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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다 초등학교 무차별 살상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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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의 전개3. 범인4. 판결5. 사건 이후6. 관련 문서

1. 개요

附属池田小事件
파일:external/bf9f0bd729f2afb902309842cd5f7466f764db816689907858c0f923524c1509.jpg 파일:external/s33.postimg.org/mqdefault.jpg
사건 당시 용의자가 끌고 온 차량과 구급차에 실려가는 피해자들.

2001년 6월 8일 일본 오사카부 이케다시오사카교육대학 부설 이케다 초등학교에 흉기를 든 괴한이 침입하여 초등학생 8명이 사망하고 15명[1]이 부상당한 사건.

2. 사건의 전개

2001년 6월 8일 오전 10시 15분경 2교시 수업이 끝나려 할 때쯤 용의자인 타쿠마 마모루(宅間守, 1963년생. 당시 38세)가 교정을 지나 흉기를 들고 학교 동쪽 끝에 있는 2학년 A반으로 침입했다. 처음에는 급식을 나눠주는 직원으로 여겨졌으나 범인의 손에 들린 흉기를 목격한 교사가 밖으로 도망치라고 소리쳤고 학생들은 비명을 지르며 달려나갔다. 범인은 달려가다 넘어진 아이를 흉기로 찔러 A반에서 4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어서 2학년 교실 B반으로 간 범인은 무방비한 학생들을 차례대로 찔러 8명이 상해를 입었고 그 중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C반으로 발걸음을 옮긴 범인은 교사가 없는 쉬는 시간을 틈타 그 반의 아이들까지 흉기로 무참히 난자했는데 해당 반의 교사들은 의자 등을 던지며 범인에게 저항했으나 한 교사는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범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서쪽 끝에 있는 1학년 교실로 침입하였고 마침 음악실 수업을 끝내고 돌아오던 학생들이 근처에 다다르자 "들어오면 안 돼! 도망쳐!"라는 교사의 목소리에 패닉 상태로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목격자인 남자 아이는 교실에 돌아오니 여자 아이가 "아파, 아파"를 연발하며 쓰러져 울고 있었으며 교실 바닥에 가 흥건했다고 증언했다.

범인에게 등을 찔린 교사 한 사람은 중상을 입은 와중에도 흉기를 든 범인의 오른손을 붙잡았고 이 과정에서 다시 얼굴을 찔렸으나 부교장의 도움을 받아 격투 끝에 범인을 제압했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겨우 10분 남짓했다.

범인인 타쿠마 마모루는 "아, 힘들어라!(あーしんど!)"라는 단 한마디만을 내뱉었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총 8명의 학생이 사망하고 학생 13명, 교사 2명이 부상을 입었다.

3. 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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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혈사태의 결정타가 된 것은 범인인 타쿠마의 성장 과정이었는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자면 1963년생인 그를 임신했을 때 모친은 낙태를 희망했으나 시기를 놓쳐 낳게 되자 자기 아들임에도 증오 발언을 지속적으로 쏟아냈고 출생 후엔 매우 어렸을 적부터 부친에게 폭언·구타를 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타쿠마도 가정폭력의 희생양이라고 볼 수 있다.[2]

부친은 법조계·경찰 일을 해 왔고 이를 자랑스러워하였으나 도가 지나쳐 학대를 비롯한 똥군기를 가족들에게 부렸다. 황당하게도 부친은 타쿠마의 범죄 행각이 문제가 되자 1989년에 타쿠마의 사유물을 멋대로 팔아 돈을 주고 의절하는 추태를 보였다. 사건 이후 충격이 컸는지 알코올 중독으로 입원했지만 이미 늦었다.

사춘기가 되고 나서는 자신보다 약한 동급생에게는 조금이라도 온화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거의 '노예'로 취급하고 여학생이 지나가면 침을 갈기는 등 막장 일로를 걸었는데 막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드럼통에 넣어 불태우거나 아무것도 아닌 일로 모친을 폭행하였으며 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교사를 때려 강제 퇴학당하기도 했다.

