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2:55:46

관동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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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당시 일본의 경찰치안 시스템3. 진행4. 일본군의 학살5. 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6. 학살의 규모7. 추모 사업8. 학계 연구
8.1. 연구자
9. 저서10. 기타11. 대중매체에서12. 참고/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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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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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간토 대학살 현장2.png
자경단의 대학살 현장

관동대학살(關東大虐殺) 또는 간토대학살[1]관동대지진이 있었던 1923년 9월 1일부터 약 3~4주에 걸친 혼란기 무렵 사람들의 불안과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일본 정부가 유언비어를 퍼뜨려 마을의 자경단을 결성하라는 공문을 보냈고 당시 일본에 존재하던 조선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일본인들이 제노사이드를 벌인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조선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심지어 일본인들도 살해당했다.

재난에 따른 내부의 정치/사회적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증오를 선동해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고대 로마 대화재 당시 네로그리스도교 신자 박해와 비슷한 점이 있다. 흑사병이 돌던 중세 유럽에도 '유대인들이 우물을 풀었다'는 소문으로 유대인들을 학살한 사례가 있다. 좀 더 가까운 시기로는 15년 뒤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자행했던 수정의 밤 사건과도 유사점이 나타난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본에서 2010년대 무렵 유행한 재일교포들에 대한 증오 발언들만 보더라도 이들 무리와 유사성이 나타난다.

2. 당시 일본의 경찰치안 시스템

본론에 앞서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 일본의 경찰치안의 시스템을 기술하자면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본에 도입된 근대 경찰 시스템은 초창기에는 아직 해체된 무사단의 성격을 계승하고 있어서 각 지방의 사병조직과 같이 운영되었고 단속을 당하는 "민중"과 단속을 하는 "경찰"이라는 관계 속에서 서로가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성격을 가진 탓에 1905년의 러일강화조약에 분노한 민중이 경찰서를 습격하여 도쿄의 경찰소의 80%가 전소하는 피해가 발생했고, 1918년의 쌀 소동을 경험한 일본 경찰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민주주의/사회주의 운동이 증폭되어 러시아 혁명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경찰의 민중화, 민중의 경찰화"를 내걸고 경찰시스템을 개편했다. 이전까지는 범죄자체를 단속하는 시스템이었다면 "경찰의 민중화"는 교통안전 캠페인을 하고 어린이에게 경찰서를 견학시키고 각종 범죄 예방의 정보를 공지하는 등 경찰이 민중에게 다가가서 경찰제도를 인지시키고 민중의 동의를 받고 범죄의 "예방"과 민중들 사이에서 "치안을 유지"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이는 해당 마을 사람이나 현지인을 경찰인원으로 채용해서 민중의 깊은 곳에 사회운동을 내부적으로 단속하겠다는 "정치경찰"화하는 노림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어둠에 세력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거나 사리사욕에 눈이 먼 사병조직과 같이 독립성이 강한 경찰에 대한 대우개선과 시스템화로 국가에 충성하고 제대로 치안업무를 하는 "행정경찰", "관료경찰"로 탈바꿈시킬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경찰의 주된 성격이 범죄의 직접적인 단속에서 예방과 사후처리도 추가되자 경찰인원만으로는 사회전반의 치안유지를 유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민중에게 경찰의 시스템을 인지시키고 민중들이 경찰에 협력하고 치안유지에 힘쓰는 시스템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경찰은 각 지역 마을의 유력자와 협업하여 민중들의 단체인 "자경단" 및 "보안조합"을 조직시키고, 그들을 통해서 범죄 예방 정보를 알리거나, 긴급상황에서의 치안유지 및 범죄단속을 위임하는 관계가 되었다. 말하자면 경찰 시스템의 일부를 각 고을 유력자와 그 자경단(유력자의 사병)에 하청한 것이다. 이것이 "민중의 경찰화"다. 관동대지진 당시 자경단이 툭하고 조직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존재하던 "민중의 경찰화"로 생긴 일본의 치안시스템의 일부이고 "경찰의 민중화"는 경찰을 "민중"에 친숙한 존재로 만들어서 "민중"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민중"과 같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민중과 같이 동조해 버리고 "경찰"이라는 국가의 권위가 부여된 지시와 공지를 자경단에 내려 자경단에게 학살에 타당성을 부여해 버리는 부작용을 불러왔다.

이러한 권위 부여는 불순조선인을 죽이는 것이 애국자인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어 자경단끼리 애국운동하듯이 조선인을 살육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찰이 선동을 조장하고, 개별경찰서에서 그 정보를 확대재생산하는 가운데 오히려 동원된 일본군은 9월 2일자에 "(조선인의) 계획적인 불순행위에 대한 그어떤 행세를 확인되지 않음"라고 사병에게 선동당하지 말라고 훈시하며 사태를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기 시작하는데[2], 경찰이 유언비어라는 걸 인식한 건 9월 3일이고, 자경단에게 자제를 요청하는 찌라지를 뿌리지만 그 내용도 "일부 조선인의 망동이 있었지만, 지금은 엄중한 경계로 사라졌고 대부분의 조선인은 선량하니 폭행하지 말지어다"라는 내용으로, "조선인의 망동"은 있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가. 9월 5일에 "일부 조선인의 망동이 있다는 소문에 불쾌감을 가진 자들이 있다고 듣고 있으며, 그런 조선인 또는 불온한 움직임을 목격하면 군과 경찰에게 연락하고, 함부로 폭행하면 아니된다."[3]는 内閣告諭(내각 고유, 훈시)가 떨어지자 "임시진재구로사무국경비부(臨時震災救護事務局警備部)"에 모인 관헌(경찰)의 회의에서 조선인 학살 사건의 공표를 공개함과 동시에, 자경대의 무장해제 및 조선인의 보호라는 방향이 정해졌지만 그와 동시에 사법성에서 지진 당시의 "조선인 범죄"를 공표하여 "조선인이 범죄를 이르켰기 때문에 학살이 불상사가 벌어졌다"며 조선인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여론전을 펼친다.[4]

