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1-27 06:22:00

탐라총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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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간섭기의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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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군사4. 주요 정치인

1. 개요

탐라총관부, 또는 탐라국군민도다루가치총관부(耽羅國軍民都達魯花赤摠管府)는 삼별초의 난 직후 삼별초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만들어진 원 간섭기 정동행성의 하위 행정구역이다.

2. 역사

송나라 토벌과 일본 토벌때부터 원나라제주도를 요충지로 여기고 전초기지로 사용하고 있었다. 원은 삼별초의 항쟁을 계기로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으려고 했다. 1273년 탐라국초토사가 설치됐고, 양양 전선에서 활약하던 실리백(失里伯)이 탐라국초토사로 임명된다. 탐라국초토사는 곧 탐라총관부로 바뀌어 다루가치가 파견된다. 고려사에서는 1273년을 다루가치가 처음 파견된 시기로 기록했다. 처음으로 확인되는 탐라국다루가치는 1275년에 파견된 손탄이고, 손탄 뒤에 실리백의 아들 탑랄적이 다루가치가 됐다. 1277년 목마장이 설치된다.

1284년, 원에 갔던 다루가치 탑자적이 돌아온다. 원사에 따르면 이 해에 탐라국안무사가 설치되는데, 고려사에서는 전과 마찬가지로 제주 다루가치가 돌아왔다고 서술한다. 원사에서 '탐라국군민안무사사 다루가치'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안무사사(安撫使司)는 다루가치가 겸한 것으로 추정된다. 1294년 원세조가 죽고 성종이 즉위하면서 충렬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탐라국고려에게 돌려준다. 1300년 (정동등처행)중서성의 청에 따라 탐라총관부가 재차 설치되자 충렬왕이 이듬해인 1301년 탐라를 다시 본국(고려)에 예속시키고 만호부를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원에서는 충렬왕의 의견을 받아들여 탐라군민만호부를 세웠고, 탐라총관부는 폐지된다.

이 때를 기점으로 좌씨가 국내에 정착해 살게 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3. 군사

1273년 원나라에서 온 진수군 1,700명이 제주도에 주둔했다. 제주도에는 고려인 주둔군도 있었고, 두 번째의 일본 원정에서 군대의 수를 다 채우기 힘드니 고려인 진수군 1,000명만을 보낼 것을 청한다. 1281년에는 탐라의 진수군 50명이 육지에 나와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으며, 군사 관련 업무는 정동행성에 이양된다. 1281년에서 1282년 사이 원나라에서 몽골인과 한인(漢人) 군대 1,400명을 보내 진수군이 늘어나고 원나라에서 장비 등이 지급된다. 1293년[1] 탐라 진수군의 지휘권은 고려 국왕에게 넘어간다. 1294년 기준으로 탐라 진수군은 1,400명으로, 고려인 1,000명에 몽골인 400명으로 구성됐다. 다루가치 탑랄적의 제안으로 몽골인 군사마저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총관부는 탐라의 군사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뗀다.

4. 주요 정치인

이름 재임기간 비고
탐라국초토사
실리백(失里伯) 1273 ~ ?
다루가치
손탄(遜攤) 1275 ~ ?
탑랄적(塔剌赤) 1276 ~ ?
탑자아(塔刺兒) 1287 ~ 1293?
아살(阿撒) 1293 ~ ? [2]
노열니타(奴列你他) 1333 ~ ?


[1] 음력으로는 1292년 12월.[2] 아철(阿撤)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