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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colbgcolor=#808080><colcolor=#fff> 출생 | 1897년 7월 25일 |
| 조선 평안남도 평양부 (現 평양시) | |
| 사망 | 1926년 8월 4일 (향년 29세) |
| 대한해협 실종 | |
| 학력 | 평양숭의여자중학교 (졸업)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 / 졸업) 도쿄음악학교 (갑종사범과 / 수료)[1] |
| 호 | 수선(水仙) |
| 직업 | 가수, 성악가 |
| 장르 | 서양 고전음악, 대중가요 |
1. 개요
한반도 최초의 공식 여성 성악가, 소프라노 가수로 대표곡 <사의 찬미>가 유명하다.[2] <사의 찬미> 녹음 후 대한해협에서 김우진과 실종되면서 당시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김우진과 실제 연인도 아니었으나 근거없는 정사(情死)[3]설이 퍼지며 죽음에 대한 각종 억측과 소문이 난무했고[4] 이로인해 여러 의혹들이 제기되었다. 가수의 비극적인 인생과 높은 화제성으로 인해 음반 불모지였던 조선에 축음기가 보급되며 국내에 처음으로 음반시장이 형성되었으며 높은 판매고를 올리며 ‘사의 찬미’ 신드롬이 만들어졌다.2. 생애
윤심덕은 1897년, 평양 남산재 교회 권사 윤석호의 1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고 형제들은 모두 음악을 공부했다.[5] 평양에서 나물 장사하는 가난한 집안이어서[6] 경성 유학과 동경 유학은 오로지 억척 같은 의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윤심덕은 눈에 띄게 키가 큰 여학생이라 ‘6척 장신’으로 불렸으며, 목소리가 우렁차고 성격이 활달해 어릴적부터 ‘왈녀’라고 불렸다. 1907년 진남포 사립여학교에 입학했고 그후 평양 숭의여학교,[7]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8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했다. 당시 부모님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덕에 신학문을 접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었고, 교회에 다니며 노래에 빠지게 되었다. 교회 성가대 활동을 하면서 노래 실력이 두각을 드러냈다.1919년, 조선총독부의 '관비유학생'[8]으로 발탁되어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했다. 아오야마가쿠인(靑山學院)을 거쳐 도쿄음악학교 사범과에 입학했다.[9]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10]에 입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21년, 동경 유학생들로 이루어진 동우회고국순회단의 단원이 되었고 연극 공연의 막간에 노래를 불렀다. '김영일의 사' 등이 공연되면 '장미화,' '황혼의 시내' 등을 독창했다. 고국순회공연의 연출자는 김우진이었으며 음악을 담당하던 홍난파가 윤심덕을 데려오며 단원이 될 수 있었다. 유학생들 사이에선 홍난파와 윤심덕이 사귀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으나 이때만해도 윤심덕은 스스로를 '자유연애론자'라고 말하며 그런 소문에는 전혀 개의치않아 했다. 일본에서 윤심덕은 쾌활하고 긍정적이었고[11] 남학생들과도 내외하지않고 유학생들과 어울리며 폭넓게 교제했다.
1923년에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고 같은 해 6월, 동아부인상회 3주년 창립 기념으로 열린 음악무도대회에서의 독창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성악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윤심덕이 독창자로 나서지 않는 음악회가 없을 정도로 출연요청이 쇄도했다. 하지만 음악회만으로는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대중가요 활동을 비롯해, 학교 음악선생,[12] 극단 토월회 배우 등을 하기도 했다. 라디오 방송에 나가 가요를 불렀고, 레코드를 취입했고, 경성 방송국에서 1세대 라디오 DJ로 활약하기도 했으며 토월회의 '동도'라는 극에 한차례 출연하기도 한 것이다. 그녀의 부모는 유학도 다녀왔으니 전적으로 가족을 부양하라고 했고 그리하여 그녀는 생계형 가수가 되었다. 1920년대 당시엔 성악 공연으로는 교통비 정도의 보수 정도밖에 받을 수밖에 없어 어쩔 수 없이, 대중 가수를 겸한 여러가지 일을 하면서 부모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유학비를 마련했고 늘 생계 걱정을 해야만 했다.