일본 내각부의 방재정보 사이트의 "報告書(1923 関東大震災第2編)"(보고서 (1923 관동대지진 제2편)의 "제4장 혼란으로 인한 피해"에는 앞서 서술한 시스템화된 경찰시스템으로 인하여 생긴 각 경찰서의 보고 의무로, 상부에 보고되어 수집된 유언비어를 타임라인순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확산의 분석, 피해, 유언비어가 나오는 원인과 대처에 대해서 연구되어 있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분은 참고하면 좋다.##

3.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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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 신문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폭동을 조장한다.'는 기사를 전면에 실었다. 매일신보는 조선총독부의 관제 언론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기사를 썼다.

1923년 도쿄를 위시한 간토 지방은 지진 때문에 엄청난 사상자와 피해가 속출했고 치안도 무너져 민심과 사회질서가 대단히 혼란스러웠다. 그렇게 서로를 믿지 못해 불신이 팽배한 가운데 내무성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각 지역의 경찰서에 지역의 치안유지에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이때 내무성이 각 경찰서에 하달한 내용 중 '재난을 틈타 이득을 취하려는 무리들이 있다. 조선인들이 사회주의자들과 결탁하여 방화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일부 신문에 인용되었고 이 과정에서 편향적인 유언비어까지 더해진 결과 '사회주의자들의 교시를 받은 조선인들이 폭도로 돌변해 일본인들을 습격하고 방화약탈까지 한다.'는 과격한 선동 문구로 완성되어 각지에 나돌았다.

심지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5][6][7], '조선인들이 독이 든 만두를 나눠주고 있다', '조선인들이 일본지진 일어나게 해달라고 일본에 저주를 퍼부었다.'는 유언비어라고 하기에도 급이 너무 떨어지는 허무맹랑하고 비과학적인 낭설까지 나돌았다. 거기다 '조선인들 모두가 일본 열도를 영차영차 밀어서 지진을 일으켰다.'는 만평이나 프로파간다 그림이 신문이나 벽보 등으로 나돌았다.

일본 경찰이 조선인에 의한 방화가 이어져 계엄령을 내렸다는 식의 전보를 전국의 지방 조직에 보냈다다.#

게다가 당장의 분노를 표출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증오를 가진[8] 일본인들은 이러한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믿고 서로 적개심을 확산시키면서 조선인 학살의 구실을 쌓아 갔다.

게다가 조선인들에 대해 무관심했던 다른 민중들도 지진으로 인해 여기저기 무너지고 물 공급까지 끊긴 상태라 삶의 터전을 잃은 허망함과 좌절, 화재[9], 치안에 대한 불안감까지 커져갔다. 그런데 이런 소문들까지 나돌자 당장의 분노와 두려움에 휩싸여 곳곳에서 우익들의 선동 하에 죽창, 몽둥이, 도끼, 갈고리, 일본도, 총기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을 빙자한 폭도들이 결성됐고, 이들은 곳곳을 돌아다니며 인민재판을 해 조선인이다 싶으면 가차없이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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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목격자, 생존자 및 실제 활동했던 자경단들의 증언.

우선 조선식 복장을 한 이는 현장에서 찌르거나, 때리거나, 찍거나, 베어 죽였다. 게다가 기름을 붓거나 장작불에 천천히 화형시키기도 했으며(사진 주의) 심지어 밧줄로 굴비엮듯 묶거나 반죽음으로 만들어 강물에 던지기도 했는데 직후 살겠다고 수면 위로 올라오면 그 즉시 쫓아가 확인사살했다.

게다가 창씨개명이나 화를 피해 일본식 이름과 복장으로 위장한 조선인들까지 잡겠다고 조선인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10] 「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십오 엔 오십 전)이나[11]だいこん」등의 단어까지 말하게 시켰다가 발음이 이상하다 싶으면 살해했는데#[12] 이것 때문에 지방 방언[13] 등으로 발음이 어눌하거나 성이 金인 도호쿠 사람들[14][15], 외자 성을 강제당한 아마미 제도 출신, 부라쿠민 등이 반체제적 사회주의자나 조선인으로 몰려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조선인들은 학살을 피해 경찰서 유치장으로까지 피신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서 안까지 쳐들어와 끌어내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조선인 역시 '신민'(일본민)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혼란 수습과 질서 회복의 의무가 있는 일본제국 경찰과 계엄 출동한 일본군, 소방관, 공무원 등 상당수는 이러한 학살들을 방관하거나 심지어 동참까지 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물론 요코하마 쓰루미 경찰서의 오카와 쓰네키치(大川常吉) 서장처럼 원리원칙에 따라 할복을 각오하고 같은 신민인 조선인을 보호한 사례도 있었고 계엄 출동한 일본군이 자경단을 직접 공격, 해산시키고 조선인을 구출한 사례도 존재한다. 심지어 소위 말하는 황도파를 비롯한 군벌이나 제국주의적인 군인들이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이었고 이 난리통에 조선인들을 보호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조선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16] 야쿠자 등 일부 범죄조직들도 조선인들을 숨겨주기까지 했다.

