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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득종

高得宗
1388년(고려 우왕 14) ~ 1452년(조선 문종 2)

1. 개요2. 생애
2.1. 생애 초반2.2. 목장 관련 자문2.3. 사헌부의 탄핵, 파직2.4. 외교 사절
2.4.1. 관압사(명나라)2.4.2. 통신사(일본)2.4.3. 성절사(명나라)
2.5. 재등용2.6. 문종 시기
3. 평가4. 가족관계

1. 개요

조선 전기의 문신. 동지중추원사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했다. 본관은 제주(濟州)로, 영곡공파(靈谷公派)의 파조이다. 자는 자전(子傳), 호는 영곡(靈谷).

제주도 출신으로 그 조상은 대대로 탐라국 성주를 지냈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1388년(고려 우왕 14) 전라도 제주도에서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아버지 고봉지(高鳳智, ? ~ 1411)의 아들로 태어났다.

10세가 되자 아버지 고봉지를 따라 육지로 나왔고 생원시에 응시해 입격했다. 고봉지는 상호군 벼슬을 지내다가 병을 앓고 제주도에 돌아갔다. 1411년 7월에 부친상을 당했는데 고득종은 부친의 묘소 옆에 초가집을 짓고는 3년상을 치렀다. 3년 뒤인 1413년 6월, 제주도안무사 윤임은 고득종 등을 눈여겨보고 그가 포상받을 만한 효자라는 장계를 올렸다. 같은 해 11월 조정에 말을 바치고 쌀과 콩을 받았고 이후 부직장(副直長: 정8품)에 제수되었다.

1414년(태종 14) 알성시 문과에 을과 3등 3위로 급세하고# 나라에서 쓰는 술을 40병 받았다. 술을 받은 사람은 총 3명으로 한 명은 장원급제한 권도(權蹈), 나머지 한 사람은 양녕대군을 교육하던 이수(李隨)였다. 실록에서는 고득종이 이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상을 받은 이유는 그가 탐라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득종은 처음에는 감찰직이 제수됐는데, 태종의 장인 민씨 가문에서 사헌부에 고득종의 죄를 캐고 다니게 했다. 고득종은 부득이하게 출근할 수 없게 됐고 1417년 성균주부로 좌천됐다. 1418년 온서령을 지내다가 중국에 보낼 세금을 충당하기 위해 경차관에 임명돼 고향 제주로 돌아갔다. 태종은 먼 길을 떠날 고득종을 따로 불러 단의 한 벌과 약을 하사했다. 고득종은 조미와 목화, 여성복을 민간에 팔고 금은을 얻었다. 이 해 10월에 은 1771냥을 들고 서울에 돌아갔는데, 태종은 이미 죽고 세종이 즉위한 뒤였다. 이듬해 제주 청년 문충덕과 함께 제주도의 토지 등급을 낮춰 조세를 감면해줄 것을 요청했고, 세종이 이를 받아들였다.

2.2. 목장 관련 자문

세종 초에 고득종은 승문원교리, 예조정랑, 봉상소윤, 선위별감, 대호군 등을 역임했다. 한편 고득종은 고향 제주에서 목장 운영하는 것을 보고 자라서인지 목장 운영에 관한 업무를 주로 맡아보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1425년, 한성부윤 김소와 함께 강화부를 돌아보며 목장으로 쓰기에 적합한 땅을 찾아 보고했다. 같은 해 11월 승정원의 대언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예빈판관에 임명됐다. 당시 고득종은 제주도에서 좋은 말을 골라 권세가에 바치면서 교제하는 한편, 동향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며 아버지나 형같은 존재가 됐다. 이를테면 매부 문방귀가 수령으로 비리를 저질렀는데 고득종이 비호해 죄를 면한 일이 있다. 1427년에는 다시 강화도에 가서 말을 키우는 인접한 두 목장을 합쳐서 담을 쌓아야 할지를 살피고 돌아왔으며, 같은 해 직제학(直提學: 정3품)을 지내다가 1427년(세종 9) 중시 문과에 을과 2등 8위로 급제하였다.#

