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22:43:02

조반니 졸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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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조반니 졸리티(Giovanni Giolitti)는 이탈리아 왕국정치인이자 이탈리아의 13대 총리이다. 1892~1893, 1903~1905, 1906~1909, 1911~1914, 1920~1921년 총 5회 총리로 재임하였다.[1]

2. 생애

조반니 졸리티는 1842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피에몬테 몬도비(Mondovì)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8년 토리노 대학교에 입학했고 1860년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당시 피에몬테의 많은 대학생들과는 달리 졸리티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2] 대학 졸업 이후 졸리티는 사르데냐 왕국 정부에 관료로 취직해 법무부, 재무부, 감사원, 국무원을 거쳤다. 이 시기 니트로글리세린을 발견한 화학자 아스카니오 소브레로의 조카 로사 소브레로와 결혼했다.

졸리티는 1882년 하원 선거에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가 주도하는 역사적 좌파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1887년 총리가 된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1889년 졸리티를 내각의 재무장관으로 임명했다. 같은 해 이탈리아 6대 발권은행 중 하나인 로마 은행에서 비리가 발견되었으나 당시 총리였던 크리스피와 재무장관 졸리티는 본인들 역시 정치자금을 부정하게 무이자 대출 받았다보니 공개시 혼란을 핑계로 이를 묻는다. 이후 1890년 크리스피의 에티오피아 침략 정책을 비판하며 재무장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1892년, 첫번째로 총리직을 맡는다.

졸리티의 첫번째 총리 임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크리스피 정권기부터 시작된 프랑스와의 관세전쟁은 이탈리아에 큰 타격을 주었고 중앙은행 역시 상황이 좋지 않았다. 거기에 더해 1892년 말, 재무장관 시절 졸리티가 묵살했던 로마 은행 감사 보고서가 유출되며 로마 은행 스캔들이 터진다. 한편 1889년부터 대토지 사회의 모순이 곪아버린 시칠리아에서 일어난 좌익 운동 파시(Fasci)는 졸리티 내각기에도 해결되지 않아 대다수가 대지주 출신인 남부 의원들이 졸리티를 압박했다.[3] 결국 수세에 몰린 졸리티는 1893년 말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졸리티 1차 내각은 실패로 점철된 채 끝났다.

사임 후 졸리티는 후임 총리로 복귀한 크리스피와 정쟁을 벌이며 권력 남용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을 뻔 하나 무죄 선고를 받아내고 크리스피와 정적들 역시 로마 은행 스캔들과 엮여있음을 밝히며 역공을 가한다. 이후 몇년간은 정계 일선에 나서지 못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부패 혐의가 잊혀지고, 노동 분쟁에 중도적인 입장을 취하겠다고 주장하며 성장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세력의 지지를 끌어내 1900년 정계 복귀에 성공한다. 이후 1901년부터 1903년까지 주세페 차나르델리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을 수행하며 늙은 총리를 대신해 사실상 내각 수반 역할을 행했으며 차나르델리 사임 이후부터는 총리직을 이어받아 2기 내각을 열게 된다. 공식적인 총리로서는 1903~1905, 1906~1909, 1911~1914 3회에 걸쳐 재임하나 실질적으론 정계에 복귀한 190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는 1914년까지 졸리티는 뇌물과 계파간 안배 등을 십분 활용하며 사실상 이탈리아 정계를 지배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자유주의 정치가 중 가장 좌익 운동에 온건하고 사회주의에 포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역사적 좌파의 대두 이후 이탈리아 자유주의 세력에 널리 퍼져있던 변환주의(Trasformismo)[4] 전통에 충실했던 졸리티는 역사적 우파 세력과 이탈리아 사회당 세력 모두와 동맹을 맺고 안심시키려 노력하며 양측 세력을 모두 내각에 참여시키려 노력했다. 졸리티는 연금 정책, 노동쟁의 비탄압 및 중재, 근로시간 제한 정책 등 자유방임주의가 당연했던 당시 기준으로는 파격적인 친사회주의 정책을 폈다. 보수주의자들은 졸리티의 바람과는 달리 이를 비난했고 결국 파업 일부 진압으로 선회하여 이번에는 사회주의자들의 지지를 잃었다.