심지어 러일전쟁의 명장 아키야마 요시후루[17]도 "조선인들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다. 유언비어에 휘둘리는 건 정신력이 나약해서이다."라고 사람들에게 훈시했고 극우파이자 일본 국가사회주의의 거두였던 기타 잇키는 무정부주의자이자 훗날 천황 폭사기도 사건의 주역이 된 박열에게 피신처를 알선했다. 도쿄에서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자 박열은 다급해져 기타 잇키를 찾아갔고 기타가 피신처를 알선해 준 것.[18] 위에서 말한 대로 극우 제국주의자들 중에서도 조선인 학살에 부정적인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극우 제국주의자들조차 비판했을 정도로 당시 상황이 매우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극우 일부가 관동대학살에 반감을 품었음은 극우의 특징인 파시즘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현상이 아니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영토였고 조선 황실을 '이왕가'로 칭해 가면서 일본 황실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조선인들 또한 명목상 똑같은 천황의 신민이었는데 문제는 같은 천황의 신민끼리 천황의 허락도 없이 국적을 나눠 서로 죽이고 다니니 아이러니하게도 극우주의자들에게는 반국가적 불충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박열에게 피난처를 주선해 준 기타 잇키는 일본인과 조선인은 같은 인종이고 같은 일본 국민이므로 두 민족을 평등하게 대우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박열이 기타를 찾아간 것은 기타 잇키가 아나키스트들과 사상적 교류를 자주 했기 때문에 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재일 조선인들 중 일부는 한국으로 피난에 가까운 귀국을 했는데 사태가 너무 심각하여 부유한 상인들조차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귀국했을 정도다. 특히 집이나 토지와 같은 부동산은 아예 가져올 수 없으니 급매 같은 것도 못 하고 귀국했는데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일본으로 가는 게 쉽던 시절이 아니라 일본에 가지 못한 재일 조선인들이 많았다. 결국 이들의 부동산은 일본 정부일본인들의 소유가 되었고 재일 조선인들은 한 푼 받지 못했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자경단의 규모는 점점 불어났고 만행도 점점 도를 넘어 공권력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학살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도쿄에 흐르는 스미다강[19]과 아라카와강이 투기되거나 강가에 암매장 혹은 방치된 시체들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만행 속에서도 모국인 조선에선 조선총독부의 언론 통제로 제대로 보도가 안 됐으며 이에 따라 지진 피해 상황과 재일동포들의 안부 위주로 다루다가 계엄령 이틀 뒤인 9월 6일 천도교당에서 개최된 재경유학생대회에서 처음 알려졌다. 이 대회는 일본 경찰들의 통제로 지정자 외엔 입장이 안 됐으나 기부금 파견과 더불어 정창욱 등 3명을 현장에 파견하록 하고 개벽사에 연락사무소를 두고 한위건 등을 상무위원으로 뽑아 유학생 관련 사무를 처리토록 했으나 정보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도 다음 날 '재류동포친족회'가 결성되면서 피해 사실은 어느 정도 알려진 걸로 보인다.

이처럼 조선인들이 학살 사건에 관심을 보이자 후쿠다 마사타로 계엄군사령관이 "일부 조선인들의 배일 폭동행위가 있었으나 도쿄 및 요코하마에서 질서가 안정됐다"고 했지만 "요코하마의 조선인들이 강도와 강간, 방화를 계획했으며 도쿄부 시바구 타마치 정류장에서 모리나가 제과 공장을 방화하는 등 온갖 소요 사태가 났다"고 하여 조선인 학살을 간접 시인한 것으로 보인다. 마루야마 츠루키치 조선총독부 경무국장은 이 학살이 일본인들이 조선인을 보는 감정이 극에 달해서 충돌로 이어질 것을 염려했지만 조선인들의 폭동 탓에 일어났다고 발표했고 관동계엄사령부도 조선인에게 어떤 위해를 가하지 않도록 하는 경고문을 도쿄 부내에 배포했다.

본격적으로 조선 언론에 보도된 건 10월 19일자 <동아일보>가 처음이고 22~24일자에도 몇 번 보도됐으나 당국의 통제로 인해 복자 처리하는 등 학살 사건을 직접적으로 전하지 못했다. 반면 재일 중국인들의 학살은 상세히 다뤄졌으며 조선인 학살을 일삼은 자경단 검거 소식으로 때우기도 했다.

상황이 더 악화됨에 따라 경찰과 군부는 체제 안정을 위해 자경단의 학살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고 단속에 나섰지만 이때는 이미 수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휘말린 중국인, 일본인들이 무차별적으로 살해당한 뒤였다. 일본 정부 역시 최종적으로 내무성발 정보들이 유언비어임을 공식확인하고 조선인 학살을 막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생긴 피해자의 수를 축소 발표했으며 자경단 일부를 연행, 조사하기도 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거나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결국 학살 사건으로 인한 사법적 책임 또는 도의적 책임을 진 기구는 전혀 없었다. 단 한 사람, 일본 국적의 변호사 후세 다쓰지는 전후 한국 언론에 사과했는데 그는 이 밖에도 한국의 민족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2004년 대한민국 정부에게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고 일본변호사연합회에서도 2003년 관동대지진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 사죄하고 원인규명에 나서라고 권고했으나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이를 무시했다.

이런 식으로 사회적 불안 속에 외부인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이 유언비어에 의해 발화되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살인, 학살이 일어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근세의 마녀사냥과 현대까지 이어지는 집시 핍박이 같은 부류에 들며 특히 작은 사회에서 더 빈번하고 끔찍하게 일어난다. 조선에서는 비슷한 사례로 만보산 사건이 종종 언급된다. 여기선 가해자가 조선인들이고 피해자가 중국 화교들이었다는 차이가 있다.

과거 한국 교과서나 이원복 교수 교양만화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 2탄 등지에는 이 조선인 학살극의 피해 규모를 6천여 명으로 수록했다. 다만 이후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수치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었다. 자세한 것은 아래 학살 문단 참조.

