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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인 Mongols | 蒙古人 ᠮᠣᠩᠭᠣᠯᠴᠤᠳ [mongγolčud] Монголчууд [Mongolchuud] | ||||
몽골의 전통 무술 부흐 복장을 한 몽골인 남성들 | ||||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인 여성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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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 국적을 가졌거나, 몽골을 모국으로 인식하거나, 혈통적으로 몽골계인 민족을 일컫는 말.몽골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는 기준으로 보면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사는 내몽골인도 몽골인에 포함되며, 혈통적으로 몽골과 같은 러시아의 부랴트인, 칼미크인, 투바인도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몽골계 민족이다.
2. 기원
인류 분산 경로 문서를 확인하길 바란다.3. 형성과정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한국인은 몽골족을 하나의 종족(Ethnic Group)으로 여기고 있으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통일 영웅으로 불리는 칭기즈 칸이 통합한 나이만, 타타르, 케레이트 등은 실제로는 몽골족이 아니라 몽골계 언어를 사용하는 유목민일 뿐이었고, 이후에 몽골로 편입된 위구르족, 캉글리, 킵차크, 거란족[1], 탕구트 등도 이 당시 정(正) 몽골인으로 분류된 니룬(귀족), 두릴리킨(평민) 몽골과 달리 한문 사료에 언급되는 '색목인(色目人)'에 가까웠다.14세기 후반 몽골 제국이 붕괴된 후, 색목인으로 분류된 각 부족들부터 정(正) 몽골인으로 구성된 부족들까지 부족 시스템을 유지하면서도 각지로 흩어졌고, 부하라 칸국, 카자흐 칸국, 크림 칸국, 티무르 제국, 북원, 오이라트 등의 구성 부족이 되었다.[2]
유목민족의 복잡한 정체성은 이들의 정치체가 정주국가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정주국가는 왕이라는 강력한 중심 아래 지방이 이에 복속되는 형태라면, 유목국가는 부족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유목국가 아래에 있는 부족들은 자신의 이득에 따라 해당 국가에 존속하거나 떨어져나가곤 했다. 예를 들면 북원 말기 내할하 5부들은 수차례 몽골에 붙다가, 후금에 붙었다 했다. 이처럼 수많은 유목부족들이 몽골이라는 "울루스"에 속했지만 오이라트, 키르기스처럼 경우에 따라서 얼마든지 떨어져나가 자신들만의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현대 몽골인의 기원은 청나라 치하 몽골에서 비롯되었다. 청나라에서 효과적인 이민족 통치를 위해 이번원을 설치했고, 몽골도 이번원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청나라는 몽골을 외몽골과 내몽골로 나누어서 다스렸다. 분단 기준은 청나라에 복속한 시기였다. 홍타이지 시기에 복속한 몽골은 내몽골이, 강희제 시기에 복속한 몽골은 외몽골이 되었다. 이에 덧붙여 청나라는 예케 몽골 울루스에 속하는 몽골인 뿐만 아니라, 오이라트[3], 투바도 모두 몽골로 묶어서 관리했다.
이후 청나라 조정은 기존의 울루스와 오톡 제도를 파괴한 뒤 팔기제에 준하여 몽골 제부를 181기(旗: 호슌)와 13맹(盟: 출간)으로 재편하고 유목지를 지정했으며, 만주족과 마찬가지로 국가가 몽골인의 문화를 규정했는데, 투메드의 사간 세첸이 1662년에 저술한 《어르더니 톱치(Erdeni-yin tobči)》를 번역한 《흠정몽고원류(欽定蒙古源流, Hesei toktobuha enetkek tubet monggo han sai da sekiyen)》 및 《흠정외번몽고회부왕공표전(欽定外藩蒙古回部王公表伝, Hesei toktobuha tulergi monggo hoise aiman-i wang gung sai iletun ulabun)》을 편찬하여 하나의 역사를 정립함으로써 이들의 문화적 균질화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이었던 그들의 종족적 정체성이 완전히 통합되지는 못했다. 이들은 몽골인이라는 정체성보다 '~ 맹' 혹은 '~ 기'라는 정체성을 중요시여겼다. 하지만 19세기 중후반 청이 내우외환을 겪으면서 세속주의 정책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국화되기 시작하자, 많은 한족들이 투셰투칸부 등으로 유입돼 개간을 시도했고, 이에 따라 유목 사회는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몽골로 유입된 한족은 유목민들과 충돌하였고[4] 이 과정에서 위협적인 타자와 접촉하게 된 유목민들은 '동족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19세기 후반 전세계 민족주의의 바람은 몽골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몽골인들은 모든 몽골인들은 뭉쳐서 하나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범몽골주의다. 