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0 00:05:21

타마노이 토막 살인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경위3. 조사 과정에서의 난항4. 사건의 원인5. 출처

1. 개요

玉の井バラバラ殺人事件

1932년 도쿄 미나미카츠시카군 테라시마쵸(現 메구로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일본 범죄 마니아들에게는 나름대로 유명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끔찍한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에서는 일본 최초의 토막살인 사건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건으로 인해 토막 살인(バラバラ殺人)이라는 단어가 정착되었을 뿐이지, 일본 최초의 토막 살인 사건은 아니다.[1]

2. 경위

타마노이는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번창한 사창가였다.

타마노이 근처에 동물의 시체 등을 버리는 매우 더러운 하수구[2]가 있는데 이곳에서 어느 유녀가 신발을 떨어뜨려 부모가 막대기로 꾹꾹 눌러보니 피 같은 것이 바닥에 주루룩 흘러내렸다고 한다.

이를 의심한 유녀에게 오전 9시경 신고를 받아 근처에서 순찰 중이던 순경이 확인하자 현장에서 두 개의 봉투[3]를 발견했다.

다른 순경과 함께 봉투를 열어젖히자 안에는 토막난 사람의 신체 부위들이 들어 있었는데 그 중 한개는 목, 손이 유실된 흉부 윗부분이었고 나머지 봉투에는 허리 부위에서 잘린 다리가 들어 있었으며 나머지 부위는 타 장소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조사 결과 모두 같은 인물의 것이며 이미 사후 1개월이 지난 상태여서 부패가 심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3. 조사 과정에서의 난항

경찰은 바로 조사를 실시했지만 사후 1개월이 지난 시신의 신원을 파악하기는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나마 찾아낸 신체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머리가 산 모양으로 돌출되어 있었다.

2. 이빨 한 군데가 덧니였다.

3. 가벼운 늑막염 치료 흔적이 있다.

하지만 수사는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었고 사실상 수사 종료 사태로 남아 영구 미제사건이 되어 버릴 뻔했다.

애초에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연관 조사고 뭐고 다 때려쳐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수사 와중에 자칭 명탐정들이 나타나 범인을 잡아 주겠다며 난리법석을 피웠는데 개중에는 당시 사건에 관심을 가지던 에도가와 란포가 범인이라는 둥, 서커스단의 소행이라는 둥 근거 없는 소리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사건에 책임을 느낀 우라카와 경사는 범인을 잡게 해 달라고 매일 신사에 참배를 다녔을 정도라고 하며 그런 우라카와 경사의 수사 재요청으로 다시 수사가 진행되었다.

이때부터 언론들의 보도가 밀물처럼 몰려들기 시작한다.[4] 따라서 사건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커져 갔다.

마침내 사건의 실마리가 잡혔다. 타 경찰서의 순경이 예전에 마주한 적 있는 남성 노숙자와 신체적 특징이 유사했는데 순경은 그 노숙자의 이름과 본적지를 기록해 파출소에 제출했다.

노숙인 남성 T를 조사하자 혼고구 유시마 신하나쵸의 여성 H와 동거 중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찰측은 H의 집에 방문했다. H는 현재 T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금전적 문제로 크게 다툰 사실이 밝혀진 후 범행을 자백했다.[5]

4. 사건의 원인

사건의 원인도 황당무계한데 범인 H(39세)가 T(27세)의 시신을 토막내 유기한 이유는 다름아닌 오해 때문이었다.

H는 아사쿠사 공원에서 아이를 데리고 살던 노숙자 T를 아키타현 대지주의 아들이라는 말을 믿고 자신의 여동생과 이어지게 만들기 위해 살갑게 대해 주었던 것지만 실제로 T는 그저 빈털터리일 뿐이었고 그대로 가난한 범인 집에 눌러앉아 버렸는데 이를 알게 되어 집에서 쫓아내려고 하자 T는 일가의 약점[6]을 구실로 잡아 경찰에 신고하겠다며 협박했다.

이에 H와 동생은 살인을 결심하고 2월 11일 스패너로 T를 살해했다.[7]

형제[8] 둘이 이틀간 시신을 토막낸 뒤 택시를 타고 타마노이에 유기했다고 진술했는데 손발은 도쿄제국대학 인쇄소 직공이던 동생을 통해 숨겼다고 한다.

초반에 H는 동생을 감싸기 위해 단독범죄라고 주장했으며 T의 사체를 토막 낸 심리를 "이 발로 어머니를 찼다, 이 손으로 여동생을 때리고, 동생을 때렸다. 이래도 괜찮아. 이래도 싸, 라고 이를 갈며 했다"고 진술했다.

1934년 8월 6일 도쿄 지방 법원은 H에게 징역 15년을, 남동생에게 살인죄로 징역 8년, 여동생에게 징역 6개월을 선고했는데 형제는 항소했고 H는 징역 12년, 남동생은 징역 6년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5. 출처

  • 明治・大正・昭和・平成 事件・犯罪大事典(메이지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사건 범죄 대사전)


[1] 이 용어는 아사히신문이 가장 처음 사용했다.[2] 오하구로도부(お歯黒どぶ, "どぶ"는 '도랑', '시궁창'이라는 뜻으로, 곧 오하구로도부는 오하구로를 한 것처럼 시꺼먼 시궁창이라는 의미다)라고 불린 곳이다.[3] 봉투라기보단 꾸러미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과거판 쇼핑백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4] 시신 발견 이틀 전에 혈맹단의 단 타쿠마 암살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에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5] 자백에 따라 피해자의 손발은 도쿄제국대학 인쇄소 공실의 마루 밑에서, 몸통의 중앙부는 오오지의 육군 화약고의 시궁창에서 발견되었다.[6] H는 춘화를 그리며 생계를 꾸려나갔다.[7] 범인의 증언에 따르면 여동생이 죽은 아기(당시 여동생은 아기를 잃은 상황이었다.)의 위패에 합장하는데 T가 "비꼬는 것 같다"며 폭행했다고 한다. 말리던 H와 H의 남동생이 스패너로 때려서 T를 살해했다.[8] H의 동생은 여동생, 남동생 총 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