4. 일본군의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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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일본인 사회주의자 학살

일본군일본제국 경찰의 학살 직접 참여 사례는 대부분 조선인 학살을 틈타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인권운동가, 반정부 행위자 등으로 경찰 및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요주의 대상으로 등록된 (주로 좌파 계열인) 운동가를 죽이고자 한 것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상은 집단 광기의 분위기에 편승해 학살에 참여한 것이 대다수다.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학살된 반면 사회주의자들이 당국으로부터 검거된 시점은 9월 3일과 4일 이후부터였으며 이전까지는 아무런 박해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히라사와 게이시치나 야마기시 사네지, 스즈키 나오가즈, 가와사키 진이치, 요시무라 고지, 가와이 요시토라 등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자발적으로 자경단에 가입해 조선인을 경계하는 업무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지진 당시 반전 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성향의 기독교인인 우치무라 간조조차 자경단과 함께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유언비어를 그대로 믿고는 몽둥이를 들고 집 주변에서 경계를 섰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지자 그를 믿고 따랐던 많은 조선인 유학생들이 실망하거나 분노하는 일도 있었다. 또한 유명한 사회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도 9월 16일 육군 헌병 대위인 아마카스 마사히코에게 체포되어 도쿄헌병대 구내에서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자경단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여동생의 집에 놀러갈 만큼 자유롭게 지냈다. 게다가 일본 민중들은 사회주의자가 범죄를 일으킨다는 일본 정부가 퍼뜨린 유언비어를 믿지 않고 정부를 비판했으며 군인이나 경찰에 검거되거나 피살당한 사회주의자들을 동정했다. 아울러 피살되거나 검거된 사회주의자들의 가족과 친지들은 정부를 상대로 진상 조사와 책임 추궁을 강하게 요구하고 항의했다.

그 결과 오스기를 죽인 아마카스는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죽임을 당한 오스기와 이토 노에, 다치바나 무네카즈 등의 유골은 유족들에게 모두 인도되었다.[출처:] 이 중 무정부주의자로 유명한 인사였던 오스기 사카에와 이토 노에는 헌병대에 의해서 일가가 참살되고 우물에 던져졌다(아마카스 사건). 이 사건의 책임자는 아마카스 대위이며 이 사건으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뒤 만주국으로 건너가 여러 정치공작과 선전활동(주로 영화 제작)에 가담했다. 영화 마지막 황제에서 사카모토 류이치가 열연한 인물이 바로 이 사람.

또한 이 사건의 재판 과정에서 일본 군국주의의 알아주는 문제 중 하나인 천황의 통수권 문제가 두드러지면서 법리적인 근거를 얻게 된다. 바로 천황의 대리인으로서 임무에 나선 군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천황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같다는 논리로 변론한 것. 이전에도 이미 군 통수권 행사에서 군의 독주는 어느 정도 확장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제 일개 대위조차도 천황의 권위를 등에 업고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생긴 셈이었다.[21]

6. 학살의 규모

학살된 조선인의 수가 자료에 따라 편차가 심하여 정확한 피해자의 수에 대해 논란이 제기되었다.

초기부터 수천 명 단위 학살 소문이 돌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독립신문 1923년 12월 5일자의 자세한 보고서를 통해 6,661명 희생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은 희생자 중 상당수가 지진으로 인한 희생자의 착오라고 주장하면서 실 희생자는 조선인 약 300명 미만이라고 사태 수습 이후 사법성 명의로 공식 발표했다.

그동안 이의 신빙성은 매우 낮다고 평가되었는데 적어도 일본 정부가 사실을 인정하고 벌인 각종 재판에서 확인된 희생자 숫자만 일본 정부의 공식 발표를 가볍게 뛰어넘기(약 900명) 때문이었다. 일본 학자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는 저서 <압박과 학살(圧迫と虐殺, 1923)>에서 2,534여 명이 희생되었다고 밝혔다.[22]

그런데 2013년 6월, 1952년에 한국 정부가 피해 청구 목적으로 조사하여 작성한 희생자 명단이 발굴되었었는데 이 명단에는 당초 일본 정부가 주장한 300명 미만에 근접한 피해자 318명이 기록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인원은 남한의 일부 사람을 대상으로 6.25 전쟁 중 짧은 기간 동안 조사한 결과라서 실제보다 숫자가 더 적을 것이다. 심지어 1923년 당시 일본에 있던 조선인은 남한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까지의 정설보다 더 많은 조선인들이 희생되었다는 독일 외무부 자료가 발굴되었으나# 독립운동가들이 학살 4개월 후에 작성된 최종 보고서 형태인데 당시 일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완전히 거부해서 조사를 못 하게 방해했다.

2013년 11월 24일, 명부에 실린 관동대지진 피살자 290명, 3.1 운동 때 피살자 명부에 일부 포함된 52명 등 342명 중 피살자는 198명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또한 살해된 사람들이 '쇠갈퀴'나 '곡괭이'로 살해되었으며 육군 헌병이 개입한 경우까지 드러나기도 했다. #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오사카국제평화센터(피스 오사카)에도 관련 게시물이 있었으나 2011년 하시모토 도루가 시장으로 취임한 후 2014년 9월 들어 보수공사를 단행하여 난징 대학살, 조선인 강제연행 관련 자료와 같이 사라져 오사카 대공습 등을 위주로 전시물이 개편됐다.

2023년 8월 24일자 조선일보 보도에서 사건 3개월 후 조선총독부의 자체조사가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총독부 도쿄 출장원이 자체 조사한 것이며 이 문서에서는 희생자가 813명으로 집계되었다. 문서에 "가나가와현은 추가 조사 중"이라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도 희생자 규모를 그 이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7. 추모 사업

관동대지진 1주기를 앞둔 1924년 8월 13일 교포였던 옥순철이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행사를 열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으며 다른 한편 8월 2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재일본청우간담회의 주도로 북청청년회관에서 첫 추모식을 열었다. 9월 1일 들어 인천노동총동맹회에서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을 했고 <동아일보>도 전단식으로 학살당한 동포를 기리는 추도문을 냈으며 이 선전문은 경성 부내에 배포됐다. 고흥 등지에선 유학생 송기일 등처럼 희생된 개인을 위한 추도식이 열렸으나 식민당국의 방해로 원만하게 진행되지 못했으며 1925년 이후에는 잊혀졌다.