이에 따르면 외몽골, 내몽골, 오이라트는 모두 같은 몽골인이 되었다.[5] 하지만 이 범몽골주의에 대해서도 각 몽골족마다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범몽골주의와 독립에 적극적이었던 부족은 단연 외몽골이었다. 이들은 8대 젭춘담바 후툭투 복드 칸을 중심으로 몽골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고, 몽골 독립을 지지하는 수많은 내몽골, 오이라트 세력도 외몽골과 협력했다. 하지만 몇몇 오이라트, 외몽골 부족과 내몽골 세력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이는 여러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중국, 러시아와 이해관계가 있었던 몽골인들이 독립에 부정적이었다. 특히 내몽골 중에서는 일부는 외몽골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중심으로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사정이 이러해도 몽골의 독립국가 건설은 추진되었다. 1911년 12월 29일 복드 칸이 칸의 자리에 오르면서, 외몽골이 중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복드 칸국은 중국에 거주하는 모든 몽골인들에게 귀부를 요청했다. 이에 호응해 투바, 신장의 토르구트, 간쑤성의 여러 몽골인들, 내몽골 내 수많은 몽골인들이 귀부를 알렸다. 문제는 러시아가 새로 만들어진 중화민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하여 몽골이 중국에 남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러시아의 인정과 지원이 절실했던 몽골은 결국 내몽골의 귀부 요청에도 불구하고, 일단 중화민국의 내몽골 통치를 인정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했던 몽골인들은 1913년 마침내 내몽골 원정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후 중화민국에서 반격하기 시작하면서 후퇴하게 된다. 이후 1915년 캬흐타 협정으로 복드 칸국이 중국의 자치국으로 전락하게 되었고, 쉬수정의 외몽골 장악과, 러시아 백군, 적군의 싸움으로 몽골 정세가 어수선해지면서 몽골 통합 논의는 지지부진하게 된다.
몽골의 통합 운동은 1921년 7월 10일 몽골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재논의되기 시작한다. 이당시 몽골의 최우선 과제는 외몽골과 내몽골, 부랴트, 탄누 우량카이, 오이라트, 그외 몽골 제부족의 통합이었다. 1921년 몽골 인민공화국 수립에 큰 영향을 받은 내몽골인들이 여러 민족주의 활동을 벌였다. 몽골 인민공화국은 내몽골의 이러한 움직임을 내몽골인민혁명이라 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공산당 탄압으로 내몽골 공산세력의 활동은 멈추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의 입김으로 1925년 제4차 당 대회 강령에서 몽골 통합 내용을 제거하면서 몽골 통합운동은 또다시 지지부진하게 되었다.
한편 내몽골에서 다른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1933년 1월 일본의 관동군이 중화민국의 열하성을 점령한다. 이에 내몽골의 각 수장들이 백령묘(百靈廟)에 모여 회담을 했다. 그리고 중화민국의 난징 정부에 내몽골 사람들의 자치를 인정하지 않을 경우, 일본에 붙어버리겠다 통보한다. 이에 놀란 장제스는 곧바로 내몽골의 자치를 인정하고, 몽고지방자치정무위원회(蒙古地方自治政務委員會)를 세웠다. 여기서 두각을 드러낸 인물이 데므치그돈로브였다. 일본의 관동군은 데므치그돈로브와 접촉하기 시작하였고, 그를 수장으로 삼아 일본의 괴뢰국 몽강연합자치정부를 만들었다. 일본은 소련과의 관계 문제로 내몽골과 외몽골이 접촉하는 것을 꺼려렸다. 데므치그돈로브도 몽골 통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1945년, 일본 제국의 패색이 짙어져가는 중에, 몽골 인민공화국이 1945년 8월 9일 소련과 함께 내몽골에 진입한다. 내몽골 곳곳에서 민족해방운동이 일어났고, 처이발상도 내몽골에 압제자 일본으로부터 내몽골을 해방시키겠다고 선전을 했다. 그리고 9일 뒤인 8월 18일, 내몽골해방선언을 발표한다. 하지만 소련의 압력으로 통합운동은 지지부진해지고, 결국 내몽골 민족운동 세력이 자치를 하는 것으로 노선을 바꾸면서 몽골의 통합이 성사되지 못한다. 처이발상의 사후에는 중국의 내몽골에 대한 지배가 확실해지면서 점차 통합운동은 사그러지게 된다. 이후로 외몽골과 내몽골은 70년이 넘도록 통합하지 못하고 분단되어 살아가고 있다. 또, 내몽골 지역에 한족이주가 계속되고[6] 내몽골이 외몽골보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하게 되면서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세대를 지나면서 동족이라는 인식도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윗세대는 서로를 같은 종족으로 보고 있지만, 80년대생 이후부터는 서로 신경을 끄는 경향이 강해진다.
