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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암굴왕 사건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사건의 시작3. 집념의 사나이 요시다4. 마침내 무죄 판결

1. 개요

吉田岩窟王事件

1913년 일본 제국에서 일어난 강도살인 사건이며 강도살인 사건 자체보다는 이 사건의 범인으로 누명을 쓴 요시다 이시마츠의 50년에 걸친 집념의 누명 벗기 과정을 일컫는다. '암굴왕'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제목을 번안한 것인데 이 사건의 피해자인 요시다 이시마츠가 가석방된 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들을 추적해 찾아내서 누명을 씌웠다는 인정을 받아낸 것이 작중의 몽테크리스토 백작과도 같다는 데서 유래했다.

2. 사건의 시작

1913년 8월 13일 나고야시 치쿠사구의 길에서 누에고치 소매업을 하던 31세 남성이 두 명의 남성에게 살해당하고 1 20전을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들은 다음날 쉽게 잡혔는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잡힌 범인들은 자신들의 형을 가볍게 하려는 목적으로 사건과 전혀 관련도 없던 무고한 요시다 이시마츠[1]를 끌어들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의 일본 경-검은 증거주의 원칙에 반해 피의자의 자백에 상당히 의존하여 수사와 기소, 재판을 진행했고[2] 이들의 주장에 경찰은 당장 요시다를 잡아들였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온 요시다는 하지도 않은 강도살인을 자백하라며 고문당해도 범행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경찰은 진범 2명의 허위 자백만을 근거로 요시다를 주범, 2명을 종범으로 기소했다. 법정도 2명의 허위 자백을 증거로 인정해 요시다에게는 사형, 2명에게는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3. 집념의 사나이 요시다

당연히 요시다는 두 번이나 재심을 청구했으나 기각당했고 고스게 형무소에 수감될 때 자신의 무죄를 부르짖으면서 버텼다. 형무소에서는 그런 그를 고깝게 여기고 고문을 가하기도 했으나 저항을 멈추지 않자 결국 귀찮아서 죄질이 매우 나쁜 죄수들만 보내는 곳으로 악명높은 아바시리 형무소로 이감했다. 아바시리에서도 요시다의 저항이 계속되자 결국 넌더리를 낸 아바시리 형무소는 아키타 형무소로 이감시켜 버렸다.

요시다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아키타 형무소의 소장은 요시다가 이전 감옥에서 계속 무죄를 주장하면서 저항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고 의구심을 품어 자체적으로 사건을 재조사했다. 그 결과 요시다가 사건과는 전혀 무관함을 알게 되자 요시다를 위해 가석방 조치를 밟아 주었다. 당시로선 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수감자가 가석방 절차를 밟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결국 아키타 형무소 소장의 도움을 받아 1935년 가석방된 요시다는 대법원 출입 신문기자의 도움으로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범인 2명이 1930년에 먼저 가석방된 뒤 사이타마현에서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뒤 그들을 쫓아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웠음을 인정하라고 촉구했다. 1936년 11월 끈질긴 요구 끝에 결국 그들이 요시다에게 누명을 씌웠음을 인정하는 사과문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대법원 출입 신문기자가 자신의 무죄 인정을 위해 끈질긴 요시다를 마치 "암굴왕의 몬테크리스토 백작 같다."고 신문기사를 쓴 것에서 이 사건의 명칭이 유래했다.

그러나 똥고집으로는 하늘도 등을 돌린다는 일본 사법부인지라 요시다는 두 명의 사과문을 바탕으로 세 번째 재심청구를 했음에도 기각당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피난을 간 도치기현에서도 자신의 무죄를 호소했다.

전쟁 이후인 1952년 요시다는 다시 언론과 변호사들에게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고 1958년에는 법무대신과의 면담까지 요구했으나 면담은 거절당했지만 이때 요시다를 상대한 법무부의 간부직원이 요시다의 주장이 일관성이 있고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고 판단해 그를 일본 변호사 협회의 인권옹호부 사무실로 안내했다.

일본 변호사 협회는 요시다의 호소를 듣고 관련 자료를 검토하고 요시다를 돕기로 결정했으며 가석방 때 요시다를 도운 대법원 출입기자도 이 사건에 대해 증언하면서 여론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여론이 움직이자 일본 국회에서도 이 사건에 주목해 국회 차원에서 인권의 관점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이런 여론의 움직임으로 1960년 요시다는 다섯번째로 재심청구를 진행했고 나고야 고등법원 제4부 재판관들이 이를 인정해 재심이 이루어지게 됐지만 검찰 측에서 당시의 현행 형사소송법을 근거로 요시다의 재심청구는 부당하다는 이의를 제기하여 나고야 고등법원 제5부 재판관들은 재심청구를 기각했다.