반면 일본에선 기독교청년회관에서 매년 추모식이 진행되었으며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총력전 체제로 돌입하면서 조선인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해짐에 따라 1939년부터는 회유책의 일환으로 관 주도로 치러졌다. 1945년 8.15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23주기를 맞이하여 재일본조선인연맹과 반일운동자구원회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일본 관동진재 피학살자 추도회'를 열었다. 1970년대 이후 역대 도쿄도지사들이 '간토대지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때마다 추도문을 보냈지만 2017년부터 고이케 유리코 지사가 추도문을 일절 보내지 않기 시작했다. 2023년 2월 21일 정례 도의회에서 일본공산당 소속 의원이 1972년 발간된 <도쿄백년사>에 언급된 '조선인 학살은 지진에 대한 재해와는 다른 인재'를 근거로 고이케 지사의 인식을 물었으나 고이케 측은 "다양한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적혀 있는 건 알고 있으나, 무엇이 명백한 사실인지는 역사가가 밝혀야 할 일"이라고 답변을 회피했다.

한국의 역대 정부들도 이 사건에 대해 규탄하는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고 19대 국회 시절인 2014년에 유기홍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여야 의원 103명이 '관동대지진 조선인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한 후 외교통일위원회에 올라갔다가 안전행정위원회로 반송되어 2015년 2월에 상정됐고 11월 제4차 법안심사소위까지 상정된 후 별 진전이 없던 상태로 2016년 회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2023년 추모100주기를 맞아 100명의 여야 국회의원에 의해 진상규명 특별법이 다시 한번 공동 발의되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국회에 의해 법안은 또다시 자동 폐기의 위기에 직면해있다. #1 #2 일본 정부가 자국 내에서 발생한 조선인 학살에 대해 역사를 감추는 모습을 일관되게 보이면서 일본시민사회에서도 진상규명에 나서라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이에 반해 대한민국은 국회 정부 시민할 것 없이 수천명의 제 민족이 방화 강도 살인 강간의 누명을 쓰고 외지에서 처참히 학살당한 이 사건에 대해 항의는 커녕 진상규명조차 지금껏 안하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2023년 9월 1일 일본 도쿄 치요다구 국제포럼에서 한국대사관과 재외동포청 후원 및 대한민국민단 주체로 '제100주년 관동대진재 한국인 순난자 추념식'이 개최됐다. 한일의원연맹 소속 일본 의원 몇몇, 한국 국회의원, 일본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 등 정치인들이 처음으로 참석했다. 조선인 희생자의 위령비가 세워진 도쿄의 한 공원에서도 일본 시민단체 등이 중심이 된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 실행위원회가 개최한 위령 행사가 열렸다. 희생자 유족들은 처음으로 일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 정부의 사죄를 촉구했다. #1 #2 #3 #4 #5 #6 #7 #8

8. 학계 연구

영국 외교문서에 관련 내용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8.1. 연구자

관동대학살에 대한 연구자로 다음과 같은 학자들이 있다.

9. 저서

오래된 일도 아닌데
깡그리 잊어버린
일이 있다.
먼곳의 일도 아닌데
아득히 제쳐 놓은
일이 있다.
남의 일도 아닌데
누구도 생각않는
일이 있다.
그러나 언제인가 그런 일은
새록새록 숨어서 숨을 쉬는 법이다.
때만되면 억세게 튕겨져나와
만갈래 비사를 외치게 한다.
의리가 없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머리가 나빠서 까먹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이 좋아서 없는 걸로
해두었던 것은 아니다.
새록 새록 그것은 우리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잊고 싶어도, 까먹고 싶어도
아예 없었던 걸로 해두고 싶어도
그것은 이제 너무도 억세어서
고스란히 잠재울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분명히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 않았다.
간토 대지진의 조선인 학살을 다룬 한국 희곡『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3-4p 중 발췌 (작가 김의경)

