으로 초대하고 그가 왕자라는 사실을 알아내자 동양왕자를 사위로 두면 좋을 것 같다는 이유로 차녀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유수포바와 결혼 시키려고 했다. 이선이 조선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러시아에 남은 평행세계 외전에서는 딸의 죽음으로 상심해서 3년뒤 죽었다고 한다.
- 지나이다 니콜라예브나 유수포바
유수포프가문의 후계자이자 펠릭스 유수포프의 엄마, 러시아 최고의 신부감으로 불가리아 대공 알렉산더 폰 바텐베르크[146] 결혼이 예정돼있었지만 사랑에 따라 러시아 근위 기병 장교랑 결혼한다. 이 때문에 니콜라이 보리소비치 대공은 타티야나를 이선과 결혼시키려 한다. 이선이 조선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러시아에 남은 평행세계 외전에서는 죽은 여동생 때문에 결혼을 망설이는[147] 이선에게 새 사랑을 찾을 것을 권한다.
-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유수포바
실존인물로 역사에 별로 남은게 없어 이선도 잘모르는 인물이다. 상당한 미인이며 아버지의 말에 따라 이선과 혼담제의가 있었고 이선 역시 마음에 들었지만 조선의 국왕이 되어야하는 이선은 거절한다. 이후 한참 뒤에 타티야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가 이진과 결혼할 때 올가를 설득하려는 펠릭스의 이름에서 언급된다. 이선이 조선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러시아에 남은 평행세계 외전에서는 이선과 약혼했으나 1888년에 유행한 전염병으로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사후 언니인 지나이다가 그녀의 모습을 담은 천사 조각상을 만들어서 이선에게 보여준다.
- 펠릭스 유수포프
러시아의 망명 귀족으로 원래 역사에서 그리고리 라스푸틴을 암살한 인물.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에 저항했으며 이후 한국에 와서 올가를 보조한다. 올가는 그가 드미트리 대공과 함께 차르를 끌어내리려는 쿠데타를 저지른것을 알지만 이미 지난일이라서 용서한다. 타티야나의 결혼을 지지하는 대표적 인사로 그이유는 유수포프 가문의 선조가 동양인인 타타르인이고[148], 과거 유수포프 가문과 알렉산드르 황제를 구한 이선간의 혼례 제의가 있을정도로 친했으며,[149] 무엇보다도 이선이 러시아에서 힘을 기르고 대한제국을 만들었듯. 러시아인들도 대한제국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러시아를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한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김보현의 이야기를 듣고 손자 김성주에게 기독교인의 축복을 내려준다. 인맥이 좋은건지 영국 대사관의 친구를 통해 에드워드와 한국 사이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인물이다.
- 보리스 사빈코프
창백한 말의 저자이자 귀족 출신 좌익 테러리스트 혁명가, 그후 좌익에 반대하는 우익 혁명가가 된 다사다난한 인물. 위험인물로 찍혀서 초반에는 황태후 언니의 남편 세르게이 대공과 플레베 내무장관을 살해한 전설적인 테러리스트[150]로 묘사되었지만 러시아 공화국이 설립되면서 케렌스키와 협력하고 소비에트와도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소비에트가 만들어지면서 노선차이로 권력에서 실각하고 백군편에서는 테러리스트였던 과거는 어디가고 숙적이었던 스톨리핀과도 협력하고[151] 스톨리핀이 암살당하자 공안 책임자가되어서 장삼의 이완용 암살을 소련에게 뒤집어 씌우는 공작을 펼친다. 백군에 합류했지만 아무래도 황제의 친척을 죽인적이 있어서 그런지 러시아 왕당파들에게는 배척을 받고 본인도 러시아 황제나 계승권자들이 나약하다고 생각해서 싫어한다.[152]
극동 공화국이 분단된 이후로는 트란스아무르와 연해주에서 자신만의 정치체제인 '보즈드'를 구상하기도 한다. 열악한 조건에서 소련과 싸우기 위해 연해주 인민은 일당백[153]을 감당해야하며 그걸 위해서는 대한제국의 황제인 이선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154] 보즈드, 즉 수령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러모로 대체역사물인 카이저라이히가 생각나는 인물.
6.3. 관료
- 니콜라이 기르스
러시아 외무장관으로 매우 뛰어난 외교관이자 대독 유화파, 온건파, 청나라와의 관계 때문에 이선을 꺼리며 조심스럽게 대한다. 스웨덴 출신으로 이선이 조선으로 귀환할 때 이선이 사적 감정으로 연해주에서 사고를 치치않도록 여러조치를 취한다. 천진 주재 영사 카를 베베르를 조선에 전권 공사로 보낸다. 조선중립화론 논쟁 당시 독일이 중립을 생각했다고 말하자 독일과 화해할 기회라고 생각하여 조선의 중립을 지지한다.
- 카를 베베르
이선이 천친에 갔을 때 처음 등장, 이선은 러시아와의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베베르가 조선 주재공사중 가장 친한파였기에 카를 베베르와 관계를 처음부터 신경 쓴다. 베베르 역시 이선을 이용하면 조선과 관계를 맺을수 있다고 생각하여 호의적으로 대한다. 조선과의 수교조약을 체결할 러시아 담당자로 임명되어 초대 주 조선 공사가 된다. 10년간 초대 조선 공사로 영국과 일본을 견제해주고 러시아의 이익과 조선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며, 이선은 그 공로로 그가 귀국할 때 대훈위 이화훈장을 수여한다.
- 이오시프 바라노프
연해주 군정장관 겸 육군 소장으로 마튜닌과 함께 고려인들이 연해주 정착에 꼭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물, 이선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려인대대를 창설하고 토지를 분배한다. 이선이 조선과 접촉하자 주의를 주지만 오히려 이선이 전권위원직을 내려놓고 떠나자 당황한다.
- 시페이에르
베베르 뒤를 이어 취임한 공사로 대외 강경파라 러시아가 대련과 여순을 조차하자 블라디보스토크와 연결하기 위한 절영도 조차요구를 줄기차게 주장한다. 이선은 처음에는 여러이유를 들어 반대했지만 대원군 상복이 끝난후에도 자꾸 요구하자 이선은 독립협회를 이용하기로 결정, 만민공동회의 시위에 각국이 주목하자 결국 절영도조차를 포기하며 러시아 정부는 이사건을 시페이에르의 책임으로 돌리고 마튜닌을 후임공사로 임명한다.
- 니콜라이 마튜닌
남우수리 국경전권위원으로 친한파, 원래 역사에서 주한 러시아 공사를 지냈을뿐만 아니라 고려인에 우호적인 인물로 연해주에서 이선과 함께 고려인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고려인 대대를 창설하는대 도움을 준다. 이선이 조선으로 떠나자 후임으로 임명된다. 역사대로 러시아 공사로 임명된다. 동학교도의 만인대 사건 당시 이선이 과거 고려인 부대로 한짓을 재현하는게 아닌가 의심한다. 이선에게 만인대가 의화단 운동처럼 광신도로 번지기전에 개입할것을 요구한다. 러시아로 돌아가서는 한국을 러시아의 체스말로 만들 계획을 세운다.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베조브라조프
니콜라이 2세가 비테를 몰아내고 들인 국무상서로 마튜닌,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해군제독, 유수포프 공작과 함께 공격적인 극동정책을 추진하려는 인물, 역사를 아는 이선은 베조브라조프를 간신이라고 주장하고 비테를 충신이라고 말하며 비테를 중히 쓸것을 건의했으나 니콜라이는 이선에 대한 질투로 무시한다. 그리고 비테를 경질하면서 베조브라조프를 띄워주는가 싶더니 차르는 그도 경질해버린다. 사실 차르가 베조브라조프를 중용한 목적은 단지 비테를 밀어내고 자신이 절대권력을 차지하는 거 하나 때문이었다.
- 파블로프
장지연의 신문사설에 항의하는 것으로 첫 등장, 이선 스파이 사건때 다시 등장하여 이선의 농담을 듣고 여유있게 받아치며 영국을 압박한다.[155] 러일전쟁 당시에는 이선과 이토가 합의를 처음에는 러시아와의 화해중재로 생각했다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본국에 전보를 보내고 러일전쟁 당시에는 한국에 남아 한국과의 외교를 조율하며 이선과 자치령문제, 예의바른 청년들문제를 협상하다 키릴대공의 안전을 보장해줄것을 요청한다.
- 세르게이 비테
러시아의 재무장관[156]으로 기울어져가는 러시아 제국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러시아의 재정적 안정을 도모하고 만주를 평화적으로 진출하려고 하나 영일 동맹의 훼방으로 평화적 진출 방안이 실패하고 차르에게 해임당한다. 이후 러일전쟁에서 전권대사로 활약에 비록 사할린을 넘겨주지만 배상금을 주지않는 외교 승리를 거둔다. 러일전쟁으로 발생한 1906년 혁명을 정치개혁으로 두마의 권력을 늘려 막아내지만 신하가 자기 위에 있는 꼴을 못 보는 차르가 다시 해임하자 차르에게 악담을 퍼붇고 스톨리핀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 표트르 스톨리핀
피의 일요일 이후 임명된 국무총리로, 원래 역사와 같이 유능하지만 사방이 적이라 변덕스러운 차르의 총애 빼고는 기댈 곳이 없는 능력있는 관료. '20년의 평화'를 주장하며 자영농과 산업을 육성하고 개혁정책을 펼친다. 원래 역사와 달리 암살당하진 않았지만 차르의 총애를 잃어서 극동 총독으로 좌천되는데, 여기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이후 러시아 내전에서 극동을 백군의 근거지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러시아 임시정부 시절에는 서로 죽이려고 안간힘을 쓴 자신의 숙적이었던 테러리스트 사빈코프와도 의견일치를 보여 화해한다.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암살당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미국에 망명을 갔다 니콜라이 2세가 처형당한 후 러시아로 돌아오는데, 이때 한국의 지원을 받아서 모든 백군 정치세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위업을 세운다. 적백내전이 격화되면서 후방이자 시베리아와 만주를 잇는 요충지인 하얼빈과 동청철도를 청이 다시 인수해서 사실상 대한이 관리하려고 하자, 협상을 위해서 하얼빈에 왔지만 이완용과 함께 아시아주의자에게 암살당했다.
- 파벨 밀류코프
입헌 민주당 당수로 "우매함인가, 아니면 반역인가”라는 말로 황후가 이끄는 답없는 러시아 정부를 비판한다. 본인은 군주제 지지자였지만 졸지에 반정부 인사가 된다. 영국에 피난하여 쿠데타 계획을 세우고 미하일을 차르로 옹립한다. 이후 외무장관에 취임. 연합국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러시아에게 할양하는 조건으로 전쟁수행을 계속할것을 당부하지만[157] 이는 좌익의 반발을 일으킨다. 우익에게는 케렌스키와 같이 유약하다고 까이면서 등장이 없다가 3부에서 백군 연합체인 전러시아 임시정부에서 외무장관자리에 있다고 언급된다.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차르와 황후를 통렬하게 비난하는 장면으로 첫 등장. 이후 러시아 공화국 법무장관이 되어 러시아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다. 이후 동맹국과의 평화가 불가능하다는 것과 러시아 내부 병폐가 너무 심각해 단기간에 해결할 수 없음을 알고 전쟁을 지속하면서 프랑스 혁명처럼 군사적 승리를 통해 공화국을 안정시키려 하면서 공화국을 위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사빈코프의 구상에 동의한다. 하지만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고 소비에트를 누르려는 우익들의 군사 쿠데타도 제대로 못 막아서 결국 실각하고 만다.
6.4. 군부
- 파벨 미셴코
의화단 전쟁부터 활약한 러시아의 기병장군. 잉커우에서 카자크를 이끌며 의화단을 공격한다. 러일전쟁당시에 유능한 장군이라 한국군이 버리고간 요충지를 모두 점령하자고 하지만 상관인 표도르 켈러의 반대로 실패한다. 러일전쟁에서 카자크와 정규기병을 섞은 '"미셴코 부대"로 활약하나 부상당해서 부대 지휘권을 브루실로프에게 넘겨준다.
- 표도르 켈러
크로파티킨과 가까운 러시아 장군으로 러시아내에세는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막상 전쟁에서는 소극적이고 이해안가는 선택을 반복하며 역사대로 마천령전투에서 부상당하면서 후퇴명령을 내리고 얼마안가 사망하고 도망가면서 가지고 간 야포와 부하 상당수를 잃어버린다.
-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크로파트킨
러일전쟁의 총사령관. 전반적으로 답이 없는 러시아 제국 고급 장교들 중엔 그나마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나, 참모 출신으로 소심함이 지나쳐서 전쟁을 말아먹을 뻔한다. 이선은 러일전쟁이 일본 육군이 멸망하는 무승부로 끝나길 바라며 러시아가 최대한 타격을 입히면서 봉천까지 후퇴할 수 있게 판을 짜놨는데, 그 기회를 다 놓쳤고 회전에서도 그럴 뻔했지만 원래 역사와 달리 명장 브루실로프가 만주로 오고, 국내 정치로 위기에 몰린 차르의 압박으로 제대로 된 공세로 일본군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나마도 아키야마 요시후루의 기만 작전에 넘어가서 더 큰 피해를 입힐 기회도 놓쳤다. 그래도 전쟁영웅이 되었다. 러일 전쟁 이후 대전쟁에서 북부전선을 책임지나 자신이 만주군 사령관일 때 부하이자 일개 기병사단장에 불과한 브루실로프가 서부전선군자리에 올라서 자신과 동급에 서자 불쾌하다고 생각하고 브루실로프의 조언을 무시하고 북부전선에 병력을 모았으나 사실 북부전선 공세는 독일군에 기만작전이었고 결국 남부전선이 독일군에게 무참히 박살나는 결과를 불러온다.
-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브론스키
아나스타샤 안드레예브나 브론스카야의 아버지이자 러시아의 유능한 장군. 하필이면 이름은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안드레이 볼콘스키 공작, 성씨가 안나 카레리나에 나오는 장군과 똑같아서 그것이 콤플렉스인 인물. 러시아 장군치고는 유능한 인물로 황족이라지만 동양인 사위를 둘 정도로 진보적인 인물이다.[158] 러일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서 맹활약하지만 공화국 수립이후 공화국 정부와 갈등끝에 하계공세를 실패했다는 이유로 남서전선군에 물러난다. 적백내전에서는 백군 편을 든다. 사위가 동양 황실의 왕자라서 그런지 러시아 인사들이 한국 황제와 연락을 넣고 싶을 때 브론스키 장군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많다. 친한 인사이자 러시아 내부 사정을 살필때 자주 등장한다.
- 알렉산드르 포크
인맥으로 진급한 똥별로 헌병대로서 정치범 탄압과 황실에 대한 아첨으로 장군 자리에 올랐다. 의화단과 전쟁에는 폭도나 다름 없는 의화단으로 활약하나 러일전쟁에서는 무능한 지휘로 일본군의 공격을 허용하여 원래 역사보다 개전이 1년 미뤄지면서 요새화가 완료된 금주와 남산의 요충지를 순식간에 상실해버린다.
- 로만 콘드라첸코 & 콘스탄틴 스미르노프
원래 역사에서도 여순 공방전에서 활약한 이들로 러일전쟁 개전이 1년 늦춰지는 바람에 요새가 더 철저하게 만들어져서 10만명이나 되는 일본군을 도륙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콘드라첸코는 전방 토치카에서 지휘하다가 사망하고 남은 병사들도 채소류와 과일이 떨어지서 괴혈병으로 군대가 고통 받으면서 결국 항복하게된다. 이선은 이후 니콜라이 2세를 만나서 이들이 패배한 이유인 괴혈병이 요새의 중국인 노동자들처럼 콩나물 재배로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159]
- 니콜라이 이바노프
1차 세계대전 당시에 남서전선군 사령관. 러시아보다 처참한 수준의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며 낙관적으로 전쟁을 지휘했으나 독일군이 공세하자 연패하고 결국 심리적압박감과 우울증으로 사임하고 그 자리에 알렉세이 브루실로프가 맡는다. 페트로그라드 군관구사령관으로 니콜라이를 쫒아내려는 펠릭스 유수포프의 쿠데타 계획에 참여하나 빵을 달라는 시민들의 시위를 유혈 진압하는 바람에 오히려 혁명이 일어난다. 결국 군대를 물리고 철수하는 게 마지막 등장.
- 미하일 알렉세예프
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군의 참모총장으로 군사적 능력이 전무한 니콜라이 2세를 스타프카에서 보좌하는 역할을 맡는다. 적백내전에서 그나마 합리적인 지휘관으로 백군편에 싸우나 심장마비로 내전 중에 사망한다.
- 라브르 코르닐로프
카자흐스탄 출신[160] 북서전선군 사령관으로 시베리아 카자크 출신, 독일군이 리가 점령 이후 동부지역 공세를 멈추자 얼떨결에 영웅으로 떠올랐다. 정치에 무지하지만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세력이 선거에 승리하자 쿠데타 지도자로 추대, 동참하고 보리스 사빈코프와도 협력한다. 그러나 반란은 보리스 사빈코프가 중간에 계획을 불어버리고 파견나온 한국군 역시 러시아 정부를 지지하면서 오히려 우익의 파멸을 가져온다.
적백내전에선 남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그후 바로 모스크바로 진군한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우지만 백군에게 패배한다. 카자흐스탄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일으키지만 오히려 차르를 구출할까봐 두려워한 사회혁명당 출신 병사가 니콜라이를 암살해버린다. 러시아 임시정부 사령관으로 취임하지만 돈바스전투에서 포탄에 사망한다.
- 안톤 데니킨
코크닐로프와 함께 쿠데타에 동참했다가 체포당하고 내전때 코르닐로프와 같이 싸운다. 대러시아주의라서 협력가능한 대상인 우크라이나 독립군도 보이는 족족 죽여버린지라 결국 적군에 패배하고 코르닐로프 사후에 자리를 이어받지만 결국 패배, 노보로시스크에서 죽기 직전에 표트르 브란겔 제독이 구해주러와서 목숨을 건지고 사령관직에서 사퇴한다.
- 표트르 최
최재형의 아들인 표트르 최(최운학)와는 다른 인물로 풀네임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최.[161] 최재형의 대자로 최재형을 대부로 모신다. 계급은 중위였으나 적백내전때 중령으로 고속 승진한다.[162] 소수민족이라 귀족적인 다른 러시아 장교와 달리 병사들과 동등한 위치에 서서 평등하게 대우해주기에 부하들의 신뢰가 높다. 1차 대전에서는 한국 공군과의 연락장교를 맡아 유왈보와 친분을 쌓기도 한다. 소비에트가 내전에서 승리할 기세를 보이자 김광서 참령을 따라 극동에서 투쟁을 이어가기로 한다.
- 김인수
빅토르 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고려인. 백군의 편에선 대표적인 고려인으로 러일전쟁 당시 브론스키 밑에서 한국군에 대한 공작을 펼친다. 1차 대전에서도 활약하고 적백내전에서도 시베리아 임시정부의 고려인 대대를 만들어 활약하나 자신이 젊은 나이에도 장교들이 죽어나가서 쾌속 승진하는 걸 보고 백군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연합국이 발을 빼려고 하자 자신의 고려인 부하들을 한국 배편에 실어 연해주로 보낸다. 부하로는 표트르 최가 있다. 이후 내전에서 패배하자 표트르 브란겔 장군과 함께 연해주로 피신한다.
- 그리고리 세묘노프
러시아 백군 지도자중 한사람으로 수꼴 왕당파,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와 수꼴왕당파를 대표하며 러시아 백군과 미친듯이 싸운다. 대한제국에 지원을 요청하나 이들의 이름을 본 이선이 바로 거절, 역사대로 몽골로 향하고 다른세력의 통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싸운다.러시아와 부랴티야, 내몽골과 외몽골, 탄누투바와 티베트, 위구르, 대한제국을 포함하는 유라시아 제국을 세우려했으나 운게른의 배신으로 지휘권을 빼앗긴다. - 미하일 디테리히스
극동군 사령관으로 브란겔,콜차크와 함께 군부 3대장, 열성적인 제정복고파라 올가에게 러시아 황실복원이 가능하다고 암시를 준다. 대한제국 정부가 아무르 임시정부가 러시아라는 국호를 못쓴다고 하자 한국 왕실이 로마노프가문이랑 사돈 맺었다고 눈에 보이는 게 없냐고 반항하다가 한국군의 압력을 받은 백군 지도부가 독직혐의로 실각시킨다. 실각 이후에는 자신과 같은 극렬 왕당파인 운게른과 손을 잡고 활동한다. 그라나 운게른이랑 달리 상대적으로 상식인이자 근대인이었기에 중세인 수준의 광기를 지닌 운게른을 따른것을 갈수록 후회하던중 친분있던 이위종의 부탁을 듣고 운게른을 배신하고 만주로 향한다.
- 표트르 브란겔
김인수의 상관으로 백군에서 유능하고 진보적인 인물로 등장. 백군이 질것을 예측하고 극동에 최후의 보루를 만들기 위해 고려인들을 극동으로 보낸다. 이후 백군의 공세가 모두 실패하자 최후의 백군대장으로 임명. 스톨리핀의 농업개혁 완수, 폴란드와 화해 및 대러시아주의 포기와 우크라이나 인정[163]으로 백군을 개혁한다. 이후 끝까지 크림반도에서 싸우나 결국 밀려나고 남은 함대를 프랑스와 영국 등 연합국들이 러시아 채권 대신에 먹으려들자 이에 반발, 대한제국의 도움으로 극동공화국으로 도주. 이후 군사 쿠데타로 극동공화국 절반을 장악한다.
- 알렉산드르 콜차크
러시아 제국 최후의 해군 제독으로 브란겔의 부하. 부하로는 최재형의 차남 파벨 최(최성학)가 있다.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급 전함 2번함 볼랴(자유라는 러시아어.)를 기함으로 삼은 러시아 마지막 함대를 이끌면서 연합국이 러시아 전함을 뺏으려고 하자 한국과 연해주 실력자의 아들인 파벨의 도움으로 연해주에 정착한다.재정복고를 은밀히 지지하고 아무르 정부를 정통 러시아 정부로 개편하고 싶어하지만 한국의 압력을 받아 이루지 못하고 있다.
6.5. 예술가
- 표트르 차이콥스키
비중은 별로 없어도 잊을만하면 등장한다. 니콜라이 대관식에 음악을 연주하고 이선이 러시아 방문할 때마다 등장, 이선은 팬이라서 차이콥스키음악을 매우 좋아한다.
- 바실리 베레샤긴
러시아의 종군화가로 전쟁과 관련된 다양한 사실적인 그림을 남긴 화가,너무 사실적인 그림이라 전시가 중단된적도 있다.러시아-투르크 전쟁,1870년 인도반란, 조청일전쟁, 미서일전쟁, 의화단 전쟁 등 다양한 전쟁에 참여하였다. 문명인이라는 백인 열강들이 약소국민을 죽이는 걸 보고 누가 문명인 야만인지 모르겠다며 반전주의 성향을 드러낸다. 일본 또한 여순학살을 보면서 참으로 훌륭한 백인들의 제자라고 비꼰다. 원래 역사대로 라면 페트로파블로프스크호가 터질때 같이 죽었어야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살아남았으며 러일전쟁에서 활약한 병사들을 그린 묵던의 영웅들이란 작품을 그렸다고 한다.
- 미하일 불가코프
러시아 백군 의무관으로 적백내전에서 백군이 패배하자 다시는 전쟁 같은 참혹한 짓에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문학에 자신의 삶을 바치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역사와 달리 소련이 아니라 극동 연해주에 정착했다는 언급이 나온다.
-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러시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1907년에 러시아에서 방문했을 때 이선이 연주를 들었으며 적백내전 이후 이선에게 초청되어 한국에서 방한공연을 한다. 이선은 음악애호가라서 라흐마니노프의 연주를 즐기고 아예 연해주에 정착할것을 권유하지만 이미 미국으로 이민 간 뒤라서 프로코피예프가 잘해줄 것이라고 거절한다.
-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적백내전 때문에 미국으로 망명한 음악가로 미국에 망명한 라흐마니노프나 프랑스로 망명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 달리 미국망명을 포기하고 연해주에 정착, 마린스키 극장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재건한다.
- 망명 예술가들
역사의 변화로 적백내전 후 다양한 문학가들이 연해주나 더 안전한 한국으로 건너오게 되는데 문학가로는 이반 부닌, 안나 아흐마토바-니콜라이 구밀료프 부부[164], 드미트리 메레시콥스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마리나 츠베타예바[165],보리스 파스테르나크[166], 러시아 아방가르드 예술가로는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크 샤갈, 나탈리아 곤차로바,카자미르 말레비치 등등이 건너왔다.
예술가들은 처음에는 혁명에 찬성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소련의 검열과 탄압에 질려서 원래 역사대로라면 러시아를 떠나기 싫어서 소련에 남았던 인물들까지 정통러시아로 이주해왔다. 이들중 일부는 프랑스나 미국, 독일로 다시 떠났지만 대부분 극동에 남아서 새로운 예술운동을 이끌게 되었다고. 이선 역시 극동 러시아와의 진정한 융화와 대한제국의 문화 발전을 위해 이들을 후원했고 이들역시 대한제국의 청년예술가와 교류하면서 새로운 예술사조가 등장했다고 한다.
- 레프 톨스토이
러시아의 대문호, 워낙 유명하고 농민에게 동정적인 인물로 1891년 대기근에 구호활동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구호 활동중인 이선과 만나지만 단 이미 65세의 나이차이에 워낙 뜬구름 잡는 사람이라 이선과는 그리 친밀하게 지냐지는 않는다.
- 안톤 체호프
러시아의 인기 소설가이자 청년작가, 사할린에 체류하며 사할린과 극동 지역 사람들의 빈곤한 생활상을 담은 탐방기를 쓰면서 러시아 제국의 문제를 정확히 짚어낸다. 그래서 그런지 극동과 관련있고 고려인 문제에 해박하며 진보적인 이선과 친하게 지낸다. 이선과 함께 러시아 정치이야기를 하지만 이선은 그가 원래 역사대로 문학가로 남길 바래서 그에게 문학의 길을 계속 걸을 것을 추천한다.
