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및 제1차 세계 대전의 러시아 해군 함선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 <colbgcolor=#ffffff,#191919> 어뢰정 | 페르노프 | |||
구축함 | |||||
잠수정 / 함 | 델핀, 솜급, 카사크타급, 미노가, 아쿨라, 카르프급, 카이만급, 크랍, 모르즈급, 바르스급, 나르발급, A급 | ||||
경순양함 | 알마스급, 스베틀라나급 | ||||
장갑순양함 | 게네랄 아드미랄, 미닌,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드미트리 돈스코이, 아드미랄 나히모프급, 파먀티 아조노바, 로시야, 그로모보이, 바얀급, 류리크 | ||||
방호순양함 | 디아나급(아브로라함), 바랴그급, 스베틀라나급, 아스콜드, 노빅급, 바가티르급, 이주므루드급 | ||||
군수지원함/구난함 | 콤무나 | ||||
순양전함 | |||||
전함 | <colbgcolor=#ffffff,#191919> 전드레드노트급 | 예카테리나 2세급, 나바린, 임페라토르 알렉산드르 2세급, 페트로파블로프스크급, 트리 스비아티테리아, 아드미랄 우샤코프급 전함, 체자레비치, 보로디노급, 로스티슬라브, 페레스베트급, 포템킨, 레트비잔, 에프스타피급, 안드레이 페르보즈반니급 | |||
드레드노트급 | |||||
※ | }}} {{{#!wiki style="margin-top: -30px; margin-bottom: -10px; letter-spacing: -0.9px; font-size: 0.82em" | ※둘러보기 : 러시아·소련군의 운용장비 | 해상병기 | }}} }}}}}} |
제원과 정보 | ||
Dmitrii Donskoi Дмитрий Донской | ||
제작 착수 | 1881년 5월 21일 | |
진수 | 1883년 8월 30일 | |
취역 | 1886년 8월 1일 | |
침몰 | 1905년 5월 29일 오전 6시46분 | |
함급 |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 | |
함종 | 장갑순양함(Armoured Cruiser) | |
배수량 | 5,976톤 | |
길이 | 93.4m | |
폭 | 17.7m | |
흘수 | 7.88m | |
추진 | 샤프트 × 1개 | |
증기기관 × 2개 | ||
보일러 × 8개 | ||
속도 | 16.5노트(30.6km/h) | |
항속 거리 | 10노트(19km/h)시 7,000 마일(13,000km) | |
함포 | 8인치(230mm) 포 × 2문 | |
6인치(152mm) 포 × 14문 | ||
어뢰 | 15인치(381mm) 어뢰 발사관 × 4개 | |
장갑 | 종류 | 복합장갑 |
Belt × 2개 | 4.5~9인치(110~230mm) | |
Deck × 8개 | 5인치(13mm) | |
Barbettes | 12인치(305 mm) |
[clearfix]
1. 개요
드미트리 돈스코이 함은 러시아 제국 해군의 장갑순양함으로 러일전쟁중 쓰시마 해전에서 패전한 발트함대 소속의 함선 중 하나였다. 함명인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1300년대 모스크바 대공으로 리투아니아를 격퇴한 러시아 영웅 ‘드미트리 돈스코이’에서 따왔으며, 침몰 이후에는 현 러시아 해군의 원자력 잠수함 이름으로 다시 쓰였다.1904년 10월 15일,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러일전쟁 중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의 50여 척의 대함대의 일원으로 발트 해의 리바우 항을 출발, 아프리카를 에둘러 극동에 이르는, 장장 29,000km라는 사상 최장의 원정길에 올랐는데, 원래의 목적지인 뤼순항이 뤼순 공방전 끝에 일본에 함락되는 바람에 중간에 블라디보스토크항으로 목적지를 변경했다.‘보물선’ 돈스코이의 기구한 항로와 두 남자 이야기(나우뉴스)