관동대학살에 대한 전문적이면서도 접근이 어렵지 않은 서적으로 강덕상의 서적이 존재한다.#

가토 나오키가 쓴 "구월, 도쿄의 거리에서 - 1923년 간토대지진 대량학살의 잔향"도 존재한다.#

10. 기타

  • 조선인 학살 사건을 다룬 기록영화를 만든 이는 재일교포 감독 오충공이 유명한데 그는 1983년 <감춰진 손톱자국>과 1986년 <불하된 조선인> 등 2편을 만들었으며 2012년부터 3편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참고 한국에서는 역사저널 그날을 통해서 일부 내용이 공개되었는데, 당시 생존자와 자경단에 참여했던 이들의 증언을 듣고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하는 출연자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결국 류근 시인이 나서서 "잠깐 쉬었다 합시다."라고 하면서 촬영이 잠시 종료되었고, 진행자 최원정 아나운서는 “프로그램 처음으로 녹화가 중단됐다. 감정이 주체가 안 된다. 우리는 왜 이런 걸 안 배운 거냐”고 토로하듯 말했을 정도.# 학살100주기를 맞이한 2023년 이 사건을 다룬 한국 최초의 기록영화 <1923 간토대학살> #,이 제작되어 2024년 5월 한국과 일본 국회 상영 예정.# 초청 게스트는 영화 <로스트 메모리즈>를 제작한 김태영 감독과 역사학자이자 프로듀서인 이진희 교수.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새 공문서 "살기품은 군중, 40여명 모조리 살해" / YTN
* 일본에는 이 일조차 배타적 우익들 중심으로 심심찮게 대학살 따윈 없었다거나 실체가 모호하다는 식으로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어 왔는데 특히 일본의 우경화가 심해진 2010년대 이후부턴 정치권에서도 이런 기류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전엔 우익계 도지사조차 조선인 학살 관련 추도문을 보내던 관행을 2017년부턴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가 보내지 않고 있으며 2023년 100주기에도 마쓰노 히로카즈 내각관방장관이 정부 내에서 사실 관계를 파악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며 학살을 부정하는 행태를 보였다.# 허나 웃긴 건 해당 발언으로부터 몇 달 전 이미 요미우리 신문이 정부 자료를 인용해 관동대학살을 되새기는 보도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마쓰노 관방장관은 해당 기록은 전문가가 작성한 것일뿐 정부 공식 견해는 아니라는 궤변을 떠들었는데, 애초에 정부 조사에 한정한다면이라는 전제부터가 웃기지만 정작 항목에도 있듯 당시 일제 역시 정부 차원에서 조사를 해 기록을 남겼다.#1 #2 게다가 후술되어있듯 이방자 여사도 관련 수기를 남긴 바 있는데, 당대를 산 일본 황족 말도 부정하면서 그저 자학사관이라고 몰아 사건 자체를 은폐하고 싶은건지 아님 규모가 수천명 단위까진 아닐지도 몰라서 반한 감정이 겹쳐 좀생이 심보로 추도문도 보내기 싫다는건지 뭘 말하고 싶은건지 도통 모를 일이다.
  • 사이타마현 서부 지역에서 징병과 재향군인 관리를 담당한 육군 지방기관인 구마가야연대구사령부가 작성한 기록이 발견되었는데, 재향군인회 구마가야지부장은 조선인 관련 헛소문에 빠진 사람들을 "사리를 모르는 몽매한 무리"라고 비판했다. 그간 학살 중심 세력으로 알려졌던 재향군인의 조선인 인식이 지역에 따라 달랐다는 새로운 사실이 나왔다.#