이에 일본 변호사 협회가 특별상고하여 요시다의 재심청구는 일본 대법원까지 올라갔다. 1962년 일본 대법원이 요시다의 사건은 사건 당시의 형사소송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해 나고야 고등법원의 결정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사건을 나고야 고등법원으로 되돌려보내 간신히 재심이 이루어졌다.

4. 마침내 무죄 판결

1963년 2월 28일 나고야 고등법원 제4부 재판관들은 사건에 대해 요시다의 알리바이가 성립하기에 요시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결했다. 무려 49년 6개월 15일[3]만의 무죄 판결이었다. 판결문에서 재판관들은 반세기에 걸친 무죄 호소는 피고인을 가히 쇼와 시대의 에드몽 당테스라 부를 만하다고 언급하면서 선배 판사들이 무고한 요시다에게 오판을 내린것을 사죄하는 의미로 재판관들이 직접 요시다에게 고개를 숙였다.[4] 일본 사법부 역사상 무죄를 인정하며 재판관들이 피고인에게 고개를 숙인 것은 전례가 없을 정도였다. 재판관들까지도 에드몽 당테스를 연상케 하는 요시다의 집념에 경의를 표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재판관들이 고개를 숙이자 요시다는 회한에 젖어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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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요시다가 부당하게 구금되어 있던 21년 7개월 7일의 수감기간에 대해 1일당 400엔씩 쳐서 도합 315만 5600엔[5]의 보상금이 지급됐다. 사건 당시 운행하던 부관연락선의 1등석 요금이 12엔이었으니 당시 기준으로 하루 400엔이라면 적지 않은 돈이었겠지만 50년 동안 오른 물가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무죄 판결을 받은 요시다는 오랜 집념이 이뤄진 탓인지 그날부터 기력이 갑자기 쇠해 판결로부터 9개월이 지난 그해 12월 1일에 노쇠와 폐렴으로 인해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했다. 도치기현에 있는 그의 무덤에는 인권의 신, 여기에 잠들다(人権の神ここに眠る)라고 새겨진 묘비가 세워져 있다.

웬만해서는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법부를 생각하면 요시다 이시마츠의 50년에 걸친 집념은 참으로 놀라운데 그런 집념이 그를 일본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이 정도 집념이 아니고서야 누명 벗기 힘든 일본의 사법현실이 어처구니 없다는 방증도 될 듯하다.

참고로 일본에는 요시다 이시마츠보다 더 오랜 기간 끝에 무죄판결을 받아낸 사건이 있으니 바로 카토로 사건이다. 1915년에 무고한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가토 신이치라는 사람이 모범수로 석방된 뒤 요시다 이시마츠의 무죄판결을 보고 재심을 청구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가토 신이치는 1915년에 일어난 사건의 무죄 판결을 무려 62년 만인 1977년에 받아냈지만 요시다와는 달리 국가에 대한 배상 소송에서는 져서 보상을 받지 못한 채 1980년에 생을 마감했다.

2014년에는 일가족을 방화살인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48년간 수감되어 있던 전 권투선수 하카마다 이와오가 발달된 유전자 검사 기술로 재심을 통해 석방됐다.

1961년에 일어난 나바리 독포도주 사건의 피고인 오쿠니시 마사루도 32년간 사형수로 복역하면서 10번[6]이나 재심 청구를 했으나 모두 기각당했으며 결국 끝내 자신이 무죄임을 인정받지 못한 채 2015년 10월 9일 폐렴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1] 吉田石松, 1879년 5월 10일 ~ 1963년 12월 1일[2] 이 점은 일본 사법계의 고질적인 병폐로 21세기에도 자백의존률이 지나치게 높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거기다 21세기에는 나아진 편이지만 불과 8,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적당한 자가 있으면 자백할 때까지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어 거짓 자백을 받아내는 짓까지 행하는 등 군사독재 정부에서나 볼 법한(직접적인 고문을 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막장 행태가 이어졌다.[3] 일수로 따지면 무려 18096일.[4] 덤으로 요시다 '피고인'이 아닌 요시다 '옹'이라고 존대하기까지 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일본 사법부가 이렇게 대한 예 자체가 드물다.[5] 2019년 기준 약 1513만엔[6] 생전 9번, 사후 여동생이 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