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법민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대한민국의 양궁 선수에 대한 내용은 김법민(양궁) 문서 참고하십시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fbe673"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be673>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남해 차차웅 | 유리 이사금 | 탈해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파사 이사금 | 지마 이사금 | 일성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벌휴 이사금 | 내해 이사금 | 조분 이사금 | 첨해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
미추 이사금 | 유례 이사금 | 기림 이사금 | 흘해 이사금 | |
<rowcolor=#fbe673> 제17대 |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
내물 마립간 | 실성 마립간 | 눌지 마립간 | 자비 마립간 | |
<rowcolor=#fbe673> 제21대 |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
소지 마립간 | 지증왕 | 법흥왕 | 진흥왕 | |
<rowcolor=#fbe673>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진지왕 | 진평왕 | 선덕여왕 | 진덕여왕 | |
<rowcolor=#fbe673>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태종 무열왕 | 문무왕 | 신문왕 | 효소왕 | |
<rowcolor=#fbe673> 제33대 |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
성덕왕 | 효성왕 | 경덕왕 | 혜공왕 | |
<rowcolor=#fbe673> 제37대 | 제38대 | 제39대 | 제40대 | |
선덕왕 | 열조 원성왕 | 소성왕 | 애장왕 | |
<rowcolor=#fbe673> 제41대 |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
헌덕왕 | 흥덕왕 | 희강왕 | 민애왕 | |
<rowcolor=#fbe673> 제45대 | 제46대 | 제47대 | 제48대 | |
신무왕 | 문성왕 | 헌안왕 | 경문왕 | |
<rowcolor=#fbe673> 제49대 | 제50대 | 제51대 | 제52대 | |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 | 효공왕 | |
<rowcolor=#fbe673> 제53대 | 제54대 | 제55대 | 제56대 | |
신덕왕 | 경명왕 | 경애왕 | 경순왕 | |
}}}}}}}}}}}} |
문무왕 관련 틀 | |||||||||||||||||||||||||||||||||||||||||||||||||||||||||||||||||||||||||||||||||||||||||||||||||||||||||||||||||||||||||||||||||||||||||||||||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신라 제30대 국왕 문무왕 | 文武王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기타 직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낙랑군왕 | }}}}}}}}} | |
경주시 통일전에 있는 문무왕 표준영정. 김기창 작.[1] | |||
출생 (음력) | 626년[2] | ||
신라 금성 (現 경상북도 경주시) | |||
사망 | 681년 7월 24일[A] (향년 55세) | ||
신라 금성 궁 침실 (現 경상북도 경주시) | |||
능묘 |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릉 | ||
재위기간 | 신라 왕태자 | ||
655년 음력 3월 ~ 661년 음력 6월 (6년 3개월) | |||
신라 제30대 국왕 | |||
661년 음력 6월 ~ 681년 7월 24일[A] (20년 1개월)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4A2D5B><colcolor=#fbe673> 본관 | 경주 김씨 | |
휘 | 법민(法敏) | ||
부모 | 부왕 태종 무열왕 모후 문명왕후 | ||
왕후 | 자의왕후 김씨 | ||
형제자매 | 10남 5녀 중 장남 동생 김인문, 김문왕, 김노차, 김인태, 김지경, 김개원, 김개지문, 김거득, 김마득 여동생 김고타소[5], 요석공주(?)[6], 김지소[7], 여동생[8], 여동생[9] | ||
자녀 | 1남 - 태자 김정명(신문왕) | ||
종교 | 불교 | ||
시호 | 문무대왕(文武大王)[11] | ||
골품 | 진골(眞骨) | ||
군사경력 | |||
임관 | 병부령(兵部令) | ||
참전 | 백제멸망전 고당전쟁 | }}}}}}}}} |
문무왕릉비 |
[clearfix]
1. 개요
신라의 제30대 임금이자 통일신라의 첫 군주. 부친은 제29대 태종 무열왕이고 모친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명왕후였다. 남동생으로 김인문이 있었고, 여동생 지소부인은 김유신의 부인이었다. 왕비는 자의왕후였다. 또 다른 여동생 김고타소는 김품석의 부인인데, 대야성 전투로 인해 일찍 죽었다.2. 생애
자세한 내용은 문무왕/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그는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고, 한때 동맹국이었던 당나라와의 총력전까지 승리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수한 군주였다.태자 시절부터 즉위 후까지 문·무 양면에서 활약해서 왕명도 '문무왕'(文武王)이 되었다. 한마디로 화전양면전술의 달인. 거대한 국력을 가진 세계제국 당나라와의 전면전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화전양면전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한 문무왕의 뛰어난 지략에 기인한 바가 컸다.