3.1. 몽골계 민족
몽골인을 포함한 몽골 혈통을 가지고 있거나 몽골계에 해당되는 민족들을 가리킨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몽골계에 해당되어도 정체성이 다르기에 민족의 정체성으로 본다면 몽골인과는 다르다. 언어는 몽골어족에 속한다.만주 지역과 몽골 사이의 내몽골 동부에 거주하는 다우르족, 신장위구르 자치구 북부 준가리아의 오이라트계와 극소수의 준가르족들, 그리고 오이라트인 중 러시아 카스피 해 북서부로 이주한 칼미크인, 티베트 북부 칭하이 성의 투족, 간쑤 성에 거주하는 무슬림 민족들인 둥샹족, 아프가니스탄 북서부에 거주하는 모골인들 역시 대표적인 몽골계 민족들이다.
4. 특징
4.1. 한국인과의 가장 가까운 민족?
일본의 국립유전학연구소와 도쿄대학이 만든 동아시아 민족들의 계통수. |
전 세계에 존재하는 42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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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인(해당 도표에서는 Northeast Asian, 즉 동북아시아인으로 표기되어 있다.)에 속하는 민족과 그 밖에 여러 민족의 대분류와 유전적 거리를 알 수 있다.[7] |
아시아에 존재하는 39개 인구 집단 간의 유전적 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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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한국인과 가장 가까운 민족은 만주족(여진족), 일본인[9]이라고 한다. 관련논문 한족(North Chinese)과 몽골인은 그 다음으로 가까운 그룹에 속한다. 결론적으로 가까운 민족인 것은 맞지만 가장 가깝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
4.2. 신체적 특징
한반도보다 훨씬 북쪽에, 그것도 러시아보다도 더 추운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라서 추위에 강하다.[10] 그래서 한국의 맹추위에도 버티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다 추워하는데도 혼자 덥다고 할 정도며, 밤이 추운 가을에도 에어콘 바람을 직접 쐬면서 팬티만 입고 이불도 없이 창문을 열어 찬 밤 공기 속에서 잘 정도이다. 물론 사람마다 차이는 있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추위를 타는 사람들도 있다.유목 생활을 주로 하는 환경적인 요인 덕분에 시력이 매우 좋기로도 유명하다. 유목민에게 중요한 재산인 양과 같은 가축이 늑대와 같은 맹수의 먹이로 희생되는 일이 많기에 이에 대한 경계를 해야 하므로 시력이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눈을 피로하게 하는 장애물이 적고 탁트인 넓은 초원에서 살아왔기에 시력이 좋은 이유도 있다. 실제로 몽골에 방문했던 한 교수는 갑자기 저 멀리를 향해 손을 흔들며 "어어이~" 하며 목청을 울리는 몽골인을 보고 토속적인 관습인 줄 알았는데, 한참 후에 그쪽에서 오는 사람들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때문에 시력이 좋은 사람을 보고 몽골인이냐고 한다.
그렇지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타 국가 사람들처럼 시력이 그리 좋지 못하다. 몽골인들의 절반가량이 수도인 울란바토르 주변에 살고 있는데 울란바토르의 풍경은 보통의 대도시들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하지만 문제는 석탄으로 난방을 하다보니 공기가 매우 나쁘며, 눈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준다. 또한 몽골인이라고 해서 TV나 스마트폰, 컴퓨터 등 눈 나빠지기 쉬운 전자제품 사용률이 특별히 더 낮은것도 아니기 때문에 요즘은 몽골인들 중에도 안경 쓰고 렌즈 끼는 사람들이 많다. 쉬운 예시로 몽골의 독재자 욤자깅 체뎅발만 해도 안경 착용자다. 몽골인이 시력 좋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초원에서 유목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다만 그래도 타 국가 사람들에 비해서 시력이 상당히 좋은 편이다.
