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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1884)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최준
崔浚[1]으로 기재되었다.]
파일:최준2.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최영조(崔泳祚)[2]
내윤(乃允)
문파(文坡, 汶坡)
본관 경주 최씨[3]
출생 1884년 7월 27일
경상도 경주부 부내면 교리
(現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4] 69번지)[5]
사망 1970년 10월 13일[6] (향년 86세)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59번지 자택
묘소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월산리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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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기업인, 교육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주의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한 경주 교촌 최부잣집 12대로 그의 둘째 남동생 최완도 독립운동가였다.[7]

2. 생애

1884년 7월 27일 경상도 경주부 부내면 교리(現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번지)에서 아버지 최현식(崔鉉軾, 1854 ~ 1928. 6. 20)과 어머니 풍산 류씨(豊山 柳氏, 1851 ~ 1932. 10. 1)[8] 사이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최윤(崔潤, 1886. 3. 26 ~ 1969. 10. 22)[9], 최완, 최순(崔淳, 1892. 10. 15 ~ 1948. 3. 22)[10]이 있었다. 아버지 최현식은 경주 교촌 최부잣집 11대로, 1888년(고종 25) 식년 진사시에 3등 19위로 입격한 뒤 경릉(敬陵) 참봉[11]을 거쳐 1900년 산릉도감 감조관(山陵都監監造官)[12] 등을 역임했다.

일찍이 21촌 지간의 족숙 최현필(崔鉉弼, 1860. 11. 30 ~ 1937. 1. 29)[13]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898년 경상북도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의 풍산 김씨(豊山 金氏) 김석윤(1884 ~ 1963. 10. 29)[14]과 결혼해 슬하에 장남 최식(崔植, 1907. 12. 27 ~ 1975. 4. 10)[15]과 차남 최용(崔榕, 1910. 3. 8 ~ 1991. 8. 15)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어릴 적부터 사촌 매제[16]박상진과 둘째 처숙부 김응섭(金應燮, 1878. 11. 15 ~ 1957. 5. 29)[17]의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05년 1월 23일부터 12월 24일까지 효릉(孝陵) 참봉, 돈녕사 주사(敦寧司主事), 현릉(顯陵) 참봉, 장릉(莊陵) 참봉, 주전원 전무과 주사(主殿院電務課主事)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18]

1917년 사촌 매제 박상진이 이끌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재무를 담당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고, 이 때문에 1918년 조직이 발각되었을 때 체포되었다가 1918년 10월 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예심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공갈·살인·강도 등의 혐의에 대해 면소 판결을 받고 곧 방면되었다. 출옥 후에는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에 입단해 군자금을 헌납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마침 귀국해 있던 동생 최완에게 현금 2만 원을 맡겨 파견해 군자금으로 조달하게 했다. 1919년 5월 안희제의 백산상회가 백산무역주식회사로 개편되자 취체역 사장 및 지배인에 취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했다.

1920년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을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1년 9월에는 미국 워싱턴 D.C.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에 경주군 대표로 서명했다.

이후 1921년부터 경남은행(慶南銀行)[19], 대구은행(大邱銀行), 고려요업(高麗窯業)[20], 경주상회(慶州商會)[21] 등 기업의 이사 및 사원으로서 활동했고, 경주산업조합(慶州産業組合)의 대표를 맡기도 했다. 또한 대구은행과 해동은행(海東銀行)[22], 대동사(大東社)[23], 경일은행(慶一銀行) 등에서는 대주주로서 경영에 관여하는 등 기업인으로서도 활동했다.

그러나 줄곧 겪어오던 백산무역에서의 주주와 중역들간의 문제가 점차 격화되었고, 1925년에는 감사역들에 의해 장부조사가 실시된 뒤 9월 12일 당시 취체역으로 있던 남동생 최순과 안희제, 윤병호, 최태욱(崔泰旭)과 함께 감사역 문영빈(文永斌, 1891. 7. 12 ~ 1961. 10. 9)[24]으로부터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사기횡령 혐의로 고소당했고, 이어 9월 19일에는 주주대표 지창규(池昌奎)·이우식(李祐植)·서상일 등으로부터 최준을 비롯한 중역들이 고소당하는 등 내분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최준은 당시 대표취체역으로 있던 동생 최순과 함께 1925년 9월 12일 이사직을 사임했고, 백산무역 또한 1928년 1월 29일 폐업했다.

이때 최준은 부채 130만원을 떠안게 되었고,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조선식산은행아루가 미쓰토요(有賀光豊, 1873. 5. 13 ~ 1949. 5. 31)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미쓰토요는 부채를 맡아주는 대신에 최준이 소유하고 있던 논밭과 집을 압류했고, 최준이 소유한 부동산의 권리를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이관하는 계약서를 체결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최준은 8.15 광복 이전까지 줄곧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의 감시 및 통제를 받아야 했다.