사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수하였고 나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그의 시대는 굉장히 어려운 축에 속하였다. 백제와 고구려가 망한 후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벌어지는 것을 정면으로 감당해야했기 때문이다. 그 시대 최강대국이었던 당나라는 신라와 동맹을 맺고 협동하여 백제를 멸망시킨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원래 백제 땅을 신라에게 주기로 약속했었지만 백제멸망에 성공하자 이를 무시하고 본인들이 직접 백제땅을 관리하기위해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고구려 지방을 관리하는 안동도호부도 설치하였다. 심지어 서라벌에도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부의 수장으로 임명하는 식으로 신라땅까지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신라는 나당전쟁 초반에는 승승장구하였으나 석문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해 공세에서 수세로 몰렸고 전쟁 패배의 압박을 받았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김유신도 나당전쟁이 끝나기전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는 상황을 더욱 암담하게 만들었는데, 신라의 큰 거목이 사라지자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판단하여 이름난 장수들도 줄줄이 사직을 청하였고, 처자식을 데리고 당나라로 도망가려 한 귀족마저 있었다. 믿고 기대던 이름난 장수도 죽고 휘하장수들도 떠나가는 이런 상황에서는 부하의 배신이나 반란으로 왕이 시해된 후 항복하는 경우가 많다. 멀리갈 것도 없이 신라가 멸망시킨 백제도 그런 전철을 밟았다.
그러나 문무왕은 모든 악조건을 극복하고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삼국통일을 완수하고, 외세의 침공을 막아낸 업적으로 현재까지도 신라사 명군으로 좋은 평가를 받는데는 이런 이유가 있는것이다.[12]
다만 《동국통감》의 평가는 삼한통일을 이룩한 공을 세웠지만 당나라를 배신해 국체를 보존하지 못할 뻔한 왕으로 평했다.
"문무(文武)는 영특하고 총명한 자질로서, 선인(先人)의 공렬(功烈)을 이어 받아 당나라의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비로소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전대의 뜻을 이룩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공렬이 성대합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고구려의 반중(叛衆)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옛 땅에 웅거하였다가 당나라에 죄를 얻어 보존하지 못할 뻔했습니까?"
동국통감은 1463년(세조 9) 서거정(徐居正) 등이 왕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1485년(성종 16)에 완성한 역사서이다. 조선 유학자들의 사관(史觀)이 반영된 책으로 문무왕에 대한 논평은 사대주의에 입각한 편협한 시각이다4. 가계
- 처: 자의왕후
5.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三國史紀) |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word-break: keep-all; min-height:(25/18*1em + 5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4a2d5b {{{#!folding [ 본기(本紀)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1권 「신라 1권 (新羅 一)」 | 2권 「신라 2권 (新羅 二)」 | |
혁거세 · 남해 · 유리 · 석탈해 · 파사 · 지마 · 일성 | 아달라 · 벌휴 · 내해 · 조분 · 첨해 · 미추 · 유례 · 기림 · 흘해 | ||
3권 「신라 3권 (新羅 三)」 | 4권 「신라 4권 (新羅 四)」 | 5권 「신라 5권 (新羅 五)」 | |
내물 · 실성 · 눌지 · 자비 · 소지 | 지대로 · 원종 · 김삼맥종 · 김사륜 · 김백정 | 김덕만 · 김승만 · 김춘추 | |
6-7권 「신라 6-7권 (新羅 六-七)」 | 8권 「신라 8권 (新羅 八)」 | 9권 「신라 9권 (新羅 九)」 | |
김법민 | 김정명 · 김이홍 · 김융기 | 김승경 · 김헌영 · 김건영 · 김양상 | |
10권 「신라 10권 (新羅 十)」 | 11권 「신라 11권 (新羅 十一)」 | ||
김경신 · 김준옹 · 김청명 · 김언승 · 김수종 · 김제융 · 김명 · 김우징 | 김경응 · 김의정 · 김응렴 · 김정 · 김황 · 김만 | ||
12권 「신라 12권 (新羅 十二)」 | 13권 「고구려 1권 (高句麗 一)」 | 14권 「고구려 2권 (高句麗 二)」 | |
김요 · 박경휘 · 박승영 · 박위응 · 김부 | 고주몽 · 고유리 | 고무휼 · 고색주 · 고해우 | |
15권 「고구려 3권 (高句麗 三)」 | 16권 「고구려 4권 (高句麗 四)」 | 17권 「고구려 5권 (高句麗 五)」 | |