1429년에는 세종에게 한라산 목장 정비 사업 등 제주도 관련 정책을 제안해 이것이 그대로 통과된 일이 있다. 이 목장 계획은 한라산에 둘레가 4식(息)[1]의 대목장을 신설해 공사 구분 없이 말들을 들여보내 방목하자는 것이다. 목장이 들어설 땅에 사는 백성들은 원 간섭기부터 있던 동쪽과 서쪽의 옛 목장이 있던 지역 중 원하는 땅을 주고 이주시킨다는 조건도 함께 붙었다. 그 외에 ① 지역 출신 인재가 목장 관리직에 취임해 말을 치거나 표류한 사람들을 구하게 하고, ② 제주도에 출입할 때는 통행증을 엄격히 확인하며, ③ 는 그 수가 적고 제주도 토지의 특성에 따라 농업에 반드시 필요하므로[2] 육지로 일괄 반출하지 말고 자원하는 사람에 한해 매매를 허락할 것을 제안했다. 1430년 예정보다 조금 넓은 165리(약 74km) 둘레로 한라산 목장이 완성됐고 민가 344호가 이주했다.

1432년 2월, 세종이 강화도 목장 신설 사안에 대신들의 의견이 갈리는 것에 불만을 표했다. 고득종은 말 100필은 기를 수 있겠다고 말했지만, 여러 대신이 강화도 백성을 이주시키는 것이 큰 일이라고 반대한 것이다. 세종은 백성을 옮기는 것은 한 때의 폐해이지만 말을 방목하는 것은 만대의 이익이 되기에, 추수를 마친 뒤 대신을 다시 보내고 사업을 추진할 계획임을 밝혔다. 1433년 첨지중추원사, 1434년 예조 우참의에 임명됐다.

2.3. 사헌부의 탄핵, 파직

1434년 6월 19일, 사헌부에서 한라산 목장 사업 관련자 세 사람의 처벌을 요구했다. 먼저 예조참의 고득종은 사적인 이익을 앞세워 목장을 새로 만들 것을 제안했고, 그 다음 안무사 장우량은 고득종의 청탁을 받고 목장을 세우기 좋은 땅이라고 속였으며, 마지막으로 상호군 박호문은 둘의 제안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그대로 전달했다는 것이다. 세종은 고득종과 장우량을 파면하고 박호문의 죄는 특별히 용서했다.

고득종은 누명을 썼다고 주장하며 30일 글을 올렸다. 평지가 아닌 산에 목장을 세우자고 제안한 것은 산지에 상록수가 많아 여름과 겨울에 날씨 때문에 입는 피해를 줄이는데 도움이 되며, 백성들이 산지에 화전을 이뤄 초목을 파괴하면 말을 기를 수 없으므로 이를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또, 목장을 세로 새우는 것이 제주도 토관들에게 이익이 됐으리라는 주장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본래 목마장이 있던 동쪽과 서쪽 끝은 1년을 묵혔다가 그 다음해에 농사를 지어야 할 정도로 땅이 척박했다. 고득종이 목장을 세우자고 주장한 땅이 오히려 농사 짓기에 유리하고, 모친 또한 목장이 있는 중간 지역에서 이익을 봤었다. 스스로 이익을 챙기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런 꿀땅에 목장을 짓자고 제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날 7월 1일, 세종이 대사헌 노한 등 사헌부 관리들을 불러 파면된 고득종의 죄를 더 묻지 말라고 하교했다. 사헌부는 국마가 큰 손해를 입었음을 근거로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매달렸으나 세종은 듣지 않았다.

이 해 8월에 글을 올려 제주도 마소 도둑들의 처벌에 대해 말했다. 제주도에 흉년이 들어 산지와 동굴에 암약하며 가축을 훔쳐가는 도적들이 늘어났고, 조정에서는 이들을 육지로 내보내 평안도에 옮기자는 제안이 나왔다. 고득종은 소인들이 굶으면 염치를 차릴 겨를이 있겠느냐며, 이유를 불문하고 마소도둑을 멀리 옮겨버리면 가족을 볼 수 없게 된 더 많은 이들이 불안해하고 도적질 뿐 아니라 반란이 빈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제안하기를, 흉년에 도둑질한 자는 개심할 수 있도록 처벌을 유예하고, 흉년이 아닌 경우는 초범이라도 육지로 보내면 도둑질은 점차 줄 것이라고 했다. 세종은 세 정승, 병조와 의논한 끝에 고득종의 제안을 따랐다.