이후 파일럿이 되고 싶다며 자위대에 입대했으나 범죄를 저질러 불명예 제대를 당했다. 1990년경 신분을 의사라고 속여 18세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지만 거짓이 탄로나 이혼당하고 또 다시 초등학교 때 은사였던 19세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으나 1994년에 이혼했다. 그의 전과 전력은 다음과 같다.
  • 1984년 맨션 관리 회사 직원이었을 때 해당 맨션에 거주하는 여성의 집으로 침입하여 강간.[3]
  • 1993년 30세경 버스 운전사였을 때 승객 여성에게 '향수 냄새가 지독하다'며 침을 뱉으며 시비를 걸고 동료들에게 싸움을 벌여서 이타미시 교통국에서 잘리고 징역 처분.
  • 차량 라이트가 눈이 부시다며 상대방의 차를 파괴.
  • 자신의 친형이 아끼는 자동차를 각목으로 부숴 버렸다.
  • 검문을 제치고 차량으로 고속도로를 역주행했다.
  • 결혼한 여성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혼을 요구한 부인에게 1년 이상 스토커 행위를 저질렀다.
  • 마찬가지로 사귀던 여성에게도 폭력을 휘둘렀으며 다른 전 부인에게도 폭력을 휘둘러 체포당했다.
  • 1998년 몇 년 전에 양자를 맺었다가 파기당한 여성 집에 침입하여 체포당했다.
  • 1999년 이타미시의 한 초등학교에서 기능원으로 일했을 때 교사 4명의 음료에 정신안정제를 주입했다.
  • 2000년 택시 운전수를 하던 때 오사카 시내의 호텔 벨보이에게 시비를 걸고 폭행하여 체포당했다.

이 외에 총 15건의 전과를 보유하였고 처벌을 피하기 위해 정신병인 척 입원하기도 하였는데 입원 중 병원 건물 5층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하다가 차 위로 떨어져 목숨은 건졌다. 이 사건을 저지른 이유는 "부모형제를 괴롭히기 위해서"라고 모친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 밝혔고 그에 대한 배상을 모친에게 강제로 요구하기도 하는 등 수없이 죄를 지었다. 그의 친형은 동생의 막장 행각에 대한 커다란 상처와 사업 실패로 1999년 3월 2일 40대 초반에 목에 있는 동맥을 찔러 자살했으며 모친도 장기간의 우울증으로 정신건강 의학병원 신세였다가 2016년 말에 사망하는 등 그야말로 구제할 수 없는 막장스러운 집안이었다.

4. 판결

범인은 체포 후에도 의사에게 약을 여러 번 먹어서 힘들다는 둥 정신병 치료를 받는 것처럼 가장한 언동을 했으나 그가 먹은 약은 단순한 우울증 약·수면제이며 이걸 아무리 먹어도 잠만 올 뿐 정신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않는 것으로 판단해 2번 이루어진 공판에선 "심신장애는 아니다"라고 판결받아 모든 것이 쇼였음이 드러났다. 조사원이 이에 대한 사실을 묻자 "죄송합니다. 약은 안 먹었어요. 지어낸 얘기였습니다"라며 거짓 진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법정에 들어올 때 범인은 유유히 휘파람을 불며 들어왔으며 "이런 결과가 뻔한 재미없는 재판에 한가한 놈들이 잔뜩 와서는... 멍청하긴~"[원문1]이란 발언을 내뱉었으며 사형을 선고받은 직후 법정에서 "사형시켜 줘서 정말 고마워!", "난 어서 빨리 죽고 싶으니까 진짜 고맙다. 드디어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안심된다"는 망언을 내뱉어 재판에 참석한 사람들의 분노를 샀는데 자신을 욕하는 사람들에게 "니들 인생보다 내 인생이 승리야"라고 말하는 등 도저히 사람의 탈을 쓰고는 꺼낼 수 없는 망발을 하였다.