고궁 · 고수성 | 고백고 · 고남무 · 고연우 | 고우위거 · 고연불 · 고약로 · 고상부 · 고을불 | |
18권 「고구려 6권 (高句麗 六)」 | 19권 「고구려 7권 (高句麗 七)」 | 20권 「고구려 8권 (高句麗 八)」 | |
고사유 · 고구부 · 고이련 · 고담덕 · 고거련 | 고나운 · 고흥안 · 고보연 · 고평성 · 고양성 | 고원 · 고건무 | |
21-22권 「고구려 9-10권 (高句麗 九-十)」 | 23권 「백제 1권 (百濟 一)」 | ||
고장 | 부여온조 · 부여다루 · 부여기루 · 부여개루 · 부여초고 | ||
24권 「백제 2권 (百濟 二)」 | |||
부여구수 · 부여사반 · 부여고이 · 부여책계 · 부여분서 · 부여비류 · 부여계 · 부여구 · 부여수 · 부여침류 | |||
25권 「백제 3권 (百濟 三)」 | |||
부여진사 · 부여아신 · 부여전지 · 부여구이신 · 부여비유 · 부여경사 | |||
26권 「백제 4권 (百濟 四)」 | 27권 「백제 5권 (百濟 五)」 | 28권 「백제 6권 (百濟 六)」 | |
부여문주 · 부여삼근 · 부여모대 · 부여사마 · 부여명농 | 부여창 · 부여계 · 부여선 · 부여장 | 부여의자 | |
금석문 및 문헌기록상 신라 최초로 성씨를 사용한 왕은 진흥왕임 * 29~31권까지 연표 * 32~40권까지 잡지 |
{{{#!folding [ 열전(列傳) ]
}}} ||5.1. 《삼국사기》 6권
《삼국사기》 〈문무왕 상〉一年 문무왕이 왕위에 오르다
一年夏六月 숙위 인문과 유돈 등이 황제의 명령을 전하다
一年秋七月十七日 김유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一年秋八月 대왕이 백제의 남은 무리를 타이르다
一年秋九月十九日 대왕이 총관과 대감의 서약을 받다
一年秋九月二十五日 군사들이 옹산성을 포위하다
一年秋九月二十七日 옹산성을 쳐서 항복을 받다
一年秋九月 옹산성 함락에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一年秋九月 웅현성을 쌓다
一年秋九月 상주 총관 품일이 우술성을 함락하다
一年秋九月 달솔 조복과 은솔 파가에게 관직과 토지 등을 내려주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사신이 와서 선왕의 제사를 지내다
一年冬十月二十九日 당나라 황제가 평양으로 군사의 양식을 보내라고 명령하다
二年春一月 당나라 사신이 왕을 책봉을 하다
二年春一月 문훈을 중시로 삼다
二年春一月 양식을 싣고 평양으로 가라고 하다
二年春一月十八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풍수촌에서 묵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유신 등 아홉 장군이 산양에 이르다
二年春一月二十三日 성천 등이 이현에서 적의 군사를 물리치다
二年春二月一日 아홉 장군이 당의 군영에 사람을 보내다
二年春二月六日 아홉 장군이 당 군사에게 군량미를 전하다
二年春二月 아홉 장군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물리치다
二年春二月 왕이 유신과 인문에게 재물과 토지, 노비를 내리다
二年春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二年春二月 탐라국이 항복하여 속국이 되다
二年春三月 왕이 죄수를 풀어주고 큰 잔치를 베풀다
二年秋七月 김인문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다
二年秋八月 흠순 등이 백제의 남은 적을 물리치다
二年秋八月 진주와 진흠 등을 죽이다
二年秋八月 여동이 벼락에 맞아 죽다
二年 남천주에서 흰 까치를 바치다
三年春一月 남산신성에 장창을 짓다
三年春一月 부산성을 쌓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 거열성을 공격하여 승리하다
三年春二月 흠순과 천존이 거물성·사평성·덕안성을 함락하다
三年夏四月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15]로 삼고 왕에게 대도독의 관작을 내리다
三年夏五月 영묘사의 문에 벼락이 치다
三年 복신과 도침이 부여풍과 함께 부흥을 꾀하다
三年冬十月二十一日 지수신을 공격하다
三年冬十一月四日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상을 주다
四年春一月 김유신에게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 주다
四年春一月 군관을 한산주 도독으로 삼다
四年春一月 부인들에게 중국의 의복을 입도록 하다
四年春二月 여러 왕의 능원에 백성을 이주시키다
四年春二月 김인문, 유인원, 부여륭 등이 웅진에서 맹약을 하다
四年春三月 반란을 일으킨 백제의 무리를 물리치다
四年 지진이 일어나다
四年 성천과 구일 등에게 당 음악을 배우게 하다
四年秋七月 인문 등에게 고구려 돌사성의 공격을 명령하다
四年秋八月十四日 지진이 일어나 백성들의 집이 무너지다
四年 함부로 절에 시주하는 것을 금지하다
五年春二月 이찬 진복을 중시로 삼다
五年春二月 이찬 문왕이 죽자 왕자의 예로 장례를 치르다
五年秋八月 왕이 유인원, 부여융과 함께 웅진의 취리산에서 맹세를 맺다
五年秋八月 왕자 정명을 태자로 삼다
五年 백성을 동원하여 군대에 쓸 물건을 하서주로 옮기다
五年 비단 한 필의 기준이 바뀌다
六年春二月 서울에 지진이 일어나다
六年夏四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六年夏四月 나마 한림과 삼광이 당에 들어가 숙위하다