11. 대중매체에서

현재까지 묘사된 관동대학살의 고증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데 일본군의 주도성이 묘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한국과 일본을 가리지 않는데 학살을 민중이 주도했으며 정부는 선동과 묵인만 한 것이란 고증오류가 지속되고 있다.
  •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에서는 학살과 동시에 조선인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 오가타 지로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 손연자 작가의 동화 《마사코의 질문》에도 이 대학살이 표현되었다.[23] 소설 속 단편인 '꽃을 먹는 아이들’의 주인공인 일본인 겐지가 조선인 여자아이에게 관심이 있어 말을 붙이려고 따라가던 중 이 지진이 났는데 그 사이에 폭도들이 몰려들어 겐지는 조선인으로 오인받아 살해당한다. 작중에서 겐지는 초등학생밖에 안 되었다. 겐지를 살해한 사람들은 겐지에게 역대 천황의 이름을 외워보라한 후 말더듬이 겐지가 더듬거리며 천황의 이름을 못 외우자 즉시 살해해 버린다.
  • 아리랑》에선 한국인 학생들이 일하고 있는 공장 사장이 "우리 가족을 건드리느냐!"며 폭도들의 난입을 막는다.
  • 영친왕이방자의 일대기를 다룬 단편 일본 드라마인 《무지개를 이은 왕비(2006)》에서는 조선인 학살 소식을 듣고 영친왕이 뛰쳐 나가려다 아랫사람들에게 제지를 당한 뒤 통곡하는 장면이 나온다. 조선인 학살 사건을 조금이나마 다룬 몇 안 되는 일본 작품이라서 잠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뛰어나가려고 했던 것은 극적 창작이지만 이방자 여사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와 큰 차이가 없는 묘사이며 조선인인 영친왕의 안전조차 우려되던 상황이었다.[24]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이 지진 후 학살과 대혼란이 이어진 일주일 내내 안그래도 힘든 식민지인 신세인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잔악한 처사에 분통해하며 눈물로 보냈고 자신 역시 일본인이다 보니 가해자 느낌이 들어 미안함에 가슴이 찢어졌다고 한다.
  • 한국에서도 비슷한 드라마가 있는데, 배우 서인석과 이휘향 주연으로 나온 1990년 KBS1 광복절 특집드라마 《왕조의 세월》에서도 영친왕(서인석 분)이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죽은 조선인들의 원혼에게 자신들을 구해지 않았냐는 원망을 듣는 상황의 악몽을 꾸다 깨어나는 장면으로 관동대지진의 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표현했다.
  • 재일교포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가 쓴 《연애소설》의 단편 〈꽃〉에서는 등장인물 도리고에 씨의 조부가 대지진 직후 이웃에 사는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리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말리러 나갔다가 사회주의자로 몰려 고문을 당한 끝에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후손인 도리고에 씨는 '납득할 수 없는 것'과 싸우기 위한 직업을 경찰에서 변호사로 바꾸었다.
  • 할아버지와 나의 사건수첩#이라는 추리만화에는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을 다룬 에피소드에서 관동대지진과 학살이 나온다. 조선인 여인이 우물에 빠져죽은 사건이 있었고 아직 소년이었던 할아버지는 범인을 추리해 사건을 해결한다. 근데 조선인이 우물에 빠져죽어 우물을 못 쓰게 되었다는 할아버지의 발언이 왜곡되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뿌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학살이 시작된다. 어린 할아버지는 이를 말리고 싶었지만 무기력했고 소문의 원형이 되는 발언이 자기 입에서 시작되었다는 것과 이를 밝히지 못하고 지켜만 봐야 했던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었다. 이를 들은 주인공은 할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 리비아썬에서는 [25]에 의해 사카노우에 타케루가 이 사건을 환상으로 겪게 된다.[26]
  • 한국의 그래픽 디자이너 김충원이 90년대 초 출간했던 어린이 교육서적인 퀴즈탐험 한국의 역사 3권에 관동대지진 문제가 나왔는데 이때의 삽화가 어린이 삽화 치곤 제법 소름끼치게 그려졌다. 폐허가 된 거리에 쓰러진 조선인을 죽창으로 찔러 죽이려는 일본인의 모습이 그려졌는데 아래에서 위를 올려보는 구도로 그려지고 제법 세밀하게 그려져서 어른이 봐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 일본의 소설 제노사이드에서는 일본인들이 저지른 또 하나의 끔찍한 '제노사이드' 라고 강력하게 비판하며 이러한 제노사이드를 옹호하는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주인공의 고등학생 시절 회상 장면과 함께 나온다.
  • 프롤레타리아 작가 코바야시 타키지의 장편소설 《전형기 사람들》[27]에 관동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한 이야기가 잠시 나온다. 홋카이도 대학생들의 군사교련 반대 운동을 다룬 대목에서 정기 발화연습[28] 도중 육군 예비소령인 교관이 '불령한 조선인들이 시가지에 불을 지르고 폭행을 저지르고 있으니 진압하라'는 취지의 지령을 내리자 학생들은 그런 모멸적인 지령에 움직이는 것은 수치라며 집단으로 반발하고 이것이 후에 군사교련 반대 운동으로 이어지는데 작중 학생들이 교관에게 반발해 대오를 흐트리는 장면에서 "모두에게는 관동대지진 때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려 조선인들을 학살했던 기억이 또렷했다."고 직접적으로 나와 있다. 비록 짧은 언급이기는 하지만 이 작품이 1930년대에 쓰여진[29] 소설임을 감안하면 당시로서는 이렇게 작품 내에서 조선인 학살을 직접적으로 거론한 것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30]
  • 일본침몰 만화판에서는 관동대지진을 언급하면서 제2차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고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듯이 학살의 대상이 조선인에서 불량해 보이는 청년들로 바뀌어 같은 일이 일어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 2017년 영화 박열에서도 관동대지진과 학살이 묘사된다.
  • 2019년 4월 21일 방영된 KBS1 역사저널 그날에서 학살 정황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 2019년 6월 16일 방영된 NHK 대하드라마 이다텐 ~도쿄 올림픽 이야기~ 1부 23화분에서 대지진 이후 동료를 찾으러 돌아다니던 주인공이 무장한 자경단에게 잡혔는 데 하필 주인공은 강한 쿠마모토 사투리를 구사하기에 자경단은 주인공을 일본인이 아닌 걸로 간주하고 들고 있는 무기들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때마침 주인공을 아는 사람이 이 사람은 딸의 선생[31]이라고 말하면서 겨우 자경단으로부터 구출한 다음 주인공에게 헛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는 이완용진짜로 우물에 독을 풀어 버린다. 정확히는 원 역사에서 간토대지진이 언제 터지는지 알고 있던 조지원이 지진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이완용을 주일 대사로 보내는데 이때 술병에 콜레라 종균을 넣어서 위장하는 식으로 세관을 속인다. 그리고 이 균을 배양해 그 창고를 하천변에 두고, 지진이 날 때 자연스럽게 도쿄의 식수원인 스미다 강에 콜레라 균이 퍼지도록 유도한다. 이 작전은 그대로 적중했고, 도쿄인들은 콜레라균에 오염된 식수를 마시고 집단 감염을 일으켜 원 역사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게 된다.[32]
  • 조선, 혁명의 시대에서는 역사의 변화로 한국이 독립한 상태라 중국인들이 외국인 노동자들로 진출했고 결국 중국인 대학살이 벌어지고 만다. 물론 일본에 거주하던 한국인도 40명 가량 사망한다. 이 사건으로 여운형이 일본인 노동자들이 중국인 노동자를 학살하는 것을 보고 공산주의가 주장하는 국제주의가 허상임을 깨닫고 사민주의로 노선을 정하게 된다.
  • 네이버 웹툰 고래별에서는 남자 주인공이자 친일파 거물의 아들인 강의현이 도쿄에 유학하다가 관동대지진으로 하숙집을 잃고 아버지의 지인인 일본인 사업가의 집으로 피신했는데 이후 대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경악하여 귀국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된다.
  • 근대 일본의 소설가 나카지마 아츠시의 소설 <순사가 있는 풍경>에서 간접적으로 암시된다. 관동대학살에 대해 최소한의 암시라도 존재하는 굉장히 드문 소설로, 이로 인해 나카지마 아츠시의 소설 중 일본에서 가장 취급받지 못하고 있다.
  • 2022년작 Apple TV+ 드라마 파친코에서는 7화에서 관동대지진과 함께 묘사되는데 집에 숨어든 조선인을 발견해 그 집과 함께 불질러버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 2023년 모리 타츠야 감독이 연출한 영화 '후쿠다촌 사건'이 9월 1일 일본에서 개봉했다.# 관동대학살 도중 벌어진 실화 후쿠다촌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 2023년 9월 1일 만화가 오카다 사쿠모가 관동대학살을 다룬 단편만화 '추등(追燈)'을 발표했다.#