1905년 5월 27일 02시 45분, 러시아 함대는 대한해협에서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만나 큰 피해를 입는다. 이때 살아남은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 함은 개전 이튿날인 5월 28일 오후 일본 함정들의 추격을 받으며 북으로 도주했다. 돈스코이의 함장 레베데프 대령은 적의 끈질긴 항복 권유를 뿌리치고 혼자서 11척의 일본 순양함/어뢰정들과 맞서 영웅적으로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고, 결국 함장 자신도 큰 부상을 입고 패주하는 신세가 되었다. 결국 울릉도 저동 앞바다에 도착, 한밤중에 승조원들을 보트로 하선시킨 채 드미트리 돈스코이를 5월 29일 6시 46분 자침시켰고 레베데프 대령 역시 함정과 운명을 같이 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의 영웅적인 항전은 오늘까지도 러시아 해군의 귀감이 되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한국측 기록인데, 울릉도의 역사가 기록된 '울릉군지'에 따르면 "(돈보스꼬이 함이)울릉도 울릉읍 저동 앞바다에서 자침하고 함장 레베데프 대령은 생존 승조원 770명과 함께 저동 앞바다에 상륙하고 포로가 되었다."라고 나와 있다. 또한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라 꼴랑 100년 전 일이라 의외로 당사자에게 직접 들어 기억하고 있는 울릉도 어르신들의 말씀으로는 "오징어선을 타고 러시아 부상 군인들을 구조해줬더니 노란 거를 주더라. 안 받으니 바다에 던져 버렸다.", "배 안에 금이 엄청 많다고 손짓으로 알려 주었다.", "러시아 군인들이 당시 구조를 도와준 어민에게 보물이 든 청동주전자를 선물했다."라고 하신다. 구체적으로는 독도수비대로 알려진 홍순칠 대장의 할아버지 '홍재현'에게 러시아 함장이 청동 주전자를 선물해줬으며 그 안에 금괴가 들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 청동 주전자는 홍순칠 대장의 기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울릉군지의 기록과 어르신들의 기억과 달리 레베데프 대령은 구조되지 않았으며, 부장 블로킨 중령 이하 생존 승조원들은 울릉도에 상륙했었다. 또한 사실 관계가 불분명한데 청동 주전자 안에 '금괴가 들어 있다.'가 아니라 '정체불명의 여성에게 홍순칠 대장이 들었다더라...' 수준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청동 주전자를 울릉도민이 러시아 해군에게 받은 것까지는 사실이며, 그러면서 이 배에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가 있었고 그게 아직 물 속에 가라앉아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이것이 이후 보물선 소동의 발단이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자료에는 발트 함대의 경비는 회계함인 아드미랄 나히모프 함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이에 울릉도민의 기록과 역사적 기록이 서로 충돌이 나자 "혹시 나히모프 함이 쓰시마 앞바다에서 침몰 직전 금괴를 돈스코이 함에 옮겨 담지 않았을까?"라는 것이 보물업자들의 주장이다. 발트함대의 회계함이 나히모프 함이라는 오피셜 자료를 잘 모르는 언론에서는, 돈스코이 함이 군자금을 실고 있었다는 보물업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기사화했다. 본 문서의 이전 버전에서도 "군자금이라면 기함에서 관리하였지 돈스코이 함에는 없었을 것이다."라는 엉뚱한 기술을 하기도 하였다.[1] 여담으로 지금은 싹 사라졌지만 과거 신일그룹 홈페이지에서 돈스코이 함이 보물선이랍시고 올렸으며 보도자료로도 뿌린 1932년 11월 28일자 뉴욕타임즈 기사 조각을 보면 Admiral Nachimov[2]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어 돈스코이 함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을 7월 19일 SBS가 지적하기 전까지 어느 언론도 이를 지적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틀 전인 7월 17일자 동아일보의 돈스코이호 보물선 맞나? 신일그룹 “확실” 주장, 일각에선 투자사기 의심기사에서 "신일그룹 자료에 따르면, 1932년 11월 28일 미국 뉴욕타임스는 '침몰한 배의 금을 사냥하는 일본'이란 제목으로, 돈스코이 함에는 영국 소버린 금화 5,000파운드 상자 5,500개를 싣고 있었으며, 이는 무게 200톤으로 당시 5,300만 달러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라며 보도자료를 따라 읽는 참담한 영어 실력을 선보인 바 있다. 단체로 영어 울렁증이라도 왔는지...