6.6. 기타
- 알렉산드라 세묘노바 보프로바
조선인 고아 여성이었으나 운좋게 러시아 대령 가족에 입양, 교육에 뛰어난 열정을 보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와서 유학을 하는 도중 이선과 만난다. 이선과 만나서 서로 대한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이선은 그녀를 보며 마르가리타를 떠올린다. 이후 이선이 러시아에 방문했을 때 최재형과 결혼한 모습으로 등장, 최재형과 행복하게 살며 연해주내 조선인들을 교육하고 있다. 원래 역사에서도 최재형의 아내였지만 의문의 음독자살했다. 별로 유명하지 않은 인물이라 이선도 잘몰라서 역사에 남지 않은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 그리고리 라스푸틴
직접적인 등장은 없고 언급만 된다. 황궁의 모든 이들에게 멸시를 받고 있는 인물로 신비한 요술로 바드마예프를 밀어내고 차르에게 접근하려고 한다. 러시아의 멸망을 막으려는, 그리고 본인이 비선실세가 되려는 이선의 개입으로 바드마예프가 손을 써서 더이상 역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 없게 되지만 라스푸틴이 없어도 차르 부부의 실정으로 러시아가 망하는 걸 보며 이선은 애초에 차르 부부가 러시아 멸망의 원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167]
- 이고르 시코르스키
원래 역사의 헬리콥터 개발자. 일리야 무로메츠 폭격기를 만들어서 차르의 총애를 얻으나 적백내전때 차르의 친구라는 이유로 적군에게 탄압을 받자 파리로 도망쳐 나오고 원래 역사에서는 이때 미국으로 건너가지만 마침 파리 강화 회의에 있던 이선이 러시아 황제와의 친분과 전폭적인 지원을 미끼로 한국으로 대려오고 한국산 폭격기 일무-2를 만든다. 이선은 거기서 더 나아가서 시코르스키와 대한제국이 세계 최초로 헬리콥터를 만드는 걸 꿈꾼다.
- 야코프 트랴피친
오호츠크 전선을 담당하던 적군 지휘관이자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 소련이 아나키스트 네스토르 마흐노를 공격하고 극동공화국을 세우고 제국주의 국가인 대한제국과 협상하자 분노, 볼셰비키고 고려인[168]이고 일본인이고 백계 러시아인이고 자신들을 제외한 모든이들을 공격하는 니콜라옙스크 사건을 일으킨다. 이런 짓거리의 이유는는 일본과 대한제국이 분노하여 소련과의 전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해서 였으나 의도를 간파당한 이선에 의해 트랴피친의 계획은 실패, 이후 소련군에 잡혀가 총살된다.
- 그리고리 포드스타빈
세계최초의 한국학과를 개설한 러시아의 교수. 한국어와 한국역사에 정통하여 러시아와 한국의 관계를 발해와 연관시키려고 하고 유라시아주의에 기반하여 제4의 로마대신에 제 4의 유라시아제국[169]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러시아내 유라시아 주민들과 한국인들이 발해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었다.
- 파벨 고르굴로프
백군 잔당이었던 파벨 고르굴로프는 그곳에서 머물며 원역사대로 녹색 파시즘에 빠져드는데, 그의 과격함에 보리스 사빈코프마저 학을 떼며 러시아 파시스트 당에서 그를 제명해버렸다.
이후 자신을 러시아 파시스트당 최고평의회 의장이라고 칭하며 원역사대로 남프랑스에 하는데, 원역사와 다르게 남프랑스에 은퇴한 이선이 그곳에 무기한으로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운게른에게 영향을 받아 이선을 칭기즈칸과 이반 뇌제의 후계자라고 여기고 있었다.이선은 그의 편지를 읽고 현대에 강림한 환경전사 칭기즈칸이냐며 어이없어하며 알현을 거절했다.
이를 고르굴로프는 이선이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1936년, 프랑스와 소련이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자 그는 이를 유대-볼셰비키의 세계전복 계획이 실현되고 있다고 여기며 치를 떨었다
마지막으로 1936년 7월 15일 성 블라디미르 축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폭탄 테러로 알렉세이 황태자가 사망하자 이에 대한 분노로 1936년 8월 16일, 알베르 르브룅 대통령, 레옹 블룸 총리를 겨냥한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킨다. 해당 인물이 벌인 1932년 알베르 르브룅의 전임자인 폴 두메르 대통령 암살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원역사와 같이 소련과 조약을 맺은 프랑스의 배신을 암살 계기로 삼았는데, 원역사와 다르게 자신을 백군 정부인 전러시아 국민국가를 대표하여 이탈리아와 독일과 함께 파시즘 삼국동맹을 맺었다며 신문사에 투고한 회고록 때문에 전프랑스에 반파시즘 여론이 불타오르며 정부가 스페인 공화국에게 군수물자를 지원해주며 라인란트 재무장 사건 때 알자스-로렌에 배치된 4개 사단을 자르로 진군시키는 등 원역사를 크게 뒤틀고 만다.
7. 소비에트 연방
7.1. 붉은군대
-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역사가 바뀌어서 소장 계급의 기병군단장으로 러일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 이선의 공작으로 이위종을 통해 일본군 기밀을 입수하고, 교차확인을 통해 일본군의 허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총사령관 쿠토파르킨에게 공세를 건의하나 그의 소심한 성격 때뭄에 반려돼서 뒷목을 잡게 된다. 그렇지만 실제 전투가 절정에 이르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정치적 압력으로 결국 공격에 동의하고, 러시아 제국의 명장답게 적의 공세종말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양익포위를 성공시켜 일본 육군에 크고 아름다운 타격을 입히고 전쟁영웅이 된다.
이후 1차 대전에서는 원래 역사와 다르게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목표로 총공세를 펼치자 이를 막아내고, 참모총장의 지위에 오른다. 혁명 때는 니콜라이 2세 퇴위에 동의했으며, '10월 쿠데타' 때 군부를 통제하지 못한 책임으로 직을 내려놨지만 러시아 민주 연방공화국에서는 트로츠키에 의해 공화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소련이 된 이후에 원래 역사처럼 적백내전에서 제국군 장교인데도 러시아를 수호하는 적군의 편에 서서 싸운다.
- 미하일 투하쳅스키
페트로그라드 전투에서 20대 중반의 중령으로 처음 등장, 트레이드마크인 종심방어를 제안하지만 계급과 나이 때문에 무시 당할 뻔했지만 미군 참모장 맥아더가 동의하면서 공식 방어 전략으로 채택된다. 이후 원래 역사와 같이 내전에서 활약한다. 내전에서 백군을 우랄산맥너머로 몰아낸 동부전선 사령관이되며 폴란드와의 전쟁에서는 북서전선군 사령관으로 바르샤바로 바로 진격하는 기동전을 펼치며 알렉산드르 예고로프와 경쟁심리를 들어낸다. 무리한 공세를 하다가 폴란드군에 포위되고 북서전선군을 날려먹는다.
- 알렉산드르 예고로프
전직 제국군 출신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군 사령관, 백군의 노출된 측면을 강타하여 백군을 밀어내면서 백군에 대한 반격작전을 지위한다. 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군으로 투하쳅스키가 바르샤바에 집착하듯 르비우 점령에 집착했다.
- 세묜 부됸니
전직 제국군 출신 장교로 기병에 탁월한 장군, 소련군의 신속한 진격에 도움이되었지만 독자적 남부 점령에 나서고 폴란드 전선의 패배요인중 하나가 된다.
7.2. 볼셰비키
-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이선이 의도치 않게 운명을 바꿔버린 인물. 워낙 인생이 바뀌어서인지 레닌이라는 가명보다 본명인 울리야노프로 더 자주 등장한다. 이선의 개입으로 인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이 지연되면서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미수자가 아닌 알렉산드르 2세 암살자가 되어 러시아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다. 이에 오스트리아로 이주해서 살면서 사실상 반은 독일인이 되었고 민족문제를 중시하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된다. 카리스마는 원래 역사와 같이 여전하지만 맨셰비키와 볼셰비키의 분열은 없어지며, 자신도 독재자가 아니라 집단지도체제의 일원이 된다. 독일의 지원을 받진 않지만[170]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결국 귀국해서 러시아 연방의 지도부의 일원이 되며, 강화파였지만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이선이 사회주의자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조한민을 제국익문사 요원으로 파견해서 그와 관계를 맺게 되는데, 한국 황제의 요원인건 알고 있었지만 러시아 제국과 다른 속내로 접촉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방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한민이 혁명 이후 황제의 제안이라며 밀약을 맺었는데, 바로 전쟁을 중단하지 않고, 전쟁 중에는 사회개혁을 잠시 미루며, 만주와 몽골 일대의 제국주의적 영향력를 제거하라는 것.[171] 의외로 토지 문제가 핵심이란 것을 꿰뚫어보고 개혁을 시행한 이선을 계몽 군주의 모범적인 사례로 높이 평가하며, 혁명은 피할 수 없다는 견해에, 자신의 저술들이 이미 번역되어서 보고됐고 흥미롭게 읽었다는 말에 이선이 차르였다면 혁명이 불가능했을거라고 진심으로 감탄한다.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또 한번 조한민을 만나서, 시베리아 자치공화국과는 휴전을 하자는 제안을 받는다. 사실상 대한제국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것을 시인한지라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유럽 러시아가 급한건 사실이라 이를 수락한다. 역사가 바뀌어서 본인이 민족문제 전문가가 되었기에 연방의 문제점도 해결하려고 노력했으나, 서방의 간섭과 내전으로 인해 무산되었다. 개변된 역사의 영향인지 뇌졸중으로 사망한 것은 똑같지만 원 역사보다 5년 더 살고 1929년 사망했으며, 반대파와 화해하는 조건으로 트로츠키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준다. 본인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효시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에 원 역사만큼의 개인숭배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사망 후 방부처리되는 일도 없이 원래 본인 소원대로 어머니 곁에 묻혔고, 페트로그라드가 레닌그라드로 개칭되지도 않았으며 고향인 심비르스크가 울리야놉스크로 개칭되는데 그쳤다.
- 레프 트로츠키
이선이 니콜라이 2세의 즉위식을 축하하러 오데사에 왔을 때, 사절단을 구경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했다. 발칸전쟁에서는 기자로서 제국주의 국가들의 전쟁이라고 비난, 더 큰전쟁으로 이어질거라는 예언을 한다. 혁명이 일어나자 미국에서 귀환한 후 두마 의원이 되었는지 토지개혁에 반대하는 구체제 인사들을 대놓고 조롱한다. 러시아 민주 연방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군사 총책임자로 선출되어서, 러시아가 단독 강화를 하지 않고 전쟁을 지속하자 원래 역사에서는 적백내전 때 발휘했던 군사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더 일찍 발휘해서 전쟁을 지휘하게 된다. 이후 파리 강화 회의에선 외무인민위원으로 약소국의 대변자를 자임하며 열강들의 눈엣가시[172]가 되었다가, 결국 회의장을 박차고 귀국했으며 다시 국방인민위원으로서 전쟁을 지도하게 된다. 장갑열차에서 조한민을 만나고 휴전 제안에는 레닌과 똑같이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 수락하며, 의외로 상술한 이선을 처음 봤던 때를 회상하며 감상적인 태도를 보인다. 조한민이 헤어지면서 무운을 빈다고 하자 처음에는 적에게 참 관대하다며 비꼬았지만, 그가 언제 다시 친구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라 하자 대범하다면서 악수를 제안한다. 결국 레닌이 그에게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자 유대인이 가능하겠냐며 회의를 드러내지만, 결국 대권을 쥐는 대신 레닌의 유언대로 반대파들에게도 골고루 자리를 나눠주고 자신은 당정군의 핵심 직위를 쥔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다.
- 이오시프 쥬가시빌리
역사의 변동으로 캅카스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다가 레닌이 아닌 트로츠키에게 발탁되어서, 캅카스 전선 수석정치위원이 되어서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원래 역사와 달리 일찌감치 잔혹성으로 두각을 드러낸 만큼 대권을 쥐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자캅사스 소비에트 공화국 지도자로 활약하다가 뒤늦게 정치국의 일원이 되기까지 했으며, 트로츠키의 부하가 되어서 레닌에게 무례를 드러낼 일도 없어져서인지 레닌도 그에 대해 별 얘기를 하지 않고 사망해서 트로츠키에 의해 정치국 위원에도 유임된다. 철저히 다수파를 따르기 때문에 트로츠키를 지지하지만 내심 대권에 대한 야망을 품고 묵묵히 일하는 중.
- 니콜라이 부하린
트로츠키처럼 미국에서 머물고 있다가 러시아에 혁명이 발생하자 한국으로 경유해서 러시아에 귀국하려다가 체포된다. 처음에는 본인이 러시아로 돌아가지 못할까봐 걱정하지만 그를 알아본 이선의 호의 덕에 오히려 한국 황제의 특급열차와 함게 대접받으면서 귀환한다. 덕분에 일개 망명객 신분으로 이상설과 이회영 같은 한국 고위직은 물론, 전봉준과 여운형 같은 한국의 정치인과도 만나면서 서로의 이론을 교류하며 친분을 쌓는다. 이후 여운형을 극동민족대회에 초대한다.
- 레프 카라한
아르메니아 출신 소련의 외무장관으로 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 소련의 카라한 선언으로 유명한 인물. 멘셰비키에 속핸던 인물이라 자본주의자들의 비위를 맞출줄 알면서도 소련의 이익을 확보하는 뛰어난 외교관. 김규식과 협상하여 극동 공화국을 출범시키고 원래 역사처럼 카라한 선언을 발표하여 국민당을 끌어들인다.
-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유대계 러시아인 거물 혁명가로 코민테른에서 러시아인 대표로 활동하며 코민테른의 의장인 인물. 코민테른을 통하여 소련의 세계정책을 관할한다.
- 김알렉산드라
적군의 편에선 대표적인 고려인으로 원래 역사에서 최초의 한국인 공산주의자다. 원래 역사와 다르게 독립을 유지한 아버지의 나라 대한제국과 소련이 싸우게 되는 걸 막으려고 했지만 싸움이 벌어지자 어쩔수없이 적군의 편에서서 한국과 싸운다. 이후 박진순과 함께 소련내 고려인 대표로서 극동민족대회 의장단에 참여한다.
- 박진순
교사출신의 고려인 혁명가. 극동문제의 전문가로서 원래 상관 그리고리 보이틴스키[173]를 보좌하는 입장이었지만 상관이 몸져누우면서 이승만과 협상을 위해 하얼빈에서 협상을 벌인다. 그러나 내심 자신을 깔보는 이승만의 태도와 젊은 혈기 때문에 이승만을 윽박지르는 사고를 친다. 덕분에 회담이 파토나고 본인도 미숙했음을 알고 사과한다. 이후 극동민족대회에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 한국을 크게 비판한다.
- 카를 라데크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혁명가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절친하다. 소련으로 이주한뒤 독일내전 당시 독일좌익을 지원하기 위해 첫등장했다. 그후 극동 공화국에 백계망명자들이 계속 망명하자 조약위반이라고 날뛰고 조한민 역시 당신들이야말로 조약 위반이라고 반박하는 모습으로 등장. 소비에트 연방이 성립되자 세계 혁명을 위해 독일 좌익의 봉기를 선동하고 로자 룩셈부르크를 설득하기 위해 파견된다.
- 아돌프 요페
유대인 혁명가이자 중국에 파견된 소련의 전권대사. 오패부-손문의 연합으로 반 단기서 동맹을 만들려고 했으나 오패부가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실패, 대신 1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킨다. 카라한처럼 합리적인 인사라서 몽골이 공산혁명은 커녕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조차 도달하지 못한 전근대 국가라는 것을 알기에 몽골 인민 공화국 조직하는 대신 운게른을 제거하는 선에서 김규식과 합의를 본다.
7.3. 기타
- 막심 고리키
저명한 소련의 문학가로 1920년 기근으로 인한 대규모 기아에서 인도적인 지원을 해줄것을 요청한다.
- 마리아 알렉산드로브나 스피리도노바
철의 여인이란 별명으로 유명한 테러리스트. 교육받은 여성의 몸으로 러시아 제국 비밀경찰에게 모진 고문과 강간을 당했음으로 정신력으로 견뎌 내고 차리즘을 비난하는 연설을 한다. 이 때문에 국민들이 여성을 고문했다는 점 때문에 차르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지고 이후 유배에서 해방되자 볼세비키를 능가하는 급진파가 되었다. 급진파로서 토지개혁을 당장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
- 이반 일리치 이바노프
15살의 러시아 소년으로 피의 일요일 당시 시위에 참여했다가 차르의 군인들이 민중을 학살. 아버지 덕분에 살아남았으나 아버지가[174] 피흘리며 복수를 당부하자 무슨일이 있어도 차르에게 복수를 하기로 결정하고 소비에트, 그중에서도 테러단체인 SR로 전향하여 처음부터 차르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자신을 백군스파이로 위장. 차르를 속여서 도망치게 한뒤 진짜 정체를 알리고 니콜라이 2세를 사살. 알렉산드라가 덤벼들자 그녀도 사살한다. 차르가 도망가길래 죽였다고 말하지만 공산당주류인 RSDLP는 니콜라이 2세를 재판도[175] 없이죽인 SR에 반감을 가지게 된다.
8. 몽골
- 복드 칸
제8 대 젭춘담바 후툭투로 티베트가 청나라에게 탄압받는 것을 보고 독립을 결심한다. 원래 역사와 달리 청나라가 살아남아 독립을 못했으나 달라이 라마의 지원과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백군의 지원으로 청나라군을 크게 대파한다.[176] 이후 청나라의 분열을 용납하지 않는 한국의 중재로 거의 완벽한 자치를 누리는 걸로 타협한다. 이완용은 이 기회에 청나라를 제어해야겠다고 해서 만주 신협약으로 사실상 청나라를 식민지로 만든다. 그러나 운게른을 끌어들인 대가로 운게른에게 권력을 상실한 상황, 친위 쿠데타가 있었으나 실패하고 병에 걸린상태다. 결국 역사대로 사망하지만 이승만의 공작에 의해 운게른에게 독살당했다고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불교방식대로 시신을 화장하여 진실을 확인할 수도 없으니 역사에서는 운게른에게 죽었다고 남을듯하다.
- 표트르 바드마예프
부랴트계 러시아-몽골인으로 달라이 라마의 스승인 아그반 도르지예프와 함께 녹룡회라는 비밀조직을 창설. 차르를 칭기즈칸의 환생, 이선은 전륜성왕의 환생으로 믿고 청조를 무너트린뒤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려는 계확을 내놓는다. 원래 역사대로라면 라스푸틴을 이용해 차르의 신임을 얻으려다 라스푸틴의 배신으로 권력에서 밀려날 운명이지만 이선의 개입으로 동양의학으로 알릭세이 황태자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 이선의 조언으로 알릭세이가 해조류나 비타민 K[177]를 섭취함으로서 라스푸틴 대신에 러시아 궁정의 비선실세가 되는데 성공하고 러시아내에 일약스타가 된다. 이후 한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차르의 외교정책을 수정하게 하고 상은 러시아 내 유라시아 주의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결코 그자리에서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한국 황제 폐하께서는 전륜성왕의 화신입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세계의 운명을 바꿀 의무가 있습니다! 아시아 기마민족의 힘으로 러시아와 유럽은 구원 받을 것입니다. 아시아 기마민족의 도움으로 유럽에 군주제가 복원될 것 입니다! 성전의 그날이 머지않았습니다. 나는 군단을 이끌고 빨갱이들을 무찌르러 출정할 것입니다. 내말을 반드시 황제 폐화께 전해 주십시오. 폐하께서는 현실을 딛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 204화 성전(聖戰)
몽골의 미친남작,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에 물들어버린 썩어빠진 러시아를 멸망시키고 칭기즈칸이 만든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려고 한다. 시대 착오적인 제정복고론자로 이선과 스톨리핀에게 추방당하지만 몽골군에 합류. 이후 청나라를 격파하고 내몽골을 점형하여 복드칸에게 호쇼이 친왕 작위를 받는다. 이후 달라이 라마와 비밀결사 녹룡회의 예언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한국 황제야말로 새로운 전륜성왕이자 칭기즈칸의 재래라는 결론에 도달. 로마노프왕조의 보호자이기도한 한국 황제를 도와 러시아와 부랴티야, 내몽골과 외몽골, 탄누투바와 티베트, 위구르를 연결하는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하려고 하나 이선은 그의 생각을 망상으로 치부한다.
이에 이선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버린 것에 분노하여 자신만의 성전에 돌입해서 위구르의 양증신과 싸우거나 중국군벌과 싸우는 좌충우돌의 행각을 벌인다. 이후 이선이 특수군사작전으로 다시 개입하자 기뻐서 성전을 선포하지만 얼마안가 다시 휴전이 반포되자 분노하여 부랴티야와 몽골사람들도 학을 떼서 소련군에 붙을 정도로 더욱 미쳐날뛴다.
1924년 시점에서 아직도 칸의 대리집정으로 몽골을 장악하고 있으며 복드칸의 친위쿠테타 이후 더욱 폭압적인 군사독재를 행하는 중이다. 백군에게 버림받은 디테히리스 장군과 함께 젬스키 소보르를 소집하여 알릭세이를 새로운 차르로 선출하지만 다른 백군 장성들과 차르로 옹립된 알릭세이 황태자, 러시아 황족들에게도 무시당하자[178] 크게 상심하여 원래 역사보다 훨씬 맛이간다. 천호제라는 이름으로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징병제를 부활시키고[179] 몰래 훔친 러시아 제국의 황금 10만톤을 이용하여 각지의 중국, 러시아, 만주 마적과 같은 군벌과 용병들을 모집하여 칭기즈 칸의 황금 군단을 재건(?)한다. 그렇지만 그의 특이한 사상과 폭정 때문에 모든 세력과 척을 지게 되고 한국이 자신을 숙청하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채자 반공을 국시로한 단기서와 협력하기로 결정한다. 공산 적위대를 토벌하러 갔으나 타찬카조차없던 운게른의 군대는 공산적위대의 화력에 밀려서 패배, 단기서 역시 한국의 침공을 받을까봐 협력을 포기하고 한국의 거짓공작으로 복드칸 살해의 누명을 쓰게 된다. 결국 정신이 나가버려 역사대로 티베트로 가려다가 부하들에게도 배신당해서 홀로 티베트로 향하단중 공산당 추격대와 싸우게 된다. 그러나 최후의 야만전사답게 체포하려는 공산당 추격대를 칼로 베어넘기자 공산당은 생포를 포기하고 총으로 운게른을 사살한다.
- 이태준
원래 역사에서 독립운동가이자 몽골과 한국의 친선을 담당했던 인물로 여기서는 만주 페스트의 비밀을 알아낸 공로로 원래 역사처럼 복드 칸의 주치의가 되고 성병 치료에 힘을 쓴다. 덕분에 몽골인들에게는 살아있는 부처인 활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규식과 복드 칸을 연결하여 몽골이 청나라에 남아있는 대신 자치를 누릴수 있게 돕는다. 1924년에는 복드칸의 병세가 악화된다는 사실을 대한제국에 알린다. 복드칸의 심복으로 친위쿠데타를 몰래 지원했기에 운게른은 이태준을 눈엣가시로 여기지만 이태준은 칸의 어의이자 몽골사람에 존경을 받으며 친위쿠데타가 실패하자 한국이 이태준의 신변보호를 위해 주재영사로 임명하면서 운게른의 숙청에서도 살아남았다. 몽골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이다 보니 작중 몽골인들에게 한국인들은 똑똑하고 착하지만 샌님이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한다. 복드칸 사후 이위종의 건의[180]를 받아들여서 운게른이 복드칸을 죽였다는 거짓말을 한다.
- 담딘 수흐바타르
몽골의 혁명가로 운게른의 권력이 약회되자 몽골에서의 혁명이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며 청나라에서의 독립과 혁명완수를 꿈꾼다. 몽골인답게 중국과 청국 모두를 혐오하여 소비에트 러시아와 가까워지려고 하고 있다. 운게른의 폭정에 맞서 적위군을 조직하여 저항하고 있다.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이 당시 다른 아시아 독립운동가들처럼 공산주의보다는 민족주의자라서 김규식과 이선은 협력이 가능하다고 보고 김원봉을 파견한다. 김원봉과 사격실력을 겨루고 김원봉이 강자이며 호방한 사람이란걸 인정하고[181] 한국과 거래를 통해 몽골 독립의 대가로 소련에 자유로운 완충국, 내몽골 분리를 약속한다. 한국이 거짓선전을 이용해 운게른을 몰아넣자 한국의 힘을 느끼고 한국에 적대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운게른을 격파, 새정부에 행정부분에서는 승려와 기존 지배층[182]을 일부 기용하는등 몽골에 자주 독립국을 건설한다.
- 데므치그돈로브
몽골의 덕왕. 칭기즈칸의 30대손으로 내몽골에서 운게른의 통치에 저항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몽골 왕공 중에서는 젊은 나이덕인지 상당히 진보적이지만 24년 기준 23살 밖에 안되는 나이와 할하인과 차하르인의 오랜 반목 때문에 몽골 전체의 지도자라는 부족하다고 이선에게 평가받는다. 부랴티야와 외몽골, 내몽골이 힘을 합쳐야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각 몽골 부족들의 반목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청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길을 택한다.
9. 티베트
- 달라이 라마 13세
티베트의 지도자로 광서제가 근대화의 일환으로 중국의 18성마냥 티베트를 대하자 청나라가 티베트를 버렸다고 생각하는 와중 조선의 발전에 자극받아 티베트의 완전한 독립을 소망한다. 그러나 조선보다 입지가 좋지 않은 티베트 특성상 한계가 있었고 원래 역사처럼 러시아를 이용하여 근대화를 꿈꾼다.
하지만 그레이트 게임에 정신이 팔린 영국이 오히려 이를 빌미로 티베트를 침공하고 결국 망명길에 오르게 되는데, 이 영국-티베트 전쟁은 작중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183] 이후 영국의 간섭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티베트로 돌아오고 영국의 힘을 빌어 독립하려다가 청나라의 신군에게 쫒겨 영국령 인도로 도망간다. 그러나 청나라가 달라이 라마를 교체한답시고 달라이 라마의 환생을 주장하는 바람에 판첸 라마가 분노, 이후 티베트인들이 봉기하면서 사실상 티베트는 말뿐인 청나라 영토가 된다. 또한 티베트 불교의 영향권인 몽골도 이에 영향을 받아 복드 칸을 선출하고 사실상 독립을 선포한다.
- 판첸 라마 9세
달라이라마가 영국에 패배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출국하자 섭정직위를 받는다. 달라이라마를 지지해서 영국에게 조약을 맺을수 없다고 말하지만 총칼에 굴복당해서 조약을 맺게 된다. 이후 청군이 처들어와서 달라이라마가 또 도망가고 청나라가 달라이라마를 새로 선출하라는, 즉 달라이라마를 환생시키라는 주장을 하자 거부한다. 이 사건으로 몽골과 티베트의 분리주의 운동이 가속화된다.
- 아그반 도르지예프
달라이 라마의 스승. 불교에 우호적인 김옥균에게 접근하여 본인의 사상을 설파하는데, 범국민주의에 기반한 환빠나 할 소리를 당당하게 해서 김옥균을 당황하게 만든다. 내용인즉 이선은 전륜성왕의 환생이며 몽골과 고려는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이고 티베트와 몽골은 역사를 공유하는 민족이니 서로 형제 민족이라는 것, 그리고 이선은 마치 고려왕이지르부카가 대칸 카이산을 도와 만주의 지배자가 된 것처럼 환생한 하얀 칸 니콜라이 2세를 도와 이선이 만주의 지배자가 될 운명이라는 것. 김옥균은 원 간섭기의 충선왕을 꺼내자 심히 불쾌해하지만 이후 만주를 한국이 지배할 명분 중 하나로 써먹기로 한다. 이 사람의 사상은 러시아 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쳐서 러시아 귀족들이 친한, 친몽골 성향을 가지게 하는데 한몫한다.