자신들이 칭기즈 칸의 후예라고 믿는 몽골인이 많다. 실제로 과거 몽골 제국의 영토에 사는 현세대 민족 중 칭기즈 칸의 후예로 추정되는 사람은 약 8%에 달하며 이는 1,600만 명이라는 대인구다. 실제 칭기즈 칸의 유전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사람들은 전부 동일 Y염색체를 가졌으며 약 1천 년 전 급속도로 확산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보다 정확히는 칭기즈 칸의 직계 후손은 아니고 칭기즈칸 가문의 유전자들이 이어진 것이다. 칭기즈칸 가문 사람들은 몽골 제국이 쇠락한 이후로도 유라시아 각지에 나라를 세우면서 지배계층의 자리를 차지했고. 티무르 제국, 무굴 제국, 모굴리스탄 칸국, 크림 칸국, 부하라 칸국 등의 나라가 수백년 넘게 이어왔고, 몽골계 국가들을 정복해서 세를 확장한 러시아 제국에서도 몽골계 귀족가문이 상당수 있었을 정도였다. 또한 중국에서도 청나라가 중국 전역을 정복한 뮈로는 황금씨족이 청나라 황실과 혼맥을 맺을 정도로 높은 지위와 부귀영화를 누렸다. 이 때문에 칭기즈칸 유전자는 만주, 중국 북부, 고비 사막, 바이칼, 투르키스탄, 파키스탄 북부 등지까지 폭넓게 분포되어 있는것이다, 다만 몽골 이외 지역에서 정착한 칭기즈칸 가문의 후예들은 이렇게 오랜기간 동안 지배계층의 자리를 차지하는 과정에서 튀르크족, 페르시아인, 슬라브인 등과 혼혈되어 중동인, 유럽인의 외모를 지니는 경우가 많고, 언어, 문화적으로도 현지어를 쓰며 동화되었기 때문에 몽골족의 정체성을 가지지않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웹상에서는 2010년대 이후로 부흐가 매체에서 조명되거나 몇몇 부흐 출신 몽골 선수들이 격투기나 레슬링 등지에서 활약하는 모습이 부각되면서 덩치 크고 힘 좋은 민족이라는 인식도 생겼는데[11], 실제 러시아 내에서 몽골인들은 소수민족 중에서 힘이 좋기로 유명하다. 다만 유전적 차이라기보다는 스포츠가 생활화되고 고단백 식단에서 나오는 차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러시아 소수민족이 아닌 몽골 본토의 남성 국민들은 평균키가 160중반~후반대를 육박 하기에 그리 키나 덩치가 큰 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키나 골격은 개인관점 혹은 집단 평균 관점에서 유전적 영향에 의한 상한선이 존재하기에 중요한 부분이긴 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고품질의 영양섭취가 전제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리 체격이 큰 유전적 포텐셜을 가지고 있는 인구 집단이라 해도 영양 섭취가 좋은 집단에 비해 평균 키나 체격의 성장이 정체되기 마련이다.[12]
4.3. 국민성
국민성의 경우 척박한 지역에서 유목을 하는 특성상 대체적으로 터프하지만 순수한 편으로 돌려말하기식 같은 건 전혀 없고 빈말이란 개념도 없어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편이다. 혼네와 다테마에라는 개념이 존재하는 일본과는 정반대. 유목민들의 공통적인 특성인 여행자 같은 처음 보는 타인에게도 호의를 베푸는 편. 한 사례로 몽골로 교환학생을 간 대학생의 경험에 따르면 홀로 버스를 타고 몽골시내 곳곳을 여행하였는데 탑승하는 승객들이 모일 때마다 항상 시끌벅적했다고. 보이는 사람마다 대화와 관심을 비춰 웃음과 대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당연히 그 교환학생도 뜨거운 관심과 대화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때에 따라 버스 안에서 술판, 춤판, 합창판이 되기도 한다.더불어 신세를 지면 반드시 갚는다는 성향이 있다. 매우 터프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가이드와 친해지면 몽골에서 겪는 위험한 상황 대부분은 넘길 수 있다. 다만 거꾸로 원수를 지면 잊지 않고 두고두고 보복한다는 말도 있다.[13] 그래서 몽골인에게 모욕을 주거나 해코지를 한다면 뒷일은 책임 못 진다.[14] 사조영웅전에 나오는 주인공에게 도움을 주는 몽골인들을 떠올리면 쉽다. 다만 터프한 게 지나치다 보니, 몽골인 근로자들이 외국에서 문제 일으켜 체포당하고 형사처벌을 받거나 추방당하는 일이 있어 몽골의 국가 이미지에 먹칠하는 경우가 많다.[15]