졸리티는 사회주의와 보수주의 양측에서 인기를 얻지 못하고 결국 역사적 좌파의 전통적인 지지자였던 남부 지주 의원들의 지지로 정권을 유지시켜야 했다. 졸리티는 남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특별법을 제정하였고 소기의 성과를 이루었으나 지주 지지율 유지 문제로 토지개혁을 비롯한 남부의 근본적인 사회 구조 개혁을 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한편 교황 비오 10세는 이탈리아 사회당의 성장세에 위기 의식을 가지고 신도들에게 통일 이탈리아 왕국 정치 참여[5]를 일부 허락하였으며 1913년에는 젠틸로니 조약(Patto Gentiloni)을 맺으며 졸리티의 자유주의 세력과 반사회주의 목적의 협력을 시작하였다.

1913년, 사회주의를 비롯한 비자유주의 계열 세력의 약진에 위기감을 느낀 역사적 좌파역사적 우파는 변환주의 연대를 넘어 완전히 합당을 단행하였고 이로 탄생한 자유연합(Unione Liberale)은 단일 중도 자유주의 세력으로 재편되었다. 통합을 주도한 졸리티는 자유 연합의 지도자가 되었다.

한편 졸리티는 참정권 확대 운동에도 지지의사를 표했다. 그는 남성 일반 참정권을 옹호했으며 4기 내각 시기인 1912년에 유권자 수를 300만명에서 850만명으로 확대시키는 법을 통과시킨다. 하지만 졸리티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는 난색을 표했으며 참정권 개혁은 민중들에게 자유주의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당대 이탈리아 상황에서 졸리티와 자유주의의 세력을 줄이고 사회주의, 가톨릭, 포퓰리즘, 파시즘의 준동을 불러일으킨 자충수라는 평가 또한 존재한다.

졸리티가 실권을 행사한 1900년부터 1914년까지의 기간은 고속 경제성장을 통해 이탈리아의 산업 기반이 닦인 시기였다. 피아트, 피렐리 등의 대기업들이 이 시기 창립되었으며 전통적 섬유산업 역시 크게 성장하였다. 이는 알프스 수력발전과 로마 은행 스캔들 이후 금융 시스템 정비,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의 보호무역 정책 등을 통해 가능했다. 하지만 근본적 사회구조 개혁을 행하지는 못했기에 남부의 빈곤은 여전했고 산업 성장은 밀라노 - 토리노 - 제노바 삼각지대에 집중되었다.

3기 내각 재임기인 1908년에 시칠리아 메시나에서 지진이 일어나 레조칼라브리아가 쓰나미로 침수되는 일이 있었다. 외교적으로는 1911년부터 1912년까지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을 일으켜 리비아 식민화에 성공하고[6] 그리스 도데카니사 제도 역시 빼앗아오는 데에 성공했으나 전쟁은 13억 리라의 지출을 불러와 재정에 악영향을 주었다.

1913년 실행된 총선거에서 졸리티의 자유연합은 과반 의석을 유지했으나 역사적 극좌파의 후신인 이탈리아 급진당(Partito Radicale storico)과 사회주의 좌파 정당인 이탈리아 사회당이 약진했고, 급진당은 1914년 연정에서 탈퇴하며 졸리티를 사임시켰다. 졸리티는 후임 총리로 역사적 우파 출신 보수주의자 안토니오 살란드라를 지목한다. 하지만 때마침 발발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지지한 졸리티는 삼국 동맹 탈퇴와 런던 밀약 체결을 통한 협상국 가입을 추진한 살란드라를 비판하며 내각과 사이가 틀어졌다. 1915년 민족주의적 군중들이 실지 회복을 부르짖는 시위를 벌이고 이탈리아의 세계대전 참전이 확실해지는 상황이 되자 졸리티는 정계를 일시적으로 은퇴했다.