10. 미합중국
10.1. 대통령
- 율리시스 S. 그랜트
미국의 제18대 대통령. 전임 대통령으로 마크 트웨인을 경유해서 만나게 되었다. 재임시기 일어난 신미양요 사건에 대해 이선에게 사과를 할정도로 인품이 높은 사람. 남북전쟁의 격전을 헤쳐나온 군인으로서 전쟁과 피에 치를 떨면서도 국가를 위한 희생을 높게 치는 사람이라 신미양요 당시 조선 군인들의 처절한 항전을 전해듣고 이에 경탄하고 있었기에 이선과 훈훈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 덕분에 원래 역사대로라면 2007년에 돌려주는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를 돌려주는데 협조한다. 이선의 금광사업에 10만 달러를 투자하는등 선심을 보이고 미국 사업가들에게 조선이 안전자산이라는 확신을 줘서 투자를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한다. 원래 역사에서도 다정다감한 성격에 소탈한 사람인 만큼 위스키를 들어마시는 주당의 모습을 보이지만 남북전쟁 당시를 회상하며 PTSD를 느끼고 감정이 격앙되는 가녀린 일면을 보이기도 했다.
- 체스터 A. 아서
19대 미국 대통령으로 이선의 보빙사를 환영한다. 원래 역사와 거의 같은 행적을 보이며 딱히 큰영향을 주진 않는다.
- 윌리엄 매킨리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제국주의자로 명백한 운명을 주장하며 쿠바 독립운동을 지원하러가다 침몰한 메인호의 복수를 위해 미서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역사의 변화로 일본이 참전,미서일 전쟁이 되면서 필리핀은 보호국형태로나마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역사대로 아나키스트에게 암살당하면서 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대통령이 된다.
-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의 제26대 대통령. 원래 역사와 달리 대한제국이 무시 못할 나라가 되자 친일적인 태도를 보이진 않지만, 미국을 끌어들이려는 대한제국의 외교적 노력에 쉽게 말려들지 않으면서 미국의 국익을 추구하는 노회한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 앨리스 루즈벨트
루즈벨트의 장녀. 1906년, 동아시아 사절단 일행으로 일본을 여행하다가 원래 역사와 다르게 승리 아닌 승리로 막을 내린 러일전쟁에 대한 민중의 분노로 공사관이 공격당하자 일본을 조속히 떠나게 된다. 이후 도착한 대한제국에서 '미국의 공주'로 치켜세워지며 뜨거운 환영을 받게 된다. 셋째를 임신한 황후를 대신해 마르가리타가 축연에 참가하자 이선과 마르가리타의 사랑이 할리우드 영화감이라면서 호들갑을 떤다. 이후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대한제국과 이선에 대한 호감[184]을 적극적으로 표명하자 루스벨트 대통령은 마음을 얻기가 쉽지 않지 않은 딸인데 이선의 역량이 대단하다면서 껄껄 웃는다.
-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미국의 제27대 대통령이자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전직 육군장관, 보좌관. 러일전쟁의 종결을 중재하기 위해서 동아시아에 왔지만 일본의 뻣뻣한 태도에 불편함을 느끼고, 극진한 대접을 하고 맛난 산해진미를 마음것 주는 미국의 전략에 최대한 발 맞추려는 대한제국에 호의를 느끼고 만주의 이권을 두고 원래 역사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해당하는 김옥균-태프트 각서에 서명하게 된다.
- 우드로 윌슨
미국의 제28대 대통령.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서 이선을 만나는데, 어떻게든 독일을 더 뜯어먹으려고 자신에게 환심을 사려던 유럽 지도자들에게 질려서 지쳐있던 참에 자신의 이상에 발맞춰주는 이선에게 호의를 품게 된다. 당연히 그가 미래인인 것을 모르니 동양의 전제군주가 어떤 교육을 받아서 이런 식견을 가질 수 있는지 감탄하면서 그의 견해를 베르사유 조약의 반대파들을 침묵시키기 위해 이용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본이 제의한 인종차별 반대 결의안을 약간 수정해서 과반 의결로 통과시킨다. 게다가 헨리 포드가 신승하면서 상원 동수에 부통령 투표로 사실상 다수당이 되었고, 미국이 더 늦게 참전하고 덜 피해를 입으면서 고립주의 여론을 누르고 미국이 베르사유 조약을 비준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성과를 이뤄내서, 작중 세계 역사의 흐름에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 레너드 우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공화당의 유력 주자로 부상한 군인. 다만 작중에선 그를 견제한 윌슨이 동부전선으로 파견했는데, 개변된 역사로 인해 동부 전선이 격전지가 되면서 명성이 더 높아져서 1920년 대선에서 공화당 대선 후보로 출마, 대통령에 당선되면서[185] 결국 역사의 변화로 필리핀 총독이 아니라 미합중국 제29대 대통령이 된다. 개입주의 성향이 강하며 동부 전선에서 대한제국군의 활약을 보면서 한국에 호의를 품게 된데다가, 맥아더의 의견을 받아들여 한국을 이용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확립한다. 1924년 대선에서도 재선에 성공해 무난히 다스리다 1927년 임기중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 캘빈 쿨리지
레너드 우드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자기의 정치적 라이벌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견제하는 모습을 보인다. 27년에 우드가 죽으면서 대통령직을 승계, 우드의 개입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자신만의 친기업 정책을 펼친다. 원 역사에서 불출마를 선언했던 1928년 대선에 출마해 재선에 성공하나 대공황이 터지고 임기 중 아들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으면서 우울증에 걸려 업무 수행도 제대로 못 하고 1933년 1월 임기 중 심정지로 사망하면서 실패한 대통령이 된다.
- 찰스 커티스
캘빈 쿨리지 행정부의 부통령으로 쿨리지 사망 후 루스벨트 부임 이전까지 딱 2개월만 대통령을 했다고 나온다. 너무 짧게 대통령해서 그런지 최초의 북미 원주민계 대통령이란거 말고는 특이한게 없다고.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군차관직을 지낸 미국 정치인으로 김유진과 카드게임으로 이어진 친구다. 금주법 때문에 뻔질나게 한국 대사관에 찾아와서 김유진에게 폭탄주를 얻어마신다. 김유진과 친해지다 보니 친한파 정치인이 되었고 이승만의 초대로 1921년에 한국에 방문해서 이선을 알현한다. 덕분에 소아마비에 걸리는 일이 없어져서 본인에게도 좋은 결과가 되었다. 김유진으로 부터 일본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양보할 거라는 첩보를 받고 이를 정부에 제공하여 국익을 위해서라면 초당적 협력을 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원 역사대로 1932년 대선에서 허버트 후버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어 뉴딜 정책으로 미국의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특히 한국이 뉴딜 정책과 유사한 용단개혁을 진행하자 이를 근거로 뉴딜 정책이 사회주의 정책이라는 반대파를 침묵시키고 정책의 정당성을 홍보한다. 뉴딜의 홍보차원에서 보빙사 50주년 행사를 우호증진의 장으로 만들어서 모든 미국인들이 친미국가 한국을 민식하게 만들고 앙국간의 우호적 교류를 증진한다.
10.2. 발명가/기업가
- 앤드루 카네기
이선이 직접 만나지는 않지만 워낙 거물이라 언급된다. 스코틀랜드 가난뱅이에서 성공했다고 나오며 철강왕으로 이름을 날린다. 이선 역시 만나고 싶어했지만 실패한다. 러일전쟁 당시 일본 공채를 사들였다고 언급된다.
- 제이콥 쉬프
유대인 자본가로 차르의 반유대주의 정책과 포그롬을 혐오하여 다카하시 고레키요에게 국채를 사주며 러일전쟁을 지원한다. 이 사람이 돈을 열심히 지원해준 덕분에 일본은 러일전쟁을 계속 해나갈수 있었다. 이 사람이 러시아의 유대인 박해 정책을 싫어해서 러일전쟁 당시에 일본을 지원한것 때문에 적백내전 당시에 러시아 군인들이 더욱 더 많은 유대인을 살해하고 유대인 음모론을 믿게된다.
- 토마스 에디슨
미국의 발명가이자 사업가로 조선시장에 큰 관심을 갖고있다. 원래 역사에서도 고종에게 우호적이었던 만큼 아시아인인 이선에게 우호적이다. 이선 역시 유명한 위인인 에디슨을 만나 향후 10년간 조선의 전기사업을 맡기자 극도로 호의적인 인물이 된다. 10년간 조선인 기술자들을 양성해줄 것과 니콜라 테슬라를 넘겨줄 것[186], 모건과 회담을 잡아줄 것 등 이선의 요구를 받아준다.
- 존 피어폰트 모건
이선이 한국을 위한 투자를 확보하기 위해 만난 인물, 원래 역사에서도 뛰어난 업가이자 금융가였던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선이 자신과 독대할 것을 요구하고 이선과 만나는 시간과 장소를 본인이 정할 정도로 미국 내의 권력자다. 이선의 운산 금광 산업에 관심을 가지고 이선을 시험해보려고 한다. 이선이 전제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군주들보다 겸손하게 구는 모습과 자국을 위한 마음, 성품을 보고 투자를 결정한다. 물론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니고 석유재벌 록펠러랑 분쟁중이었는데 이선이 석유기업가인 노벨가문과 친해서 이들을 소개시켜줄것, 러시아랑 친하니 러시아 황제와 철도사업을 할 수 있게 도와줄 것, 이선의 뛰어난 능력[187]과 가능성을 보고 투자를 결정한다. 한참 뒤 러일전쟁 당시 일본 공채를 사들였다고 언급된다.
- 라이트 형제
원래 역사에서 비행기를 만든 형제들. 비행기 실험을 위한 투자자금을 모색하다가 한국 황제에게 큰돈을 투자 받는다. 덕분에 바뀐 역사에 그들의 실험에는 왠 동양인이 참관을 했다. 군인이 비행기를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꺼림칙하다고 생각했으나 에밀리 브라운스캔틀 때문에 그냥 황제가 미국을 좋아하나보다라고 생각한다. 역사대로 미국이 비행기에 관심없자 프랑스와 비행기 공장 계약을 하나 프랑스가 기술만 먹고 통수를 치는 바람에 한국에다가 새 공장을 차린다.
- 헨리 포드
포드식 생산방식으로 유명한 사업가로 친한파 정치인으로 등장. 2부 1화에서 이선이 초창기 별볼일 없던 포드의 공장에 초기 투자자로서 크게 투자했고 이선이 21세기식 선거운동을 가르쳐줘서 미시간주 민주당 상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덕에 친한파가 되었다. 세계 역사를 바꾸는데도 공헌했는데 포드가 정치인이 되면서 아슬아슬하게 개입주의자 표가 고립주의자 표보다 많았고 덕분에 윌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베르사유 조약 인정과 미국의 국제연합 잔류, 인종차별 폐지 등을 이뤄낸다. 러시아에 투자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적백내전으로 무산된다. 유대인 음모론을 믿어서 정치인이 된 이후 자제해도 여전히 본인소유의 신문사는 음모론을 신봉한다. 정작 유대인 음모론의 유대인과 가장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이선에게는 찬사를 보낸다고.
- 찰스 크레인
부유한 사업가 출신의 윌슨 대통령 측근으로 한국에 의해 청국에 재무고문으로 임명된다. 찰스 크레인을 이용하여 미국을 배려한 이선은 만주를 미국과 나눠먹게 되고 미국 역시 이에 만족하여 한국의 만주지배를 인정한다. 러시아 문제에도 관심이 많아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군을 지원했다고 한다. 역사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미국인 대표로 오는데 이선은 김규식이 원래역사에서 크레인에게 독립청원서를 낸것을 기억해내며 역사의 변화에 감동을 느낀다. 윌슨 이후 레너드 우드 대통령이 된후에도 한국에 요청에따라 만주에 남았으며 미국의 자본을 끌어들여 만주를 개발했다고 한다.
10.3. 정치인
- 허버트 후버
미국 구호청을 이끄는 사람으로 1921년 소련 기근 당시 리가에 소비에트를 향한 식량지원으로 매일 1백만명의 아이들을 위한 식량을 제공한다. 식량 구호를 주는 대가로 내전과 국제전 중단을 요구하고 소련은 폴란드와 한국과의 휴전에 동의한다. 역사의 변화로 대통령이 되진못하고 국무부 장관자리를 지냈으며 루즈벨트에 대항해 공화당 대선 후보로 나왔으나 낙선한다.
- 유진 데브스
미국 사회주의자로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1차 대전 참전을 반대한 것 때문에 반역죄로 투옥, 옥중 출마를 한다. 하지만 100만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보여주어 여운형 같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10.4. 군부
- 르장드르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샤를 르 장드르"나 한국이름 이선득으로 불린다. 일본에서 고문관으로 활동하며 류큐합병, 대만으로 진출, 조선개항을 정책으로 건의 했고 묄렌도르프의 계약기간이 종료된 후 로 한국에 왔다. 한국에 돈을 받으면서 고문으로 활동하며 국제법상으로 간도가 한국의 영토임[188]을 주장하고 맡서 싸울것을 요구한다. 이홍장의 이선 납치사건때 이홍장이 설마 납치를 하겠냐는 생각으로 같이 올라탔다가 끌려가고 백인이라 금방 풀려나지만 국제법 위반임을 주장하여 미국시민권자로 조선을 옹호하고 청나라를 야만국으로 몰아세운다. 시모노세키 조약에도 고문으로 참여하고 대한국 헌법제정에도 도움을 준다.
- 조지 듀이
미국 해군제독으로 미서일 전쟁에서 방호순양함 4척과 포함 3척으로 마닐라만에서 해전을 벌여 3시간만에 스페인 해군를 모두 침몰시킨다.
- 존 조지프 퍼싱
러일전쟁 당시 막스 호프만, 아서 맥아더 주니어[189], 이안 해밀턴과 팔켄하인처럼 관전무관으로 첫등장. 미서일 전쟁의 영웅이라고 언급된다. 윌슨이 공화당과 가까운 우드를 견제하기 위해 주전장이라고 생곽된 서부전장에 파견되나 예상을 뒤집고 동부전선이 주전장이되면서 우드는 전쟁 영웅이 되고 대통령이 된다. 퍼싱도 정치에 잠깐 기웃거리나 우드에 밀려나고 우드의 참모였던 더글라스 맥아더를 견제한다.
- 더글라스 맥아더
러일전쟁 때 미국 파병군의 참모장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동부 전선으로 가게 되며, 대한제국을 경유하면서 이선을 알현하고 짧은 대화를 나눈다. 실제 인물과 다르지 않게 자부심과 오만함으로 가득한 인물이지만 20대의 중령 투하쳅스키가 제안한 '종심 작전'이 무시당할 위기에 그를 지원해서 공식 전략으로 채택되게 만든다. 이후 김유진에게 다나카 상주문을 받고 이 문서가 진짜든 아니든 간에 한국은 미국의 세계 질서에 복종할 것이고 이를 이용하면 미국의 목적인 한영일동맹[190]을 붕괴시키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한국을 이용해 일본을 견제해야한다고 주장한다.
- 조지 S. 패튼
1912 스톡홀름 올림픽에 참여하는 것으로 첫등장.
10.5. 선교사
- 호머 헐버트
미국 선교사들로 길모어(George William Gilmore), 벙커(Dalzell Adelbert Bunker)와 함께 육영공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역사대로 이완용을 수재라고 칭찬한다.
- 메리 스크랜튼
메리 스크랜턴이라고 나오며 박정양에게 여성교육을 제안한다. 박정양은 이르다고 생각했으나 이선은 선교사들의 활동에 지지를 표명했고 역사대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함께 이화학당을 설립한다.
-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와 아내 릴리어스 호튼 언더우드과 같이 입국하여 제중원 의학교 교사가 된다. 이선은 이들 부부가 역사에서 한국을 위해 진심으로 일한 친한파라는 걸 알아서 이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언더우드는 한국 내 교육에 힘쓰며 이후 이강의 개인교사가 되며,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증축하며 연희대학교를 설립한다. 호튼은 얼마 안되는 여의사로 궁중 어의가 되어 마그가리타 얀코프스카 이전까지 황후 어의가 되고 이진의 탄생과 이안의 탄생에도 도움을 준다.
- 호러스 뉴턴 알렌
홍영식이 칼을 맞았을 때 의사를 수소문하면서 등장, 미국 공사관 공의로 홍영식을 살려낸다. 홍영식은 이에 감사를표하며 알렌에게 자신의 집과 토지를 기부하고 알렌은 그자리에 제중원을 설립한다.[191]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정치에도 입문하고 이익을 챙기는 것도 좋아하여 이선은 원래 역사처럼 운산 금광을 독점하게 두진 않지만 그에게 뇌물을 주고 미국기업들과 한국을 연결하는 거간꾼 역할을 맡긴다.
물론 이선은 의사에 불과한 알렌이 대미외교에 영향력이 별로 없다는 걸 알아서 서재필을 이용하여 미국에 직접 외교 하는 걸 선호한다. 그래도 매수된게 효과는 있어서 테프트 전쟁장관에게 한국황제는 절대로 친미적이니 한국을 지지하라고 말한다. 이건 일본 대사인 그리스컴이 일본의 야욕을 경고한것과 대조되어 태프트가 한국으로 마음이 기우는 결과를 가져오고 기어이 운산금광에 투자하여 돈을 벌었다는 걸로 언급된다.
- 헨리 아펜젤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같이 입국하여 제중원에서 자연과학과 의학을 가르친다. 1885년에는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단순한 관리를 기르는게 아닌, 자유주의 교육과 기독교 사립학교의 시초가된다.
- 에밀리 브라운
한국에 파견된 장로화 선교사 피터브라운의 딸로 본인도 한국에서 선교사업을 하려고 한다. 닥터 얀코프스카처럼 금발벽안으로 외모는 달라도 비슷한 성격과 성향이고 이강과 만나고 친분을 다지고 이강 역시 그녀와 친구관계를 유지한다. 그러나 미국 기레기들이 이강과 결혼한다고 거하게 구라를 까는 바람에[192] 곤란을 겪는다. 이건 뜻하지 않은 이득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일본이 한국 외교부가 스캔들 덮는다고 마비상태라고 착각하고는 한국에 대한 관심을 꺼버려서 노백린이 비행기 실험에 참관하는 것을 놓친다.
10.6. 기타
- 마크 트웨인
미국의 소설가, 본명은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 보빙사의 일원으로 뉴욕에 머물고 있던 이선을 만나게 된다. 원래 역사에서도 적극적인 반 제국주의자였던 만큼 뚜렷한 자기 주장과 부국강병의 뜻을 가지고 있는 이선을 높게 평가한다. 이후 투자 유치를 위해 이선의 부탁을 받고 그에게 율리시스 S. 그랜트 전 대통령을 소개시켜 준다. 여담이지만 일부 타블로이드들은 이선의 미국방문을 마크 트웨인의 걸작 톰 소여의 모험을 빗대 이선의 모험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물론 이는 제국주의적 시각이 있었던 지라 마크 트웨인은 기분나빠한다.
- 퍼시벌 로웰
한국에 관심이 많은 하버드 졸업생 미국인으로 이선은 그가 명왕성 발견자라는 걸 단번에 알아봤다. 보빙사를 도운 공로로 조선에 환대받고 고종의 사진을 처음으로 찍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기생 계손향과 로맨스를 즐기나 이어지진 못한다. 의화단 전쟁당시 화성 연구로 유명해져 홍영식의 죽음을 추모하는 글을쓴다. 3부에는 훗날 명왕성이 될 행성을 발견했으며 광무20년에 죽었고 제자들이 그뜻을 이어 연구를 하는중이라고 한다.
- 제임스 크릴먼
조지프 퓰리처가 운영하는 신문사의 기자로 일본의 말대로 청나라와 싸우는 것은 문명과 야만의 전쟁이라고 믿었으나 일본정부가 선동해왔던 것과 달리 야만적인 일본군의 여순 대학살에 충격을 먹으며 이를 신문에 실어 폭로한다. 이회영과도 이야기를 나누는데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는 이회영에게 감명 받아 이 전쟁이 더러운 전쟁이지만 조선의 자주독립은 지킬수 있길 바란다고 말하고 이회영 역시 이사건을 반드시 세계만방에 알려달라고 부탁한다.
- 니콜라 사코/ 바르톨로메오 반제티
미국의 아나키스트들. 역사대로 살인강도의 누명을 쓰고 재판중이라고 언급되며 여기서 힌트를 얻은 일본정부는 고토쿠 슈스이를 처리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11. 영국
11.1. 황실
- 빅토리아 여왕
초강대국의 여군주. 고종은 여군주가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너무 높은 사람이라 직접 출연하기보다는 유럽 왕족들이 빅토리아의 여왕의 가족이라는 말로 더 자주 언급된다. 특히 로마노프 가문에 대해서 언급할 때 빅토리아와의 관계가 자주 언급된다. 제위 60년 행사에는 이척과 이강이 참석하고, 1901년에 역사대로 사망하며 장례식에는 빌헬름 2세나 의친왕, 라마 6세가 참석한다.
- 에드워드 7세
원래 역사처럼 유럽의 평화를 중재함으로써 벨 에포크시대를 유지시킨 인물, 외교를 좋아하고 성격이 좋아서 이선에게도 인종차별 없이 큰 호의를 보인다. 이후 노환으로 사망하고 유럽의 중재자가 사라지면서 유럽은 1차 세계대전으로 직행한다.
- 빅토리아 멜리타
러시아의 키릴 대공과 결혼한 영국의 공주.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의 조카. 키릴을 사랑하지만 그녀의 전남편인 에른스트 루트비히가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의 오빠 였다. 알렉산드라의 입장에서는 오빠와 이혼한 전 올케가 자기 남편의 사촌과 재혼하는 거였기 때문에, 빅토리아와 키릴의 혼인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키릴과 결혼하고 역사대로 키릴이 복권되자 그녀는 러시아 왕실과 영국 왕실을 이어주는 가교가 되어주고 이선이 에드워드 7세와 만날 수 있게 도와준다.
- 조지 5세
영국의 국왕으로 원래 역사처럼 훌륭한 성품, 입헌군주제의 모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황태자 이진도 동양에는 자기 아버지가 있다면 서양에는 조지 5세가 있다고 평가할 정도로 훌륭한 군주. 원래대로라면 역사상 세계최초로 군주 중 처음으로 옥음방송을 하게되나 진보적인 이선에게 선수를 빼앗긴다.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본인은 이선에게 감명을 받아 본인도 라디오 방송을 하기로 결정하며, 이선의 진보적인 사상과 외교적 실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특히 본인의 친척인 니콜라이 황제의 자녀들을 구해준것에 크게 감사를 표한다.[193] 그와는 별개로 에드워드 8세가 유부녀나 쫓아다니느라 타티야나 공주와 결혼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다. 이후 에드워드가 사고를 치자 이 스캔들을 덮어준 한국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러나 이 스캔들을 영국 언론이 공개하자 크게 분노한다.
- 에드워드 8세
영국의 황태자로 심프슨 부인 때문에 왕위가 날아간 사람 맞다. 인종차별주의자라서 히로히토 황태자를 고급 원숭이라고 부르고 호주 원주민들을 원숭이에 가까운 종족이라고 부르는 등 실제 역사에서 했던 짓을 그대로 하지만 그래도 빌헬름과 달리 현실 감각도 있고 머리도 상당히 좋은 사람이라 속으로만 생각하고 겉으로는 외교활동을 한다. 한국 황태자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한국에 방문하나 내심 한국 황태자가 러시아 공주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194] 결국 마운트배튼이 마리야와 가까워지자 자기도 뭐라도 얻어가자면서 이서아를 유혹했다가 스캔들이 터진다. 그리고 이선은 이 스캔들을 빌미삼아 마음의 빚을 지게 해서 영국에게 여러 이권을 받는다. 성희롱 이후 조지 5세의 명을 받아 몸을 사리지만 데일리 메일이 성희롱을 폭로하자 본인에게 수치스러운 사실을 폭로한 데일리 메일을 원망한다. 원역사대로 왕위에 올랐는데 대헌장, 권리장전 이후 영국 국왕의 덕목이 된 정치적 중립을 무시한다던가 파시스트랑 어울린다던가 하는 식으로 의원들의 불만을 사고있고 유부녀 좋아하는 성벽은 여전하며 나중에는 원역사대로 심프슨 부인을 끼고다닌다. 의외로 영국 유학생활중인 정친왕 이안과는 자유로운 독신영혼(...)이라는 코드가 잘맞아 꽤 친하게 지내는편.
- 루이 마운트배튼
에드워드의 6촌으로 에드워드와 달리 공손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와 친구지만 천박한 언행에 한숨을 짓는 일이 많다. 원래 역사에서처럼 마리야 여대공을 짝사랑하고 있어서 마리야를 구해준 한국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후 황제가 결혼 자금까지 주며 결혼을 지지해주자 크게 감사를 표하고 스캔들 사건에서 에드워드를 압박한다. 마리야랑 결혼시켜준 고마움과 친구 에드워드의 잘못때문에 마음에 빚이 있어서 이안과 친구가 된다. 데일리 메일의 보도로 에드워드 스캔들이 터지자 이안과 아나스타샤를 안심시키며 에드워드가 범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마리야와의 결혼으로 비키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빅토리아라는 딸을 가진다.
-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
루이 마운트배튼의 큰누나,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의 아내, 루이스와 앨리스의 어머니인 헤센의 빅토리아 공녀는 헤센의 알릭스와 자매이기도해서 마리야와 외사촌이기도 하다. 그리스에서 쫒겨난 뒤로 난처해져서 가난하게 살고 있으며 루이는 해군장교라서 가족인데도 불구하고 정부에서 어떤 접촉도 못하게 했기에 이를 안타까워한 마리야가 이안과 함께 도와준다.
- 조지 6세
원래 역사대로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과 결혼한다. 여기서는 이미 동양은 귀천상혼을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 한국을 통해 잘알려진 탓에 결혼이 손쉬웠다고 한다. 이진과 타티야나의 순방 당시에는 에드워드8세를 대신하여 황태자 부부를 맞이하며 역사대로 말더듬이라서 외교업무를 힘들어하지만 아내와 이진의 도움으로 무사히 마친다. 인종차별을 몰상식한 행동이라고 생각하기에 이진과 타티야나의 결혼이 동양과 서양 왕실을 잇는 가교가 되기를 바란다. 이진의 즉위식에도 영국대표로 참석.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6세의 아내로 조지 6세는 그녀 곁에 있으면 말을 잘 더듬지 않는다. 그래서 그를 도와서 외교업무를 수행한다.
- 필립 마운트배튼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의 아들. 아직 어린 꼬마아이로 같은 망명자 신세였던 마리야가 필립 마운트배튼을 보고 알렉세이를 떠올려서 후견인이 되어준다.