1924년, 윤심덕은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로 이름이 알려지며 유명세를 얻게 된다. 하지만 세상은 그녀의 예술보다는 사생활에 관심이 더 많았다. 윤심덕은 자유분방한 성향과 여성 예술가에 대한 사회적 편견으로 인해 여러 소문에 시달렸다. 평양 기생의 딸이라느니, 일본인에게 입양되어 음악을 했느니, 친아버지가 아니라느니 하는 출생을 둘러싼 소문[13]부터 일본에서 누구누구와 사귀었다더라, 구애를 받았다더라 등의 과거[14]에 대한 뜬소문이 돌더니 김홍기, 이용문 등 남성들과의 스캔들이 신문에 보도되며 곤경에 빠지게 된다. 윤심덕은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인데도 부모가 성화를 부려 이를 무마하려던게 신문에 결혼설로 나오고 이어 신랑 집안에서 혼담을 파기했다는 기사가 나오며 파혼당한 여자라는 소문에 시달린다. 본격적으로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사건은 남동생의 미국 유학비를 지원해준 재력가 이용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로[15] 행실이 안좋은 여자로 낙인되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
윤심덕은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토월회의 여배우[16]로 무대위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일은 악성 기사를 더욱 부축인다. 배우로서 준비가 부족한 상태로 악조건 속에 오른 무대는 평론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고, 이어 신문과 잡지들은 그녀에 대해 악의적인 기사들을 쏟아낸다. 심지어 '예술가인척하는 계집'이라는 기사가 있을 정도였다. 날이 갈수록 세간에는 악성 루머가 더해만갔고[17] 결국 윤심덕은 활동을 멈추고 조선을 떠나있기로 한다. 하얼빈의 배형식 목사 집에서 은거하다 1925년 6월 형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언니를 위로하기 위해 귀국했고, 이후 여동생의 미국 유학을 위해 자금을 모으고자 일본에서 일거리를 찾다가 1925년 12월 31일, 일본 닛토(日東)레코드와 전속계약을 했다. 그녀는 동생들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만큼 우애가 남달랐고 없는 형편에 유학비를 마련하려고 하다보니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1926년, 일본 오사카에서 <사의 찬미>외 24곡을 취입했다. <사의 찬미>는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왈츠 <다뉴브강의 잔물결>의 주선율에 별도의 가사를 덧붙인 번안곡이다. 하지만 <사의 찬미>는 원래 녹음하고자 했던 곡이 아니었다고 한다. 레코드사 측은 노래를 녹음하던 중에 그녀가 갑자기 이 노래를 녹음하고 싶다고 했다면서 실종 이틀후 대대적으로 윤심덕과 사의 찬미와 관련된 사연을 알렸고[18] 윤심덕의 죽음에 대한 소문은 엄청나게 재생산되었다. 소문으로 고통스러워 죽음을 생각했던 그녀는, 죽음마져도 사실과 다른 뜬소문과 허위 스캔들로 만들어지며 소비되어졌다.
이 노래는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1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19] 어떻게 보자면, 그녀의 죽음이 판매량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노래는 죽음을 찬미하는 우울한 노래이고, 그 가수는 죽었으니까. 다시 후술하겠지만 실종 직후 발매되며 그녀는 이 레코드판이 정식 발매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 당시 레코드판 한 장 가격은 쌀 한 섬 가격으로 상당히 고가였다. 더구나 레코드를 들으려면 더 고가의 축음기(유성기)도 필요하니 같이 구입을 해야만 해서 일본의 축음기 회사가 큰 이득을 보았다. 이렇게 고가임에도 엄청난 화제성으로 인해 한국 특유의 쏠림 구매가 일어났고 이렇게 한반도에 음반 산업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녀가 취입한 음반은 사의 찬미가 대표작이지만 해당 레코드판이 발매되기 6개월 전에 프란츠 슈베르트의 <들장미>나 <보리수> 등을 <월계꽃>이나 <옛꿈>으로 번안한 곡을 녹음한 적이 있는데 해당 음반은 2022년 4월 말에 발견되었다.#
3. 죽음에 대한 사실
윤심덕과 김우진은 같은 배에서 실종이 되었다. 두 사람이 과연 배를 탔는지 여부도 불확실하다는 분석도 있으나 가방이 있는 점, 탑승인 명부에 적혀있는 거주지가 실제 거주지라는 점을 볼 때 탑승한 것으로 여겨지며 우연으로 같은 배를 탄 것인지, 같은 배에서 만난 것인지, 같이 가서 탄 것인지는 알 수 없다.1926년 8월 4일 선실 문이 열려있는데 승객이 없어서 승객명부를 조사했고 전날인 8월 3일 부산행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두 사람이 적은 승객명부가 확인되었다.[20]
당시 분명한 사실은 다음 3가지 뿐이다.