그러나 최근엔 몽골의 경제 사정이나 도시화에 따른 여러 문제들이 겹친 데다, 몽골의 치안은 좋지 않기로 유명하기 때문에[16]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많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한몽관계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술을 매우 잘 마시는 나라로, 소비량, 음용률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 폭음 문화는 역시 오래된 유목생활에서 나타나는데, 유목민족들은 초원에서 사람을 만나면 상대가 초면이더라도 반드시 서로를 지켜줘야 했고, 아무리 바빠도 상대가 술을 건네면 예의상 마셔야 했다. 인구밀도가 희박한 스텝지역, 사막지역에서 인간은 맹수나 자연환경 등과 싸워야 했고 인간끼리는 서로 힘을 합쳐야 했다. 낮에 인적 없는 초원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 돕고 하는 게 좋기는 하지만 문제는 밤이었다. 밤에 잠들 때, 한 명이 몰래 상대의 말이나 양들을 몰고 도망가 버리면, 남은 한 명은 죽게 된다. 그러자니 서로 못 믿고 잠 안 자고 버티면, 둘 다 피곤하다, 그러다 결국 선택한 방법이 모두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고 함께 잠 드는 것이었다. 술이 주는 특유의 고양효과로 어색한 사람과도 금방 친해질 수 있게 되는 것은 덤이었다.
이 문화는 몽골 제국을 설립한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 제국 성립 이후에도 몽골인은 중국인, 고려인[17], 이란인 등 타민족과의 공식석상에서도 상식을 초월한 폭음을 즐겨 피지배 민족을 경악시킬 정도였다고 한다. 문제는, 드넓은 초원에서는 가족 이외의 사람을 만나는 경우는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니 이렇게 술을 마셔도, 그렇게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리고 숙취와 함께 깨어나도, 이곳은 초원이어서 공기도 좋았고, 어차피 비도 거의 내리지 않는 이런 기후에서 양 떼를 이동하는 것이, 꼭 시간을 정해서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에 꾸준한 승마와 육체노동을 해서 건강을 어떻게든 유지할 수 있었다.하지만, 제국 건국 이후에는 이들은 점령한 대도시의 궁에서 살았다. 그러나 고향에 대한 향수병에 시달리며 자기들끼리 거의 매일 이렇게 술을 마시고, 다음 날에는 숙취에 시달렸기 때문에 지도자로서 처리해야 하는 일은 안 했다. 또 그렇게 술을 마시고 따로 운동은 하지 않았으니[18] 체력도, 전투력도 엉망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제국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고, 실제로 거대한 원 제국의 몰락 원인을 주둔 병사들의 알콜 중독으로 보는 설이 있을 정도다.
술 좀 마신다 하는 한국인들도 몽골인들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 편이다. 특히 몽골은 러시아와 가까워서 40도 이상가는 보드카를 주로 많이 마시기 때문에 20도짜리 소주 마시던 한국인들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아예 알콜 도수가 낮은 맥주의 경우 술로 쳐주지도 않는다. 실제로 몽골에 여행 간 한국인들이 마지막 날 뒷풀이를 하려고 맥주를 잔뜩 사두고 몽골 현지인 가이드에게 같이 술 먹자고 말하자, 몽골 현지인 가이드는 술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른 예로는 술을 전혀 못 한다는 한 몽골인이 맥주를 물처럼 마시자, 의아한 한국인이 술 못하신다면서 맥주는 어떻게 드시나요??라고 물으니까 "맥주는 술 아니에요."라고 했다고 한다.[19] 다만 이러다보니 알콜중독이나 폭음이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지적받으면서 국가에서 절주를 강조하고 있다.[20]
5. 몽골 국외 거주 몽골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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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국민들은 중국과 대립하는 감정이 있으며, 아울러 내몽골인이나 자국 내 튀르크계 카자흐인은 더욱이 혐오한다. 신해혁명을 전후하여 내몽골인 남성 상당수가 한족 여성들과 통혼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외몽골 할하인들과 다르게 내몽골인들이 중국에 대해 느끼는 감정은 다소 복잡하다. 내몽골인은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인식하기는 하지만 엄연히 한족과는 다른 몽골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몽골계 중국인이다.
일단 이 문서는 독립국가 몽골국의 국민 90%를 차지하는 할하 몽골인들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몽골국에는 몽골인 말고 소련 시대에 이주한 러시아인도 있는데,[21] 인종부터 백인인 데다 정교회를 믿는다. 또다른 이웃 국가인 중국의 한족에 비하면 러시아인의 이미지가 그나마 좋은 편이다.