한편 생존 승조원들은 다음 날 상륙한 일본 해군에게 무저항 항복했다. 발트함대는 50여 척의 함정 중 순양함 2척[3]과 어뢰정 2척만 블라디보스토크로 갈 수 있었다. 나머지는 격침, 항복 후 나포, 미국령 필리핀 등으로 도주했다.
2. 침몰선 탐사와 발견
당초 보물은 1905년 5월 28일(돈스코이 함 침몰 전날) 쓰시마 근해에 침몰한 나히모프 함에 실려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러일전쟁 후 전쟁포로로 잡혀 있다 돌아온 발트함대의 한 사령관이 남겼다는 기록이 시초라 하는데, 로제스트벤스키 제독과 그 예하에 있던 네보가토프, 엔크비스트 두 제독 중 한 명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나히모프 함에는 군자금과 일본 정벌 후 쓸 자금으로 약 24조원에 달하는 금화와 백금괴 등 보물이 있었다고 한다. 1980년 일본 해양개발주식회사는 나히모프 함 보물 인양 작업을 벌였다. 백금괴로 추정되던 쇳덩어리 17개를 인양했지만 정밀검증 결과 백금괴가 아닌 배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 평형수 개념으로 배에 저장해둔 납덩어리로 밝혀졌다. 금화는 찾지 못했다. 아울러 러시아(당시 소련) 정부와 나히모프 함에 대한 소유권 분쟁이 번지면서 인양 작업은 1년 만에 끝났다.나히모프 함 소동이 가라앉자 보물선에 대한 관심은 울릉도 앞바다에 잠든 돈스코이 함으로 옮겨졌다. 보물이 침몰 직전 돈스코이 함으로 옮겨졌다는 것. 기록에 따르면 나히모프 함이 쓰시마 앞바다에서 침몰 직전 돈스코이 함으로 군자금을 옮겼다는 것인데 200톤이나 되는 금괴를 집중 포격을 받으면서 옮겼다는 것도 난센스이지만 그 기록이라는 게 대체 뭔지 사진으로라도 찍어서 보여달라는 언론의 요청에 신일그룹 측은 묵묵 부답이다. 그래 놓고 다시 7월 26일 신일그룹 기자회견에서 최용석 대표는 "러시아 국립문서 보관서에 보관된 자료에 따르면 군자금을 실었던 발트함대의 회계함 나히모프 함이 1905년 5월 27일 울릉도 저동항 앞바다에서 돈스코이 함에 접근한 기록이 있다. 나히모프 함의 금괴 등이 돈스코이 함으로 옮겨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쓰시마 앞바다에서 침몰한 나히모프함이 다시 부활하여 다시 울릉도까지 갔다는 건데, 스스로 먼저 했던 말을 까먹은 듯.
1981년 5월 29일 한국의 도진실업이 해운항만청에 1,200만원의 보험증권을 제출하고 매장물 발굴 허가를 얻었다. 도진실업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부설 연구기관이던 해양연구소에 탐사 작업을 의뢰했다. 하지만 탐사는 실패로 끝났고, 탐사 작업을 진행한 도진실업 대표도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터진 시기에 단기금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돈스코이 함은 발견되지 않았다. 죽지 않고 또 돌아온 돈스코이 소동(경향신문)
1999년 8월 동아건설과 해양수산부 산하 국책연구기관 해양연구원(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이 ‘밀레니엄 2000’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돈스코이 함 탐사 사업에 뛰어들었다. 동아건설이 자금을 대고 해양연구원이 실제 탐사 작업을 맡는 등 2004년 12월까지 4단계로 진행되는 대규모 보물선 탐사 프로젝트였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보물선 탐사 작업을 본격적으로 지원한 배경에는 IMF(국제통화기금)가 있다. 구제금융을 받던 암울한 시기, 정부는 보물선 프로젝트가 국민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금 모으기 운동 등으로 ‘금’이 귀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부도 위기에 몰렸던 동아건설 역시 보물선 탐사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 있었다.