- 8월 3일 김우진과 윤심덕이 일본에서 같은 배를 탔다는 것.
- 8월 4일 새벽 대마도를 지날 무렵, 선실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사람은 없고 가방만 있었다는 것.
- 이후 승객명부를 대조해서 확인해보니 김우진과 윤심덕이 없다는 것.
유언장 같은 것은 확인되지 않았다. 조선의 신문, 잡지들은 유서를 남긴 정사(情死)사건이라 했으나, 이는 허위로 가족과 지인들은 그런 것이 없다고 밝혔다. 또한 두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며 가족과 지인, 그들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이를 부인했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자살했다는 장면을 본 목격자가 없었다. 넓은 바다였기 때문에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들의 유품은 이들의 가방뿐으로 윤심덕이 남긴 현금과 장신구, 김우진이 남긴 현금과 금시계가 가방 안에 있었고 이 짐을 집으로 보내달라는 객실 승무원에게 보내는 쪽지와 팁이 있었다. 목격자가 없는 경우, 실족이나 파도에 휩쓸려 바다에 떨어지는 등의 사고가 아닌 경우가 오히려 적고 바다에서 일어나는 사고 대부분이 안전 부주의로 일어나는 사고인만큼 김우진의 가족은 현상금을 걸면서까지 흔적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양승국 교수는 김우진을 연구하면서, 충동에 의한 자살 내지 사고사에 무게를 두었다. 많은 김우진 생애와 작품 연구들 역시 실종 사건에 대해, 충동적으로 배에서 뛰어내렸거나 사고사를 당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김우진은 작가였던 만큼 집을 나와 실종되기 전까지 글을 남겼고, '문학적 열망'을 가로막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고뇌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는 상태이다.[21]
4. 죽음에 관한 의혹
4.1. 황색지의 왜곡
목격자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초 사건을 접하자마자 조선의 신문, 잡지들은 직접 본 것 마냥 일제히 ‘유서를 남기고는 두 사람이 서로 껴안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면서, 조선 최초의 정사(情死)사건이라고 대서특필했다. 실종전까지 두 사람이 연인이란 것도 금시초문이었고, 승객 명부 조사 결과 ‘김수산과 윤수선이 없었다’는 것이 사건의 실체이나 앞다투어 허위보도를 쏟아냈다.오늘날에는 보도 내용을 검증할 책임이 있어 명예훼손으로 판단되는 행위이나 당시는 취재에 대한 개념도 윤리도 전혀 없던 무지한 시절이었다. 이미 윤심덕에 대한 루머가 상당한 상태였으므로, 실종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조선 최초의 정사설'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정사(情死)는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자살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정사는 일본어로는 신쥬(心中しんじゅう)라고 하며 일본에서 넘어온 근대적 문화의 풍경으로 1920년대 사람들에게는 로맨티시즘의 극치로 여겨졌다. 즉 세간에서 떠돌은 윤심덕과 김우진의 이야기는 소문과 소문이 덧붙여져 만들어진 '1920년대 환타지 로맨스'라는 것이다.[22]
당시, 김우진은 문학에 뜻을 두었지만 가업계승을 원하는 완고한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와 일본에서 독일 유학을 앞두고 있었고 실종 3일전인 8월 1일, 자신의 희곡을 문학지에 보내면서 ‘앞으로 나의 작품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원고를 받으면 회답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윤심덕은 동생들의 학비와 부모와 가족의 생활비를 책임지고 있는 상태였으며 당시, 여동생의 미국 유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8월 5일, 여동생이 미국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미국에서 실종 소식을 듣는다.
윤심덕의 여동생은 언니의 실종에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근거없는 억측과 소문으로 큰 상처를 받아 "살았든 죽었든 관심갖지 마시오"라며 그만 좀 하라고 인터뷰를 했다. 여동생이 언니가 자살할리가 없다고 말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계획된 죽음보다는 충동에 의한 자살 내지 사고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또한 윤심덕이 당시 도쿄에 있는 친구에게 ‘곧 도쿄에 놀러갈테니 만나자’는 편지를 보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두 사람은 예술과 죽음에 대해 서로 소통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윤심덕은 무게감있고 명망이 높은 김우진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으며 그의 예술관에 동조하며 존경심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두 사람의 죽음을 '자살설' 내지 동반자살로 추측하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자살 파트너'였을 것으로 예측한다. 적극적인 윤심덕이 유도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며, 충동적으로 벌어졌으리라 추정되고 있다.