이슬람을 믿는 5%의 튀르크계 카자흐인 및 키르기즈인도 있는데, 외몽골 서부의 호브드 아이막에 산다. 튀르크인들 역시 몽골인과 사이가 나쁘며 그래서 몽골과 카자흐스탄 간에 은근한 신경전이 있다.
미국내에 소수의 몽골계 미국인들이 거주하고 있고 칼미크계 미국인들도 거주하는 등 소수의 몽골계 민족이 미국에 거주한다. 그리고 러시아내에는 몽골계 러시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5.1. 재한 외국인
자세한 내용은 몽골계 한국인 문서 참고하십시오.5.2. 러시아
자세한 내용은 몽골계 러시아인 문서 참고하십시오.6. 유명 몽골인
6.1. 실존 인물
- 간볼드 간바야르
- 구유크 칸
- 경화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 계국대장공주: 고려 충선왕의 왕비
- 노국대장공주: 고려 공민왕의 왕비
- 나이단 투브신바야르: 몽골의 유도선수며, 몽골의 올림픽 첫 금메달리스트.
- 다나시리 황후
- 다니엘라 왕: 중국의 배우. 몽골족이지만 내몽골 자치구나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몽골 자치현 출신이 아니라 허난성 출신이다.
- 다르카이
- 달라이 라마 4세
- 담딘 수흐바타르
- 덕녕공주: 고려 충혜왕의 왕비, 충목왕의 모후
- 데므치그돈로브: 내몽골의 칸으로 몽강연합자치정부을 세웠다. 몽강국 또는 몽골군사정부는 일제의 괴뢰국으로 형제 국가인 만주국과 같은 처지였다. 이후 장제스에 투항.
- 멍크 바터: 중국의 농구선수, 뜻은 몽골어로 '영원한 영웅'으로, 몽골식 발음은 뭉흐바타르다
- 메르키트 바얀
- 몽케 칸
- 무나시리 황후
- 무칼리
- 바린 바얀
- 바얀 후투그 황후
- 바투
- 베이르 테무르
- 보로클
- 보르테 우진
- 보르지기트 셍게린첸
- 보오르추
- 복국장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 부다시리 황후
- 살리타이
- 수부타이
- 아리크부카
- 아바카 칸
- 아무칸
- 아오르꺼러: 내몽골인인 중국의 격투기 선수로 몽골씨름인 부흐 선수 출신이다. 중국식 이름이 아니라 원래 이름이 차하르어로 아오르거러이다.
- 아운가
- 왕리쥔[22]
- 야쿠
- 오고타이 칸
- 욤자깅 체뎅발
- 엘 테무르
- 예수게이
- 원혜종 토곤 테무르
- 우란푸
- 욘돈반처그
- 의비(懿妃) 야속진(也速眞): 충선왕의 제2비. 광릉군과 충숙왕의 모후.
- 자랄타이
- 자무카
- 제국대장공주: 고려 충렬왕의 왕비, 충선왕의 모후
- 제베
- 젤메
- 조국장공주: 고려 충숙왕의 왕비, 용산원자의 모후.
- 조리그투 칸
- 주치
- 차가타이
- 차칸테무르
- 칭기즈 칸
- 쿠빌라이
- 쿠빌라이 칸
- 탕우타이
- 텡기스
- 토오릴 칸(옹 칸)
- 톡토 테무르
- 툴루이
- 티라운
- 푸타우
- 허를러깅 처이발상
- 호엘룬
- 훌라구
- 함보 라마 이르길로프(Hambo Lama Itigelov): 러시아 부랴트 공화국의 티베트 불교 대승려로 사망 직후 시신이 썩지 않아서 유명하다. 저절로 미라화된 사례로 뽑히는데 소련 당시 과학 아카데미에선 "춥고 건조한 기후와 부랴트 사원 특유의 수련 분위기 등이 실제로 시신이 부패하는 것을 막아주어, 시신을 미라화/비누화시킨다"고 결론을 내렸다.
