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6 10:38:56

로마 은행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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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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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은행 스캔들(Scandalo della Banca Romana)은 1893년 이탈리아 왕국의 6대 발권 은행인 로마 은행의 파산으로 일어난 스캔들이다. 이탈리아판 파나마 스캔들로 불리기도 한다.

2. 상세

로마 은행(Banca Romana)은 1833년 로마에서 교황령의 중앙은행으로 설립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이후 이탈리아 각지에는 로마 은행을 포함해 통일 전 국가들이 세운 중앙은행들이 여기저기 존재했는데 통일 정부는 이들을 합쳐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대신 통일 전 중앙은행 역할을 했던 6개 은행에 통화 발권 권한을 허가하는 식으로 이탈리아 리라의 발권을 하게된다.

이탈리아의 6대 발권 은행들은 때마침 불어닥친 부동산 투기 수요에 발맞춰 대출을 손쉽게 허가해 주고 지폐를 법적 한도 이상으로 찍어 댔다. 하지만 부동산 투기에 통일 의회의 정치인들을 포함한 귀족과 사업가, 성직자 등의 기득권들이 얽혀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으로 막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대출과 자금 조달에 얽힌 부패도 심각하였다. 그러던 중 1880년대 후반부터 이탈리아 경제에 불황이 닥쳐 민간 은행의 뱅크런을 막기 위해 발권 은행들이 금융 구제에 동원되어야 했는데 이는 발권 은행의 부실함을 더욱 악화시켰다.

1887년 부동산 거품이 붕괴되면서 발권 은행들의 부채가 막심해지고 1889년 6월 정부 감사에서 로마 은행의 재정 부실과 일처리 시스템의 결함이 드러났다. 하지만 당시 총리였던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와 재무장관 조반니 졸리티는 본인들이 발권 은행들과의 정치적 거래로 정치자금을 무이자 대출 받은 것도 있고 해서 이를 공개할 시 혼란이 우려되고 국민의 신뢰를 저하할 수 있다는 핑계로 이를 묻었다. 이후 이탈리아 금융 시스템과 재무 구조는 개선된 것이 없이 차일피일 시간만 흘러갔다.

1892년 말, 결국 1889년의 로마 은행 감사 보고서가 유출되었고 공교롭게도 총리로 재임하던 조반니 졸리티는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열어야 했다. 위원회의 조사 결과 로마 은행의 현금 부족, 부실 채무, 지폐 과다발행과 회계시스템 결함 등이 밝혀졌다. 졸리티는 1889년 당시 보고서를 묵살한 재무장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총리 직에서 사퇴해야 했다.

3. 결과

결국 로마 은행은 해체되었고 중앙 은행 설립을 위해 1893년 이탈리아 은행(Banca d'Italia)이 설립되었다. 하지만 지역 이권과 관련된 여러 정치적 이유로 6대 은행 중 남부의 나폴리 은행과 시칠리아 은행은 발권 은행으로 남겨 놓을 수밖에 없었고 1926년 무솔리니 정권기에야 나폴리 은행과 시칠리아 은행의 발권 기능이 정지되면서 이탈리아 은행이 명실상부한 중앙은행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한편 스캔들은 후임 총리가 된 프란체스코 크리스피조반니 졸리티 간의 정쟁으로 이어졌다. 졸리티는 스캔들로 인해 유죄 선고를 받을 뻔했지만 크리스피를 포함한 정적들 역시 무이자 불법 대출에 엮여 있음을 밝혀 역습에 성공했다. 이후 졸리티는 총리 자리에 다시 오르는 데 성공하고 1900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 개전까지 이어진 황금기를 이끌게 된다. 하지만 스캔들의 결과 크리스피와 졸리티 모두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고 그들이 속한 역사적 좌파(Sinistra storica)도 인기를 잃었다.

로마 은행 스캔들을 계기로 이탈리아는 전반적으로 은행의 시스템과 관련 법규를 정비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탄탄해진 금융은 1900년부터 1914년까지 지속된 경제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