동아건설은 해양수산부 포항지방해양수산청에 공식 제출한 발굴 승인 신청서에 금괴류 500㎏에 추정가치 50억원을 적어 냈다. 2018년 신일그룹 사건이 터지자 "우리는 돈스코이에 금 500㎏ 정도 있는 것으로 추정하며 현재 가치로는 220억원 수준으로 본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참고로 동아건설 측은 '돈스코이 함 최초 발견'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어 앞으로 신일그룹 측과 다툼이 예상된다. 이 회사는 지난 19일 기자회견을 열어 "포항 해양청에 허가를 받아 정상적인 루트로 해당 함선을 찾아낸 우리에게 최초 발견자의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동아건설은 "신일그룹이 한 일은 우리가 먼저 발견한 좌표에 가서 과거보다 좋아진 장비로 비교적 선명한 영상을 촬영한 것에 불과하다"며 "아직 정식 발굴 허가를 받지 않은 신일그룹이 만약 금화 한 개라도 끌어올리면 그것은 도굴"이라고 강조했다. 동아건설 '돈스코이' 권리 주장…"220억원 가치 금 추정"(SBS). 당시 부도 위기의 동아건설이 돈스코이 함을 발견하겠다고 하자 주가가 17일 연속 상한가를 치는 대소동이 일어났지만, 결국 상장 폐지 당시 주가는 30원이였다. 2018년 현재는 회생절차를 거쳐 정상 운영 중에 있다. 다만 발굴 허가 기간은 2014년까지로 이미 끝났다.
2003년 5월 20일 한국해양탐사 연구소는 울릉도 저동 앞바다 수심 400m 지점에서 돈스코이 함을 발견했다. 1999년 ‘밀레니엄 2000 프로젝트’로 돈스코이 함 탐사작업을 시작, 약 4년 간의 탐사 끝에 발견한 것이다. 이 때 15cm 함포, 속사포 지지대, 조타기, 전신기, 돛대 지지대, 후갑판 발코니와 선체 측면 등의 촬영에 성공했으며 이들 촬영사진이 기존의 돈스코이 함의 설계도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러시아와의 소유권 분쟁을 피하기 위해 돈스코이 함 ‘추정’ 선박이라는 표현을 썼다.
2018년 7월 17일. 신일그룹에서 해당 선체를 울릉도 앞바다에서 발견해 탐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소유권 등기와 본체 인양을 위한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 밝혔다. 113년 만에 발견된 '150조 품은 보물선'…소문 진짜일까(SBS), 정말 전설의 보물선일까… "113년 전 침몰한 돈스코이號 찾았다"(조선일보). '최초 발견', '130년만에 발견', '150조 가치' 주장으로 관련 주식으로 알려진 제일제강이 상한가를 쳤으며, 무슨 조화인지 이날 비트코인 가격이 10% 폭등하였다.
즉, 동아건설과 한국해양탐사 연구소가 1999년 합작으로 조사하다 중간에 동아건설은 망하고, 한국해양탐사 연구소 단독으로 2003년 돈스코이 함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2018년 신일그룹은 당시 동아건설 관계자와 한국해양탐사 연구소 연구원을 합류시킨다. 반면에 2018년에 다시 회생한 동아건설은 돈스코이 함은 자신들이 발견하였기 때문에 소유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등 동아건설/한국해양탐사연구소/신일그룹은 서로 관계자가 섞여 있는 상태이며 권리 관계가 복잡하다. 동아건설은 투자 사기가 의심된다며 신일그룹을 검찰에 고발하였다.