윤심덕은 음반취입을 위해 일본으로 갔을때, 김우진은 윤심덕이 일본에 있는지도 몰랐다. 윤심덕은 오사카에서 레코드 취입후 당시 도쿄에서 독일유학을 준비하던 김우진에게 오사카로 오라고 전보를 보냈다. 김우진은 도쿄 홍해성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으며, 연극인 홍해성은 김우진이 전보를 받고 다급히 도쿄에서 떠났다고 증언했다. "오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전보를 받았다고 전해지며 김우진은 "그녀를 말리려 간다"며 떠났다고 한다. 윤심덕은 토월회 활동에 대해 과거 연출자였던 김우진에게 물었고 이후 좋지 않은 상황에 대해 위로를 받았다는 얘기가 있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두 사람은 연인관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두 사람을 아는 모든 이들이 연인관계가 아니라고 증언했다. 연인관계였다면 지인들도 알고 있어야하고 내면을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김우진의 글에 분명히 남아있을 터인데 전혀 그런 게 없다.[23] 김우진의 글에는 주로 시대 갈등과 세대 갈등이 그려지며 인습에 머물고 있는 당시 사회와 부친과의 갈등이 자주 언급되나 연애, 낭만에는 전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김우진의 아내 역시 '냉철한 사람'이라고 말했다.[24] 사실 이들이 연인관계라고 언급하는 것은, 윤심덕의 루머를 만들던 황색 신문, 잡지들이 정사(情死)라고 할 때 부터였다. 김우진의 친구이자 윤심덕을 알고있던 시인 조명희는 이를 두고 “풍문에 불과하다. 그것에 대해선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말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가족들, 그들을 아는 지인들 모두 근거없는 허위 소문이라며 이를 부정했다. 고국순회공연에서 자금과 연출을 담당했던 김우진은 자신의 집에서 단원들을 초대하는 음악회를 열었고 단원이던 윤심덕은 동생 윤성덕, 윤기성을 데리고 한차례 공연을 한적이 있었다.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윤심덕(소프라노)과 윤기성(바리톤)이 노래를 불렀으며 김우진은 아내와 함께 윤심덕 남매의 재능을 인정하며 다른 단원들과 함께 이들을 대접했다. 이 음악회는 흩어진 단원들을 격려하고 사기를 북돋아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실종후 황색지들은 그때 당시 연애가 시작되었다면서 모든 초점을 정사(情死)에 두고 이야기를 지어냈다.
김우진은 부유했으므로 두 사람이 연인이었다면 윤심덕은 경제적 지원을 받아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을테지만 두 사람은 고국순회공연으로 알게 된 지인 사이였을 뿐이다. 또한 당시에는 이혼제도도 있고 첩을 두는 것도 문제가 되지않았다. 윤심덕의 진남포 삼숭학교 시절 친구인 박인덕, 김일엽도 이혼했다. 조선직업 부인회 회장이던 박인덕은 결혼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 가장이 됐고, 첩을 두자 조선 최초로 위자료를 주고 이혼했다. 최초의 여성잡지 <신여자>를 만든 김일엽은 이혼과 동거를 모두 경험했고 여승이 되었다. 더구나 1920년대는 ‘제2부인’이라는 용어가 있을 정도여서[25] 두 사람이 원하면 같이 살면 그만이었다. 따라서 김우진이든 윤심덕이든 굳이 사랑때문에 비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두 사람은 시대적, 사회적 상황과 가정사로 인해 예술 활동이 가로막히며 힘들어하고 있었다. 황색지들은 정사(情死)는 이 사건이 최초라 했는데 조선에선 일어나지 않는 근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풍조였다.[26]
4.2. 위장설, 생존설, 모살설
죽음에 관련된 증거가 전혀 없어 두 사람의 실종사건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남겨놓은 유서도 없고, 투신 장면을 목격한 사람도 없고,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게다가 실제로 배를 탄 사람이 김우진과 윤심덕이 맞는지 제대로 확인한 사람도 없었다. 그냥 ‘명부상 김수산과 윤수선이라는 남녀가 탔고, 이 사람이 김우진과 윤심덕이더라’라는 것 뿐이다.가난한 여가수 윤심덕과 거부의 아들이자 작가인 김우진이 어떻게 사랑으로 맺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미스터리한 요소들 때문에 다양한 추측과 상상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윤심덕이라는 인물도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 자유연애론자 윤심덕, 일편단심 순정파 윤심덕 등 여러 설정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사건의 경우도 동반자살이라고 하나 목격자가 없었기 때문에 죽음을 가장하고 다른 사람의 행세를 한다는 '위장설', 유럽으로 떠나 살고 있다는 '생존설', 죽음에 대한 소문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사실에 입각해 일본 축음기 회사와 레코드사를 거론한 '모살설' 등이 제기되었다. 당시 그들의 드라마틱한 죽음으로 인해 ‘사실은 어디 외국에서 살고 있다 카더라’가 유행을 했고 두 사람의 생존설을 확대, 재생산한 것 역시 당대의 호사가들과 황색 신문, 잡지였다. ‘두 사람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가장하고 외국으로 도망갔다’는 이야기들은 사의 찬미가 팔리는 것만큼 퍼져나갔다.