六年夏四月 왕이 당에 군사를 요청하다
六年冬十二月 당의 이적과 학처준이 연정토의 항복을 받다
七年秋七月 큰 잔치를 베풀다
七年秋七月 당 황제가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일원을 운휘장군으로 삼다
七年秋七月 대나마 즙항세를 보내어 당에 조공하다
七年秋七月 당 고종이 신라 군사가 평양에 모이도록 명령하다
七年秋八月 왕이 장군을 이끌고 출정하다
七年秋九月 왕이 한성정에 도착하다
七年冬十月二日 영공이 대왕에게 편지를 보내다
七年冬十一月十一日 왕이 영공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군사를 돌리다
七年冬十二月 중시 문훈이 죽다
七年冬十二月 왕이 대장군의 정절을 받다
八年 아마가 와서 항복하다
八年春三月 파진찬 지경을 중시로 삼다
八年 파진찬 용문을 비열홀주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四月 꼬리별이 천선을 지키다
八年夏六月十二日 유인궤와 김삼광이 당항진에 도착하다
八年夏六月二十一日 여러 사람을 총관으로 삼다
八年夏六月二十二日 고구려의 군, 성이 귀순하고 인문 등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七日 왕이 당 군영으로 나아가다
八年夏六月二十九日 여러 도의 총관들이 행군하다
八年秋七月十六日 당 군대와 회합하라고 명령하다
八年秋九月二十一日 고구려 왕이 항복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二日 고구려 정벌에 대한 공을 포상하다
八年冬十月二十五日 국원 사신 용장의 잔치 대접을 받다
八年冬十一月五日 고구려 포로를 데리고 서울로 돌아오다
八年冬十一月六日 문무 관료를 이끌고 선조의 사당을 찾다
八年冬十一月十八日 전쟁에서 죽은 자를 포상하다
八年冬十二月 영묘사에 불이 나다
九年春一月 신혜 법사를 정관대서성으로 삼다
九年春一月 승려 법안이 자석을 구하다
九年春二月二十一日 신하에게 교서를 내리다
九年夏五月 천정군 등 세 군의 백성을 진휼하다
九年夏五月 당에 자석을 바치고, 흠순과 양도를 보내 사죄하다
九年 사찬 구진천이 당에 들어가 쇠뇌를 만들다
九年 여러 신하에게 목장을 나누어 주다
十年春一月 당에 억류되었던 양도가 죽다
十年春三月 설오유가 고연무와 함께 옥골에 나아가다
十年夏四月四日 설오유와 고연무가 말갈 군사를 크게 무찌르다
十年夏六月 모잠이 안승을 임금으로 받들어 귀순하자 이들을 금마저에 머물게 하다
十年夏六月 한 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은 여자에게 벼를 주다
十年秋七月 백제의 남은 무리를 여러 곳에서 물리치다
十年秋七月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하고 책문을 전하다
十年冬十二月 토성이 달에 들어가다
十年冬十二月 중시 지경이 물러나다
十年冬十二月 왜국이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고 하다
十年冬十二月 수세와 진주가 백제의 남은 무리를 진압하다
5.2. 《삼국사기》 7권
《삼국사기》 〈문무왕 하〉十一年春一月 이찬 예원을 중시로 삼다
十一年春一月 백제에 쳐들어갔다가 당주 부과가 죽다
十一年春一月 말갈 군사의 목을 베다
十一年春一月 당 군사의 침공에 대비하여 옹포를 지키게 하다
十一年春一月 흰 물고기가 뛰어 들어가다
十一年夏四月 흥륜사 남문에 벼락이 치다
十一年夏六月 장군 죽지 등이 백제 가림성의 벼를 밟다
十一年夏六月 당 군사와 석성에서 싸우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당 총관 설인귀가 왕에게 편지를 보내 회유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대왕이 설인귀에게 답서를 보내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신라와 당이 백제를 멸망시키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신라가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신라와 당이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신라와 웅진도독부가 취리산에서 맹세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신라와 당이 고구려 원정에 나서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신라와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웅진도독부가 신라를 압박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신라와 웅진도독부가 서로 반목하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문무왕 답서: 문무왕이 설인귀에게 답장을 보내다
十一年秋七月二十六日 소부리주를 두고 아찬 진왕을 도독으로 삼다
十一年秋九月 당 장군 고간 등이 대방을 쳐들어오다
十一年冬十月六日 당 조운선을 치다
十二年春一月 백제의 고성성을 공격하여 이기다
十二年春二月 백제의 가림성을 이기지 못하다
十二年秋七月 당 장수 고간과 이근행이 평양에 군영을 설치하다
十二年秋八月 신라와 고구려 군사가 당나라와 싸우다
十二年秋八月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살별이 북쪽에서 일곱 번이나 나타나다
十二年秋九月 왕이 당에 용서를 구하다
十二年 사람들이 굶주리다
