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colbgcolor=#8d473d> 역사 | <colcolor=#000,#fff>연표 · 주호국 · 탐라총관부 · 탐라만호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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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간섭기의 고려 |
1. 개요
탐라만호부, 또는 탐라군민만호부(耽羅軍民萬戶府)는 탐라총관부 폐지 이후 제주도에 설치된 원 간섭기 정동행성의 하위 행정구역이다.2. 역사
탐라총관부가 폐지된 뒤인 1301년 5월, 정동행성 산하 경상도와 전라도의 진변만호부의 예를 따라 제주도에 만호부가 설치됐다. 설치 두 달 전인 같은 해 3월에 고려와 원 양국간 소통에서 오해로 탐라총관부가 다시 세워졌었고, 충렬왕이 다시 표문을 올려 오해를 바로잡았다. 한편 고려는 탐라총관부가 있음에도 따로 제주목을 설치했고, 이때부터 제주도의 행정구조는 고려에서 보낸 만호와 제주목사 두 지방관이 공존하는 형태가 됐다. 그 외 고려에서 보낸 지방관으로는 빈발하는 반란에 민심을 수습하려는 안무사, 선무사 등이 보내지기도 했다. 한편 도내에는 여전히 전통적 지배층인 성주·왕자들이 있었고, 주요 군사 시설인 목마장을 운용하는 몽골인 목호들이 많았다.고려가 제주도 지배권을 넘겨받았지만 원나라가 제주도에 간섭하는 경우가 잦았다. 1300년부터 1305년까지 6년간은 원나라 황태후가 말을 기른다는 이유로 원나라가 직할 지배했었다. 1318년에는 탐라의 포렵호(捕獵戶)를 잡으라는 원나라 황제의 칙서가 정동행성으로 전달되고, 만호부에서 황제의 명에 따라 반적들을 제압하는 일도 있었다. 1336년 사용·엄복의 난이 일어난 것이 원나라에 전해진 뒤에는 원나라 출신 관리가 제주도에 보내졌다.
1360년대와 70년대에 공민왕이 반원 노선을 확실히 하고 명나라를 가까이하자 몽골인 목호들은 고려에 반감을 느꼈다. 1362년에는 목호들이 사병을 동원할 수 있던 성주 고복수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제주만호를 살해했다. 반란 정권은 북원과 소통하며 만호 파견을 요청하고 고려에 저항했지만 이듬해 말에 고려에서 파견된 제주목사 성준덕(成俊德)에 의해 진압됐다. 그 뒤에도 1372년에는 목호의 난이, 1375년에는 차현유(車玄有)의 반란이 있었으며, 1376년에는 만호 김중광이 몽골 목호 강바얀(姜伯顔)의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제주도에서 반란이 있을 때마다 고려는 백성들을 안무하기 위한 지방관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고려 말이 돼서 제주 성주 고신걸과 그 아들 고봉례를 개경에 인질로 잡아두게 되면서 마침내 반란이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이름이 확인되는 제주 만호는 1398년에 조선 태조로부터 비단을 받은 김천신(金天伸)으로, 3년 전에는 경상도 수군 첨절제사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3. 하위 행정구역
3.1. 서도천호소
일명 제주서도(濟州西道). 『동문선』의 「성주고씨가전」을 보면 고씨들이 서도(西道) 또는 서해도(西海道)의 부천호(副千戶)를 세습하는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태종실록』에 성주를 좌도지관으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천호소의 이름은 조선 태종 4년(1404) 서도정해진(西道靜海鎭)으로 바뀌기 전까지 유지됐다. 태종 16년(1416)에 들어 대정현(大靜縣) 현감이 파견됐다.고득종의 말에 따르면 서쪽 끝에 목마장이 있었다.
3.2. 동도천호소
일명 제주동도(濟州東道). 『태종실록』에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미루어, 서도천호소의 경우처럼 문씨 왕자들이 동도의 부천호를 세습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호소의 이름은 조선 태종 4년(1404) 동도정해진(東道靜海鎭)으로 바뀌기 전까지 유지됐다. 조선 태종 16년(1416)에 들어 정의현(旌義縣) 현감이 파견됐다.고득종의 말에 따르면 동쪽 끝에 목마장이 있었다.
4. 역대 만호
성명 | 임기 | 비고 |
임숙(林淑) | ? ~ 1323 | |
박순인(朴純仁) | 1323 ~ ? | |
박도손(朴都孫) | ? ~ 1362 | 임기중 피살 |
문아단부카(文阿但不花) | 1362 ~ 1363? | |
이용장(李用藏) | ? ~ 1372 | 임기중 피살 겸 목사 |
김중광(金仲光) | ? ~ ? | |
김천신(金天伸)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