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9-18 10:38:19

파먀티 아조노바급 장갑순양함

파일:러시아 국기.svg 러일전쟁 및 제1차 세계 대전의 러시아 해군 함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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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Память Азова»

1. 개요2. 제원3. 배경4. 상세

1. 개요

파먀티 아조노바는 러시아 제국해군의 장갑순양함으로, 동형함은 없다.

2. 제원

전장 115.6m
전폭 15.6m
흘수 7m
기준배수량 6,734t
최대출력 5,715hp
최대속력 16.8kt
항속력 10kt로 6,100해리
무장 20.3cm 단장포 2문, 15.2cm 단장포 13문, 47mm 단장포 7문,
3.7cm 5연장기관포 8문, 63.5mm 화포 2문, 38cm 수상어뢰발사관 단장 3문
탑재기 수 없음
승원 569명
동형함 없음

3. 배경

1890년대 러시아 해군은 원양진출을 목표로 하여 장갑함보다도 항해성을 중요시한 <대양형 순양함>의 정비에 전력했다. 이전급인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 시험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신함은 게네랄 아드미랄급 장갑순양함급과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의 확대개량형으로 설계되었다.

4. 상세

설계는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을 확대개량하는 것이 되어 배수량 6,000톤급의 대형 원양순양함으로 설계하였다.
1885년 10월 12일에 발트 공장에서 설계안이 제출되어 선체는 강철재를 사용했지만 내부구조와 외판은 목재부품이 혼용되었기에 이미 구식화된 설계로 해군에서 비난이 쏟아지자 나중에 철제를 덧씌운다는 타협안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외관상 특징은 3개의 연돌로, 이전의 장갑순양함이 2개의 연돌인 것에 반하면 기관은 발전된 것이었고 비록 범주용 돛대를 갖추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완전한 증기군함이어서 엔진을 탑재한 기범선은 아니었다. 범주용 돛이 장비된 이유는 당시의 해군원수이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1]의 취미(...)였다. 대공은 자신이 가장 우수한 선원이라 입버릇처럼 자랑스러워했는데 범주용 닻이 증기군함의 중량증가를 불러와 성능을 떨어뜨린다는 설계자와 함장의 말을 믿지 않았다. 대공은 성능보다는 아름다운 외관을 더욱 중요시했는데 결국 <파먀티 아조노바>는 증기선보다 바크형 범선과 비슷한 외관을 띄게 되었다.
<파먀티 아조노바>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 1886년 3월 4일에 기공에 들어가 6월 27일에 70문 전열군함이자 나바리노 해전의 수훈함이던 <아조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함명을 파먀티 아조노바(아조프의 기억)라고 명명했다. 공식적인 기공식은 7월 12일이었는데 기공식에는 황제인 알렉산드르 3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 그리스 왕비인 올가 콘스탄티노브나[2], 해군원수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참석했다.
진수는 러시아 해군창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표트르 1세의 보트가 진수된 지 200주년을 기념하여 1888년 5월 20일에 거행되었으며 <파먀티 아조노바>는 당시 황태자이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훗날 니콜라이 2세)의 해외 순방함으로 예정되었다. 이에 함내에는 각종 화려한 장식과 호화 기자재가 사용되었다.
이 때문에 추가예산이 편성되어 황태자 전용거주구역을 신설하고 아름다운 함체보호를 위해 증기엔진으로 항해시엔 특별제작한 텐트를 우천시를 제외하고는 늘 펼쳐서 석탄재가 함내에 떨어지는 것을 방지했다. 그리고 내부순환용으로 전동식 환기팬과 영국에서 구입한 700개의 백열전구를 밝힐 축전지를 장착했다. 800톤에 달하는 과적으로 부담경감을 위해 보급품과 기뢰 등은 다른 증기선을 동반하여 이용했다. 게다가 함재수뢰정을 위해 증기동력식 기중기도 추가되었다. 당시 기중기는 수동식이었는데 증기식 동력기의 채용은 새로운 기술도입이기도 했다. 그리고 포문의 유리창 설치도 이루어져 78,000 루블이 더 소요되었다.
1890년 6월에 준공된 <파먀티 아조노바>는 8월 23일에 처녀항해에 나서 유럽을 순회한 후 세바스토폴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황태자인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승선하여 아시아 순방 후 극동으로 향하도록 하였다. 원래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 흑해로 들어가려고 했지만 오스만 제국이 이를 거부했기에 황태자는 그리스를 방문 후 수에즈 운하를 건너 실론으로 향했다. 10월에 인도 봄베이에 도착한 <파먀티 아조노바>에서 상륙한 황태자는 42일간 현지에서 휴가를 보낸 후 실론 섬을 거쳐 1891년 2월 18일에 싱가포르에 입항했다. 여기서 다른 5척의 러시아 군함과 합류한 뒤 3월 23일에 홍콩, 3월 29일에 상하이에 들른 후 황태자 일행은 다른 2척의 군함과 함께 1891년 4월 5일에 일본나가사키 항에 먼저 입항했다.
4월 16일에 황태자는 부활절 휴식으로 장기간 나가사키에 머물렀는데 이 때 황태자는 신분을 감추고 인근 마을을 돌면서 가고시마로 넘어가 구 사쓰마 번주였던 시마즈 타다요시와 친교를 나누었다. 니콜라이는 시마즈씨의 환대에 기뻐하며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고 <파먀티 아조노바>의 선원들도 현지 주민을 초청하여 과자를 나누어 주는 등 분위기는 매우 좋았다.
하지만 곧이어 청천벽력같은 사건이 터졌다. 황태자 일행은 4월 27일에 고베 항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열차편으로 쿄토로 향했다. 4월 29일에는 환영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이 직접 비와호 관광에 동행하여 만찬과 접대를 했다. 그 후 교토로 이동하던 니콜라이 황태자는 갑자기 뛰어든 경호원 쓰다 산조 순사가 휘두른 칼에 머리를 부상당했다.

이후 1892년에 블라디보스톡에 머문 <파먀티 아조노바>는 10월 16일에 크론슈타트로 돌아와 개장공사 후 지중해 함대에 배치되었다. 1894년에 다시 극동으로 이동하여 1900년 초까지 현지에서 활동한 <파먀티 아조노바>는 다시 발트함대로 이동하여 수리도중 러일전쟁을 맞이하여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그 후 제1차 세계 대전러시아 혁명의 혼란 속에서 노농적색해군의 손에 들어간 파먀티 아조노바는 1919년 8월 19일, 공산세력을 제어하기 위해 출동한 영국해군 어뢰정에 의해 격침되었는데 1923년에 인양되어 파공을 메운 후 창고로 사용하다가 1925년에 제적 후 1927년에 해체되었다.
출처: 해인사<러시아/소련해군 순양함사>

[1] 1850-1908, 알렉산드르 2세의 아들이자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생[2] 니콜라이 1세의 손녀이자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왕비. 알렉산드르 3세와 알렉세이 대공과는 사촌지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