11.2. 군부
- 찰스 조지 고든
이선이 힘을 기르기 위해 청나라로 갔을 때 이홍장의 주선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미래인으로서 그의 종교적 열정을 자극해서 조선에 귀국한 후 조선군 고문관을 맡게 된다. 사실 이는 영국의 영웅인 그가 수단에서 참살당한 후 영국 여론이 들끓어서 거문도 사건으로 이어진 나비효과를 방지하기 위함이었으나, 그와 무관하게 영국은 군사적인 필요와 러시아 견제라는 목적으로 거문도를 점령한다.혐성국조선에 있는 동안 조선군의 큰 틀을 잡아준다. 이후 청나라의 변법정부에서 군사고문관을 맡았으나, 의화단으로 인해 북경 주재 외국인들이 위협받자 최후의 협상 노력을 하겠다며 총리아문을 방문했으나,[195] 이미 광기에 물든 북경에서는 소용 없었기에 결국 홍영식과 함께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원래 역사보다 15년 더 살았지만 그의 죽음은 영국에서 전국민적 분노를 일으켰고, 대한제국으로서는 러시아와 특수 관계 및 높은 관세로 소원했던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조선에 기여한 공을 기려서 최고 훈장을 추서하고, 동상을 세워서 추모하기로 했다.
- 허버트 키치너
영국령 인도의 사령관으로 영국의 티베트 원정을 정당화하는 역할로 등장, 한참 등장 없다가 처칠의 갈리폴리 작전을 반대하는 것으로 재등장, 1차 세계대전의 영국 장군으로 영국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키치너 사단을 만들고 솜 전투를 치르나 40만의 영국인 사상자를 내고 총리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와 사퇴한다.
-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영국의 장교로 아랍 반란을 주도하여 아라비아의 로렌스라고 작중에서 불린다. 아랍의 진정한 독립을 원했지만 역사대로 영국 정치인들에게 배신당하는 걸로 등장한다.
11.3. 총리
-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영국의 수상, 조선과의 협상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과 유사한 조약을 체결해야할 상황이 오자 난감해하나 러시아 견제를 위해 한국과 수교를 맺는다. 이선은 아편전쟁을 비판한 점때문에 나름 이야기가 가능할거라고 기대했으나 이선의 방문 당시 수단 문제[196]가 터져 조선에 대해 까먹어버린다. 마흐디 운동 이후에도 아일랜드[197]와 선거문제가 더 중요해서 조선에 신경쓰지 못한다.
조선 중립화론 논의 당시 찰스 고든이 조선에 파견되었기에 조선의 영향력을 확보했고 조선 중립화 방안이 러시아와 독일의 동아시아 영향력을 차단하는 수가 될수 있다고 생각하여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보수파에 압력을 받아 역사대로 거문도 점령이 일어난다. 그러나 오히려 이는 열강들이 영국을 의심, 견제하는 형태가 되어 조선 중립화론은 더욱 견고해진다. 러시아에 대해 강경파로 크림전쟁을 준비했음에도 영국언론에 러시아 스파이로 몰린적이 있어서 이선은 자신이 러시아 스파이로 몰리자 글래드스턴과 같은 위치에 서다니 참 고맙다며 조롱한다. 이승만 역시 대한의 글래드스턴이 되려고 노력한다.
-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글래드스턴을 이어 취임한 총리로 솔즈베리라는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제국주의자이지만 아프가니스탄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자 거문도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러시아가 한국을 침공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단다. 찰스 고든이 의화단 전쟁으로 죽으면서 역사대로 영국군을 파견하게되고 중국을 열강들과 함께 분할, 보어 전쟁쯤에는 병환으로 아서 벨푸어에게 총리자리를 넘긴다.
- 아서 벨푸어
보수당 원로이자영국의 외무장관으로 위대한 고립을 끝내고 영국의 세계정세 개입을 시작한 인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일동맹을 만들고 1차 대전에서는 벨푸어 선언을 한 인물. 여기서도 벨푸어 선언을 해서 중동을 엉망으로 만든다. 백인 우월주의를 신봉하여 파리강화회의 당시에 인종간의 평등 문구를 삭제하라고 압박을 넣었으며[198] 친일적 인사로 한국에게 끌려다니는 상황과 영국의 세계 패권이 미국에게 넘어갔음을 인정하며 슬퍼한다. 원로로서 조지 5세에게 앞으로는 귀족원(상원)에서 총리가 나오면 안된다는 것을 건의 한다.
- 헨리 캠벨배너먼
1907년 영국의 총리로 대한제국이 영국의 동맹이 된후 처음 만난 영국 지도자, 이선은 자신을 존중해주는 영국인들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다. 이선과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 종료를 논의한다. 총리 본인은 반러파라 그레이트 게임 종료에 거부감을 느끼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사임한다.
-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1097년 재무장관으로 첫등장. 러시아와의 그레이트 게임을 종료해야 한다는 자유 제국주의 파벌로 헨리 캠벨배너먼을 몰아낼 생각을 하며 헨리가 사임하자 총리로 취임한다. 이선은 역사를 알아서 애스퀴스가 오랫동안 집권할것을 알고 윤치호에게 애스퀴스와 고나계를 만들어 놓을 것을 지시한다. 그레이트 게임 종료협상에서 만주와 몽골, 티베트은 청나라의 영토임을 확정한다. 대전쟁 참전을 지지했으며 1차 세계대전에서 솜전투의 실패를 책임지고 로이드 조지에게 비난 받으며 키치너와 함께 사퇴한다.
-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의 수상. 진보적인 인물로 보어 전쟁과 제국주의의 비도덕성을 비판하고 시종일관 한국과 러시아에 적대적이던 영국 정치인들과는 다르게 한국을 어느 정도 존중해주는 편. 대중복지와 투표권확대를 공약하는 등 진보적인 인물이지만 어디까지나 당시 영국인 중에서 진보적인 인물이라 원래 역사 처럼 아랍에 벨푸어 선언으로 혼란을 일으킨다. 본인도 케인스의 말대로 독일을 쥐어짜면 문제가 생긴다는 걸 알지만 국민들의 분노와 표 때문에 독일에게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을 물린다. 이후 에드워드 황태자의 스캔들에서 대놓고 무시하기, 이권 조금 던져주고 사건 은폐하기 등을 계획하나 그러기에는 조지 5세가 너무 명예로운 인물이었고 이선이 사과를 받아들이자 기뻐하는 조지 5세와 달리 앞으로는 외교에 있어서 많은 양보를 해야 한다는 것에 한숨을 쉰다. 이후 그리스가 터키와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연합국을 끌어들여 터키와의 전쟁을 일으키려 하나 대영제국의 자치령인 캐나다와 앤잭부터가 전쟁을 반대하자 정치적 역풍을 맞고 보수당 의원들에게까지 버림받으며 실각한다. 실각당한 뒤에도 데일리 메일의 에드워드 스캔들 때문에 기자들에게 질문공세를 당한다.
- 스탠리 볼드윈
보수당의원으로 로이드 조지의 대항마로 부상한다. 영국 총리가 되나 데일리 메일발 에드워드 스캔들이 터지자 자신과 경쟁하던 커즌이 정보를 흘렸다고 의심한다. 로더미어 자작에게 유유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데일리메일 스캔들의 여파로 2당인 자유당과 노동당이 연합하면서 보수당 정부가 무너지고 조기 총선을 선언한다.
- 램지 맥도널드
영국 노동당 출신의 첫 총리, 스코틀랜드 빈농 사생아 출신이지만 자수성가하여 정치인이 되었다. 이안과 케인스의 개입으로 노동당-자유당연정이 성립하면서 총리가 되었다. 그럼에도 영국 상류층들에겐 멸시의 대상이고 변혁을 원하는 영국 젊은이들과 좌익들에게는 자본가 눈치보는 소심한 개혁가로 낙인 찍혔다. 소련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정책을 펼치나 그과정에서 한국과의 외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11.4. 내각/외교관
- 윈스턴 처칠
원래 역사와 비슷한 강경한 반공주의자지만, 작중 달라진 국제관계 때문에 일본이 영국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자 한국까지 끼워서 영일한 동맹을 결성할 수 있게 배후에서 지원한다. 원래 브라질에 팔려고 했지만 포기하게 된 드레드노트를 잠재적 적국인 오스만 제국이 구매하려고 한국이 구입할 수 있게 주선하며, 1차 대전이 발생한 후에는 돈을 주고 리스하게 된다. 불행히도 갈리폴리 하는 것은 여전했지만, 이선의 귀띔으로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은 막을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을 새로운 '동양의 헌병'으로 생각하고 러시아의 정국이 불안해지자 개입을 종용하지만 이선의 노련한 협상으로 건함 기술, 전차와 전투기의 기술 이전 및 현지 생산을 먼저 한 후에 개입하기로 했는데, 이선의 예상과 달리 러시아 내전이 더 빠르게 터지면서 기호지세 격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소련과 평화협상을 맺고 본인이 지원하던 그리스가 터키에게 패배하자 또다시 갈리폴리로 진격하려다가 역풍 맞고 실각한다. 실각한뒤에는 한국에 기술을 유출했다는 의혹 때문에 잠깐 곤혹을 겪고 노동당이 자유당과 연립 정부를 구성하자 반공을 주장하던 사람답게 탈퇴하여 역사대로 보수당에 입당한다. 이재각의 반공연설에도 대놓고 박수를 치며 노동당-자유당과 대립하고 이선, 이진, 이강을 다 만났으니 작중 세계관에서는 친한파 정치인으로 알려졌으며 원래 역사에서는 이승만과 반공포로 때문에 욕하던 사이였지만 여기서는 서로 친분을 쌓아 친구가 된다. 그러나 친한파 정치인이란게 영국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어서 영국내 인종차별주의 혐한 우익들의 표적이 된다. 그럼에도 한영우호친선회 회장을 맡는등 한국에 우호적인 반공 영국 정치인.
- 조지 뷰캐넌
주 러시아 대사로 대전쟁중에 차르의 한심한 작태를 참다 못해 개혁 좀 하고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라는 영국 정부의 충고를 전하나 차르가 국민의 신뢰라는 말을 나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국민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지이라고 전제군주다운 반문을 하자 어이를 상실해서 둘다라고 답한다. 이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자신의 외교관 업무의 최악의 실패라고 자책하고 로마 진군 당시 주이탈리아 대사로서 같은 주러시아 대사로 친분이 있던 이위종과 함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를 설득하여 이탈리아의 파시즘화와 공산화를 막아낸다.
- 어니스트 사토
작중에서는 어니스트 사토우[199]라고도 나온다. 주일 영국 공사관원으로 승려 이동인과 접촉하여 이미 조선에 대한 정보를 확보했다. 1887년 부터 1889년까지 조선에 총영사로 부임하며 의화단 전쟁직후 청나라에 재임하면서 북경의정서에 싸인하고 광서제의 고문을 맡지만 내심 청나라가 망할것이라는 보고를 영국에 올린다. 영국내 최고의 극동 전문가로 에드워드 왕자 일행이항 같이 특사로 파견되며 한국의 변화상을 보고 매우 놀라워하며 호평을 내린다. 에드워드 스캔들 당시 조선과 마운트베튼과 같이 불려나가 1880년대 영사시절 거문도 점령사건을 언급당하며 이선의 분노를 뒤집어쓴다.
- 존 조던
아일랜드 출신, 원래 역사에서는 러일전쟁 당시 서울에 먼저들어가는 쪽이 한국을 차지할거라고 말한다던가 중국에게 만주 독립군을 무장해제할것을 요구한 영국외교관. 바뀐 역사에서는 영국의 실책으로 인해 한국 황제의 분노를 뒤집어 쓰는 역할을 맡는다. 이선 러시아 스파이 사건 당시에는 황제 뿐만 아니라 각국 공사들에게 비판 받았다. 한영일 동맹이 체결된 이후에는 러일전쟁을 보고하고 조선에서 근무가 끝난뒤에는 청나라로 파견되어 한국공사 시절 친분이 있던 주청 한국공사 이완용과 접촉하여 중국 분할계획을 세우며 술잔을 기울인다. 대전쟁 이후 한국에 특사로 파견되어 한영일 동맹의 종료를 통보한다. 은퇴한후에는 에드워드 7세와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에드워드의 성추행 때문에 다시 러시아 스파이 스캔들을 언급당하며 한국황제의 분노를 뒤집어쓰고 만다.
- 에드워드 그레이
영국의 외교부 장관으로 그레이트 게임 종료를 원하는 자유 제국주의 파벌, 김옥균과 광서제의 죽음 이후 중국의 행방에 대해 논의 하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영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유럽의 안보가 위험하다는 명연설을 해서 영국의 참전을 이끌어낸다. 그러나 본인은 이 전쟁으로 벨 에포크가 끝난다는 걸 확실히 인지하고 유럽의 등불이 꺼지고 있다는 말을 남긴다.
- 마일스 램프슨
원래 역사에서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외교활동을 하던 인물이었지만 역사의 변화로 한국에 대사로 오게 되었다. 1922년 주한영국대사라서 에드워드 스캔들 당시 이선의 분노를 뒤집어 쓰게 된다. 이후 갈리폴리 해협위기 당시 조심스러운 태도로 한국의 참전을 촉구하는 친서를 전달한다. 에드워드 스캔들이 데일리 메일를 통해 폭로되자 데일리 메일를 원망하며 황제 앞에 또 다시 불려나가게 되어 이선의 분노를 다시 뒤집어 쓰게 되면서 진작 임지를 옮겼어야 한다고 후회한다.
- 조지 너새니얼 커즌
커즌 선으로 유명한 인물, 인도의 총독이자 부왕, 티베트가 러시아를 통해 개혁을 하려하자 프랜시스 영허즈밴드를 주축으로 하는 군대를 편성하여 티베트를 침공하여 학살을 벌인다. 3부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대영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며 아내에게만 에드워드 스캔들을 알렸는데 아내가 그 사실을 사위인 오스왈드 모슬리에게 알려주면서 세상에 스캔들이 퍼지게 되고 스캔들을 누설한 인물로 의심받아 곤혹을 겪게 된다.
- 오스왈드 모슬리
아직 영국 노동당에 있던 시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노동당의 기존 인사들과 노선 차이를 보이면서 파시스트가 될준비를 착실히 하고 있다. 커즌 라인으로 유명한 외무장관 조지 너새니얼 커즌 후작의 사위인데 커즌이 자신의 아내에게만 알려준 에드워드 스캔들을 사위를 좋아하는 커즌의 아내가 모슬리에게 알려주면서 모슬리 또한 에드워드의 비밀을 알게 된다. 노동당 인사로서 보수당과 자유당을 동시에 무너뜨릴 건수라고 생각해서 로더미어 자작에게 에드워드 스캔들을 알려주었다.
11.5. 학자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영국의 지리학자이자 영국 왕립 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 여행광으로 조선을 방문하여 이선을 만나서 이선이 여성과 백성들의 교육에 전념하는 것을 보고 세상에서 존재하는 왕족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이라고 평가한다. 한국에 대해 저술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의 내용 역시 원래 역사와 다르게 이선의 진보성을 칭찬하는 내용이 된다. 비숍의 책은 조선에도 유명하여 황후 김아영 역시 비숍의 책을 읽어보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고 싶어했다. 물론 황후가 되면서 그건 무산되고 이선은 죄책감을 느낀다.
- 허버트 스펜서
사회진화론의 창시자. 약자를 돕는 것은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을 내면화한 개화당인사들, 원래 역사에서 친일파 였던이들이 이사람의 사상을 바탕으로 제국주의자가 된다.
- 핼퍼드 매킨더
지리학의 아버지, 역사가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싸움으로 진행된다고 생각하는 인물로 일본에게 동방을 맡겨서는 안되며[200] 한국을 대영제국의 편으로 끌어들일것을 요구한다. 이선의 러시아 스파이 사건 당시 언론을 비판하며 대한제국을 모욕해서는 안된다고 주장, 당연히 비웃음 당하지만 매킨더는 인종차별주의적 태도[201]가 황인종을 단결시킬수 있다며 굴하지 않고 반박한다. 영국의 티베트 원정 이후 그의 이론이 보수당일각에서 받아들여지며 그의 이론을 지지한 이승만이 보수당 소장파와 포럼을 가지도록 도와준다.
- 오연덕
중국식 이름 우례더. 영국령 말레이시아 페낭 출신의 화교로 영국국적이자 중국계 최초로 영국 왕실 장학금을 받아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한 수재. 김필순, 이태준과 함께 만주지역 방역에 나서며 만주 폐스트를 폐페스트라고 주장하나 서양의사들에게 무시당한다. 그러나 서양의사 메즈니가 죽고 기타사토 시바사부로가 오연덕을 지지하면서 폐페스트의 존재가 입증된다. 한국의 도움을 받아 수백만장의 마스크를 보급하는데 청나라가 아닌 한국이 중국을 도운 것 때문에 중국내 지식인들이 만주족의 천명이 끝났음을 실감한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
케인스주의를 만든 경제학자. 주식투자에도 크게 성공한 몇안되는 경제학자다. 원래 역사처럼 베르사유 조약과 파리 강화 회의에서 독일을 쥐어짜면 안된다고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에게 경고하지만 그대로 무시당한다. 이선의 동생 이영과 친분을 쌓으며 앞으로의 경제 상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다. 저술을 통해 연합국 지도자들의 대독일 정책 크게 비판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다. 영국 정계의 자유방임주의 경제 체제를 비난하여 우익들에게 마르크스 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러시아 발레리나인 리디아 로포코바와 사랑에 빠진 탓에 우익언론에게 온갖 수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같은 처지인 이영과 이서아 스캔들에 크게 공감하며 영국 파시스트들에게 한방 먹여주는데 동참한다. 덕분에 영국 보수당은 무솔리니 지지를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케인즈주의를 바탕으로 1932년 대한제국에 초빙되어서 용단개혁의 경제대공황 극복에 힘쓰게 된다.
-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작중에서는 조선의 독립운동가가 아니라 그냥 의사로 스페인 독감 방역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여름 휴가를 맞아 원산을 방문했다가 안드레아스와 함께 원산 학살의 진상을 알리게 된다. 공교롭게도 원래 역사에서나 작중에서나 학살의 진상을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에드워드 카
영국의 외교관,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저자다. 아직 외교관이던 시절이라 이선에게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이선의 진보적인 사상에 큰 감명을 받는다. 소련에 대한 시각또한 유화적이라 이선과 유사하여 금방친해진다. 그래서 한국에 대해서 엄청나게 우호적인 보고서를 제출한다. 이선 역시도 역사학자들의 우상인 카를 만나서 매우 기뻐하며, 이선에게서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며,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다.라는 말을 듣고 큰 감명을 받고 나중에 자기 책에 써먹어야겠다고 다짐한다.
11.6. 언론인
- 허버트 조지 웰스
영국의 언론인이지만 SF작가로 더 유명한 인물, 동시대 인물이지만 직접 등장하는 건 아니고 이선이 미래인이다 보니 그의 소설 타임머신이 잠깐 언급되며 이선과 아인슈타인이 시간여행 관련 설명할 때 다시 언급된다.
- 어니스트 베델
원래 역사처럼 러일전쟁에 종군기자로서 등장하고 역사의 변화로 한국을 괴롭히는 일제를 보고 한국의 독립운동가가 되지는 않지만 일본의 야당과 함께 호헌운동을 벌였기 때문에 일본정부에 눈에가시인 인물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으로 인해 한국에 파견되었고 거기서 종군 기자생활을 하게되고 이후 한국의 자유주의자들과 대한매일신보를 만들어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스코필드와 함께 원산학살의 진상을 알린다. 대한매일신보는 진보적인 언론으로서 계속 한영우호를 증진하나 데일리메일이 에드워드의 성희롱을 폭로하자 자신의 한영우호를 위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슬퍼한다.
- 해럴드 시드니 함스워스
영국 타블로이드 신문인 데일리 메일 사장. 로더미어 자작이라고 주로 불린다. 인종차별주의자,파시스트, 엘리트주의자, 황화론음모론자, 기레기라는 21세기 기준 인간 말종인 인물. 백인 우월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내심 독일인이나 프랑스인도 독재에 순응하고 감정적이라면서 깔보며 영국이 가장 문명화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영국내 혐한인사로 한국과 소련을 싫어하며 원래 역사 성향대로 파시스트를 긍정적으로 여긴다. 에드워드 스캔들을 통해 대영제국에게 요구를 한다는점, 처칠을 통해 영국 방산기술을 공짜로 얻은점, 이선과 한국황실이 백인 여자랑 결혼해서 혼혈을 만들었다는 점.[202], 인도 폭동의 배후로 보인다는 점[203], 항공업 종사자라서 이고르 시코르스키와 러시아계 항공기술자들을 영국에 유치하려고 했으나 그걸 이선에게 빼앗긴 것 때문에 한국을 유난히 싫어해서 에드워드 스캔들을 폭로한다.
- 맥스 아이트켄
데일리 메일의 경쟁사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사주. 비버브룩 남작이라고 불린다. 로더미어와는 신문사 경쟁 관계지만 본인도 파시스트에 인종차별주의자라서 아시아인과 공산주의를 무찌르고 대영제국을 구한다는 대의 아래 로더미어와 손잡고 에드워드 스캔들을 폭로하여 보수당, 노동당, 자유당 등 기존 정당들을 흔들려고 한다.
12.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 → 다뉴브 연방 → 오스트리아 제국
12.1. 황실
- 프란츠 요제프 1세
1896년에 이선이 빈을 방문했을 때 만났다. 사라예보사건이 터졌을 때 이미 86대의 나이였을 정도로 늙은 황제며 아내가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에게 살해당했다. 황태자 암살미수 후 배후에 세르비아가 있다는 게 확정되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결심하고 암살단체 단결 혹은 죽음을 몰랐던 오스트리아 정부는 전쟁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얼마 안 가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보스니아 총독을 암살하면서 세르비아에게 주동자 처벌을 요구했으나[204] 단결 혹은 죽음이 오히려 세르비아에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격분, 전쟁을 선포한다. 전쟁 도중 1916년에 노환으로 사망하며 장례식에는 독일 왕공들이 참석한다.
-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2대 황제, 오스트리아 제국의 제4 대 황제이자 다뉴브 연방의 초대 황제. 슬라브족에 대한 비둘기파로 이영의 개입으로 사라예보 사건에서 생존했다. 이후 평화주의자답게 국내 강경파를 자제시키고, 세르비아에는 적당한 수위의 요구를 하면서, 카이저는 특유의 허영심을 자극해서 안심시키는 식으로 전쟁을 반년 넘게 늦췄지만 결국 세르비아 강경파의 쿠데타로 전쟁이 일어난다.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죽은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단독 강화를 통해서라도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전후 다뉴브 연방으로 국가를 재편하고 본인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 후 스위스로 망명했다.
- 카를 1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다뉴브 연방의 제2대 황제. 팔켄하인이 오스트리아군을 비난하자 오스트리아군은 최선을 다했다며 독일의 작전이 무리했다고 항의한다. 원래 역사와 달리 승전국 간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서 오스트리아, 헝가리,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를 구성국으로 국체를 존속할 수 있게 되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각종 사회주의 개혁정책을 모두 통과 시켜서 붉은 황제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20세기 민족주의 시대에 다문화 국가는 존속하기 어려운것이여서 결국 1923년 경제위기를 계기로 헝가리, 크로아티아는 독립을 선언하고 독일 통일론자들이 합스부르크의 퇴위를 주장하며 위기에 처한다. 파시즘 정권을 경계하던 중 1936년 가을에 사망한다. 향년 49세
- 엘리자베트 마리
결혼후 이름인 엘리자베트 페츠넥이라고도 불린다. 본인도 페츠넥 동지라는 이름을 더 선호한다. 역사대로 오토 남작과 결혼했으나 불의한 결혼생활 때문에 이혼까지 가게된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살아있기때문에 카를 1세가 카톨릭 교리대로 반대를 표하지만 결국 이혼, 그러던 중에 레오폴트 페츠네크라는 고아 출신 평민 사회주의자랑 하기 위해 아예 황족지위도 벋어버리고 결혼하는데 성공한다.[205]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붉은 황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고 사민당이 진보적인 개혁정책을 실행하도록 도와준다. 이렇게 진보적인 이유는 아버지루돌프 프란츠 카를 요제프의 비극적인 자살 이유가 보수적인 오스트리아 황실과 문화에 있다고 믿어서 그렇다. 국민들에게는 가난한이와 여성을 도와서 인기가 높다. 폴란드 사회당 출신인 마르가리타랑 황녀 이라, 황자 이안과도 만나는데 독립적이고 진보적인 여성의 모습을 보여줘서 이라 역시 그녀의 영향을 받아 독립적인 여성이 되고싶어한다.
- 오토 폰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 황태자이며, 1936년 가을에 아버지 카를 1세가 사망하자 황제로 즉위하여 프란츠 요제프 2세가 되었다. 자유주의적 교육을 받아 히틀러와 나치,파시스트들을 경멸하고 있다.
12.2. 정부인사
- 오스카르 포티오레크
원래 역사에서 사라예보 사건 당시 황태자랑 같이 차에 탔던 인물, 보스니아 총독으로 회첸도르프의 압박을 받아 세르비아가 황태자를 암살하려고 했다고 전쟁을 부추기는 보고서를 올리려고 했으나 예심판사가 무시하고 독자적 보고서를 올리면서 실패, 세르비아를 무너트릴 다른 전쟁명분을 찾을가 고민하던 차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해서 본인이 직접 전쟁명분이 되어준다.
-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오스트리아의 참모총장. 세르비아의 전쟁을 주장했던 강경파로 제국 유지를 위해 예방 전쟁을 펼칠것을 제안하고 전쟁이 일어나자 희희낙락한다. 그러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과 협의없이 이탈리아 전선으로 군대를 보낸것 때문에 독일군과 마찰을 겪는다. 프란츠 페르디난트와는 정치적 숙적 관계지만 둘다 오스트리아군을 깔보는 독일군을 증오하고 있으며 내심 독일처럼 전국민의 지지를 받고 싸우고 싶으나 다민족국가인 오스트리아군의 특성 때문에 불가능한 것을 알게 된다. 결국 총사령관 자리에서 물러나 이탈리아 전선으로 파견된다.
- 카를 레너
오스트리아 사회민주 노동당 소속 총리로 카를 1세의 명으로 어떻게든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문제를 해결하고 러시아의 사례를 받아 들여 기간산업 국유화, 주택공유화, 8시간 노동, 실업급여 등등의 혁신적인 정책을 펼치고 토지개혁과 복지정책으로 노동자 계급의 충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했으나 1923년 독일발 경제위기에 의해서 실각한다.
- 호르티 미클로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해군제독으로 헝가리 사회주의 공화국을 진압하러 가지만 루마니아[206]가 지원을 중당하면서 헝가리에서 패퇴하고 오스트리아 해군제독으로 남는다. 그래도 크로아티아가 존재해서 원래 역사처럼 해군없는 나라의 해군제독 신세는 면하나 싶었지만 얼마 못가 크로아티아가 독립하면서 해군없는 나라의 해군제독이 되어버린다.