구체적으로는 2003년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돈스코이 함을 탐사팀으로 참여해 좌표 등 정보를 알고 있던 '진교중'이 신일그룹 탐사총괄자문으로 합류해 쉽게 돈스코이 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2.1. 정말 보물선인가?
지금도 수없이 많은 금이 있다고 회자되는데, 어느 업체도 실제 인양이나 금의 유무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게다가 현재 인양을 주도하는 신일그룹은 금이 있다고 기정사실화하고(아직 끌어올리지도 않았고 금이 확실히 존재한다는 보장조차 없다) 관련 가상화폐 개설을 추진했지만 전형적인 사기로 드러나 버렸다.논리적으로 드미트리 돈스코이에 저만한 금이 실렸을 확률은 없다고 할 수 있다.
-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NYT는 "현 시세(2000년 12월)로 따졌을 때 150조원 어치 금괴의 무게는 14,000미터톤(1미터톤=1,000kg)에 이르렀을 것이다."라고 하며 아마 "금덩이 무게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조롱하였다. 설사 금화류가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가격을 열 배쯤 더 받는다고 쳐도 실을만한 양이 안 된다.
- 2018년의 금 시세로 따져도 신일그룹의 주장대로 150조원의 가치라면 3,300톤의 금이 있어야 한다. 2018년 한국은행 보유 금 보유량이 104톤이며, IMF때 금 모은 게 220톤이다. 또한 과거 러시아 제국과는 비교도 안되는 부자인 현 러시아의 금괴 보유량이 18년 8월 현재 1,944톤이며 전세계 중앙은행이 가진 금이 33,000톤이다. 당시 시세든 지금 시세든 천 톤 이상의 금을 그런 식으로 쓸 정도면 본국의 금 보유량은 더 많았을 테고 그럼 러시아 제국은 망하지 않았으며[4] 세계의 역사는 다시 써졌을 것이다.
- 신일 그룹의 주장으로는 배 안에 9조원 가치의 영국 금화 200톤이 있지만, 고고학적 가치를 감안해 150조원이라고 한다. 꼴랑 110여년 밖에 안된 배에서 고고학적 가치를 따지는 게 우습긴 하지만 전세계에 딱 1개 있는 금화도 아니고 무려 200톤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금화라면 있던 희소성도 바닥으로 떨어진다. 결국 금의 실거래가 이상의 가치가 있기 어렵다. 신일그룹 측은 소브린 금괴가 배 안에 있다고 주장한다. 소브린 금화=1파운드 금화이다. 전세계를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기축 화폐인지라 희소성은 0이다.[5] 또한 배 안에 실려 있는 게 소브린 금화가 아니라 금괴라면 고고학적 가치 따위는 당연히 없고 당연히 실거래가이다.
- 장거리 원정이라는 위험한 임무를 맡은 배에 그런 막대한 금을 실을 이유가 없다.(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발트함대 소속으로서, 유럽과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항해했다.) 굳이 엮어넣는다면 기항지마다 현찰 박치기로 보급을 해야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 양은 무리가 있다. 아무리 크게 잡아도 군함 한 척이 세계일주를 하는데 드는 비용 이상은 들어갈 리가 없다.
- 러시아 제국 정부 공식 문서에 금 수송 관련 이야기가 없다. 비공식 문서에서조차 한 줄도 없다.[6]
- 옮긴다 쳐도, 러시아 제국이 수백~수천 톤이나 되는 금괴를 왜 철도가 아닌 배로 옮겼을지 의문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구간별 개통 시점은 불분명하나, 적어도 러일전쟁 이전까지 대부분의 노선이 개통되었다. 다만 이때까지는 중간중간 강 등에 의해 단절된 구간이 존재했고, 단선이라 [7] 수송이 원활하지 않기는 했지만, 지구 반 바퀴를 돌아가는 데 비하면 훨씬 안전하고 빠르다.