- The HU
- 난딘에르덴
- 아즈자르갈 : 블랙컴뱃 헤비급 파이터 https://www.sherdog.com/fighter/Tserendash-Azjargal-384760
대부분 몽골 제국, 원나라 시대 인물인 것처럼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니라, 원나라 멸망 이후 몽골은 약체화, 소수민족화 되었기 때문이다. 내몽골은 차하르가 후금에 복속되어 이후 청 황실의 외척으로 나름 중요한 세력이 되었지만 인물은 별로 안 나왔고,[23] 외몽골은 오이라트계 준가르 제국 최후의 명군인 가르단이나 체왕 랍탄 등이 나오기도 했으나 결국 족속 자체가 지리멸렬해져서[24] 몽골인민공화국(현 몽골) 건국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25] 그 외 다른 몽골계 민족들에 해당되는 인물들은 몽골계 인물 참고.
6.2. 가상 인물
※ 해당 국가 작품 제외.배우 및 성우가 몽골인인 경우 ☆표시.
6.2.1. 한국 작품
- 몽골인[26] - 무인시대
- 솔롱고 - 빨래(뮤지컬)
- 바브가이 - 싸움독학
- 왕비[27], 원나라 황제의 칙사 - 쌍화점(영화)
- 보돈차르, 치베 - 치우천왕기
- 사라 외 - 십시일반 中 <코리아판타지>
6.2.2. 일본 작품
- 라리 펠드난드 - 대운동회
- 라찌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 황아일족 - 마기(만화)
- 레키 - 비탄의 아리아[28]
- 바트뭉흐 바트바야르 - 히노마루 스모
- 북갑국 사람들 - 환상게임
- 아인 - 팬텀 오브 인페르노, Phantom ~Requiem for the Phantom~
- 우란푸 - 은하영웅전설
- 위글 옥장 - 북두의 권
- 지그짓 바톨 - 파이팅 레이어
- 킬 한 - 기동무투전 G건담
- 테무진 - 용호의 권 2
- 아이글 - 럼블 로즈
6.2.3. 미국 작품
6.2.4. 기타 국가 작품
7. 관련 문서
[1]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자는 한인으로 분류되었다.[2] 17세기에 히바 한국에서 활약한 나이만 부족과 병자호란에 동원됐던 나이만 부족의 사례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3] 준가르, 티베트의 호쇼트족, 러시아에서 돌아온 토르구트 등[4] 대표적으로 금단도 사건이 있었다. 금단도는 몽골지역에 정착한 한족들이 만든 조직으로, 몽골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고, 조직적으로 몽골인들을 살해하였다. 이 때 죽은 몽골인들이 최소 10만명이 넘었고, 당시 몽골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5] 이 때, 부랴트인과 투바인들도 합류를 요청했지만 러시아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내 자치공화국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그치게 된다.[6] 2024년 기준 내몽골에서 몽골인의 인구는 500만, 한족의 인구는 2000만명이다.[7] 참고로 왜 'South Chinese'가 동남아시아인으로 분류되는 것인지 의문이 생길 수도 있는데, 'South Chinese'에는 징족, 태족, 묘족 등 중국 최남부에 거주하는 여러 소수민족도 포함되고, 북중국과 남중국으로 나눈다고 중국 대륙을 딱 절반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유전학계에서 남방 한족이 있다고 보는 지역은 난링·우이 산맥 이남 지역으로, 중국 대륙 기준으로 매우 일부분이다. (혹은 중국과 인도차이나 반도 국경 근처의 소수민족 거주지까지 포함할 수도 있다.) 사실 이마저도 다른 지역에서 유입된 인원이 너무 많아서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적인 대도시는 전부 난링·우이 산맥 이북에 있다. 다만 난링·우이 산맥 이남에 거주하는 객가인은 북방 한족의 일파로서 전쟁 등으로 인해 중원에서 남쪽으로 피난 간 이들의 후손이다. 이들은 유전적으로 북방 한족에 가깝다고 한다.#[8] 다만 동호 자체는 흉노보다 동쪽에 살던 여러 종족들을 총칭한 명칭으로 몽골계, 튀르크계 등 다양한 북방종족들을 가르키는 말이었다. 동호인이라 해도 꼭 몽골계는 아니었던 셈이다.[9] 일본인(야마토 민족)은 한반도에서 온 야요이인들의 피가 많이 섞였기 때문에 일본 열도 선주민이라 할 수 있는 조몬인의 직계 후손인 아이누인보다 한국인과 가깝고, 일본인과 한국인은 유전적으로 동일한 클러스터에 속한다고 한다.