12.3. 기타
- 니콜라 테슬라
크로아티아계 전기 기술자로 아직 두각을 드러내기 전이라 유럽 파리지사에서 일한다. 이선이 에디슨에게 부탁하고 에디슨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아서 한국으로 보내려고 했으나 막상 테슬라를 데리러 파리로 왔을 때는 테슬라의 능력을 높게 산 찰스 배처러 때문에 미국 본사로 갈 준비를 하러 빈으로 간 상태였다. 이선은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언젠가 조선이 발전하면 알아서 찾아올 것이라며 넘어간다. 그러나 이선이 자리를 잡고 대한제국이 열강 말석자리에 올라도 테슬라는 기술대국인 미국을 버리고 변방인 한국으로 올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워낙 성격이 괴팍하고 금전 감각이 없어서 엄청난 돈이나 지위를 약속해도 안 왔다고...
- 에른스트 폰 헤세-바르텍
오스트리아 귀족 여행가. 원래 역사에서 한국이 현명한 정부를 가지면 발전할 수 있는 민족[207]이라고 평가했는데, 역사의 변화로 이선이 정권을 잡아 진보적 정책을 펼치고 한국이 빠르게 발전하자 이를 호평한다.
- 리하르트 폰 쿠덴호베-칼레르기
유럽인과 일본인 혼혈로 인종차별에 반대하고 베타적인 민족의식도 없는 인물, 아내도 유대인이다. 1923년에 국제 범유럽 연합이란 시민조직을 만들고 진보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물들인 아리스티드 브리앙, 프로이트, 토마스 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지지를 받는다. 물론 전쟁으로 원한이 깊은 대다수의 유럽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운동이라고 조롱받지만, 이선은 최초의 유럽연합운동이란 걸 알고 이들의 사례를 참고하기로 한다.
13. 세르비아 왕국
- 알렉산다르 1세
세르비아의 왕자.에드워드 7세 장례식에 참여하는 걸로 첫등장. 러시아 공주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를 사랑하여 구혼한다.[208] 흑수단에 우호적이었으며 이들의 쿠데타로 불쾌해하지만 세르비아의 섭정이 된다. 루마니아의 마리야와 약혼 후에도 여전히 타티아나를 사랑하여 유럽 왕족중 유일하게 그녀 가족의 망명을 세르비아에서 받아줄 수 있다고 말하지만 타티아나는 세르비아가 한국보다 테러의 위협이 크고 한국이 세르비아보다 더 부강한 나라라는 이유로 거절한다.
- 루마니아의 마리아
루마니아 국왕 페르디난드 1세의 딸로 그리스 왕태자인 요르요스 2세의 아내이자 언니인 엘리자베스, 그리고 자신의 엄마이자 조지5세의 사촌인 마리 알렉산드라 빅토리아와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등장. 강대국인 한국 황제에게 자국의 이익을 위해 유고슬라비아 성립을 관철해달라고 빈다. 그러나 이선은 세르비아 때문에 전쟁이 났기에 그냥 웃는얼굴로 화답만하고 무시한다.
- 니콜라이 파시치
굉장한 달변가로 한국의 이영에게 동양의 피에몬테인 한국과 세르비아는 서로 러시아와 우방국이고 골리앗에 저항하는 다윗 같은 국가라고 말하며 호감을 산다. 이영과 함께 이야기하면서 언젠가는 전쟁을 해야겠지만 당장은 세르비아에 평화가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 선거 이후 민족주의 여론을 무시하고 오스트리아와 합의를 보고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흑수단을 통제하려하지만 오히려 흑수단이 먼저 쿠데타를 이르켜 파시치를 축출하고 러시아로 망명하여 정권회복을 러시아에게 부탁하는 걸로 등장 끝.
- 아피스 드미트리예비치 중령
단결 혹은 죽음, 또는흑수단이라고 불리는 조직을 이끄는 인물. 전왕인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부부를 역사대로 잔인하게 토막 살인하고 페타르 1세를 옹립했다. 중령임에도 흑수단을 이끌고 있으며 사라예보 사건을 기획하고 오스카 포티오레크를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역사랑 달리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안죽어서 체포 안당하고 살아남아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 가브릴로 프린치프
역사랑 달리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이영의 말대로 1차시도후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면서 암살하지 못하지만 대신에 오스카 포티오레크를 암살하는데 성공하여 역사대로 제1차 세계 대전의 단초가 된다.
14. 프랑스 공화국
14.1. 정치인
- 쥘 페리
1832년생 정치가로 교육장관, 외무장관, 총리를 역임하며 무상, 여성, 세속, 의무교육을 진작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한 진보적인 정치인이지만 어디까지나 백인들을 위한 제국주의 정치가로 베트남을 침공한다. 역사대로 베트남을 놓고 청과 전쟁이 발발했으며 너무 무리한 아프리카 침공 역시 감행한덕에 영국과 사이가 나빠지고 이선은 이를 이용해 조선 중립방안을 비스마르크와 추진한다. 청과의 전쟁은 역사와 달리 청나라가 끈질긴 싸움을 한덕에 무승부로 결판났다.[209] 덕분에 쥘 페리는 프랑스 국민들에 의해 세느 강에 던져질뻔 했다.
- 레몽 푸앵카레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분쟁에서 러시아를 지지한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다. 종전후에는 한국을 위한 승전 퍼레이드에 같이 참여한다. 프랑스 총리로 당선된 뒤에는 갈리폴리위기에 영국편을 들지않을 것을 명확히 하고 포슈와 함께 라인란트 지역을 아예 분리시키려는 계획을 실현시키려한다.
- 레옹 부르주아
프랑스의 전 총리로 에밀 뒤르켐이 주장한 유기적 사회론을 바탕으로한 연대주의를 주장했으며 자유방임주의, 파시즘, 공산주의의 실패를 아는 이선은 연대주의를 한국의 대표적인 미래이념으로 생각한다. 이선은 자신이 연대주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기자들에게 말하고 부르주아 본인 역시 인종 차별에 반대하고 세계평화를 바라는 이상주의자라 자신의 이념이 동방의 황제에게 영향을 미친것을 인상깊게 생각한다. 이선의 이러한 행보는 프랑스 국민들이 혁명의 이상이 한국에 수출된것으로 생각해서 한국에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도록했다. 파리강화회의에서는 프랑스 대표중 한명으로 등장, 역사와 달리 이선의 개입으로 본인이 주장하던 인종간의 평등 문구를 삽입하는대 성공한다.
- 아리스티드 브리앙
프랑스의 전시총리로 조제프 조프르를 원수로 진급시킴으로서 사실상 해임시키는 걸로 첫등장하며 로이드 조지와 함께 1917년 서부전선 춘계 대공세에 합의한다. 전쟁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서 프랑스가 소외되자 국민들의 압박을 받아들여서 잠수함과 보조함에 대한 규제 철폐를 요구하고 비슷한 처지인 대한제국 및 이탈리아와 연대, 이 과정에서 영일동맹에 대항하는 대륙국가들의 동맹인 커피클럽이 탄생한다. 범유럽 연합 운동에서 명예회장으로 추대된다.
- 조르주 클레망소
쥘 페리가 청불 전쟁에서 패배하자 이를 비난하면서 첫등장. 실제 인물의 행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대로 상당히 진보적이고 유대인 드레퓌스를 위해 싸울정도로 양심있는 사람이면서 대독강경파. 이선과는 만국평화회의에서 정상회담을 가지고 한불관계를 동맹에 준하게 격상시키는 한불협약을 맺었고, 이후 파리강화회의에서 만나게 된다. 러시아 혁명 이후 디폴트 선언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라 러시아에 대한 초강경 제재를 주장하며, 참전을 피하고 싶었던 이선과 대립한다.
14.2. 군부
- 조제프 조프르
연합군의 총사령관 격 인물로 1915년에 전선에서 밀렸음에도 전면적인 포위 공세로 전환하면 예비군이 없는 독일군을 무찌를 수 있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가지며 솜 전투를 준비하나 이선은 역사대로라면 팔켄하인이 서부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단 걸 알고 알려준다.[210] 그러나 한국의 발언권은 무시당하고 여전히 예비대가 남아있던 독일은 간단히 무찌른다. 결국 니벨에게 자리를 물려준다.
- 로베르 니벨
역사의 변경으로 독일군이 동부에 더 집중하면서 베르됭 전투는 없었지만 이후 솜 전투 실패로 조제프 조프르가 이름뿐인 명예원수로 진급, 사실상 해임을 당한후 취임한 프랑스군 지휘관. 역사대로 니벨 공세를 시도하고 원래 역사 니벨 공세와 베르됭 전투를 합한 것 만큼이나 거하게 말아먹는다.[211] 그후 즉시 경질되고 후임으로 필리프 페탱이 임명된다.
- 페르디낭 포슈
이선이 협상국이 되기 위한 협상을 위해 프랑스에 방문했을 때 육군대학 총장으로 등장, 군사에 관심이 많은 이선을 인상깊게 보고 한국군을 친독에서 친불로 전환하기 위해 필리프 페탱을 파견한다. 역사대로 세계대전 후반부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 등장, 서부전선에서 강력한 공세를 펼쳐 전쟁을 종결한다. 미래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자체를 박살내려고 하는 인물로 한국에게 사인검을 선물 받고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될때 20년 동안의 휴전협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발언을 한다.
- 필리프 페탱
진급이 밀린 중령으로 등장하고 포슈의 명으로 한국에 방문하여 군사기술을 교류하며 덕분에 한국은 1차 세계 대전 주역들의 군사 교육을 모두 받은 나라가 된다. 1차 세계 대전에서는 서부전선에서 위력적인 공세를 펼치며 니벨 공세로 경질된 로베르 니벨대신에 임명되며 1917년 박살나기 직전인 프랑스군을 겨우 수습한다.
- 막심 베이강
포슈의 참모로 폴란드군이 계획한 반격작전에 반대하는 모습으로 등장, 마른 강에서 한것처럼 비스와강에 참호파고 버틸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프랑스 병력을 요구하자 프랑스는 병력을 보낼수없다는 입을 닫는다.
- 샤를 드골
역사의 개변으로 베르됭 전투가 없어서 포로로 잡히지 않았고 동부 전선에서 파견되어 활약하고 적백내전에서 군사고문단의 일원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해서 기갑 부대를 지휘하고, 피우수트스키에게 독립적인 기갑 부대 활용을 건의한다. 이선의 명을 받은 김경천과 친분을 맺게 된다. 김경천과 전차를 이용한 전쟁방안에 대해 토론한다.
14.3. 기타
-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
친한파이자 동양학자인 프랑스 공사로 조선궁녀 이심을 사랑하여 고종과 김옥균에게 부탁하고 고종 역시 프랑스 공사의 환심을 사는게 중요하여 이둘의 결혼을 허락한다. 이 때문에 확고부동한 친한파가 되고 청나라가 조선에 압박을 가할 때 프랑스가 한국편을 들도록 유도한다. 물론 프랑스는 플랑시때문이 아니라 베트남을 차지 하기 위해 청나라와 전쟁을 벌였으나 역사의 변화로 무승부로 끝나자 그것에 대한 앙심으로 행한일이다.
-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이선이 노년의 그를 만났다. 오랜 숭배자였다면서 최상의 예우를 표하자 크게 기뻐하고, 초상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하자 처음엔 동양 군주의 초상화라 잠깐 부담스러워하지만 몇가지 요소만 빼고 원하는 대로 그리라는 말에 승낙하고, 이때 그린 초상화가 3부의 표지가 됐다는 설정이다. 이선이 내탕금으로 그림을 사들이고 그림에서 위안을 얻으며, 국민들도 자신과 똑같은 감상을 느끼길 바라며 미술관을 지어서 전시하고 있다는 말에 진정한 예술 애호가라며 감탄한다.
- 펠릭스클레르 리델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 1861년 조선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도주, 프랑스 해군에 알려 병인양요의 원인이 된 신부. 프랑스 방문 당시 다시만나며 이선이 병인양요 원인임을 지적하자 리델 신부 역시 이를 인정한다. 이선은 리델의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 감탄하고 한국어 사전의 유럽 출판 ,종교의 정치개입 금지와 조선의 풍습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종교적 자유를 보장해준다.[212]
-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3부 시점에서 서울 대주교를 지내고 있다. 원래 역사의 행보를 반영해서인지 정교분리 원칙을 내세워 신부들이 원산 학살의 진상을 알리려는 것을 막았지만, 본인은 개화당 정부와 야합하고 있다.
- 제라드 메즈니
만주페스트 당시 청나라에서 방역 전문가라고 파견한 의사. 천진 육군군의 의학당의 교장. 페스트는 오직 선페스트, 즉 접촉으로 만 전염된단 당시 사고 방식을 그대로 가진 의사. 동양인 몇명이 주장하는 폐페스트 이론을 무시하고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고 환자를 돌본 결과 페스트에 걸려 죽고 이사람 시체를 부검하여 폐페스트임이 증명된다.
15. 이탈리아 왕국
15.1. 정치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파리강화회의 당시 총리로, 원래 역사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귀국 후 사퇴했지만 본작에서는 파시즘의 발호를 경계한 이선의 도움으로 피우메를 얻는 성과를 거두고 귀국했다.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이선이 파리강화회의 중 회견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역사의 행적을 아는 이선은 그를 마뜩치 않아하고 파시즘의 발호를 거듭 경고하고 국민이 선출한 정부를 믿을 것을 권고하는데, 가르치는 것 같은 태도를 다소 맘에 안 들어하지만 이선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일단 듣고 그의 말대로 할 것이라고 다짐하긴 한다. 니콜라이 보다는 똑똑하지만 이사람도 무능하고 소심한 편이라서 로마 진군 당시 지곤조기를 외치며 계엄령을 내리지 않으려고 했으나 조지 뷰캐넌 영국 대사와 이위종을 통한 이선의 개입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파시스트당은 체포되고 무솔리니는 스위스로 도망간다. 여전히 이선이 자신을 가르치는 태도를 맘에 안들어하긴 해도 이선의 정세판단이 뛰어나고 니콜라이 차르가 그걸 안들어서 혁명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선을 나름대로 높게 평가하지만 4부에 들어와서 사회당이 승리하자 파시스트들을 총리로 올려버린다.
- 조반니 졸리티
자유주의 우파 성향[213]의 정치인으로 80대의 나이에 1923년에 여섯 번째로 총리에 지명된 거물로, 본인의 성향과 달리 극단주의 세력을 혐오해서 로마 진군을 진압할 것을 결의한다.[214] 경찰 병력을 이용해서 시간을 벌고 국가에 충성하는 알피니 산악여단을 계엄군으로 동원하고 영국과 한국의 도움을 받아 회의적이었던 에마누엘레 3세를 설득해서 로마 진군을 진압하는 업적을 이룬다.
15.2. 군부
- 피에트로 바돌리오
이탈리아의 육군참모총장으로 검은 셔츠단이 오합지졸이라는 것을 정확히 눈치채고 자신이 반란진압 책임자가 될것이라며 국왕에게 계엄령의 결단을 촉구한다. 계엄령이 선포되자 무솔리니의 로마진군을 저지한다.
- 아르만도 디아츠
바돌리오의 전임자로 2차 피아베강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의 승리자. '승리의 공작'이라는 칭호까지 받은 전쟁영웅이지만 바돌리오랑 달리 로마진군을 진압하는 계엄령을 내리면 내전이 일어날 것라고 국왕에게 경고하는데 사실 파시즘 정부가 들어서면 군인대우가 나아지고 공산주의도 없어질 것라는 정치적 계산으로 한말이었다.
- 조반니 메세
원래 역사와 같이 유능함을 인정받아 대령 계급으로 왕의 군사보좌관을 하고 있었으며 로마 진군 때 계엄군을 지휘해서 성공적으로 저지한다.에밀리오 데 보노가 전쟁영웅이라는 점을 앞세워 병사들을 선동하자 병사들에게 저들은 쿠데타 군이라는 걸 숙지시켜서 간단하게 진압한다.
15.3. 파시스트
-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파시즘의 시초가 되는 인물로 예술가이자 전쟁영웅, 원래 역사에서는 피우메 점령을 벌였지만 여기서는 1919년에 차라점령을 벌이고 카르나로 섭정국을 세운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에 의해 토사구팽 당하고 스위스국경 호숫가에 은거하게 된다. 그러나 무솔리니의 로마 진군이 대실패하고 무솔리니가 도망가면서 이탈로 발보에 의해 파시즘 지도자로 추대, 30년 대공황을 기회로 권력을 잡는다.
- 베니토 무솔리니
원래 역사와 달리 '불구가 된 승리'는 피했지만, 이탈리아의 오랜 지역 및 계급갈등으로 인해 사회당의 세력이 커지면서 반작용으로 전투파쇼단의 리더로 세를 불리고 있다. 역사의 변화로 로마 진군은 늦춰줬지만 결국 실행한다. 원래 역사처럼 추한 꼴을 다보이며 로마로 진군하지만[215] 미래인인 이선의 개입으로 인해 대실패하고 본인은 스위스로 도망간다. 이선은 그꼴을 보면서 무솔리니의 공격은 이탈리아 산악 사단에 막힙니다라고 조롱했다.
- 이탈로 발보
젋은 파시스트로 밀라노 신문사에서 도망갈 준비하는 무솔리니를 대신해서 로마진군을 이끌지만 본인도 로마진군이 엉성하다는 걸 알고 한숨을 쉰다. 그후 진압하러온 산악사단에게 잡혀서 체포된다. 체포된 뒤에도 무솔리니의 행방을 불지 않았지만 이미 다른 동료인 체사레 마리아 데 비키가 불어버렸다. 그래도 무솔리니와 달리 이탈리아에 계속 남아있다가 단눈치오를 파시즘 지도자로 올리는데 성공하고, 나이든 단눈치오 대신 실권을 잡는다.
- 에밀리오 데 보노
파시스트당의 가장 유명한 예비역 육군중장으로 메세대령도 그를 알고 있다. 2차 피아베강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활약한 군인이라 이를 언급하며 메세대령을 회유하려하나 실패, 두체의 연락도 없자 바로 패배를 인정하고 빠르게 항복한다. 이탈로 발보처럼 무솔리니 위치에 침묵을 지킨다.
16. 독일
16.1. 황실
- 빌헬름 1세
독일의 황제로 이선이 아버지 고종에게 황제로서 모범으로 제시한다. 이선이 차르를 만나는 동안 사망하고 대한제국 칭제건원 당시에 개화파에서 칭제건원 목적으로 다시 언급. 빌헬름이 니콜라이 2세에게 삼제동맹 부활의 당위성을 위해 언급한다.
- 프리드리히 3세
비스마르크와 대립하는 독일의 자유주의 황태자로 아들 빌헬름을 영국식 자유주의자로 키우려고 했으나 비스마르크가 개입하여 빌헬름을 군국주의자로 만드는 바람에 실패한다. 역사대로 1888년에 후두암으로 사망하며 이선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담배 피다 건강으로 단명한 황제라서 그런지 에드워드 7세가 담배를 즐기자 이선이 이를 언급하기도 하고 이선이 말로리 바이스 증후군에 걸리자 독일인 의사인 분쉬가 언급하기도 한다.
- 빌헬름 2세
주인공 이선이 완화군일 때, 황제가 되어서 두 번 만났고, 의화단 전쟁 때 조선과 함께 공사 피살의 피해를 입는 등 작중 바뀐 역사에서 꽤 자주 얽히긴 하지만 행적은 원래 역사와 별로 다르지 않으며, 실제 인물의 즉흥적이고 막나가는 모습을 잘 묘사했다. 이선이 독일에 대해서 아첨하자 바로 극동에 개입하고[216] 이선 앞에서 황화론을 설파할 정도로 현실감각이 없는 인물. 말도 안 되는 음모론을 설파하고 돌아다니다가 대전쟁에서의 패배로 결국 쫒겨나고 이선이 잠깐이나마 팔병신이라 부르면서 영국인들을 제외하면 가장 상대하기 힘들었던 인물로 평가한다. 네덜란드로 도망간 뒤에도 독일 황족이 공화국을 인정할 경우 모두 호적에서 파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해군제독이자 빌헬름 2세의 아우. 독일의 해군제독으로서 독일 함대협회의 명예회장. 대한제국 성립 당시 방문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 형과 달리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독일제국 멸망 이후에는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 이선이 배후로 있는 발렌베리가문과 밀착하여 독일 조선소와 기술을 한국에 팔아치운다. 그렇기에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카이저 자리를 미끼로 쿠데타 지지를 호소했을 때 제국이 망한 것과 전쟁 패배는 자신과 루덴도르프 같은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깔끔히 무시한 후 발렌베리 가문에 알려 버린다.
16.2. 총리
- 오토 폰 비스마르크
이선이 존경하는 인물로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와 대화에서 첫 등장. 이선은 세금을 내라, 군대를 가라, 닥쳐라[217]로 표현되는 프로이센식 개혁을 조선에 접목한다. 이선이 세계를 돌아다니며 외교관계를 수립할 때 직접만나게 되는데 원래 역사대로 유럽 정세에만 집중하여 동아시아 문제에는 불개입을 원칙으로 했지만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이선을 만나고 친러정책과 프랑스와 영국의 관심을 아시아로 돌려야한다는 것에 의견이 일치, 이를 위해 독일의 투자와 고문관을 받는데 합의 한다. 이선이 원래대로라면 비스마르크가 했을 “외교란 러시아와 싸우지 않는 것이다.”를 미리 말하자 크게 공감하고 이선이 이토 히로부미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것이라고 칭찬한다.
- 베른하르트 폰 뷜로
카이저의 말에 따라 세계 정책을 수행하는 독일의 재무재상겸 총리. 차르의 변덕을 잘 조율하여 비스마르크 이후 최장기간을 재임한다. 독일의 팽창을 의미하는 양지 연설로 유명하여 팽창주의자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그는 군부에 비해 외교적 온건파로 카이저의 말도 안되는 정책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선에게 동아시아 문제는 독일 제국에 별거아닌데 카이저가 계속 개입하려든다는 불만을 표하며 차르에게 한 것 처럼 조언을 좀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작중에서는 베트만-홀베크라고 불린다. 온건파로 스톨리핀과 함께 독일과 러시아의 군비가 과도하게 지출되었다는 것에 동의하고 데탕트에 합의한다. 그러나 발칸문제가 심각해지자 발칸 문제에 손을 때고 카이저에게 신중론을 설득하였으나 대전쟁을 역사에 비해 고작 7주 늦췄을 뿐이었다. 대전쟁중에는 독일이 전후에 유럽을 어떻게 통치할것인가하는 9월 계획을 세웠으며 티르피츠의 사임에도 불구하고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억제했으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결국 다시 허락하고 만다.
- 막시밀리안 폰 바덴
독일제국의 총리로 자유주의자이면서 귀족인 인물, 에리히 루덴도르프도 바덴의 취임을 지지했는데 그 이유는 전쟁 패전의 책임을 바덴에게 뒤집어씌우려고 받아들였다.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온건한 타협한을 내놓지만 그마저도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거부로 무산된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바덴 내각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것을 요구하고 카이저가 바덴내각을 선택하면서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해임되지만 혁명은 막을수 없었고 결국 에베르트 말대로 카이저를 토임시킨다는 일방적인 발표를 하고 에베르트에게 총리 자리를 넘긴다.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제국의 마지막 총리로 사회민주당 지도자지만 급진적인 혁명을 싫어하는 인물, 하지만 혁명을 막을수 없다는 걸 알고 바덴에게 황제 퇴위를 요구한다. 필리프 샤이데만이 공화국을 선포하자 분노하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독일 첫 민주선거인 1919년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베르사유 조약이 가혹하단걸 알지만 결구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한다. 독일공화국 대통령이 된후는 슈트레제만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대비한다.
- 필리프 샤이데만
사회민주당 지도자이자 독일의 부총리로 독일 공화국을 선포한다. 공화국에서는 초대 총리를 맡으며 베르사유 조약을 수락 수 없다는 이유로 내각 총사퇴를 선포했다. 공화국을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우익암살미수가 있었다.
-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패전후 독일의 지도자로 문민통제가 안되는 군대, 답없는 경제 상황, 공산당과 극우단체의 임박한 반란 위협에서 독일정부를 지키려고 노력한다. 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글복하여 우익들에게 민족배반자라고 욕을 들어 먹는다. 결국 답없는 상황속에 독일 군사쿠데타가 임박하자 쿠데타에 미온적인 젝트 장군에게 찾아가서 자신은 끝까지 쿠데타에 저항할것이라고 말한다. 젝트는 그의 말을 듣고 쿠데타를 진압하며 슈트레제만은 젝트에게 덕분에 쿠데타를 진압했다고 칭송한다.
16.3. 정치인/관료
- 파울 게오르크 폰 묄렌도르프
1879년 천진 주재 독일 대리영사로 이홍장의 추천을 받아 조선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선이 직접 고용계약서를 작성했으며 원래 역사처럼 조선의 돈을 받게 되자 조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 일하는 유능한 관료로 등장한다. 조선을 위한 개혁안을 미리 만들어 놓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 이선은 그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하며 파울도 똑똑한 황제인 이선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 헤르만 부들러
1884년 조선 주재 부영사. 1885년 조선중립국안을 제안했다. 원래 역사와 달리 이선이 조선 역시 불가리아와 같은 조공국이며 조선이 동양의 발칸반도가 될수 있다는 사실을 서양에 알리고, 그리고 프랑스와 영국관계 악화와 더불어 이를 이용,러시아와 영국의 분쟁을 중재하려는 비스마르크의 외교술 덕분에 조선중립안이 통과된다.
- 아루트르 치머만
미국이 참전하게 된 계기가 된 치머만 전보를 보낸 사람. 원래 역사와 다르게 전보를 보낸 배경에 한국이 깊이 관여돼있다. 주 중국 대사였던 파울 폰 힌체가 러시아가 더 이상 전쟁 수행을 하기 힘드니 한국과 일본에게 연합국을 배신하고 동맹국을 도우면 한국에게 만주를 주고, 일본에게는 태평양 이권을 주겠다는 제안이 추가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를 먼저 미국에 알림으로서 미국에게 신뢰할 수 있는 동맹이라는 확신을 받는다. 한편 일본은 사실을 숨긴것 때문에 미국에게 의심을 받고 미국인들이 재미 일본인을 차별하는 계기가 된다.
- 헤르만 뮐러
독일의 외무장관, 부상 당한 프랑스 상이 군인들의 눈총을 받으며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는 역할을 맡았다.
-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무장관으로 재직중 베르사유 조약체결에 도움을 주었단 이유로 우익무장단체에게 암살된다.
- 카를 리프크네히트
로자처럼 역사의 변화로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일어나지 않은 탓에 살아남았지만 코민테른의 뜻을 따라 무력으로 정권을 쟁취할지 , 아니면 로자의 말을 따라 선거로 정권을 획득할지 고민한다. 결국 로자의 완강한 반대로 독일공산당은 코민테른과는 달리 혁명의 순수성을 지키는 길을 걷기로하고 무력봉기도 취소한다.