졸리티는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19년 총선에서 참전파였던 정치인들을 비난하는 구호를 외치며 정계에 복귀하였다. 졸리티 본인은 정계에 성공적으로 복귀하였으나 그가 소속된 자유 연합은 전쟁을 거치며 지지율이 크게 떨어졌고 승전 후 협상국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보통선거와 비례대표제를 실시하며 의회 주도권을 크게 잃었다. 하지만 1919~1920년 이탈리아는 전후 혼란이 극심해 사회주의 총파업과 파시즘의 준동이 격화되었고[7] 당시 총리였던 급진당의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니티가 이를 수습하는데에 벅차했기에 결국 총리직을 사임, 연륜있는 정치인으로 정평이 나있던 졸리티가 후임 총리로 재집권하였다. 졸리티는 과거 그랬던 것처럼 파업과 쟁의를 진압해달라는 지주와 자본가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중재자 입장에 서려 했다. 파시즘 세력의 폭력행위 역시 방관으로 임했다.

총리직에 복귀한 졸리티가 당면한 가장 골치아픈 문제는 피우메카르나로 섭정국이었다. 현 크로아티아 리예카인 항구도시 피우메는 이탈리아인 다수 도시였으나 위치가 이스트리아 반도보다도 동쪽인데다가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의 숫자도 만만치 않아 이탈리아와 신생 유고슬라비아 왕국 간의 분쟁지역이었다. 종전 협상시 이탈리아는 피우메를 확보하지 못했는데 이에 반발한 국수주의자 가브리엘레 단눈치오[8]는 1919년에 의용군 2600여명을 조직해 피우메를 점령하고 카르나로 섭정국을 세워 두체 자리에 올랐다. 이탈리아 정부는 국제 협상을 깨트리고 사병을 운용한 단눈치오에 당혹해하며 진압하려 했다. 졸리티는 1920년 유고슬라비아와 라팔로 조약을 체결해 피우메에 중립 도시국가 피우메 자유국을 세우기로 하고 직후 해군을 파견해 단눈치오 세력을 진압하였다.[9]

1921년 졸리티는 사회당의 성장을 견제하기 위해 민족주의와 파시스트 세력과 연합해 국민 블록(Blocco Nazionale)을 결성한 후 의회해산을 단행해 총선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실망스러웠고 그는 책임을 지고 사임해 마지막 총리 임기를 끝마쳤다. 졸리티는 총리직 사임 이후로도 파시즘에 반대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로마 진군 이후, 졸리티는 베니토 무솔리니 내각을 지지하고 이탈리아판 수권법인 아체르보 법에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러나 1924년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법에 반대표를 던지며 파시즘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1925년 국가 파시스트당 가입 요구에 불응했다. 이후로도 하원의원직을 역임하다 1928년 사망했다.

[1] 이탈리아는 총리 임기를 셀 떼 1인 1대로 세어 두번 이상 재임하였어도 한번만 센다.[2] 통일운동 미참여와 군사 경험 부족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가 위주의 이탈리아 왕국 정계에서 불리하게 작용되었으나 졸리티가 다른 이탈리아 정치인들과는 달리 통일 이데올로기 이상주의에 연연하지 않고 실용적 정책을 펼칠 수 있게 하기도 하였다.[3] 졸리티는 파업을 불법행위로 여기지 않고 진압에 총기사용을 허가하지도 않는 등, 좌익 운동에 중도적인 입장을 보여 남부 지주들의 불만을 샀다. 졸리티 사임 후 파시 운동은 졸리티 사임 후 총리직에 복귀한 크리스피가 계엄령을 선포하고 40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강경 진압하였다.[4] 좋게 말하면 유연한 중도 연정, 나쁘게 말하면 뇌물수수와 정파간 이권 나눠먹기에 가깝다.[5] 이탈리아 통일로 인한 교황령 멸망 문제와 바티칸 포로 상황으로 인해 당시 가톨릭은 통일 이탈리아의 존재를 혐오하였고 신도들의 통일 왕국 정치참여를 금지하였다. 이러한 갈등 상황은 베니토 무솔리니 집권기 라테라노 조약을 통해서야 완벅히 해결된다.[6] 다만 현지 반란세력의 준동과 1차대전이 겹치며 간접지배에 머물렀으며 파시즘 정권기인 1931년에 와서야 오마르 무크타르를 진압하고 직접 지배를 확립하였다.[7] 이를 비엔니오 로소(Biennio rosso)라고 부른다.[8] 시인이자 초기 파시즘 사상가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롤모델이었다.[9] 피우메 자유국은 1924년 베니토 무솔리니가 끝내 점령하였고 2차대전 패전 이후 이스트리아 반도와 함께 유고슬라비아령으로 완전히 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