‘두 사람은 죽지 않고, 유럽으로 도피했다’는 소문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구체화된다. 배에 탔던 선원을 매수해 자살했다고 꾸몄고 이후 다른 사람으로 위장해 중국을 거쳐 유럽에 갔다는 소문이 돌자, 1931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악기를 파는 잡화점을 하는 동양인 부부가 있으며 이들이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간판명부터 구체적인 지명 등이 언급되자, 김우진의 동생은 당시 총독부를 통해 주이탈리아 일본대사관에 확인을 요청했다. 이에 1931년 11월, 이탈리아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우진의 가족들에게 “로마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이라는 이름을 가진 조선인이 살지 않으며, 동양인이 경영하는 악기점도 없다”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1934년에는 자칭 김옥균의 손자가 나타나 “내가 이탈리아에서 머물 때 로마에서 악기상을 하는 김우진과 윤심덕 부부를 보았다”고 말하고 다녔고 얼마 안 있어 거짓말을 했음이 밝혀졌다. (관련 내용은 김옥균 항목 참고) 사실 이 소문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자살을 꾸미기 위함이었으면 본명을 쓰지 굳이 가명을 쓸 이유가 없다. 또한 죽음까지 가장해 이탈리아 로마에서 신분을 속일 이유도 없다.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며 이들의 죽음이나 소문이 ‘사의 찬미의 음반 판매와 관련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 되었다. 이로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보았기 때문이다. 레코드사와 짜고 죽음을 가장했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하고, '레코드사 관련자들이 이들을 해친 것'은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사고 발생 후 닛토(日東) 레코드사는 윤심덕이 사고 직전 <사의 찬미>를 녹음했다면서 이를 대대적으로 알린다. 원래 계약은 26곡을 녹음하는 것이었지만, 윤심덕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 강의 잔물결’에 자신이 가사[27]를 붙인 노래 한 곡을 더 녹음하자고 제안했다면서 <사의 찬미> 과 관련된 사연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음반홍보에 나섰다. ‘사의 찬미’가 포함된 윤심덕의 유고 음반은 오사카를 시작으로 일본과 조선 전역에 발매되었고 높은 화제성으로 인해 전대미문의 판매고를 올렸다. 이에 대해 후대는 식민지 여성 예술가의 '희생제'를 통해 한국의 대중음악사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2022년 논설
음악평론가 강헌은 그들의 죽음에 관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무차별적으로 유포된, 그 무엇인지 모른다며[28] 사의 찬미 신드롬 뒤에는 '일본 오디오 산업의 계략'이 있음을 지적했다. 실종이 정사(情死)로 왜곡되고 재생산된 데는 레코드사의 홍보가 분명 기여한 점이 있어, 타살 가능성과 모살설이 제기되었다. 강헌은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면, 당시 윤심덕의 음반을 취입한 닛토(日東) 레코드사가 유력한 용의자[29]라고 추정했다. 강헌은 당시 음반뿐만 아니라 노래를 듣기 위한 축음기 역시 조선 땅 곳곳에 팔리기 시작했다고 하면서, 아울러 이 레코드사는 당시 일본 국영축음기회사인 닛지쿠의 자회사라는 사실을 짚었다. 기사
닛토 레코드사는 1926년에 생긴 당시로써는 듣보잡 회사로 1928년 사라졌다.[30] 더욱이 당시 레코드 메인곡으로 내놓았던 사의 찬미는 원래 그녀가 부를 예정의 노래가 아니었다면서 실종직후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다. 왜곡보도로 화제를 모아 음반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고가의 축음기를 만드는 일본의 국영기업과 레코드 회사는 큰 돈을 벌며 이득을 챙겼다.