- 휴고 스티네스
독일인 사업가. 초인플레이션이 터지자 독일의 기업들을 인수하면서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218] 자국을 점령한 프랑스군과 접촉하기도 하는 등 자신의 기업만 챙기는 인물. 유대인임에도 독일에 헌신한 발터 라테나우와 달리 독일인임에도 독일보다는 본인의 자본을 불리는 데만 신경쓰는 인물이다.[219] 어떻게 보면 독일 우익들이 주장하는 독일인의 돈을 착취하는 유대인 배후자본에 실제로 가장 가까운 인물.
사회주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세력과 돈과 연줄을 가지고 있는데 극우인 에리히 루덴도르프를 지원한다던가, 또는 그 대척점에 있는 현직 총리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같은 당이기도 하고, 심지어 독일에서 라인란트를 분리하려는 분리주의와 프랑스 세력과도 연줄이 있는등. 자기 자본을 지키기 위해서 온갖 정치세력과 손을 잡는다. 본인이 지향하는 목표는 유럽경제공동체를 만들고 자기가 정상 자리에 오르는 것이지만 현실적인 문제[220]로 곤란을 겪던 중 킬 군항 조선소와 HAG[221]를 인수하려는 마이어 무역회사의 배후가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임을 눈치채고 조사를 하던 중 한국황제가 발렌베리의 배후임을 눈치채고 외국인이 독일 기술을 빼가려한다고 생각하여 막으려 하지만[222] 발렌베리가 배후가 카이저의 동생인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 대공이라고 답변하자 찜찜함에도 넘어간다. 루덴도르프가 점점 선을 넘어 쿠데타를 준비하자 루덴도르프를 통수치고 쿠데타 사실을 슈트레제만에게 그사실을 알린다. 슈트레제만은 그 역시 의심하고 있었다고 말하지만[223] 결과적으로 독일을 구한셈이라 감사를 표한다.
- 콘라트 아데나워
쾰른 시의 시장으로 라인란트의 자치를 요구하지만 라인란트 분리를 획책하는 프랑스의 정책에는 강하게 반발하며 라인란트를 독일에 남게하는 대신 프랑스와 화해하고 프랑스-독일의 경제 연합을 주장한다. 슈티네스의 구상에 들어맞기에 슈티네스의 지원을 받으며 라인란트 분리주의를 길들일 목적으로 화폐유통을 막은 독일 정부에 반발하여 더욱더 프랑스와 접촉한다.
16.4. 나치
- 아돌프 히틀러
1차 대전에 참전했으나 행보가 미묘하게 달라져서, 하사가 됐고 전후 바이에른이 아니라 원래 역사의 자유군단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이는 강철군단에서 선동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후 프로이센 군부의 쿠데타에도 참가했으나, 젝트가 진압에 나서자 유대-마르크스주의[224]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며 무기를 내려놓는다. 군에서 나온뒤로는 변방 시골에 선동가로 지내다가 괴링에 소개를 받아 루덴도르프에게 발탁되지만 역사의 변화로 무솔리니의 실패를 아는 루덴도르프는 히틀러를 단순한 선동가로 치부한다. 히틀러 역시 원래 역사처럼 융커들이 무능하기짝에 없고 진정한 게르만 민족 혁명을 위해서는 융커들이 사라져야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군사쿠데타가 대실패로 끝나자 무능한 융커들 때문에 실패했다고 울분을 표하며 체포를 피해 도망친다.
하지만 4부에서 결국 다시 독일로 가서 재기에 성공하였고 원래 역사대로 독일에 나치즘 광풍을 일으키며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힌덴부르크와 싸우는바람에 늦게 정권을 잡고, 융커들과 대립하게되어서 장검의 밤은 일어나지 않는다.
- 그레고어 슈트라서/오토 슈트라서
통칭 슈트라서 형제들. 히틀러가 도망다니던 와중에 나치당을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융커와 히틀러의 간격이 벌어지면서 장검의 밤도 일어나지않아서 멀쩡히 활동중이지만 히틀러가 융커와 타협하면서 소외된다.
- 요제프 괴벨스
뛰어난 선동 능력으로 그 유명한 지갑일화를 보여주며 등장. 나치당 외교인사로 이선을 만나서 접대하나 그를 외교 대상으로 보지 않는 이선은 그를 무시하고,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그냥 평범한 부르주아 군주라고 보고한다.[225]
16.5. 독일 육군
- 파울 폰 힌덴부르크
독일의 장군이자 조선에 파견된 군사 고문단으로 이선이 빌헬름에 아부하여 독일 군사고문단이 파견될때 원래는 일본에 파견된 맥켈소령이 갈 뻔했으나 멕켈소령이 동양근무를 거부, 힌덴부르크 역시 거부했으나 빌헬름 황제의 설득, 한국으로 가게된다. 한국의 징병제를 만들었지만 팔켄하인과 다르게 유배라고 생각해 열의가 없었다. 1차 세계 대전에서는 에리히 루덴도르프의 상관으로 등장. 도움안되는 오스트리아군을 욕하고 아예 오스트리아군 지휘권도 가져온다.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함께 자주 출연하며 대전기 행적 역시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거의 동일하게 따라간다. 전후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려고 하자 결사항전을 외치며 저항할것을 촉구했다.
이진과 타티야나 부부가 유럽을 순방할 때 다시 등장하며 우익의 단일후보로 등장한덕에 독일의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한다. 복고주의자라서 비록 적국이었지만 몰락한 차르의 딸이 다시 황후자리에 오른것에 만족스럽게 생각하며 과거에 자신이 한국에서 근무하였고 그다음에는 한국과 전쟁으로 싸웠으며 다시 평화가 찾아와서 공화국의 대통령으로서 황태자 이진을 만나 우호적인 대화를 나누게 된것에 깊은 감정을 느낀다. 이진을 만나 독일 민족은 언젠가 다시 일어날것이라는 말을 전한다.
- 에리히 폰 팔켄하인
원래 역사처럼 무자비하고 오만한 프로이센 장군. 힌덴부르크랑 달리 조선을 자신의 사상을 구현해볼 실험장으로 여겨서 열정적으로 일한다. 대한제국에 고문단으로 와서 총력전의 개념을 설파하고 이선과 친분을 맺고, 러일전쟁에도 관전무관으로 참전 후 귀국해서는 아시아 전문가로 활약한다. 그리고 이 경험은 1차 대전의 경로를 완전히 틀어 놓았는데, 러시아의 실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러시아를 전열에서 탈락시키고 해상봉쇄를 뚫고 서부전선에 집중하기 위한 자원과 식량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크라이나를 침공해야 한다는, '심판 작전'을 입안해서 카이저의 승인을 받는다.
이 계획은 처음에는 적중해서 러시아에 큰 피해를 입혔으나, 양익을 맡은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무능과 낮은 전투의지, 그리고 소방수로 투입된 브루실로프 장군의 역공과 빠른 대응으로 인해 무산되고, 오-헝에 대한 고압적인 태도까지 겹쳐서 해임당한다.
- 알프레트 폰 슐리펜
독일군의 최고위 참모총장, 팔켄하인을 불러 러일전쟁과 관련된 아시아의 여러 상황들을 질문하고[226] 한국에 만약에 일본이 처들어온다면 임진왜란처럼 총력전을 할것이라는 팔켄하인의 말을 듣고 미친놈들이라고 평가한다. 대독포위망이 결성되려하자 러일전쟁이 끝나기전에 예방전쟁을 치르기 위해 슐리펜 계획을 준비하며 모로코 위기 당시에 전쟁을 개전하려고 했으나 카이저의 유유부단함 때문에 실패하고 이후에도 강경책을 주문하다 은퇴당한다.
-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일명 소(小) 몰트케, 슐리펜 작전에 따라 프랑스를 공격하려하나 황제가 만류하려하자 이미 멈출수 없다고 말한다. 황제에게 삼촌 대(大)몰트케에 비교당하자 분노하여 참모본부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역사대로 슐리펜 계획이 실패하자 퇴진당한다. 그자리는 카이저의 총애를 받는 팔켄하인이 차지한다. 여담으로 대(大)몰트케는 워낙 유명한 장군이다보니 작중 등장인물에게 꾸준히 언급된다.
- 에리히 루덴도르프
전쟁이 국가존립의 전부라는 총력전 사상을 지지하는 전쟁광이고 시대착오적인 융커 그 자체다. 69세의 노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지휘를 맡고 있는 인물로 강력한 동부전선 지지자. 동부전선을 빠르게 마무리하고 서부전선으로 나가길 원하는 팔켄하인과 달리 동유럽을 독일 지배하의 괴뢰국으로 만들고 영미권과 싸우자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극도로 잔인하여 독가스를 일부러 더 사용해서 러시아군을 미친듯이 죽인다. 그러면서 서부전선은 영국을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기아상태로 만들면 된다고 주장했으나 역사대로 미국의 참전을 불러오고 만다.
팔켄하인이 해임되자 자신이 원하는대로 동부전선에 집중하고 러시아민주공화국의 강화요청도 빨갱이라고 무시하며 동부전선에 총공세를 가한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두 전투에서 동부공세가 막히자 본인조차 독일의 패배가 다가왔음을 직감한다. 이후 카이저에게 해임당하자 2주뒤 독일제국이 망할거라는 악담을 퍼붓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전후에는 배후중상설을 설파하거나 바이에른에서 극우활동을 벌이고 있다. 역사의 변화로 무솔리니가 로마진군에 실패하자 역시 민중을 동원한 파시즘보다는 전통적인 형태의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한다.하인리히 폰 프로이센을 카이저로 옹립하려고하나 거부당하자 형제가 둘다 비겁자라고 욕한다. 아돌프 히틀러를 단순한 선동가로 취급하고 시대착오적 군사독재를 목표로 쿠데타를 일으키나 젝트 총감이 쿠데타를 거부하자 쿠데타는 실패하고 스위스로 도망간다.
- 막스 호프만
독일군의 참모장교로 원래 역사처럼 매우 뛰어난 참모장교다. 마주리안 전투에서 러시아군을 괴멸시켜 동부전선이 독일군 우위로 흘러가는데에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마주리안 전투의 공이 장군인 에리히 루덴도르프나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공으로 돌아가자 자신의 공이 도둑 맞았다고 생각하고 더욱 공격적으로 공을 세우려고 한다. 이후 벌어진 상트 페테르부르크 전투에서 한국군을 인종적 편견 때문에 가장 약한 군대로 오판[227]한다. 이후 한국군의 종심방어 전술에서 철저하게 패배당한다.
- 한스 폰 젝트
본작에서는 베르사유 조약 체결 혼란 이후 독일에서 내전이 발생해서 베를린에 군사정부가 세워지자, 바이마르로 탈출한 사민당 정부의 요청을 받아 진압했다. 원래 역사의 행보를 반영해서 군국주의자지만 때를 기다렸다가 소련과 손을 잡고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해야 한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비밀리에 트로츠키와 접촉, 라팔로 조약 이후 소련과 함께 전차 개발을 하고 있지만 공산주의를 싫어해서 극우 단체 검은 제국군이 날뛰도록 놔두고 쿠데타 직전까지 방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독일 총리 슈트레제네만이 결사항전으로 버틸것이라며 통첩을 날리고 독일 내전의 가능성을 언급하자 검은 제국군을 쓸어버린다. 물론 그 대가로 작센주의 공산주의자들도 함께 쓸어버린다.
- 빌헬름 그뢰너
독일의 병참감으로 자신을 퇴위시키려는 사민당에 반발한 빌헬름 2세에게 베를린 진공 명령을 받으나 각 전선 사령관들의 의견을 듣고 빌헬름 2세에게 아무도 카이저를 따르지 않으며 독일군의 깃발의 맹세는 이미 단어에 불과하다고 통보한다.
- 페도어 폰 보크
역사대로 우익무장단체 검은 제국군과 젝트 장군사이의 연결을 담당하는 인물, 루덴도르프 장군의 쿠데타가 발생하기 직전, 젝트의 명령없이 움직이는 검은 제국군에게 젝트장군은 진압명령을 내릴거라고 경고한뒤 해산명령을 내린다.
16.6. 독일 공군
- 헤르만 괴링
히틀러를 루덴도르프와 주선한 에이스 전투기 파일럿. 히틀러를 단순한 선동가 그이상으로 평가하며 그를 중책으로 쓸것을 제안한다. 히틀러, 에른스트 룀과 함께 군사 쿠데타에 참여하지만 앞장서서 독일군과 대치하다가 하반신에 총을 맞고 실려간다.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나치 우익을 대표한다.
- 군터 플뤼쇼브
역사상 첫 공중전을 치른 인물로 전후 파타고니아를 탐험한 인물, 타우베 정찰기를 타고 권총을 쏘며 서왈보와 공중전을 치른다. 이후 키아우초우에 주둔한 군인들이 항복하자 혼자 기밀문서를 지참한후 비행기를 타고 도망갔다.
16.7. 독일 해군
-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독일 대양해군의 지지자로 카이저의 건함 경쟁을 위한 정책을 밀어붙인다. 1차세계 대전에서는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참모총장 팔켄하인이 중단시키자 반발하여 사임한다.
- 헤닝 폰 홀첸도르프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강력하게 지지하며 영국의 식량사정으로 보아 6개월내에 영국을 항복시킬것이고 그러면 미국역시 참전을 꺼리게 될것이라는 구체적 지표를 제시한다. 물론 결과는 미국 참전이었다.
16.8. 독일계 유대인
- 발터 라테나우
유대인인데도 독일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본가이자 민족주의자. 1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제국을 위해 놀라운 수완을 발휘해 국가배급체제와 총력전체제를 조직한다. 소련도 참고할 정도로 뛰어난 국민 배급체제를 만든인물로서 독일이 전쟁에서 패배하자 공화국을 지지하는 자본가[228]로 돌변하여 온건 사회주의자들과 타협을 이뤄내고 독일과 국제적으로 고립된 소련이 힘을 합쳐서 1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에 대항해야한다는 합리적인 구상을 한스 폰 젝트와 함께 실현하려고 하지만 소련 유대인 혁명가들과 야합했다는 유대인 음모론을 신봉하는 극우에게 암살당한다.
- 쿠르트 아이스너
바이에른 주 총리로 유대인이며 독일 우익 무장단체 검은 제국군에게 암살당한다.
- 로자 룩셈부르크
원래 역사처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것은 똑같지만 군부 쿠데타로 우익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신뢰가 떨어져서 사민주의와 같은 좌익계 정당이 의석을 많이 차지한 덕에 스파르타쿠스 봉기가 일어나지 않았고 원래 역사와 다르게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살아남을 수 있었다. 폴란드계 유대인이라서 독일 극우들에게 두세배로 증오받는 인물이고 독일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서 호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코민테른이 무력혁명을 요구하자 코민테른이 기회주의적으로 타락했다고 비난하고 좌우익의 암살을 피해 숨어지내고 있었지만 이후 놀라운 사실이 드러나는데 마르가리타와 같은 혁명 동지였다.[229] 같은 길을 걷던 동지가 차르의 벗이자 동양 전제군주의 정부가 되었다는 것에 놀라움과 빈정거림을 표하지만 황제가 공산주의에 대해 높은 이해를 하고 자신의 글을 읽었다는 걸 알자 놀란다. 마르가리타와의 회담을 통해 폴란드가 독일봉기를 가만히 두지 않을거라는 논거를 획득하고 무력봉기를 취소시킨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선이 오래전부터 눈독을 들이고 있던 과학자로 스위스 특허청에 근무할 때부터 계속 러브콜을 보냈지만 번번히 거절당한 것으로 나온다. 결국 이선 본인이 직접 국빈으로 모시고 이강이 숙소까지 제공해주면서 에드워드 8세보다 더 성대한 환영식을 열어서 한국에 유치하려지만 기술강국인 독일과 달리 비백인 사회이자 과학기술 수준이 처참한 대한제국에 남는 것을 거절하고 한국 황제와 이야기하며 본인의 인종 차별주의적 생각을 고치는 변화가 일어난다. 이선은 혹시나 해서 지구 최고지성인 아인슈타인에게 시간여행이 가능하냐고 물어보지만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는다. 이선은 그에 대한 답례로 자신이 미래를 볼 수 있고 앞으로 세계 대전이 한 번 더 있을 것이고 그 후에는 인류가 우주에 진출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선이 웃으면서 한 말이라 아인슈타인도 그냥 웃어넘기지만 이선의 별명이 차르의 예언자인 걸 아는 아인슈타인은 다가올 세계 대전을 걱정한다.
- 프리츠 하버
인공 질소비료의 아버지이자 독일의 애국자인 유대인 과학자로 대전쟁 중 독가스를 만들어서 뿌린것 때문에 전범으로 몰려 위기에 처한다. 그걸 눈치챈 이선에게 한국으로 넘어올 것을 제안하지만 워낙 애국자라서 거절하고 독일에 계속 남는다.
16.9. 기타
- 프란츠 에케르트
원래 역사대로 대한제국 애국가를 만들며 황실 군악대를 이끌었다. 은퇴 후에도 한국에 잔류하여 음악인들을 양성했다고 하며 원래 역사와 달리 이선이 서양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지원들 많이 받은듯.
- 하인리히 마이어 & 게르하르트 마이어
하인리히 마이어는 세창양행이라는 조선 최초의 서양인 회사, 동아시아 무역의 중요한 파트너가 된다. 명예 총영사로 부임하였으며 원래 역사처럼 한국의 다양한 문화재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변화된 역사에서도 한국의 갑옷과 옛 국기를 소유하고 있다.
게르하르트 마이어는 하인리히의 아들로 대전쟁에도 살아남은 마이어 무역회사를 운영하면서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을 배후에 두고 경영위기에 독일의 조선소를 인수하려고 한다. 그리고 발렌베리 뒤에는 하인리히 폰 프로이센이 있고 그뒤에는 이선이 있다. 이선이 독일 기업과 기술들을 한국에 빼돌리는데 도움을 준다.
- 칼 볼터
세창양행을 마이어와 함께 공동으로 건립한 독일인, 상해에서 큰부를 이룬 제임스 존스턴[230]이란 영국인의 딸과 결혼하여 인천 제물포에 여름별장을 지었고 붉은 지붕의 별장이라 김옥균의 푸른기와의 별장과 함께 인천의 랜드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근처에는 제물포 구락부가 있다고 한다.
- 막스 폰 브란트
조독 수호조약을 체결한 주청 독일공사로 주조선 미국공사인 어거스틴 허드의 딸 헬레나랑 결혼하는 데 브란드는 56세고 헬레나는 23라고 나온다. 허드는 처름에는 반대했지만 받아들였다고 한다.
- 앙투아네트 손탁
여기서는 카를 베베르의 처남의 처형으로 나온다. 한국 왕실의전관으로 조선에 얼마없던 서양인 여성, 왕실 의전관으로 이선을 따라 유럽회담에도 참여하며 같은 여자인 아영과 마르가리타와 교류한다. 이후 등장은 없지만 역사대로 손탁 호텔은 등장한다.
- 리하르트 분쉬
호열자 사건 때 첫 등장, 독일의 의사로 역사대로 황실 주치의가 된다. 서양 의사로서 고종의 건강을 돌보거나 이선의 건강을 체크하지만 어느날 이선이 쓰러졌을 때 하필이면 청도로 휴가를 갔다. 그래서 다른 서양의사를 수소문하나 조선인 보조의들은 다른 지역에 외진을 나갔고 이선의 신하중 의사인 서재필은 연락이 없었다. 결국 이선은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의 치료를 받게되고 이 일로 마르가리타와 이선이 이어진다. 3부에서 이선이 피를 토하는 말로리-바이스 증후군에 걸리자 [231]이 생겼을 때 이것을 위궤양으로 보지만 수술을 할필요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 안드레아스 에카르트
원래 역사처럼 한국에 애정을 품고 한국에 심취한 독일인 신부. 원산 학살을 목격하고 진상을 알린다.
17. 폴란드
-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일본에게 러일전쟁 당시에 아카시 모토지로에게 지원을 받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며 이선과 나이가 같다. 원래 역사대로 폴란드 독립 후 국가원수가 되었으며, 마르가리타와 함께 방문한 이선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폴란드를 유럽의 한국에 비유하며 독립과 동시에 고토를 돠찾고 폴란드를 열강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이선은 폴란드의 발전된 공업 기술력을 흡수하고 소련이 유럽에만 신경을 쏟게 하기 위해서 피우수트스키가 요청한 군사고문단 파견을 승인하고, 관대하게 무담보로 차관을 제공하며 폴란드의 대외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했으며, 사인참사검을 선물하고 답례로 나폴레옹의 26원수 중 한명이자 폴란드 독립을 위해서 싸운 유제프 안토니 포니아토프스키의 칼을 선물받았다. 민족 정체성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인이라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재건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독립이후 원래 역사대로 우크라이나와 동맹하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을 일으킨다. 처음에는 공세가 성공적이었으나 적군이 반격하면서 밀려나고 위기에 처하지만 오히려 반격작전을 준비, 기계화 부대를 이끌고 비스와강의 기적을 일으키고 전쟁 영웅이된다. 전쟁후에는 마르가리타를 보내 독일의 공산반란을 막는다. 폴란드의 안보를 위해 동유럽 국가들의 연합인 미엔지모제를 만들려고 하지만 영토 분쟁 때문에 실패한다. 여담으로 역사와 달리 기계화 부대로 대승을 거둬 기계화 부대양성에 적극적이다.
- 브로니스와프 피우수트스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형이자 좌파 독립 운동가. 이름이 복잡해서 그런지 브와디스와프 피우수트스키라고 나오기도 한다. 폴란드의 독립운동가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서 사할린으로 추방되며 거기서 일본인들과 접촉하여 폴란드의 독립을 노리고 있다. 아이누 연구가이기도 해서 훗날 일본에 망명해 아이누 여인과 결혼한다.[232]. 한국과 일본이 동맹을 맺자 마르가리타에게 한국 황제 움직여서 폴란드 독립을 도와줄것을 요청한다. 또한 마르가리타가 독립자금을 비밀리에 폴란드에 송금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 로만 드모프스키
폴란드의 우파 독립운동가,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라이벌, 반유대주의자 민족민주주의당의 당수. 폴란드인들이 무력으로 독립을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에게 니콜라이 2세의 친우인 이선을 설득하여 이선이 폴란드인의 자치를 차르에게 건의해달라고 요청한다. 베르사유 조약 체결 당시에는 초강경 민족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서 서방 대표들이 질겁할정도로 강경한 모습을 보여주며 인종차별주의자 답게 인종평등 규약에 반대표를 던지려다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말려서 찬성표를 던졌다. 이선 역시 그의 베타성에 그를 협상 대상자로보지 않고 피우수트스키와만 대화한다.
-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유명한 음악가이자 외교관, 훗날 폴란드 대통령, 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이선과 빠르게 친해진다. 음악을 이용해서 감정을 이용하는 외교전술을 사용하나 이선은 이미 노회한 외교관이라 별효과는 없었다. 이선에게 폴란드에서 유명한 연애소설인 바츠와프 시에로셰프스키의 '한국의 삶'을 추천하고 이선은 부끄러워한다. 로만 드모프스키를 설득하여 인종차별 금지 조약에 찬성하게 한다.
-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 출신으로 34세의 나이에 신생 폴란드군 야전 사령관이 되었다.
- 바츠와프 시에로셰프스키
역사대로 한국을 1903년에 방문한 작가이자 폴란드 독립운동가, 이선과 마르가리타를 모델로 한 <한국의 삶>이란 로맨스 소설을 쓴다.[233] 물론 사실과는 많이 차이가 있는 로맨스 소설에 이선은 당황하지만 이 소설덕에 폴란드인들은 한국이 폴란드의 독립을 지원했다는 걸 진짜로 믿게 되었고[234] 이선 역시 소련 견제를 위해 폴란드와 동맹을 믿는게 좋다고 생각해서 독립한 폴란드와 친하게 지낸다.[235] 이 소설을 서서 한국과 폴란드 관계를 개선한 공로덕인지 초대 주한대사로 임명된다.
-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북부전선을 맡으며 적군으로 부터 필사적 방어를 시전하고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4군 기계화사단을 지휘하여 소련군을 포위하자 반격을 감행하여 비스와 강의 기적을 일으킨다.
- 미하우 얀코프스키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의 친척. 폴란드 독립운동에도 관심 있었으나 정치범으로 유배되었다가 사면된 후 연해주에 정착해 자경단을 꾸렸다가 이선을 만나서 연을 맺게 되고 이선을 지원한다. 이선이 권력을 잡자 대한제국을 위해 고급 종마들을 보내 기병을 꾸릴 수 있게 해준다. 마르가리타와 이선의 관게를 응원하고 한국 정부에 후한 보상을 받으며 원래 역사처럼 한국 함경도에 정착해서 자신만의 이상향인 노비나(Novina)를 만들어서 살고있다. 그러다가 이진과 타티야나가 결혼하려고 하자 혼란스러운 올가에게 상담을 해주고[236] 자리를 주선해주는 등 여전히 한국의 든든한 조력자로 살고 있다.
- 이반 블로흐
폴란드 계 유대인으로 <이제 전쟁은 불가능한가>라는 책을 통해서 새로운 군사 기술은 총검전술과 기병대의 돌격 같은 개활지에서의 전투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하면서 블로흐는 열강간의 전쟁은 참호전 이 될 것이라 전망했고, 앞으로는 모든 국가들이 전쟁을 하면 산업 역량을 갈아넣는 총력전이 될것임을 주장했다. 그당시에 과장이 심하다고 다들 생각했지만 러일전쟁으로 새로운 전쟁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후 대전쟁을 통해 그의 말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18. 오스만 제국 → 튀르키예
- 압뒬하미트 2세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해 붉은 술탄이라는 이름을 가진 술탄으로 러시아가 영국과 손잡자 이를 두려워한 청년 튀르크당이 1908년 쿠데타를 일으키자 군대에 진압을 명령하지만 오히려 그 군대도 혁명에 참여하면서 항복하고 정치범 석방, 자유 선거를 시작하지만 자유선거는 보스니아 위기를 부르게 된다.
-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1차 대전 후 보스포루스 해협 통제위원으로 있었던 안중근이 유럽에 온 이선을 알현하면서 그와 만난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등장한다. 원래 역사처럼 터키 독립전쟁을 펼치며 영웅으로 떠올랐으며, 독립국가를 이룬 후 대한제국이 이제까지 이룬 성과를 보고 배우겠다며 터키의 주권을 침해하는 강대국의 편에 서면 적이 될 것임을 암시했다. 이선도 높게 평가해서 이선이 그리스 편을 들지않는 이유가 된다. 소련의 지원을 받아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터키의 국민영웅이 된다.
- 엔베르 파샤
청년 튀르크당 당수로 오스만제국의 총사령관으로서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의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는 인물. 소령 시절 쿠테타로 압뒬하미트 2세를 몰아내고 청년 튀르크당 혁명을 이끈다. 범투란주의를 신봉하고 역사의 변화로 근대화에 성공한 우랄 알타이계 국가인 한국을 근대화의 모범사례로 든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과 밀약을 맺어 정치공작을 통해 중립을 선포하려던 오스만 제국을 1차 대전에 참전한다. 이후 패배 이후 실각, 원래 역사에서는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다가 적군에게 사망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코민테른이 주최하는 동방인민대회에 참석하여 모든 무슬림의 정치적 단결을 주장한다.