十三年春一月 커다란 별이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떨어지다
十三年春一月 강수를 사찬으로 삼다
十三年春二月 서형 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夏六月 호랑이가 대궁 뜰에 들어오다
十三年秋七月一日 김유신이 죽다
十三年秋七月一日 반란을 일으키려던 아찬 대토를 죽이다
十三年秋八月 파진찬 천광을 중시로 삼다
十三年秋八月 사열 산성을 늘려 쌓다
十三年秋九月 국원성 등 여러 성을 쌓다
十三年秋九月 서해를 지키게 하다
十三年秋九月 당과 말갈·거란의 군사를 아홉번 싸워 물리치다
十三年 당과 거란·말갈 군사가 고구려의 여러 성을 공격하다
十三年 주군에 외사정을 두다
十三年 국경을 지키는 병사를 다시 두다
十四年春一月 대나마 덕복에 의해 새 역법을 사용하다
十四年春一月 당이 김인문을 신라 왕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다
十四年春二月 궁궐 안에 연못을 파다
十四年秋七月 큰 바람이 황룡사의 불전을 무너뜨리다
十四年秋八月 왕이 서형산 아래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四年秋九月 의안 법사를 대서성으로 삼다
十四年秋九月 안승을 보덕왕으로 봉하다
十四年秋九月 영묘사 앞 길에서 군대를 사열하고 육진 병법을 보다
十五年春一月 각 관청 및 주군에 구리 인장을 만들어 내려주다
十五年春二月 유인궤가 칠중성을 공격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다
十五年秋九月 설인귀가 천성을 치자 맞서 싸워 크게 이기다
十五年秋九月二十九日 이근행이 매초성에 진을 치자 공격하여 내몰다
十五年秋九月 사신을 당에 보내 토산물을 바치다
十五年秋九月 안북하를 따라 관과 성을 설치하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아달성을 노략질하자 소나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거란·말갈 군사가 칠중성을 포위하자 유동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말갈이 적목성을 에워싸서 공격하자 탈기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가 석현성을 빼앗자 선백과 실모 등이 싸우다 죽다
十五年秋九月 당 군사와 열여덟 번 싸워 전과를 올리다
十六年春二月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다
十六年秋七月 살별이 북하와 적수 사이에서 나타나다
十六年秋七月 당 군사가 도림성을 공격하자 거시지가 맞서 싸우다 죽다
十六年秋七月 양궁을 짓다
十六年冬十一月 사찬 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나당전쟁 종전)
十六年冬十一月 재상 진순이 물러나기를 요청하자 안석과 지팡이를 주다
十七年春三月 왕이 강무전 남문에서 활쏘기를 보다
十七年春三月 좌사록관을 설치하다
十七年春三月 소부리주에서 횐 매를 바치다
十八年春一月 선부에 령 1인을 두다
十八年春一月 좌이방부와 우이방부에 경을 각각 1인씩을 더 두다
十八年春一月 북원소경을 설치하다
十八年春三月 대아찬 춘장을 중시로 삼다
十八年夏四月 아찬 천훈을 무진주 도독으로 삼다
十八年夏五月 북원에서 기이한 새를 바치다
十九年春一月 서불한 천존을 중시로 삼다
十九年春二月 사신을 보내 탐라국을 다스리다
十九年春二月 궁궐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고치다
十九年夏四月 형혹이 우림을 지키다
十九年夏六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고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十九年秋八月 태백이 달에 들어가다
十九年秋八月 각간 천존이 죽다
十九年秋八月 동궁을 짓고 문의 이름을 정하다
十九年秋八月 사천왕사가 완성되다
十九年秋八月 남산성을 늘려 쌓다
二十年春二月 이찬 김군관을 상대등으로 삼다
二十年春三月 보덕왕 안승에게 예물을 주고 왕의 여동생의 딸과 혼인시키다
二十年夏五月 보덕왕 안승이 왕의 생질과의 결혼을 감사하다
二十年夏五月 가야군에 금관소경을 설치하다
二十一年春一月一日 하루 종일 밤처럼 어둡다
二十一年春一月 사찬 무선이 정예군사를 데리고 비열홀을 지키다
二十一年春一月 우사록관을 두다
二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二十一年夏五月 별똥별이 삼대성을 침범하다
二十一年夏六月 천구가 서남쪽에 떨어지다
二十一年夏六月 성을 새로 쌓으려고 하다
一年秋七月一日 문무왕이 죽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보장왕과 더불어 책 2권 분량 기록을 갖고 있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삼국시대 모든 왕[16]들 중에서도 기록이 가장 많으며, 고려 시대의 웬만한 왕들도 문무왕보다 기록이 적다.
6.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문무왕/대중매체 문서 참고하십시오.7. 기타
- 불교 신자임에도 절간에 대한 토지 지급을 일시적으로 끊거나 줄이는 정책을 하며 고려 제8대 현종보다 종교 문제에 대해 성공했다고 《동국통감》에 기록했다. 실질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불교에 대한 개혁 정책을 가장 처음 실시했다. 비록 미완이었지만 유교적 시각에서도 꽤 높은 평을 받은 군주였다.