2017년 tvN 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서도 실종사건과 이에 대한 의혹설들이 나왔다. 잡학박사 유시민은 “사실 그분의 '자살설'에 이태리 '생존설', '모살설 등의 음모론'이 있다”며 죽음에 대한 의혹설들을 정리했다. “음반이 출시되기 직전에 윤심덕과 김우진이 실종됐다”는 팩트를 언급하며, “당시 ‘사의 찬미’를 듣기 위해서는 축음기를 사야했기에 축음기를 사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음모론이 있다”고 모살설을 설명했다. 기사
2021년 MBC 선을 넘는 녀석들 : 마스터-X 14회에서는 '사의 찬미' 윤심덕의 죽음에 대해 방송을 하며 신여성을 대표하는 윤심덕이 받아야했던 부정적인 시선과 시대적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전현무는 “이런 상황을 오늘날로 치면 악플로 볼 수 있다”며 “저도 마음이 많이 아파봐서 안다”고 공감했다.
어쨋든 분명한 것은 1926년 8월 4일 이후 윤심덕과 김우진은 사라졌다. 여담이지만 윤심덕과 절친한 사이였던 극작가 이서구(1899~1982)의 회고에 의하면, 이서구는 윤심덕이 일본으로 음반을 취입하러 갈 때 경성역으로 배웅을 나왔었는데 이 때 나누었던 대화가 참 의미심장하다.물론 이서구가 마지막에 한 말은 당연히 농담으로 한 말이었고, 실제 이 대화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한 대화였다고 한다. 참고로 이서구가 사달라고 했던 넥타이는 윤심덕이 죽었다는 비보가 들려온 지 며칠 후에 이서구에게 도착했고, 이서구는 그 넥타이를 매고 다니지 않고 죽을 때까지 간직했다고 한다.
5. 창작물
두 사람의 죽음에 관한 소재로 많은 팩션 창작물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최초의 영화화는 1969년 안현철 감독의 <윤심덕>(1969)이다. 신성일, 문희가 김우진과 윤심덕을 맡았으며, 이순재가 스토커 박정식 배역을 연기하여 해당 인물을 부각시킨 치정물이었다. 백영민, 주증녀, 한은진 등이 조연으로 출현했다. 영화는 김우진과 윤심덕 두 사람의 만남에서부터 현해탄에서 뛰어내리는 장면까지를 담고 있다.
- 1988년 극작가 윤대성이 <사의 찬미> 희곡을 썼으며 1990년 5월, 극단 실험극장의 창립 30주년 기념작으로 동명의 연극이 공연되었다. 윤호진이 연출을 맡고 윤석화, 송영창, 송승환이 윤심덕, 김우진, 홍난파를 맡아 열연을 보여주었다. 이후 윤대성 희곡 원작의 사의찬미 연극이 꾸준히 공연되었으며 극작, 연기 전공 입시에서도 주요 희곡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홍난파가 김우진과 윤심덕의 친구로 나오는 극은, 모두 이 희곡을 바탕으로 하거나 이 희곡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들이다.
- 2025년에 사의 찬미(연극)이 개막했는데, 윤대성 희곡 원작으로 음악가 홍난파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김우진과 윤심덕이 사망한 지 2년 된 해에 시작하는 이야기이다. 2025년 윤대성 작가가 85세로 별세, 초연 35년 역사를 기념하는 연극으로 올라왔다. 기사
- 이후 1991년, 김호선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임성민, 장미희, 이경영 주연(윤심덕, 김우진, 홍난파가 주연)의 사의 찬미로 영화화되었다. 윤심덕을 맡은 장미희는 이 작품으로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김우진을 맡은 임성민은 청룡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참고로 김호선 감독이 <사의 찬미> 이후 차기작으로 다시 장미희와 임성민을 캐스팅해서 만든 영화가, 바로 한국영화계에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애니깽이다. 즉 <사의 찬미>는 1950년대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충무로 인력들이 만들어낸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악역으로 이용문(윤심덕을 첩으로 만들려는 인물), 박정식(윤심덕의 스토커) 등이 출연하고 있다.