이러한 독립운동 지원의 과정과 일제의 신탁관리 명목의 수탈로 300년간 이어지던 경주 최부잣집의 명성은 최준의 대에서 끝났다. 그래서 마지막 최부자로 불린다. 나라가 일제에게 넘어갔을때 이회영과 함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을 몸소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광복 후 일제의 신탁관리하에 있던 재산의 1/3을 돌려받았는데, 이를 민족문화 건설에 주역이 될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의 목적으로 모두 사회에 환원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5년 10월 대구시 지역 유지 20여 명과 함께 경북종합대학 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취임했다. 이 경북종합대학은 1947년 3월 가칭 대구문리과대학으로 개교했다가, 그해 9월 재단법인 대구대학(大邱大學)[25]으로 설립인가를 받아 정식으로 개강했다. 1950년 4월에는 초급대학을 부설했고, 1959년 3월에는 대구여자학숙을 병설하기도 했다. 최준은 집안의 모든 재산과 집, 선산, 교촌마을에 살던 일가 친척들의 집까지 모두 대구대학 재단에 기부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대구대학은 1960년대 이후 재정난에 빠져 당시 대구대학 교수로 있던 신현확의 주선으로 1964년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에 경영권을 넘기게 되었고, 최준은 재단 이사에 취임했다. 그러나 1966년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삼성그룹은 대구대학 재단을 박정희 정부에 헌납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1967년 12월 영남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준은 군사정권에 재단이 넘어가는 것에 대해 격렬히 반발했으나 끝내 막지 못했고, 대구대학 재단 소유였던 최준의 사재와 선산 등이 모두 학교법인 영남학원에 이관되었다.

1970년 10월 13일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59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사후 198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3. 여담



[1] 1919년 5월 일본 외무성 기록 騷蜜 제2219호에는[2] 승정원일기에는 崔祚로 표기하기도 했다.[3] 사성공파(司成公派)-정무공파(貞武公派)-교리파(校里派) 18세 영(泳) 항렬.[4] 경주 최씨 사성공파-정무공파 집성촌이다.[5] 이 지번에 바로 경주최부자댁이 자리해 있다.[6] 음력 9월 14일.[7] 첫째 남동생 최윤(崔潤, 초명 최영희崔泳禧, 1886. 3. 26 ~ 1969. 10. 22)이 중추원 참의를 지낸 친일파라고 하지만 가문을 지키기 위한 방패막이었을 뿐이었으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조사에서도 친일행위가 적극적이지 않은 것으로 나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음에도 일찍 풀려났다고 한다.[8] 류성룡의 후손으로, 류도휘(柳道彙)의 딸이다.[9] 초명 최영희(崔泳禧).[10] 초명 최영희(崔泳禧).[11] #[12] #[13] 최진립의 넷째 아들 최동길(崔東吉)의 9대손이다. 1891년(고종 28) 제2회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 4위로 급제해 승정원 가주서(假注書, 정7품)와 권지(權知)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 종9품)를 역임했으나, 갑오개혁 이후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14] 김정섭(金鼎燮, 1862. 7. 21 ~ 1934. 4. 2)의 장녀이다.[15]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니혼대학에 입학했으나 1930년 중퇴했다.[16] 독립유공자 박상진 열사는 최준의 작은아버지 진사 최현교(崔鉉敎, 초명 최현설崔鉉卨, 1857 ~ 1924. 1. 15)의 장녀와 결혼했으며, 박상진과 최준은 같은 1884년생으로 동갑이지만 박상진이 최준보다 5달 늦게 태어났다.[17] 최준의 처부(妻父) 김정섭의 둘째 남동생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차장을 역임했으나, 아직 독립유공자에는 서훈되지 않은 상태이다.[18] * 효릉 참봉 : 1월 23일 임명, 3월 2일 사직
* 돈녕사 주사 : 3월 2일 임명, 3월 11일 사직
* 현릉 참봉 : 1차 3월 11일 임명, 5월 8일 사직 / 2차 5월 9일 임명, 5월 21일 사직 / 3차 5월 22일 임용, 5월 23일 사직 / 4차 5월 24일 임용, 5월 25일 사직 / 5차 5월 26일 임명, 5월 29일 사직 / 6차 5월 30일 임용, 7월 21일 사직 / 7차 7월 22일 임용, 8월 8일 사직 / 8차 8월 9일 임용, 9월 1일 사직 / 9차 9월 2일 임용, 9월 12일 사직 / 10차 9월 13일 임용, 10월 12일 사직 / 11차 10월 12일 임용 / 12차 12월 24일 임용, 1906년 1월 12일 사직
* 장릉 참봉 : 5월 21일 임용, 5월 22일 사직
* 주전원 전무과 주사 : 12월 23일 임용
[19]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남도 부산부 초량동(現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604번지[20]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대구부 금정2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3가) 184번지.[21]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경주군 경주면 동부리(現 경주시 동부동) 146번지.[22] 1921년 당시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남대문통1정목(現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1가)[23] 1921년 당시 주소는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1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1가) 53번지.[24] 본관은 남평(南平), 초명 문영우(文永禹). 남평문씨인터넷대동보에는 文永으로 등재되어 있고, 1913년 간행된 조선신사대동보에는 文永으로 등재되어 있다. 초대 남평문씨대종회 회장을 역임했다.[25]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 내리리에 있는 대구대학교와는 별개의 대학이다.[26] 충효당(忠孝堂)이라고 한다.[27] 근재(謹齋)는 학성 이씨 시조 이예(李藝, 1373 ~ 1445. 2. 23)의 10대손 이의창(李宜昌, 1725. 9. 16 ~ 1781. 7. 25)의 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