1435년 2월 고득종은 예조참의로 복직했고 1437년과 1438년 첨지중추원사를 지냈다.

2.4. 외교 사절

2.4.1. 관압사(명나라)

1438년 10월 명나라에 조공하러 갈 때 사행에 참여했다. 중추원부사 이명덕은 이듬해 정월을 축하하는 정조사, 호조참의 고득종은 종마 50필을 바치는 관압사, 그리고 해평군 윤연명은 하사품에 사례하는 역할을 했다. 북경으로 가는 길에 통사(通事)가 죽어 대체됐는데, 북경에 이르자 고득종이 꾀를 내서 새 통사의 이름 대신 얼자 고정도의 이름을 적고 명나라의 하사품을 받게 했다. 1439년 2월 북경에서 돌아왔다가 사헌부 아전의 신고로 문서를 위조한 것이 들통나 4월 15일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사헌부는 고득종에게 장 100대를 때리고 2천 리 밖에 유배할 것을 제안했고, 세종은 말 없이 죄를 인정한 고득종을 외지로 귀양보냈다.

고득종은 사헌부에 앙심을 품고 죄를 면하고자 대사헌 남지를 무고했다. 4월 20일 형조에서 무고임을 밝혔고 사간원이 법대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세종은 고득종의 고신(임명장)을 박탈하는 데 그쳤다. 21일 다른 대간들이 제주도 출신이라고 용서해서는 안 된다고 아뢨으나 유의미한 변화는 없었다. 며칠 뒤인 29일 고득종은 다시 고신을 돌려받고 일본 통신사로 임명됐으며, 5월 3일 첨지중추원사에 임명됐다.

2.4.2. 통신사(일본)

5월 4일 대간은 명나라에 다녀올 때 재물을 탐했던 고득종은 일본에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며 감찰을 보내 검찰할 것을 요청했다. 세종은 "사신을 외국에 보낼 때의 법식으로서 감찰을 보내는 것이라면 가능하지만, 고득종의 경우만을 위해 특별히 감찰을 보내는 것은 잘못(遣使外國, 例遣監察, 則斯可矣。 若爲得宗, 特遣監察, 則非矣。)"이라면서 "이미 그를 믿고 타국에 사신으로 보내려는 것(旣信其人, 遣使他國)"이라고 말했다. 고득종은 세종의 말에 느낀 바가 있었는지, 7월 3일 왕에게 아뢴 통신사 사목(事目: 규정)에 종사관이 감찰관을 겸해 문제가 있으면 비밀리에 기록했다가 왕에게 알릴 것을 제안했다.

7월 11일 고득종은 일본 국왕에게 보내는 세종의 글을 받고, 12일 자신에게 당부하는 글을 받았다. 전하는 바에 일본의 대내전(大內殿)과 소이전(小二殿)이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국왕(고하나조노 천황)과 아우(사다쓰네 친왕)가 대립하고 있다고 하니, 물러가고 나아가기를 잘 헤아리라는 것이었다.

조선을 떠난 통신사는 오가는 길에 쓰시마 섬의 다이묘 소 사다모리(宗貞盛)를 만났다. 사다모리는 어업을 생업으로 삼는 쓰시마 도민들이 전라도 남쪽 30리에 있는 고초도(孤草島)[3]에서 어업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제안했다.

또 통신사 일행이 일본 본토에 도착했는데, 홀연 선군(船軍) 김연(金淵)이 도망쳐 종적을 알 수 없게 됐다. 고득종은 현지의 협조를 구해 아카마가세키(赤間關) 인근에서 김연을 찾아줄 것을 당부했다. 결국 김연의 모습을 봤다고 증언한 여성이 나타났고, 현지에서 가혹하게 문초했지만 끝내 자백하는 바가 없었다. 여성은 고득종에게 넘겨졌는데, 통신사로 갔다고 해서 일본어를 할 줄 아는 것은 아니었기에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다. 고득종은 전하의 교지를 받은 뒤 처우를 결정하겠다며 일본에서 붙잡아두고 있으라고 한 뒤 떠났다.