- 뮤지컬은 <사의 찬미> 희곡 내용을 바탕으로 한 극이 1990년 공연되었고 이후 2005년 윤석화가 제작과 연출을 맡은 뮤지컬이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올려졌으며 가수 바다가 윤심덕 역으로 출연했다.기사
- 2012년에는 '글루미데이'라는 뮤지컬이 올라왔으며 2015년부터 '사의 찬미'로 이름을 바꾸어 공연되고 잇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염세주의를 의인화한 미지의 가상인물을 추가한 뮤지컬로 삶(우진, 심덕)과 죽음(사내)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으며 선율속에 흐르는 긴장과 미스터리에 중점을 두고있다.
- 2016년에는 연극 관부연락선이 공연되었다. 여기서는 윤심덕은 주인공에게 구조되어 살아나지만, 자신의 진정한 꿈을 찾아 생존을 비밀로 하고 로마로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2025년 8월에 동일 내용의 관부연락선(뮤지컬)이 무대에 올랐다.
- 2018년 11월 27일부터 SBS에서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다.[31] 이종석이 김우진 역을, 신혜선이 윤심덕 역을 맡았다. 이 극에도 홍난파가 나오며 이지훈이 홍난파 역으로 나왔다.
- 2018년 제16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에서 창작 오페라 <윤심덕, 사의 찬미>가 공연되었다. 이후 2021년 제18회 대국국제오페라 축제에서도 공연되었다. 윤심덕에게 반한 일본경찰 다케시는 윤심덕을 회유하나 윤심덕이 거부하자 허위 루머를 퍼뜨리는 것으로 나온다.
- 웹소설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도 김우진과 함께 등장. 광무제 이선이 수집한 피에르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그렸다는 그림과 어진을 보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최신 고증에 충실한 작품답게, 두 사람이 사랑하는 남녀 사이가 아니라, 예술가 대 예술가로서 존경과 진보적인 사고 때문에 가족과 사회에 갈등을 겪는 인물들의 동질감으로 표현된다. 두 사람의 자살 이유 역시 사랑때문이 아닌, 일본의 억압적인 통치에 비관한 식민지 청년의 아픔으로 소개된다.
[1] 다이쇼 15년(1926년)에 작성된 도쿄음악학교졸업생씨명록에 윤심덕은 다이쇼 12년(1923년) 3월에 갑종사범과를 수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갑종사범과가 중등 음악교원 양성, 을종사범과가 초등 음악교원을 양성함.[2] ‘사의 찬미’는 죽음의 노래라는 뜻이다. 당대에는 ‘찬미’란 말이 ‘음악’ 또는 ‘노래’와 같은 뜻으로 쓰였다.[3] 사랑하는 남녀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것을 비관하여 동반자살하는 것을 이르는 말. 情事가 아니라 情死. 근대일본의 풍조였던 신쥬(心中)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1920년대에는 로맨티시즘의 극치로 여겨졌다.[4] 배에서 뛰어내려 동반자살했거나 사고사를 당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5] 언니 윤심성도 성악을 배웠으며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경상북도 안동으로 출가했고, 여동생 윤성덕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피아노를 공부한 후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남동생 윤기정은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도쿄음악대학과 오아이오대학에서 성악(바리톤)을 공부했다. 동생들의 유학 학비는 모두 윤심덕이 마련했다.[6] 아버지 윤석호는 나물장사를 하고 어머니 김씨는 병원에서 일을 했다. 광혜여의원은 미국인 여의사 홀 부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윤심덕은 이에 영향을 받아 한때 의사가 될까도 생각했지만 적성에 맞지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편입했다.[7] 숭의여학교는 총독부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학교가 아니어서 상급학교에 진학하려면 인가받은 학교에서 2년간 더 공부해야 했다.[8] 경성 여고보 사범과를 졸업한해 원주로 교사 발령을 받았으며 다음해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자격시험에 합격해 유학길에 오른다. 