- 가장 결정적인 증거가 러시아 제국의 금 보유고이다. 1897년 화폐 개혁 당시에 러시아 제국의 금 보유고는 약 11억 루블이었다. 당시에 발행한 10루블짜리 체르보네츠 금화는 무게가 860g이며 통상 금화의 금 함유량은 90%인데, 체르보네츠 금화는 이 함유량을 준수하고 있다. 체르보네츠 금화를 기준으로 산수를 하면 러시아 제국의 금 보유고는 100톤도 안 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재무 관료들로 손꼽히는 비테, 분게, 브이시네그라드스키와 제정 러시아 재무부 전체가 노력해 수십 년에 걸쳐 모은 금이 100톤이 안 되는 판국에 돈스코이 함에 그렇게 많은 양의 금화를 줄 수가 없다.
- 이전 다른 보물 관련 사기 사건들의 레퍼토리와 다를 게 없다. 하나같이 발굴되지 않은 보물, 자산 등을 핑계로 외부적인 자금 유치를 벌인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 그리고 이미 2000년대에 이걸로 사기 친 전적이 있다.
- 하물며 러시아 언론조차 한국에서 보도 되고 있는 보물에 대해서 전설이라고 언급하고 있으며, 이것이 사실인지 현실적으로 확인이 되지 않는다고 보도하고 있다.[8]
당시 발트 함대가 항해에 필요한 돈을 싣고 가긴 했다. 러일전쟁 당시 발트 함대가 한 달 동안 항해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10개 사단을 한 달 동안 만주에 주둔시킬 수 있을 정도였으니 분명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당시 함대 기동에 가장 중요하고 비싼 석탄의 경우 러시아 정부와 미리 계약한 독일의 함부르크-아메리카 기선[9]에게서 받을 수 있으므로 연료비는 들지 않았겠지만, 러시아가 항로 주변에 영향력을 뿌려 놓았던 것도 아니니 외상 거래도 힘들고, 영향력이 없는 지역에 들어갔으니 루블화 따위가 먹힐 리도 없다. 황금 박치기를 할 수 밖에. 군함 수십 척과 수병 수천 명을 위한 경비와 만약을 위한 군자금은 150조같은 터무니없는 액수는 아니었겠지만 분명 상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격침된 장소가 여정의 거의 끝자락이라는 점, 즉 가져온 돈은 거의 다 썼을 공산이 크다. 비상금이 남았을 수는 있고 발트 함대 정도 되는 거대한 집단이라면 쓰고 남은 잔돈조차도 적지 않겠지만, 그게 무슨 현재 가치로 150조나 되는 거액일 리는 없다. 애초에 돈스코이 함은 전쟁하러 왔던 군함이지, 금을 수송하거나 물품을 팔려고 왔던 상선이 아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발트 함대에서 군자금은 회계함인 나히모프함에서 전담 하였고, 이 함은 쓰시마 앞바다에서 침몰하였다. 즉 돈스코이함에는 처음부터 군자금이 없었다. 다시말해서 돈스코이보다는 나히모프가 보물선일 확률이 더 높다. 그런데 그 나히모프도 돈이 발견되지 않았다. 좋게 봐줘서 발트함대 전체의 군자금이 아니라 돈스코이함 금고에 자체적으로 예비금 형식으로 푼돈을 갖고 있었다고 치더라도, 제정 러시아 해군은 퇴함 전 함의 금고에 있던 공금을 장교들이 머릿수대로 나눠 갖는 관례[10]가 있기에, 함내 금고의 돈은 전부 돈스코이 함의 장교들 호주머니로 떠난 지 오래일 것이고, 혹여나 정말 좋게 봐줘서 돈 한푼 안쓰고 급여정산을 금으로 직접 제공했으면서 그 금을 미처 꺼내지도 못한채로 침몰했다고 치더라도 기대할 수 있는 금의 양의 최대치는 당시 돈스코이에 탑승한 장병들 급여액 정도다. 실제로는 급여를 금으로 직접 꼬박꼬박 주기보다는 본국에서 급여액을 수령할 수 있는 영수증을 끊어주는 형태로 제공했을 확률이 더 높으므로 돈스코이에 금이 있을 확률은 더욱 떨어지고 혹여나 금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말 푼돈 수준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3. 신일그룹 돈스코이호 사기 사건
자세한 내용은 신일그룹 돈스코이호 사기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4. 상세도
5. 관련 문서와 보도
영어위키백과송원호 명예연구원 논문
울릉도 바닷속 150조원 '보물선'... 인양해도 한국 소유 아니다?