- 메흐메트 6세
마지막 술탄이자 파디샤. 케말에게 오스만 정부는 외세에 부역한 반역자라는 평가를 받고 술탄자리에서 쫒겨난다. 이후 영국의 군함을 타고 몰타로 망명을 간다.
19. 스웨덴
- 루트비히 노벨
알프레드 노벨의 형으로 바쿠유전을 위한 투자자를 찾기 위해 이선과 식사중인 유수포프가문에 방문한다. 스웨덴인인데다가 돈으로 남작자위를 사서 러시아 귀족들에게 차별당하지만 러시아에서 사업하려면 그런 차별에 일일이 신경쓰면 안된다고 이선에게 충고한다. 러시아 땅에서 같이 차별받는 입장이다보니 아시아인이라고 깔보지 않고 이선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이선이 석유산업의 전망에 대해 이야기하자 분명히 크게 될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 알프레드 노벨
노벨상과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발명가. 작중 초반에 이선이 러시아에서 만난 인물이다. 노동자 복지를 크게 신경쓰는 윤리적인 경영을 하는 혁신적인 인물이지만 러시아 귀족들에겐 죽음의 상인이라 불리며 멸시당한다. 이선이 황제를 암살로 부터 구한 공으로 막대한 은사금을 받고 그 은사금으로 바쿠유전을 경영하게 되는 브라노벨[237] 투자자를 찾고 있던 노벨가문에 투자해서 큰돈을 번다. 노벨가문도 그후 대주주인 황제를 위해 기술을 지원하고 공장을 세우는등의 활약을 한다. 발렌베리 가문과 황제를 연결해주고 발렌베리 가문을 통해 투자금을 유치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며, 꼬박꼬박 배당금을 바치다가 1차 세계대전을 감지한 이선이 유럽 자산을 중립국인 스웨덴 으로 옮길때 큰 역할을 한다.
- 발렌베리 가문
스웨덴 거대 재벌로 스웨덴 정부에 압력을 넣어서 금산분리를 폐지시킬만큼 강한 권력을 가진 재벌. 이선이 러시아로 건너간 초반부터 이선과 금융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해준다. 이선이 바쿠유전에 투자하도록 도와주고 이선에게 꼬박꼬박 배당금을 주는 것 이외에도 황실 내탕금이나 유럽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할 때 조력자 역할을 해준다. 이후 독일 기술을 유출 시키려는 이선과 함께 독일의 마이어 무역회사를 바지사장 삼아 독일 기술을 유출한다.
- 구스타브 5세
스웨덴 국왕으로 1912 스톡홀름 올림픽을 개최하고 이진과 타티야나 부부가 순방할 때 다시 등장한다.
-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스웨덴의 왕태자로 이진과 타티야나 부부가 순방할 때 첫등장한다. 원래 역사에서 서봉총을 발굴할 정도로 고고학과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인물. 이진에게 " 동양 하면 사람들은 중국과 인도만을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코리아에는 특수한 것이 있습니다"라며 언젠가는 한국의 문화가 전세계에 널리 퍼질것이라고 예측한다. 역사대로 신라의 금관과 고려청자를 보고 감탄하며 언젠가 한국을 방문하기로 한다. 얼마안가 이진이 황제로 즉위하자 다시 만나게된다. 방문 귀빈중 서열이 가장 높았다고한다.
20. 핀란드
-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러일전쟁에서 브루실로프의 휘하에서 연대장으로 싸우게 된 것을 제외하고는 실제 인물과 행적이 비슷하다. 러일전쟁 이후 역사대로 두차례의 유라시아 횡단을 통해 러시아 제국내 아시아 전문가가 되고 달라이라마를 두차례 알현, 복드칸의 군사고문이 된다. 역사의 변화로 한국이 존재함에 따라 범투란주의에 심취하여 우랄-알타이 이론에 따라 유라시아주의자가 되었다. 원래 역사와 달리 러시아가 민주연방공화국이 되면서 자발적으로 핀란드를 독립시켰지만, 인연을 맺은 브루실로프의 설득으로 러시아군에 남았다. 내전 중에는 백군에 가담했는지 핀란드군과 함께 페트로그라드를 위협하고 있다고 언급된다.
- 구스타프 욘 람스테트
우랄-알타이 이론을 연구한 학자로 몽골의 독립을 지지하고 김규식과 도르지예프와 교류한다. 북방민족들을 모두 오랑캐 취급하던 한국 민족주의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가져다 주었으며 한국과 핀란드의 범민족주의자들이 유라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꿈꾸게 해준다.
21. 스페인
- 알폰소 13세
에드워드 7세 장례식에서 처음 등장, 사회주의 세력의 확산을 경계해서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쿠데타에 오히려 총리직을 안겨준다.
-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아버지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이후 노동조합을 10년간 금지한 계엄령을 내려 국왕에 보은 한다. 이 쿠데타는 원래 역사대로라면 무솔리니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어야 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오히려 이 쿠데타가 무솔리니의 1923년 로마진군에 영향을 준다.
22. 필리핀
- 에밀리오 아기날도
자칭 필리핀 임시대통령으로 29세의 젊은 나이에 필리핀 독립운동을 이끈다. 호세 리잘 죽음 후 독립운동을 이끌었지만 무력진압으로 패퇴, 홍콩으로 망명했다가 일본의 지원을 받으며 다시 독립을 준비한다. 기자로 위장한 이회영에게 필리핀의 역사를 설명해준다. 이회영은 필리핀이 독립을 바라면서 대만 민주국을 파괴한 일본의 지원을 받는건 모순아니냐고 질문하고 아기날도는 그렇다면 한국의 도움을 바란다고 말한다.
- 호세 리잘
필리핀의 민족시인으로 1896년에 공개처형을 당하면서 전국민적인 무장봉기와 필리핀 임시정부 출범, 필리핀 독립운동인 카티푸난 운동이 무력투쟁으로 변하게 된다.
23. 시암
- 라마 5세
시암의 국왕으로 동양의 개혁적인 전제군주라는 점에서 이선과 비슷하면서도 비교할 점이 많아 자주 등장한다. 국왕으로서 몸소 외국에 나가 외교활동을 하고 만국평화회의에 직접 참석한다고 나오며 이선 역시 이를 근거 삼아 네덜란드로의 해외순방을 나선다. 만국평화회의에서 개혁 군주로 이선처럼 환영받으며 유럽순방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국민개병제, 노예제 폐지, 토지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 라마 6세
빅토리아 여왕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로 잠깐 등장.
- 라마 7세
첫등장에서는 아직 왕이 아니라 프라차티뽁 왕자로 나온다. 라마 6세의 동생으로 이진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24. 그리스
- 요르요스 1세
에드워드 7세 장례식에 참석하는 걸로 등장. 자국 내 미치광이에게 총맞아 죽은 것으로 언급된다.
-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
원래 역사에서 오쓰 사건 때 니콜라이를 구해준 인물로 이 일화를 아는 이선 역시 요르요스랑 동행한다. 오쓰 사건 때 이선은 총을 쏘고 요르요스는 지팡이칼로 암살자를 벤다. 겸손한 사람이라 이선이 총을 쏴서 저지해줘서 암살을 막을수 있었다고 말해준다.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그리스의 외교관으로 신들린 외교를 펼치며 파리강화회의에서 활약한다. 메갈리 이데아를 홍보하며 그리스도 한국처럼 고토를 되찾고 싶다면서 이선에게 어필한다. 이선에게 이선도 그를 높게 평가하지만 폴란드와 다르게 그리스하고 한국은 너무 먼나라인데다가 역사대로라면 그리스가 터키를 못이긴다는 걸 알기에 한국에게는 큰 성과가 없었다. 결국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의 쿠데타로 쫒겨났다가 국왕이 전쟁에서 터키와 패배하자 다시 쿠데타로 집권하는데 성공한다.
- 콘스탄티노스 1세
카이저의 처남, 친독파로 베니젤로스와 갈등을 빚어 연합국의 압력 때문에 결국 왕위에서 물러난다. 아들 알렉산드로스 1세가 역사대로 원숭이에 물려 폐혈증으로 사망하자 다시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를 공격하여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이은 "콘스탄티노스 12세"가 될 꿈에 젖어 있었으나 무스타파 케말에의해 패배, 패배결과에 분노한 베니젤로스파 장교들의 반란으로 쫒겨난다. 이안은 그걸 보고 무리한 확장은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임을 알게된다.
- 조피 도로테아 울리케 알리체
독일의 공주, 그리스의 왕비, 빌헬름 2세의 여동생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가 친독파인 이유중 하나.
- 마리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남동생 뤼시앵 보나파르트의 증손녀로 그리스와 덴마크의 요르요스의 아내.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가족에게 파리 별장을 빌려준다. 1919년에 이선을 만났으며 동양의 나폴레옹이라고 불리는 이선의 아들인 이안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요르요스 1세의 아들이자 콘스탄티노스 1세의 동생. 고위군사령관으로 튀르키예 패배에 대해 재판을 받으나 니콜라이를 망영시키지 못한것에 죄책감을 가진 조지 5세의 구명으로 추방되며 가난하게 살고 있다. 아내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공녀가 루이 마운트배튼의 큰누나라서 루이 마운트배튼과 마리야 부부에게 금전적 지원을 받는다. 이들에게 한 남자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가 마리야 공주의 동정을 사서 도움을 받으며 파리로 이주한다.
25. 네덜란드
- 빌헬미나 여왕
27세의 젊은 여왕으로 만국평화회의에서 이선과 만났다. 이선은 박연과 하멜을 언급하며 네델란드와 친목을 다지고 빌헬미나 여왕도 이선을 라마 5세 같은 아시아의 개혁군주라며 화답한다. 이선과 함께 서양예법에 따라 팔짱끼고 헤이그 거리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 휘베르트 보스
작중에는 1903년에 처음 등장[238]했기에 미국식 이름인 휴버트 보스로 나온다. 빌헬미나 여왕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서태후,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다고 언급된다. 이선을 보고 동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림모델이라고 이선의 잘생김을 칭찬하며 소설 2부 표지가 바로 보스가 그린 그림이라는 설정이다.
- 빈센트 반 고흐
이선이 내탕금으로 그의 작품들을 구입한 덕분에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10년 더 살면서 더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고 짧게 언급된다.
26. 인도
-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원래 역사에서는 한국에 그다지 관심없었던 인물이었고 단지 한국에서 오해로 유명했던 인물이지만 역사의 변형으로 한국이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지금에 와서는 진심으로 한국을 찬양하는 시를 쓴다. 이선을 보고 아시아의 등불이라고 예찬하지만 이선는 자기가 왜 원래 역사의 메이지 황제마냥 아시아의 희망이 된거냐고 어이없어 하고 실제로도 타고르가 원래 역사에서 일본을 비슷한 이유로 찬양했다.
- 마하트마 간디
전직 변호사이자 인도의 독립운동가, 이선[239]과 함께 인도인들에게 반영의 아이콘이다. 인도 국민회의와 함께 웨일스공의 방문에 맞춰 뭄바이 항쟁을 이끌었다. 이것 때문에 1921년대 영국의 대외외교는 소극적인 태도 였고 에드워드 추행사건을 공개하면 영국이 불리해질거란걸 안 이선이 영국을 압박하여 워싱턴 군축조약을 한국에 유리하게 체결한다.
27. 우크라이나
- 세레딘-사바틴
우크라이나계 러시아 건축가로 원래 역사에서 을미사변을 목격했다. 독립문을 설계하였으며 한국에 남아서 심의석과 함께 석조전등의 근대건축을 지휘했으며 겨울궁전과 같은 멋진 양옥[240]을 만드는등 한국 건축계 역사에 큰영향을 미친다.
- 시몬 페틀류라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집정으로 적백내전 당시 폴란드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우크라이나-폴란드 동맹조약을 체결하는 걸로 짧게 등장한다.
- 네스토르 마흐노
우크라이나의 무정부주의자. 적백내전중에 아나키스트 이념을 따르는 흑군을 조직하여 적군 소련과 백군에 맞서 큰 승리를 연속으로 거두나 이념상 절대로 용납 불가능한 공산주의 적군과 우크라이나 자체를 싫어하는 백군에게 동시에 공격받는다. 결국 체급차이로 전쟁에서 패배하고 만다.
- 유리 홀류슈코
젤레나 우크라이나의 대표로 아무르강 이남의 연해주에 2번째로 거주하는 민족인 우크라이나인의 대표. 연해주에서 별도의 자치를 요구하고 있으며 연해주가 단순한 러시아인들의 땅이 아니라 퉁구스, 고려인, 우크라이나인의 땅임을 상기시키며 이영과 이서아 친왕 부부에게 젤레나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인 자치구역에 대해서 지지를 표해줄것을 요청한다.
28. 기타 인물
- 프리드쇼프 난센
실제 노르웨이 발음인 프리티오프 난센으로 불린다. 저명한 탐험가이면서 국제연맹 난민고등판무관으로 근무, 1921년 기근으로 인한 소련의 기아로 죽어가는 아이들을 지원해야한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체코슬로바키아의 국부. 신생 체코를 위해 파리강화회의에서 열띤 외교를 펼친다. 체코군단이 한국군과 함께 동부전선의 일익을 담당했고 원래 역사에서 체코군단이 한국독립군을 지원했기에 이선도 호의적으로 대한다. 이진과 타티야나 부부가 방문할 때 다시 등장한다.
- 호치민
3부 61화에 응우옌아이꾸옥이란 가명으로 등장. 파리 강화 회의에서 베트남의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한국 황제를 만나려고 했으나 프랑스의 방해로 실패한다. 이후 한국도 프랑스에게 잘보이기 위해 베트남 독립을 요구하는 베트남 학생들을 추방하고 만주에 대한 욕심을 들어내자 크게 실망한다. 그 모습에 김규식은 자기도 만약 호치민 같은 처지였다면 저랬을 것이라고 호치민을 동정한다. 이후 코민테른에서 주최하는 극동민족대회에서 다시 등장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투신한다는 연설을 한다.
- 파이살 1세
1차 대전 중에 영국 장교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협력으로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아랍 봉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분할한다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체결, 원래 역사 처럼 아라비아의 로렌스까지 속여서 거하게 통수를 친 덕분에 분노하여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러시아와 함게 싸워준 한국에게 막대한 금과, 보물, 향신료 등의 특산물을 바쳐서 한국에게 아랍의 독립을 위해 힘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이선은 안타깝게도 중동은 너무 멀고 석유가 탐나지만 영국이 그걸 원하기에 크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그래도 양국의 우호를 위해 한국의 군사고문단을 파견해주었고 아랍인들은 그거라도 감지덕지하며 알라를 찬양한다.
[1] 연대 당시는 2017년이었다.[2] 첫 부인인 남양 홍씨와 1894년에 사별하고 재혼했는데, 작중에서 이준용의 가족사는 거의 묘사되지 않았다.[3] 이선은 만약 본인과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 조선 최초의 여성의사 같은 여성 최초의 무언가가 되었을 거라면서 안타까워한다.[4] 대원군은 손자 이선을 아껴서 그의 취향까지 고려해서 서양 느낌의 그녀를 골랐음에도 유학을 간다니 배신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이며, 즉위식까지만 보고 데려오지 않으면 다음엔 후보도 안 알려주고 간택하겠다며 경고한다. 그래도 조선 역사상 최초로 왕족과 결혼할 여인이 결혼 전에 그 왕족과 몇 달을 같이 지냈다는 전례를 만들기는 했다.[5] 아영은 황제인 이선이 첩을 안 들인 걸 이상하게 생각했다.[6] 근대교육을 받아 신여성을 꿈꿀 정도로 진취적이었으나, 남편이 불륜을 저지르자 전근대적인 인식으로 용인해버린다. 그러면서도 이선이 입헌군주제의 황후로서 외부활동을 하라고 요구하면 군말 없이 따르는 등 남편이 근대와 전근대 사이를 오갈 때마다 그저 따라갔다. 마르가리타라는 특수한 인물을 위한 편의주의적인 캐릭터성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부분[7] 신교육을 받긴 했지만 원래 전통적인 유학자 명문가 집안 출신인 데다가 민자영의 폐출 이후 그녀의 먼 친척 고모인 황태후에 이어 그녀까지 두 명 연속으로 황후를 배출하게 되자 집안에서 경사스러워하면서도 처신을 조심하고 그녀에게도 민자영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고 단단히 당부한 것이 캐릭터성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8] 1부부터 갈등이 암시되었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맥빠지는 마무리였다. 그러나 이진은 신분의식에 잡혀있지만 존경심으로 계속 참는 패턴으로 서술되어 캐릭터적 매력이 매우 떨어졌다. 긍정적인 모습은 첫번째 자식이 딸임에도 순수하게 기뻐한다는 것 정도. 이런데 4부에서는 파시즘에 친밀감까지 느끼니 밉상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부자갈등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9] 러시아 황실이 딸만 낳아서 러시아 황실로 받은 압박을 알고 있어서다.[10] 1923년에 열두 살이라고 나온다.[11] 러시아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이 대한제국과의 합의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망명을 묵인하기로 했는데, 이선은 자식들 뿐만 아니라 황제와 황후 부부도 구출하라고 명령했다.[12] 당대 혈우병 환자들이 20대까지 사는 경우가 드물어 삶이 많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13] 마리아의 결혼식으로 한국 황제가 부자라는 소문이 퍼져서 한몫잡아보려는 몰락 귀족, 신분 상승을 꿈꾸는 부르주아 영애들이 많았다.[14] 러일전쟁 당시 극동군 참모였던 안드레이 브론스키의 딸[15] 한국 황제와 마르가리타 얀코프스카에 대한 호감도와 소설속에서 나온 백마탄 이국적인 왕자님 로맨스도 한몫했다.[16] 본인도 알고 있지만 보수적인 청나라 왕실에서 살기는 싫고 알릭세이 역시 얼마 못 가 죽을 거란 현실과 겹사돈을 꺼려서 결혼을 거부한다.[17] 국왕이라는 호칭이 대외적으로는 권위가 부족하다고 느껴져서 사용하게 된 호칭.[18] 왕이 대군주 칭호를 쓰게 된 후에도 한동안 왕세자라고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동궁도 대군주와 짝을 맞추어 왕태자 칭호를 쓰게 되었다. 이후 조청일전쟁 승전으로 왕태자 칭호가 완전히 정착된다.[19] 정확히는 귀인 장씨 소생[20] 황태후만 이런 게 아니고 황실에서는 황제 일가와 이강·이영 외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없었고 정부에서도 김옥균·서재필·이승만·안창호 외에는 전부 우려를 표명했다. 심지어 국민 여론도 우려와 불만이 적잖았다.[21] 시댁 기준으로는 의붓손자이긴 하지만 황후 김아영은 원래 황태후의 먼 친척 조카이기 때문에 혈연관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22] 보수적인 조선시대 사람 기준으로는 애초에 그 자리에 있던 게 문제였던 데다 김씨는 처음부터 서양인 며느리인 이서아를 싫어한 것에 더해서 타티야나가 이진과 결혼하여 황태자비가 되는 데에도 이서아가 한몫 거들었다고 생각해 더 분노한 것으로 나온다.[23] 그러나 이는 이중잣대이기도 하다. 황제의 총희인 마르가리타가 후궁으로 입궁하지 않아 500년에 걸쳐서 확립된 내명부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두고보다가 며느리가 성희롱당하고 왔을 때는 인신공격에 가까운 독설을 쏟아냈다.[24] 이는 일부러 왕위에서 멀어질 만한 일을 함으로서 형의 왕권을 강화해주고 신하들의 의심에서 벗어나려는 행동이기도 했다.[25] 안나 카레리나에 나오는 장군 이름과 같아서 농담거리로 쓰이는 게 콤플렉스인 장군이다.[26] 이선은 후에 장난이라고 하긴 했으나 아나스타샤는 그래도 꺼림칙해 했다.[27] 참고로 고종의 막내 고명딸 덕혜옹주의 외동딸 한국식 이름이 정혜인 것을 보면 참으로 묘하다.[28] 해당 인용문이 나온 연재분의 제목이기도 하다.[29] 작가가 이 글을 쓰는 데 상당한 영감을 줬다고 밝힌 문구.[30] 여전히 기민한 정치적 감각으로, 청나라는 그 덩치 때문에 개혁을 이루기 쉽지 않으며 내부의 갈등 사이에서 조선의 살 길이 있음을 직감한다.[31] 칭제건원 이후 죽기 직전 해당 조직을 이선에게 물려주고, 이선은 이 조직을 제국익문사로 확대 개편한다.[32] 임종 전 이를 고백하면서 제대로 이장하고 제사도 지내달라고 당부한다.[33] 해당 연설은 특정 사건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의 해명에 따르자면 원래 이렇게 전개할 것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해당사건과는 달리 공동의 적을 언급하는 등 차이가 있다.[34] 오리엔탈 스캔들로 한국에 주눅들어 있던 외교 분위기를 역전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35] 독립협회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다.[36] 고종의 신위에 배향할지 더 훗날 광무제 이선의 신위에 배향할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37] 소련과 계속싸우고 일본이 중국으로 남진하도록 할지, 아니면 일본의 팽창주의에 맞서 소련과 화해하고 지금이라도 건함정책을 펼지를 고민하며 결국 중국 국민당의 북벌성과에 달려있다고 말한다.[38] 일제강점기에 한국이 고통받는 것에 대해서는 차마 자세히 알려줄수가 없었다고 한다.[39] 미래 서울에는 마천루가 가득하며 손안의 작은기계로 소통하고 다닌다는 사실도 이선이 알려준다.[40] 금주법이 가장 끔찍했다고 한다.[41] 서북 지역의 정치참여가 이루어진 것에만 만족할 정도로 이들도 나름 보수적이다. 단 박은식은 개혁적인 안창호를 지지한다.[42] 원래 역사에서 실제로 이상설이 임시정부 대통령이던 시절 있었던 일화다.[43] 이선의 정치적-외교적 지향점은 이승만과 일치하는 것이 많다. 무리한 팽창을 경계하고 미국과 친하게 지낸다 등등. 차이라면 이선은 자신과 주장이 달라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공산주의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점이 있다.[44] 이승만과 같은 황해도 출신이라는 점도 있었다.[45] 문제는 이승만과 반대로 너무 심각하게 권력의지가 없어서 이선이 차기 총리로는 힘들다고 평가한다.[46]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나 본 작품에서나 일본은 러일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파탄났다.[47] 대놓고 야인시대 패러디로 400만엔을 주장했다.[내용누설] 사실은 이선의 명을 받고 꾸민 역정보작전으로 이선은 원세개가 유일한 민씨일족인 민영익과 접촉할거라고 생각했고 원세개를 실각시키기 위해 가짜정보를 뿌린후 민영익이 미국으로 도주하게 하여 원세개를 난처하게 만든것이다. 민영익은 이러한 작전에 참여 대가로 민영환을 중책에 써줄것을 요청하며 이선 역시 받아들인다.[49] 같은 자리에 양헌수, 어재연 동상도 있다고 한다.[50] 소제목이 '임진년 위기'이다.[51] 그래서 작중 역사에서는 삼국간섭이 '제2차 삼국간섭'이 된다.[52] 사카이 나카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53] 최전선인 크라스노예 셀로가 발음이 한국인에게 어려워서 적절한 이름을 찾다가 붉은 도시니까 홍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래서 홍도의 홍범도라고 불린다.[54] 원래는 참장-부장-대장이었으나, 광무 20년에 부장과 대장 사이에 정장 계급이 도입되었다.[55] 이는 데일리 메일이 '한국은 1차 세계 대전에 2만명 밖에 안죽은 주제에 영국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서려고 한다'는 망언을 했기 때문이기도 했다.[56] 요한 묵시록 13장 4절인 "누가 이괴물을 당해낼수 있겠는가?" 라는 질문에 어떤괴물이든 대비만 하면 잡을 수 있다면서 자신감을 보인다.[57] 이승만의 독선적인 성품과 이승만이 군무대신 다른 대신들처럼 역시 군인이 아니라 문관이 맡아야한다고 주장하다보니 마찰을 겪는다.[58] 김경천,지청천 ,홍사익, 김좌진, 이응준 등이다.[스포일러] 일부 독자들은 김유진이 본작에서 유진 킴이 백인 우월주의자에게 암살미수를 당한 편이 나오고 조혁시 연재분에서 출연했고, 이후 유진이 죽은 다음날에 다시 재출연한 덕분에 이쪽 세상으로 환생한거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60] 이선이 홍범도와 이동휘, 노백린을 섞은 듯한 인물이라고 평한다. 군대에서도 좌(左)좌진 우(右)유진이라며 김좌진만큼 뛰어난 군인이라고 인정받는다.[61] 이선은 본인이 모르는 인물이 나오자 우리 역사에 이런 인물이 있었나? 하고 의아해 한다.[62]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신축민란은 반기독교 민란이다.[63] 스톡홀름 올림픽 우승자라서 스톡홀름에 방문해도 사람들의 의심을 피하기 쉬웠다.[64] 상황이 좀 많이 병맛스러운데 청나라에 승리한 국경일이라고 술마시고 일부 군인들이 소련 국경에 머물던 만주군에게 행패를 부리다 만주군과 싸움이 났다. 그걸 핑계로 소련에 머물고 있던 한국군을 쫒아내려던 소련 적위대가 실수로 총으로 해병대원을 사살했다. 정작 나중에 만주군과는 서로 입싹닫고 화해한다...[65] 원래 역사의 한일의정서, 을사조약, 정미 7조약을 섞은 것 같은 항목들로 구성되어 있다.