- 《삼국사기》에서 문무왕의 외모에 대해 외모가 뛰어났으며,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고 기록했으며, 문무왕릉비에는 문무왕의 풍모가 뛰어났고, 도량은 바다와 하천과 같았으며 위엄은 우레와 같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 역대 신라의 군주들 중에서는 비교적 신라의 뿌리깊은 신분제도였던 골품제에 크게 얽메이지 않고 능력과 공적 위주의 논공행상이나 인사를 벌이는 모습도 종종 보여주었는데, 대표적으로 말갈을 상대로 무쌍을 찍었던 맹장 소나를 진골만이 받을 수 있는 벼슬인 잡찬(신라 17관등 중 3위)에 추증한 점이나, 군공을 세워 김유신의 추천을 받은 장군 열기를 사찬 벼슬에 올려준 사례가 있다. 열기는 《삼국사기》 열전에도 이름을 올렸지만 '가문을 알 수 없다'고 적혀 있는 데다가 김유신의 추천을 받았을 때도 문무왕은 처음에 "사찬은 너무 지나친 상 아닌가?"라고 의문을 표시했던 기록도 있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골품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17]
- 사극에서는 아버지 무열왕이나 외삼촌인 김유신에 비해 비교적 비중이 적은 편이다. 삼국 통일기의 전쟁에서 문무왕의 활약은 아버지나 외삼촌 못지 않은데, 태자 시절 백제 공격 때는 김유신과 함께 직접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고 고구려 멸망이나 나당전쟁 승전은 문무왕 치세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나 삼국 통일기를 다룬 사극들이 통일전쟁의 서막을 연 무열왕과 김유신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한 세대 뒤의 문무왕은 그저 이들이 주도한 통일 사업을 마무리하는 군주 정도로 간략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삼국지》에서 도원결의 ~ 제갈량 사망까지만 상세하게 나오고 그 뒤는 아예 생략하거나 대충 넘어가는 것과도 비슷하게, 어떤 의미에서는 그 업적이나 중요도에 비해 사극에서 크게 조명 받지 못한 역사 인물이다. 《삼국지》도 그렇듯 후반부까지 똑같은 비중으로 제대로 다루기엔 전반부터 달려온 작가의 필력과 근성 문제나 사극의 경우 전쟁씬 연출의 체력적ᆞ비용적 부담이 큰 것으로 보인다.
- 다만 대중적으로는 아버지나 외삼촌에 비해 이미지가 더 좋은 편. 삼국통일이나 당으로부터 삼한을 지켜내는 위업을 달성했다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죽기 전 유언의 무게감이나 대왕암 전설의 신비한 이미지가 크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대왕암 전설은 이후 판타지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 2003년 4월,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DDH-II) 2번함이 문무대왕함(DDH-976)이란 함명으로 진수되었다. 2009년 4월,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청해부대)에 다른 함정들과 순환 파병되기 시작했다.
- 2021년 7월 21일, 경주시 감포읍에 짓는 한국원자력연구원 분원을 문무대왕과학연구소라고 명명한다. # 감포읍은 문무대왕면 바로 옆에 있는 해안이다. 소형모듈원전(SMR) 연구를 중점적으로 할 예정이며, 2025년 완공 예정이다. 문재인 정부가 대전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있던 한국원자력연구원을 경주로 이전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가, 반발에 부딪치자 분원을 크게 짓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8.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wiki style="margin:-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4A2D5B><tablebgcolor=#4A2D5B> | 문무왕 관련 문서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ord-break: keep-all;" | <colbgcolor=#4A2D5B,#2d2f34><colcolor=#fbe673,#f9d537> 생애 및 활동 | <colbgcolor=#fff,#1f2023>생애 | |
관련 문서 | 문무대왕릉 · 문무왕릉비 · 감은사 · 문무대왕함 | ||
매체 | 대중매체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A2646, #4a2d5b 20%, #4a2d5b 80%, #3A2646); color: #fbe673;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DDD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ont-size:0.85em; letter-spacing: -1.5px" | ||||||||||||||||||||||||||
선도성모 | 은열왕 | 문열왕 | 감문왕 | 문의왕 | 장무왕 | 장렬왕 | ||||||||||||||||||||
| ||||||||||||||||||||||||||
朴1 시조 혁거세왕 | 알영 | |||||||||||||||||||||||||
| ||||||||||||||||||||||||||
| | |||||||||||||||||||||||||
朴2 남해왕 | 운제 | 청평군 | 박민 | 세조 알지왕 | 사요왕 | |||||||||||||||||||||
| | |||||||||||||||||||||||||
| | | ||||||||||||||||||||||||
朴3 유리왕 | 아효 | 昔4 시조 탈해왕 | 지소례왕 | 일지왕 | 태조 성한왕 | 사요왕의 딸 | ||||||||||||||||||||
| | |||||||||||||||||||||||||
| | | ||||||||||||||||||||||||