[10] 러시아는 추운 이미지로 유명하지만 워낙 국토가 넓어 춥지 않은 지역도 얼마든지 존재하고, 러시아의 본체라고 할 수 있는 모스크바는 아예 온대 기후에 가까울 정도이다. 반면 몽골은 국토가 충분히 넓은데도 전부 추운 땅인데다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러시아나 북유럽 국가들의 수도를 전부 제치고 가장 추운 수도로 알려져 있다.[11] 특히 일본의 국기인 스모에서 큰 두각을 나태내고 있다.[12] 멀리 갈 것 없이 우리 한민족이 몽골족과 비교되는 가장 좋은 예시다. 한민족과 몽골족은 전통적으로 동아시아와 아시아 전체를 통틀어서 평균 신장이 최상위권으로 큰 편에 속했던 민족이다. 한민족은 6.25 전쟁을 겪은 이후의 몇 세대 동안은 165 내외로 정체되어 다른 주요 아시아 국가 민족들에 비해 키 성장이 매우 더딘 편이었다. 그러다 남한 지역에서는 선진국에 준하는(혹은 선진국 수준의) 영양섭취가 가능해진 세대가 등장하자 마자 다시 한번 아시아 전체 최상위권의 평균 신장까지 성장 했다. 한편 영양 불균형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북한은 현재까지도 평균키가 6.25 전쟁 직후부터 현재까지도 165 내외에 고정되어 있고, 한때 한민족과 더불어 아시아 평균키 1위를 놓고 경쟁(?)하던 몽골족도 지금은 북한 사람과 비슷한 평균키다. 미국의 경우에도 독일계를 비롯한 백인계 미국인들의 평균 신장이 대공황 시기에는 정체 되기도 했다.[13] 칭기즈 칸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에서도 예수게이가 '은혜와 원수는 반드시 갚아라!' 라고 아들 테무친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14] 일부 개념 없는 사람들처럼 경제력만 믿고 거들먹거리다가 큰일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이 경제력 높은 국가에서 왔으니 함부로 설쳐도 현지인들이 위해를 가하지 못하리라는 위험한 착각을 하여 현지에서 행동을 함부로 하다 낭패를 겪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15] 그 예로 한국에서 외국인 범죄자들 중에서 몽골인들의 비율이 높다. 그 이유가 몽골에서 말보다 싸움으로 해결하는 문화 때문에 외국에 와서도 그걸 못 버려서 싸움질하거나 범죄를 저질러 체포당하는 일이 많기에 외국인들에게 괜한 편견과 선입견을 심어주는 것이었으며 몽골 정부도 이런 범죄자들 때문에 골치 아픈 상황이다.[16] 세계적인 수준으로 치안이 나쁜것은 아니고 미국, 러시아와 비슷한 평범한 수준이지만, 한국과 일본, 싱가포르, 대만이 세계적인 수준의 치안을 자랑하고 있고, 중국도 도시 한정으로 보면 대만과 같은 수준의 치안을 가졌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나빠보이는것이기는 하다.[17] 고대 삼국시대의 한족들부터 근대 서양인들까지 한결같이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평한 민족이 이런 평가를 내릴 정도면 그야말로 엄청난 수준인 것이다.[18] 초원에서는 승마를 해야만 생활이 가능했기 때문에 꾸준히 승마를 하고 체력을 키울 수 있었지만 성에서만 살게되니 승마할 공간도 없고 승마할 필요도 없으니 기초체력이 떨어졌을 것이다.[19] 이러한 인식은 북한도 비슷해서 30도짜리 소주를 주로 마시다보니 막걸리가 사장되고, 맥주를 패스트푸드점에서 팔 정도다.[20] 몽골에선 매달 1일에는 술을 사고 팔지 못하게 법으로 되어있다.[21] 2010년 통계 기준 2,474명[22] 보시라이를 몰락시킨 결정적인 인물. 항목 참조.[23] 그나마 청말에 보르지기트 셍게린첸이라는 인물이 나오긴 했다.[24] 준가르 자체가 유목민의 군사적 우위가 사라져가는 시점에 등장하기도 했고 대내외적으로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으며 결정적으로 준가르에 빡친 청나라가 준가르족 자체를 제노사이드 해버렸다.[25] 지금 몽골도 인구가 매우 적어서 한국의 부산광역시 수준이다. 2010년대에 부산광역시의 인구 감소로 몽골의 인구가 부산광역시의 인구를 약간 추월하였다.[26] 고려에서 사신으로 등장한다.[27] 설정 상, 고려의 왕과 정략결혼한 원나라의 공주인데, 정작 몽골어를 구사하는 장면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28] 칭기즈 칸의 후예이자 몽골의 공주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