1440년 5월 25일 통신사 고득종과 부사 윤인보가 조선에 귀국해 일본 국왕의 서계를 전달했다. 29일에는 대마도주의 제안을 조정에 전달했고, 예조에서 이를 맡았다. 이번에는 무사히 넘어가나 싶었는데, 6월 18일 사헌부에서 또 고득종을 탄핵했다. 부사로 갔던 윤인보가 기생의 청탁을 듣고 관노인 그 동생을 통신사 일행에 들이자고 제안했고, 고득종은 이를 눈감아주고 오히려 그가 선상에 익숙하다며 글을 올렸으니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지평 송취는 명나라에 사행할 때 지은 죄까지 언급하며 고득종을 함께 벌해야 한다고 아뢨는데, 세종은 지난날의 일은 이미 죄를 줬고 이번에는 작은 죄를 범했으니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넘겼다.

8월 1일에는 대내전에서 사신들이 왔는데, 고득종에게 보낸 편지도 함께 있었다. 아카마가세키에서 잡힌 여성을 붙잡아두고 있으라고 했지만 오래 잡아둘 수 없어 풀어줬다는 것. 찾으려고 노력은 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혹 승려가 됐나 해서 여러 에서 그를 찾아봤다고 했으며, 찾는 즉시 배편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9월 11일 예조에서 끝까지 찾아보고 본국에 송환해줄 것을 당부하는 답장을 보냈다.

8월 11일 글을 올려 제주도 역참에 세 가지 폐단이 있어 오히려 백성들을 불편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후 예조참의, 동지중추원사, 의금부제조[4], 중추원부사를 역임했다. 한편 후일 '고득종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 국왕이 시해를 당했다.'[5]는 기록이 있다.

2.4.3. 성절사(명나라)

1441년에는 세종이 고득종을 명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로 보내겠다고 밝혔다. 7월 19일, 8월 4일, 5일과 7일 4번에 걸쳐 사헌부에서 고득종이 사절로 부적합하다고 주장했지만 세종은 이미 처벌한 일이라고 하고, 또 '너희들이 마땅한 말도 하지만 옳지 않은 말도 하지 않느냐.'며 이미 사행이 정해졌으니 대신할 인물은 없다고 못 박았다. 고득종은 8월 13일 북경으로 출발했다.

명나라 사행에서 고득종 자신을 3번이나 믿어준 세종에게 감사함을 표하고 싶었는지, 적극적으로 외교 사절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고득종은 명나라 예부상서 호영(胡濚)에게 편찮은 세종이 북쪽 오랑캐들 때문에 근심한다며 운을 뗐다. 조선 국경에서 사람을 죽이고 가축을 훔쳐가는 일이 빈번한데 이는 이만주 등 야인이 벌이는 일이 분명하다, 야인들이 데려간 인구와 가축들을 돌려보내라고 중재해달라는 말이 고득종을 통해 명나라에 전해졌다. 마침 명나라 조정에서 이만주와 범찰(凡察) 관하의 말만 듣고 (조선이 데려간) 야인들의 관하 인구를 돌려보내라고 지휘 오양(吳良)을 보낼 예정이었는데, 고득종이 나서서 조선에서 데리고 있는 야인 인구는 하나도 없다고 반박했다.

사행에 함께한 여러 관원들의 도움으로 고득종은 정통제가 준 약재까지 받았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고득종의 이러한 활동은 조선에서 명을 받은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 고득종을 비롯한 서장관 김담, 압물 이순지, 압마 김지, 통사 김한과 김신 등은 돌아오기도 전에 사헌부에서 탄핵됐고, 의금부에는 체포령이 떨어졌으며, 국문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12월 15일, 의금부에서는 고득종에게 참형을, 나머지에게는 장형 또는 유배형을 내릴 것을 아뢨다. 그러나 세종은 또 이들의 죄를 용서하고 다만 고득종에게서 직첩만을 거두고 더 죄를 논하지 말라고 했다. 사헌부의 대간들이 이에 반발하며 고득종은 포상을 위해 무례를 범했기에 먼 지방에 보내 금고(禁錮)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고득종을 황해도 강음현으로 폄출하기로 했다. 1442년 1월 21일 조선에 온 오양은 고득종의 사람됨을 보고 그 죄를 용서해줄 것을 부탁했지만 이뤄지지는 않았다.

