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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에 세 형제가 내조하여 각각 받은 칭호. 시기 불명. 고려사상 확인됨. ** 백제 문주왕에게 담왕이 받은 칭호로 족보상 기록됨, 후대 도동음률(명칭에 이설 있음)은 삼국사기상 좌평으로 확인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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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d473d><colcolor=#fbe673> 탐라국 초대 군주 고을나왕 | 髙乙那王 | |
본관 | 제주 고씨(濟州 髙氏) |
형제 | 양을나(良乙那)[1], 부을나(夫乙那)[2] |
출생지 | 삼성혈(三聖穴) |
생몰년도 | ? ~ ? |
재위기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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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탐라국 삼성신화(또는 설화)의 등장인물. 제주 고씨의 시조이다. 사실상 신화의 영역에 있는 인물이라 실존 여부는 불확실하다.2. 생애
탐라국을 세우고 1000년을 살았다고 한다. 한라산 북쪽에 있는 삼성혈에서 고을라, 부을라, 양을라 삼신인이 솟아났는데, 그들의 용모는 매우 크고 비범한 모습이었다고 하며,[3] 이 세 명이 돌을 세우고 살 곳을 정하고 활로 쏘아 북두칠성을 보면서 3개로 나누어 수도를 정하고 국호를 탐라라 하였다. 이 때 일도동 이도동 삼도동으로 나뉘었다고 한다.탐라현(耽羅縣)은 전라도(全羅道)의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 『고기(古記)』에서 말하기를 “태초(太初)에 사람이 없었는데, 세 신인(神人)이 땅으로부터 솟아 나왔으니[4], 맏이는 양을나(良乙那)라고 하였고, 그 다음을 고을나(髙乙那)라고 하였으며, 셋째는 부을나(夫乙那)라고 했다. 세 사람은 거친 땅에서 사냥질을 하면서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먹었다. 하루는 자주색 진흙으로 봉해진 나무 상자가 바다에서 떠다니다 동쪽 바닷가에 닿은 것을 보고 가서 열어보니, 상자 안에 또 돌 상자가 있었으며, 붉은 띠와 자주색 옷을 입은 사자(使者) 한 사람이 따라 나왔다. 돌 상자를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망아지와 송아지[駒犢]들과 오곡(五穀)의 종자가 나왔다. 사자가 ‘우리는 일본국(日本國)의 사신입니다. 우리 왕이 이 세 딸을 낳고는, 「서해(西海)의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구나」 하고는 저에게 분부하여 세 딸을 모시고 여기에 오도록 한 것입니다. 마땅히 배필로 삼아 대업(大業)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한 후 홀연히 구름을 타고 가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순서에 따라 세 여자를 나누어 아내로 삼고서, 샘이 달고 땅이 비옥한 곳으로 가서, 화살을 쏘아 땅을 점치고는 양을나가 사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였고, 고을나가 사는 곳을 제이도(第二都)라 하였으며, 부을나가 사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하였다. 처음으로 오곡을 파종하고 또 가축을 길러 나날이 부유하고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
고려사 지리지 탐라현조.
고려사 지리지 탐라현조.
3. 여담
- 을나(乙那)라는 이름은 탐라어를 음차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은 이름은 여진족의 이름을 음차할 때도 쓰였다. 이름자에 을나가 들어가는 여진족 인물로는 고려 현종 시기 기록에 나타나는 추장 서을나(徐乙那), 동여진의 오을나(烏乙那)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