KBS 일요스페셜1 2 3 4 5
보물선에 미치면 ‘패가망신’(2003.06.19)
탐사코드 J 36회[11]
[팩트체크] 울릉 앞바다 '150조 보물선' 5가지가 수상하다(2018.07.18)
SBS 그것이 알고싶다 1132회 보물선과 회장님 - 돈스코이호 미스터리(2018.08.04)
그것이 알고싶다, '보물선' 돈스코이호 미스터리 추적(2018.08.03)
[스브스夜] '그알', 보물선은 투자 사기?…순진한 개미 울린 '회장님'(2018.08.05)
6. 관련 문서
[1] 뭐 상대적으로 구식이고 약한 드미트리 돈스코이보다 더 크고 강한 함이 군자금을 관리 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는 있다. 실제로 아드미랄 나히모프는 드미트리 돈스코이보다 배수량이 2,000톤이나 더 크고 무장도 강력한 장갑순양함이다. 하지만 이 시절 전함은 배수량이 크지 않아 당시 러시아 제국의 가장 최신 전함인 보로디노급 전함도 배수량이 고작 14,000톤에 불과했다. 거기에다 당시 해전의 전술은 가장 크고 강한 전함은 무조건 함대 선두에 서야하니 어느 정도 덩치도 있으면서 정면에 서지 않는 함이 회계를 담당하는 게 이치에 맞다.[2] 아무래도 아드미랄 나히모프(Адмирал Нахимов)를 라틴 문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학술적으로 많이 쓰이는 표기법을 사용한 듯 하다. 영어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음역법에 따라 치환하면 'Admiral Nakhimov'이다.[3] 알마스 함과 이줌루트 함으로, 그 중 이줌루트 함은 입항하기 전에 좌초했으나 니콜라이 2세는 이줌루트 함도 귀환함에 포함시키고 공적을 치하했다.[4] 제정 러시아가 러일전쟁에서 패한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재정 파탄이었다. 비록 만주 주둔 병력과 최정예 발트함대가 패하긴 했어도 본국 육군은 여전히 건재했지만 전쟁을 계속 수행할 돈이 없어 포츠머스 강화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5] 참고로 비슷한 시기인 180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미국의 1달러 금화는 현재 금 무게에 따른 70달러의 가치를 가진다. 고고학적 가치를 감안해 몇십배로 뻥튀기 따위는 없다. 다만 녹여서 금으로 파는 것이 아니라 미 연방준비은행으로 가져 가면 그냥 1달러로 바꿔 준다.[6] 무슨 러시아 장군이 기록한 어쩌구 저쩌구 라는 이름의 문서는 원균의 승전 기록이 실려 있다는 역사서와 비슷한 희귀도를 자랑 한다. 즉, 믿는 사람의 뇌내 망상으로만 존재 한다. 언론사에서 신일그룹측에 그 문서를 사진으로라도 찍어서 보내 달라고 했지만 대답이 없었다.[7] 모든 단절 구간이 하나로 연결된 것은 1916년이었다. 전체 복선화는 1937년이 돼서야 완성됐다.[8] 드미트리호 한국연안에서 발견되다[9] 당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러시아가 유럽 대신 아시아로 진출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10] 국내에 정발된, 발트함대의 여정을 다룬 도서인 《짜르의 마지막 함대》에 언급된 내용이다.[11] 16분 36초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