[66] 그런데 이 시호는 주로 세도 가문들에게 내려진 것이라, 미래인으로서 그에게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는 이선이 우회적으로 비꼰 것이다.[67] 이것이 같은 파벌이자 부하인 이승만과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이승만은 "걔네가 어떻게 굴든 가까이 지내면서 우리한테 좋은 것만 빼먹으면 된다."라는 마인드지만 윤치호는 "저놈들은 당최 야만적이고 믿을 수 없는 놈들이니 경계해야 한다."는 식.[68] 옐리자베타 놀켄(Елизавета Валерьяновна Нолькен)이라는 인물로 이위종과 결혼, 이위종 사망 후 재혼했다가 레닌그라드에서 홀로 살았다. 1943년 독소전쟁의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했다.[69] 동시기를 다룬 대체역사소설 여명의 세기 주인공에게서 이름을 차용해왔다. 처음에는 조혁시 작가와 여명의 세기 작가가 동문이라서 차용했다고 밝혔었는데, 나중에 작가 본인이 직접 자신과 여명의 세기 작가는 동일인물이라고 밝혔다. 여명의 세기 주인공과는 설정에서 차이점이 있다.[70] 외교관으로 처음 임명되었을 때는 외신에서 조한민이 누구야? 하던것과 대조된다.[71] 여명의 세기에서는 이사벨라 키스라는 영국-오스트리아 혼혈 백인여자와 결혼했다.[72] 자신무의식에 이승만같은 권력욕이라도 있었던건지 하면서 식겁한다.[73] 신민당과 달리 천도교 교령이라는 손병희의 종교적인 지위덕에 가능했다.[74] 원래역사에서 김덕명과 함께 동도대 총참모였던 사람. 조혁시에서는 부참모장을 맡는다.[75] 여운형은 누구나 자유롭게 토론을 할 수 있다면서 박헌영의 비난을 신경쓰지 않았다.[76] 하필이면 로마의 적통을 계승했다는 러시아 황가가 망명온지라 신채호의 추종자들은 더욱더 한국이 보편 제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77] 원래 역사에서는 대한제국이 식민지 상태라서 그냥 우리 국민들이 이주하며 독립군 기지를 만들자는 수준이었다.[78] 한국인, 러시아인, 몽골인, 퉁구스인, 만주족으로 중국인과 일본인이 빠지고 대신 퉁구스인과 러시아인이 들어갔다.[79] 단 신채호의 말을 왜곡해서 민중에게 전하는 등, 신채호와 사상이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다. 좀더 아시아주의에 가깝다.[80] 원래 이선은 삼년상을 없앨 생각이었는데 친아들도 아닌 전우가 삼년상을 치르자 친아들로서 효를 다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생길 여지가 있었다. 결국 꾀병을 부려 삼년상 자체가 비효율적이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납득시켜야 했다.[81] 그를 포함 몇몇은 미래인인 이선의 혜안을 따라가지 못해서 신하로 도리를 다 못하고 있다는 고뇌를 겪고 있었다.[82] 조선인들이 하얀옷을 입고다녀서 러시아인들은 한국인들을 백조라고 부른다.[83] 원래는 완은군 역모사건이 일어나야 하지만 역사의 변화로 그런일이 없어진다.[84] 원래 역사에서 석조전을 건축했다.[85] 아직 어릴때라서 본명인 김성주로 언급[86] 황제의 행보가 조선의 전통적인 가치관과 반하긴 하지만 훌륭한 황제의 명이니 따른다는 사고를 보여준다.[87] 그나마 이안이 케임브리지에 유학을 하면서 황제랑 연을 대보려는 사람들이 대우해줘서 조금 나아졌다고.[88] 물론 아직 시각미디어가 발달하기전이라 평상시 그녀가 인기가수라는 걸 아는사람은 거의 없다.[89] 변화된 역사에서도 서로 불륜관계가 아니냐고 흉보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특히 윤심덕이 노처녀라서 그런의혹이 있다고 한다.[90] 김상준이 특별히 부패한게 아니라 시대의 한계였고, 파렴치하게도 박영효 본인이 제일 축재에 열심이었는데 이걸 빌미로 공격했다.[91] 군대에 가고 싶지 않았던 유진이 "이름만 봐도 무관이 돼야 할 것 같은데 유신이가 가면 안되나? 고 드립을 치는데, 당시에는 당연했던 가부장의 권위로 밀어 붙이고 대신 참령까지만 하라고 타협했다.[92] 남승룡은 원역사의 동메달이 아니라 은메달을 차지한다.[93] 김옥균은 이선이 흥선대원군 세력이었기에 자신들이 흥선대원군에게 들켰으니 이제 끝장인줄 알았다고.[94] 영국 노동당은 처음 선거할 때 단지 2석이었고 일본 사회민주당은 아예 원외정당이었기에 사실상 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주의 정당이 되었다.[95] 한국이 아무르 임시 정부를 정통 러시아 정부가 아닌 아무르 정부로 만들어버리면서 소련이 망할 때 까지 한국의 소유가 되었다.[96] 1917년 하반기에 만들어 1918년 5월에 2만정을 생산해냈다.[97] 이후 대한제국은 모총이라는 이름으로 좀더 소형화시킨 제식 소총을 만든다.[98] 일본 역시 지분이 있지만 미국과 한국에 딸리고 실질적으로 일본 지분은 돈 빌려준 영국과 프랑스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99] 영국제 군함에 운용하는 인원이 영국인이었기에 청나라 군함도 함부로 건드릴수가 없었다.[100] 러시아에서 사온 2척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이랑 같이 사왔지만 이름이 안나온 러시아 방호순양함 1척, 광개토대왕, 김유신[101] 이순신 장군 역시 대한의 홍보와 이순신의 열렬한 추종자 사토 데쓰타로의 홍보 덕에 대영제국 연구자들이 연구하면서 크게 이름이 알려졌다.[102] 원 역사와 달리 한국의 개입으로 생존하여 한족 국민국가인 중국과는 다른 만몽회장의 나라가 되었다. 물론 몇 년 후 외몽골은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독립, 티베트도 달라이 라마가 독립, 청해는 친중화민국인 군벌인 마씨 군벌, 신강은 친소련 군벌인 성스차이가 장악해 만주족의 땅인 만주와 자치를 누리되 그나마 청조의 권위를 인정하는 내몽골을 제외하면 전부 떨어져 나간다. 중원 수복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머지 지역도 각자 따로 놀자 아예 중화제국에서 만주족 국민국가로 노선을 전환하여 기존의 국기였던 황룡기를 왕실기로 쓰고 원역사의 만주국 국기인 신오색기를 국기로 사용한다.[103] 표면적으로는 황후는 만주족이나 몽골족이여야 한다는 전통이 있다고 반대하지만 진짜 이유는 선통제마저 한국 여자랑 결혼하면 한국에 병합되는 거 아니냐는 공포가 있기 때문이고 이라 공주가 혼혈에 서녀인 것도 한몫한다.[104] 같은 행사에 참석한 다른 서양 외교관들도 고종을 폐하(your majesty)라고 불렀지만 서양 언어인 만큼 이 부분은 번역하기 나름이었기에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오토리 공사가 고종을 일본어로 陛下(헤이카)라고 부른 것은 달리 번역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105] 청나라가 분리 독립한 상황에 따라 오족공화를 상징하는 오색기가 아니라 철혈십팔성기와 청천백일기를 사용한다.[106]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이선이 원세개가 황제가 되고 싶어한다는 소문을 퍼트렸기 때문. 그래서 원래 역사와 다르게 황제가 될 마음이 없었던 원세개는 어이없어 한다. 이선은 원세개가 황제가 되고 싶어 한다는 걸 사람들이 믿을 정도로 원세개의 평판이 안 좋은 걸 이용했다.[107] 철혈십팔성기를 사용한다.[108] 원세개편에 서지않은 이유도 원세개가 권력유지를 위해 일본에 이권을 팔아먹어서다.[109] 물론 자신의 재산을 불리려는 다른 군벌과 달리 국고 환수적 성격으로 행한 일이었다.[110] 청천백일기를 사용한다.[111] 이선은 짜장면과 짬봉을 대접하는게 중국인들의 문화를 존중한다는 표시로 썼고 순진한 손문은 그걸 믿었지만 실제로 이선은 중국을 갈갈이 찢어놓을 생각을 한다.[112] 일본이 이권을 가져간 절강은 장개석의 고향이기도 해서 더욱분노한다.[113] 물론 장개석의 본심은 미래인인 이선만 알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개석을 친소파 인물로 분류한다.[114] 물론 미래인이라서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은 이선이 손문과 중화민국의 본심을 파악하기 위한 연기였다.[115] 원래 역사에서도 방문하긴 했으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추진했다.[116] 놀랍게도 이 일화는 실화다.[117] 유일한 불편이 본인이 좋아하는 게이샤와 정사를 나누는게 불편하다는 점이라고 본인입으로 말한다.[118] 우익 정치인이라서 좌익에게는 원래부터 평가가 나빴고 러일전쟁을 막으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니다가 우익에게 러시아 스파이로 찍혔고 이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지지로 영미권에 일본을 팔아먹으려는 친미파로 낙인찍힌다.특히 이토 본인의 막후 정치 때문에 실제로는 별 실권없는 원로임에도 급진파들은 일본정부를 이토가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19] 실존인물로 원래 역사에선 야스다 재벌 총수 야스다 젠지로에게 앙심을 품고 암살한 뒤 체포당하기 전 자살한 사람이다.[120] 이 부분은 신분의 차이도 있지만 높은 신분임에도 국민들을 동등한 정치주체로 여겨서 국민에게 다가선 이선과 다르게 낮은 신분임에도 백성을 깔보고 그들 위에 군림한 이토의 잘못이 더 크다고 언급된다.[121] 실제로도 이게 화두가 되어 암살당했다.[122] 이는 사실 문민정부를 흔드려는 기타 잇키의 공작이었다.[123] 평민 출신인 하라는 대립에 두려움이 없어서 사이온지가 그를 적극 기용한다.[124] 물론 이 계획은 일본정부의 의향이 아니었기에 그냥 무시당하고 일본정부는 이들 행동에 대한 반동으로 조선에 간섭한다는 갑(甲)안 대신 당분간 조선을 방치한다는 을(乙)안을 채택한다.[125] 원래 역사에서는 만철의 초대총재였다.[126] 같은 여당임에도 반대한것은 파벌 싸움 때문이다.[127] 물론 소련과 일본이 갑자기 가까워진 건 아니고 영국이 소련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니까 한일에 가깝다.[128] 사실 한국은 별문제 없었고 오히려 그사이에 라이트 형제랑 접촉하고 있었다.[129] 평화주의자, 여성참정권지지자이자 한국에 식민통치에대한 배상을 해야한다고 말했다.[130] 이토는 서구와 한국을 자극할 정도로 심한 요구라서, 야마가타는 정당한 일전을 벌이지도 않고 이런 무리한 요구를 하는게 어이 없어한다.[131] 이것역시 제국익문사 이회영의 도움이 있었다.[132] 원래 역사에서도 대지진 당시 무정부주의자인 박열을 피신시켰다.[133] 사실 이는 조청일 전쟁 때도 일어난 일인데, 조선이 압록강을 넘은 후에 날씨, 보급, 작전능력 부족을 핑계로 한동안 진격을 하지 않아서 피는 일본이 더 흘리고 이득을 보려는 수작이 아니냐고 의심했는데 진짜였다. 작중에서 이선의 본의는 오히려 군부가 더 잘 파악했다.[134] 너무 일본의 속마음을 잘담아서 일본인들도 설마 한국 황제가 만들었을 것라고는 상상을 못했다.[135] 드립에 가깝지만 작중 묘사된 해당 인물은 군인으로서 임무를 다 하고 살기 위해 사투를 벌였을 뿐 전쟁범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자신과 부하들이 이런 비참한 상황에 놓이게 된 원인이 무능한 윗대가리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그들에게 분노를 표출했으니 '옳게 된 사무라이'란 호칭이 전혀 과하지 않다.[136] 물론 니콜라이도 황제인 만큼 이선의 말에 다 휘둘리는 것은 아니며, 이선은 인간적으로도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기 때문에 그가 원래 역사의 비참한 운명을 맞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언도 한다.[137] 차르 본인도 마틸다 크셰신스카라는 폴란드 여자를 사랑한적이 있기때문이다.[138] 본인은 같은 독일 출신 왕후인 예카테리나 2세 마냥 본인이 친정을 잘한다고 믿고 있어서 더 심각해진다.[139] 이선은 타티아나가 혈우병인자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140] 물론 이선은 러시아 제국 금을 50톤이나 챙긴 상태라 전혀 아까워하지 않는다.[141] 이영은 러시아 여자랑 결혼했고 미하일은 귀천상혼을 해서 둘다 황실에게 환영받지 못한다.[142] 이진은 이게 러시아 황제가 보일 모습이냐면서 깐다.[143] 4부 29화에서 트로츠키와 이선의 비공식 회담 도중 지나가듯이 언급되었다.[144] 정작 대공 본인은 너무 구시대적인 인물이라 차르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거부한다.[145] 원래 역사에서 너무 친해서 동성애 의혹도 있었다.[146] 이선처럼 차르 암살을 막아낸 공로가 있다.[147] 사실 단순히 그 이유는 아니고 조선으로 귀국할 준비이기도 했다.[148] 물론 300년이 지나서 펠릭스는 백인이다.[149] 실제로 바쿠유전에 공동 투자하는 등 이후에도 교류를 이어갔다.[150] 케렌스키와 협력하려고 러시아 공화국으로 왔을 때 다들 니콜라이 2세 암살하러 온것 아니냐고 의심할정도다.[151] 물론 그전에 코르닐로프 쿠데타 당시 스톨리핀을 저격하여 죽기 직전까지 몰아세운적이 있다.[152] 알릭세이는 병약한 어린아이, 키릴대공은 황실에게 인기없음, 니콜라이 대공은 군사적 재능은 몰라도 시대에 뒤떨어진 반동이라고 평가하며 하나같이 지도자 자리에 안어울린다고 평한다.[153] 본인이 직접 동양의 고사라며 언급한다. 실제로 작중 소련과 연해주 인구차가 일당백이다.[154] 이선을 보고 그는 황제가 아니더라도 능력이 뛰어나니 지도자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평한다.[155] 이선이 파블로프 공사에게 자신의 정체가 전세계에 들통나서 차르에게 미안하다고 전해달라고 말하고 파블로프도 이해하고는 러시아의 위대한 첩보조직이 들켜버렸다면서 블랙 유머로 같이 영국을 압박한다.[156] 러시아는 전제주의 국가라 총리가 명예직이고 재정을 관리하는 재무부과 사실상 최고위직이다.[157] 단순한 제국주의적인 이유외에도 러시아가 단독 강화하면 연합국의 지원이 끊어지고 러시아 경제는 파산하기 때문이다.[158] 단 진보적이어도 러시아인이라서 그런지 우크라이나는 말로로시아(소러시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물론 20세기 이전까지는 '소러시아'라는 명칭이 '우크라이나'의 지명으로 더 흔히 쓰이기는 했다만.[159] 러시아군은 중국인들이 괴혈병에 안걸리는 이유가 콩나물 때문임을 알았음에도 비타민의 존재를 몰라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해서 안먹었다.[160] 이덕에 적백내전 당시 카자흐스탄 출신들이 백군에 대거 협력하는 이유가 된다.[161] 그러나 이사람 이름이 최재형의 러시아 이름에서 따온것은 맞다.[162]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고위 장교들이 다죽어서 승진했기에 씁슬함을 느낀다.[163] 이게 생각보다 대단한게 러시아 백군 지도자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우크라이나를 인정한 것이다.[164] 원래 역사에서는 소련에 쭉 살다가 볼셰비키를 비판하여 숙청.[165] 원래 역사에서는 빈곤때문에 러시아를 떠나 파리, 베를린, 프라하에서 빈곤 속에서 가족과 함께 살다가 1939년 러시아로 돌아왔다가 남편과 딸은 간첩 혐의로 처형, 본인은 자살한다.[166] 닥터 지바고 작가. 원래 역사에서는 소련에서 살다가 사망[167] 그럼에도 10월 혁명을 어느 정도 늦추는 효과는 있었다.[168] 고려인들이 러시아인이라고 항의하자 한국 제국주의의 원흉이라며 빈정거리며 죽인다.[169] 스키타이-튀르크의 1제국, 주치 울루스 2제국, 3의 하얀 칸 러시아 제국을 계승한 제국이다.[170] 원래 역사와 다르게 인생의 절반은 독일에서 살았으니, 독일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질 때 파급력이 더 클 것을 우려해서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171] 2부에서 나온 떡밥이었는데 3부 초반에서 회수되었다.[172] 이게 역사의 큰 변화가 되었는데 이때 트로츠키의 행보 덕에 원래 역사보다 온건하고 국력이 약한 소련임에도 열강들이 공산주의 위협을 더 심하게 경계하는 이유가 된다.[173] 중국공산당을 창설한 리다자오를 도운 공산주의자.[174] 다행히 아버지 본인의 피가 아니라 같이 있던 동료들의 피라는 걸 보면 아버지는 살아남았으나 니콜라이를 죽일 때 아버지의 마지막 말이라는 걸 보면 얼마안가 죽은듯.[175] 니콜라이 2세를 좋아해서는 아니고 순교자 만들어주기 싫어서 였다.[176] 장작림의 신군은 매우 강했으나 신군은 어디까지나 대 중국 상대용이라 한국군이 출동을 금지시켜서 금위군으로만 싸웠다.[177] 여기서 이선은 K-의학 드립을 친다.[178] 콜차크 같은 백군장성들은 고작 중령이었던 운게른이 자신들을 대신해서 백군의 주도권을 쥐려는게 싫어서, 알릭세이는 자신은 딱히 바라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러시아도 아닌 몽골에서 차르로 옹립돼서, 러시아 황족들은 운게른 때문에 왕정복고가 미치광이들의 짓거리로 인식되는 게 싫어서 운게른의 차르옹립을 반대한다.[179] 몽골은 청나라에 합병된 이후로 징병제가 없어져서 군역에 대한 거부감이 심하다고 한다.[180]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이위종이 러시아 혁명의 참혹함을 말하면서 내전을 빨리 끝내기위해서는 어쩔수 없다고 설득했다.[181] 몽골인들은 강자의 말을 듣는다면서 운게른도 폭정만 안 했다면 꽤 많은 사람이 따랐을 거라고 평가한다.[182] 몽골문자가 너무 복잡하여 몽골문자를 읽을수 있는 사람이 얼마 안되었다.[183] 티베트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한 영국이 벌인 학살이 전세계, 특히 아시아에서 지탄을 받았고, 원주민들의 저항에 충격받은 영국인들의 루소포비아가 심화되어 온갖 음모론을 펼치다가 이선을 러시아 스파이로 모는 바람에 한국 국내 반영감정이 폭발, 이선의 친러시아 정책에 힘이 실리게 된다.[184] 원래 역사에서 명성황후릉의 석상을 올라타는 등 대한제국을 우습게 보던 것과 대조적이다.[185] 원 역사에서도 유력 후보는 우드였으나 공화당 내 계파 갈등 끝에 워런 G. 하딩이 후보로 선출되었다.[186] 그러나 이 부분은 에디슨이 마음을 바꿔서 니콜라 테슬라를 한국에 초빙하는데 실패한다.[187] 이선은 미래인이라 경제사에 대해서 다알고 있어서 경제예측을 훌륭하게 해낸다.[188] 간도를 동양의 알자스 로렌이라고 주장했다.[189] 맥아더 장군의 아버지이자 남북전쟁의 영웅[190] 실제로 이당시 미국은 영일 동맹에 의한 포위 공격을 미국의 최대 안보위협으로 보았다.[191] 역사에서는 민영익을 살려내고 홍영식은 역적으로 죽었기에 고종이 홍영식집을 몰수하여준다.[192] 이강을 계승권자라고 주장하고 이강이 에밀리와 결혼하면 한국황제의 혈통에 미국인의 피가 흐른다는 자극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이강은 당연히 미칠노릇.[193] 조지 5세도 나름 구하려고 애썼지만 영국내 차르에 대한 여론이 너무 나빠서 구해주지 못했다. 실제 역사에서도 영국인에 반대에 부딪혀 차르 일가를 구하지 못한다.[194] 인종차별적 성향에 더해 본인은 정부를 여럿 두고 있어서 실제 국혼 후보였던 타티야나 공주에게는 관심이 없었지만 이진과 결혼한다니까 괜히 질투가 나서 이러는 것이다.[195] 중국인들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고든은 청나라 관복에 황제가 하사한 황마괘를, 홍영식은 조선 관복을 입고 깄다.[196] 원래 역사에서는 여기서 고든이 죽으면서 여론에 압박을 받게된 글래드스턴 내각이 강경책을 써서 거문도 점령이 일어난다.[197] 결국 아일랜드 문제때문에 총리직에서 사퇴한다.[198] 동맹인 한국과 일본은 명예 백인이라고 립서비스 해주긴한다.[199] 가상인물 사토 히로시와 구분하기 위해서 인듯하다.[200] 일본이 언젠가 중국대륙을 집어삼키면 서양을 공격할거라고 생각했다.[201] 이사람도 인종차별주의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고가 유연해서 이승만이나 이선을 높게 평가한다. 특히 이 당시는 재야학자라서 자신의 이론을 지지해주는 한국황제에게 고마워한다.[202] 가장 큰 이유로 특히 러시아 황족들은 영국인들이 존경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자손들이라서 더욱 분노한다.[203] 인도인들은 성공한 아시아인인 한국황제의 초상화를 든 것인데 로더미어 자작은 음모론자 답게 이선이 인도인들을 선동했다고 생각한다.[204] 전쟁을 바로 일으키기에는 농번기라 오스트리아의 능력이 안 따라주었다.[205] 원래역사에서도 페츠네크랑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페츠네크가 중간에 오스트리아 나치들에게 다하우 수용소로 잡혀가서 만난뒤 27년 뒤인 1948년에 했다.[206] 다뉴브연방이 존재하는 역사의 변화로 트란실바니아를 절반 밖에 가지지 못해 대놓고 침략하려다가 헝가리를 공격하면 베사라비아를 공격하겠다는 소련의 압박을 받고 공세를 포기한다.[207] 조선인들의 내면에는 아주 훌륭한 본성이 들어 있다. 진정성이 있고 현명한 정부가 주도하는 변화된 상황에서라면, 이들은 아주 짧은 시간에 깜짝 놀랄 만한 것을 이루어낼 것이다. 물론 이들의 이웃인 잽싸고 기민한 일본인들처럼 빠르게 진행되지는 않더라도, 한때 이들의 군주국이었던 중국보다는 훨씬 빠를 것이다[208] 하지만 타티아나는 외국으로 가기싫어서 구혼을 거절했다.[209] 물론 얼마안가 1차 동아시아 전쟁을 틈타 베트남을 식민화한다.[210] 사실 이선도 완벽하진 않았는데 팔켄하인은 역사의 변화로 서부가 아닌 동부 공세를 준비했다.[211] 얼마나 심각하게 말아먹았는지 충분한 인력과 저력을 가지고 사기도 드높았던 프랑스가 단 1주일만에 이 미친전쟁을 중단하라!라고 외칠 정도다.[212] 프랑스와 수교하기 위해서는 카톨릭 종교의 자유가 필수적이어서 원래 역사처럼 반드시 해결해야할 문제였다.[213] 자유주의 우파이긴 한데 원래 역사에서는 무솔리니를 지지한 적 있을 정도의 강성 우익이다. 다만 현대 기준으로 우파이고 말년 혼란기에 파시즘과 연립을 추구했던 거지 원 소속은 역사적 좌파.[214] 처음에는 무솔리니에게 부총리와 내무 장관자리를 약속했지만 아예 자신의 권력까지 내놓으라고 하자 분노하여 무솔리니와 결별한다.[215] 영국신문은 로마를 공격한 모든 시도중 가장 초라한 시도라고 조롱한다.[216] 비스마르크는 황제가 동양 왕자랑 병정놀이한다고 표현했다.[217] 비스마르크의 명언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이말은 비스마르크를 비꼬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218] 독일 마르크를 신용하지 않고 금으로 바꾸는게 가능한 미국 달러로만 받는다던가, 재산을 네델란드로 빼돌리는 등의 방식으로 전후에도 부를 유지하고 부채를 늘렸다가 초인플레이션이 터지자 갚는 식으로 돈을 불린다.[219] 그럼에도 극우 테러를 혐오하고 현실감각이 있는 사람이라서 발터 라테나우가 독일을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도 불구하고 우익에게 죽은걸 동정한다. 물론 그 우익은 스티네스의 뒷돈을 받는 세력이다.[220] 독일 우익은 전쟁 때문에 프랑스를 혐오하고 슈트레제만은 구상은 훌륭하다고 판단하지만 자본가를 견제하려고 한다.[221] 독일 유명 조선회사로 유보트를 만든곳이 여기고 원래 역사에서 장보고급의 기술을 이전해준 HDW가 바로 이곳이다.[222] 특출난 애국심이 아니라 스웨덴 자본은 외국 자본이라 외화로 기업을 바로 사들일수 있어서 독일 자본가보다 유리하다보니 자신의 회사에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한 것.[223] 실제로 최후까지 스티네스는 고민을 하다가 내린결론이었다.[224] 작중 역사에서는 볼셰비키가 사전적인 의미로만 쓰이는 관계로 이 용어를 쓴 듯.[225] 이는 괴벨스가 어느 정도 좌익성향이라서 군주제를 경멸해서도 있다.[226] 그중에는 이선이 러시아가 아니라 일본편을 든 이유가 폴란드 애인의 영향도 있냐는 말도 있었다.[227] 실제로는 이미 사기가 떨어질때로 떨어진 러시아군, 나라없는 군대라 한계가 뚜렷한 체코군, 전쟁에 참여한지 얼마 안된지라 오합지졸인 미군, 수가 너무 적은 영국과 프랑스의 파견군 보다 훨씬 준비도 잘돼있고 수도 많은 연합군의 주력이었다.[228] 극좌는 자본가라서 싫어하고 우익은 유대인이라고 싫어하는 인물이라서 생존을 위해 온건한 공화국이 존재해야한다고 보았다.[229] 이웃한 지역에 살았고 여성 폴란드 혁명가가 흔하지 않아서 서로 만나서 토론하고 민족과 계급에 대해서 토론을 자주 나눴다고 한다.[230] 실존인물로 역사에서도 자유공원근처에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231] 아직 해당 병이 확인되기도 전이다.[232] 이선은 이를 지적해서 일본인들이 아이누를 가혹하게 구는 걸 본사람들이 왜 일본에 희망을 거는지 모르겠다고 답변하자 마르가리타는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233] 소설 내용은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노력한 미녀의 독립운동가가 잔혹한 차르에게 잡혔으나 동양의 왕자가 그녀를 구해주었고 그녀는 미지의 동방의 나라로 가게되었으며 왕자와 그녀사이에 로맨스가 생겼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폴란드인들은 진짜라고 믿는다고.[234] 이선은 마르가리타를 도와준것을 제외하면 차르의 친구였기에 폴란드 독립에 도와준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일본이 러일전쟁을 위해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형을 통해 더 도와줬다.[235] 한국인들은 폴란드를 정동파란양의 모국이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폴란드인들이 이소설을 읽고 한국인들을 환영하자 우호적 분위기가 생겼고 적백내전에서 한국의 적인 소련을 폴란드가 격파하자 한국 역시 폴란드를 동맹국으로 생각하게된다.[236] 비록 적국인 러시아의 공주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고 폴란드도 독립했기에 서로 관계가 풀어졌다. 실제로 원래 역사에서도 백계 러시아인들을 지원하기도 했다.[237] 알프레드 노벨의 형 루드비그 노벨이 설립한 회사로 한때 전세계 석유 생산량의 50%를 차지했다고 한다.[238] 서술상 첫등장이지 설정상 1898에 이미 등장했다고 한다.[239] 가장 강력한 아시아인이기에 막연히 한국 황제가 같은 아시아인인 인도의 독립을 힘써주지 않을까 해서 반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고르가 한국을 찬양하는 시를 쓴것도 같은 이유.[240] 러시아 황제 남매들이 직접 겨울 궁전에 온것 같다고 추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