도쿄예술대학 재학생명부에는 ‘특별유학생’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9] 다만 원래 특기인 성악과가 아닌 갑종사범과(甲種師範科)에 재학(도쿄음악학교 재학생명부에 기록)했다. 아무래도 음악과목 교사를 염두에 두고 사범과를 전공한 듯 하다. 여담으로 여동생 윤성덕(1903~1968)도 언니와 비슷한 길을 걸어 이화여전 음악과 교수로 재직했다.[10] 도쿄음악학교는 우에노(上野)공원에 위치해 우에노음악학교라고도 불렸다.[11] 이 시기의 윤심덕을 알던 지인들은 그녀가 소문에 시달려 우울증이 있었고 죽음을 생각했었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 할 정도였다.[12] 교사로 일하기도 했으나 적응을 하지 못해 오래 다니지 못했다.[13] 이러한 소문들은 그녀가 근본없는 여자라는 악의적인 소문이었다.[14] 과거가 많은 여자라는 악의적인 소문들이었다.[15] 윤심덕이 남동생 미국 유학자금 마련을 위해 이용문을 찾아갔다는게 기사화되었고 기사 말미에 이후는 알아서 생각하라고 적혀있어 파문이 일어났다.[16] 당시 여배우는 기생취급을 받았고 이로인해 토월회는 여배우 구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윤심덕이 여배우가 됐다는 소식을 듣자 모친은 토월회의 광무대를 찾아와 끌어 내릴려고 했다. 윤심덕은 모친이 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뒷문으로 도망치듯 광무대를 빠져나오곤했다.[17] 사실 확인도 되지않는 여러 남성들과의 루머는 계속 만들어졌다. 니혼대 문과생 박정식이 여러 차례 구애를 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아 윤심덕때문에 정신이상이 생겼다는 루머도 만들어졌다. 누구 애인이다, 누구 첩이다 식의 숱한 염문설에 휩싸인다.[18] 이 일화도 레코드사가 전한 것으로 홍보를 위해 만들어낸 사연일 수도 있다. 사의 찬미 작사도 윤심덕이 했다고 하나 음악평론가 강헌을 비롯해 음악평론가들은 실제 윤심덕이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었다며 판매를 위한 전략으로 보았다. 사의 찬미 작사는 전문 작가가 쓴 것으로 추측되어지고 있다.[19] 레코드판 10만장이라는 것은 정확한 기록이라기보다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렸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당시 사의 찬미는 그만큼 당대에 신드롬을 일으켰다.[20] 승객명부에는 전남 목포부 북교동 김수산과 2정목 273번지 윤수선이 적혀있었고 두 사람의 주소, 나이가 일치했다.[21] 당시 김우진은 앞으로 문학을 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절망감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22] 사회적·신분적 장벽때문에 죽음으로 끝난 비극적 신파적인 로맨스 스토리는 당대에 자유연애 사상을 자극하면 사회적 파장을 가져왔다. 아이러니 한점은 윤심덕은 소문을 싫어했고, 김우진은 신파극을 싫어했다는 점이다.[23] 김우진이 집을 나와 사랑과 그리움을 보낸 대상은 한살짜리 아들 김방한이었다. 김우진이 집을 나와 쓴 <출가>에 그 마음이 잘 나타나있다.[24] 남편은 냉철한 사람이라 사랑때문에 뭘할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우진은 신파를 싫어했고 사실주의 신극운동을 한 지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다.[25] 부자들이 첩을 두는 일은 너무나도 흔한 일이었고 일반 가정도 첩을 거느리는 일이 많았다. 김우진의 부친도 가업계승만 한다면 첩을 두는 일따위는 상관도 없을 터였다.[26] 조선 사회에선 일어나지 않는 근대 일본의 풍조라는 점 때문에 더욱 관심을 받은 측면이 있다.[27] 이때문에 의혹이 더 커졌다. 윤심덕이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었고 전문 작가가 가사를 붙인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 이에 대해 음악 평론가 강헌도 윤심덕이 신문 잡지 매체에 쓴 글이 남아있는데 글을 잘 쓰는 편이 아니었다며, 사의찬미의 가사는 전문적인 작가의 손에서 쓰였음이 거의 명백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28] 음악사 평론책인 '전복과 반전의 순간'과 사의찬미를 전복한 소설 <생의 찬미>의 공저자로 이를 파헤쳤다.[29] 가장 큰 이득을 본 자가 범인이다.[30] 당시 콜롬비아, 폴리도어(Polydor) 등 유명 메이커 음반회사들이 많았었다.[31] 6부작 단막극. 하루에 2회씩 3일간 방영했으므로 3부작이 아니라 6부작이다. 11월 27일, 12월 3일, 12월 4일에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