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0-16 11:38:10

한성근

韓聖根
1833년(순조 33) 8월 3일 ~ 1905년(고종 42) 12월 28일 (향년 72세)

1. 소개2. 생애3. 여담

1. 소개

조선 후기의 문신, 장군. 본관은 청주(淸州)[1], 자는 원집(元執).

2. 생애

1833년 8월 3일 충청도 괴산군 동중면 쌍곡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쌍곡리)에서 아버지 한용철(韓用喆, ? ~ 1840. 12. 3)과 어머니 동래 정씨[2] 사이에서 3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증조부는 한상겸(韓相謙), 조부는 한영표(韓永彪)이다. 한성근이 출세한 후 3대가 각각 승정원 좌승지(정3품),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 문·무관의 품계) 호조 참판(종2품), 호조판서(정2품)에 추증되었다.

그는 본래 문관으로, 1863년(철종 14) 정시 문과에 병과 6위로 급제하고 이듬해인 1864년(고종 1) 7월 권지(權知:견습관원) 성균관 학유(學諭:종9품)에 제수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같은 달 봉상시 봉사(奉常寺奉事:종8품)에 제수되었다가 1866년(고종 3) 2월 성균관 학록(學錄:정9품)에 제수되었다.#

그러다가 그해 9월 13일, 그는 봉상시 봉사로 있었는데, 별안간 경기 순무영(巡撫營)에 의해 겸임 초관(哨官:종9품)으로 차출되어 집사(執事) 지홍관(池弘寬)과 별파진(別破陣:총포를 다루는 특수병) 50명과 함께 출정하게 되었다.# 그 출정하게 된 곳이 바로 당시 통진도호부 보구곶면 산성리(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에 있던 문수산성(文殊山城)이다.

그러다가 5일 후인 9월 18일 오후 2시경, 프랑스군 소속 선박 4척이 문수산성의 남문에 도달하자, 발포하여 먼저 정박해 있던 2척의 배에 타고 있던 27명의 프랑스군을 섬멸했다.[3] 그러자 나머지 2척에 타고 있던 100여 명의 프랑스 병사가 육지로 올라서서 발포하기 시작했고, 이에 5명의 사상자[4]를 내고 중과부적으로 달아났다. 프랑스군은 이때 문수산성의 남문에 불을 지르고 몸을 돌려 퇴각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승전보를 울리도록 하고는 한성근의 공을 치하해 같은 달 말에 병조 좌랑(정6품)에 제수되었다. 이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며, 그 뒤 별기군의 정령관에 임명돼 신식 군대를 훈련했다.

그러던 도중 흥선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 옹립 사건에 휘말렸으나 혐의 없음이 밝혀졌다. 1896년 중추원 의관을 지냈고 1899년 궁내부 특진관을 지내다가 1905년 12월 28일 노환으로 사망해 충청북도 괴산군에 묻혔다.

3. 여담

병인양요에서 활약한 양헌수 장군이나 신미양요에서 대패했으나 끈질기게 전투를 수행해 조선군의 기백을 보여준 어재연 장군에게 밀려 인지도가 낮다. 이유는 나라에서 안 밀어준 탓도 있기도 하고 두 장군은 스토리도 많은데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무찔러 정족산 사고에 보관 중이던 조선왕조실록과 도서를 지킨 양헌수 장군과 미군에게 대패했으나 자신의 동생과 함께 참전해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어재연 장군보다 밀린 것이다.

나라에서는 두 장군을 기려 승전비를 세워주거나 추모비를 세워 후대에게 내용이 자세하게 전달됐고 두 장군의 격전지인 정족산성과 광성보는 잘 보존되거나 사진 기록이 남아 처절했던 전투의 현장을 잘 보여줘 두 장군은 인지도가 있다. 한성근 장군의 격전지인 문수산성은 접근하기도 어렵고 성도 많이 훼손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며 성의 일부가 군부대에 있어 민간인이 접근하기 어렵다.

지금도 대우가 나쁜데 양헌수 장군의 경우 장군이 쓴 일기는 사적이 되거나 양헌수 장군의 물건이 전쟁 기념관에 전시되었다. 어재연 장군의 경우 국방부에서 호국의 인물로 선정되고 나라에서 추모비를 세워주거나 장군기를 반환받아 박물관 중앙에 전시하고 격전지였던 광성보에는 어재연 장군의 동상까지 세워졌다. 교과서에서도 두 장군의 이야기만을 서술하고 두 분의 초상화까지 그려 추모하지만 한성근 장군의 경우 그런 것도 없이 잊혀지고 있다. (비상출판사 2009년 개정판 한국사 교과서 5단원에는 수록되어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성근 장군의 무덤이 있는 괴산군이 한성근 장군의 행적을 추적 기록물이나 유물을 홍보해주고 있고 한성근 장군의 고향인 김포시는 격전지인 문수산성을 복원하기 시작해 개선의 여지는 있다.

공무원 시험에서는 주로 양헌수와 섞어서 페이크로 나오곤 한다. '양헌수-정족산성, 한성근-문수산성'인데 이를 바꿔서 출제하는 식. 수험생들은 이에 대처하기 위해 문성근으로 외우기도 한다.


[1] 양이공파 29세 근(根) 항렬.[2] 정호순(鄭好淳)의 딸이다.[3] 승정원일기 고종 3년 병인(1866) 9월 19일(을해) 맑음에서는 5, 60명으로 추정했다.[4] 당시에 경기도 광주유수부 별파진의 최장근(崔長根)·김달성(金達城)·오준성(吳俊成)과 문수진(文殊鎭)의 백성 오돌중단(吳乭仲段)이 사망자로 파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