2.5. 재등용

1443년 6월 9일, 세종은 강음현에 있는 고득종이 외방종편(外方從便, 서울 이외 지방에 거주)하게 했다. 사헌부 장령 이백첨이 징계의 뜻이 없는 것이라고 지적하자 세종은 "죄가 무겁기 때문에 완전히 석방하지 않고 외방 종편하게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달 13일까지 사헌부에서 온갖 반대 상소가 이어졌으나 세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1445년 5월 22일, 고득종은 죄를 용서받아 석방돼 서울로 돌아왔으며 1447년에는 동지중추원사 관직을 받았다.

섬 사람인 고득종이 바닷길에 익숙하다고 해서 곧 도전운사에 임명되기도 했다. 1448년 고득종은 조세를 수로로 운반하지 말고 육로로 운반할 것을 제안했다. 조운선을 검찰할 때 후미의 배가 갈 때 같이 출발하는데, 호송을 기다리는 동안 앞 배가 먼저 출발해 멀리 가버리면 감찰하기가 곤란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좌의정 하연 이하 대신들이 거부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같은 해 12월 한성부판윤을 겸했다. 1449년 12월 연로한 세종이 배천 온정으로 요양을 가려는데 여러 대신들과 함께 수로로 가는 일을 논의해 육로로 가기로 결정했다.

2.6. 문종 시기

또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돼 사행을 갈 뻔 했다. 이번에는 부상(富商)의 아들을 종으로 속여서 데려가려고 했는데 사헌부에 걸렸고, 문종은 재고한 끝에 다른 인물로 교체했다. 1450년 11월 지중추원사에 임명됐다. 12월 8일 병선을 조운에 사용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조운선을 따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1451년 8월, 평안도 삼화현 호도에 쌓아둔 곡식이 비가 새서 썩었기에 전운사로서 여러 감사, 수령, 차사, 현령들과 함께 사헌부의 탄핵을 당했다. 여러 현령들과 종사관만이 파직됐고 고득종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후인 1460년 5월 25일 세조로부터 원종3등공신으로 임명됐다.

3. 평가

得宗性貪無節, 嘗爲都轉運使, 聲言乘船由水路而行, 載資糧酒饌雜物于二船, 終由陸路而來, 二船所載, 盡輸其家。
고득종은 성품이 탐욕스럽고 절제함이 없어, 일찍이 도전운사를 맡아 배를 타고 수로로 간다고 큰소리치고 경비와 식량, 술과 반찬 등 물건을 두 배에 싣고는 끝내 육로로 왔는데, 두 배에 실었던 것들은 모두 집으로 날랐다.
『세종실록』 126권, 세종 31년 12월 9일 을묘.
得宗, 耽羅人, 稍工於詩律, 然性本貪利, 尙浮誇, 以營産爲事, 不顧名節。
고득종은 탐라 사람으로 시율에는 자못 재능이 있었으나, 그 본성은 이익을 지나치게 탐하고 허황된 것을 숭상하였으니, 재산을 모으기만 하고 명예나 절개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문종실록』 4권, 문종 즉위년 10월 14일 갑신.

4. 가족관계

  • 부: 고봉지
    • 본인: 고득종
      • 아들: 고태필
      • 며느리: 고씨
      • 며느리: 김씨
      • 아들: 고태보
      • 사위: 하복생
      • 아들: 고정도
    • 누이
    • 매부: 문방귀
고득종은 성주 고신걸의 손자로, 탐라국의 마지막 성주 고봉례는 고득종의 숙부였다. 『사가집』에 따르면 고태필 등 네 아들을 뒀다.

[1] 4식(息) = 120리(里) = 43,200보(步) = 259,200척(尺). 1척이 20.8cm라면 4식은 약 54km다.[2] 고득종의 말에 따르면 토지의 질이 나쁜 제주도는 가옥에서 밭에 소를 풀어 키우고 밤에는 밭 한가운데 있는 팔장(八場)에 들여보내는 전통이 있었다. 팔장에서 쇠똥을 채취하고 소를 밭에 풀어 땅을 밟게 하면 비로소 싹이 났다.[3] 어떤 섬인지는 불명. 공도 정책으로 여러 대 섬을 비웠기에 사는 백성이 없었다.[4] 사헌부에서는 탐욕한 사람에게 옥사를 맡길 수 없다고 탄핵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前者高得宗到我國, 國王見弑; (『세종실록』 102권, 세종 25년 12월 17일 정유.)