한술 더 떠 자신이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힌 아이들에 대해 "내가 죽인 애새끼들은 내 자살을 위한 발판이 되려고 살아온 거야! 진짜 감사해. 그 애새끼들이 8명이나 죽어 줘서 내가 죽을 수 있는 거니 감사해야지! 죽어 줘서 고마워! 그래도 사형이 되려면 3명으로 충분했겠지. 나머지 5명은 덤으로 감사해 줄게!"[원문2]라고 모욕하는 발언을 내뱉어 유가족들이 오열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003년 변호인이 항소했으나 타쿠마 마모루 스스로가 항소를 철회하였고 사형이 확정되었다. 그는 변호인에게 사형 확정 후 6개월 이내에 집행이 되지 않으면 정신적 고통을 이유로 국가에게 손해배상 청구나 형사고발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2004년 담당 변호인에게 보낸 연하장에 "끝을 맺기 위해 협력을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을 써서 보낼 만큼 사형을 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범인은 옥중에서 만난 사형 폐지 운동가인 여성과 옥중결혼을 했고 아이치현 출신의 어느 여성에게 사랑을 고백받아 그 여성과도 편지로 교류를 나누었다. 1년 뒤인 2004년 9월 14일을 기해 오사카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1세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감옥에 있는 저와 결혼해준 아내에게 "고맙다"고 전해주세요'라는 말 한 마디만 남겼으나 최후까지 반성도, 피해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사죄도 없었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순간까지 피해자들을 모독했다.

5. 사건 이후

이 사건으로 사망한 피해자들에게는 2006년2007년 졸업식에서 졸업증서가 수여되었다. 문부과학성은 피해자 유족들에게 총 4억 엔 가량의 위자료와 배상금을 지급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의 유치원·보육원학교에 경찰관립기소(警察官立寄所)라는 팻말과 스티커를 붙이고 외부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등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고 노력하는 움직임이 늘어났다.

2017년에 일본의 모 스레에 사건 당시 생존자(당시 학생)가 자신에게 일어났던 상황을 간략하게 회고한 글을 올렸다. 해당 글에 따르면 작성자는 사건 당일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려다가 범인을 막으러 온 선생님에게 화장실에서 문 잠그고 절대 나오지 말라는 당부를 지켰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그 사건의 충격이 충격인지라 결국은 일가족 모두 다른 곳으로 이사갔다고 한다. 덤으로 몇몇 몰지각한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작성자가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화를 모면했다는 이유로 비겁자라고 비난해서 마음고생이 컸지만 담임 선생님이 '나쁜 사람은 네가 아니라 그 범인이야'라며 감싸 주었다고 한다.

아카호리 마사아키 감독이 2013년에 만든 연극인 ‘카츠라기 사건(葛城事件)’과 이를 바탕으로 같은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는 이 사건을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범인의 가족, 특히 아버지의 시점에서 이들 가족이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일그러져 있었는지 그리고 있다.

가수 우타다 히카루는 이 사건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본인의 정규 2집 Distance의 수록곡 Distance를 발라드 버전으로 편곡해 FINAL DISTANCE라는 제목으로 발매했으며 동명의 싱글의 수익금을 피해자들과 유가족들에게 기부했다.

2021년 6월 8일 사건 2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추모식 자체는 해마다 열렸으나 20주기 추도식은 2020년과 마찬가지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으로 예년에 비해 규모가 축소되었다.

공교롭게도 7년 후 같은 날짜인 2008년 6월 8일에 아키하바라 무차별 살상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매년 6월 8일이면 두 사건이 동시에 언급되는 일이 많다.[6]

6. 관련 문서


[1] 교사 2명과 초등학생 13명.[2] 그러나 아주 어렸을 때부터 기차 선로 위에 돌을 두거나 길을 방해하는 등 여러 문제행동을 보였다고 한다. 즉, 태생적으로 충동 제어 능력이 부족하고 반사회적 기질을 타고난 사람이 그걸 교정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키는 환경에서 자라면서 최악의 케이스가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3]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4년간 소년원에서 복역했다.[원문1] わしが殺したガキどもは、わしの自殺の為の踏み台の為に、生きていたんやな! ほんま、感謝しとる。あのガキが8人死んでくれたから、俺が死ねるんやから 感謝せなあかん! 死んでくれてありがとう! でも、死刑になるだけやったら3人で十分やったな。残りの5人はおまけで感謝しといたる![원문2] わしが殺したガキどもは、わしの自殺の為の踏み台の為に、生きていたんやな! ほんま、感謝しとる。あのガキが8人死んでくれたから、俺が死ねるんやから 感謝せなあかん! 死んでくれてありがとう! でも、死刑になるだけやったら3人で十分やったな。残りの5人はおまけで感謝しといたる![6] 그래서 범인이 이 사건도 의식했다는 설도 나왔다.[7] 실제로 사건을 보도한 기사의 댓글창에서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이 떠올랐다는 댓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