朴7 일성왕 | 朴5 파사왕 | 석구추 | 김아도 | 허루왕 | ||||||||||||||||||||||
| | | | |||||||||||||||||||||||
朴8 아달라왕 | 朴6 지마왕 | 昔9 벌휴왕 | 김수류 | 마제왕 | ||||||||||||||||||||||
| | | ||||||||||||||||||||||||
| | | ||||||||||||||||||||||||
아도왕 | 세신왕 | 이칠왕 | 김욱보 | |||||||||||||||||||||||
| | | ||||||||||||||||||||||||
| | | | |||||||||||||||||||||||
昔11 조분왕 | 昔12 첨해왕 | 昔10 내해왕 | 술례부인 | 구도왕 | ||||||||||||||||||||||
| | | | | | |||||||||||||||||||||
| | | | |||||||||||||||||||||||
| | | | | ||||||||||||||||||||||
昔14 유례왕 | 석걸숙 | 내음왕 | 석우로 | 광명부인 | 金13 미추왕 | 김말구 | ||||||||||||||||||||
| | | ||||||||||||||||||||||||
| | | ||||||||||||||||||||||||
昔15 기림왕 | 昔16 흘해왕 | 金17 내물왕 | 김대서지 | |||||||||||||||||||||||
| | |||||||||||||||||||||||||
| | | | |||||||||||||||||||||||
金19 눌지왕 | 파호왕 | | 김미사흔 | 金18 실성왕 | ||||||||||||||||||||||
| | | | |||||||||||||||||||||||
金20 자비왕 | 습보왕 | | 김내숙 | |||||||||||||||||||||||
| | | | |||||||||||||||||||||||
| | | | |||||||||||||||||||||||
金21 소지왕 | 金22 지증왕 | | 선혜부인 | 김물력 | ||||||||||||||||||||||
| | | ||||||||||||||||||||||||
| | | | |||||||||||||||||||||||
聖23 법흥왕 | 입종왕 | | 김거칠부 | |||||||||||||||||||||||
| | |||||||||||||||||||||||||
| | |||||||||||||||||||||||||
聖24 진흥왕 | 김숙흘종 | | ||||||||||||||||||||||||
| | | ||||||||||||||||||||||||
| | | ||||||||||||||||||||||||
복승왕 | 동륜왕 | 만천왕 | 聖25 진지왕 | | 김만명 | |||||||||||||||||||||
| 장인 | | | |||||||||||||||||||||||
| | | | | | | ||||||||||||||||||||
마야부인 김행의 | 聖26 진평왕 | 진정왕 | 진안왕 | 문흥왕 | 김마차 | | ||||||||||||||||||||
| ||||||||||||||||||||||||||
| | | | | ||||||||||||||||||||||
| | | | | | | ||||||||||||||||||||
聖27 선덕왕 | 김천명 | 비담 | 聖28 진덕왕 | 김알천 | 眞29 태종 무열왕 | 현성왕 | 흥무왕 | |||||||||||||||||||
| | |||||||||||||||||||||||||
| | | ||||||||||||||||||||||||
眞30 문무왕 | 김인문 | 무열왕의 딸 | 신영왕 | |||||||||||||||||||||||
| | | ||||||||||||||||||||||||
眞31 신문왕 | | 흥평왕 | ||||||||||||||||||||||||
| | | ||||||||||||||||||||||||
| | | ||||||||||||||||||||||||
眞32 효소왕 | 眞33 성덕왕 | | 명덕왕 | |||||||||||||||||||||||
| | | ||||||||||||||||||||||||
| | | | | ||||||||||||||||||||||
개성왕 | 김사소 | 효상태자 | 眞34 효성왕 | 眞35 경덕왕 | 김주원 | 眞38 열조 원성왕 | ||||||||||||||||||||
| | | | |||||||||||||||||||||||
| | | | | ||||||||||||||||||||||
眞37 선덕왕 | 眞36 혜공왕 | 김헌창 | 혜충왕 | 헌평태자 | 혜강왕 | |||||||||||||||||||||
| | |||||||||||||||||||||||||
| | | | |||||||||||||||||||||||
眞39 소성왕 | 眞41 헌덕왕 | 眞42 흥덕왕 | 선강왕 | 익성왕 | 성덕왕 | |||||||||||||||||||||
| | | | | | |||||||||||||||||||||
| | | | | | |||||||||||||||||||||
眞40 애장왕 | 헌덕왕태자 | ? | 眞44 민애왕 | 眞43 희강왕 | 眞45 신무왕 | 眞47 헌안왕 | ||||||||||||||||||||
| | | | |||||||||||||||||||||||
| 의공왕 | 眞46 문성왕 | 궁예(?) | |||||||||||||||||||||||
| | | ||||||||||||||||||||||||
| | | | |||||||||||||||||||||||
성무왕 | ─ | ? | 眞48 경문왕 | 혜성왕 | 문성왕태자 | 문성왕의 딸 | ||||||||||||||||||||
| | | ||||||||||||||||||||||||
| | | | |||||||||||||||||||||||
선성왕 | 흥렴왕 | 박정화 | 眞49 헌강왕 | 眞50 정강왕 | 眞51 진성왕 | 의흥왕 | ||||||||||||||||||||
| 양부 | | | |||||||||||||||||||||||
| | | | | ||||||||||||||||||||||
朴53 신덕왕 | 김의성 | 김계아 | 眞52 효공왕 | 김억렴 | 신흥왕 | |||||||||||||||||||||
| | |||||||||||||||||||||||||
| | |||||||||||||||||||||||||
朴54 경명왕 | 朴55 경애왕 | 眞56 경순왕 | ||||||||||||||||||||||||
| | |||||||||||||||||||||||||
| | |||||||||||||||||||||||||
박언창 | 박언침 | 마의태자 | ||||||||||||||||||||||||