12. 참고/관련 자료



[1]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関東大震災朝鮮人虐殺事件)이라고 부른다.[2] 적의 기만작전이나 오정보등을 고료하여, 정찰을 통한 정보의 정확성을 따지고 행동해야하는 군대와, 신고가 오면 일단 출동해야하는 경찰이라는 조직의 차이라는 요소도 있다.[3] 3일자의 경찰의 "망동이 있었다"는 입장과 달리 내각은 "망동이 있다는 소문"으로 되어 있어서, 조선인이 원인제공이라는 부분이 애매모호하게 되어있다.[4] 참고로 사법성에서 공표한 "조선인의 범죄"의 약 80%는 이름/소재지도 불명한 사건이고, 나머지 20%의 조선인이 확실한 범죄도, 절도/횡령 등의 경범죄뿐이다.[5] 이 문구가 가장 유명하여 드립으로도 흔하게 쓰인다. 원본처럼 일종의 헛소문이 퍼지는 현상에는 사용하지 않고 무언가 부정적인 요소가 바이러스처럼 퍼졌고 그 근원이 있을 때 "A가 B에 독을 풀었다!"고 말하는 방식.[6] 경시청에 보고된 기록에 의하면 최초등장은 9월 2일 14시경,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건 18시경에 우에노 공원의 우물의 물이 변색하면서부터다.[7] 이와 비슷한 케이스로 메이지 10년(1877년)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우물물을 소독하려고 우물에 석회를 투입하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그걸 본 사람들이 "콜레라가 퍼진 건 경찰과 의사가 우물에 독을 풀었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해서 의사를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다. 도쿄처럼 수도가 보급되어 있는 도시에서 지진으로 우물의 중요성이 급부상하면서 우물을 소독하려고 석회를 넣고 있는 장면을 관련 지식이 없는 사람이 목격했거나 우물물을 소독 없이 마시면 안 된다는 훈계의 이유로 우물물은 독이 들어있다가 와전되었거나 지진으로 인한 영향으로 변색된 물의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유언비어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다.[8] 사실 불과 2년 전인 1921년 조선인 이판능연쇄살인을 저질렀지만 조선인들이 반발하여 비교적 가벼운 형벌을 언도했기 때문에 그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이들은 더욱 증오감을 가졌을 것이다.[9] 당시 건물들은 목재가 대부분이라 화재에 특히 취약했다.[10] 한국어에 없는 어두 유성음이나 이따금 정확하게 발음되지 않는 장음, 발음(撥音) 등으로 이루어졌다.[11] 또는 10엔.[12] 고대 구약성서에서 언급된 발음이 이상한 외부인(및 내부인까지)을 살해하는 악습 십볼렛이 시공을 초월하여 일본에서 벌어진 셈.[13] 특히 도호쿠벤류큐어.[14] 물론 콘, 콘노 등으로 읽지만 이미 눈이 돌아간 자경단에겐 통하지 않았다.[15] 도호쿠 사람들의 선조인 에미시(아이누)가 야마토(일본 본토)의 침략을 당한 일, 보신 전쟁 당시 아이즈 번 사람들이 신정부와 싸우다 대거 죽어나간 일을 생각하면 두 시기의 비극적인 역사가 관동대학살로 반복된 셈이다. 21세기에도 도호쿠(특히 후쿠시마현) 주민들이 방사능 문제와 관련된 일본 정부의 잘못을 숨기기 위한 희생양으로 전락한 사례가 있으니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도호쿠 주민들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형태로 실현된 셈이다.[16] 조직원 및 상납관계 등이 있었다.[17] 아키야마 요시후루는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인 조선군 사령관으로 1년간 재직한 경력도 있다.[18] 기타 잇키는 단순히 파시스트라고만 하기엔 너무 복잡한 인물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항목 참조. 기타 잇키는 2.26 사건에서 민간인으로 동참했다가 쿠데타 진압 후 황도파 장교 20명과 함께 처형되었다.[19] 서울로 치면 한강 격.[출처:] 학살의 기억. 관동대지진/ 강덕상 저/김동수, 박수철 역/ 역사비평사[21] 재판 자체에서는 당장 판결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으나 이후 종범들을 대상으로 열린 별도 재판에서 이 논리가 제기되면서 병사들은 완전 무죄 방면되었고 장교들의 지휘책임 역시 묵살되었다. 이후 이 상황을 신병 정신교육 시간에 강조하면서 병사는 무조건 천황의 대리인 장교의 명령에 천황의 명을 받들듯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교육했다. 이는 훗날 2.26 사건 등의 군사반란 상황에서조차 장교의 명령에는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논리로 비화되었다.[22] 요시노 사쿠조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이론적 기반을 다진 진보적 지식인으로 조선의 독립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23] 국어 읽기 6학년 2학기 교과서(2002~2008학년도까진 1학기)에 수록될 정도로 인지도가 높은 단편 '방구 아저씨'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이다.[24] 또 극중에는 저택에 갇혀 있었던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는 당시 내외는 궁내성 근처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하고 있었다. 황족까지 텐트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재난 당시는 무시무시했다.[25] 부시를 닮았다.[26] 물론 조선인은 아니고 네눈박이라서 괴롭힘을 받다가 조선인에게 구해지는 일본인으로 체험하게 된다.[27] 작가가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되어 고문받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미완으로 남아 있다.[28] 사격훈련의 일종으로, 실탄 없이 화약만 넣은 상태로 실시하는 훈련이다.[29] 현재 남아 있는 부분은 1931년에서 1932년까지 쓰여진 분량이다.[30] 한편 코바야시는 작품 곳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에 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전술된 《전형기 사람들》은 작중에 오타루의 조선인 노동자들이 직접 등장하는 부분이 있고 대표작인 《게 가공선》에도 조선인 노동자들이 일본의 하층 노동자들보다도 더 비참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서사가 잠시 나온다.[31] 아이러니한 점은 이 말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딸이 맨 발로 뛴 사진 때문에 장가를 못 간다고 날뛰면서 주인공을 선생직에서 해임하라고 했었다는 점이다.[32] 그러나 이는 새 발의 피다. 이후 한일전쟁이 발발하자 국군은 기아 작전으로 혼슈를 봉쇄하고 더티 밤, 세균 병기, 독가스 등 ABC 무기를 총동원해 일본 본토에서만 5,000~6,000만명을 학살했다.[33] 리포트2[34] 리포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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