{{{#!wiki style="margin:-5px -10px" | [왕조 보기] | |||||||||||||||||||||||||
[朴] 밀양 박씨 왕조 | [聖] 경주 김씨 성골왕조 | |||||||||||||||||||||||||
[昔] 경주 석씨 왕조 | [眞] 경주 김씨 진골왕조 | |||||||||||||||||||||||||
[金] 경주 김씨 마립간조 | 추존 국왕 및 왕족 | |||||||||||||||||||||||||
[범례] | ||||||||||||||||||||||||||
세로선(│) : 부자, 사위관계 / 가로선(─): 형제, 자매관계 / 혼인관계: 붉은 두줄#= |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직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 |||
단군 | ||||
동명성왕 | 온조왕 | |||
이사부 | 백결선생 | 의자왕 | 계백 | |
김관창 | 김유신 | 문무왕 | 원효 | |
혜초 | 장보고 | 고왕 | 강감찬 | |
서희 | 정중부 | 최무선 | 죽림고회 | |
김부식 | 지눌 | 의천 | 이종무 | |
정몽주 | 문익점 | 최충 | 일연 | |
최영 | 황희 | 맹사성 | 장영실 | |
신숙주 | 한명회 | 이이 | 이황 | |
신사임당 | 곽재우 | 조헌 | 김시민 | |
이순신 | 태조 | 정종 | 태종 | |
세종 | 문종 | 단종 | 세조 | |
사육신 | 생육신 | 논개 | 권율 | |
홍길동 | 임꺽정 | 삼학사 | 박문수 | |
한석봉 | 김홍도 | 김병연 | 김정호 | |
영조 | 정조 | 정약용 | 전봉준 | |
황진이 | 홍경래 | 김옥균 | ||
안중근 | 이완용 | 윤동주 | 지석영 | |
손병희 | 유관순 | 안창호 | 방정환 | |
김두한 | 이상 | 이중섭 | ||
간접적으로 언급된 인물/단체 | ||||
민족대표 33인 | 김좌진 | |||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 ||||
기울임체 는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 }}}}}}}}} |
[1] 무열왕 표준영정과 혼동되는 경우도 많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당나라에서 받아 온 복식대로 금관 대신 복두를 쓰고 단령을 입어야 한다는 점에서 고증 오류가 있다. 다만 670년 이후 시점을 그린 그림인 당나라 장회태자 이현의 무덤 벽화 예빈도에서 신라 사신이 여전히 당인들과 달리 조우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무열왕이나 문무왕 등 7세기 중반까지는 사모단령과 기존 복식이 혼용되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대한제국 시대 교과서인 "초등대한역사"에 제시된 문무왕의 상이 있는데 당대에 그렸던 문무왕의 영정을 보고 그렸는지 불명이다.[2]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생년이나 수명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 생년은 문무대왕비에 기록된 '왕이 죽었을 때 56세'라는 내용으로 역산한 것. 《삼국유사》에서 아버지 김춘추와 어머니 문희의 만남에 얽힌 유명한 이야기에서 이를 해결해주는 사람이 선덕여왕인데, 626년은 진평왕 재위기다. 문희와의 에피소드가 선덕여왕이 공주였을 때 있었던 에피소드로 해석하는 설이 이런 이유 때문에 생겼다. 게다가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이 629년 생인데 그 역시 진평왕 때 태어났다. 그로 볼 때 위 주장이 사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A] 음력 7월 1일, 율리우스력 7월 21일[A] [5] 642년 이전 혼인.[6] 요석공주라는 설이 있지만, 이 사람은 설화적 성격이 강한 《삼국유사》에만 등장하는 인물이고, 설령 실존인물이라 할지라도 6두품인 원효대사와 혼인하는 것을 보면 적녀가 아닌 서녀로 추정되며, 적녀만을 지칭하는 "딸 5명"에 포함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요석'은 이름이 아니고, 거처하던 궁의 이름이다. 태종 무열왕 치세(654~661)에 재혼. 과거의 노처녀 기준을 생각하면 첫 결혼은 650년 정도에 한 것으로 추정된다.[7]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기준 3녀. 655년에 혼인.[8] 원성왕의 증조할머니. 안승의 장모이기도 한데 그녀의 딸이 혼인 당시 결혼 적령기였다면 그녀는 665년 정도에 혼인한 것으로 추정된다.[9] 신목왕후의 모친.[10] 일단은 둘 모두 성덕왕의 고자매(姑姉妹)라고는 하는데, 아버지의 관등이 각각 5두품인 나마, 4두품인 대사이기 때문에 가능성이 낮다. 정황상 위의 왕자들처럼 당나라에 보낼 때 왕족이라고 포장하려고 그런 듯하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포모(泡母)는 충주 사람이며 시호가 정완부인(貞完夫人)이라고 한다. 따라서 가왕녀가 확실해 보인다.[11] #[12] 빅데이터 기반 텍스트 네트워크 분석을 활용한 '문무대왕(文武大王) .[13] 지도부인 또는 비형랑=김용수 설을 따를 경우 도화녀.[14] 마야부인 또는 승만부인, 혹은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후궁.[15] 해당 문서를 들어가면 알 수 있듯이 실질적인 행정 구역은 아니었다.[16] 고구려는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백제는 온조왕.[17] 사실 열기의 사례는 문무왕이 의문을 표시하자 김유신이 "관직은 공평한 그릇이니 공을 세운 자에게 보수로 주는 것을 어찌 지나치다 하십니까?"라고 간언하자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뒷날 열기는 김유신 사후 김유신의 아들 김삼광에게 청해서 삼년산군 태수 자리를 받아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